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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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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진회는 1904년 결성된 친일 단체로, 대한제국 말 일본의 침략 정책에 협력하며 한일 합방을 주장했다. 독립협회 출신 인사들과 동학 세력이 결합하여 결성되었으며, 송병준, 이용구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활용하여 군수 물자 수송, 여론 조작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일진회는 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일 합방 이후 해산되었으며, 일진회에 대한 평가는 친일 매국 단체라는 부정적 평가와, 일부 일본 우익의 개혁 세력이라는 긍정적 평가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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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일진회
개요
유형정치 조직
존속 기간1904년 ~ 1910년
설립 목적러일 전쟁 지원, 친일적 활동, 한일 합방 추진
주요 활동러일 전쟁 지원, 친일적 활동, 한일 합방 청원, 사회 운동 탄압
해체 시기한일 병합 조약 이후 강제 해산
역사
설립 배경러일 전쟁 발발
송병준 등의 친일 성향 인사들의 주도
초기 활동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지원
친일적 선전 활동
을사조약 체결 지지
친일 행위한일 합방 청원 운동 전개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에 적극 협력
사회 운동 탄압항일 의병 운동 탄압
독립 운동 세력 감시 및 탄압
해산 과정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강제 해산
일부 친일파는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 수여 및 혜택 수령
조직 및 구성
창립 주도 인물송병준
주요 구성원이용구
윤시병
박제빈
기타 친일 성향 인사 다수
조직 체계중앙 조직 및 각 지역 지부 구성
재정 지원일본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 및 특혜 수령
비판 및 평가
친일 행적대한제국 국권 피탈에 적극 협력
한일 합방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추진
비판한국 사회로부터 친일 반민족 행위 단체로 비판받음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기여했다는 평가
관련 연구친일파 연구 및 일제강점기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단체
관련 문서
관련 법규한일 병합 조약
관련 인물송병준
관련 사건러일 전쟁, 을사조약, 한일 병합 조약
관련 단체대한자강회, 국민동지찬성회
기타
참고 자료警秘第四一〇六號ノ一
일진회, 친일의 대명사로 부활?

2. 창립 과정 및 배경

러일 전쟁 발발 직후,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한 송병준은 일본군의 세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1904년 8월 18일, 송병준은 전 독립협회 회원이던 윤시병, 유학주 등과 연대하여 '유신회'를 조직하고 임시 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했다. 8월 20일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경무사 신태휴를 통해 해산을 명했으나, 일본 헌병들이 이를 막고 오히려 경무청 순검을 검속하겠다고 위협하며 일진회를 옹호하였다.[10]

일진회는 창립과 함께 다음과 같은 4대 강령을 발표했다.


  • 황실을 존중하고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할 것
  •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 정부의 개선된 정치를 실시할 것
  • 군정과 재정을 정리할 것


일진회는 국정 개혁과 문명 개화를 표방하며, 회원들에게 단발과 양복 착용을 권장했다. 그러나 1904년 10월 22일 평의원 회의에서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 군략상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문을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헌병대장 다카야마,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전달하여, 친일적 성격을 드러냈다.[10]

한편, 동학의 잔여 세력을 규합한 이용구는 1904년 9월 진보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조직 확장에 힘쓰고 있었다. 송병준은 진보회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흡수하기 위해 이용구와 협상하였고, 1904년 12월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10]

2. 1. 시대적 배경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일본)이 청나라에 승리하자, 조선(李氏朝鮮)에서는 명성황후가 조선에서 더욱 강화되는 일본의 지배력을 경계했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의미도 포함하여 친러 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그 후, 을미사변에서 명성황후가 암살되고(살해 현장에 있던 순종의 말에 "을미사변에 즈음하여, 현에 짐이 목격한 국모의 원수, 우범선"이라고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우범선은 '우는 작년 왕비를 시해한 것은 자신이라고 하는 뜻을 누설하였다'라고 스스로 범인임을 밝히고 있다.), 1896년 2월 11일, 친러파인 이범진과 이완용 등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고종 (조선)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업무를 보게 되었다(러시아 공사관 피신). 일본의 지원을 받던 개화파 정권은 붕괴되었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1896년 7월, 개화파의 계보를 잇는 자들이 조선의 자주 독립, 법치주의 확립, 신교육 진흥, 농업 개량, 공업 육성, 애국심, 군주에 대한 충성심 함양을 호소하며, 이완용 등이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1897년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두드러지자 독립협회는 반러 투쟁을 전개하며, 국왕 고종에게 궁궐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고종은 궁궐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세력은 조선반도에서 후퇴했지만, 독립협회의 주장은 점차 수구파 관료와의 갈등을 초래하여, 결국 고종의 칙령에 의해 독립협회는 해산되었다.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반도에서 후퇴함에 따라 다시 일본의 세력이 증대하여 대한제국의 경제적 지배를 강화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반도와 만주의 이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러일전쟁 중 일본군 통역을 맡았던 송병준이 일본의 영향하에 정치 개혁을 위한 조직을 계획했지만, 이 계획은 원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에게 받아들여졌다.

2. 2. 창립 주도 세력

러일 전쟁 발발 직후,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한 송병준은 일본군의 세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1904년 8월 18일, 송병준은 전 독립협회 회원이던 윤시병, 유학주 등과 연대하여 '유신회'를 조직하고 임시 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했다. 8월 20일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경무사 신태휴를 통해 해산을 명했으나, 일본 헌병들이 이를 막고 오히려 경무청 순검을 검속하겠다고 위협하며 일진회를 옹호하였다.[10]

2. 3. 진보회와의 통합

한편, 동학의 잔여 세력을 규합한 이용구는 1904년 9월 진보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조직 확장에 힘쓰고 있었다. 송병준은 진보회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흡수하기 위해 이용구와 협상하였고, 1904년 12월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10] 이를 통해 일진회는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3. 조직 및 운영

이용구는 지방지부 회원의 거의가 진보회 회원이라는 명분으로 13도 지방 총회장 직에 앉았으며, 배후에서 일진회를 조종하던 송병준은 이듬해 평의원장에 취임하였다. 송병준은 일제의 계략에 호응하여 윤시병을 멀리하고 이용구를 매수하여 1905년 12월 22일 총회에서 회장에 이용구, 부회장에 윤시병, 지방총회장에 송병준, 평의원장에 홍긍섭을 선출하였다.[10] 일진회는 일본인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한편 일본군의 지원을 비밀리에 받아 활동했다. 창립 당시 300명, 진보회와 통합한 뒤 곧 수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고, 한일 병합 이후에는 '100만 회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10만 명 정도였다. 이와 같이 조직된 일진회와 연계된 외곽단체나 주변단체 또한 조직되어 일제와 일진회의 사주와 매수 공작에 의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일제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한성부를 중심으로 일본군의 보호 아래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미미한 단체에서 시작해 일본의 지원으로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가진 전국적인 단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일진회는 회원에게 회비를 걷어 사용하는 것을 운영 규칙으로 정했으나, 실제로는 정규적인 회비 징수가 많지 않았고, 일정한 수입 재원도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송병준이 일제의 군사 기밀비로 운영했다.[10] 일진회가 매국 행위를 점차 명확히 하자 일본 제국은 이를 이용하고자 50000JPY을 몰래 지원하여 특별히 보호하였다. 러일 전쟁 중 일진회 회원들이 일본군을 위해 수송, 정탐, 노역 등에 참여한 대가로 일본군으로부터 총 89940JPY, 전쟁 종료 후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JPY씩의 기밀보조금, 같은 해 5월 15일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100000JPY을 각각 교부받았으며, 같은 해 8월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보조금 260000JPY을 받았다. 송병준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외무성 장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나 이토 히로부미가쓰라에게 보낸 편지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일진회가 이토 히로부미가쓰라 등 일제 당국자들로부터 이따금 금품을 받아 매국 행위를 한 것이 확실했다. 결국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히 연결되어 일제의 재정 지원을 받은 것이다.[10] 일진회 규칙에는 고문을 두도록 되어 있지 않았으나, 일진회 배후에서 일본인 고문들이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일제, 특히 군부에서 파견된 일본인들로 구성된 고문이 배후에서 조종하였다.[11]

3. 1. 조직 구조

일진회는 중앙 조직과 지방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에는 회장, 부회장, 평의원장, 평의원 등의 임원을 두었다. 1905년 당시 초기 임원은 다음과 같다.[12]

직책이름비고
회장윤시병전 관찰사
부회장유학계전 군수
13도 총회장이용구무관 호걸
평의원장송병준
평의원윤길병, 홍긍섭, 양재익, 염중모, 윤갑병, 엄계영, 김진진, 정경수, 김택현, 윤정식, 이행민, 고청룡, 조성원, 한교형, 한석진, 원세기, 김동욱



이후 윤시병의 요청으로 이용구가 회장에 취임하였다.[10] 그는 진보회 출신 회원들을 기반으로 13도 지방총회장 직을 맡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지방에는 13도 지방총회장을 두어 각 지역의 조직을 관리하였다.

1905년 당시 회원 수는 전국적으로 28만 4천 명이 넘었으며, 특히 평안도함경도에 많았다고 한다.[12]

3. 2. 회원 구성

초기 일진회 회원은 300명 정도였으나, 진보회와 통합한 이후 수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일진회는 '100만 회원'을 구호로 내걸었으나, 실제 회원 수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10] 1905년 당시 회원 수는 전국적으로 28만 4천 명을 넘었으며, 특히 평안도함경도에 많았다고 한다.[12]

초기 임원은 다음과 같다.[12]

직책이름비고
회장윤시병전 관찰사
부회장유학계전 군수
13도 총회장이용구무관 호걸
평의회장송병준
평의원윤길병, 홍긍섭, 양재익, 염중모, 윤갑병, 엄계영, 김진진, 정경수, 김택현, 윤정식, 이행민, 고청룡, 조성원, 한교형, 한석진, 원세기, 김동욱



이후 윤시병의 요청으로 이용구가 회장에 취임했다.

3. 3. 재정 운영

일진회는 회원들의 회비를 걷어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정규적인 회비 징수가 많지 않았고 일정한 수입원도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송병준이 일본군의 군사 기밀비로 운영 자금을 조달했다.[10]

일진회가 매국적인 행각을 드러내자 일본 제국은 이를 이용하고자 50000JPY을 몰래 지원하여 특별히 보호하였다. 러일 전쟁 중 일진회 회원들이 일본군을 위해 수송, 정탐, 노역 등에 참여한 대가로 일본군으로부터 총 89940JPY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JPY씩의 기밀보조금을, 같은 해 5월 15일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100000JPY을 각각 교부받았다. 같은 해 8월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보조금 260000JPY을 받았다.[10]

송병준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외무성 장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 이토 히로부미가쓰라에게 보낸 편지 등의 내용을 보면, 일진회가 이토 히로부미가쓰라 등 일제 당국자들로부터 수시로 금품을 받아 매국 행위를 한 것이 확실하다. 결국 일진회는 일본군의 특무 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하게 연결되어 일제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10]

3. 4. 일본인 고문

일진회는 규칙상 고문을 두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일본 제국, 특히 군부에서 파견된 일본인들이 배후에서 조직을 조종하였다.[11] 일진회 활동에는 우치다 료헤이와 일한전보통신 사장 기쿠치 츄자부로(菊池忠三郎) 등 일본인이 깊이 관여하였다.[23]

4. 주요 활동

일진회는 창립 초기부터 해산될 때까지 일본 국수주의자 및 낭인들의 조종을 받으며 일제의 침략 정책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직후, 일제는 대한제국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고문정치제제'를 확립하고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진회는 일본군을 위해 군수품을 운반하고(1905년 6월 10일~10월 20일), 함경도에서 간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러시아군 동태를 정탐하는 등 일제의 전쟁 수행을 지원했다. 또한, 경의선 철도 부설 공사(1904년 10월 ~ 1905년 9월)에 20여만 명의 회원을 무보수로 동원하여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 동맹, 포츠머스 조약 등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승인되자, 일진회는 1905년 11월 6일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길 것을 주장했다. 이는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이어져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탈되고, 1906년 2월 한성부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대한제국은 일제 식민지화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07년 일진회가 일본 제국 황태자 다이쇼대한제국 방문 때 서울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 사진에는 일진회의 이름이 담긴 대형 아치 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해 있으나 아치의 중간에 '받들어 맞이한다'는 의미의 '봉영(奉迎)'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진회는 통감부의 지시를 받으며 매국 행위를 가속화했다. '일진회 선언서'와 을사늑약에 대한 국민적 분노에도 불구하고, 일진회원들은 관직에 기용되었고, 송병준이완용 내각의 농상공부대신(후에 내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송병준이완용과 결탁하여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고, 일진회원들에게 시위를 지시하여 결국 고종 황제는 강제로 퇴위당했다. 이후 일제는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여 통감부의 내정 간섭을 강화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신문지법(7월 24일), 보안법(7월 27일)을 공포하게 하여 한국민의 항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했다.

4. 1. 초기 활동

일진회는 독립협회에서 보이는 민주주의와 독립국가주의 사상을 계승하여 “정치개혁과 민주자유”를 기치로 내걸었다.[13] 러일전쟁 당시 설립되어, 일한 군사동맹을 통해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이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을 막아 조선의 부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4년 12월 22일, 윤시병은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의 회칙을 발표했다.[14]

번호내용
1본 회원은 일체 단발할 것
2모자는 외국의 모양을 모방하여, 힘써 국산품으로 제작할 것
3평상복은 현재의 국내 관습을 바꾸지 않을 것
4평상복 겉옷은 좁은 소매의 옷을 사용하여 염색할 것. 다만, 공복과 사복은 이에 한하지 않음
5양복의 한 가지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하되, 지극히 간략함을 목적으로 하여 재산을 낭비하지 않을 것


4. 2. 일제 침략 정책 협력

일제는 러일 전쟁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한일의정서를,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고문정치제제'를 확립하고 식민지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일진회는 일제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위해 군수품을 운반하고(1905년 6월 10일~10월 20일), 함경도에서 간도까지 러시아군 동태를 정탐했다. 경의선 철도부설공사(1904년 10월 ~ 1905년 9월)에는 회원 20여만 명이 무보수로 동원되어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25] 영국, 미국 등 열강이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8월 제2차 영일 동맹,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하면서,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좌우되었다.

대한제국 보호국화 소문이 퍼지자, 일진회는 1905년 11월 6일 일본인 고문이 기초한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외교권 이양을 주장했다. 이는 을사늑약 강요 10여 일 전 발표된 것으로, "일본의 보호지도를 받기 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1월 17일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듬해 2월 한성부에 통감부를 설치,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일진회는 통감부 휘하 우치다 료헤이의 지시를 받으며 매국 행위를 본격화했다. '일진회 선언서'와 을사늑약에 대한 국민적 분노에도 불구하고, 일진회원들은 관직에 기용되었고, 송병준이완용 내각의 농상공부대신(후에 내부대신)이 되었다.

일제는 일진회를 통해 침략 정책을 강행했고, 일진회는 기관지 국민신보를 통해 이를 옹호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송병준이완용과 결탁, 고종 양위를 강요하고 일진회원들에게 시위를 지시하여 결국 고종 황제는 양위했다. 일제는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을 체결, 통감부의 내정 간섭을 합리화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신문지법(7월 24일), 보안법(7월 27일)을 공포하게 하여 한국민의 항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했다. 대한자강회가 해산되고 한국군 해산으로 항일의병이 봉기하자, 일진회는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25] 등의 조종 하에 '자위단'을 조직,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토벌에 앞장섰다.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살해된 일진회원은 9260명, 부상자는 10명, 소각된 가옥은 360호, 재산 피해액은 50501.31KRW에 달했다.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 방문 시 일진회는 환영 행사를 주도했고, 전국에서 유세, 강연회를 열어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 국민신보사, 시천교회, 자선부인회 등 일진회 외곽 단체와 자혜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대한신문사 등 주변 단체들도 일제의 침략 행각을 지원했다.

일진회 설립 초기 일본은 일진회를 낮게 평가했으나,[15] 송병준은 일본 마쓰이시 야스지 대좌에게 서신을 보내 고종과 관료 주도로는 대한제국 유지가 어렵다고 주장하며 경의선 부설 협력을 제의했다.[16]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은 물자 수송을 위해 경의선 부설을 계획했으나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일진회가 무상 지원을 통해 회원 14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 일진회는 일본군 군수물자 수송에도 10만 명 이상을 동원, 자비로 무기와 식량을 전장까지 운반했다. 또한 일진회 회원들은 장발상투를 버리고 단발을 자주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삼았다. 러시아 공사관 피신으로 단발령이 폐지된 상황에서 이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1905년 10월, 일본 정부는 한국 보호권 확립 방침을 결정하고,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 제2차 한일협약 체결을 강행했다. 이에 앞서 일진회는 11월 5일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고 일본의 지도와 보호를 받아 조선의 독립과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했다.[17]

4. 3. 의병 탄압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이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 투쟁이 격화되자 일진회는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 탄압에 앞장섰다.[25] 일진회는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일본군과 협력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러한 일진회의 매국 행각은 당시 의병들로부터 커다란 분노를 샀는데,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살해된 일진회원은 9,260명, 부상자는 10명, 소각된 가옥은 360호, 재산 손해액은 50501.31KRW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수많은 일진회원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었음을 보여준다.

4. 4. 여론 조작 및 선동

일진회는 기관지 '국민신보'를 발행하고, 전국 각지에서 유세와 강연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침략 정책을 옹호하고 합방 여론을 조성하였다.[25] 1905년 11월 6일에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의 보호지도를 받기 위해 내치,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늑약이 강요되기 10여 일 전에 발표된 것으로, 일진회의 매국 행위 정체를 공표한 것이었다.[17]

1909년 12월 4일에는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여 한일합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다.[25] 이는 경술국치가 단행되기 약 8개월 전의 일로서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 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진회의 성명은 일제가 조작한 여론 환기 수단이었으며, 한국 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켜 성토와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를 '노회선언'(奴會宣言)이라 혹평하였고, 김윤식 등은 송병준, 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기까지 했으나 일제의 비호로 묵살되었다.

5. 한일합방과 일진회 해산

일진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형성 과정에서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타협안인 아우스글라이히처럼 헝가리인과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이 대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과 같이, 한일 합방으로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연방 체제를 수립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일진회는 일제의 한국 병탄에 앞잡이 노릇을 했으나, 1910년 9월 26일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될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에 의해 해산료 15만을 받고 해산되었다. 이는 형식상 1주일의 유예 기간을 둔 자진 해산이었다.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에 합병 청원 및 간도 이주 소요자금으로 300만을 요구했으나, 가쓰라 총리는 3000만이라도 지원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했다. 일진회 주요 간부들 가운데 송병준에게는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주었고, 이용구에게는 10만을 주는 데 그쳤다.[22]

5. 1. 합방 청원

1909년 12월 4일, 일진회는 한국과 일본이 연방제를 이루어 대등하게 통합되어야 한다는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19]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일본에 넘기는 것으로, 사실상 병합을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성명서는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 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를 '노회선언(奴會宣言)'이라 비판하며 강력하게 규탄했고, 중추원의장 김윤식 등은 송병준, 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기까지 했으나 일제의 비호로 묵살되었다.

일진회는 회원 100만 명의 성명이라 칭하며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막대한 비용과 많은 인명을 희생하여 한국을 독립시켜 주었다. 또한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의 손해가 갑오의 20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러시아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막아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국은 이에 감사하지 않고 여러 나라에 의지하며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조약을 맺게 된 것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 헤이그 밀사 사건도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지만 이것 또한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우리나라 황제 폐하와 일본 천황 폐하께 간청하여 우리도 일등국민의 대우를 받고 정부와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자”라고 주장하며 한국과 일본의 연방 형식의 동등 합방을 요구하였다.[19]

이 상소문은 우치다 요헤이가 이끄는 국수주의 단체 흑룡회의 다케다 노리유키가 작성했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 카쓰라 다로 총리(당시), 테라이 마사타케 육군대신에게 사전에 통보되어 동의를 얻었다.

궁지에 몰린 일진회는 간부나 회원 중에서 퇴회하는 자가 속출하여 불과 수일 만에 90여 명에 달하였으며, 이용구와 우치다 료헤이도 일본헌병대에 신변을 보호받아야만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용구 등 일제 앞잡이들과 고문인 우치다가 결탁하여 일진회의 외곽단체인 한성보신사, 대한상무조합수, 국민동지찬성회 등 유명무실한 10 여개 단체를 사주, 매수하여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지지하도록 조작하고 일제 병탄을 합리화하는 매국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5. 2. 일제의 배신과 강제 해산

일진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형성 과정에서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타협안인 아우스글라이히(키에제제시)로 인해 헝가리인과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이 대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한일 합방으로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연방 체제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일진회가 일제의 한국 병탄에 앞잡이 노릇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9월 26일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될 때 일진회 역시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에 의해 해산당했다. 형식상으로는 1주일의 유예 기간을 둔 자진 해산이었고, 해산료로 15만 원을 받았다.[22]

당시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에 합병 청원 및 간도 이주 소요자금으로 3백만 엔을 요구했으며, 가쓰라 총리는 3천만 엔이라도 지원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일진회 주요 간부들 가운데 논공행상으로 송병준에게만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주었고, 이용구에게는 10만 원을 주는 데 그쳤다.

일진회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한국과 일본 양국의 동등한 지위에 기반한 '일한공영'이었으며, 일본이 생각하는 외지로서의 병합과는 전혀 달랐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일한 병합에 대한 한국 측의 요구를 일절 받아들이지 않을 방침이었기 때문에 일진회의 청원을 거부했다.[20][21]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거액의 부채와 토지 인프라에 막대한 예산이 필요해져 일본 국민의 이해를 얻기 어렵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한편, 일진회의 송병준도 한일의 대등 합방은 국력 차이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일 병합론을 전개했고, 1910년(메이지 43년) 제2차 가쓰라 내각에 의해 대한제국 강제 병합이 이루어졌다. 한국 병합 후, 한국통감부는 친일파/비친일파 정치 단체의 대립에 의한 치안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의 모든 정치 결사를 금지하고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일진회는 병합 직후인 1910년(메이지 43년) 9월 12일 일본 정부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고, 해산 비용 15만 엔을 받고 같은 해 9월 25일 해산했다.[22] 일진회를 이끌고 한일 병합론을 주장했던 송병준 등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병합 후 조선 정치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고, 그 공적으로 송병준에게는 자작(伯爵)위가 수여되었다.

한편으로는 한일의 대등 합방을 일본 측이 거부하고 한국을 흡수하는 형태로 병합했다는 것에 원 회원들 사이에는 실망과 분노가 퍼져, 후의 3·1 운동에 참여한 사람도 많았다. 일진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용구는 일본 정부로부터 보내진 화족 작위를 거절하고, 일진회 해산 1년도 되지 않아 분사했다. 그는 객혈로 입원했을 때 방문한 일본인 친구에게 일진회 활동에 대한 후회를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5. 3. 일진회 주요 인물들의 최후

일진회 간부들은 한일합방 이후, 조선귀족 작위를 받거나 일제의 통치 기구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었으나, 민족반역자라는 낙인은 피할 수 없었다. 송병준은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지만,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혔다.[22] 이용구는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사했다.[21]

6. 일진회에 대한 평가

일진회에 대한 평가는 그 활동에 대한 해석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크게 다르다.

기무라 칸은 한국 병합 직전기에 일본에 협력적이었던 한국의 정치 세력에는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한국 관료들과 일진회 같은 민간 단체의 두 파벌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토는 이완용을 한국 측 협력자로 선택했고, 그의 지지를 배경으로 이완용 등은 영향력을 확대했다. 한편, 일진회는 일본 측 민간 단체(흑룡회 등)와 제휴하여 이토·이완용 등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완용 등은 일본에 협력함으로써 일본 측에 개입 구실을 주지 않도록 하고 대한제국 유지를 도모한 반면, 일진회는 왕조 국가의 틀 자체를 부정하고 한일 양국민이 일본 천황 아래에서 동등한 국민(일등 국민)이 되는 것을 생각했다는 점에 양측의 근본적인 대립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일진회는 그러한 입장에서 합병(합방)에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지만,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라는 형태의) 한국 병합이 성립되면서 그 역할은 종료되고 버려졌다. 반면 이완용 등은 일본과 거래를 하는 현명한 자세로 임하여 병합 후에도 조선 귀족 지위를 얻었지만, 한일 간 국력 차이 앞에서 그러한 현명함조차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조선 귀족의 지위도 명예적인 것에 불과했다[24].

오선화는 저서 『한국 병합의 길』에서 “민족의 존엄 확보를 위해 대아시아주의를 내걸고 국내에서 최대한 노력한 이용구 등을 매국노로 단정 짓고, 국내에서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해외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한 안창호이승만을 애국자·항일 투사로 높이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평가했다.

6. 1. 긍정적 평가 (일본 일부)

일본의 일부 우익 인사들은 일진회를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한 개혁 세력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들은 일진회가 일본과 협력하여 조선의 발전을 이끌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김완섭 등은 일진회가 이씨조선 정부의 압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 계급과 지배 계급 출신의 개혁파 지식인 그룹, 그리고 조선 근대화를 지원하고자 한 일본 세력이 결집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6. 2.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 및 일본 일부)

대한민국의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일진회를 친일 매국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24] 일진회가 국권 회복과 민족 자결을 위한 노력을 저버리고, 일제의 침략에 앞장선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일진회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 평범사에서 출판한 『조선을 아는 사전』에서는 일진회를 “친일 매국 단체”라고 부르며, 공개적인 운동 외에 스파이 활동 등에도 협력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친일 단체로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민중의 반발을 불러온 부정적인 결과가 더 컸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일진회의 실체가 “이용구와 송병준 등의 권력 집단”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 록명해마의 『이토 히로부미는 왜 살해되었는가』(1995)에서는 일진회를 일본이 일본군 통역관이었던 송병준에게 만들게 한 친일파 정치 단체라고 한다. “일진회는 일본의 국수주의 단체인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 같은 유력자를 고문으로 두고, 일본의 보호를 받아 조선 국내의 반일 분자와 반일 운동의 스파이 활동을 하여 대중의 반감을 샀다. 특히 러일 전쟁 후, 일진회가 일본의 지도와 보호를 요청하는 선언을 발표하여 맹렬한 반발을 받았다. 그중 ‘공진회’나 ‘대한자강회’ 같은 민족주의 단체들로부터 일제히 매국노로 비난받았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 삼성당의 『조선의 역사 신판』에서는 일진회가 1909년(메이지 42년)에 발표한 선언에 대해 민중의 목소리를 대표하지 않았고, 또한 “회원 100만 명”도 실체 없는 숫자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 야마다 아키라는 당시 대한제국은 정당 정치가 아니었고, 일진회가 한일 합방을 원했다고 해도, 그것은 한국인의 민의를 보여준 것이 아니며, 일진회는 한국 민중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24]


이처럼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는 한국인의 민의를 대표하지 않았으며, '회원 100만 명'도 실체 없는 숫자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본 내에서도 일진회가 한국 민중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견해가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jacar.go.[...]
[2] 서적 일본 고지도에도 독도 없다. [Dokdo is not on Japanese maps] Jaeumgwa Moeum
[3] 웹사이트 http://100.naver.com[...] 2024-09-01 #추정 날짜, Dead link 정보 이용
[4] 웹사이트 http://100.naver.com[...] 2024-09-01 #추정 날짜, Dead link 정보 이용
[5] 뉴스 http://english.kbs.c[...] 2006-06-30 #기사 작성일 추정
[6] 웹사이트
[7] 서적 日韓合邦秘事
[8] 서적 大東亜戦争への道
[9] 서적 日韓合邦秘史
[10] 서적 最近の韓国: 日露戦争中に於ける韓国の諸問題 https://books.google[...]
[11] 논문 資料紹介 韓国侍従武官からみた日本の韓国併合 : 『魚潭少将回顧録』より「韓国末期の外交秘話」 https://hdl.handle.n[...] 九州工業大学
[12] 서적 韓国経営 https://books.google[...]
[13] 웹사이트
[14] 서적 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https://books.google[...]
[15] 웹사이트
[16] 웹사이트 https://www.jacar.ar[...]
[17] 서적 朝鮮最近史
[18] 서적 韓国併合
[19] 간행물 統監府文書 8、警秘第4106号の1
[20] 간행물 一進会請願書の取り扱いにつき曾禰統監請訓 1909-12-05
[21] 간행물 桂首相より一進会顧問・杉山茂丸宛内訓 1910-02-02
[22] 서적 日韓合邦秘史
[23] 간행물 伊藤公爵薨去後ニ於ケル韓国政局並ニ総理大臣李完用遭難一件 3 隆煕4年〔明治43年〕1月7日から〔明治43年〕2月18日 国立公文書館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4] 서적 (제목 없음)
[25] 웹사이트 武田範之(読み)たけだ はんし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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