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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팅겐 대학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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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괴팅겐 대학교의 역사는 1737년 개교 이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진다. 1732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의 지시로 설립이 계획되었으며, 계몽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연구의 자유를 추구했다. 개교 이후 1807년 프랑스 점령, 베스트팔렌 왕국 시대, 빈 회의 이후 프로이센 합병, 독일 제국 시대를 거치며 학생 문화, 학문 발전,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대학교로서 재건되었으며, 현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학술적 성과를 이루고 있다.

2. 1737년 개교 이전

1732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령의 선제후이자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군주였던 게오르크 아우구스트하노버 주 정부에 괴팅겐에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부터 1733년 1월 13일 대학교 설립 특권을 획득하여, 유럽 전역에서 학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3]

1734년 10월 14일, 물리학자 자무엘 크리스티안 홀만[6]이 오래된 곡물 창고에서 첫 번째 강의를 열었다.[7][8] 첫 학기에는 147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14] 초대 총무처장 게를라흐 아돌프 폰 뮌히하우젠[15]은 1732년부터 대학교 설립 계획에 결정권을 가지고 지휘 책임을 맡았다.[16] 1737년 9월 17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왕에 의해 격식을 갖춘 개교식이 치러졌다.[20]

2. 1. 설립 배경

1732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령의 선제후이자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군주였던 게오르크 아우구스트하노버 주 정부에 괴팅겐에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1]

유럽 전역에서 학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특권이 필요했고, 1733년 1월 13일 카를 6세로부터 대학교 설립 특권을 획득했다.[3] 이는 40년 전 세속화 과정에서 할레 대학교가 세워질 때와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 당시 할레 대학교는 신학부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다른 학부에 대한 감독권을 상실했었다. 괴팅겐 대학교 역시 할레 대학교와 비슷하게 연구 결과가 교회의 검열을 받지 않는 계몽주의 대학교로 계획되었다.[4][5]

2. 2. 초기 모습

1735년, 처음 대학도시로 묘사된 괴팅겐


1737년 대학교 문장


1732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령의 선제후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의 공작이며, 조지 2세로도 알려진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군주였던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에 의해 하노버 주 정부는 괴팅겐에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1]

대학교 학위가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으려면 황제의 특권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요한 디데 춤 퓌어스텐슈타인[2]으로 보내 1733년 1월 13일 카를 6세로부터 승인을 받았다.[3] 이는 40년 전 세속화 과정에서 할레 대학교가 세워질 때와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데, 당시 할레 대학교는 다른 대학교들과 달리 신학부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어 다른 학부에 대한 감독권을 상실했다. 괴팅겐 대학교 역시 할레 대학교와 비슷하게 연구 결과가 더 이상 교회의 검열을 받지 않는 계몽 대학교로 계획되었다.[4][5]

개교를 축하하며 뮌히하우젠을 위해 행진하는 괴팅겐 학생들


1734년 10월 14일, 아직 정식으로 개교하지 않은 새로운 대학교의 첫 번째 강의가 오래된 곡물 창고에서 열렸다. 물리학자 자무엘 크리스티안 홀만[6]이 이 강의를 맡았다.[7][8] 이와 함께 파울리네 수도원의 명망있던 김나지움은 세속화되었고, 수도원은 파울리네 교회(Paulinerkirche)와 함께 대학교의 첫 번째 건물이 되었다.[9] 1786년, 건축가 게오르크 하인리히 보어헤크[10]에 의해 대학 건물은 파울리네 길까지 확장되었다.[11] 파울리네 교회는 처음에는 대학교회 역할을 맡았고, 현재는 구시가에 있는 성 니콜라이 교회(Kirche St. Nikolai)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교회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예배가 모두 행해진다.[12][13]

첫 학기에는 147명의 학생들이 대학교에 등록했다.[14] 1732년부터 대학교 설립 계획에 결정권을 가지고 지휘 책임을 맡았던 초대 총무처장 게를라흐 아돌프 폰 뮌히하우젠[15]의 주도로,[16] 1734년에 대학마구간이 학교 건물 가운데 가장 먼저 완공되었고, 1736년에는 도서관에 처음으로 학생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17] 현재 이 대학마구간은 사라졌고, 당시 현관의 합각머리만이 새 캠퍼스에 남아있다.[18] 대학교에는 철학, 신학, 법학, 의학부가 설립되어 모든 고전적인 학부를 갖추게 되었다.[19] 건축 기간은 약 177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토박이 괴팅겐 사람들과 잦은 마찰과 갈등이 나타났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도시에 대학교가 설립되는 것을 정면으로 반대했었다.

1737년 9월 17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왕에 의해 격식을 갖춘 개교식이 치러졌다.[20] 당시 총장은 왕이 맡았기 때문에, 대학교에서 직접 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은 총장대리가 되었다.[21][22]

초대 총무처장 폰 뮌히하우젠


대학교의 첫 강의를 맡은 홀만

3. 개교에서 프랑스 점령까지 (1737년 ~ 1807년)

크리스티안 고틀롭 하이네는 고전학자이자 도서관장으로, 1767년에 고대 조각품 주상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수집관은 현재까지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고,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25]

1770년에는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물리학, 수학,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실험물리학의 첫 독일 교수였으며, 현재까지 유효한 전자기학적 지식들을 이끌어 냈다. 박학자로서 그는 자연과학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고 풍자적인 논문들을 남기기도 했다. 괴팅겐 대학교에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리히텐베르크 강의실이 있다.

리히텐베르크의 안구 모형


리히텐베르크가 사용했던 존 돌런드(John Dollond)의 망원경


리히텐베르크의 유리 프리즘


18세기 괴팅겐에는 리히텐베르크 외에도 알브레히트 폰 할러, 요한 크리스티안 에륵스레벤, 요한 다비트 미하엘리스, 아우구스트 루트비히 폰 슐뢰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알브레히트 폰 할러는 의사이자 자연과학자이며 시인으로, 괴팅겐이 뛰어난 학자들을 얻게 하는데 기여했다. 요한 크리스티안 에륵스레벤은 1771년에 독일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수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요한 다비트 미하엘리스는 신학자이자 동양학자(1746~1791)였고, 아우구스트 루트비히 폰 슐뢰처는 역사학자이자 시사 평론가(1769~1809)였다.

슐뢰처가 쓴 "Extra Gottingam non est vita, si est vita non est ita!(괴팅겐 밖에는 삶이 없고, 있다고 해도 이곳만 못할 것이다!)"라는 격언은 아직도 괴팅겐 시청 지하의 입구에 적혀있다. 그의 딸 도로테아(Dorothea von Rodde-Schlözer)는 1787년에 독일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65년부터 1770년까지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괴팅겐에서 공부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아버지에 의해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가야만 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번 괴팅겐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독일어권 최초의 산부인과, 괴팅겐 아쿠시에하우스(Accouchierhaus)


1751년, 알브레히트 폰 할러의 제안으로 독일어권 최초의 대학 산부인과가 괴팅겐에 설립되었다. 이 산부인과는 18세기 말 비교적 현대적이고 대규모 설비를 갖춘 신축 건물(아쿠시에하우스, Accouchierhaus)로 옮겨졌다. 현재 이 건물은 대학교 음악학과가 사용하고 있다.

1770년대 초, 낭만주의 괴팅어 하인분트가 결성되어 도시의 이름에 또다른 명성을 주었다.

1780년,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가 문화인류학 수집관을 설립했다. 이곳은 현재 인류학 연구소에 속해있으며, 제임스 쿡의 탐험에서 얻은 수집품들도 있다. 블루멘바흐는 동물학인류학의 중요한 창설자로 여겨지며, 비교해부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781년, 요한 도미닉 피오릴로가 괴팅겐으로 초빙되면서 미술사가 학문적인 과목으로 자리잡았다.

1802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는 페르시아 설형문자의 판독 방법을 선보여 근동 지역 고대사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3. 1. 학생 문화와 사회

1745년경 학생 수는 약 600명 정도로 안정되었고, 대학교는 상류 가문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었다. 18세기 정규 학업 기간은 3년(6학기)이었다. 헬름슈테트, 예나, 할레 등에서 온 학생들을 통해 학생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었고, 프리메이슨, 향우회 같은 학생 단체들이 등장했다.[25]

괴팅겐 학생들이 향우회 단복을 입은 모습.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베스트팔렌,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 홀슈타인(1773년)


1770년대까지 학생들 사이에서는 과장된 결투 예법이 있었다. 1766년 괴팅겐에서 결투 중 사망 사고가 발생한 후, 독일의 결투 문화는 찌르기 위주에서 '괴팅어 힙멘주어(Göttinger Hiebmensur)'라는 베기 위주로 바뀌었고, '괴팅어 히버(Göttinger Hieber)'라는 가벼운 사브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브르는 나중에 코르프슐래거(Korbschläger)라는 손 보호망이 있는 칼로 대체되었다.

1769년부터 1772년까지 사교술 관련 저술로 유명한 아돌프 크니게(Adolph Freiherr Knigge)가 괴팅겐에서 법학과 관방학을 공부했다. 1772년에는 요한 하인리히 포스(Johann Heinrich Voß)가 괴팅겐에 학생으로 등록했다. 그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등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 및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으로 유명해졌다. 포스는 괴팅어 하인분트(Göttinger Hainbund)라는 문학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훗날 프로이센 개혁가가 되는 카를 폼 슈타인(Heinrich Friedrich Karl vom und zum Stein)도 1773년부터 1777년까지 괴팅겐에서 법학, 역사학, 관방학을 전공했다.

1788년 빌헬름 폰 훔볼트가 법학부에 등록하여 대학교와 아카데미의 관계를 통한 교육과 연구의 상호작용에 대한 첫인상을 받았다. 이는 1810년 베를린 대학교 설립의 기반이 되었고, 세계적으로 많은 대학교들이 그의 구상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 1789년 4월 25일 그의 동생 알렉산더 폰 훔볼트도 괴팅겐에 등록했다. 괴팅겐에는 물리학자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Georg Christoph Lichtenberg)와 해부학자이자 동물학자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Johann Friedrich Blumenbach)가 있었다.

대학교와 괴팅겐 시, 시민과 학생들 사이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1790년 7월 26일 가구공 장인들과 학생들 사이에 큰 다툼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시 동쪽 괴팅겐 숲(Göttinger Wald)의 들판으로 퇴거했고, 경제력을 이용해 대학교와 시의 호의를 강요했다. 시 당국은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했다. 1806년 괴팅겐에서 다시 학생들의 항의 운동이 발생하여 1월 6일 한뮌덴(Hann. Münden)으로 퇴거했지만, 큰 성과 없이 1월 12일 괴팅겐으로 돌아왔다.

3. 2. 정치, 대학 구조, 건축

1738년에는 해부학 실습관(Theatrum Anatomicum)이 완공되었고, 1739년에는 식물학 정원이 조성되었다. 1751년에는 첫 번째 천문대가 문을 열었다. 같은 해에 국왕 게오르크 2세는 지금의 괴팅겐 과학아카데미(Akademie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를 설립하였고, 이곳은 현재 독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과학아카데미가 되었다. 1753년부터는 기관지인 괴팅기셰 게레르테 안차이겐(Göttingische Gelehrte Anzeigen)을 출간하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 독일어로 발행되는 학술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48년, 파울리네 교회에서 국왕 게오르크 2세의 모습


1748년 8월 1일, 국왕 게오르크 2세의 괴팅겐 방문은 대학교에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축제 행사와 파울리네 교회 행렬 모습은 당시 동판화와 사무국장 요한 로렌츠 폰 모스하임의 기록으로 남아있다.[25] 왕가의 방문은 대학교와 학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1765년 요크공, 1768년 브라운슈바이크 공 페르디난트, 1769년 글로스터공의 방문도 그러했다.

3. 3. 교수진과 학문적 발전

크리스티안 고틀롭 하이네(Christian Gottlob Heyne, 1763~1812)는 고전학자이자 도서관장으로, 1767년에 고대의 조각품 주상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수집관은 현재까지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고,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25]

1770년에는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Georg Christoph Lichtenberg)가 물리학, 수학, 천문학 교수가 되었고, 현재까지 유효한 전자기학적 지식들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실험물리학의 첫 독일 교수였다. 괴팅겐 대학교에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리히텐베르크 강의실이 있다.

리히텐베르크 외에도 18세기 괴팅겐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의사이자 자연과학자이며 시인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할러이다. 그는 괴팅겐이 뛰어난 학자들을 얻게 되는 데 기여했다. 요한 크리스티안 에륵스레벤(Johann Christian Erxleben)은 1771년에 독일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수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신학자이자 동양학자였던 요한 다비트 미하엘리스(Johann David Michaelis, 1746~1791), 역사학자이자 시사 평론가 아우구스트 루트비히 폰 슐뢰처(August Ludwig von Schlözer, 1769~1809)도 이 시기에 활동했다.

슐뢰처가 쓴 "Extra Gottingam non est vita, si est vita non est ita!(괴팅겐 밖에는 삶이 없고, 있다고 해도 이곳만 못할 것이다!)"라는 격언은 아직도 괴팅겐 시청 지하의 입구에 적혀있다.

1780년에는 의학자이자 인류학자였던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가 문화인류학 수집관(Sammlung für Völkerkunde)을 설립했다. 블루멘바흐는 동물학인류학의 중요한 창설자로 여겨진다.[26]

요한 도미닉 피오릴로(Johann Dominik Fiorillo)가 괴팅겐으로 초빙되면서 1781년부터 독일에서는 미술사가 학문적인 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1802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Georg Friedrich Grotefend)는 페르시아 설형문자의 판독 방법을 선보였다.

후고(G. v. Hugo)

4. 베스트팔렌 왕국 시대 (1807년 ~ 1813년)

괴팅겐베스트팔렌 정부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1809/10 겨울 학기에 헬름슈테트 대학교는 학생 수가 76명에 불과하여 문을 닫아야 했다. 1809년에는 린텔른 대학교(Universität Rinteln)도 괴팅겐 대학교를 위해 문을 닫았다. 이로 인해 괴팅겐은 벨펜 가문의 영토에서 유일한 대학교가 되었다.[3]

4. 1. 학생과 사회

1809/10 겨울 학기에 헬름슈테트 대학교는 단지 76명의 학생들만이 수업에 참여하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1809년에 린텔른 대학교(Universität Rinteln)도 괴팅겐 대학교를 위해서 문을 닫았다.[3]

4. 2. 교수진

1830년 5월 28일 괴팅겐, 야콥 그림의 수업장면


이 시기에 야콥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괴팅겐으로 왔다. 야콥 그림은 사서 겸 교수로, 빌헬름 그림은 처음에는 사서로만 일했지만 나중에는 교수로도 재직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대 문학에 몰두했고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독일 고대법제(Rechtsaltertümer)와 어문학을 강의했다. 이들은 이렇게 새롭게 일어난 독문학의 주춧돌을 놓았다.[1]

화학자 프리드리히 뵐러는 1836년 프리드리히 슈트로마이어의 후임을 맡았다. 뵐러는 1828년 무기화합물인 시안산암모늄으로 유기화합물인 요소를 합성하는데 처음으로 성공하면서 유기화학의 선구자로 여겨졌고 생화학 연구의 장을 열었다. 이 인 비트로 합성은 초월적인 생명력이 유기물의 생산에 불가결하다는 생기론을 반증했다.[1]

이 시기에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도 대학의 교수이자 천문대의 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1]

1863년부터 1866년까지 로베르트 코흐가 괴팅겐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국가고시를 보았고 박사학위도 취득하였다. 오늘날 그는 현대 세균학의 창시자이며 열대의학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연구와 그의 제자들은 나중에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의 생명을 위협했던 심한 전염병들의 치료에도 기여했다.[1]

4. 3. 정치와 대학

헬름슈테트 대학교는 16세기에 벨펜 가문에 의해 설립되어 거의 150여 년 동안 벨펜 가문의 유일한 대학교였다. 하지만 1809/10 겨울학기에 단지 76명의 학생들만이 수업에 참여하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1] 약 120명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비교적 작은 규모였던 린텔른 대학교도 1809년에 괴팅겐 대학교를 위해 폐쇄되었다.[1] 이로 인해 괴팅겐은 벨펜 가문의 영토에서 유일한 대학교가 되었다.[1]

5. 빈 회의에서 1866년 프로이센 합병까지 (1815년 ~ 1866년)

1815년 빈 회의 이후 괴팅겐 대학교하노버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나사우 백작령은 1817년 하노버 왕국과 조약을 맺어 괴팅겐 대학교를 나사우의 국가대학으로 삼았는데, 이는 1866년 프로이센에 합병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837년, 윌리엄 4세는 대학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빌헬름 광장에 대강당(Aula)을 건립하였다.

1837년 빌헬름 광장의 대강당


이 건물은 오토 프라엘이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영향을 받아 로마 초기교회 양식으로 설계했고, 전면 조각 장식은 에른스트 폰 반델이 제작했다. 괴팅겐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광장 이름을 빌헬름 광장으로 짓고, 윌리엄 4세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는 현재 독일에서 유일한 영국 왕의 기념물이다.

윌리엄 4세를 위한 기념상


오래된 대강당에는 역사적인 학생 감옥이 남아있다.

같은 해, 괴팅겐 7교수 사건이 발생했다. 그림 형제빌헬름 베버 등 7명의 교수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1833년 하노버 헌법 폐지에 항의하다 해고된 사건이다.

괴팅겐 7교수: (1) 빌헬름 그림, (2) 야코프 그림, (3) 빌헬름 에두아르트 알브레히트, (4)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달만, (5) 게오르크 고트프리트 게르비누스, (6)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 (7) 하인리히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에발트


이로 인해 대학은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1819년의 전제주의적 헌법이 다시 효력을 갖게 되었다. 해고된 교수들의 동료들은 연대하여 대학의 청빙에 응하지 않았고, 대학은 이들을 다시 부르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베버와 하인리히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에발트만이 복귀했다. 이 사건은 1934년 나치 대숙청과 함께 세계 과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1848년 혁명 당시, 괴팅겐 시와 대학은 혼란을 겪었지만, 하노버 정부가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진정되었다. 괴팅겐 7교수 중 2명이 대학의 초청을 받아들였고, 학생들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1866년, 신고딕 양식의 강당이 완공되어 예술 소장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파울리네 교회의 대학 도서관 확장도 진행되었지만, 파울리네 교회와 빌헬름 광장의 대강당은 1970년대까지 강의 목적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빌헬름야코프 그림

5. 1. 학생과 사회

1815년 예나에서 시작된 부르셴샤프트 사상이 괴팅겐에 전해졌으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학생단체 대표회(Senioren-Convent)로부터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르셴샤프트는 1848년까지 코어(Corps)보다 의미 없는 예외 현상으로 남았고, 그들을 상징했던 알트도이치 복장(Altdeutsche Tracht)은 도시에서 보기 어려웠다.[27]

1818년 수공업자와 학생 간의 싸움이 발생했고, 하노버 정부는 후사르를 투입하여 학생들에게 맞섰다. 이로 인해 모든 재학생은 비첸하우젠(Witzenhausen)으로 퇴거했다. 학생들의 파업은 성과가 없었고, 학생 수는 1158명에서 858명으로 감소했다.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에 따른 대학법 통과로 학생연합 추적은 182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823년 학생들은 다시 비첸하우젠으로 퇴거했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27]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하르츠기행(Die Harzreise)》에서 괴팅겐 시와 시민, 대학교를 조롱 섞인 반어로 비판했다.[27]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엄격한 지시로 발트족 사람들의 독일 유학이 어려워지면서 괴팅겐 학생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27]

1831년 1월,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괴팅겐 혁명(Göttinger Revolution)이 발생했다. 요한 에른스트 아르미니우스 폰 라우셴플라트(Johann Ernst Arminius von Rauschenplatt)의 지도 아래 혁명위원회가 발족하고, 시의회가 해산되었다. 사람들은 자유 헌법과 정부 퇴각을 요구했고, 학생들은 금지된 담배를 피웠다. 1월 15일 정부 군대 투입으로 혁명은 실패했지만, 에른스트 폰 뮌스터(Ernst von Münster) 백작이 장관직을 사임하고 케임브리지 공 어돌퍼스(Adolphus)가 하노버 부왕(Vizekönig)으로 임명되었다.[27]

1842년과 1845년, 7월 혁명과 함바흐 축제(Hambacher Fest)의 영향으로 학문적 특권 폐지를 추구했던 개혁적 진보 운동(Progress)이 괴팅겐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27]

1848년 괴팅겐에서는 진보 운동이 사그라들고, 1850년대 중반부터 빌덴샤프트(Wildenschaft) 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운동은 학생단체(Studentenverbindung)에 대항하여 조직되었고, 1863년 7월 빌덴샤프트에서 총학생회(AStA)의 전신인 학생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이 운동은 학생 단체들의 총대표권을 잃으면서 힘을 얻어갔다.[27]

5. 2. 교수진과 학문적 발전

야코프 그림빌헬름 그림 형제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독일 고대 법제와 어문학을 강의했다.[27] 프리드리히 뵐러는 유기화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로베르트 코흐는 현대 세균학의 창시자로 각각 이름을 남겼다.

1837년에는 괴팅겐 7교수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림 형제와 물리학자 빌헬름 베버를 포함한 7명의 교수가 자유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1833년에 만들어진 하노버 헌법 폐지에 항의했다가 해고된 사건이다.[27] 이 사건으로 인해 괴팅겐 대학교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해고된 교수들의 동료들은 이에 연대하여 대학교의 청빙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대학교는 이들을 다시 부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베버와 동양학자 하인리히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에발트만이 괴팅겐 대학교로 복귀했다.

5. 3. 정치, 대학 구조, 건축



1837년 윌리엄 4세는 대학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강당(Aula)을 선사했다. 이 건물은 1835년 건축가 오토 프라엘(Otto Prael)에 의해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영향을 받아 로마 초기교회(Basilika) 양식으로 지어졌다. 건물 전면의 조각장식은 조각가 에른스트 폰 반델(Ernst von Bandel)의 작품이다. 괴팅겐 사람들은 후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대강당 앞 광장 이름을 윌리엄 4세의 독일식 이름인 빌헬름 광장(Wilhelmsplatz)으로 바꾸고,

여기에 왕의 동상을 건립했는데, 이 동상은 현재 독일에서 유일한 영국 왕에 대한 기념물이다.[27] 이 오래된 대강당에서는 역사적인 학생 감옥을 지금까지도 볼 수 있다.

같은 해인 1837년, 그림 형제와 물리학자 빌헬름 베버를 포함한 일곱 명의 교수가 자유주의적 사상에 영향을 받아 1833년에 만들어진 하노버 헌법 폐지에 항의하여 해고되었다(괴팅겐 7교수 사건). 이로 인해 대학은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 헌법 폐지 선언으로 전제주의적이었던 1819년의 헌법이 다시 효력을 갖게 되었다. 쫓겨난 교수들의 동료들은 서로 연대하여 이들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한 대학의 청빙에 응하지 않았고, 대학은 결국 이 교수들을 다시 부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물리학자 베버와 동양학자 하인리히 에발트만이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로 돌아왔다. 세계 과학사에서는 이 사건을 이후 1934년에 일어나는 나치의 대숙청과 한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1866년에는 신고딕 양식의 강당이 완공되었고, 이 건물은 현재 대학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 예술 소장품들 가운데 회화를 소장하는 용도로도 쓰이고 있다. 이 건축 사업과 함께 파울리네 교회의 대학 도서관 확장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도 진행되었다. 하지만 파울리네 교회와 빌헬름 광장의 대강당도 70년대에 다목적관이 문을 열 때까지 계속해서 강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6. 독일제국 시대 (1866년 ~ 1918년)

1866/67 겨울학기를 기점으로 괴팅겐 대학교는 프로이센의 학교가 되었다. 1878년부터 1882년까지 프린츠 길에는 대학도서관의 큰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확장은 도서관이 프로이센 도서관 체계에 새롭게 들어오면서 원격대출과 같은 업무를 위해 필요했다. 이 건물의 "베를린" 건축양식은 그 이전의 하노버 건축양식과 비교되는 것이었다.[1]

1887년에는 대학의 150주년 기념축제가 열렸다. 황제 빌헬름 1세는 자신의 총장직위를 하노버 지역의 가장 높은 대표자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알프레이트 폰 프로이센(Albrecht von Preußende)에게 위임했다.[2]

1881년 5월 15일, 괴팅겐에서 법이 바뀌면서 술집들이 이전보다 일찍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에 맥주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300명이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로 많은 이들이 구금되었다.[1]

6. 1. 학생과 사회

1881년 5월 15일, 괴팅겐에서는 법이 바뀌면서 술집들이 이전보다 일찍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에 맥주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300명이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로 많은 이들이 구금되었다.[1]

6. 2. 교수진과 학문적 발전

프로이센 문화부 관리였던 프리트리히 알트호프(Friedrich Althoff)의 대학정책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괴팅겐 대학교는 수학, 화학, 물리학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1920년대까지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했다. 알트호프는 펠릭스 클라인을 초빙하였고, 클라인은 알트호프와 함께 수학 및 자연과학 분야 발전에 기여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화학자 발터 네른스트와 리하르트 지그몬디가 괴팅겐 대학교로 오게 되었다.[28]

다비트 힐베르트가 1900년에 파리에서 발표한 힐베르트의 문제들은 20세기 수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04년에 괴팅겐 대학교로 초빙된 루트비히 프란틀(Ludwig Prandtl)은 유체역학의 기초를 세우고 독일항공우주센터의 전신인 항공역학실험소(Aerodynamische Versuchsanstalt)를 설립했다.[28]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헤르만 민코프스키의 지도 아래 190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펠릭스 클라인은 카라테오도리에게 괴팅겐에서 교수자격시험을 준비할 것을 제안했다. 카라테오도리는 변분법, 복소해석학, 열역학, 기하광학, 이론물리학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저명한 수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의 편지를 통해 상대성이론의 기초에 관한 중요한 수학적 설명을 제공했다.[28]

인물분야비고
펠릭스 클라인수학뛰어난 학문조직자(Wissenschaftsorganisator)
다비트 힐베르트수학힐베르트의 문제들 발표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수학변분법, 복소해석학, 열역학, 기하광학, 이론물리학 연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상대성이론에 기여
발터 네른스트화학
리하르트 지그몬디화학
루트비히 프란틀물리학, 유체역학, 항공역학유체역학 기초, 항공역학실험소 설립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고전문학



다비트 힐베르트

6. 3. 정치, 대학 구조, 건축

1878년부터 1882년까지 프린츠 길에는 괴팅겐 대학교 도서관의 큰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확장은 도서관이 프로이센 도서관 체계에 새롭게 들어오면서 원격대출과 같은 업무를 위해 필요했다. 이 건물의 "베를린" 건축양식은 그 이전의 하노버 건축양식과 비교되는 것이었다.[1]

1887년에는 대학의 150주년 기념축제가 열렸다. 황제 빌헬름 1세는 자신의 총장직위를 하노버 지역의 가장 높은 대표자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알프레이트 폰 프로이센(Albrecht von Preußende)에게 위임했다.[2]

7. 양차 세계대전 사이 (1918년 ~ 1945년)

세계경제위기로 인해 타격을 입은 괴팅겐 대학교의 연구소들과 카이저 빌헬름 협회는 나치 집권 이후인 1933년에 유대인 출신이거나 “유대인의 친구들”이라고 불렸던 학자들을 모두 해고했다. 1920년대 말 록펠러 재단의 자금으로 대학교에 새로운 수학 연구소가 창설되었지만, 재단은 대표였던 막스 메이슨의 지시로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뉴욕으로 이주하는 것을 후원했다. 72명의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이거나 정치적 이유로 박사학위를 박탈당했고, 이 가운데에는 노벨상 수상자였던 루트비히 크비데막스 보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치적 숙청작업은 "1933년의 대숙청(great purge of 1933)"으로 세계 과학사에 기억되고 있다.

1934년,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베른하르트 루스트는 한 연회에서 옆에 앉아있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에게 괴팅겐의 수학 연구소가 유대인,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학자들이 떠나게 되면서 어려움이 있는지 물었다. 힐베르트는 특유의 동프로이센 방언으로 "어려움이요? 어려움은 없습니다, 장관님. 다만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을 뿐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전에 괴팅겐에서 일했던 엔리코 페르미, 에드워드 텔러, 제임스 프랑크 등은 1942년부터 괴팅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학문적 지도 아래에 미국 로스알라모스에서 맨해튼 계획을 통해 첫 번째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이후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더욱 중요한 기여를 했다.

괴팅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로버트 오펜하이머


수학자 에미 뇌터


당시 물리학과 학생이었던 에드워드 텔러

7. 1. 학생과 사회

제1차 세계 대전의 낙관적 분위기 속에서 대학교는 전쟁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등록을 유지했다. 실제로는 약 4분의 3 정도의 학생들이 전쟁에 참가했고, 그들 가운데 726명의 학생들과 22명의 대학교 직원들이 목숨을 잃었다.[28]

1918년 11월 8일 저녁 괴팅겐에서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Arbeiter- und Soldatenrat)가 구성되었고, 다음날 시청 건물에 붉은 깃발이 게양되었다. 좌익 학생들은 보수적 다수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평의회에 학문적 문제를 조언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협력했다.

1920년대의 한 학생이 모티브가 된 괴팅겐 상공회의소의 임시화폐


바이마르 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자 정부는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거의 모든 대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간제 자원병을 모집하여 학생대대(Studentenbataillon)를 조직했다.

1920년 7월 22일, 민족주의적인 학생단체(Studentenverbindung)들의 연합운동으로 독일대학우호회(Deutscher Hochschulring, DHR)가 괴팅겐에 설립되었다. 이 우호회는 1920년대 초반 지역적인 학생회(AStA)와 그 연합체인 독일 학생회(Deutsche Studentenschaft, DSt)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1년 5월 괴팅겐 학생회 선거에서 20석 가운데 16석을 확보했다. 좀 더 민족자유주의적(nationalliberale)인 코어(Corps)들은 1922년 여름학기에 우호회를 떠났다. 우호회는 1920년대에 공화국에 적대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수많은 집단 행동에 협력했고, 학생들에게 민족사회주의적인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1926년 설립된 민족사회주의 독일 학생연맹(National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 NSDStB)의 세력이 커지면서 우호회는 그 의미를 잃었다.[28]

1934년에 일어난 괴팅겐 폭동은 학생회의 획일적 통일화(Gleichschaltung)가 대학교에서도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이 획일화 정책은 대학교의 200주년인 1937년에 완료되었다. 모든 학생들은 독일학생연맹(NSDStB)에 의해서 청년동맹(Kameradschaften)으로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학생 수가 크게 늘어나서 1945년 항복 이전 마지막 학기에는 4884명이 등록했다. 이는 불구자가 된 수많은 전쟁참가자들이 학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인데, 이들은 의학자로 다시 투입될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의 영향으로 1학년이 2학기가 아닌 3학기로 나뉘어 학업 기간이 줄어들었다.[28]

7. 2. 교수진과 학문적 발전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는 역사음악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1920년부터 1930년 사망할 때까지 괴팅겐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29/30년에는 대학교 총장으로도 재직했다.[1]

1924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서 막스 보른의 조수가 되었고,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와 함께 연구했다.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보른,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괴팅겐에서 양자역학의 기초를 세웠다.[2]

1927년에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막스 보른의 지도 아래 양자물리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저명한 원자 과학자들과 교류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3]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에드워드 텔러는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랑크의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두 사람 모두 나치 집권 이후 괴팅겐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4]

7. 3. 정치, 대학 구조, 건축

나치 집권 이후 1933년 괴팅겐 대학교는 세계경제위기로 인해 타격을 입은 연구소들과 카이저 빌헬름 협회와 함께 유대인 출신이거나 “유대인의 친구들”이라고 불렸던 학자들을 모두 해고했다. 1920년대 말 록펠러 재단의 자금으로 새로운 수학 연구소가 창설되었지만, 재단은 대표였던 막스 메이슨의 지시로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뉴욕으로 이주하는 것을 후원했다. 인종차별적이거나 정치적 이유로 72명이 박사학위를 박탈당했고, 이 가운데에는 노벨상 수상자였던 루트비히 크비데막스 보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치적 숙청작업은 "1933년의 대숙청(great purge of 1933)"으로 세계 과학사에 기억되고 있다.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베른하르트 루스트는 1934년 한 연회에서 옆에 앉아있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에게 괴팅겐의 수학 연구소가 유대인,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학자들이 떠나게 되면서 어려움이 있는지 물었다. 힐베르트는 특유의 동프로이센 방언으로 "어려움이요? 어려움은 없습니다, 장관님. 다만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을 뿐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전에 괴팅겐에서 일했던 엔리코 페르미, 에드워드 텔러, 제임스 프랑크 등 몇몇 학자들은 1942년부터 괴팅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학문적 지도 아래에 미국 로스알라모스에서 맨해튼 계획을 통해 첫 번째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이후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더욱 중요한 기여를 했다.

8. 1945년 이후 니더작센 대학교

주사전자현미경을 사용하고 있는 괴팅겐의 학생들


전쟁이 끝난 후, 대학교는 천천히 원래 모습을 되찾아 갔다. 서독의 유일한 대학교로서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는 영국 군부의 통제 아래 1945/46 겨울학기부터 바로 다시 문을 열었다. 당시 4296명의 학생들이 등록했고, 그 가운데 78%는 남성이었다. 남학생 중 98.5%는 전쟁에 참여했었고,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를 포함하여 이들 중 거의 3분의 1이 장교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30] 그는 괴팅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졸업하고 두 국가고시를 모두 마쳤다. 호어스트 엠케(Horst Ehmke)도 1946년부터 1949년까지 괴팅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57년, 괴팅겐의 핵물리학자 18명은[32]괴팅겐 선언(Göttinger Erklärung)”을 통해 콘라트 아데나우어에게 핵무장 추진계획 철회를 호소하였다.

괴팅겐의 학생 수는 50년대 말까지 4500명에서 약 6000명 사이를 맴돌았다. 6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중대학(Massenuniversität)으로 변화가 시작되었고, 60년대 말 학생운동을 통해 집단관리대학(Gruppenuniversität)의 모습이 나타났다. 학교는 때때로 3만 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된 평등한 대중대학이 되었다. 밀려오는 학생들을 감당하기 위해 괴팅겐 시내 북쪽에 정신과학을 위한 새로운 캠퍼스가 건설되었다. 중앙학생식당, 후생복지기구(Studentenwerk) 건물, 푸른 탑(„Blauer Turm“)이라 불리는 다목적관,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앙 강의동(ZHG)이 들어섰다. 바로 옆에는 법학부(Juridicum), 신학부(Theologicum), 경제학부 및 사회학부(Oeconomicum)를 위한 세미나관이 각각 들어섰다.

대학병원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시 북쪽에 새롭게 건립되었고 다른 연구소들도 베엔데(Weende) 구역에 들어섰다.

1989년 네 번째이자 마지막 독일 마르크 화폐 시리즈가 나왔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0마르크), 파울 에를리히(200마르크), 야콥 그림, 빌헬름 그림(둘 다 1000마르크) 4명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10마르크권에는 가우스 초상 옆에 괴팅겐 대학교의 역사적인 건물인 천문대와 대강당(Aula)도 그려졌다.

대학교회는 1822년부터 구시가 남쪽 니콜라이 구역의 고딕양식 니콜라이 교회(St.-Nikolai-Kirche)이다.

8. 1. 학생과 사회

전쟁이 끝난 후, 대학교는 천천히 원래 모습을 되찾아 갔다. 1945년 12월, 처음으로 총학생회(AStA) 선거가 실시되었고, 초대 회장으로는 전직 군 장교이자 나치스에 저항했던 악셀 폰 뎀 부셰가 선출되었다.[30] 1946년 7월에는 괴팅겐에서 영국 점령지역의 초대 학생의회 대표들이 모였고, 이 모임은 정기적으로 이어져 독일학생연합(Verband Deutscher Studentenschaften) 조직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 말, 정치적 격동기에 괴팅겐에서는 좌파 학생들이 총학생회 다수를 차지했다. 1977년 독일의 가을, 괴팅겐의 메스칼레로(Göttinger Mescalero)가 발표한 연방검찰총장 지그프리트 부박에 대한 추도문은 큰 국제적인 이목을 끌었고, 대학교는 자율주의 반파시즘적 신좌파 세력의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었다.[29] 하지만 급진적인 좌파세력은 몇 년 전부터 현저히 그 영향력을 잃었다.[31]

이후 괴팅겐 대학교는 많은 영향력 있는 정치인과 학자들을 배출했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훗날 독일 연방 대통령이 된 그는 괴팅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여 두 번의 국가고시를 모두 마쳤다.[30]
  • 호어스트 엠케: 연방 수상사무처장과 여러 정부기관의 장관으로 일했던 그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괴팅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 페터 슈트룩: 괴팅겐에서 태어나 연방국방부장관 및 독일 사회민주당의 연방의회 원내대표를 역임한 그는 1962년 아비투어를 마치고 괴팅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니더작센 주총리이자 전 독일 연방수상인 그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 괴팅겐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당시에도 대학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자비네 로이토이서-슈나렌베르거: 연방법무부장관을 지낸 자유민주당 소속의 그녀는 1970년 아비투어를 마치고 괴팅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 위르겐 트리틴: 연방환경부장관을 지낸 녹색당 소속의 그는 1973년에 아비투어를 마치고 괴팅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공산주의동맹 회원이자 총학생회 의원이었으며, 잠시 학생의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 지그마 가브리엘: 전 니더작센 주총리, 전 연방 환경부장관이며 현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인 그는 1981년부터 1987년까지 괴팅겐에서 교직을 위해 독일어, 정치, 사회학을 전공했다.
  • 우어줄라 폰 데어 라이엔: 당시 니더작센 주총리의 딸이었던 그녀는 1977년부터 괴팅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독일 기독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연방가정부장관, 연방노동사회부장관으로 일했다.
  • 에드차르트 슈미트-요어트치히: 자유민주당 소속의 그는 괴팅겐 대학교 법학부에서 1976년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 디터 볼렌: 독일의 유명 가수로 꼽히는 그는 괴팅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여 1978년에 학위를 취득하였다.

8. 2. 교수진과 학문적 발전


  • 볼프강 파울은 1944년부터 1952년까지 괴팅겐에서 교수로 일했으며, 사중극자 이온트랩 기술(파울 트랩)을 창안하여 198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 에르빈 네어는 1980년 괴팅겐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하였고, 1974년 괴팅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베어트 자크만과 함께 세포 사이의 이동 경로를 발견한 공로로 1991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1]


2007년, 화학부 건물의 모습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의 명예교수이자 괴팅겐에 소재한 막스플랑크 생물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슈테판 헬은 STED(Stimulated Emission Depletion) 현미경을 발명하여 지난 수년간 국내외의 수많은 상을 받았다.[2]

8. 3. 정치, 대학 구조, 건축

1955년, 새로 선출된 니더작센 주 총리 하인리히 헬베게(Heinrich Hellwege)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던 자민당의 우익 출판가 레온하르트 슐뤼터(Leonhard Schlüter)가 실각한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29] 대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농경학자 에밀 뵈어만(Emil Woermann)은 슐뤼터의 지명에 저항해서 모든 학부의 학장들과 함께 사의를 표명했다. 이 일은 중앙당을 이끌고 있던 토마스 델러(Thomas Dehler)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고 며칠 후 대학의 지도부는 슐뤼터의 사직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1957년, 괴팅겐의 18명의 핵물리학자들[32]은 “괴팅겐 선언(Göttinger Erklärung)”을 통해서 당시 독일 연방수상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우어에게 핵무장 추진계획의 철회를 호소하였다.

베엔데(Weende) 구역에 자리잡은 물리학부 건물


괴팅겐의 학생 수는 50년대 말까지 4500명에서 약 6000명 사이를 맴돌았다. 6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중대학(Massenuniversität)으로의 변화가 시작되었고 오래된 형태의 정교수대학(Ordinarienuniversität)이 여기에 맞설 수는 없었다. 60년대 말의 학생운동을 통해서 집단관리대학(Gruppenuniversität)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고, 학교는 때때로 3만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된 평등한 대중대학이 되었다. 이렇게 밀려오는 학생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괴팅겐 시내의 북쪽에 정신과학을 위한 새로운 캠퍼스가 계획되어 건설되었다. 이곳에는 중앙학생식당을 포함한 후생복지기구(Studentenwerk)를 위한 건물과 푸른 탑(„Blauer Turm“)이라고 불리는 고층 건물 형태의 다목적관,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학에서 가장 큰 강의실(“011”)을 갖춘 중앙 강의동(Zentrale Hörsaalgebäude, ZHG)이 자리잡았다. 바로 옆에는 법학부(Juridicum), 신학부(Theologicum), 경제학부 및 사회학부(Oeconomicum)를 위한 세미나관이 각각 들어섰다.

대학병원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시 북쪽에 새롭게 건립되었고 다른 연구소들도 베엔데(Weende) 구역에 들어섰다.

1989년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독일 마르크 화폐 시리즈가 나왔고 9명의 서로 다른 인물들의 초상화가 찍혔다. 이들 가운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0마르크), 파울 에를리히(200마르크), 야콥 그림, 빌헬름 그림(둘 다 1000마르크) 4명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사람들이었다. 10마르크권에는 가우스의 초상 옆에 괴팅겐 대학교의 특별히 역사적인 건물인 천문대와 대강당(Aula)도 그려졌다.

9.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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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기타 harvnb Rössler
[2] 문서 Diede zum Fürstenstein, Johann Wilhelm Dietrich
[3] 기타 harvnb Rössler
[4] 웹인용 Zensurfreiheit der jungen Georgia Augusta http://www.uni-goett[...] 2011-11-22
[5] 기타 harvnb Rössler
[6] 문서 Samuel Christian Hollmann
[7] 기타 harvnb Stackelberg
[8] 서적 Die Georg-Augustus-Universität zu Göttingen, in der Wiege, in Ihrer blühenden Jugend, und reiffererm Alter / Mit unpartheiischer Feder entworfen von Einem Ihrer Ersten, und nun allein noch übrigem, Academischem Lehrer Vandenhoeck & Ruprecht
[9] 기타 harvnb Rössler
[10] 문서 Georg Heinrich Borheck
[11] 서적 Die Niedersächsische Staats- und Universitätsbibliothek Göttingen: ihre Bestände und Einrichtunge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http://books.google.[...] Otto Harrassowitz Verlag 2011-11-22
[12] 기타 harvnb Rössler
[13] 웹인용 Universitätsgottesdienste http://www.uni-goett[...] 2011-11-22
[14] 기타 harvnb Rössler
[15] 문서 Gerlach Adolf Freiherr von Münchhausen
[16] 기타 harvnb Rössler
[17] 기타 harvnb Kleßmann
[18] 웹인용 Reitstalltor http://www.denkmale.[...] 2011-11-22
[19] 웹인용 Die Geschichte der Georg-August-Universität http://www.uni-goett[...] 2011-11-22
[20] 기타 harvnb Rössler
[21] 기타 harvnb Rössler
[22] 기타 harvnb Rössler
[23] 문서 Johann Lorenz von Mosheim
[24] 문서 Georg Ludwig Boehmer
[25] 웹사이트 Virtuelles Antikenmuseum Göttingen http://www.viamus.de[...]
[26] 논문 Geschichte der Biologie Jena
[27] 문서 1830년 7월의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848년 3월의 독일 혁명까지의 기간
[28] 서적 Erlebte Geschichte 1917-1997 Wien; Köln; Weimar
[29] 문서 1977년말 적군파(Rote Armee Fraktion)에 의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30] 문서 당시 괴팅겐에서 공부하던 클라우스 휠브로크(Klaus Hülbrock)라는 한 학생이 쓴 가명으로, 그는 후에 자신이 이 글을 썼음을 지그프리트 부박의 아들에게 쓴 공개서한을 통해 밝혔다.
[31] 웹사이트 괴팅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의 학생의회 – 소개(Über uns) http://stupa.uni-goe[...]
[32] 문서 이들은 괴팅겐 7교수(Göttinger Sieben)와 비슷하게 괴팅겐 18교수(Göttinger Achtzen)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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