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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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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영근은 1854년 상민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장단 군수와 절도사까지 승진한 인물이다. 그는 황국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나 개화파의 의견에 매료되어 관민공동회 회장이 되었다. 1899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우범선을 살해하고 자수했으며,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1909년 귀국했다. 이후 고종의 능인 홍릉을 참배하며 생활하다가 능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파면되었으며, 1923년 병사했다. 그는 개화 사상가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민권운동과 계몽 강연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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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
기본 정보
한글 이름고영근
한자 이름高永根
로마자 표기Go Yeong-geun
참고 사항
출처 필요2012년 1월 3일

2. 생애

1854년 상민 출신으로 태어나, 민영익의 가복(청지기)으로 왕궁에 출입하며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장단군수와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종2품)까지 승진했다.[1][2][3]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중추원 의관, 황국협회 부회장을 거쳐 개화파 단체 관민공동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4][5][6]

1899년 폭탄 테러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 1903년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을 살해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과 순종의 노력으로 감형받고 1909년 귀국했다.[7][2][8][9] 귀국 후 고종에게 어하사금을 하사받았다.[10][8]

1910년 한국 병합 이후 1919년 고종이 붕어하자, 민씨 일족의 총지배인격으로서 홍릉에 참배하는 생활을 하였고, 1921년 능참봉(종9품)에 임명되었다.[12] 1922년 고종의 능비를 세운 후 참봉직에서 파면되었으나, 조선총독부3·1 운동 이후의 민심을 고려하여 능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8][12] 1923년 홍릉 옆 초가에서 병사했다.[12][8]

2. 1. 출생과 초기 활동

1854년 상민 출신으로, 민영익의 가복(청지기)으로 왕궁에 출입했다.[1]。 후에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장단군수와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종2품)까지 승진했다.[2][3]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립된 준입법기관 중추원에 1898년 7월부터 정2품 일등 의관으로 소속되었으며,[4] 1897년 대한제국 황제를 선포한 고종이 주도한 수구파 어용 단체 황국협회의 부회장에 1898년 6월 30일 취임한다.[5]。 황국협회는 독립협회 계열 개화파 단체인 만민공동회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되었지만, 감시 대상이었던 개화파의 의견에 점차 매료되어, 결국 개화파 단체 관민공동회 회장이 되어 고종을 배신하게 되었다.[6]

2. 2. 우범선 살해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 고영근은 일본으로 건너가 윤효정과 밀담을 나누었고,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현 구레 시에서 우범선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칼로 살해하였다.[2]

고영근은 범행 후 바로 경찰에 자수하였고,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고종의 선처 부탁으로 8년 복역 후 1911년 출소했다.[2]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1903년 10월 28일 고영근은 구레의 우범선 집에 나타나 자신이 자객이 아님을 설득했고, 우범선은 고영근을 3일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며 집 수색도 도왔다. 그 사이 고영근은 오카야마에 있던 노윤명에게 연락했고, 11월 13일 노윤명이 구레에 도착했다. 다음 날 저녁, 고영근은 우범선을 자신의 거처로 유인해 단도로 찔렀고, 노윤명도 망치로 우범선의 머리를 쳐서 우범선은 즉사했다.[2] 고영근은 살해 후 한국 정부에 보낼 편지를 들고 노윤명과 함께 와쇼마치 파출소에 자수했으며, 경찰 조사에서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며,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했다.[8]

이후 히로시마 감옥으로 이송된 고영근은 12월 24일 히로시마 지방 재판소 공판에서 "살인죄로 기소되는 것은 유감이며, '賊魁斬殺復國母讐' 여덟 글자가 적히면 본망이다. 노윤명은 공모자가 아니라 종범이며 단지 방조했을 뿐이다"라고 진술했다.[8] 변호인은 두 사람 모두 의사이며 일본에서도 충신 효행의 살인죄는 형량을 경감하는 판례가 있다고 주장했고, 고종은 임권조 재한 일본 공사에게 선처를 의뢰했다. 12월 26일 히로시마 지방 재판소는 고영근에게 사형, 노윤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고무라 주타로외무대신은 임권조에게 고종이 천황에게 특사를 보내 감형, 사면을 탄원하도록 전문을 보냈다. 1904년 2월 4일, 히로시마 고등법원 2심 재판에서 고영근은 무기징역, 노윤명은 징역 12년으로 감형되었다.[8] 순종은 고영근 특사를 요구했고,[9] 3월,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 특사에게 고영근의 한국 송환을 요청, 러일 전쟁 후 고영근은 감형되어 1909년 5년 형기를 마치고 귀국했다.[8][2] 귀국 후 고종은 고영근에게 어하사금을 하사했다.[10][8]

2. 2. 1. 우범선 암살 사건 관련 의혹 및 논란

을미사변 때 훈련대 병력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동참했던 당시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은 이후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 후 고영근은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우연찮게도 대한제국 조선인 망명객 출신인 윤효정과 만나 명성황후 암살 사건 관련 담화 등을 밀담하였고, 1903년 11월 24일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에 소재했던 자신의 객저(집)로 우범선을 초대한 후 칼로 목과 턱을 찔러 우범선을 살해하였다.[1]

고영근은 우범선 사살 후 바로 경찰에 자수하였다.[1] 이 일로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선처 부탁으로 8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1911년 출소했다.[1]

1899년 1월 8일에 고영근은 친구인 윤치호에게 함경남도 원산부윤으로 임명되리라는 설이 돌았다.[1] 1월 16일 오후 7시경 윤치호는 은밀히 일본인 집에 피신한 고영근의 행방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1] 윤치호를 만났던 고영근은 그에게 원산부윤직에 나갈 것이냐고 물었고, 윤치호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부대신으로 승진한 것은 만민공동회 덕택이며, 윤웅렬이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해산에 가담했던 척신파 대신 민영기와의 친분관계를 지적하기도 했다.[1] 윤치호는 고영근의 언급에 불쾌했으나 논쟁을 하면 감정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 보고 언급을 회피하고 헤어졌다.[1] 1911년 한국으로 돌아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능참봉이 되어 무덤을 지켰었다.[1]

2. 3. 홍유릉 능참봉과 최후

1910년 한국 병합 이후, 1919년 덕수궁 이태왕이 된 고종이 붕어하자, 고영근은 민씨 일족의 종가인 민정식가의 총지배인격으로서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에 참배하는 생활을 했다.[12] 1921년에는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종9품)에 임명되었다. 1922년, 고종 붕어 후 4년 가까이 천에 싸인 채 홍릉 옆에 방치되어 있던 "대한 고종 대황제 홍릉"이라고 새겨진 능비를 재계 후, 인부를 동원하여 비각 안에 건립했다.[8] "대한"이라는 국호와 "황제"라는 칭호가 문제가 되어, "이태왕"으로 하거나[3] "전"을 붙이지 않으면[12] 비를 세울 수 없었다고 한다. 건립 직후 고영근은 병합 후 이왕(순종)의 거처가 된 창덕궁에 "대사를 마쳤다, 우리 선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라는 상소문을 들고 달려가 처벌을 기다렸다. 이왕직은 심정은 절실히 이해했지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어 고영근을 참봉직에서 파면했다.[12]

조선총독부와 일본 궁내성은 능비 문제에 대해 협의하여, 1923년 1월 고영근이 세운 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3·1 운동 직후이기도 해서, 능비 문제로 조선인을 다시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8]

파면 후, 고영근은 홍릉 옆에 초가를 짓고 살았지만, 1923년에 병사했다. 1907년부터 1920년까지 창덕궁에서 근무한 권등사로개[11]는 이 굳센 선비를 의기 있게 여겼던 듯, 그의 회고록 『이왕궁비사』에는 "고로 고령은 참봉의 직에서 물러났지만, 초가를 금곡의 송백 사이에 맺고 무관의 참봉으로서 만년을 보내다가,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나 그 유해를 태왕의 능 옆에 묻었다"라고 적혀 있다.[12][8]

3. 개화 사상가로서의 활동

고영근은 개화 사상가로, 무인이었지만 지식이 해박하여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며 민권 운동과 계몽 강연 활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윤치호의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참조

[1] 뉴스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 http://shindonga.don[...] 東亜日報 2009-09-01
[2] 뉴스 <명성황후 원수 갚은 자객 고영근> 오디오듣기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출간 http://www.yonhapnew[...] 連合ニュース 2009-09-02
[3] 뉴스 【噴水台】御陵の番人、高永根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9-03-04
[4] 간행물 中樞院來文1898年7月8日 http://e-kyujanggak.[...] 奎章閣韓国学研究院
[5] 웹사이트 "만민공동회 > 근대적 인간의 탄생 > 단체 수구파" http://independent.c[...] 韓国コンテンツ振興院
[6] 뉴스 "관민공동회 오(五)차 상소(전호 연속)" http://independent.c[...] 独立新聞 1898-11-19
[7] 웹사이트 "자료관 > 만민공동회 관련 자료 > 근대사 연표" http://independent.c[...] 韓国コンテンツ振興院
[8] 뉴스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 http://shindonga.don[...] 東亜日報 2009-09-01
[9] 문서 1907年8月31日付・往電第31号
[10] 서적 李王宮秘史 https://ndlonline.nd[...] 朝鮮新聞社 1926
[11] 뉴스 대한제국 황실비사/곤도 시로스케 지음 http://www.seoul.co.[...] ソウル新聞 2007-08-10
[12] 서적 李王宮秘史 https://ndlonline.nd[...] 朝鮮新聞社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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