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1892년 독일에서 태어난 나치당의 초기 핵심 인물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받았으며, 이후 나치당에 입당하여 초기 조직 확장에 기여했다. 그는 나치당 내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을 옹호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갈등을 겪었고, 1932년 당직을 사임했다. 이후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장검의 밤 희생자 - 쿠르트 폰 슐라이허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독일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국방군 내 영향력을 행사하며 총리까지 역임했으나, 권력 강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치당과 연계하려다 장검의 밤 사건 때 암살당했다.
  • 장검의 밤 희생자 - 프리츠 게를리히
    프리츠 게를리히는 독일의 언론인이자 반나치 운동가로, 나치즘의 위험성을 깨닫고 《뮌히너 노이예스테 나흐리히텐》 편집장과 《올바른 길》 창간을 통해 나치즘을 비판하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 대관구지휘자 - 발두어 폰 시라흐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 독일 시대 히틀러 유겐트의 국가 지도자였던 독일 정치인으로, 나치즘에 심취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합법적인 청소년 단체로 성장시키고 빈의 가우라이터 겸 제국총독으로 활동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대관구지휘자 - 요제프 괴벨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이자 정치가로서 뛰어난 선전 능력으로 나치당의 권력 장악에 기여하고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서 독일의 문화와 언론을 통제하며 전쟁 선동에 앞장섰으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으로 평가받고 베를린 함락 직전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 독일의 반자본주의자 -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가, 언론인, 혁명가이자 공산주의 사상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등을 통해 역사적 유물론, 계급 투쟁, 자본주의 비판 이론을 체계화하여 사회주의 운동과 현대 사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의 반자본주의자 - 빌헬름 바이틀링
    빌헬름 바이트링은 19세기 독일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정의자 동맹에서 활동하며 초기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기독교적 메시아니즘과 공산주의를 결합한 사상으로 노동자 운동을 전개했으나 후기에는 정치 활동에서 은퇴하여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슈트라서, 1928년경
슈트라서, 1928년경
본명그레고어 슈트라서
출생일1892년 5월 31일
출생지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가이젠펠트
사망일1934년 6월 30일
사망지나치 독일, 베를린
사망 원인총살형
경력
소속 정당푈키셔 블록 (1922년–1925년)
나치당 (1925년–1932년)
직업약사
군사 경력
충성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군종바이에른 왕국 육군
부대자유군단
계급중위
복무 기간1914년–1919년
참전제1차 세계 대전
독일 혁명
훈장철십자 훈장
정치 경력
직책NSDAP 조직지도부장, 이후 국가 조직지도자
임기 시작1928년 1월 2일
임기 종료1932년 12월 8일
이전브루노 하이네만 장군
이후아돌프 히틀러
로베르트 라이
직책NSDAP 제국 선전지도자
임기 시작1926년 9월 16일
임기 종료1928년 1월 2일
이전오토 마이
이후아돌프 히틀러
직책니더바이에른 가울라이터
니더바이에른-오버팔츠
니더바이에른
임기 시작1925년 2월 26일
임기 종료1929년 11월 1일
이전직책 신설
이후오토 에르버스도블러 (니더바이에른)
아돌프 바그너 (오버팔츠)
직책국회의원
임기 시작1924년 12월 7일
임기 종료1933년 3월
선거구오버바이에른
직책바이에른 주 의회 의원
임기 시작1924년 5월 4일
임기 종료1924년 12월 7일
선거구파펜호펜

2. 초기 생애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1892년 5월 31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가이젠펠트에서 가톨릭교 사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3][4] 그는 동생 오토 슈트라서와 함께 자랐다. 지역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바이에른주 하부의 프론텐하우젠 마을에서 약사 견습생으로 일했다.[4]

어린 시절 사진(1897년 촬영). 오른쪽이 그레고어, 왼쪽이 동생 파울


이후 뮌헨 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했다.[4]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에를랑겐-뉘른베르크 대학교에서 약학 공부를 재개했다.[4] 1919년에는 프란츠 폰 에프가 이끄는 우익 자유군단 활동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4] 약사 시험에 합격한 뒤, 1920년부터 란츠후트에서 약사로 일하기 시작했다.[4]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슈트라서는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독일 제국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4]. 그는 제1 바이에른 야전 포병 연대에서 복무했으며, 오버로이튼언트(중위) 계급까지 진급했다[3][4]. 전쟁 중 용맹함을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모두 받았다[4].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에를랑겐-뉘른베르크 대학교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1919년 국가 시험에 합격했고, 1920년부터는 란츠후트에서 약사로 일하기 시작했다[4].

2. 2. 자유군단 활동

1919년 슈트라서는 형과 함께 프란츠 리터 폰 에프가 이끄는 우익 ''자유군단''(Freikorps)에 합류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바이에른에서 공산주의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는 '슈름바탈리온 니더바이에른'(Sturmbataillon Niederbayern, "저지 바이에른 돌격대")을 창설하고 지휘했으며, 젊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부관으로 고용되었다. 슈트라서는 거대한 체구, 뛰어난 지휘 능력, 무한한 조직력으로 유명했다. 1920년 3월까지 슈트라서의 자유군단은 실패한 카프 반란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의 형 오토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좌측으로 돌아서서 이 우익 ''쿠데타''(coup d'état)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슈트라서 형제는 반자본주의적이고 사회 혁명적인 노선을 나치당에 옹호했으며, 동시에 확고한 반유대주의와 반공주의를 견지했다.

3. 나치당 입당과 초기 활동

1928년 나치 전당대회에서 히틀러와 다른 주요 SA 간부들


1920년, 슈트라서는 자신의 준군사 조직과 함께 뮌헨을 기반으로 한 또 다른 극우 정치 정당인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NSDAP)과 협력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돌격대를 통해 나치당에 입당했다.[4] 1921년에는 히틀러 및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과 교류했다. 1922년 가을, 슈트라서는 공식적으로 NSDAP와 SA의 당원이 되었고, 그의 지도력을 인정받아 바이에른 남부(하바이에른)의 ''돌격대''(SA) 지역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23년 11월, 그는 히틀러와 루덴도르프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시키려 시도한 맥주홀 폭동에 돌격대 부대를 이끌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폭동 실패 후, 히틀러의 재판 직후 다른 가담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반역 방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실제 체포 사유는 금지된 NSDAP를 위해 군인을 모집하려 한 혐의였다. 1년 6개월의 금고형(또는 15개월 징역형)과 소액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3] 그러나 1924년 4월 6일과 5월 4일(팔라티네이트 지역), NSDAP와 연계된 "폴키쉬 블록" 소속으로 바이에른 란트타크 의원에 선출되면서 몇 주 후인 1924년 5월에 가석방되었다.[3]

히틀러가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당을 대리했지만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로젠베르크 대신 슈트라서를 선호했다. 이로 인해 1924년 6월 12일, 독일 민족 자유당과 나치당 잔존 세력이 합쳐 "국가 사회주의 자유 운동"을 창설했을 때, 루덴도르프, 슈트라서, 그리고 독일 민족 자유당 당수 알브레히트 폰 그레페 세 사람이 전국 집행부를 구성하게 되었다.[3] 이 운동의 활동과 선전은 주로 슈트라서와 에른스트 룀이 이끌었다.[3] 1924년 12월 7일 국회 선거에서 슈트라서는 "폴키쉬" 국가사회주의 자유 운동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베스트팔렌 북부 선거구를 대표하게 되었다.

1924년 12월 20일 히틀러가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출소한 후, 1925년 2월 27일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나치당 재결성을 선언하며 루덴도르프 및 독일 민족 자유당과의 관계를 끊었다. 루덴도르프 등과 함께 활동했던 슈트라서는 이 재결성식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곧 독일 민족 자유당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히틀러를 당 지도자로 인정했다.[3]

1925년, 나치당 재건 후 슈트라서는 하바이에른의 초대 ''가울라이터''로 임명되었다. 그는 란츠후트에서 최대 2,000명을 이끌며 활동했으며, 업무 부담으로 조수를 찾았다. 이 자리에 하인리히 힘러가 임명되어 하바이에른 지역의 조직 확장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26년 12월, 슈트라서가 담당하던 ''가우''는 오버팔츠와 통합되었고, 그는 확장된 ''가우''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8년 10월 1일, 가우가 다시 분할되면서 오버팔츠 지역은 아돌프 바그너가 맡게 되었고, 슈트라서는 1929년 3월 1일까지 하바이에른의 ''가울라이터'' 직책을 유지했다.

4. 나치당 전국 조직에서의 역할

1925년 2월 26일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나치당(NSDAP)이 재건된 후, 슈트라서는 하바이에른의 초대 ''가울라이터''가 되었다. 당시 히틀러에게 연설 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슈트라서는 히틀러를 대신하여 북부 독일에서 당을 대표하고 연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국회의원으로서 부여된 무료 철도 통행권을 이용하여 북부 및 서부 독일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가울라이터를 임명하고 당 지부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대중 연설을 했다. 이러한 집중적인 노력 덕분에 1925년 말까지 북부 지역의 NSDAP 지부 수는 약 272개로 크게 증가했으며, 슈트라서는 나치당을 남부 독일의 지역 정당에서 전국적인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기여했다.

슈트라서를 중심으로 한 북부 및 서부 독일의 당 조직은 히틀러의 남부 그룹과는 다른 사회주의적 경향을 보였고, 이는 1926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히틀러와의 노선 갈등으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북서 독일 나치당 지도 참조) 밤베르크 회의 이후 히틀러는 슈트라서를 달래는 한편 당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1926년 9월 16일부터 1928년 1월 2일까지 슈트라스를 당의 선전 전국 지도자(Reichspropagandaleiterdeu)로 임명했다.

1928년부터 히틀러는 조직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당의 전국 조직 업무를 슈트라서에게 맡겼다. 슈트라서는 조직 전국 지도자(Reichsorganisationsleiterdeu)로서 뛰어난 조직 능력을 발휘하여 당의 조직 구조를 개편하고 중앙집권화했다. 그는 NSDAP 지역 경계를 국회 선거구 경계에 맞추고 ''가울라이터''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당의 지역 구조와 수직적 관리 체계를 모두 재정비했다. 또한 주 감찰관과 전국 감찰관 제도를 만들어 지역 조직에 대한 중앙당의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당 조직 강화와 광범위한 선전 활동은 나치당의 급속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나치당은 1928년 총선에서 2.6%의 득표율에 그쳤으나, 1930년 9월 총선에서는 18.3%를 얻어 제2당으로 부상했고, 1932년 7월 총선에서는 37.3%를 득표하며 마침내 제1당이 되었다. 슈트라서는 1928년 5월 20일 총선에서 선거구 26(프랑코니아)에서 국회 의원으로 선출된 최초의 12명의 나치 의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931년 초까지 슈트라서는 히틀러 다음가는 나치당의 2인자로 여겨졌으나, 급진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던 동생 오토가 1930년 7월 탈당한 사건과 1931년 초 스키 사고로 인한 장기 요양 등으로 당내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히틀러와의 갈등과 당직 사임 참조) 그럼에도 1931년 12월 18일 SA-''Gruppenführer'' 계급을 부여받았고, 1932년 6월에는 ''Reichsorganisationsleiter''로서 당 조직 구조를 더욱 중앙 집중화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4. 1. 북서 독일 나치당 지도

1925년 3월 11일, 아돌프 히틀러는 슈트라서에게 북서 독일에서 나치당 조직 재건을 위임했다. 당시 히틀러에게 연설 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슈트라서는 북부 독일에서 당을 대표하여 연설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슈트라서는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무료 철도 통행권을 활용하여 북부 및 서부 독일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베스트팔렌, 라인란트 북부, 하노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등지에 대관구 지도자를 설치하고 당 지부를 설립하는 등 조직 확장에 힘썼다. 슈트라서는 먼저 하바이에른의 초대 가울라이터가 되었고, 이후 오버팔츠와 합병된 니더바이에른-오버팔츠 대관구 지도자를 잠시 맡았다. 1928년 10월 1일 대관구가 다시 분할된 후에는 1929년 3월 1일까지 하바이에른의 가울라이터로 활동했다. 그의 집중적인 노력 덕분에 1925년 말까지 나치당의 지역 지부 수는 쿠데타 이전 71개에서 약 272개로 크게 증가했다.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남부 독일과 달리, 북서 독일의 나치당은 다른 경향을 보였다. 이곳에서는 반유대주의보다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 컸기 때문에, 슈트라서를 비롯한 북서 독일 지도부(동생 오토, 요제프 괴벨스, 카를 카우프만 등)는 반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조하며 히틀러 등 뮌헨의 당 본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슈트라서는 1925년 11월 국회 연설에서 "경제의 국유화"를 포함한 "경제 혁명"과 "착취적인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대신 "진정한 사회주의"를 원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성향을 명확히 드러냈다.

1925년 9월 10일, 슈트라서는 북부 및 서부 독일의 가울라이터들을 모아 "북서 독일 대관구 활동 협동체"(Arbeitsgemeinschaft der nord- und nordwestdeutschen Gaue der NSDAPde, 약칭 NSAG)를 창설했다. 이 조직은 당의 사회주의적 측면을 강화하고 노동 계급에 대한 지지를 넓히는 한편, 히틀러가 이끄는 뮌헨 당 본부(특히 선전부장 헤르만 에세르)에 대항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NSAG는 처음부터 통일성이 부족한 느슨한 연합체에 머물렀고,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남부 독일의 대관구에 비해 영향력이 약했다.

또한 당 중앙의 막스 아만이 관리하는 프란츠 에르 출판사에 대항하여, 1926년 3월 1일 베를린에 투쟁 출판사(Kampfverlag)를 설립했다. 이 출판사는 당의 사회주의적 노선을 대변하는 주간 신문 『베를린 노동자 신문』(Berliner Arbeiterzeitungde) 등을 발행했고,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망치와 국가주의를 상징하는 칼을 갈고리 십자와 조합한 독자적인 로고를 사용하여 북부의 사회주의적 경향을 나타냈다. 슈트라서는 당시 젊은 정치 선동가였던 요제프 괴벨스를 투쟁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임명했다.

1925년 말, 슈트라서는 동생 오토, 괴벨스와 함께 기존 25개조 강령을 상세화하고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화한 새로운 당 강령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당수인 자신과 상의 없이 강령 초안을 만든 것에 격노했다. 슈트라서는 이 초안의 승인을 얻고자 1926년 1월 25일 하노버에서 북서 나치 대관구 지도자 회의(하노버 회의)를 소집했다. 히틀러는 불참하고 고트프리트 페더를 대리로 보냈지만, 회의는 슈트라서의 주도로 진행되어 페더와 로베르트 라이를 제외한 전원이 강령 초안에 찬성했다. 회의에서는 독일 공산당이 제안한 구 황실 재산 몰수 법안도 논의되었는데, 슈트라서는 몰수에 찬성하며 히틀러의 반대 입장과 정면으로 대립했고,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히틀러의 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히틀러는 1926년 2월 14일, 자신의 지지 기반이 강한 밤베르크에서 반격 회의(밤베르크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히틀러는 슈트라서의 새 강령 초안과 황실 재산 몰수 주장을 "볼셰비즘"과 유사하다고 맹렬히 비판하고, 사유 재산 보호와 기존 당 강령의 신성함을 역설했다. 히틀러의 강력한 연설 앞에서 슈트라서는 제대로 반론하지 못했고, 밤베르크 회의는 당내 권력이 히틀러 중심으로 확고히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이 과정에서 슈트라서의 핵심 측근이었던 괴벨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밤베르크 회의 이후, 히틀러는 북부 독일 지부를 달래면서

4. 2. 히틀러와의 갈등과 당직 사임

대공황 시기 독일의 실업률이 급증하자, 슈트라서 형제는 베를린에서 지역 일간지 ''민족사회주의자''(Nationaler Sozialistde)를 발행하며 민족주의, 반자본주의, 사회 개혁, 반서구주의 등 독자적인 나치즘 노선을 내세웠다. 이는 요제프 괴벨스의 반발을 샀으며, 그는 슈트라서 형제의 신문 때문에 자신의 베를린 신문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1930년 4월 말, 히틀러는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사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괴벨스를 나치당(NSDAP) 선전 담당 제국 지도자로 임명했다. 1930년 5월 2일, 히틀러의 지시로 괴벨스는 ''민족사회주의자''의 저녁판 발행을 금지시켰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동생 오토와 거리를 두었고, 6월 말에는 신문 발행인 직에서 물러났으며, 오토는 7월 초 당을 떠났다. 이 사건과 1931년 초 스키 사고로 인한 장기 요양은 당내 슈트라서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그는 헤르만 괴링, 괴벨스, 에른스트 룀 등과 당내 2인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처지가 되었다.

1932년, 베르히테스가덴. 왼쪽부터 히틀러, 슈트라서, , 괴링


1932년 8월, 당시 총리 프란츠 폰 파펜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히틀러에게 독일 부총리직을 제안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다. 슈트라서는 히틀러에게 연립 정부 참여를 촉구했지만, 히틀러는 부총리직을 "2인자 역할"로 여기며 거부했다.[1] 슈트라서는 히틀러의 총리직 고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좌절감을 느꼈다.

히틀러와의 이념적, 개인적 갈등은 1932년 12월 후임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슈트라서에게 부총리직을 제안하면서 극에 달했다. 당시 나치당은 막대한 부채와 선거 자금 고갈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1932년 11월 국회의원 선거와 12월 4일 튀링겐 주 의회 선거에서 연이어 득표율이 하락하는 등 위기 상황이었다. 슈트라서는 당 운동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입각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히틀러에게 입각 필요성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슐라이허는 슈트라서의 입각을 통해 나치당을 분열시키고, 당내 좌파 세력을 자신의 "국가 보수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여 히틀러를 견제하고자 했다.

히틀러는 이 제안에 격노하여 슈트라서에게 거절을 요구했다. 12월 7일, 히틀러는 나치당 국회의원들을 소집하여 슈트라서의 행동을 "당내 분열 행위", "최종 승리 5분 전에 내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 맹비난하며 슈트라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의원들에게 입장을 바꿀 것을 강요했다. 결국 슈트라서는 자신의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이 정권을 잡기 불과 7주 전인 1932년 12월 8일 모든 당직에서 사임했다.

슈트라서의 사임 이후 히틀러는 일시적으로 ''제국 조직 지도자''(Reichsorganisationsleiter) 직을 맡았다가 로베르트 레이에게 넘겼다. 또한 히틀러는 슈트라서의 권력 기반이었던 중앙 집권적인 전국 감찰관 제도를 폐지하고 대관구 지도자들을 자신에게 직접 종속시켰다. 1933년 1월 16일, 히틀러는 슐라이허와의 관계를 문제 삼아 슈트라서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슈트라서는 1933년 3월 국회 의원직을 포기하며 공식적으로 정치계를 떠났다.

5. 정계 은퇴 이후와 죽음

국회의원직을 사임한 슈트라서는 정치 입문 전 직업인 약사로 돌아가려 했다. 그는 자신의 인맥과 히틀러의 동의를 통해, 정치 활동을 모두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IG 파르벤의 베를린 자회사인 화학-제약 회사 셰링-칼바움의 이사직을 맡을 기회를 얻었다. 이후 정치와 거리를 두며 과거 정치적 동료들과의 만남을 거절했고, 일부 보도와 달리 형 오토 슈트라서의 검은 전선 조직과도 연락하지 않았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이 성립되자 형 오토는 국외로 망명했지만, 그레고어는 독일 국내에 남았다. 1934년 6월, 히틀러가 돌격대 문제로 고심하던 무렵, 히틀러는 내각 개조를 생각하며 슈트라서를 내무상 또는 경제상으로 입각시킬 계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5]. 그 조짐으로 1934년 6월 23일 히틀러가 당원 번호 6번의 황금 나치 당원 배지를 슈트라서에게 선물한 것을 들 수 있다[5].

이 때문에 돌격대 숙청을 준비하고 있던 괴링히믈러는 슈트라서를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그도 함께 제거하기로 결정했다[5].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 당일, 슈트라서는 히믈러가 지휘하는 게슈타포에 의해 납치되었다. 납치된 지 2시간 후, 그는 형무소 내에서 친위대 대원에게 사살되었다. 나치 당국은 그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자살'로 발표했다[5].

6. 가족 관계

7. 평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나치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인 오토 슈트라서와는 달리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의 결정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히틀러에게 공공연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레고어는 당의 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주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려 했던 동생 오토의 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국의 사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나치즘이라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이념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과정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비록 그가 나치당 내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을 일부 대변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활동이 나치즘의 폭력성과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개인의 자유권리를 억압하고, 폭력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 했던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Inside Europe https://archive.org/[...] Harper & Brothers
[2] 문서 ヴィストリヒ、109頁
[3] 웹사이트 LeMO http://www.dhm.de/le[...]
[4] 문서 ヴィストリヒ、110頁
[5] 문서 ヘーネ、129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