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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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조 가문은 후지와라노 카네자네를 시조로 하는 오섭가 중 하나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섭정 및 관백을 배출하며 번성했고,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을 배출하기도 했다. 전국 시대에는 쇠퇴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으로 격상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현대에는 공작의 칭호를 받았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구조 가문은 고노에 가문, 니조 가문, 이치조 가문 등과 계보를 공유하며, 쓰루도노 가문과 같은 서류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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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가는 가마쿠라 시대에 창설되어 모란 문양을 사용했으며, 센고쿠 시대에 단절되었다가 재건되었고,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쇼군가의 오토다이도코로를 배출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공작 작위를 받은 일본의 귀족 가문이다. - 섭관가 - 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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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가 | |
---|---|
가문 정보 | |
성씨 | 구조 가 |
로마자 표기 | Kujō-ke |
문장 | 구죠 후지 (九条藤) |
![]() | |
본성 | 후지와라 북가 구조류 적류 |
종별 | 공가, 화족 (공작) |
출신지 | 야마시로국 교토 구조도리 |
근거지 | 야마시로국 교토, 도쿄도지요다구간다니시키초, 도쿄도 미나토구후쿠요시초, 교토시사쿄구오카자키엔쇼지초 |
창시자 | 구조 가네자네 |
창건 연도 | 13세기 |
주요 인물 | 지엔, 구조 요시쓰네, 구조 미치이에, 후지와라노 요리쓰네, 후지와라노 요리쓰구, 구조 유키이에, 구조 미치타카, 구조 사다코, 구조 미치히로 |
분가 | 니조 가, 이치조 가, 쓰루도노 가 |
2. 역사
후지와라노 카네자네를 시조로 하는 구조씨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셋째 아들로부터 시작되었다.[4] 1185년 타이라 씨가 몰락한 후, 카네자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원을 받아 섭정 및 관백이 되었다.[5] 1191년에 카네자네는 독립된 가문을 세웠으며, '구조'라는 가문명은 그의 선조 후지와라노 모토츠네가 건설하고 그의 가문이 살았던 "구조 오지(九条大路)"에 위치한 저택에서 유래했다.[7] 이후 구조씨는 오섭가로 알려진, 섭정 및 관백을 배출할 수 있는 다섯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1] 가마쿠라 막부의 4대 및 5대 쇼군인 구조 요리츠네와 구조 요리쓰구 또한 이 가문 출신이었다.[8]
가마쿠라 시대에는 구조 미치이에가 간토 신지가 되어 막부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섭관에 오르는 등 가문의 권세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미치이에 사후, 미야 소동과 료코의 모반 사건 등으로 인해 가문이 몰락하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였다. 특히 이치조가와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남북조 시대에는 이치조가와의 적류(嫡流) 다툼이 격화되었다. 1365년에는 고코곤 천황이 "구조 가문과 이치조 가문은 적류로서 동격이다"라고 재결하면서 분쟁이 일단락되었다.
전국 시대에는 당주가 실각하여 한동안 지방에 칩거하기도 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도요토미 씨 및 도쿠가와 씨와 인척 관계를 맺으며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간에이 연간에는 고노에 가문을 능가하는 공가 최대의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주가 자주 요절하여 다른 가문에서 양자를 맞이하는 일이 잦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구조 가문은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공작 작위를 받았다. 당주 구조 미치타카는 보신 전쟁에서 공을 세워 상전록을 하사받았고, 궁내성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귀족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구조 가문은 메이지 시대에도 오랫동안 공가의 생활 양식을 유지했지만, 1933년을 기점으로 변화를 맞이했다. 1870년에는 현미 1297ton 9두의 가록을 받았고, 1876년에는 61070JPY 59전 8리의 금록 공채를 받았다.[19][21]
2. 1. 가마쿠라 시대
후지와라노 카네자네를 시조로 하는 구조씨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셋째 아들로부터 시작되었다.[4] 1185년 타이라 씨가 몰락한 후, 카네자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원을 받아 섭정 및 관백이 되었다.[5] 1191년, 카네자네는 독립된 가문을 세웠으며,[6] 가문명 '구조'는 그의 선조 후지와라노 모토츠네가 건설하고 그의 가문이 살았던 "구조 오지(九条大路)"에 위치한 저택에서 유래했다.[7] 이후 구조씨는 오섭가로 알려진, 섭정 및 관백을 배출할 수 있는 다섯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1] 가마쿠라 막부의 4대 및 5대 쇼군인 구조 요리츠네와 구조 요리쓰구 또한 이 가문 출신이었다.[8]요시츠네의 아들 미치이에는 셋째 아들 요리츠네를 가마쿠라 막부의 4대 쇼군으로 보냈다(섭가 쇼군). 미치이에는 간토 신지가 되어 막부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장남 노리자네, 차남 요시자네, 넷째 아들 사네츠네를 모두 섭관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246년, 가마쿠라 4대 쇼군이었던 구조 요리츠네가 교토로 송환되고 미치이에도 간토 신지에서 면직되었다(미야 소동).[18] 1252년에는 료코의 모반 사건에 구조 가문이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요리츠네의 아들인 5대 쇼군 후지와라 요리츠구가 해임되었다. 미치이에의 손자 구조 타다이에는 고사가 상황의 칙명을 받아 우대신에서 해임되었고, 같은 해 미치이에도 급사하여 구조 가문의 권세는 완전히 몰락했다.
미치이에 사후, 구조 가문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였다. 특히 이치조가와의 갈등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가문의 재산 상속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1304년에는 우치자네가 섭관에 취임하지 못한 채 급사하면서 이치조가가 상속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2. 2. 적류(嫡流)를 둘러싼 대립
후지와라노 카네자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구조씨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셋째 아들을 시조로 한다.[4] 1185년 타이라 씨가 몰락한 후, 카네자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원을 받아 섭정 및 관백이 되었다.[5] 카네자네는 1191년에 독립된 가문을 세웠고,[6] 가문명인 '구조'는 그의 선조 후지와라노 모토츠네가 건설하고 그의 가문이 살았던 "구조 오지(九条大路)"에 위치한 저택에서 유래되었다.[7] 그 이후 구조씨는 섭정 및 관백을 선택할 수 있는 다섯 가문 중 하나가 되었으며, 나중에 오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1]도가는 아들 충가에게 처분장(유언장과 같은 것)을 넘겨주었고, 당시 공가에게 가장 중요한 유산이었던 일기 등의 문서류는 넷째 아들 실경의 이치조가가 상속받도록 했다. 하지만 도후쿠지 등 일족 사원의 관리권을 맡는 가쵸자는 처음에는 실경이 잇고, 그 다음에는 장남의 아들인 구조 타다이에가 계승하며, 이후에는 이 두 명의 자손 중 가장 관직이 높은 인물(일문 상수)이 잇도록 했다.
도가는 충가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지만,[19] 둘째 아들 요시자네를 자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재산도 물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요시자네의 장남 미치요시는 순조롭게 승진하여 섭관 후보로 취급받았다. 도가의 딸 젠시가 사망하자, 이치조 사네츠네는 젠시의 소령 수령을 형 요시자네에게 양도함으로써 이치조가와 니조가는 화해한다.[20] 요리쓰구 해임 사건의 영향으로, 충가 계통의 섭관 계승은 어려워졌다고 여겨졌으나, 가마쿠라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요시자네는 2년 후 관백에 취임했다.
1265년, 센닌몬인(구조 히코코)으로부터 충가의 적남 타다노리에게 계승될 예정이었던 소령을 실제로 타다노리가 상속하는 것에 대해 이치조가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양가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구조 타다이에가 1273년에 실각한 지 21년 만에 관백에 취임하여 복권했고, 그 후 아들 타다노리도 1291년에 관백에 취임함으로써, 구조가도 도가의 처분장의 요건을 충족했지만, 척족의 이치조가는 가쵸자의 지위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치조가가 구조류에서 적류의 지위가 정착된 것처럼 여겨졌다. 1287년에는 요시자네의 아들 모로타다가 관백에 취임하고, 니조가가 섭가로서 확립되었다.
1304년, 우치자네가 섭관에 취임하지 못한 채 급사하면서, 이치조가가 도가의 처분장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의문이 생겼다. 1318년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례 때, 카잔인 이에사다와 우치자네의 적남 우치쓰구 사이에서 열의 순서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이는 청화가의 이에사다는 섭관의 아들이 아닌 우치쓰구를 섭가 (구조류의 적류)라고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324년에 고다이고 천황은 구조가에게 윤지를 내려, 일문 상수가 가쵸자의 지위에 올라야 한다고 했다.
남북조 시대가 되자, 북조의 1365년에 이치조 츠네미치가 사망하자, 이치조 가문에 이은 세력이었던 쿠죠 츠네노리는 고코곤 천황에게 츠네미치의 아들 후사츠네가 부당하게 "가장자(家長者)"를 칭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당시, 장자 상속제가 일반화되면서, 도가의 장남의 자손인 쿠죠 가문이야말로 가독을 이어받아야 할 적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사츠네는 이치조 사네츠네가 쿠죠 미치이에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기에 쿠죠 류 섭관가의 정치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문서류인 도카도 문고의 『고니조 모로미치기』, 『교쿠요』, 『교쿠주이』 등이 이치조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고 반론했고, 이에 대해 쿠죠 츠네노리는 쿠죠 가문이 적류이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고코곤 천황은 같은 해 1365년 11월 29일에 쿠죠 가문에 륜지를 내려, "도가의 유지는 어디까지나 일문 상수에 의한 가장자의 계승이며, 그 자격을 가진 쿠죠 가문과 이치조 가문은 적류로서 동격이다"라고 재결했다.
2. 3. 전국 시대 ~ 에도 시대
전국 시대에는 당주 구조 마사모토가 가신 가라스마 사리타즈를 살해한 것으로 실각하여 한동안 지방에 칩거하게 되었다.[1]마사모토의 손자 구조 타네미치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큰 조카(누이 교코와 니조 요리후사의 손자)에 해당하는 구조 가네타카를 양자로 맞아, 덴쇼 2년(1574년)에 가독을 물려주었다. 가네타카는 덴쇼 6년(1578년)부터 덴쇼 9년(1581년), 게이초 5년(1600년)부터 게이초 9년(1604년)까지 두 번 관백을 지냈지만, 게이초 9년에 아들 구조 유키이에 (당시의 이름은 충영, 후에 개명)가 도요토미 간코와 결혼하고, 딸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 비)이 급사하자 충격을 받아 가독을 유키이에에게 물려주고 출가 은거했다. 이러한 불행은 있었지만, 구조 가문은 간코와 유키이에의 결혼으로 도요토미 씨 및 도쿠가와 씨의 인척이 되었다.
유키이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관백을 두 번 지냈다. 첫 번째 재임(게이초 13년(1608년) - 게이초 17년(1612년))에는 에도 막부의 의향을 받아, 고요제이 천황의 마사히토 친왕(고미즈노오 천황)에 대한 양위에 대해 막부와의 관계가 꼬인 천황을 설득했다. 두 번째 재임(겐나 5년(1619년) - 겐나 9년(1623년))에는 도쿠가와 가즈코(도후쿠몬인)의 입내에 진력했다. 또한 교가노 3대 화가들(가노 산라쿠, 산세츠, 에이노)을 보호하여 그들의 위기를 구하는 등, 교가노의 존속에도 관여했다.
간에이 연간에는 유키이에의 셋째 아들 미치모토가 마쓰도노 가문을 부활시켜, 일대 한정 섭가로 했지만, 미치모토가 요절했기 때문에 그 영지 1000석은 구조 가문에 넘어갔다. 이로 인해 고노에 가문을 능가하는 공가 최대의 영지를 가지게 되었고, 구조 가문은 광대한 저택을 짓고, 구조류의 적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는 당주가 자주 요절하여, 다카쓰카사 가문과 니조 가문에서 양자를 맞이했다(다카쓰카사 가문에서는 가네하루, 유키쓰구, 니조 가문에서는 스케쓰구, 나오타다). 막말기에는 나오타다의 딸 숙자(에이쇼 황태후)가 고메이 천황의 뇨고가 되었다.

근세의 구조 저택은 게이초 9년(1604년)에 구조 유키이에와 간코의 혼례를 계기로 조영된 것에서 시작된다. 이듬해 게이초 10년(1605년)에는 어소의 동남쪽으로 이전하여 유키이에의 저택과 아버지 가네타카의 은거 저택이 나란히 조영되었다. 이후, 원어소 서쪽에 "별장"이 조영되었고, 지금까지의 저택은 상저택이라고 불렸지만, 만지 4년(1661년)의 화재로 상저택은 소실된다. 간분 13년(1673년)의 화재로 별장도 소실되어 구조가는 재건된 상저택을 거주지로 삼았다. 호에이 5년(1708년)에 상저택이 소실되어 호에이 6년(1709년)에 본채 저택으로 재건된 것이 막말 유신 시대까지 남았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구조씨 구성원은 공작으로 승격되었고 공작 칭호를 받았다.메이지 유신 당시 당주 구조 미치타카(1839년 5월 1일 출생, 1906년 1월 4일 사망)는 보신 전쟁에서 오우 진무 총독으로 공을 세웠다.[1] 그 공으로 메이지 2년에 상전록 800석을 하사받았다.[2]
같은 해 6월 17일,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구조 가문도 옛 공가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3][4]
메이지 9년 당시 미치타카의 거처는 도쿄시 간다구 간다 니시키초였다.[5]
메이지 17년 (1884년) 7월 7일, 화족령이 시행되어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미치타카는 옛 섭가로서 최고의 공작위에 올랐다.[6] 같은 해에 미치타카는 장전장 및 자향간 지후에 임명되었다.[7]
미치타카의 부인 가즈코는 옛 쓰시마 번주 소 요시카즈의 딸이다.[8]
1906년 1월 4일, 미치타카는 사망했고 장남 미치자네 (1869년 12월 15일 출생, 1933년 1월 19일 사망)가 작위를 계승했다.[9] 미치자네는 영국 유학 후 궁내성에 들어가 식부관, 시종, 장전차장, 장전장을 역임했다.[10] 또한 귀족원 공작 의원으로 활약하며 세습 재산 심의 회장 등을 맡았다.[11] 미치자네의 부인 게이코는 오타니 코에이 백작의 차녀이다.[12]
미치타카의 넷째 아들 구조 요시마사와 다섯째 아들 구조 요시유키는 분가하여 각각 남작이 되었다.[13] 구조 나오타다의 아들 쓰루도노 타다요시도 남작에 서임되었다 (쓰루도노 가).[14]
1933년 1월 19일, 미치자네가 사망하자 장남 미치히데 (1895년 8월 9일 출생, 1961년 5월 27일 사망)가 공작위를 계승했다.[15] 장전을 맡는 동시에 귀족원 공작 의원으로 활약했다.[16][17] 미치히데의 부인 후미코는 시마즈 타다마로 백작의 차녀이다.[18]
구조 공작 가문은 2대 미치자네 습작 후에도 오랫동안 공가 생활 양식을 지켰다. 당주 거실은 교토에서 아카사카다이 후쿠요시초로 이전했고, 집안의 말은 어전말에 한정되었다. 가신 이하 신분이 낮은 사용인은 당주에게 말을 거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생활도 1933년 미치자네가 사망하고 미치히데가 습작하면서 변화했다. 당주 거실은 도쿄 제실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현: 도쿄 국립 박물관 정원 내 구조관).
1870년 12월 10일, 가록은 현미 1297ton 9두였다.[19] 구조 미치타카는 보신 전쟁 전공으로 1869년 상전록 800석을 하사받았다.[20]
1876년 8월 5일,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 및 상전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 공채 액수는 61070JPY 59전 8리(화족 수급자 중 108위)였다.[21] 구 공가 화족 중에서는 산조가와 이와쿠라가 다음으로 공채액이 많았다.[22]
1889년, 구 오섭가인 고노에 공작가, 다카쓰카사 공작가, 구조 공작가, 니조 공작가, 이치조 공작가 5가에 총 100000JPY이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하사되었다. 이는 황실과 특별한 관계인 구 오섭가 몰락을 막기 위한 천황의 배려였다. 이를 계기로 1894년부터 천황 어수금으로 "구 당상 화족 혜휼 사금"이 창설되어 그 이자가 구 당상 화족에게 분배되었다. 구조가는 구 당상가 공후작가로서 연 2회 900엔의 배당을 받았다.[23]
3. 주요 당주
이름 | 생몰년 | 비고 |
---|---|---|
구조 가네자네 | 1149년 - 1207년 | 후지와라 북가 적류인 후지와라 타다미치의 여섯째 아들.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결탁하여 고시라카와 법황의 비호를 받는 조카 코노에 모토미치와 대립하면서 섭정, 관백 역임. |
구조 요시쓰네 | 1169년 - 1206년 | 미나모토노 미치치카(도치카도노 미치치카)와의 조정 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실각한 아버지 구조 가네자네의 뒤를 이어 섭정이 되어 구조 가문의 섭관가로서의 지위 확립. |
구조 미치이에 | 1193년 - 1252년 | 셋째 아들 요리츠네가 요리토모의 이복 여동생의 증손에 해당하여 4대 쇼군으로 가마쿠라로 보내짐(섭가 쇼군). 조큐의 난 이후 장인인 사이온지 킨츠네가 친 막부파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간토 신지가 되어 막부에 대해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 |
구조 노리자네 | 1210년 - 1235년 | 구조 미치이에의 장남. |
구조 타네미치 | 1507년 - 1594년 | 전국 시대의 당주로, 가신 가라스마 사리타즈를 살해한 것으로 실각하여 한동안 지방에 칩거. |
구조 카네타카 | 1553년 - 1636년 | 구조 타네미치의 양자. 덴쇼 6년(1578년)부터 덴쇼 9년(1581년), 게이초 5년(1600년)부터 게이초 9년(1604년)까지 두 차례 관백 역임. |
구조 사키이에 | 1586년 - 1665년 | 구조 카네타카의 아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관백을 두 차례 역임. |
구조 미치후사 | 1609년 - 1647년 | 구조 사키이에의 아들. |
구조 카네하루 | 1641년 - 1677년 | 다카쓰카사 가문에서 구조 미치후사의 양자로 들어옴. |
구조 스케자네 | 1669년 - 1730년 | 구조 카네하루의 아들. |
구조 모로타카 | 1688년 - 1713년 | 구조 스케자네의 아들. |
구조 사다노리 | 1700년 - 1728년 | 구조 스케자네의 아들. |
구조 타네모토 | 1725년 - 1743년 | 구조 스케자네의 아들. |
구조 나오자네 | 1717년 - 1787년 | 니조 가문에서 구조 스케자네의 양자로 들어옴. |
구조 미치마에 | 1746년 - 1770년 | 구조 나오자네의 아들. |
구조 스케이에 | 1769년 - 1785년 | 구조 나오자네의 아들. |
구조 스케쓰구 | 1784년 - 1807년 | 니조 가문에서 구조 나오자네의 양자로 들어옴. |
구조 히사타다 | 1798년 - 1871년 | 구조 스케쓰구의 아들. |
구조 사다츠네 | 1823년 - 1859년 | 마지막 구조 간파쿠. |
구조 미치타카 | 1839년 - 1906년 | 마지막 후지 씨 장자, 세이메이 황후의 아버지. 보신 전쟁에서 오우 진무 총독으로 공을 세움. |
구조 미치자네 | 1870년 - 1933년 | 구조 미치타카의 장남. |
구조 미치히데 | 1895년 - 1961년 | 마지막 구조 공작. |
구조 미치히로 | 1933년 - 2017년 | 헤이안 신궁 궁사. |
구조 미치나리 | 1968년 - | 35대 당주, 메이지 신궁 궁사. |
4. 계보
후지와라노 카네자네를 시조로 하는 구조 가문은 오섭가 중 하나로,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을 배출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공작 작위를 받았다.
대수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1 | 구조 카네자네 | 1149년 | 1207년 |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셋째 아들. 섭정 및 관백.[4][5] |
2 | 요시츠네 | 1169년 | 1206년 | |
3 | 미치이에 | 1193년 | 1252년 | 가마쿠라 막부 4대 쇼군 요리츠네의 아버지. |
4 | 노리자네 | 1211년 | 1235년 | |
5 | 타다이에 | 1229년 | 1275년 | |
6 | 타다노리 | 1248년 | 1332년 | |
7 | 모로노리 | 1273년 | 1320년 | |
8 | 후사자네 | 1290년 | 1327년 | |
9 | 미치노리 | 1315년 | 1349년 | |
10 | 츠네노리 | 1331년 | 1400년 | |
11 | 타다모토 | 1345년 | 1398년 | |
12 | 미츠이에 | 1394년 | 1449년 | |
13 | 마사타다 | 1440년 | 1488년 | |
14 | 마사모토 | 1445년 | 1516년 | |
15 | 히사츠네 | 1469년 | 1530년 | |
16 | 타네미치 | 1507년 | 1594년 | |
17 | 카네타카 | 1553년 | 1636년 | |
18 | 유키이에 | 1586년 | 1665년 | |
19 | 미치후사 | 1609년 | 1647년 | |
20 | 카네하루 | 1641년 | 1677년 | |
21 | 스케자네 | 1669년 | 1730년 | |
22 | 모로타카 | 1688년 | 1713년 | |
23 | 유키노리 | 1700년 | 1728년 | |
24 | 타네모토 | 1725년 | 1743년 | |
25 | 나오자네 | 1717년 | 1787년 | |
26 | 미치사키 | 1746년 | 1770년 | |
27 | 스케이에 | 1769년 | 1785년 | |
28 | 스케츠구 | 1784년 | 1807년 | |
29 | 히사타다 | 1798년 | 1871년 | |
30 | 九条幸経|구조 유키쓰네|유키쓰네일본어 | 1823년 | 1859년 | |
31 | 미치타카 | 1839년 | 1906년 |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 |
32 | 九条道実|구조 미치자네|미치자네일본어 | 1870년 | 1933년 | |
33 | 九条道秀|구조 미치히데|미치히데일본어 | 1895년 | 1961년 | |
34 | 九条道弘|구조 미치히로|미치히로일본어 | 1933년 | 2017년 | |
35 | 九条道成|구조 미치나리|미치나리일본어 | 1968년 |
5. 가례(家礼)
후지와라 북가 적류인 후지와라 타다미치의 여섯째 아들 쿠조 카네자네를 시조로 한다. 카네자네는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결탁하여, 고시라카와 법황의 비호를 받는 조카 코노에 모토미치와 대립하면서 섭정 관백이 된 인물이다. 쿠조의 가호는 시조인 카네자네의 저택에서 유래되었지만, 쿠조의 보명에 따라 '도화'라고도 불렸다. 카네자네는 이후 미나모토노 미치치카(도치카도노 미치치카)와의 조정 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실각했지만, 미치치카 사후 카네자네의 아들 쿠조 요시츠네가 섭정이 되어 쿠조 가문의 섭관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카네자네 이후 귤씨를 가사로 삼아, 귤씨의 실질적인 씨장자인 코레사다의 지위 또한 세습하게 되었다.
요시츠네의 적남 미치이에는 셋째 아들 요리츠네가 요리토모의 이복 여동생의 증손에 해당하여 4대 쇼군으로 가마쿠라로 보냈다(섭가 쇼군).
미나모토노 스에나가는 [후지와라노 카네자네]의 가신으로 섬겼으며, 그 계통은 구조 가문의 제대부시나노 코지 가문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시나노 코지 가문 외에 토쿠노코지 가문, 이시이 가문, 아사야마 가문, 우고 가문, 시바 가문, 시마다 가문, 야노 가문, 히나츠 가문이 제대부로서 섬겼다.
타치바나 씨는 대대로 섭관 가문의 가신으로 섬겼으나, 타치바나 모리마사 이후 구조 가문에 섬기고 있다.
6. 구조 저택 터
근세의 구조 저택은 1604년(게이초 9년) 사키이에와 칸코의 혼례를 계기로 조영된 것에서 시작된다.[4][5] 이듬해 1605년(게이초 10년) 어소의 동남쪽으로 이전하여 사키이에의 저택과 아버지 가네타카의 은거 저택이 나란히 조영되었다.[5][6] 이후, 원어소 서쪽에 "별장"이 조영되었고, 이전까지의 저택은 상저택이라고 불렸지만, 1661년(만지 4년) 화재로 상저택은 소실되었다.[7] 1673년(간분 13년) 화재로 별장도 소실되어 구조가는 재건된 상저택을 거주지로 삼았다.[7] 1708년(호에이 5년) 상저택이 소실되어 1709년(호에이 6년) 본채 저택으로 재건된 것이 막말 유신 시대까지 남았다.[7]
1877년(메이지 10년) 정부에 의해 구조가의 부지가 매입되었다. 안채 등 주요 건물은 도쿄의 구조 저택으로 이전되었다. 교토 어원 남서부에는 정원 부분만이 정비되어 남아 있다. 구조 연못이라고 불리는 정원의 연못 안의 섬에는 진수사였던 이츠쿠시마 신사가, 연못가에는 십취정이라고 불리는 소쇄한 다실이 모두 현존하고 있다. 1934년(쇼와 9년) 교토에서 이전되었던 당주의 거실이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증되어 "구조관"으로 명명되었다.
7. 구조 가문의 재산
후지와라 북가의 적류인 후지와라 타다미치의 여섯째 아들 구조 가네자네를 시조로 하는 구조 가문은, 가네자네가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결탁하여 섭정 관백이 되면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구조 요시츠네가 섭정이 되면서 섭관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구조 미치이에는 아들 후지와라 요리츠네를 4대 쇼군으로 가마쿠라에 보내고, 자신은 조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주도권을 잡으며 막부에 대해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미야 소동과 료코 모반 사건에 연루되면서 가문의 권세는 쇠퇴했다.[18]
이후 구조 타다노리와 이치조 우치쓰구 등이 섭관에 취임하면서 가문의 지위가 다시 회복되는 듯했으나, 겐쿄 4년(1324년) 고다이고 천황이 구조 가문에게 일문 상수가 가쵸자의 지위에 올라야 한다는 윤지를 내리면서 가문의 권위가 다시 강화되었다.
1870년 12월 10일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1297.9ton였다.[17] 구조 미치타카는 보신 전쟁 전공으로 1869년에 상전록 800ton을 추가로 하사받았다.[18]
1876년 8월 5일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 및 상전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 공채 액수는 61070.598JPY였다.[19] 구 공가 화족 중에서는 산조가와 이와쿠라가 다음으로 많았다.[20]
1889년에는 구 오섭가인 고노에가, 다카쓰카사가, 구조가, 니조가, 이치조가의 5가를 대상으로 총 100000JPY이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하사되었다. 이는 황실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구 오섭가가 몰락하지 않도록 하는 천황의 배려였다. 이를 계기로 1894년부터 천황의 어수금으로 "구 당상 화족 혜휼 사금"이 창설되어, 그 이자가 구 당상 화족을 대상으로 분배되었다. 이로 인해 구조가는 구 당상가의 공후작가로서 900JPY의 배당을 연 2회 받을 수 있었다.[21]
7. 1. 봉건 시대의 소령(所領)
후지와라 북가 적류인 후지와라 타다미치의 여섯째 아들 구조 가네자네를 시조로 한다. 가네자네는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결탁하여 고시라카와 법황의 비호를 받는 조카 고노에 모토미치와 대립하면서 섭정 관백이 된 인물이다.1204년(겐큐 원년) 가네자네는 총처분장을 작성하여 소령 보전을 꾀했는데, 총 60개소에 달하는 장원이 기재되어 있다. 1250년(겐초 2년) 가네자네의 손자 구조 미치이에는 소령 확보를 위해 총처분장을 작성했는데, 총 112개소에 달했다. 이때 이치조 사네츠네에게 양도된 소령은 후에 이치조가령의 기초가 되었고, 구조 다다이에에게 양도된 소령은 여자 1기분을 흡수하여 구조가령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 말부터 남북조 시대의 동란 속에서 구조가령은 점차 쇠퇴하여, 1396년(오에이 3년) 당시에는 불과 16개소가 당지행으로 남아 있었고, 전국 시대 말기의 가령 목록에는 21개소를 싣고 있지만, 이미 껍데기만 남은 것이었다.
에도 시대의 소령 표고는 처음 2,000석, 나중에는 3,000석이었다.
7. 1. 1. 막말의 영지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구고구령취조장 데이터베이스』에서 산출한 막말기의 구조가 영지는 다음과 같다.(7개 마을, 3,052석 여)[1]국 | 군 | 마을 | 석 |
---|---|---|---|
야마시로국 | 아타고군 | 이치조지 마을 | 22석 여 |
야마시로국 | 아타고군 | 마쓰가사키 마을 | 252석 여 |
야마시로국 | 아타고군 | 시즈하라 마을 | 101석 여 |
야마시로국 | 오토쿠니군 | 엔묘지 마을 | 712석 여 |
야마시로국 | 키이군 | 후카쿠사 마을 | 623석 여 |
야마시로국 | 키이군 | 히가시쿠조 마을 | 340석 |
셋쓰국 | 토요시마군 | 이케다 마을 | 1,000석 |
7. 2. 메이지 시대 이후의 재산
메이지 유신 당시 당주 구조 미치타카는 보신 전쟁에서 오우 진무 총독으로 공을 세워 메이지 2년(1869년)에 상전록 800석을 하사받았다.[1] 같은 해 6월 17일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생겨나면서 구조 가문도 옛 공가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2][3]메이지 9년(1876년) 당시 미치타카는 도쿄시 간다구 간다 니시키초에 거주하였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미치타카는 옛 섭가로서 최고위인 공작위에 올랐다.[4] 같은 해에 장전장 및 자향간 지후에 임명되었다.[5] 미치타카의 부인 가즈코는 옛 쓰시마 번주 소 요시카즈의 딸이다.[6]
1906년 1월 4일 미치타카가 사망하자 장남 미치자네가 작위를 계승했다.[7] 미치자네는 영국 유학 후 궁내성에서 식부관, 시종, 장전차장, 장전장을 역임했고,[8] 귀족원 공작 의원으로도 활동하며 세습 재산 심의 회장 등을 맡았다.[9] 미치자네의 부인 게이코는 오타니 고에이 백작의 차녀이다.[10]
미치타카의 넷째 아들 구조 요시마사와 다섯째 아들 구조 요시유키는 분가하여 각각 남작이 되었다.[11] 구조 나오타다의 아들 쓰루도노 타다요시도 남작에 서임되었다 (쓰루도노 가).[12]
1933년 1월 19일 미치자네가 사망하자 장남 미치히데가 공작위를 계승했다.[13] 장전을 맡는 동시에 귀족원 공작 의원으로 활약했다.[14][15] 미치히데의 부인 후미코는 시마즈 타다마로 백작의 차녀이다.[16]
구조 공작 가문은 2대 미치자네 습작 후에도 오랫동안 공가의 생활 양식을 유지했다. 당주의 거실은 교토에서 아카사카다이 후쿠요시초로 이전했으며, 집안에서는 어전말만 사용했다. 가신 이하 신분이 낮은 사용인은 당주에게 말을 거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생활은 1933년 미치자네가 사망하고 미치히데가 습작하면서 변화했다. 당주의 거실은 도쿄 제실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현: 도쿄 국립 박물관 정원 내 구조관).
1870년 12월 10일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1297석 9두였다.[17] 구조 미치타카는 보신 전쟁 전공으로 1869년에 상전록 800석을 추가로 하사받았다.[18]
1876년 8월 5일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 및 상전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 공채 액수는 61,070엔 59전 8리(화족 수급자 중 108위)였다.[19] 구 공가 화족 중에서는 산조가와 이와쿠라가 다음으로 많았다.[20]
1889년에는 구 오섭가인 고노에 공작가, 다카쓰카사 공작가, 구조 공작가, 니조 공작가, 이치조 공작가의 5가를 대상으로 총 100000JPY이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하사되었다. 이는 황실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구 오섭가가 몰락하지 않도록 하는 천황의 배려였다. 이를 계기로 1894년부터 천황의 어수금으로 "구 당상 화족 혜휼 사금"이 창설되어, 그 이자가 구 당상 화족을 대상으로 분배되었다. 이로 인해 구조가는 구 당상가의 공후작가로서 900JPY의 배당을 연 2회 받을 수 있었다.[21]
8. 서류(庶流)
메이지 시대에 쓰루도노가·쇼엔가가 분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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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模三浦一族の滅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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鷹司教平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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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は九条道房の女待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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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鷹司政通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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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山藩筆頭家老・伊木忠恭の養子になるが、離籍し靏殿家として独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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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公式上は幸経の長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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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一条実輝の養子になるが実家に戻り分家。妻は九条武子。
[28]
문서
松尾善徳の子。
[29]
문서
樋口健太郎「八条院領の伝領と八条良輔」(初出:『年報中世史研究』40号(2015年)/所収:樋口『中世王権の形成と摂関家』(吉川弘文館、2018年) ISBN 978-4-642-029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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