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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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호 쿠스티 파아시키비는 1870년 핀란드의 코스키 HL에서 태어나 1956년 사망한 핀란드의 정치인이다. 헬싱키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핀란드 대공국 의원, 재무 장관, 핀란드 국립주식은행 행장을 역임했다. 그는 1918년 핀란드 총리를 지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4년부터 1946년까지 다시 총리를, 1946년부터 1956년까지 핀란드 대통령을 역임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핀란드의 독립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파시키비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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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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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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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
원어 이름 | Juho Kusti Paasikivi |
출생 이름 | 요한 구스타프 헬스텐 |
출생일 | 1870년 11월 27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해메엔코스키 |
사망일 | 1956년 12월 14일 |
사망지 | 헬싱키, 핀란드 |
안장 장소 | 히에타니에미 묘지 |
국적 | 핀란드 |
정당 | 핀란드당 (1906–1918) 국민연합당 (1918년부터) |
배우자 | 안나 마틸다 포르스만(사별) 알리나 (알리) 발베 |
자녀 | 4명 |
모교 | 헬싱키 대학교 |
직업 | 정치가 교수 변호사 |
주요 직책 | |
핀란드 대통령 | 제7대 재임 기간: 1946년 3월 11일 ~ 1956년 3월 1일 이전 대통령: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다음 대통령: 우르호 케코넨 |
핀란드 총리 | 제2대 재임 기간: 1918년 5월 27일 ~ 1918년 11월 27일 이전 총리: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다음 총리: 라우리 잉그만 |
핀란드 원로원 의장 | 재임 기간: 1918년 5월 27일 ~ 1918년 11월 27일 이전 의장: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
수상 재임 기간 동안의 총리 | |
총리 | 마우노 페칼라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우르호 케코넨 사카리 투오미오야 랄프 퇴른그렌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파시키는 1890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러시아어 및 러시아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7]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헬싱키 대학교에서 법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2. 1. 출생 및 어린 시절
파아시키비는 1870년 남부 핀란드 패이앤네 타바스티아 코스키 HL(현재의 해메엔코스키)에서 요한 구스타프 헬스텐(Johan Gustaf Hellstén|요한 구스타프 헬스텐sv)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5] 그의 부모는 상인이었던 아우구스트 헬스텐과 카롤리나 빌헬미나 셀린이었다. 파아시키비의 어머니는 그가 4세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가 14세 때 빚 때문에 사망하여, 이후 숙모인 카이사 하그만이 그를 양육하였다. 1885년, 헬스텐은 자신의 이름을 핀란드식인 유호 쿠스티 파아시키비(Juho Kusti Paasikivi|유호 쿠스티 파시키비fi)로 개명하였다.[5] 그의 성은 두 언어 모두에서 문자 그대로 "판석"을 의미한다.젊은 시절 파아시키비는 열렬한 체조 선수였다. 해메엔린나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후 독서에 몰두하였다. 1890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러시아어 및 러시아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897년에는 법학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같은 해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901년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헬싱키 대학교 조교수로 근무했다.
2. 2. 교육
젊은 시절 파시키는 열정적인 육상 선수이자 체조 선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학업적 재능을 알아보고 홀롤라에서 잠시 공부한 후 하메엔린나의 명문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파시키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대한 열정을 보였고, 반에서 최고의 학생이었다.[6] 1890년에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5월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7] 이듬해 겨울, 파시키는 전공을 법학으로 바꾸어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02년에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파시키는 교사, 강사, 법원 집달관, 라흐티에서 개업 변호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894년경 대학 재학 시절에 파시키는 핀란드화 운동에 참여하여 학생 조직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다.[8]3. 정치 경력
1890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하여 러시아어 및 러시아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헬싱키 대학교에서 법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그리고 1910년부터 1913년까지 핀란드당 소속 핀란드 대공국 의회 의원을, 1908년부터 1909년까지는 핀란드 상원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1909년 러시아 제국의 러시아화 정책에 항의하여 재무장관 직을 사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부터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1934년까지 핀란드 국립주식은행(Kansallis-Osake-Pankki) 행장을 역임했고, 1915년부터 1918년까지 헬싱키 시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1918년 5월부터 11월까지 핀란드의 총리를 역임하면서 독일 제국의 지원을 통해 핀란드에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독일 제국의 패전으로 무산되었다.
1936년 스웨덴 스톡홀름 주재 핀란드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40년에는 소련 모스크바 주재 핀란드 대사로 임명되었다. 겨울 전쟁에서 소련과의 평화 협상을 주장했지만, 1941년 핀란드가 나치 독일을 지지하자 사임했다.
1944년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핀란드의 총리를 역임하면서 핀란드가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3. 1. 초기 정치 활동 (1907년 ~ 1918년)
1902년부터 1903년까지 헬싱키 대학교 행정법 조교수를 역임했다.[9]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그리고 1910년부터 1913년까지 핀란드당 소속 핀란드 대공국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1908년부터 1909년까지는 핀란드 상원 재무장관을 역임했다.1909년 러시아 제국의 러시아화 정책에 항의하여 재무장관 직을 사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1934년까지 핀란드 국립주식은행(Kansallis-Osake-Pankki) 행장을 역임했으며, 1915년부터 1918년까지 헬싱키 시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핀란드 대공국에서 일했지만, 러시아의 비생산적이고 과격하며 잠재적인 공격성을 인지하고,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핀란드당의 초청을 받아들여 핀란드 정치에 참여했다.
3. 2. 핀란드 독립과 내전 (1917년 ~ 1918년)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파시키비는 핀란드 대공국의 법률을 현대화하는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러시아 제국 내에서 핀란드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는 연립 내각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하며, 지나치게 큰 자치 목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려 했다.[10] 그러나 볼셰비키의 10월 혁명 이후, 파시키비는 입헌군주제 형태의 완전한 핀란드 독립을 옹호하게 되었다.[10]핀란드 내전 동안 파시키비는 백군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1918년 5월부터 11월까지 핀란드의 총리로 재직하면서, 독일 왕자 프리드리히 카를을 핀란드의 국왕으로 추대하여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는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려 했다. 이를 통해 볼셰비키 러시아에 맞서 핀란드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10]

그러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핀란드는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공화국으로 전환해야 했다. 파시키비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KOP 은행으로 돌아갔다.[10]
파시키비 내각은 핀란드 내전 이후 수용소가 존속하는 동안 집권했으며, 이 수용소에서는 총 1만 2천 명의 적군 포로들이 사망했다. 이들의 주요 사망 원인은 기아였다.[10]
3. 3. 국민연합당 대표 및 외교관 활동 (1934년 ~ 1944년)
1934년 파시키비는 보수 정당인 국민연합당 의장직을 맡아 당을 재건했다.[22] 1936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 주재 핀란드 대사로 임명되었는데,[22] 당시 스웨덴 주재 대사직은 핀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적 지위로 여겨졌다.[22] 독일이 권위주의 체제로 변화하고 폴란드와 에스토니아가 소련의 위협으로 고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제 연맹의 쇠퇴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점점 무관심해졌고, 핀란드를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스웨덴뿐이었다.[22] 라푸아 운동 이후, 파시키비와 만네르하임은 보수 진영에 합류하여 스웨덴의 지원을 얻는 방안을 논의했다.[22]스톡홀름에서 파시키비는 스웨덴의 방위 보장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핀란드와 스웨덴의 방위 연합 또는 방위 동맹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압박했다.[22] 핀란드 내전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스웨덴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의원내각제 도입과 민주주의로 인해 혁명적인 혼란에 휩싸였으며, 사회민주당에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었다.[22] 그러나 핀란드는 내전의 결과로 사회주의가 붕괴되었다.[22] 파시키비가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무렵, 핀란드에서 페르 스빈후뷔가 파시키비가 속한 보수당의 압력을 받아 의원내각제에 반감을 가지고 사회민주당원을 내각에 임명하지 않은 사실이 스웨덴에 알려졌다.[22] 이 소식은 1918년 핀란드의 입헌 군주제, 1932년 라푸아 폭동 등을 통해 파시키비와 그가 관계하는 단체들을 의심하던 스웨덴 여당인 사회민주당에 악영향을 미쳤다.[22]
퀴오스티 칼리오의 대통령 당선으로 상황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22] 칼리오 대통령은 의원내각제를 인정하고 사회민주주의자를 내각에 임명했다.[22] 그러나 핀란드와 스웨덴 사이의 불신은 여전히 강했다.[22] 겨울 전쟁 중 스웨덴은 핀란드 지원을 고려했지만, 그 지원은 너무 늦고 미미했으며 턱없이 부족했다.[22] 스웨덴은 또한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정규군도 파병하지 않았다.[22] 이는 핀란드와 파시키비 모두에게 스톡홀름에서의 그의 노력이 실패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22]
겨울 전쟁 전야, 파시키비는 핀란드 대표로 모스크바에 협상을 위해 갔다.[22] 파시키비는 소련 측의 몇 가지 요구는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22] 전쟁이 발발하자 파시키비는 리스트 뤼티 내각에 정치 고문 겸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다.[22] 리스트 뤼티, 바이노 탄넬과 함께 내각을 지휘하는 삼두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22] 또한, 휴전과 평화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협상을 계속했다.[22] 1940년 모스크바 평화 조약 체결식에 뤼티와 함께 참석하여 겨울 전쟁을 형식적으로나마 종결시켰다.[22] 모스크바에서는, 어쩔 수 없이 헬싱키에서의 비밀 결정과 멀어지고, 독일의 지원으로 소련에 보복하는 움직임에 반대하여 사직했다.[22] 1940년 소련 모스크바 주재 핀란드 대사로 임명되어 겨울 전쟁 평화 협상을 주도했지만, 1941년 핀란드가 나치 독일을 지지하자 사임했다.[22]
4. 총리 및 대통령 재임 (1944년 ~ 1956년)
1944년 11월 17일부터 1946년 3월 9일까지 핀란드의 총리를 역임하면서 핀란드가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46년 3월 11일부터 1956년 3월 1일까지 핀란드의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소련과의 마찰을 피하는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의 정책은 "파시키비 노선"이라고 불리며, 핀란드가 소련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양국이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데 주력했다. 핀란드는 소련과 친선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맺었고, 그 대가로 안정을 얻었다.
1946년 선거와 1950년 선거에서 국민연합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2년 하계 올림픽(헬싱키 개최) 개막식을 열었으며, 1956년에는 소련이 임차했던 포르칼라 해군 기지를 반환받았다.
4. 1. 총리 재임 (1944년 ~ 1946년)
1944년 11월, 만네르헤임은 파시키비를 총리로 임명했다. 핀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자인 위르외 레이노가 내각에 포함되었다. 파시키비의 정책은 지난 25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현실적인" 것을 목표로 했다.[11]파시키비는 1939년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전간기 핀란드의 소련 묘사가 "경솔하게 러시아 혐오적"이었으며, 소련의 공격은 이념적이거나 확장주의적이라기보다는 정당하고 전략적이며 심지어 "방어적"이었다고 결론지었다.[11]
파시키는 전범 재판을 포함한 많은 소련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의 주된 노력은 핀란드가 소련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두 국가 모두 자신감 있고 평화로운 관계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네르헤임이 사임하자 의회는 파시키비를 그의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파시키비의 나이는 75세였다.
4. 2. 대통령 재임 (1946년 ~ 1956년)
1946년 3월 11일부터 1956년 3월 1일까지 핀란드의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소련과의 마찰을 피하는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는 "파시키비 노선"이라고 불리며, 핀란드가 소련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양국이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데 주력했다.[11] 핀란드는 소련과 친선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맺었고, 그 대가로 안정을 얻었다. 이 노선은 핀란드화로도 알려져 있다.1946년 선거와 1950년 선거에서 국민연합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91.91%(159표), 57.00%(171표)로 당선되었다.[12]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파아시키비는 사회민주당, 공산당과도 협력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1948년 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을 때는 헬싱키 방어를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핀란드 역사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 없이는 쿠데타를 원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12]
그의 두 번째 임기에는 국내 정치에 더 집중했다. 조세프 스탈린의 사망은 파아시키비의 업무를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다. 스포츠 애호가였던 그는 1952년 하계 올림픽(헬싱키 개최) 개막식을 열었다.[15]
1956년에는 소련이 임차했던 포르칼라 해군 기지를 반환받았다.[13] 파아시키비는 85세의 나이로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1956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5. 파아시키비 노선 (Paasikivi doctrine)
파아시키비 노선은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핀란드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한 현실주의 외교 정책이었다. 이 노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의 대통령을 역임한 파시키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
파시키비는 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을 거치면서 핀란드가 소련에 맞서기보다는 협력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간기 핀란드의 반소련 정책이 경솔했으며, 소련의 핀란드 침공은 이념적이라기보다는 전략적이고 방어적인 목적이었다고 보았다.[11]
그는 핀란드가 소련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양국 간의 평화로운 관계가 핀란드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전범 재판을 포함한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고, 핀란드-소련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파아시키비 노선은 냉전 시대 핀란드의 중립 외교 정책의 기반이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핀란드화라는 용어로도 알려지게 되었다.[12] 이 정책은 핀란드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소련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13]
1956년 파시키비는 소련이 임차했던 포르칼라(Porkkala) 해군 기지를 반환받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6. 유산 및 평가
파아시키비는 핀란드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어려운 국제 정세 속에서 생존하고 번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현실주의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외교 정책은 핀란드가 냉전 시대에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기반을 마련했다.[11] 핀란드는 소련과 친선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맺었고, 그 대가로 안정을 얻었다. 이것은 "파아시키비 노선"이라 불리며, 핀란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오랫동안 지켜지고 정착되었다. 이는 핀란드화로도 유명하다.
은행 분야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은 파아시키비는 핀란드 마르카 지폐에 초상화가 등장한 세 명의 핀란드 대통령 중 한 명이다. 다른 두 명은 핀란드 초대 대통령인 스톨베리와 파아시키비의 후임 대통령인 우르호 케코넨이다.
7.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비고 |
---|---|---|
안나 포르스만 | 4명 | 1897년 결혼, 1931년 사별 |
알리나 발베 | 없음 | 1934년 재혼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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