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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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세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로, 본관은 개성 왕씨이며, 의조와 원창왕후의 아들이다. 신라 말기에 송악군 성주로 있었으며, 궁예에게 귀부하여 금성태수를 지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세조위무대왕으로 추존되었으며, 창릉에 묻혔다. 출신과 관련하여 당나라 황족의 후손이라는 설과 중국 상인과의 연관성 등 다양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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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세조 - 위숙왕후
위숙왕후는 왕륭의 부인이자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서,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 고려 세조 - 창릉 (고려)
창릉은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과 위숙왕후 한씨의 능으로, 예성강 강가에 위치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존급유적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다. - 897년 사망 - 진성여왕
진성여왕은 신라 경문왕의 딸로, 정강왕 사후 887년에 즉위하여 음란한 행실과 국정 문란, 민란 발생으로 혼란을 겪다가 897년 효공왕에게 양위하고 사망했다. - 897년 사망 - 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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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왕후는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모이자 작제건의 어머니로, 신천 강씨 가문과 고려 왕실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 고려 신화의 인물 - 고려 국조
고려 국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에 대한 논쟁적인 기록으로, 김관의는 국조를 강보육으로 기록했으나 이제현은 이를 반박하고 이색은 강호경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려 세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왕륭 |
작위 (추존) | 고려 국왕 |
시호 (추존) | 원렬민혜위무대왕 (元烈敏惠威武大王) |
묘호 (추존) | 세조 (世祖) |
휘 | 왕륭 (王隆)/왕융 (王隆) |
자 | 문명 (文明) |
호 | 용건 (龍建) |
종교 | 불교 |
생애 | |
재위 기간 | 896년 – 897년 |
출생지 | 미상 (신라 송악) |
사망일 | 897년 5월 (음력) |
사망지 | 신라 금성군 |
묻힌 곳 | 창릉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의조 |
어머니 | 원창왕후 |
배우자 | 위숙왕후 |
자녀 | 태조 (1남) |
친척 | 왕식렴 왕신 왕육 왕희순 왕삼순 왕만세 개성 왕씨 |
경력 | |
관직 | 송악 성주 태봉 금성군 태수 |
2. 생애
세조는 신라 정치가 쇠퇴하여 견훤과 궁예가 서남과 한산주를 차지하고 패권을 다투던 시기 송악군의 성주였다.
896년 궁예가 양길을 정복하고 서북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자, 세조는 궁예에게 귀의하여 금성태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세조는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일 조선, 숙신, 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고, 먼저 신의 아들 왕건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였고, 궁예는 그의 말을 따라 왕건을 송악 성주로 임명하였다.
897년 음력 5월 금성군에서 사망하여 영안성 강변의 석굴에 안장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世祖중국어의 본관은 개성이며, 의조와 신천(信川) 장자의 딸인 원창왕후 저민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설에 의하면 왕륭이 4형제 중 장남이라고도 한다. 초명은 용건(龍建)이고 자는 문명인데, 877년(헌강왕 3년)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선승 도선의 예언으로 아들을 낳으니 곧 왕건이다. 도선의 지시로 이름을 륭(隆)으로 바꾸었다.[5]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으며, 무덤은 창릉(昌陵)이라 하였다. 현종 때인 1027년(현종 18년) 원열(元烈)의 시호가 더해지고, 1253년(고종 40년) 민혜(敏惠)의 시호가 추가되었다.
그의 가계는 중국섬서성경조군 출신인 강숙의 차남의 67대손[9][10][11]인 강호경의 아들인 강충으로부터 시작된다. 강충은 이제건과 강보육을 낳았고, 강보육은 조카인 덕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강진의를 낳았다. 그 강진의와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왕제건이다.[7]
王帝建중국어의 아버지인 중국인은 중국 당나라의 황족이며[12], 『고려사절요』에서는 당 숙종, 『편년강목』에서는 당 선종이라고 한다.[12][13]
중국인이 신라에 왔을 때, 강보육의 딸인 강진의와의 사이에 왕제건이 태어났다.[12] 王帝建중국어은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로 가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를 만나 그녀의 부마가 된다. 『성원록』에 따르면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는 중국평주 출신의 두은점 각간의 딸이라고 한다.[14]
王帝建중국어과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 사이에서 아들 왕륭이 태어났다.[12] 그 왕륭의 아들이 고려의 초대 왕 왕건이다.[9][15]
아버지 | 작제건 |
---|---|
어머니 | 원창왕후[5] |
배우자 | 위숙왕후 한씨[6] |
아들 | 왕건 |
2. 2. 호족 성장
개성을 본관으로 하여, 의조와 신천(信川) 장자의 딸인 원창왕후 저민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설에 의하면 왕륭이 4형제 중 장남이라고도 한다. 초명은 용건(龍建)이고 자는 문명인데, 877년(헌강왕 3년)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선승 도선의 예언으로 아들을 낳으니 곧 왕건이었다. 도선의 지시로 이름을 륭(隆)으로 바꾸었다.신라의 정치가 쇠퇴하여 견훤과 궁예가 서남과 한산주를 차지하고 패권을 다투고 있을 때 송악군의 성주로 있었다.
896년 궁예가 양길을 정복하고 서북의 패권을 차지하자 그에게 귀복하여 금성태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일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고, 먼저 신의 아들 왕건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자 궁예가 그의 말을 따라 왕건을 송악 성주로 임명하였다.
2. 3. 사망과 추존
897년 음력 5월 금성군에서 사망하여 영안성 강변의 석굴에 안장되었다.[1] 훗날 아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고, 무덤은 창릉이라 하였다.[1] 현종 때인 1027년(현종 18년) 원열(元烈)의 시호가 더해졌고, 1253년(고종 40년) 민혜(敏惠)의 시호가 추가되었다.[1]왕릉은 1217년 3월 11일 봉은사로 이장되었다가 1243년 강화 개골동으로 다시 이장되었다.[1]
2. 4. 이장
1217년 3월 11일 고려 봉은사로 이장되었다가 1243년 강화 개골동으로 다시 이장되었다.[1]3. 가계
世祖중국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아버지 | 의조 | ? | |
어머니 | 원창왕후 | ? | |
부인 | 위숙왕후 한씨 | ? | |
아들 | 태조 | 877년 ~ 943년 | 재위: 918년 ~ 943년 |
동생 | 왕평달 | ? | |
조카 | 왕식렴 | ? ~ 949년 | 대광 |
조카 | 왕신 | ? ~ 926년 | 원윤 |
조카 | 왕육 | ? | |
동생 | 개성 왕씨 | ? | |
조카 | 왕희순 | ? | |
조카 | 왕삼순 | ? | 원윤 |
동생 | 개성 왕씨 | ? | |
조카 | 왕만세 | ? | 대광 |
의조는 중국섬서성경조군 출신인 강숙의 차남의 67대손[9][10][11]인 강호경의 아들인 강충의 아들이다. 강충은 이제건과 강보육을 낳았다. 강보육은 조카인 덕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강진의를 낳았고, 그 강진의와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의조이다[7]。의조의 아버지인 중국인은 중국 당나라의 황족이며[12], 『고려사절요』에서는 당 숙종, 『편년강목』에서는 당 선종이라고 한다[12][13]。 아버지인 중국인이 신라에 왔을 때, 강보육의 딸인 강진의와의 사이에 의조가 태어났다[12]。의조는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로 가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를 만나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의 부마가 된다. 『성원록』에 따르면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는 중국평주 출신의 두은점 각간의 딸이라고 한다[14]。그리고 의조와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 사이에서 아들 왕륭(훗날 세조)이 태어난다[12]。
4. 출신 논란
고려 세조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미야와키 준코는 918년 고려 건국 당시, 옛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지만, 왕건은 만주인의 조상과 연결되는 인물이며 조선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7]
4. 1. 한국 측 기록
중국 섬서성 경조군 출신 강숙의 차남의 67대손[9][10][11]인 강호경의 아들 강충은 이제건과 강보육을 낳았다. 강보육은 조카 덕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강진의를 낳았고, 강진의와 중국인 사이에서 왕제건이 태어났다.[7] 왕제건의 아버지는 중국 당나라 황족으로,[12] 『고려사절요』에서는 당 숙종, 『편년강목』에서는 당 선종이라고 한다.[12][13] 중국인 아버지가 신라에 왔을 때 강보육의 딸 강진의와 관계하여 왕제건이 태어났다.[12] 왕제건은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로 가려고 황해를 건너던 중,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를 만나 그녀의 부마가 된다. 『성원록』에 따르면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는 중국 평주 출신 두은점 각간의 딸이다.[14] 왕제건과 서해 용왕의 딸 용녀 사이에서 아들 왕륭이 태어났고,[12] 왕륭의 아들이 고려 초대 왕 왕건이다.[9][15]최완수(간송미술관 연구실장)는 왕건의 조상 일족이 송악산(현재 개성시) 일대의 상업 세력인 호상이었으며, 중국 상인과 직접 교역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고 주장한다. 당나라 황족이라는 왕제건의 아버지는 사실 호상 일족에게 상거래를 위해 드나들던 중국 상인이었고, 그와 강진의 사이에서 왕제건이 탄생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왕제건의 아버지가 중국 상인임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숙종이라고 높여 말하지만, 고려 측의 추측일 가능성이 있다. 왕제건이 강보육의 집에 한 달여 동안 머물다 떠난 중국 상인 청년의 아들인 것은 틀림없으며, 이는 호상이었던 일족에게 많은 중국 상인이 상업 거래를 위해 드나들었던 점, 왕제건이 16세 때 아버지의 증거물인 활과 화살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으러 상선으로 당나라에 가려 했다는 점에서 재해석에 무리가 없다고 말한다.[16]
고운기(연세대학교)는 "작제건은 당나라 황족이라는 인물이 신라에 와서 이 땅의 여자 진의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작제건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도중에 서해 용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용건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왕건의 아버지이다. '용'이 중국계 상징이라면 왕건의 가계는 거의 중국계이고, 증조부부터 따져봐도 왕건은 틀림없이 중국계 3세"라고 말한다.[12]
야하타 가즈오는 "보육은 형의 딸 덕주를 아내로 삼아 딸 진의를 낳았지만, 진의는 신분을 알 수 없는 중국인 상인과 맺어져 작제건(의조)을 낳았다." "부계 혈통에서 중국인의 피를 물려받은 인물임은 확실합니다"라고 말한다.[7]
4. 2. 중국 및 기타 국가 기록
중국 섬서성 경조군 출신 강숙의 차남의 67대손[9][10][11]인 강호경의 아들 강충은 이제건과 강보육을 낳았다. 강보육은 조카 덕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강진의를 낳았고, 강진의와 중국인 사이에서 왕제건이 태어났다.[7] 왕제건의 아버지는 당나라 황족으로,[12] 『고려사절요』에서는 당 숙종, 『편년강목』에서는 당 선종이라고 한다.[12][13] 강보육의 딸 강진의와 당나라 황족 사이에서 왕제건이 태어났다.[12]왕제건은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로 가던 중 황해에서 서해 용왕의 딸 용녀(후의 원창왕후)를 만나 부마가 된다. 『성원록』에 따르면 용녀는 중국 평주 출신 두은점 각간의 딸이다.[14] 왕제건과 용녀 사이에서 아들 왕륭이 태어났고,[12] 왕륭의 아들이 고려 초대 왕 왕건이다.[9][15]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왕건의 조상이 송악산(현재 개성시) 일대 상업 세력인 호상이었으며, 중국 상인과 직접 교역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고 주장한다. 왕제건의 아버지는 상거래를 위해 드나들던 중국 상인이었고, 강진의와 중국 상인 사이에서 왕제건이 태어났다고 해석한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왕제건의 아버지를 숙종이라고 높여 말하지만, 고려 측 추측일 가능성이 있으며, 왕제건은 강보육의 집에 한 달여 동안 머물다 떠난 중국 상인의 아들이었다고 한다.[16]
연세대학교 고운기는 작제건이 당나라 황족으로 신라에 와서 진의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말한다.[12]
미야와키 준코는 918년 고려 건국 당시, 옛 고구려 후예를 자처했지만, 왕건은 만주인 조상과 연결되는 인물이며 조선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7]
야하타 가즈오는 보육이 형의 딸 덕주를 아내로 삼아 딸 진의를 낳았지만, 진의는 신분을 알 수 없는 중국 상인과 맺어져 작제건(의조)을 낳았고, 부계 혈통에서 중국인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말한다.[7]
5. 대중 문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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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독남인 왕건(王建)이 877년생이니 840년대~850년대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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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몽부인(夢夫人)성씨는 한씨(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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