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연안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연안파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 해방 후 북한에서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참여한 세력이다. 주로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활동했으며, 김두봉, 최창익, 무정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창설과 한국 전쟁에 기여했으나, 김일성과의 노선 갈등으로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통해 숙청되었다. 이후 일부는 자유북조선임시정부 등 망명 정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사회주의 - 아리랑 (책)
    아리랑은 님 웨일스가 김산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1941년 미국에서 출판한 책으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금기로 한국에 알려지지 못하다가 1984년 번역 출판되어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독립운동가 김산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계파 - 갑산파
    갑산파는 갑산공작위원회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로동당 내에서 형성되었으나, 김일성의 정책 및 후계 문제에 이견을 드러내며 숙청되어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 확립과 김정일 후계 체제 구축에 영향을 주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계파 - 8월 종파 사건
    8월 종파 사건은 1956년 김일성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김일성은 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했으며, 남북 간의 이념 대립을 심화시켰다.
  • 조선신민당 - 김두봉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정치인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독립동맹 결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되었다.
  • 조선신민당 - 백남운
    백남운은 일제강점기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연구하고 광복 후 좌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한 정치인이다.
연안파
개요
존속 기간1945년 ~ 1956년
소속 국가북한
배경
형성 배경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음.
조선독립동맹 출신 인사들이 주축.
주요 활동 지역옌안
인물
주요 인물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윤공흠
김민산
서휘
이필규
장평산
김세일
오기섭
권오직
허정숙
리상조
김강
박일로
한빈
석정
송봉욱
고봉기
정률
조기천
김림
왕재순
방호산
채웅건
김창만
강건
김웅
김태근
특징
주요 특징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의용군 등 옌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출신.
중국 공산당과의 연계 강화 추구.
정치적 성향초기에는 김일성과 협력 관계 유지.
이후 소련파, 국내파와의 권력 투쟁.
몰락
몰락 계기8월 종파 사건을 통해 숙청됨.
숙청 이유김일성의 권력 강화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됨.
종파주의, 분파 행위 등의 명목.
영향
영향북한 정치에서 김일성의 독재 체제 강화에 기여.
주체사상 확립의 배경.
관련 사건8월 종파 사건

2. 역사

연안파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세력으로, 1942년 7월 산시성 타이항산에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주요 인물로는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박일우, 한빈, 윤공흠, 서휘, 방호산 등이 있다.[1]

1945년 해방 이후, 이들은 대부분 11월부터 그해 말에 걸쳐 북한으로 귀국했다. 1946년 2월 16일에는 조선독립동맹조선신민당(당수 김두봉)으로 개칭했고, 1946년 8월 말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면서 북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1]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북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김일성 중심의 지도 집단과 대립했고,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대부분 당에서 축출되거나 숙청되었다.[1]

2. 1.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주요 인물로는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박일우, 한빈, 윤공흠, 서휘, 방호산 등이 있다.[1] 이들은 1942년 7월 산시성 타이항산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다.[1]

중국 본토에서도 조선인 유학생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운동에 참여하거나, 조선 및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활동가들이 옮겨와 활동했다. 중국 본토의 조선인 혁명가 대부분은 중국 공산당에 참여했다.[1] 무정은 유학생으로 중국에 건너가 1920년대 중반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장정에도 참여했다. 장지락은 광주 봉기 (1927년)에 참여했다.[1]

1940년대에는 김두봉, 최창익 등이 옌안에 들어가 중국 공산당 세력에 합류했다.[2] 1942년 7월,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위원장: 김두봉)이 결성되었고,[2] 태항산 근거지에서는 조선의용대를 기반으로 조선의용군(사령관: 무정)이 결성되어 일본군에 대한 선전 활동 등에 종사했다. 또한, 옌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여 간부 양성에 힘썼다.[2]

중국 전선에 동원된 일본군의 조선인 병사 중에는 탈주하여 조선의용군에 합류하는 자들도 있었다. 1945년에는 작가 김사량이 중국 공산당 지배 지역으로 탈출했다.[2]

2. 1. 1.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운동

만주(중국 동북 지방)는 19세기 말부터 조선인이 거주하게 된 지역이며 (조선족 참조), 조선이 일본에 의해 지배를 받던 시대에는 항일 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이 가운데 사회주의에 의한 혁명과 독립을 목표로 하는 운동도 나타났다. 재만 조선인 혁명가 대부분은 조선공산당에 참여했다.[1]

1930년대 만주에서의 조선인 사회주의자 활동은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놓여 군사 조직으로 동북항일연군이 형성되었다.[1] 이후 김일성 등은 소련 영토로 탈출하여 만주파를 형성하게 된다.[1]

2. 1. 2. 옌안의 조선인 혁명가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 걸쳐 옌안은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좌파 항일 민족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1]

님 웨일스김산(장지락)의 일생과 인품을 아리랑의 노래에 담아 구미권에 조선인의 혁명 운동을 소개했다.[2] 그러나 장지락은 이후 캉성에 의한 숙청에 휘말려 1938년에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처형되었다.[2]

2. 2.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박일우 등 연안파 주요 인물들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으며, 1942년 7월 산시성 타이항산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다.[1] 이들은 1945년 11월부터 그해 말에 걸쳐 북한으로 귀국했다.

1946년 2월 16일, 연안파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하여 조선신민당(당수 김두봉)을 결성했다. 1946년 8월 말, 조선신민당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으로 출범했으며, 이 과정에서 연안파는 북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파(빨치산파), 조선 내부에서 독립운동을 해 온 남로당파나 갑산파, 소련 출신자를 중심으로 한 소련파 등 여러 파벌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1949년 6월,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었고,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연안파는 6·25 전쟁 이후 북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김일성 중심의 지도 집단과 대립하다가,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대부분 당에서 축출되거나 숙청되었다.[1]

2. 2. 1. 조선인민군 창설과 6.25 전쟁

조선인민군 창설에 연안파 인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과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발족에 기여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연안파는 조선인민군 내에서 주요 지휘관으로 활동했다.[1]

6.25 전쟁 당시 연안파의 주요 인물과 역할은 다음과 같다.

6.25 전쟁 개전 시점에 조선인민군 주력 부대에서 간부직을 맡았던 조선의용군 출신은 다음과 같다.

구분이름
사단장이권무 (제4사단), 김창덕 (제5사단), 방호산 (제6사단), 전우 (제12사단)
참모장현파 (제2사단), 장평산 (제3사단), 조관 (제5사단), 노철룡 (제6사단)
연대장최경수 (제4연대), 박정덕 (제10연대), 김봉문 (제11연대), 왕휘 (제12연대), 한일해 (제13연대), 황석 (제14연대), 이방남 (제15연대), 장교덕 (제18연대), 최학훈 (제30연대), 이원성 (제31연대)


2. 3. 8월 종파사건과 숙청

1956년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도 김일성 비판이 일어났다. 연안파는 소련파와 함께 그 중심이 되었지만, 김일성에게 패배하여 숙청되었다. 이 사건을 8월 종파 사건이라고 한다.

3. 주요 인물

연안파의 주요 인물로는 김두봉, 최창익, 무정, 허정숙, 박일우, 한빈, 윤공흠, 서휘, 김창만, 김원봉, 리유민 등이 있다.[1]

한국 전쟁 당시 무정은 국방성 부원수였고, 박일우는 내무부 장관이자 북중 연합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김웅은 1951년 조선인민군 전선 사령관이었으며,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은 군단장이었다.[1]

3. 1. 중국 공산당 계열

주요 인물로는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박일우, 한빈, 윤공흠, 서휘, 방호산 등이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했으며, 1942년 7월 산시성(山西省)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 동북 지방에서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1945년 11월부터 그해 말까지 북한으로 들어왔다. 1946년 2월 16일 '조선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 당수 김두봉)으로 바꾸었다. 조선신민당은 1946년 8월 말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출범했으며, 이때 연안파 인물들은 북한 정치의 장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연안파는 6·25 전쟁 이후 북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김일성 중심의 지도 집단과 대립하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대부분 당에서 축출되거나 숙청당했다.

한국 전쟁이 시작될 무렵 연안파에는 30명의 조선인민군(KPA) 장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정은 국방성 부원수였고, 박일우는 내무부 장관이자 북중 연합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김웅은 1951년 KPA 전선 사령관이었고,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은 군단장이었다.[1]

인물주요 활동 및 숙청 여부
김두봉1942년 합류, 조선독립동맹 주석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58년 숙청.
최창익[2]1941년 합류,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 부수상 겸 재정상 / 1956년 당 제명, 1957년 옥사 또는 처형.
허정숙최창익의 아내,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 / 문화선전상 / 실각을 면하고, 당 중앙위 서기까지 승진, 1991년 사망.
김창만조선독립동맹 간부 / 당 선전선동부장, 교육상 / 실각을 면하고, 부수상까지 승진, 1966년 숙청.
무정[2]1920년대 입당, 조선 의용군 총사령 /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 1952년 병사.
김웅신사군 부대 참모, 조선 의용군 제1지대장 / 조선인민군 제1군단장, 민족보위 부상 /
박일우1928년 입당, 조선 의용군 부사령 / 내무상 / 1955년 실각.
박효삼1941년 조선 의용대원으로 공산당 구역으로 이동, 조선 의용군 부사령 / 제1, 2차 당 중앙위원, 조선인민군 제9사단장, 부총참모장 / 1959년경 정치적 실종.
이상조1940년 입당, 조선 의용군 제3지대장 /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주소련 대사 / 소련, 나중에 한국으로 망명
방호산만주 사변 후, 공산당 항일 유격대에 참가, 소련 유학, 팔로군 지휘관 / 조선인민군 제6사단장, 조선인민군 제5군단장 / 소식불명 (중국 망명?).
이권무만주 사변 후, 동만에서 항일 활동에 참가, 소련 유학, 팔로군 부대 참모 / 조선인민군 사단장, 군단장, 집단군 사령관, 총참모장 / 소식불명.
윤공흠/ 상업상 / 1956년 숙청.
서휘/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 / 나중에 중국으로 망명
정율성1939년 입당, 조선인민군 클럽 부장 /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 나중에 중국으로 이주


3. 2.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김원봉조선의용대 대장, 임정 한국광복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다 1958년에 실각했다.

4. 영향

연안파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1942년 7월 산시성(山西省)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다.[1] 주요 인물로는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박일우, 한빈, 윤공흠, 서휘, 방호산 등이 있다.[1] 이들은 대체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1945년 11월부터 그해 말에 걸쳐 북한으로 들어왔다.[1]

1946년 2월 16일, 연안파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당수 김두봉)을 결성했다.[1] 같은 해 8월 말, 조선신민당은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출범했으며, 이로써 연안파 인물들은 북한 정치 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1]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북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김일성 중심의 지도집단과 대립하다가, 결국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대부분 당에서 축출되거나 숙청당했다.[1]

5. 자유북조선임시정부

자유북조선임시정부는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이라고도 불린다. 주로 러시아,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정치망명한 구 연안파 출신 인사들과 구 소련파 출신 전 북한 정부 요직자, 그리고 유럽 등에서 유학 중 귀국을 거부하고 정치 망명한 유학생들이 결성한 정치 조직이다.[1] 상임의장은 과거 북한 정부 문화선전성 유럽부장이었고 구 남로당파였던 박갑동이 맡았다.[1] 구 연안파 출신으로 소련 대사였던 리상조도 상임위원이다.[1]

참조

[1] 서적 The Ashgate Research Companion to the Korean War Ashgate Publishing, Ltd. 2014-01-01
[2] 뉴스 「北朝鮮現代史の理解のため、粛清された人物の研究を」 https://megalodon.jp[...] 朝鮮日報 2009-03-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