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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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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준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젊어서 학문에 힘써 시경, 삼례에 능통했다. 장소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겨 기도위, 종사중랑을 거쳐 위위, 상서령을 역임했다. 촉한에 사신으로 방문했고, 제갈량과 교류했다. 효경전과 조수론을 저술했으며, 배현, 장승과 함께 관중과 자로에 대해 논했다. 정병, 감택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았으며, 친구 유영을 위해 손권에게 사죄하여 쫓겨났으나 유영을 구제하는 등 인품이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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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엄준
원어 이름嚴畯
만재 (曼才, Mancai)
출생지쉬저우펑청국
사망 연도미상
직업관료
관직 정보
직책상서령 (尚書令)
임기 시작미상
임기 종료미상
군주손권
직책 (2)위위 (衞尉)
임기 시작 (2)229년
임기 종료 (2)미상
자녀엄개 (嚴凱, Yan Kai)
엄쌍 (嚴雙, Yan Shuang)

2. 생애

젊어서 학문을 즐겨 《시경》과 삼례(三禮)에 능했다.[14]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하여 제갈근, 보즐과 친교를 맺고, 장소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겨 기도위와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14]

217년, 횡강장군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엄준에게 노숙을 대신하여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육구에 주둔하게 하려 했다. 엄준은 자신이 군사적 재능이 없다며 강하게 사양했고, 감정이 격해져 눈물까지 흘렸다.[14] 손권이 시험 삼아 말을 타게 하자, 엄준은 말에 오르다 떨어졌다.[15] 결국 손권은 엄준의 뜻을 받아들였고, 세상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을 칭찬했다.[14]

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엄준을 위위에 임명하고 촉한에 사자로 보냈다. 제갈량은 이때 엄준을 만나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14]

손권이 어렸을 적 외운 책을 암송해 보라고 하자, 엄준은 《효경》의 '중니거(仲尼居)'를 외웠다. 그러자 장소는 엄준을 “비루한 서생”이라고 평가하고, 자신은 '군자지자 상(君子之自)'을 외워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16]

엄준의 친구 유영이 병을 핑계로 손권의 초빙에 불응하다 들통나자, 엄준은 손권에게 사죄했다. 손권은 분노하여 엄준을 쫓아냈지만, 유영은 죄를 면했다.[14] 훗날 엄준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가 향년 78세로 사망했다.[14][17][18]

2. 1. 초기 생애와 학문

엄준은 장쑤성 쉬저우 팽성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매우 학구적이었으며 유교 경전에 정통했다.[1] 특히 『시경』, 『서경』, 삼례(『의례』, 『주례』, 『예기』)에 통달했으며, 『설문해자』를 좋아했다. 후한 말 혼란기에 강남 지역으로 이주하여 제갈근, 부지 등과 교류했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헌신적인 인물로 알려졌다.[1]

3세기경, 장소의 천거로 손권에게 등용되어 기병교위(騎都尉)와 종사중랑(從事中郎)에 임명되었다.[2] 217년 노숙 사후 후임으로 거론되었으나, 군사적 능력이 부족하다며 스스로 사양했다. 손권은 그의 솔직함을 높이 평가했다.[3]

엄준은 학문적 소양뿐만 아니라 성품도 훌륭했다. 그는 관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선물과 보상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4] 재산을 축적하지 않아 집안은 늘 가난했다.

엄준은 『효경전』(孝經傳)과 『조수론』(潮水論)을 저술했다.[10] 또한 관중과 계로에 대한 배현, 장승과의 논의는 널리 알려졌다.[10]

2. 2. 손권과의 만남과 관직 생활

젊어서 학문을 즐겨, 《시경》·삼례에 능했다.[14]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하여 제갈근·보즐과 친교를 맺었다.[14] 장소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겨 기도위·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14]

217년, 횡강장군(橫江將軍)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엄준으로 노숙을 대신하게 하여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육구에 주둔하게 했고, 중론에도 합치되었으나, 엄준 자신은 군재가 없다 하여 강하게 고사하였고, 감정이 격해져 울었다.[14] 손권이 또 엄준이 말을 탈 수 있는지를 시험했는데, 엄준은 말에 오르다 떨어졌다.[15]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고, 세간에서는 재능에 따라 겸양할 줄 안다며 좋게 여겼다.[14]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위위에 임명되었고, 촉한에 사자로 갔다. 제갈량은 이때 엄준을 만나고 좋아했다.[14]

손권에게 어렸을 적 외운 책을 암송하고 있는지 질문을 받자 《효경》의 중니거를 외웠는데, 장소에게 “비루한 서생”이라는 평가를 들었으며, 장소는 바로 군자지자 상을 외우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16]

엄준의 친구 유영이 칭병하고 손권의 초빙에 불응하다가 들통나자 엄준은 손권에게 사죄했고, 손권의 분노로 인해 엄준은 쫓겨났으나 유영은 죄를 면했다.[14] 훗날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가 죽었다.[14]

2. 3. 죽음

엄준의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8] ''오서''(吳書; 《오의 기록》)에는 그가 78세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후에는 두 아들, 엄개(嚴凱)와 엄상(嚴爽)이 남았다. 엄개 또한 동오 정부에서 일했으며, 최고 임명은 승평소부(升平少府)였다.[9]

3. 저술 활동

엄준은 《효경전》과 《조수론》을 저술했고, 배현, 장승과 함께 관중자로에 대해 토론했다.[14] 또한,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힘써 『시경』, 『서경』, 삼례(『의례』, 『주례』, 『예기』)에 통달했으며, 『설문해자』를 좋아했다.[10]

엄준의 저술과 관련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술내용
《효경전》(孝經傳)유교 경전인 효경에 대한 주석서
《조수론》(潮水論)조수 현상에 대한 논의
관중자로에 대한 토론배현, 장승과 함께 역사적 인물인 관중자로에 대해 토론한 내용으로, 널리 세상에 전해졌다.[10]


4. 평가

진수정병, 감택과 함께 엄준을 “한 시대의 유림”이라 평가했고, 관직에서 쫓겨나면서도 유영을 구제한 것을 매우 칭찬했다.[14] 주소제갈근, 보즐, 엄준, 장승을 칭찬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히 주장하는 것”, “명리를 다투는 것”, “붕당을 중시하는 것”, “신속하게 하려고 힘쓰는 것” 네 가지 악덕을 없애는 데 이들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했다. 또 제갈근, 엄준, 보즐 세 사람의 우정이 끝내 상하지 않았음을 칭찬했으며, 엄준에 대해서는 노숙의 뒤를 잇는 것을 사양한 것을 칭찬했고, 훗날 구경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그 영예와 봉록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했다.[16]

손등은 죽기 전 남긴 상소에서 제갈근, 보즐, 주연, 전종, 주거, 여대, 오찬, 감택, 장승, 손이와 함께 나라를 위해 충성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 통달한 인물로 엄준을 언급했다.[19]

엄준은 성실하고 순박한 인품으로, 타인에게 진심으로 가르치고 이끌었으며,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돕는 데 힘썼다. 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친척이나 지인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에, 집안은 늘 가난했다.

엄준은 ''효경전''과 ''조수론''을 저술했으며, 배현과 장승과 함께 관중자로에 대해 논한 내용은 널리 세상에 전해졌다.

진수는 엄준을 "정병감택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자신의 영달을 희생하여 친구를 구했다"고 평했다. 영천주소는 자신의 저서에서, 고소, 제갈근, 보즐, 엄준, 장승의 인물을 비교하며, 각 인물을 칭찬했다.

5. 가족 관계

엄준에게는 엄개(嚴凱)와 엄상(嚴爽) 두 아들이 있었다.[17] 엄개는 오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승평소부에 이르렀다.[17]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3
[2] 서적 Zhili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3
[3] 서적 Sanguozhi vol. 53
[4] 서적 Sanguozhi vol. 53
[5] 서적 Sanguozhi vol. 52
[6] 서적 Sanguozhi vol. 52
[7] 서적 Sanguozhi vol. 53
[8] 서적 Sanguozhi vol. 53
[9]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3
[10] 서적 Sanguozhi vol. 53
[11] 서적 呉書
[12] 서적 三国志』呉志 厳畯伝注引『志林
[13] 서적 呉書
[14] 서적 삼국지
[15] 서적 지림
[16] 서적 상게서
[17] 서적 오서
[18] 문서 손등 (동오)
[19] 서적 상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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