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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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령군은 조선 숙종과 명빈 박씨의 아들로, 숙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다. 5세에 연령군에 봉해졌으며, 숙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21세에 사망하여 효헌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사후 후사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19세기까지 연령군가에서는 사도세자의 후손임을 강조했으나, 20세기에 들어 연령군을 선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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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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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이훤(李昍) 또는 이헌 |
초휘 | 인수(仁壽) |
자 | 문숙(文叔) |
시호 | 효헌(孝憲) |
작위 | 왕자군 |
출생 | 1699년 6월 13일 (음력),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
사망 | 1719년 10월 2일 (음력), 조선 한성부 가회방 |
가계 | |
아버지 | 숙종 |
어머니 | 명빈 박씨 |
배우자 | 상산군부인 김씨 |
자녀 (양자) | 상원군 이공(商原君 李糿)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
기타 정보 | |
능묘 | 연령군묘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
관직 | 오위도총부도총관 |
씨족 | 전주 이씨 연령군파 |
2. 생애
1699년(숙종 25년) 7월 5일, 숙종과 후궁 명빈 박씨의 아들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2] 숙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막내아들로 숙종이 매우 사랑하였다. 1703년 연령군이 5세가 된 해에 어머니 명빈 박씨가 세상을 떠났다.[21]
1703년 (숙종 29년) 10월 3일 5세의 나이로 연령군에 봉해졌다.[21] 왕실 전범에는 왕자가 6세 미만까지는 군호를 봉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으나, 명빈 박씨의 상주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반대 의견은 면직 처분으로 억눌렀다. 같은 해 10월 19일 종친부 유사당상에 임명되었다.[22] 종친부 유사당상은 종친부의 요직이었으며, 각처에서 임명 철회 상소가 상주되었으나 숙종은 이를 무시했다.
1707년 관료 김동필의 딸인 김씨 부인이 연령군의 배우자로 간택되었고, 같은 해에 결혼했다.[4][5][23] 1708년 12월 16일 숙종은 정명공주의 저택을 매입하여 연령군택으로 고쳤다.[24] 1711년 12월 14일 천연두를 앓았다.[25] 1716년 1월 16일 창경궁을 나섰다.[26] 1717년 2월 7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27] 1718년 5월 11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유임되었다.[28] 7월 11일 사옹원 도제조로 이동했다.[29]
연령군은 1719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30] 시호를 "효헌"으로 추증받았다. 숙종은 연령군택을 방문하여,[31] 3년간 녹봉을 지급하고,[32] 11월 15일까지 조시를 중지하도록 했다.[33]
2. 1. 출생과 유년 시절
1699년(숙종 25년) 6월 13일, 숙종과 명빈 박씨의 아들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출생하였다.[34] 숙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막내아들로 숙종이 매우 사랑하였다. 아명(兒名)은 인수(仁壽)이다.1703년 연령군이 5세가 된 해에 어머니 명빈 박씨가 세상을 떠났다.[34] 숙종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미를 찾는 어린 아들을 애처로워하며 조정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항상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내가 죽거든 선빈(先嬪,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라고 했는데, 후일 숙종은 그 뜻을 불쌍히 여겨 그의 바람대로 묻어주었고, 사람들은 이를 모두 슬퍼했다 한다.
{{인용문-테두리|
:임금(숙종)은 왕자가 어려서 어머니를 여윔을 안쓰럽게 여겨
:항상 좌우에 두고 보살핌이 지극하였다.
:|《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7월 15일 (기미)|align=center}}
1703년 (숙종 29년) 9월 4일, 숙종은 아명을 방제에 쓸 수 없다는 이유로[35] 6세 이후에 봉군하는 법을 무시하고 5세에 불과한 그에게 이름 훤(昍)과 연령군의 군호를 내렸는데, 이에 대해 조정 신료들이 반발하자 숙종은 반대하는 대신들을 처벌하면서까지 봉작식을 강행했다.[36][37]
{{인용문-테두리|
왕자 이훤(李昍)을 봉하여 연령군(延齡君)으로 삼았다.
:훤은 명빈 박씨(榠嬪 朴氏)가 낳았는데,
:낳은 지 겨우 다섯 살 되던 때에 명빈이 졸(卒)하여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이다.
임금(숙종)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왕자의 봉작(封爵)은 혹은 여섯 살 혹은 열 살에 하였으나,
:지금 명빈의 초상에 이미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있어야만 하니,
:비록 장성하지는 않았지만 아명(兒名)을 방제(旁題) 에 쓸 수는 없다.
:또 왕자는 몇 달만 지나면 여섯 살이 되니 정사를 열어 봉작케 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작주(繳奏)하기를,
:"왕자께서 지금 어리시니 다만 봉작만 너무 이른 게 아닙니다.
:하물며 어머니의 상중(喪中)에 있고 장례도 행하지 아니했는데,
:작호를 봉하고 관면(冠冕)을 씌우는 것은 예법에 아주 어긋난 일이니,
:결코 거행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예관(禮官)에 명하여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품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봉작은 상명(上命)에서 나왔으니, 미안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예관에게 상고하여 아뢰게 하고, 또한 대신에게도 묻도록 하라."
하였다.|《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9월 3일 (병오)|align=center}}
1703년 (숙종 39년) 9월 9일 종친부유사당상에 임명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소갈병을 앓았다 한다. 신도비에 의하면 '오랫동안 가슴을 답답해했는데, 마침내 소갈병이 생겼는데 병이 발작하면서 사제로 나왔다가 조금 차도가 있으면 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 대궐에서 출궁한 후, 숙종이 불편하다 하면 촛불을 지키고 있다가 숙종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취침하였다. 인원왕후가 병에 걸리면 부왕인 숙종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극진히 간병하였다. 그는 대궐에 입직할 때는 옷 띠를 풀지 않은 적이 많았으며, 수시로 부왕의 오줌을 맛보고 건강을 점검하기도 하였다.
1707년 관료 김동필의 딸인 김씨 부인이 연령군의 배우자로 간택되었고, 같은 해에 결혼했다.[4][5]
2. 2. 왕자 시절
1699년 7월 5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명빈 박씨이다. 숙종은 막내 아들인 연령군을 매우 총애하였는데, 이는 명빈 박씨를 총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2] 1703년 10월 3일 5세의 나이로 연령군에 봉해졌다.[21] 왕실 전범에는 왕자가 6세 미만까지는 군호를 봉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으나, 명빈 박씨의 상주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반대 의견은 면직 처분으로 억눌렀다. 같은 해 10월 19일 종친부 유사당상에 임명되었다.[22] 종친부 유사당상은 종친부의 요직이었으며, 각처에서 임명 철회 상소가 상주되었으나 숙종은 이를 무시했다.1704년 6세의 나이로 종친부 당상관의 작위를 하사받았으며,[2] 1706년 관례를 행하였다. 사헌부로부터 상중에는 있던 직책도 사퇴하는데 그에게 유사당상직을 맡겼다고 반대하며, 그를 추천한 사람들을 파면할 것을 청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1707년 2월 7일 9세의 나이로 종친 임원군 이표의 외손녀이자 판돈령부사 김동필의 딸인 김씨와 가례(嘉禮)를 올렸으며, 임창군 혼(臨昌君焜) 등이 주관하였다.[4][5][23] 군부인 김씨는 부인병을 앓았는데, 연령군의 묘비명에 의하면 군부인은 태를 손상해서 자녀를 낳을 수 없었다고 한다.
1708년 12월 16일 출궁을 앞둔 그의 제택을 정하는데 숙종이 수만 냥을 들이려 하자 부제학 조태구 등이 1707년에 정한 연잉군의 제택에 들인 비용이 2천 냥에 불과하였음을 지적하며 반대하였다.[39] 조정의 반대가 극심하자 숙종은 정명공주의 저택을 구입하여 연령군에게 제택으로 하사하였는데,[24] 무려 200칸에 이르는 이 거대한 저택은 본시 연잉군이 사려고 오랜 기간 공을 들였지만 1707년에 숙종이 사지 못하도록 금한 것이었다.[40] 이후에도 이 저택을 보수하는데 주춧돌을 바꾼 비용만도 중인 4가구의 재산과 같다는 지적이 있었다.
1711년 12월 14일 10여 일간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다.[25][41] 그의 두환(천연두)을 고친 의사 유상(柳王+常)은 상을 받고 가자되고, 얼마 뒤 지방 수령직에 임명된다.[41] 그해에 숙종은 연령군에게 왕자 사부를 붙여서 글을 배우게 하였다.
1715년 다시 출궁하여 집으로 돌아갔고, 1716년 1월 16일 창경궁을 나섰다.[26] 종부시도제조, 사옹원도제조,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냈다. 1717년 2월 7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27] 1718년 5월 11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유임되었다.[28] 6월 15일 다시 도총관에 임명되고, 1718년 7월 11일 사옹원 도제조로 이동했다.[29] 그는 사망 당시까지도 사옹원 도제조직을 겸직하였다.
숙종의 총애가 각별해 숙종의 세 아들(경종, 영조, 연령군) 중 가장 두드러지게 사랑을 받았다. 1705년(숙종 31년), 연령군이 왕의 교지를 받들기 위해 뜰앞에 무릎을 꿇고 대기하였는데, 교지를 전달하는 정랑 조도빈이 집에서 늦게 나와 왕자를 기다리게 하자 숙종은 매우 노하여 조도빈을 파직하였다.[38]
{{인용문-테두리|
:왕자(王子)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이 숙은(肅恩)할 때에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 교지(敎旨)를 전해야 하는데,
:미처 오지 않아 왕자가 자못 오랫동안 뜰에 꿇어앉아 있었다.
:임금이 대내(大內)에서 보고 진노하여 정랑(正郞) 조도빈(趙道彬)의 벼슬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임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으므로, 액정(掖庭)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숙종실록》 42권,
숙종 31년(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9월 9일 (경오)|align=center}}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의 저서인 《단암만록》에 의하면 숙종은 연잉군(영조)으로부터 첫 손자(효장세자)를 얻었음에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고, 이전에 있었던 이이명과의 정유독대 당시 연령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인용문-테두리|
:연령군(延齡君)은 사람됨이 온유하고 영민하여
:임금(숙종)의 사랑을 받은 것이 연잉군보다 지나쳤다.
:연잉군(延礽君, 영조)은 자주 임금의 질책을 받았고
:또 생모(숙빈 최씨)의 상(喪)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행검이 없다고 책망하여 임금을 알현하지 못하게 한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다.
:정유년(1717년)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했을 때
:임금의 뜻은 대개 연령군에게 있었다고 한다.|《단암만록》|민진원|align=center}}
2. 3. 최후
연령군은 1719년 9월 병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10월 2일, 탕제의 효험 없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가회방 사저에서 갑자기 급사하였다.[46] 사망 원인은 천연두였다.[25]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숙종은 오열하며 제택으로 친림하려 하였지만 군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숙종은 궐밖에 나가 직접 연령군의 마지막 모습과 염습을 지켜보겠다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애써 반대하여 그만두었다.[42]{{인용문-테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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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王子)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이 졸(卒)하였다.
:훤은 자(字)가 문숙(文叔)인데, 임금(숙종)의 셋째 아들로서, 성품이 효성스럽고 근실하였다.
:사제(私第)에 나가 살았는데, 폐해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임금이 병든 후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며 조금이라도 게을리함이 없었으니,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21세로 아들이 없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스스로 글을 지어 제사지내고, 또 친히 묘문(墓文)을 지었다.
:시호(諡號)는 효헌(孝憲)이라 하였다.|《숙종실록》 64권,
숙종 45년(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10월 2일 (신축)|align=center}}{{인용문-테두리|
:약방의 세 제조가 먼저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흥정당(興政堂)에 이르렀다.
:이이명이 연령군의 장례에 친림할 수 없는 상황을 극진하게 아뢰자,
:임금이 눈물을 뿌리고 오열하며 말하기를,
:"나의 두 눈이 물건을 보지 못하니 비록 가더라도 무엇을 하겠는가마는,
:단지 입관하기 전에 그 시신이라도 한 번 어루만져 보려는 것이다.
:경 등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정리(情理)를 헤아려 억지로 다투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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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불러서 보았는데,
:승지(承旨)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도 따라 들어가 여러 사람이 번갈아 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가보지 못하고 이곳에 앉아 슬퍼하고 번민만 하면 반드시 다른 병이 첨가될 것이다.
:한 번 가서 슬픔을 풀어버리면 결단코 손상되는 바가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날 임금의 슬픔이 지극히 깊고 중대하여 차마 우러러볼 수가 없었는데,
:군신(群臣)이 진언하면 곧 누구냐고 묻고는 반드시 온화한 말로 답하였다.
:그리고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자 정리를 억제하여 따랐으니,
:군하(群下)로서 허심탄회하게 아랫사람을 접대하는 도량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자 비로소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비답하기를,
:"친림하는 일절은 우선 정지하도록 하겠다." 하였다.|《숙종실록》 64권,
숙종 45년(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10월 2일 (신축)|align=center}}
숙종은 연령군이 죽자 매우 슬퍼하여[46] 3년간 녹봉을 지급하고,[32] 11월 15일까지 조시를 중지하도록 했다.[33] 그의 이복 형인 왕세자(경종)는 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림을 강행하였지만, 군신들이 실의에 빠져있는 숙종에게 나아가 왕세자의 친림을 정지하기를 청하기에 이르자 친림단자를 거두고 상차에는 숙종을 모시고 연령군의 제택으로 친림할 것임을 통보하였지만 이루지 못했다.[43] 왕세자는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죽은 아우를 위해 거애(擧哀)하였으며[44], 스스로 제문(祭文)을 지어 ‘불러도 응답하지 않고 막연히 소리가 없으니, 끝이난 이 세상에서 공연히 의형(儀形)만을 생각하는구나. 가는 세월 흐르는 물 같아서 산으로 갈 날 기약이 있도다. 금양(衿陽) 떠날 날이 하룻밤뿐인데 무정한 달빛은 천추(千秋)토록 비치리라.’는 극도에 이른 우애를 드러냈다.[45] 이후 숙종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친히 묘문을 지었다.[46] 시호는 효헌(孝憲)이다.[3]
2. 4. 사후
1719년(숙종 45) 11월 13일에 사망하자,[30] 시호를 "효헌"으로 추증받았다.[29] 숙종은 연령군택을 방문하여,[31] 3년간 녹봉을 지급하고,[32] 11월 15일까지 조시를 중지하도록 했다.[33] 효헌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그에게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숙종은 1719년 10월 20일 직접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이탄의 아들들 중 차남 상대(尙大)를 지명하여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게 하였다. 연령군은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어머니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그해 12월 17일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번당리(衿川縣 下北面 樊塘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명빈 박씨의 묘소 근처에 묻혔다. 묘비문은 서평군이 썼고, 묘지문은 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가 썼다. 신도비문은 의정부우의정 이이명이 짓고, 글은 이조판서 조태구(趙泰耉)가 썼으며, 의정부우참찬 민진원(閔鎭遠)이 돌에 새겼다.1725년(영조 1) 6월 부인 상산군부인 김씨(商山郡夫人 金氏, 1698∼1725)가 29세로 사망했다. 한편 1727년(영조 3) 1월 연령군 가의 종이 백성과 싸웠는데, 종부시에서 그 백성만 잡아가 문초하다가 죽어 물의를 일으켰다. 그 해 12월에 소현세자의 4대손 밀풍군 탄의 아들 상대를 양자로 들여 상원군(商原君)으로 봉했다. 그러나 상원군은 생부 밀풍군의 아들이라서 밀풍군 추대 사건에 연좌되어 파양되고, 영조는 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주의 5대손 이채의 아들 수신(守愼)을 낙천군으로 봉하고 양자로 삼았다.
후일 그의 제사는 운현궁 남연군의 후손들이 받들게 되었지만, 남연군의 후손들은 연령군의 후손이 아닌 사도세자의 별자 은신군의 후손이라 강조하였다. 또한 스스로를 남연군파라 지칭하였다. 20세기에 와서 연령군을 시조로 보고 연령군을 선조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경성부 구획정리에 의해 1940년 그의 묘소는 경성부 대방정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5-52번지, 구 가야사터 동남쪽 3km 지점 근처에 어머니 명빈 박씨의 묘소와 함께 이장되었다. 가야사터는 연령군의 양증손 남연군 묘소가 있는 곳이다. 남연군 묘 근처 옥계저수지변으로 이장되었으며, 묘소는 부인 상산군부인과 합장이고 어머니 명빈 박씨의 묘소 바로 우측에 있다. 연령군 내외 및 명빈박씨 묘 건너편 서남쪽에는 산을 등지고 흥녕군의 묘가 있다. 연령군의 신도비는 1967년 8월 3일 서울 성북구 공릉동(현 노원구 공릉동) 230-1번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근처로 옮겨졌고, 1980년 6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3. 가족 관계
연령군의 아버지는 숙종이며, 어머니는 명빈 박씨이다.[47][48] 조부는 현종, 조모는 명성왕후 김씨이다. 외조부는 박효건이다. 부인은 상산군부인 상산 김씨로, 장인은 김동필이며 장모는 전주 이씨이다.[49] 상산군부인 김씨의 외조부는 선조의 고손자인 임원군 이표이다.[8]
연령군은 아들이 없어 상원군 이공과 낙천군 이온을 양자로 들였으나, 모두 파양하였다.[50][51]
4. 논란
4. 1. 후사 문제
연령군은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다.[9] 1719년에는 밀풍군의 둘째 아들인 상원군 이공이 양자로 지명되었으나,[9]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1733년에 양자 관계가 파양되었다.[11][12]이후, 선조의 서자 경창군의 6대손 채의 차남 낙천군 이온을 사후 양자로 정하였으나,[13][14] 낙천군 역시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다.[15] 결국 덕흥대원군가의 동돈녕 이형종의 차남 달선군 이영을 낙천군의 양자로 삼았지만,[16] 달선군 부인 신씨와 낙천군 부인 서씨의 갈등으로 달선군이 자결하면서 1750년에 양자 관계가 파양되었다.[17][18]
정조는 은신군을 봉사손으로 지명했지만,[19] 은신군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20] 은신군을 연령군의 사후 봉사손으로 삼는 과정에서, 손자뻘인 은신군을 할아버지뻘인 연령군의 양자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오랫동안 발생하기도 하였다.
4. 2. 사도세자 강조와 연령군 회피
19세기까지만 해도 운현궁가에서는 자신들을 사도세자(장조)의 별자 은신군의 후손임을 강조하였다. 장조의 서차남 은신군이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해졌지만 이는 은신군 사후에 정조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은신군도 아들이 없었으므로 인평대군의 6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채중을 은신군의 양자로 사후입양하였다.정조가 영조의 유지를 이유로, 은신군을 연령군의 후사로 정하면서 은신군 집안을 계승하는 사람이 연령군가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은신군의 양자인 남연군의 후손들은 연령군을 선조로 하지 않고, 사도세자를 강조했다. 1792년 편찬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되어 있었고, 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된 선원보들도 사도세자의 자녀 항목에 은신군을 넣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 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기록하였다. 1892년 발행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1919년 5월에 세운 흥친왕 신도비와 이준용 신도비에도 여전히 장조의 아들 은신군을 강조했다. 1948년에 영선군 이준용의 신도비를 다시 세울 때도 융릉(장조)의 아들임을 강조했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연령군의 생일, 기일 제사를 받들었지만, 연령군이나 낙천군 대신 사도세자를 내세웠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와서 연령군을 선조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5. 연령군이 등장하는 작품
5. 1. 드라마
2019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해치》에서 노영학이 연령군 역을 연기했다.6.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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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명빈 박씨의 졸기
숙종실록
1703-07-15
[35]
문서
방제(旁題) : 신주(神主) 아래의 왼쪽에 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
[36]
문서
숙종 (조선)|숙종의 둘째 아들인 영조|연잉군은 6세에 군호가 정해졌고 7세에 봉작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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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9월 3일 (병오) ----'''명빈 박씨의 아들 이훤을 연령군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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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숙종실록》 42권, 숙종 31년(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9월 9일 (경오) ----'''왕자 연령군 이훤을 오랫동안 꿇어앉아있게 한 책임을 물어 정랑 조도빈을 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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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 조태구가 연령군의 제택에 대하한 일로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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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의 집에서 정명 공주의 집을 억지로 사들이지 말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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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왕자 연령군의 두환이 낫자 의관 유상에게 가자 하고 후에 수령에 제수 하다"
숙종실록 50권, 1711년(숙종 37년, 청 강희(康熙) 50년) 11월 22일 정미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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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숙종실록》 64권, 숙종 45년(1719년 청 강희(康熙) 58년) 10월 2일 (신축) ----'''군신이 임금의 친림를 만류하니 이에 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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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왕세자의 상차 친림을 군신이 반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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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왕세자가 연령군을 위해 거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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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임해군]]의 양자 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의 손자인 임원군 이표(林原君 李杓)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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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연령군에게는 10촌 할아버지뻘이며, 연령군의 친할아버지 현종과는 8촌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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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의 차남으로 후사 없음.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었다가 사후 파양되었다.
1728
[50]
문서
후사 은신군]]이 친왕손으로서 낙천군의 제사 모시기를 주저하였으므로 낙천군을 건너뛰어 곧바로 연령군의 제사를 잇도록 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은신군이 낙천군을 반대하였다기보다는 선왕이 바로 연령군 제사를 받들게 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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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연령군 이훤의 집 제사를 받들도록 해당 궁에 분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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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2월 28일 (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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