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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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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종은 조선의 제20대 왕으로,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이다. 1690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소론과 노론의 당쟁 속에서 불안정한 왕위 계승을 겪었다. 즉위 후 건강 악화와 이복 동생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으로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으며, 신임사화로 대규모 숙청이 발생했다. 1724년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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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왕조선의 제20대 국왕
재위 기간1720년 7월 21일 ~ 1724년 10월 11일
이윤 (I Yun, 李昀)
휘서 (Hwiseo, 輝瑞)
묘호경종 (Gyeongjong, 景宗)
시호각공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Gakgong deokmun ikmu sunin seonhyo daewang, 恪恭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능호의릉 (Uineung, 懿陵)
생애
출생1688년 11월 20일
출생지창경궁 취선당, 한성부
사망1724년 10월 11일 (35세)
사망지창경궁 환취전, 한성부
가족 관계
아버지숙종
어머니희빈 장씨
배우자단의왕후 심씨 (1696년 결혼, 1718년 사망)
선의왕후 어씨 (1718년 결혼)
기타
종교유교 (성리학)
왕조전주 이씨

2. 생애

경종은 숙종의 장남으로, 아버지 숙종은 그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으며, 장씨 소생의 측실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3세에 세자가 되어 차기 국왕 자리를 약속받았다.[15] 경종은 총명하고 서예에도 뛰어났으나, 1694년 어머니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고 (갑술환국), 1701년에는 사사되면서 아버지 숙종의 냉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20]

1690년 경종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그를 지지하는 소론과 그의 이복 동생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1] 어머니 장희빈이 노론에 의해 사사되면서, 경종은 노론의 압박 속에 불안정한 세자 지위를 유지하였다.[21]

1720년 숙종의 죽음으로 경종은 즉위하였으나, 그의 치세는 노론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노론의 지지를 받은 이복 동생 연잉군1721년에 왕세제(王世弟)가 되었는데, 이는 경종이 아들이 없고 건강상의 이유로 자식을 바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종의 허약한 건강으로 인해, 그는 재위 4년 동안 뚜렷한 업적을 남길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었다.[3]

노론이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김일경은 노론을 탄핵했고, 노론 4대신이 유배에 처해졌다. 1722년에는 목호룡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고 고발하여 노론은 몰락했다. (신임의 옥) 이로 인해 소론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선의왕후와 소론은 왕족을 양자로 들여 연잉군을 제거하려 했지만, 경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실패했다. 일설에는 당시 의학에서 상극으로 여겨지던 게장을 먹었고, 연잉군이 의사의 반대에도 인삼을 약으로 사용했다 하여, 경종이 노론파 양반에 의해 암살되었다고도 한다. 경종은 만 35세로 사망했으며, 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이다.

에서 내려진 시호는 "각공왕"인데[11], "삼갈 각", "공손할 공" 자를 사용하여 조선 국왕이 순종적이기를 바라는 청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호는 치세 중의 공식 기록에서 철저히 제거되어, 외교 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은 청에서 시호를 받은 사실을 기록할 뿐 내려진 시호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랑캐로 여긴 청으로부터의 시호를 치욕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11]

2. 1. 탄생과 세자 책봉

1688년(숙종 14년) 10월, 창경궁 취선당에서 숙종과 당시 정2품 소의(昭儀)였던 희빈 장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숙종은 총애하던 장씨에게서 아들을 얻자, 후사를 근심하던 차에 매우 기뻐하였다.[15]

1689년(숙종 15년), 숙종은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명호를 내리면서, 생모인 소의 장씨도 내명부 정1품 희빈(禧嬪)에 봉하였다. 숙종의 장남이며, 아버지 숙종은 그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고 하며, 측실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3세에 세자가 되어 차기 국왕 자리를 약속받았다.

경종은 매우 총명하여 신하들의 예상을 뒤엎는 질문을 많이 했다. 또한 서도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1694년에 어머니가 중전(정비)에서 빈의 자리로 강등되고 (갑술환국|갑술환국한국어), 1701년에 형사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 숙종의 냉대였다. 그로 인해 그는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2. 2. 기사환국

1689년 숙종남인 출신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훗날 경종)을 원자로 삼으려 하자, 서인인현왕후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며 반대하였다. 숙종은 이에 반발하여 기사환국을 일으켜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을 기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김수항 등이 사사되고, 서인 출신 왕비였던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16] 이후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17]

2. 3.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

1694년(숙종 20년), 숙종은 갑술환국을 일으켜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서인을 재등용하면서 남인은 이후 정계에서 소멸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희빈 장씨는 왕비에서 빈(嬪)으로 강등되었다.[20]

1701년(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희빈 장씨와 그 측근들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모해하였다는 노론숙빈 최씨의 고변이 있었고, 숙종은 관련자들을 국문하여 대대적으로 처벌하였으며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여 사사하였다.[20]

2. 4. 험난한 즉위 과정

어머니 희빈 장씨노론 세력에 의해 사사되면서, 경종은 희빈 장씨의 정적인 노론의 압박 속에 불안정한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였다.[21] 또한 후사도 두지 못했으므로 말년의 숙종은 노론의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독대(獨對, 獨對|사관을 물리고 신하와 단둘이서 만남중국어)하여 세자의 후사에 대한 언급을 하였으나, 사관이 입시하지 못하게 한 채 이루어졌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21] (정유독대)

숙종이이명의 독대를 두고 사관은 물론 유생들이 비판하였고 세자의 지지세력인 소론 또한 이이명과 숙종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와병 중이던 소론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간의 독대를 격렬하게 비판했다.[22]

숙종이이명과의 독대를 비난하는 대신들에게 변명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자신의 병이 심해짐을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23] 숙종 말년의 정쟁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으로 양분되어 대립하였는데,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면서 노론과 연잉군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1690년, 경종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그를 지지하는 소론과 그의 이복 동생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권력 다툼이 촉발되었다.[1] 이 다툼으로 인해 소론 학자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었고, 경종 재위 기간 동안 당쟁은 절정에 달했다.[2]

1720년 숙종이 승하한 후, 31세의 왕세자 이윤(휘소)는 경종으로 즉위했다. 숙종은 사망하기 전 이이명에게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사관이나 기록자가 없어 소론과 노론 간에 의심이 생겨났다.

경종은 재위 기간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고, 노론은 경종에게 그의 이복 동생 연잉군에게 왕위를 양보하라고 압박했다. 1720년 즉위 2개월 후, 그의 이복 동생 연잉군(훗날 영조)이 국정을 처리하기 위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다. 이는 왕의 허약한 건강으로 인해 그가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모친 장희빈의 질병이 그의 건강 악화에 책임이 있다는 설이 있다. 1701년, 그녀는 사약을 받았다. 사약 후, 장희빈은 아들인 왕세자(훗날 경종)를 만나기를 간청했다.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가던 중, 그녀는 왕세자의 하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혔고, 이로 인해 그는 불임이 되어 후사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경종의 허약한 건강으로 인해, 그는 재위 4년 동안 뚜렷한 업적을 남길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었다.[3]

3. 치세

1720년(경종 즉위년) 6월 13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숙종의 병신처분 이후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이 정국을 장악한 가운데 경종이 즉위하였고, 왕권은 불안정하고 미약하였다.

평소 말수가 적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못하던 경종에게 노론은 노골적으로 불충(不忠)한 모습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사례들이 희빈 장씨 추숭 문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 및 대리청정 주청, 경종이 후사를 두지 못함을 운운한 '위약' 언급 사건이다.[31][32]

소론 강경파는 이런 노론에 맞서며 옥사를 일으켜 신임사화가 발생하였고,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의 4대신이 처형당하고 노론이 실각하였으나,[4][5] 경종이 급서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은 복권하였다.

경종은 총명하여 신하들의 예상을 뒤엎는 질문을 많이 했고,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어머니 장씨가 중전에서 빈으로 강등되고, 1701년에 사사되면서, 아버지 숙종에게 냉대를 받으며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1720년 부왕 숙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 20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경종의 치세는 노론이 권력을 잡고 있었고, 노론의 지지를 받은 이복 동생 연잉군(후의 영조)이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이는 경종에게 아들이 없었고, 건강상의 이유로 후사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론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김일경은 노론을 탄핵했고, 노론 4대신이 유배되었다. 1722년 목호룡이 경종 시해 미수 사건을 고변하면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은 몰락하고 소론이 집권하였다.

선의왕후와 소론은 왕족을 양자로 들여 연잉군을 제거하려 했지만,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일설에는 경종이 당시 의학에서 상극으로 여겨지던 게장을 먹었고, 연잉군이 의사의 반대에도 인삼을 약으로 사용했다 하여, 노론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3. 1. 희빈 장씨 추숭 문제

1720년(경종 즉위년) 7월, 소론을 중심으로 희빈 장씨의 추숭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유학 조중우가 상소를 올려 희빈 장씨의 명호를 정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25] 숙종희빈 장씨의 작호를 거두지 않고 천장과 망곡례를 허가했던 것은 경종이 즉위한 후에 희빈을 추존할 수 있도록 한 숙종의 은밀한 뜻이었으니 희빈 장씨에게 마땅히 명호를 올려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쳐 올라왔다.

이에 희빈 장씨를 사사하는데 일조하였던 노론이 대대적으로 반대하자, 노론의 기세에 눌린 경종은 선왕의 국상 중에 논할 일이 아니라며 상소를 올린 유학 조중우를 변방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하려 했으나, 노론의 대신들은 조중우를 국문할 것을 요구하였고, 경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노론은 조중우와 그 무리들을 압송해 국문하였고 조중우는 유배 가는 길에 사망하였다.[26]

얼마 후, 성균관 장의(성균관 유생 대표) 윤지술[27]이 장의의 권한으로 권당(성균관 유생들의 동맹휴학)을 선언하며 숙종대왕 지문(誌文)에 숙종희빈 장씨를 사사한 신사년의 일(무고의 옥)을 누락한 것을 비난하며 다시 기록할 것을 청하였다.[28]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을 주축으로 한 노론은 윤지술의 의기를 칭찬하며 그를 비호하였으나, 윤지술은 국왕의 생모를 망령되이 비난한 죄로 처형되었다.

조중우와 윤지술은 소론과 노론의 입장을 대표하여 각기 다른 생각으로 소를 올린 것이었는데, 조중우는 망령되게 숙종의 뜻을 억측하며 은혜를 빙자하고 대의(大義)에 어긋난 죄로, 윤지술은 어머니와 아들의 끊어질 수 없는 의(義)를 비하하며 군부를 욕보인 죄로 처형된 것이다.[29]

1722년(경종 2년) 신임옥사로 민진원과 노론을 축출한 경종은 비로소 어머니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증하였다.[30]

3. 2. 위약 언급 사건

경종은 어려서부터 비만이었으며 잔병치레를 하였다.[31] 즉위 후에도 후사가 없자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고,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32]

이에 청나라에 주청사를 보내어 세제 책봉을 승인받고자 하였는데, 이때 경종이 위약(痿弱)하여 후사를 이을 수 없고, 좌우의 잉첩(후비)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부분이 왕을 모욕하였다 하여 주청 부사 윤양래와 서장관 유척기가 변방에 위리안치되었다.

3. 3. 신임옥사

경종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노론의 주장에 따라 1721년 음력 8월에 이복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했다.[32] 그러나 노론은 더 나아가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했고, 소론 측에서는 노론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하며 반대했다. 경종은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다가 목호룡의 고변이 발생하자, 공론을 모아 노론 세력을 불충과 반역으로 몰아 숙청했다. 이를 신임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연잉군을 지지하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을 포함한 50여 명의 고관들이 사형당하고 그 일족이 유배되거나 투옥되는 등 연잉군은 큰 지지 세력을 잃었다.[4] 1722년에는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과 문유도가 연잉군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역사는 신임사화를 신축옥사와 임인옥사 두 사건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신축옥사는 1720년, 허약한 경종을 대신하여 연잉군이 국정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노론을 소론이 숙청한 사건이다. 임인옥사는 경종 재위 2년(1722년)에 일어났다.[5]

신임사화로 소론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했지만, 경종은 병약했고, 경종 비 선의왕후는 비밀리에 다른 종친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으려고 했다. 소론의 위협 속에서, 노론과 완론파 소론은 연잉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경종의 비호 아래 연잉군은 불안정하지만 왕세제의 자리를 유지했다.

4. 최후

경종은 1724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소론은 이복 동생인 연잉군이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호머 헐버트의 저서 『한국의 역사』에서는 경종이 상한 해산물을 먹고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6] 헐버트는 "형제(영조)에 대해 알려진 어떤 것도 그가 그런 행위(경종 독살)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시사하지 않으며, 한여름에 바다에서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얼음 없이 가져온 새우를 먹는 사람은 죽음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소문(영조의 독살설)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7]

경종의 유해는 양주의 천장산에 안장되었으며, 능호는 의릉으로 정해졌다.

4. 1. 사망

경종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비만한 몸집[31]에 몸에 열과 화가 많아 형용할 수 없는 병을 앓거나 다시 회복되는 일이 반복되었다.[33]

1724년(경종 4년) 여름부터 경종은 소화불량과 설사 등으로 8월에는 거의 한 달간 제대로 식사를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음력 8월 19일 저녁에 게장과 감을 먹고는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어 24일에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이에 세제(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사용할 것을 강권하고, 어의 이공윤이 반대했지만 세제의 강권에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처방한다. 그러나 세제의 처방에 경종의 상태는 더 악화되어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34] 경종이 승하하기 전, 게장과 꿀, , 인삼차 등을 수라로 든 일이 있어[35], 경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영조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이 유포되었다. 이는 이인좌의 난나주 괘서 사건 때도 언급되면서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과 관련한 아킬레스건으로 남게 되었다.

소론은 노론이 앞서 경종을 폐위하고 영조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복 동생 영조가 그의 죽음에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현재 여러 사관들은 호머의 저서 『한국의 역사』에 묘사된 대로 그가 상한 해산물을 먹고 사망했을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6] "그러나 우리는 그 소문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형제에 대해 알려진 어떤 것도 그가 그런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시사하지 않으며, 둘째로 한여름에 바다에서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얼음 없이 가져온 새우를 먹는 사람은 죽음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7]

경종은 1724년에 사망했고, 양주의 천장산에 안장되었다. 능호는 의릉(Uireung)으로 정해졌다.

4. 2. 묘호와 시호, 능묘

묘호는 경종(景宗)이며,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효(德文翼武純仁宣孝)이다.[11] 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懿陵)으로,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 함께 있다. 무덤은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태로, 위쪽에는 경종의 능이, 아래쪽에는 선의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5. 경종 독살설

단의왕후의 남동생 심유현소론 과격파는 연잉군이 어의의 경고를 무시하고 올린 인삼, 부자를 먹은 뒤 경종이 사망한 점[36]을 주목해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이 독살설은 소론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김일경의 모의 사건, 이천해의 난동,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등 오랜 시간 영조의 정통성 시비 문제로 비화되었다.

나주괘서사건의 주모자 신치운은 영조가 자신을 친국할 때 '신은 갑진년(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라며 경종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37]

1754년(영조 30년), 영조는 본인은 경종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천의소감》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소론은 노론이 경종을 폐위하고 연잉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점을 들어 연잉군이 경종의 죽음에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현재 여러 사관들은 그가 상한 해산물을 먹고 사망했을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6] "그러나 우리는 그 소문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형제에 대해 알려진 어떤 것도 그가 그런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시사하지 않으며, 둘째로 한여름에 바다에서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얼음 없이 가져온 새우를 먹는 사람은 죽음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7]

일설에 따르면, 당시 의학에서 상극으로 여겨지던 게장을 먹었고, 연礽|잉한국어군이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을 약으로 사용했다고 하여, 경종이 노론파 양반에 의해 암살되었다고도 한다.

6. 가족 관계

관계이름본관생몰년부모비고
조부모현종1641년 - 1674년
명성왕후 김씨1642년 - 1684년
외조부모장형인동1623년 - 1669년
윤씨 부인파평1626년 - 1698년
숙종1661년 - 1720년
생모희빈 장씨인동1659년 - 1701년
적모인현왕후여흥1667년 - 1701년
정비단의왕후 심씨청송1686년 - 1718년청은부원군 심호
영원부부인 박씨
자녀 없음
계비선의왕후 어씨함종1705년 - 1730년함원부원군 어유구
완릉부부인 이씨[38]
자녀 없음
동생대군1690년 7월 19일[12] - 1690년 9월 16일[13]


7. 경종이 등장하는 작품


  • 1968년 영화 《요화 장희빈》에서 배우 김정훈이 연기했다.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인현왕후》에서 배우 김성환이 연기했다.
  • 2002년~2003년 KBS2 드라마 《장희빈》에서 곽정욱이승형이 연기했다.
  • 2010년 MBC 드라마 《동이》에서 윤찬이 연기했다.
  • 2016년 SBS 드라마 《대박》에서 현우가 연기했다.
  • 2019년 SBS 드라마 《해치》에서 한승현이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The 1728 Musin Rebellion: Politics and Plotting in Eighteenth-Century Kore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6
[2] 서적 The 1728 Musin Rebellion: Politics and Plotting in Eighteenth-Century Kore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6
[3] 웹사이트 Uireung Tomb - Exploring Korea http://www.exploring[...] 2013-07-31
[4] 웹사이트 Royal Palaces and tomb http://jikimi.cha.go[...]
[5] 웹사이트 Uireng, Royal tomb of Queen Seonui http://www.seongbuk.[...] 2014-03-24
[6] 웹사이트 The history of Korea https://archive.org/[...] Seoul, Methodist Pub. House
[7] 웹사이트 Uireung - A Story of King Sukjong and King Gyeongjong http://samedi.livejo[...]
[8] 문서 Daughter of Shim Ho
[9] 문서 Daughter of Eo Yu-gu
[10] 뉴스 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https://www.chosun.c[...] 2007-09-11
[11] 뉴스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www.chosunonl[...] 2007-09-16
[12] 간행물 中宮殿解娩後, 大殿中殿, 藥房問安. 答曰, 知道. 政院玉堂問安. 答曰, 知道. 政院玉堂問安. 答曰, 知道.」承政院日記 承政院日記342本(脱草本18本)粛宗16年7月19日 戊申10/14記事
[13] 간행물 新生王子卒, 張氏出也. 生纔一旬. 禮曺啓 行停朝市禮葬等事.」朝鮮王朝実録 粛宗実録22巻 粛宗16年9月16日癸卯2回目
[14] 문서 《숙종실록》에는 10월 27일, 《경종대왕 묘지문》에는 10월 28일로 기록됨.
[15] 간행물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10월 27일 (병인)
[16] 간행물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5월 4일 (기해)
[17] 간행물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10월 22일 (기묘)
[18] 간행물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6월 16일 (을해)
[19] 간행물 《숙종실록》 30권, 숙종 22년(1696년 청 강희(康熙) 35년) 5월 20일 (을해)
[20] 간행물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10일 (계해)
[21] 간행물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7월 19일 (신미)
[22] 간행물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7월 28일 (경진)
[23] 간행물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7월 19일 (신미)
[24] 간행물 《숙종실록》 62권, 숙종 44년(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9월 13일 (무자)
[25] 간행물 《경종실록》 1권, 경종 즉위년(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7월 21일 (병술)
[26] 간행물 《경종실록》 1권, 경종 즉위년(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7월 24일 (기축)
[27] 문서 인현왕후의 조카 민우수의 처남
[28] 간행물 《경종실록》 2권, 경종 즉위년 9월 7일(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신미)
[29] 간행물 《경종실록》 2권, 경종 즉위년(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12월 28일 (경신)
[30] 간행물 《경종실록》 10권, 경종 2년(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10월 10일 (임술)
[31] 간행물 《승정원일기》 477책 (탈초본 25책) 숙종 39년(1713년 청 강희(康熙) 52년) 4월 9일 (병진)
[32] 간행물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8월 20일 (무인)
[33] 간행물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일 (임신)
[34] 간행물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5일 (을미)
[35] 간행물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1일 (신묘)
[36] 역사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4일 (갑오) 의식을 잃자 인삼차를 올리다
[37] 역사 영조실록 84권, 영조 31년(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5월 20일 (계사) 신치운을 신문하다
[38] 인물 중종 (조선)|중종의 6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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