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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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소는 삼국 시대 동오의 인물로, 동오의 두 번째 재상인 고옹의 장남이다. 그는 오군 출신으로, 육적과 함께 어려서부터 명성이 높았으며, 육손, 장돈, 복정보다 낫다는 평을 받았다. 27세에 예장 태수가 되어, 인재를 발탁하고 교육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31세의 젊은 나이에 재임 중 사망했다. 방통은 그를 "느린 걸음이나 짐을 잘 지는 소"에 비유했고, 주소는 그를 보즐, 제갈근 등과 함께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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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군 고씨 - 고옹
채옹의 제자이자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은 고옹은 손권 휘하에서 회계태수 대행, 좌사마, 상서령 등을 역임하고 승상까지 오른 오나라의 정치가이다. - 오군 고씨 - 고담 (삼국지)
고담은 삼국 시대 동오의 인물로, 승상 고옹의 손자이자 손권의 사위이며 손등을 보좌하다가 손패와 손화의 후계 다툼에 연루되어 교주로 유배된 인물이다. - 동오 사람 - 시삭
시삭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위사로, 손침의 모반을 고발하고 제거 계획에 참여했으며, 손침 제거 후 그의 일족 처형에 협력했고 그의 아들 시참은 진나라의 도교 도사였다. - 동오 사람 - 사광 (삼국지)
사광은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사촌 사휘 등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여대의 부탁으로 그들을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나, 사휘 등은 처형되고 사광은 관직을 박탈당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고소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고소 |
원어 이름 | 顧邵 |
자 | 효칙 (孝則, Hyojeuk) |
출생 | 188년 또는 185년경 |
사망 | 218년 또는 215년경 (향년 30세) |
출신지 | 양주 오군 오현 |
부친 | 고옹 |
모친 | 육강의 딸 |
배우자 | 손책의 딸 육준의 딸 |
자녀 | 고담 고승 |
친척 | 육기 (외삼촌) 고유 (형) 고지 (형) |
관직 정보 | |
직책 | 예장태수 (豫章太守, Yejang Taesu) |
임기 시작 | 불명 |
임기 종료 | 불명 |
군주 | 헌제 |
섬긴 세력 | |
소속 세력 | 손권 |
2. 가문 배경
고소는 오현 오군(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출신으로, 삼국지 시대 동오의 두 번째 재상이었던 고옹의 장남이다.[2] 고씨 가문은 당시 오군과 강동 지역의 4대 명문가 중 하나였다.
2. 1. 오군 4대 성씨
고소는 오현 오군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출신으로, 삼국지 시대 동오의 두 번째 재상이었던 고옹의 장남이다.[2]고씨 가문은 당시 오군과 강동 지역의 4대 명문가 중 하나였다.
오군 4대 성씨 | 강동 4대 성씨 | 각 가문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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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顧), 육(陸), 주(朱), 장(張) | 고(顧), 육(陸), 우(虞), 위(魏) | 고씨 가문: 고옹, 고소, 고담 육씨 가문: 육손, 육기, 육개 주씨 가문: 주환, 주거 장씨 가문: 장온 우씨 가문: 우번 위씨 가문: 위등 |
2. 2. 강동 4대 성씨
고소의 본관은 오현, 오군으로, 현재의 장쑤성 쑤저우시이다. 그는 삼국지 시대 동오의 두 번째 재상을 지낸 고옹의 장남이었다.[2]그가 속한 고씨 가문은 당시 오군과 강동 지역의 4대 명문가 중 하나였다. 오군의 4대 명문가는 고(顧), 육(陸), 주(朱), 장(張)씨 가문이었고, 강동 지역의 4대 명문가는 고(顧), 육(陸), 우(虞), 위(魏)씨 가문이었다.
3. 초기 생애
고소는 역사에 정통했으며, 사람 간의 도덕적 의무에 큰 관심을 가졌다. 젊은 시절 외삼촌인 육기처럼 명성이 높았고, 오군의 육손, 장돈(張敦), 복정(卜靜) 등 명문가 자제들보다 더 높은 품격으로 여겨졌다.[3] 장돈은 웅변술과 덕망 있는 인품으로 알려졌으며, 손권 밑에서 보좌관과 기록관으로 일했고, 후에 해혼현(현재의 중국 장시성 난창)의 현령으로 승진했으나 31세에 사망했다. 복정은 산현(현재의 중국 저장성 성저우시)의 현령으로 재직했다.[4] 고소의 명성과 인기로 인해 오군과 양주 전역에서 그와 친분을 맺거나 관계를 형성하려는 방문객들이 많이 찾아왔다.[5]
소년 시절부터 박식함으로 알려져, 어머니의 남동생인 육적과 함께 칭송받았으며, 육손, 장돈, 복정은 고소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고소와 친교를 맺기 위해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명성은 멀리까지 닿았다. 손권은 그 명성을 듣고 손책의 딸을 고소에게 시집보냈다.
건안 15년 (210년), 방통은 주유의 관을 전달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오나라로 향했다. 고소는 육적, 전종 등과 함께 방통과 친교를 맺었고, 방통으로부터 "노우능부중치원(발은 느리지만 힘이 있는 소)"이라고 평가받았다.
같은 해, 27세에 출사하여, 손린의 후임으로 예장 태수가 되었다. 누습을 폐지하고, 뛰어난 인재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발탁하는 등 뛰어난 치적을 올렸다. 정서, 장병, 오찬, 은례를 발탁하여 손권에게 추천했다.
건안 19년 (214년), 태수 재임 중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천의 주소는 보즐, 제갈근, 엄준, 장승, 고소의 인물을 비교하여 칭찬하는 서물을 남겼다.
3. 1. 혼인 관계
고소는 손책의 딸과 결혼했다. 손책은 후한 말기 강남 지역을 다스린 군벌이자, 훗날 동오의 초대 황제가 되는 손권의 형이다.[6] 그는 아마도 육손과 육모의 누이와도 결혼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에는 고소의 차남 고승이 육모의 외조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7]4. 방통과의 만남
210년 주유가 죽은 후, 방통이 그 상구를 운구하여 오나라에 왔다가, 떠나는 길에 창문에서 육적, 고소, 전종을 만났다. 이들은 방통과 깊은 친교를 맺었다.[26]
4. 1. 방통의 평가
주유가 죽은 후, 방통이 그 상구를 운구하여 오나라에 왔다가, 떠나는 길에 창문에서 육적, 고소, 전종을 만나 세 사람을 평하였다. 고소에 대해서는 “고자(고소)는 굼뜬 소라 이를 만하니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26] 고소는 방통의 숙소로 찾아가 방통에게 자신과 방통 둘 중에 누가 나은지를 물었는데, 방통은 “세속을 도야하고 인물을 평하는 것은 당신이 낫지만,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기의 요최를 파악하는 데에는 자신이 더 낫습니다.”하고 대답하니, 고소는 이에 만족하였다.[27]210년 주유가 사망하자[26] 방통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군으로 갔다. 방통은 오군에서 유명했기에 그가 떠나려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러 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육적, 고소, 전종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차례로 그들을 평가했다. 방통은 고소를 "신체적으로 약하지만 먼 거리를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소"라고 묘사했다. 고소는 나중에 방통에게 "당신도 인물을 잘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둘 중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방통은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성격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당신만큼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전략에 관해서는 제가 당신보다 하루 앞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소는 방통의 말에 동의했고 그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건안 15년 (210년), 방통은 주유의 관을 전달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오나라로 향했다. 고소는 육적, 전종 등과 함께 방통과 친교를 맺었고, 방통으로부터 "노우능부중치원(발은 느리지만 힘이 있는 소)"이라고 평가받았다.
5. 관료 생활
고소는 소년 시절부터 박식함으로 알려져 어머니의 남동생인 육적과 함께 칭송받았으며, 육손, 장돈, 복정은 고소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고소와 친교를 맺기 위해 찾아왔고, 명성은 멀리까지 닿았다. 손권은 그 명성을 듣고 손책의 딸을 고소에게 시집보냈다.
건안 15년 (210년), 방통은 주유의 관을 전달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오나라로 향했다. 고소는 육적, 전종 등과 함께 방통과 친교를 맺었고, 방통으로부터 "느리지만 힘이 있는 소"라고 평가받았다. 같은 해, 27세에 출사하여 손린의 후임으로 예장 태수가 되었다. 고소는 누습을 폐지하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인재를 발탁하는 등 뛰어난 치적을 올렸다. 영천의 주소는 보즐, 제갈근, 엄준, 장승과 고소의 인물을 비교하여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5. 1. 예장 태수 시절 업적
손권은 손책의 딸을 고소에게 시집보냈다. 고소는 27세에 예장 태수가 되었다.[25] 난창시(南昌市), 장시성 일대의 예장군 태수로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0] 임지에 이르러서는 옛 현자인 서유자(徐儒子)의 묘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 후손을 우대했으며, 음란한 제사와 예에 맞지 않는 제사를 금했다. 낮은 관리 중에 자질이 빼어난 사람이 있으면 학문을 하게 하고, 그 중에서 앞선 사람을 뽑아 중요한 직책에 두었다. 선행을 들어서 가르쳤으므로, 교화는 널리 퍼졌다.[25]고소는 예장군에서 교육과 유교 문화를 강화하기 위해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였다.[11] 그가 발굴하고 승진시킨 인재들로는 정서(丁諝), 장병(張秉), 오찬, 은리(殷禮)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다.[12] 이들은 나중에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는데, 정서는 고위 군인이 되었고, 장병과 은리는 군의 태수가 되었으며, 오찬은 태자(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고소는 뛰어난 인물 판단력을 보여 칭찬을 받았다.[13]
고소는 친구와 부하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장병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고소는 상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또 다른 때는, 그가 오군(吳郡)을 떠나 예장군에서 취임할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당시 장병은 병을 앓고 있어서 고소를 배웅할 수 없었다. 고소는 그를 배웅하러 온 사람들에게 "장병이 아프니, 나를 전송할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내가 대신 그에게 가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곧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14]
고소는 예장군의 태수로 5년간 재직하다가 임지에서 사망했다.[15]
5. 2. 인재 발탁
고소는 경전을 많이 읽고 인물 품평을 좋아했다. 어릴 적 육적과 함께 명성을 얻었으며, 육손, 장돈, 복정도 고소에 미치지 못했다. 고소는 전당 사람으로 병졸인 정서, 양서 땅의 서민인 장병,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킨 오정 사람 오찬과 운양 사람 은례를 발탁하여 친하게 지내고, 이들의 영예를 세웠다.[25] 이들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고소의 안목 덕분에 훗날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12] 정서는 고위 군인이 되었고, 장병과 은리는 군의 태수가 되었으며, 오찬은 태자(太子)의 스승이 되었다.[13]고소가 예장 태수가 되었을 때, 전송하러 나온 사람이 수백 명이었는데, 마침 장병은 병이 들어 전송하지 못했다. 고소는 찾아온 수백 명에게 양해를 구하며, 직접 장병을 찾아가 이별을 하였다.[25]
6. 죽음
건안 19년(214년), 예장 태수 재임 중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5]
7. 평가
고소는 경전을 많이 읽었으며, 인물 품평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육적과 함께 명성이 있었고, 육손, 장돈, 복정은 고소에 미치지 못했다. 먼 곳에서도 고소를 찾아와 의론을 하거나 두터운 정을 맺었으므로, 명성은 사방으로 퍼져 칭찬을 받았다. 전당 사람 정서, 양서 사람 장병, 오정 사람 오찬, 운양 사람 은례를 발탁하여 친하게 지내며 이들의 영예를 세웠다.[25]
주유가 죽은 후, 방통이 육적, 고소, 전종을 만나 세 사람을 평했는데, 고소에 대해서는 “굼뜬 소라 이를 만하니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방통은 고소에게 자신과 둘 중에 누가 나은지를 물었는데, 방통은 “세속을 도야하고 인물을 평하는 것은 당신이 낫지만,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기의 요최를 파악하는 데에는 자신이 더 낫습니다.”하고 대답하니, 고소는 이에 만족하였다.[27]
영천 사람 주소는 보즐과 엄준을 칭찬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출한 사람을 논한다면 고예장(고소), 제갈사군(제갈근), 보승상(보즐), 엄위위(엄준), 장분위(장승) 같이 완미함을 이룬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진수는 “장승과 고소는 마음을 비운 인격자로서 인물을 좋아하고 숭상했다.”고 평했다.
소년 시절부터 박식함으로 알려져 육적과 함께 칭송받았으며, 육손, 장돈, 복정은 고소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방통은 주유의 관을 전달하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오나라로 왔을 때 고소는 육적, 전종 등과 함께 방통과 친교를 맺었고, 방통으로부터 "노우능부중치원(발은 느리지만 힘이 있는 소)"이라고 평가받았다.
8. 가계
- -|]]
- 아버지 : 고옹
- 아들 : 고담, 고승
9. 일화
고소는 예장군(豫章郡) 태수로 재직하던 시절, 학교를 세우고 유교 문화를 장려하는 데 힘썼으며, 백성들에게 해롭다고 여겨지는 미신적인 사찰들을 철거했다.[18] 여산의 묘를 철거하려 할 때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고소는 이를 강행했다. 어느 날 밤, 여산군이라 칭하는 신비로운 손님이 고소를 찾아왔다.[18] 고소는 그와 춘추좌씨전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귀신은 고소의 침착함에 감복하여 화해를 청하며 묘를 복원해달라고 부탁했다.[18] 고소가 이를 거절하자 귀신은 3년 안에 복수하겠다고 예고하며 사라졌다. 실제로 3년 후, 고소는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18] 꿈속에서 다시 나타난 여산군은 절의 복원을 권했지만, 고소는 "사도는 정도를 이길 수 없다"라며 끝까지 거절했다.[18]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2
[2]
서적
Sanguozhi vol. 52
[3]
서적
Sanguozhi vol. 52
[4]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5]
서적
Sanguozhi vol. 52
[6]
서적
Sanguozhi vol. 52
[7]
서적
Sanguozhi vol. 52
[8]
서적
Sanguozhi vol. 37
[9]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10]
서적
Sanguozhi vol. 52
[11]
서적
Sanguozhi vol. 52
[12]
서적
Sanguozhi vol. 52
[13]
서적
Sanguozhi vol. 52
[14]
서적
Sanguozhi vol. 52
[15]
서적
Sanguozhi vol. 52
[16]
문서
顧劭
[17]
서적
太平広記巻293、雑鬼神志怪第八話に類話
[18]
논문
富永一登『魯迅輯『古小説鈎沈』校釈-『幽明録』(八)』
[19]
서적
三国志巻52裴注に呉書を引いて曰く「雍母弟徽」とある
[20]
서적
三国志巻52裴注に呉書を引いて曰く「雍族人悌」とある
[21]
서적
晋書巻57に「秘子参」とある
[22]
서적
晋書巻57に「参弟壽」、晋書巻76に「衆兄壽」とある
[23]
서적
晋書巻76に「驃騎将軍栄之族弟也」とある
[24]
서적
晋書巻83に「侍中衆之族子也」とある
[25]
서적
삼국지
[26]
서적
삼국지
[27]
서적
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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