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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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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갑산파는 1967년 김일성의 권력에 도전했다가 숙청된 북한 내 정치 세력을 지칭한다. 이들은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여 김일성과 함께 집권했으나, 김일성의 경제 정책인 병진 노선에 반대하고 경제적 수정주의를 주장하며 김일성의 후계자 문제에 관여하려 했다. 갑산파는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허석선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김일성은 이들을 숙청한 후 개인 숭배를 강화하고 주체사상을 확립하여 1인 세습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갑산파 숙청은 북한 사회의 경직성을 심화시키고 김정일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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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사건 개요
이름갑산파 사건
주요 인물김일성
박금철
배경
시기1967년
장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인권력 투쟁
전개
주요 내용갑산파의 숙청 시도와 김일성의 반격
결과갑산파 숙청 및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 강화

2. 역사적 배경

갑산파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으로, 광복 이후 남조선파, 소련파, 연안파 등 다른 계파를 차례로 몰아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했다.[12] 해방 후 1950년대까지의 권력 투쟁을 논할 때는 유격대파, '김일성파'와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

그러나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기 전 후계 구도 확립 문제 및 경제 정책에 대한 관점 차이로 인해 1967년 기존 권력층의 일부가 숙청되는데, 이때 실각한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허석선 등만을 따로 묶어 '갑산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1930년대 조국광복회 사건(혜산 사건) 때 국내에서 거점으로 활동한 항일무장조직 출신으로서 김일성과 손을 잡아 집권했으나, 경제적 수정주의를 내세우다가 숙청당했다.

갑산파는 김일성 유일사상이 만연하기 전에 실학과 같은 민족전통의 혁명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당 간부들에게 목민심서를 읽게 하고 실학을 높게 평가하는 등 부르주아 사상과 수정주의, 봉건유교 사상을 퍼뜨렸다고 비난받고 숙청당했다.[12]

2. 1. 갑산공작위원회와 항일무장투쟁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광복 이후 남조선파, 소련파, 연안파 등 다른 계파를 차례로 몰아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했다.[12] 이들은 김일성의 대일 투쟁에 물자를 지원했던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지하 해방 조직을 기반으로 했다.[13] 갑산공작위원회는 함경남도(현재 량강도) 갑산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동북항일연군과 연계하여 보천보 전투를 일으키기도 했다.[8]

갑산파는 지식인과 전문가를 많이 보유하여 북한 건국 후 정부 요직을 차지했고, 조선로동당 내 다른 파벌과의 권력 투쟁에서 항상 김일성 측에 섰다.[14] 그러나 김일성의 독재와 개인 숭배에 대한 불만, 경제 정책 차이로 인해 1967년 박금철, 리효순 등 갑산파 핵심 인물들이 숙청되었다.[12] 이들은 북한이 경제와 군대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병진 노선에 반대하고, 중공업보다 경공업을 우선시하며, 가치론에 입각하여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위해 반 화폐 채택을 옹호하는 등 경제적 수정주의를 내세웠다는 비난을 받았다.[12] 또한, 김일성 유일사상이 만연하기 전에 실학과 같은 민족전통의 혁명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숙청당했다.[12]

갑산파 숙청 이후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체계화하고 1인 세습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12]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갑산파를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부르며, 조국광복회와 혜산 사건 관련 인물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13][14]

2. 2. 북한 정권 수립과 권력 투쟁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광복 이후 남조선파, 소련파, 연안파 등 다른 계파를 차례로 몰아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했다.[12] 해방 후 1950년대까지의 권력 투쟁을 논할 때 이들은 유격대파, '김일성파'와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

갑산파는 김일성의 대일 투쟁에 물자를 지원했던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지하 해방 조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8] 이 조직의 기원은 김일성의 활동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때로는 전체 빨치산 계열을 갑산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점차적으로 이 파벌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나머지 빨치산 계열과 구별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일련의 숙청을 통해 당의 다른 파벌들을 몰아냈으며, 특히 1956년의 8월 종파 사건이 두드러지지만, 갑산파는 남아 있었다.

갑산파는 김일성의 경제 모델과 다른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특히 김일성의 경제와 군대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병진 노선에 반대했으며, 군사적 필요보다는 국가 경제를 우선시했다. 그들은 중공업보다 경공업을 선호하여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려 했다. 그들은 집권 조선로동당이 경제 계획에서 경제학, 과학, 공학 전문가들에게 역할을 위임하기를 원했다. 또한 경제 가치론을 선호했고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위해 반 화폐 채택을 옹호했다.

그러나 주요 쟁점은 누가 김일성의 후임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동생 김영주를 유력한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김영주는 자격이 부족했다. 그는 갑산파의 지도자인 박금철에게 비판을 받았는데, 박금철은 국가의 부주석과 당 서열 4위까지 올라갔다.[1][2] 박금철은 리효순한국어, 김도만, 박용국, 허석선, 고혁, 하앙천, 림춘추를 포함한 많은 영향력 있는 지지자들을 모았다.

갑산파는 박금철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파벌 구성원들은 박금철의 말을 김일성의 말씀과 동등한 "가르침"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3] 1960년대 초부터 갑산파 출신들의 회고록이 출판되었으며, 박달과 박금철의 사진이 김일성의 사진 옆에 인쇄되기도 했다. 박금철의 아내 최채련이 사망했을 때, 당의 선전선동부 부장이었던 김도만은 그녀가 남편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그린 ''성실의 한 단면''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는 영화 또는 연극으로 묘사되었다. 김일성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도만은 또한 박금철의 생가를 재건했다. 김일성에 대한 선전물을 배포하지 않는 동안 박금철에 대한 비공식 전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동은 김일성에 대한 불충으로 간주되었다.

박금철은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봉건, 유교" 사상을 퍼뜨린다는 비난을 받았다. 박금철은 당의 군사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김일성의 "백 대 일" 슬로건을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그의 책임인 생산 계획은 충족되지 않았다고 한다. 박금철은 옛 갑산공작위원회 출신들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파벌은 가족주의적이고 지역주의적이라고 주장되었다. 박금철의 동맹인 남조선 담당 총국 국장인 리효순은 남한에서의 비밀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또한 파벌주의자들은 "수정주의자"이며, 조선 왕조 시대의 "봉건주의" 문학을 사람들에게 읽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이 파벌은 또한 김일성의 친모스크바 노선과 반대로 친중국적이라고 여겨졌다.

갑산파는 1967년 숙청되었는데, 이때 실각한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허석선 등만을 따로 묶어 '갑산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1930년대 조국광복회 사건, 일명 '혜산 사건' 때 국내에서 거점으로 활동한 항일무장조직 출신으로서 김일성과 손을 잡아 집권했으나 경제적 수정주의를 내세우다가 숙청 당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갑산파를 숙청한 김일성은 이듬해인 1968년 자기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고, 황장엽 등을 동원해 김일성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하여 '1당 독재 제체'를 '1인 세습 독재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인 독재'나 '개인 우상화'를 공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강화되었다.[12]

2. 3. 김일성과의 갈등과 숙청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광복 이후 남조선파, 소련파, 연안파 등 다른 계파를 차례로 몰아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기 전, 후계 구도 확립 문제 및 경제 정책에 대한 관점 차이로 인해 1967년 기존 권력층의 일부가 숙청되는데, 이때 실각한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허석선 등이 '갑산파'로 불린다.[12]

갑산파는 김일성의 경제 모델과 다른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12] 이들은 특히 김일성의 병진 노선에 반대했으며,[12] 군사적 필요보다는 국가 경제를 우선시했다.[12] 특히 군사비 지출을 줄이고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공업보다 경공업을 선호했다. 또한 경제 가치론을 선호했고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위해 화폐 사용을 권장했다.[12]

주요 쟁점은 누가 김일성의 후임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12] 김일성은 자신의 동생 김영주를 유력한 후계자로 지명했지만,[12] 김영주는 자격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2] 갑산파의 지도자인 박금철은 김영주를 비판했는데,[12] 박금철은 국가의 부주석과 당 서열 4위까지 올라갔다.[12] 박금철은 리효순, 김도만 등 많은 영향력 있는 지지자들을 모았다.[12]

갑산파는 박금철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12] 파벌 구성원들은 박금철의 말을 김일성의 말씀과 동등한 "가르침"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12] 김일성에 대한 선전물을 배포하지 않는 동안 박금철에 대한 비공식 전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12] 이러한 행동은 김일성에 대한 불충으로 간주되었다.[12]

박금철은 옛 갑산공작위원회 출신들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2] 이 파벌은 가족주의적이고 지역주의적이라고 주장되었다.[12] 박금철의 동맹인 남조선 담당 총국 국장 리효순[12]은 남한에서의 비밀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12] 또한 파벌주의자들은 수정주의를 따르며, 조선 왕조 시대의 "봉건주의" 문학을 사람들에게 읽도록 강요했다고 비판받았다.[12] 이 파벌은 또한 김일성의 친모스크바 노선과 반대로 친중국적이라고 여겨졌다.[12]

김일성은 갑산파의 사상과 행동을 자신의 통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1967년 3월, 김일성은 "당 사업을 개선하고 당대회 결정을 관철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갑산파를 비판하며 "개인 영웅주의"를 실천한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의 해결책은 자신을 중심으로 당을 결집시키는 "유일 사상 체계"였다.[12] 김일성은 다른 당 간부들에게 파벌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파벌 구성원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의 노선을 고수했다.[12]

김일성은 갑산파를 제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열린 충성스러운 당원들의 회의에서 허가를 받았다.[12] 1967년 4월 4일부터 8일까지 열린 제4차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5차 전원회의에서[12] 김일성은 100명 이상의 파벌 구성원을 공식적으로 당에서 제명했다.[12] 박금철은 지방의 공장으로 보내져 노동을 해야 했다.[12] 그는 1967년 5월에 처형되거나 자살했다.[12] 이효순, 김도만, 박용국, 허석선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12]

1967년 5월 25일, 김일성은 당 이념 기구 요원들에게 "당 선전 사업 방향에 관한 당면 과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5.25 교시"로 알려지게 되었고 김일성 지지자들이 당 내 파벌 요소를 폭로하는 데 사용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12] 이 연설은 조선로동당 당원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되었다.[12]

김정일은 이 파벌을 조사하는 데 참여했는데, 이는 김일성이 그에게 위임한 임무였다. 당시 김정일은 26세에 불과했고,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첫 번째 공식적인 임무였다.[12] 김정일이 전원회의에서 연설을 했을 때, 그것은 그가 권위 있는 인물로서 한 첫 연설이었다. 김정일의 이름은 공식 문서에 처음으로 언급되었으며, 그가 이미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냈다.[12] 숙청 6개월 후, 당의 임시 회의에서 김일성은 자신을 배신한 영화계에 충성을 요구했다. 김정일은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고 직접 발표했고, 영화 제작에서 그의 영향력 있는 경력이 시작되었다.[12] 김정일은 이 사건으로 오점을 남긴 당의 조직지도부를 떠나 선전선동부를 인수했다.[12] 그는 아버지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 사상을 확립하는 데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12] 1969년까지 숙청은 끝났다.[12]

갑산파 숙청 이후, 김일성은 이듬해인 1968년 자기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고, 황장엽 등을 동원해 김일성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하여 '1당 독재 체제'를 '1인 세습 독재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인 독재'나 '개인 우상화'를 공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강화되었다.[12]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갑산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박금철 등 처형당한 인물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부르고 있다.[13]

3. 주요 인물

인물직책
박금철조선로동당 상무정치국 위원,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당 비서[1]
리효순조선로동당 상무정치국 위원,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당 비서, 대남 공작 담당[2]
김도만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장, 당 비서[3]
박용국조선로동당 국제부장, 당 비서
허석선조선로동당 과학교육부장


4. 갑산파 숙청의 영향

갑산파 숙청은 김일성의 권력 강화와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를 위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북한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 정치적 영향:
  • 김일성의 유일 지배 체제가 강화되었다. 주체사상이 확립되고, 개인 숭배가 심화되었다.
  • 김정일의 후계 체제가 구축되었다. 갑산파 숙청은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 당내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일인 독재 체제가 강화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인 독재'나 '개인 우상화'를 공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 사상적 영향:
  • 주체사상이 북한의 유일한 지도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 실학 등 민족 전통 사상에 대한 관심이 억압되었다.
  • 경제적 영향:
  • '병진' 노선이 확립되어 군사 부문이 경제보다 우선시되었다.
  • 사회적 영향:
  • 북한 사회가 더욱 경직되고 폐쇄적으로 변화하였다.
  •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되었다.
  • 대남 관계:
  • 북한의 대남 정책이 더욱 강경해졌다.
  • 문화/예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초기에 국내 영화 제작 기관은 갑산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갑산파의 영수 "박금철"을 영웅시한 영화를 몇 편 제작했는데, 이 파의 숙청을 계기로 (김정일의 회유·압박 작전도 영향을 미쳐) 이후 다수의 김일성·김정일 찬양·선전 영화가 제작·국내 상영되었다.[10]
  • 혁명가극 등 국내 예술·역사관 창작 사업에서 "조선 민족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는 박금철과 "김일성 장군 전설과의 일체화를 대전제로 해야 한다"는 김정일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이것이 갑산파 숙청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이종석 서울대학교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11]
  • 갑산파 숙청 4개월 후, 김정일은 북한 정부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 과장 자리를 장악한다.


갑산파 숙청은 북한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이후 북한 사회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유일 지배 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4. 1.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 강화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당 간부들에게 목민심서를 읽게 하고 실학을 높게 평가하는 등 부르주아 사상과 수정주의, 봉건유교 사상을 퍼뜨렸다는 비난을 받으며 갑산파가 숙청되었다.[12] 이후 김일성은 이듬해인 1968년 자신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황장엽 등을 동원해 김일성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하여 '1당 독재 체제'를 '1인 세습 독재 체제'로 전환하였다.[12]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인 독재'나 '개인 우상화'를 공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강화되었다.[12]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갑산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박금철 등 처형당한 인물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부르고 있다.[13] 조국광복회 조직과 혜산 사건을 서술할 때도 당시 체포되어 사형당한 리제순(리효순의 동생)이나 옥중 고문으로 건강을 잃은 박달 등 해방 후 북한 건국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14]

현대 김일성 배지


학자 임재천의 말처럼 갑산파 사건은 "북한 정치의 분수령"이었다. 이는 김일성의 지위에 대한 마지막으로 믿을 만한 도전으로 기록되었다. 파벌 제거 이후 김일성의 권력 장악력은 강화되었고 그의 개인 숭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어서 문화 대혁명 당시 중국과 유사한 선전이 급증했다. 김일성 배지가 도입되었고 공개 회의에서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책은 내용의 정확성을 검토받았고 많은 책들이 불태워졌다. 이 사건 직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에 그의 통치를 명문화했다. 김일성은 1967년 12월 16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활동의 모든 부문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이 원칙들을 대중에게 발표했다. 사건 이후, 지도자를 뜻하는 한국어 단어 '수령'은 김일성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김일성의 5월 25일 연설은 중국이나 소련과는 구별되는 그의 독자적인 이론적 입장을 확립하여 두 사회주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얻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의 정치 이념인 주체사상은 점차 추진력을 얻기 시작했다.[7] 그의 ''병진'' 경제 노선이 자리를 잡았지만, 실제로는 경제보다 군대를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적 쇄신이 이루어진 후, 북한의 대남 정책도 더욱 강경해졌다.

갑산파의 몰락과 함께, 김일성은 북한의 역사 서술의 유일한 초점이 되었다. 해방 당시 그의 역할은 신화적인 수준으로 과장되었다. 반면에 다른 게릴라 투사들의 경험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김정일은 공모자들의 전쟁 회고록을 대중적인 컬렉션인 ''항일유격대 투쟁 회고록''에서 삭제했다. 김정일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정치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개인 숭배는 김씨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숭배가 처음으로 확대된 대상은 그의 어머니 강반석이었다. 1967년 7월, 그녀를 찬양하는 "조선의 어머니"라는 노래가 발표되었다. 7월과 9월에는 ''로동신문''에 강반석을 찬양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또한 9월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에서 강반석을 본받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8년까지 북한의 개인 숭배는 완성되었다.

김일성은 딸 김경희가 혁명 전통을 가진 집안의 아들 장성택과 결혼하는 것을 꺼렸다. 그의 자격은 더 이상 이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72년에 결혼했지만, 장성택의 과거는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없었다. 갑산파 사건의 유산은 장성택을 통해 김정은 시대까지 이어졌다. 2013년, 그는 장성택을 숙청하고 처형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처럼 그의 군사-경제 정책을 '병진'이라고 불렀고,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은 김정은을 언급하도록 수정되었다. 스테판 해거드는 "김정은의 ''병진'' 노선은 정확히 김일성의 것과 같지 않으며, 장성택은 갑산파가 아니지만 ... 근본적인 역학은 다소 유사해 보인다. 즉, 지도자 중심 체제에 대한 도전은 숙청뿐만 아니라 통일과 복종을 위한 중요한 이념적 정당화로 대응한다"고 결론 내린다.

4. 2. 김정일 후계 체제 구축

김일성에게서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기 전, 후계 구도 확립 문제 및 경제 정책에 대한 관점 차이로 인해 1967년 기존 권력층 일부가 숙청되었다. 이때 실각한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허석선 등은 '갑산파'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경제적 수정주의를 내세우다가 숙청당했다.[12]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당 간부들에게 목민심서를 읽게 하고 실학을 높게 평가하는 등 부르주아 사상과 수정주의, 봉건유교 사상을 퍼뜨렸다는 비난을 받고 숙청되었다. 갑산파를 숙청한 김일성은 이듬해인 1968년 자신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고, 황장엽 등을 동원해 김일성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하여 '1당 독재 체제'를 '1인 세습 독재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인 독재'나 '개인 우상화'를 공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김정일 후계 체제가 강화되었다.[12]

김일성은 갑산파의 사상과 행동을 자신의 통치와 국가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했다. 1967년 3월, 김일성은 "당 사업을 개선하고 당대회 결정을 관철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갑산파를 비판하며 "개인 영웅주의"를 실천한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자신을 중심으로 당을 결집시키는 "유일 사상 체계"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김일성은 다른 당 간부들에게 파벌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파벌 구성원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의 노선을 고수했다. 김일성은 갑산파를 제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열린 충성스러운 당원들의 회의에서 허가를 받았다.

4월 4일부터 8일까지 열린 제4차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100명 이상의 파벌 구성원을 공식적으로 당에서 제명했다. 박금철은 지방의 공장으로 보내졌고, 1967년 5월에 처형되거나 자살했다.[4] 다른 사람들은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사라지거나 감옥으로 보내졌다.[3] 이효순, 김도만, 박용국, 허석선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5월 25일, 김일성은 당 이념 기구 요원들에게 "당 선전 사업 방향에 관한 당면 과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5.25 교시"로 알려지게 되었고, 김일성 지지자들이 당 내 파벌 요소를 폭로하는 데 사용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5] 김정일의 처제인 송혜랑은 5월 25일을 북한에서 "모든 것이 바뀐 날"로 특징지었다. 이 연설은 조선로동당 당원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되었다.

김정일은 이 파벌을 조사하는 데 참여했으며, 이는 김일성이 그에게 위임한 첫 번째 공식적인 임무였다. 김정일이 전원회의에서 연설을 했을 때, 그것은 그가 권위 있는 인물로서 한 첫 연설이었다. 숙청 6개월 후, 김일성은 영화계에 충성을 요구했고, 김정일은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김정일은 이 사건으로 오점을 남긴 당의 조직지도부를 떠나 PAD를 인수했다. 그는 아버지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 사상을 확립하는 데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69년까지 숙청은 끝났다.

갑산파 사건은 "북한 정치의 분수령"이었다. 이는 김일성의 지위에 대한 마지막 도전으로 기록되었다. 파벌이 제거되자 김일성의 권력 장악력은 강화되었고 그의 개인 숭배는 더욱 심화되었다. 김일성 배지가 도입되었고, 공개 회의에서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이 사건 직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에 그의 통치를 명문화했다.

김일성의 5월 25일 연설은 중국이나 소련과는 구별되는 그의 독자적인 이론적 입장을 확립하여 두 사회주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얻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의 정치 이념인 ''주체사상''은 점차 추진력을 얻기 시작했다.[7]

김정일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정치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개인 숭배는 김씨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숭배가 처음으로 확대된 대상은 그의 어머니 강반석이었다. 1967년 7월, 그녀를 찬양하는 "조선의 어머니"라는 노래가 발표되었다. 1968년까지 북한의 개인 숭배는 완성되었다.

갑산파 숙청 불과 4개월 후, 김정일은 북한 정부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 과장 자리를 장악한다.

4. 3. 북한 사회의 경직화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 리효순 등 갑산파가 숙청된 이후, 김일성은 자신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다.[12] 황장엽 등을 동원해 주체사상을 체계화하여 '1당 독재 체제'를 '1인 세습 독재 체제'로 전환하였다.[12]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인 독재'나 '개인 우상화'를 공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강화되었다.[12]

학자 임재천의 말처럼 갑산파 사건은 "북한 정치의 분수령"이었다. 이는 김일성의 지위에 대한 마지막으로 믿을 만한 도전으로 기록되었다. 갑산파 제거 이후 김일성의 권력 장악력은 강화되었고 그의 개인 숭배는 더욱 심화되었다. 문화 대혁명 당시 중국과 유사한 선전이 급증했다. 김일성 배지가 도입되었고 공개 회의에서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책은 내용의 정확성을 검토받았고 많은 책들이 불태워졌다. 이 사건 직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영향력 있는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에 그의 통치를 명문화했다. 김일성은 1967년 12월 16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활동의 모든 부문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이 원칙들을 대중에게 발표했다. 사건 이후, 지도자를 뜻하는 한국어 단어 '수령'은 어떤 집단의 지도자나 레닌, 스탈린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김일성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김일성의 1967년 5월 25일 연설은 중국이나 소련과는 구별되는 그의 독자적인 이론적 입장을 확립하여 두 사회주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얻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의 정치 이념인 ''주체사상''은 점차 추진력을 얻기 시작했다.[7] 그의 ''병진'' 경제 노선이 자리를 잡았지만, 실제로는 경제보다 군대를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적 쇄신이 이루어진 후, 북한의 대남 정책도 더욱 강경해졌다.

갑산파의 몰락과 함께, 김일성은 북한의 역사 서술의 유일한 초점이 되었다. 해방 당시 그의 역할은 신화적인 수준으로 과장되었다. 반면에 다른 게릴라 투사들의 경험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김정일은 공모자들의 전쟁 회고록을 대중적인 컬렉션인 ''항일유격대 투쟁 회고록''에서 삭제했다. 김정일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정치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개인 숭배는 김씨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숭배가 처음으로 확대된 대상은 그의 어머니 강반석이었다. 1967년 7월, 그녀를 찬양하는 "조선의 어머니"라는 노래가 발표되었다. 7월과 9월에는 ''로동신문''에 강반석을 찬양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또한 9월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에서 강반석을 본받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8년까지 북한의 개인 숭배는 완성되었다.

4. 4. 남북 관계에 미친 영향

갑산파 사건은 김일성의 권력 강화와 개인 숭배 심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북한 정치의 분수령이자 김일성의 지위에 대한 마지막 도전으로 기록되었다.[7] 파벌 제거 이후, 문화 대혁명 시기 중국과 유사한 선전이 급증했다.[7] 김일성 배지가 도입되었고,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7] 출판된 책들은 검열을 받았고, 많은 책들이 불태워졌다.[7]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을 통해 김일성 통치를 명문화했다.[7] '수령'이라는 단어는 김일성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7]

김일성은 1967년 5월 25일 연설을 통해 주체사상을 확립하여, 중국이나 소련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7] 그의 ''병진'' 경제 노선은 군사를 우선시하는 정책이었다. 인적 쇄신 이후, 북한의 대남 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7]

갑산파의 몰락과 함께, 김일성은 북한의 역사 서술의 유일한 초점이 되었다. 그의 항일 투쟁은 과장되었고, 다른 게릴라 투사들의 경험은 잊혀졌다.[7] 김정일은 아버지와 함께 정치 생활의 중심에 섰으며, 개인 숭배는 김씨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확산되기 시작했다.[7] 숭배의 첫 대상은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었다.[7] 1968년까지 북한의 개인 숭배는 완성되었다.[7]

김일성은 딸 김경희와 장성택의 결혼을 꺼렸으나, 둘은 1972년에 결혼했다. 갑산파 사건의 유산은 장성택을 통해 김정은 시대까지 이어졌다. 2013년, 김정은은 장성택을 숙청하고 처형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처럼 그의 군사-경제 정책을 '병진'이라고 불렀고,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은 김정은을 언급하도록 수정되었다.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문서 ちなみに現在の北朝鮮での正史では、同事件での甲山派の戦功はおろか参加していた事実まで歴史抹殺されている。
[9] 뉴스 북、40年前에도 자본주의를 실험(2002년 09월 25일 기사) http://www.chosunonl[...] 조선일보
[10] 서적 망가 김정일 입문 북조선 장군님의 진실 비조신사
[11] 서적 북조선 유격대 국가의 현황 이와나미 쇼텐
[12] 웹사이트 김일성 (유일지도체제의 확립과 권력세습) http://www.e-nkfocus[...] 북한포커스
[13] 간행물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 1993-02-12
[14] 서적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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