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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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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명순은 189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 배우이다. 1917년 소설 '의심의 소녀'로 문단에 등단하여,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를 주장하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1920-30년대 여성 문인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25년 시집 '생명의 과실'을 출간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영화 '광랑', '나의 친구여'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도 활동했다. 1939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고와 정신병에 시달리다 1951년 도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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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189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김명순
한자金明淳
로마자 표기Gim Myeongsun
출생 이름탄실 (彈實)
로마자 표기 (출생 이름)Tansil
출생일1896년 1월 20일
출생지평양, 조선
사망일1951년 6월 22일
국적한국
민족한국인
직업작가
언어한국어
사조페미니즘
대표 작품칠면조
한국어 이름
한글김명순
한자金明淳
로마자 표기Gim Myeongsun
매큔-라이샤워 표기Kim Myŏngsun
한글 (출생 이름)탄실
한자 (출생 이름)彈實
로마자 표기 (출생 이름)Tansil
매큔-라이샤워 표기 (출생 이름)T'ansil
다른 이름
한글망양초
한자望洋草

2. 생애

김명순은 1896년 1월 20일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현재의 평양시)에서 평양의 지주이자 문신 관료였던 김희경(金羲庚)의 소실의 딸로 태어났다. 출생 연대는 다소 불명확하여 1897년생 설도 있다. 탄실(彈實)은 그의 아명이자 필명이었다. 어머니는 기생 출신 산월(山月)이다.[3] 아버지 김희경은 구한말의 관료로 평안남도 참사관(參事官)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숙부는 김희선(金羲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 1920년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 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 김희경은 부인과 첩 사이에서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는데, 김명순은 어렸을 때에 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일찍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나 서녀였으나 특별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2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 계열 학교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896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기독교 계통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로 전학갔다.[3] 1907년 야소교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유학, 진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3] 진명여학교 입학 직후 어머니는 38세로 사망하였다.

{{인용문2|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제

...(이하 중략)...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 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하 중략)...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시 '유언(遺言)' 중에서}}

한일 합방으로 국권이 피탈되자 망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이름을 기정(箕貞)으로 고쳤다가 다시 명순으로 개명하였다. 진명여학교 학적부에는 기정(箕貞)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 어머니가 기생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새어머니 가족에게 학대받아 1911년 학교를 중퇴했다.[3]

1912년 진명여학교 보통과를 제4회로 졸업했는데, 졸업 평균성적이 94점으로 2등이었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일본으로 유학, 시부야의 국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으나 4학년 2학기를 수료하고 중퇴하였다. 1913년 도쿄 고지마치 여학교에 다녔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여 성명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3]

1915년 7월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중이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 (군인)에게 강간당했다. 충격을 받은 김명순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다.[10] 김명순은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여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졸업생 명부에서 삭제되고 귀국해야 했다.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하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했고, 소설가 김동인은 그를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에서 자유분방한 성품이 빚어낸 사건인 것처럼 묘사했다.[10]

1915년 초에 귀국, 1916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17년 3월에 졸업한다. 그 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그는 평양의 부호 화백인 김유방의 도움으로 경성에 계속 머무르며 이화학당을 다니며 문학에 전념하였다.

1917최남선이 발행하던 잡지 <청춘(靑春)>에서 소설을 현상모집하자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2등으로 등단하였다.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심사를 맡았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놀라워하여 특별히 2등으로 뽑았다. 특히 춘원 이광수는 그녀의 작품을 격찬하였다 한다.[11] 그해 이광수의 ‘소년’이 발표되자 그는‘소녀’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한다.

1919년 문학동인 잡지인 '창조'가 창간되자, 김동인, 전영택, 주요한 등과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일본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 등에도 작품을 발표했다.[6] 1920년 2월에는 김일엽이 창간한 잡지 신여자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20년 7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체류하며 음악을 배웠다. 1920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유학생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과 '여자계(女子界)'에 시ㆍ소설ㆍ수필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의 '창조' 7호에 망양초(望洋草)라는 필명으로 산문시 ‘조로(朝露)의 화몽(花夢)’을 발표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폐허(廢墟)지가 발간되자 폐허지의 동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1년 《개벽》(Gaebyeog)에 발표한 단편소설 《칠면조》(Chilmyeonjo)에서 보여준 예리한 심리 묘사로 유명해졌다.[7]

1921년 귀국, 그 뒤 신문사에 칼럼과 글, 시, 소설 등을 발표하고 강연활동 등을 하였다.[6] 귀국 직후, 임장화와 헤어지고 길진섭의 모델이 되었다가 그의 연인이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스스로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한국의 여성들이 일종의 노예의 처지에 있다고 보고, 조선 여성을 노예의 처지에서 건지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1년부터 잡지 개벽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로 활약하였으며,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 '상봉'을 번역하기도 하였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문학 평론을 하기도 했다.[6]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 개벽지 외에도 신여성잡지에도 고정필진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3월부터는 「조선일보」에 소설 ‘돌아다 볼 때’를 연재하더니, 6월부터는 ‘탄실이와 주영이’를 연재하였다.

1925년 잠시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를 지낸 적도 있다. 1925년 한국 최초의 여성 기자인 이각경의 뒤를 이어 매일신보사에서 공채한 여성 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기자로 선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의 신문에 칼럼을 송고하였고, 조선문단같은 잡지에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1925년 4월 첫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하였다.

첫 시집 생명과 과실에서 그는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사회가 여성에게 일정한 역할과 의무를 강요한다고 전제하고 여성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이며 여성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자유 연애, 자유 결혼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여성의 자유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했던 김동인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한다.[11]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개인을 넘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11] 김동인은 그를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총명하고 청순한 외모의 그는 일본유학 시절 여러 유학생들과 자유롭게 연애하였다. 처음 도쿄에서 화가인 김찬영과 연애했다가 김찬영으로부터 버림받은 직후 다시 김찬영의 친구인 임장화와 사귀기도 했다.

그 뒤 김기진1924년 11월신성에 게재된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에서,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이성을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그의 성격을 위해서든지 또 무슨 다른 점을 위해서든지간에 대단히 좋지 못한 원인이 된다고 전제한 후, 그녀는 무절제한 편이라고 잘라 말했다.[12] 그러나 이것은 문필력에 있어서 앞서가는 선각자적인 '신여성'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당시 남성 문인들의 질투와 자기 방어에서 나오는 학대에 가까운 공격이었으며 이러한 터무니없는 공격의 무차별적인 공세로 인해 그녀는 삶을 추스리고 재기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하며 결국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13]

1927년 초 이경손 감독의 권유로 그 해에 발표된 영화 '광랑(狂浪)'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나운규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같은 해 이경손 감독이 조선시네마에서 제작한 영화 '나의 친구여'에도 출연하였다. 1928년 2월 '나의 친구여'가 상영된 직후 3월에는 이경손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숙영낭자전'에도 출연하였다. 정식으로 영화 배우나 연극 배우로 수업을 받지는 않았으나, 당시에는 여배우의 수가 부족하여 김명순은 문단활동을 하며 외국유학도 해서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던 그가 영화에 여자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1930년 안종화 감독이 제작하는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김영환 감독이 제작하는 '젊은이의 노래'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영화배우로도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영화수업을 받지 못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의 배우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38년 이병도의 집에서 잠시 머물며 「조선유학사」의 원고를 정리하였다. 이병도와는 일본 유학 중 만났으며 폐허잡지의 동인인데다, 그의 부인이 김명순의 진명여학교 동기동창이었으므로, 이병도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창작기력을 소진한 그는 더 이상의 시나 소설도 발표하지 못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화출연도 교섭이 들어오지 않아, 남의 집에서 밥이나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뒤 동창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이병도의 집을 나온 뒤, 일시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이까지 데리고 귀국했지만, 그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한 쑥덕거림과 편견, 그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점에 대한 조롱과 비방 등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그 뒤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1939년 1월호 삼천리지에 시 ‘그믐밤’을 발표하였다.

1939년 이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갔지만 작품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생계를 위해 잡일과 노동 등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장기간 일하지 못하고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림을 당했다. 그는 주로 동경 Y.M.C.A 회관 뒷채의 셋방에서 살았는데 1945년 해방 소식을 접하였으나 돈이 없어 귀국하지도 못했고, 진료도 받지 못했다.[4]

생애 후반에는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가 누군가의 행려병자 신고로 도쿄도아오야마 뇌병원(靑山腦病院)에 수용되어 생활하던 중 1951년 병사하였다. 매장지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고 있다. 그의 최후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0년김명순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5]

김명순, 20대 무렵


춘원 이광수(김명순을 문단으로 발탁하였고,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김명순, 1920년대 무렵

2. 1. 생애 초반

김명순은 1896년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에서 평양의 지주이자 문신 관료였던 김희경(金羲庚)의 소실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는 다소 불명확하여 1897년생 설도 있다. 탄실(彈實)은 그의 아명이자 필명이었다. 어머니는 기생 출신 산월(山月)이다.[3] 그러나 후대에 그녀의 어머니는 김인숙(金仁淑)이라고도 하고, 김인정(金仁貞)이라고 기록된 곳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에게 첩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생긴 것이다. 김명순이 나중에 지은 자전적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에는 기생이었던 그의 어머니 이름이 산월(山月)이라 하였다. 아버지 김희경은 구한말의 관료로 평안남도 참사관(參事官)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숙부는 김희선(金羲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 1920년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 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 김희경은 부인과 첩 사이에서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는데, 김명순은 어렸을 때에 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탄실이라는 이름에 애착을 느껴서, 뒷날 작가로 등단한 뒤에는 망양초(望洋草)라는 이름과 함께 김탄실(金彈實)을 필명으로 썼다고 한다.

일찍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나 서녀였으나 특별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3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였다. 1902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 계열 학교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896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기독교 계통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로 전학갔다.[3] 1907년 야소교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유학, 진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3] 진명여학교 입학 직후 어머니는 38세로 사망하였다.

{{인용문2|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제

...(이하 중략)...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 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하 중략)...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시 '유언(遺言)' 중에서}}

한일 합방으로 국권이 피탈되자 망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이름을 기정(箕貞)으로 고쳤다가 다시 명순으로 개명하였다. 진명여학교 학적부에는 기정(箕貞)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 어머니가 기생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새어머니 가족에게 학대받아 1911년 학교를 중퇴했다.[3] 1913년 도쿄 고지마치 여학교에 다녔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여 성명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3]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진명여학교 보통과를 제4회로 졸업했는데, 졸업 평균성적이 94점으로 2등이었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일본으로 유학, 시부야의 국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으나 4학년 2학기를 수료하고 중퇴하였다.

1915년 7월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중이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 (군인)에게 강간당했다. 충격을 받은 김명순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다.[10] 김명순은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여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졸업생 명부에서 삭제되고 귀국해야 했다.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하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했고, 소설가 김동인은 그를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에서 자유분방한 성품이 빚어낸 사건인 것처럼 묘사했다.[10]

1915년 초에 귀국, 1916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17년 3월에 졸업한다. 그 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그는 평양의 부호 화백인 김유방의 도움으로 경성에 계속 머무르며 이화학당을 다니며 문학에 전념하였다.

1917최남선이 발행하던 잡지 <청춘(靑春)>에서 소설을 현상모집하자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2등으로 등단하였다.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심사를 맡았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놀라워하여 특별히 2등으로 뽑았다. 특히 춘원 이광수는 그녀의 작품을 격찬하였다 한다.[11] 그해 이광수의 ‘소년’이 발표되자 그는‘소녀’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일찍부터 이광수의 작품을 즐겨 읽었던 그는 이광수의 자유 연애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한다.

2. 1. 1. 출생과 가계

김명순은 1896년 1월 20일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에서 평양의 지주이자 문신 관료였던 김희경(金羲庚)의 소실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는 다소 불명확하여 1897년생 설도 있다. 탄실(彈實)은 그의 아명이자 필명이었다. 어머니는 기생 출신 산월(山月)이다.[3] 그러나 후대에 그녀의 어머니는 김인숙(金仁淑)이라고도 하고, 김인정(金仁貞)이라고 기록된 곳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에게 첩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생긴 것이다. 김명순이 나중에 지은 자전적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에는 기생이었던 그의 어머니 이름이 산월(山月)이라 하였다. 아버지 김희경은 구한말의 관료로 평안남도 참사관(參事官)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숙부는 김희선(金羲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 1920년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 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 김희경은 부인과 첩 사이에서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는데, 김명순은 어렸을 때에 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탄실이라는 이름에 애착을 느껴서, 뒷날 작가로 등단한 뒤에는 망양초(望洋草)라는 이름과 함께 김탄실(金彈實)을 필명으로 썼다고 한다.

일찍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나 서녀였으나 특별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3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였다. 1902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 계열 학교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에서 수학하였다.

2. 1. 2. 소녀 시절

1896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기독교 계통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로 전학갔다.[3] 1907년 야소교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유학, 진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3] 진명여학교 입학 직후 어머니는 38세로 사망하였다.

{{인용문2|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제

...(이하 중략)...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 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하 중략)...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시 '유언(遺言)' 중에서}}

한일 합방으로 국권이 피탈되자 망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이름을 기정(箕貞)으로 고쳤다가 다시 명순으로 개명하였다. 진명여학교 학적부에는 기정(箕貞)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 어머니가 기생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새어머니 가족에게 학대받아 1911년 학교를 중퇴했다.[3] 1913년 도쿄 고지마치 여학교에 다녔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여 성명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3]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 1. 3. 학창 시절

1912년 진명여학교 보통과를 제4회로 졸업했는데, 졸업 평균성적이 94점으로 2등이었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일본으로 유학, 시부야의 국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으나 4학년 2학기를 수료하고 중퇴하였다.

1915년 7월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중이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 (군인)에게 강간당했다. 충격을 받은 김명순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다.[10] 김명순은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여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졸업생 명부에서 삭제되고 귀국해야 했다.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하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했고, 소설가 김동인은 그를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에서 자유분방한 성품이 빚어낸 사건인 것처럼 묘사했다.[10]

1915년 초에 귀국, 1916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17년 3월에 졸업한다. 그 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그는 평양의 부호 화백인 김유방의 도움으로 경성에 계속 머무르며 이화학당을 다니며 문학에 전념하였다.

1917최남선이 발행하던 잡지 <청춘(靑春)>에서 소설을 현상모집하자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2등으로 등단하였다.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심사를 맡았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놀라워하여 특별히 2등으로 뽑았다. 특히 춘원 이광수는 그녀의 작품을 격찬하였다 한다.[11] 그해 이광수의 ‘소년’이 발표되자 그는‘소녀’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일찍부터 이광수의 작품을 즐겨 읽었던 그는 이광수의 자유 연애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한다.

1908년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다니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어머니가 기생이었던 탓에 괴롭힘을 당했다. 또한 새어머니의 가족으로부터 학대를 받아 1911년에 학교를 중퇴했다. 1913년에는 도쿄로 가서 고지마치 여학교에 다녔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곧 한국으로 돌아와 성명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3]

1919년에는 김동인 등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조직한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인 ‘창조’에 참여했다.

1902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 계열 학교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서울 진명여학교에 진학하였고, 도쿄 유학을 하기도 하였다.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통적인 결혼관에 대한 부정과 여성 해방에 대한 의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그녀는 봉건적인 가부장제도에 환멸을 느꼈고, 이는 그녀의 이후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기에 잡지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입선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의심의 소녀』는 전통적인 남녀 관계 그대로 결혼함으로써 발생하는 비극적인 여성의 최후를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여성 해방을 위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소설가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실존 모델로 알려진 개화기의 신여성이다.

2. 2. 문필 활동과 언론 활동

1925년 한국 최초의 여성 기자인 이각경의 뒤를 이어 매일신보사에서 공채한 여성 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기자로 선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의 신문에 칼럼을 송고하였고, 조선문단같은 잡지에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1925년 4월 첫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창작집에는 시 24편과 감상문 4편, 소설 2편이 실려 있다. 그는 이 창작집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창작 의도를 밝혔다.

첫 시집 생명과 과실에서 그는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말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였던 김탄실 자신이 당대 사회에서 오해받았으므로 고통과 비탄과 저주 속에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통과 비탄과 저주를 이겨내기 위해, 그는 시를 쓰고, 소설과 작품 등을 쓰면서 고통과 편견을 이겨냈다. 한편 악의적인 김동인의 소설인 김연실전과 그를 평소 혐오하던 팔봉 김기진의 근거 없는 신랄한 비판은 그를 몰락의 길로 이끌게 된다.

1917년 최남선이 편집한 잡지 《소년》(Sonyeon)에 단편소설 《의문의 소녀》(Uimun-ui sonyeo)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6] 192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1년개벽》(Gaebyeog)에 발표한 단편소설 《칠면조》(Chilmyeonjo)에서 보여준 예리한 심리 묘사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1925년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봉건적인 가부장제도에 환멸을 느꼈고, 이는 그녀의 이후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통적인 남녀 간의 모순된 관계를 극복한 새로운 연애를 갈망하며 남성과 여성의 주체적인 관계야말로 올바른 관계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잡지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입선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의심의 소녀』는 전통적인 남녀 관계 그대로 결혼함으로써 발생하는 비극적인 여성의 최후를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여성 해방을 위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이후 단편 『칠면조』(1921), 『돌아볼 때』(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꿈 묻는 날 밤』(1925)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경』, 『옛날의 노래여』, 『창궁』, 『거룩한 노래』 등의 시도 창작하였다. 1925년에는 시집 『생명의 과실』을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빈곤한 생활에 어려움을 겪다가, 복잡한 연애 사건으로 인해 정신병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1921년 귀국, 그 뒤 신문사에 칼럼과 글, 시, 소설 등을 발표하고 강연활동 등을 하였다.[6] 귀국 직후, 임장화와 헤어지고 길진섭의 모델이 되었다가 그의 연인이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스스로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한국의 여성들이 일종의 노예의 처지에 있다고 보고, 조선 여성을 노예의 처지에서 건지어야 된다. 구습에 젖어서 아직 눈뜨지 못하는 조선 여성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여성들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여자 아이들도 가리지 않고 남자 아이들처럼 학교에 보내어 글을 배우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1년부터 잡지 개벽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로 활약하였으며,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 '상봉'을 번역하기도 하였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문학 평론을 하기도 했다.[6]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 개벽지 외에도 신여성잡지에도 고정필진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3월부터는 「조선일보」에 소설 ‘돌아다 볼 때’를 연재하더니, 6월부터는 ‘탄실이와 주영이’를 연재하였다. 1925년 잠시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를 지낸 적도 있다.

귀국 후 1920-3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해방론자이자 제1세대 여성작가로 활동하였다. 1930년 두 번째 시집 『애인의 선물』을 출간했다. 시적인 문체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묘사에 치중하였으며, 제도로서의 결혼보다는 감정이 소통되는 연애를 우위에 두는 가치관을 표출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는 이광수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고 봉건 제도의 압제 밑에 수백년을 시달려 온 여성의 해방은 자유 연애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 식민통치하의 암울한 현실, 여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대우를 하는 사회적 분위기, 적자와 서자에 대한 차별대우 등에 좌절하였다.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며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였다. 1910년대 등단하여 1930년대까지 작품을 발표한 김명순은 1920년대 중반에 나혜석, 김원주 등과 함께 근대 초기의 여성 문인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5년 잡지 《조선문단 (朝鮮文壇)》지에 시 <창궁 蒼穹>을 발표하고, 단편 <꿈 묻는 날 밤> 등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는 심각한 심리적 갈등과 지적 추리의 경향을 보였다.

1919년 문학동인 잡지인 '창조'가 창간되자, 김동인, 전영택, 주요한 등과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일본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 등에도 작품을 발표했다.[6] 1920년 2월에는 김일엽이 창간한 잡지 신여자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20년 7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체류하며 음악을 배웠다. 1920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유학생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과 '여자계(女子界)'에 시ㆍ소설ㆍ수필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의 '창조' 7호에 망양초(望洋草)라는 필명으로 산문시 ‘조로(朝露)의 화몽(花夢)’을 발표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폐허(廢墟)지가 발간되자 폐허지의 동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1년 《개벽》(Gaebyeog)에 발표한 단편소설 《칠면조》(Chilmyeonjo)에서 보여준 예리한 심리 묘사로 유명해졌다.[7]

그는 사회가 여성에게 일정한 역할과 의무를 강요한다고 전제하고 여성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결혼은 남녀 당사자가 하는 것이므로 부모와 집안의 개입은 부당하다는 점과 여성에게도 연애할 자유, 결혼할 자유를 부여해야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이며 여성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자유 연애, 자유 결혼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여성의 자유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했던 김동인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한다.[11]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개인을 넘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11] 김동인은 그를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이를 두고 김기진은 공개장 형태로 비난하였다.[14] 특히 김기진은 김명순에 대해 성욕생활이 무절제하다고 비판하면서, 그런 사람 치고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난을 가했다.[14] 김기진의 공개 비판에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길 원한다고 맞받아쳤다.

총명하고 청순한 외모의 그는 일본유학 시절 여러 유학생들과 자유롭게 연애하였다. 처음 도쿄에서 화가인 김찬영과 연애했다가 김찬영으로부터 버림받은 직후 다시 김찬영의 친구인 임장화와 사귀기도 했다. 조선의 여인들이 아직도 가정과 남자에게 얽매여 있는 동안, 그는 일본에서 신여성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 중 김동인은 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봤는데, ‘김연실전’에서는 그가 어느 여학교를 거쳐서 음악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모교인 진명여학교를 기생학교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 뒤 김기진1924년 11월신성에 게재된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에서,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이성을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그의 성격을 위해서든지 또 무슨 다른 점을 위해서든지간에 대단히 좋지 못한 원인이 된다고 전제한 후, 그녀는 무절제한 편이라고 잘라 말했다.[12] 그러나 이것은 문필력에 있어서 앞서가는 선각자적인 '신여성'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당시 남성 문인들의 질투와 자기 방어에서 나오는 학대에 가까운 공격이었으며 이러한 터무니없는 공격의 무차별적인 공세로 인해 그녀는 삶을 추스리고 재기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하며 결국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13]

1920년 7월에는 〈폐허〉지가 발간되자 그는 오상순, 이광수, 염상섭, 이병도 등과 함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폐허지는 반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얼마 못가 폐간되었다.

현재 그녀의 작품에 대해 알려진 바는 상대적으로 적다. 김영희의 지적처럼 학자들이 그녀를 연구하지 않았고, "현대 한국 여성 소설가 계보에서 그녀의 위치를 더 잘 평가하기 위해 분실된 작품들을 발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7]

2. 2. 1. 잡지 문인 활동

1919년 문학동인 잡지인 '창조'가 창간되자, 김동인, 전영택, 주요한 등과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일본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 등에도 작품을 발표했다.[6] 1920년 2월에는 김일엽이 창간한 잡지 신여자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20년 7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체류하며 음악을 배웠다. 1920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유학생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과 '여자계(女子界)'에 시ㆍ소설ㆍ수필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의 '창조' 7호에 망양초(望洋草)라는 필명으로 산문시 ‘조로(朝露)의 화몽(花夢)’을 발표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폐허(廢墟)지가 발간되자 폐허지의 동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1년 《개벽》(Gaebyeog)에 발표한 단편소설 《칠면조》(Chilmyeonjo)에서 보여준 예리한 심리 묘사로 유명해졌다.[7]

2. 2. 2. 자유 연애 활동

총명하고 청순한 외모의 그는 일본유학 시절 여러 유학생들과 자유롭게 연애하였다. 처음 도쿄에서 화가인 김찬영과 연애했다가 김찬영으로부터 버림받은 직후 다시 김찬영의 친구인 임장화와 사귀기도 했다. 조선의 여인들이 아직도 가정과 남자에게 얽매여 있는 동안, 그는 일본에서 신여성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 중 김동인은 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봤는데, ‘김연실전’에서는 그가 어느 여학교를 거쳐서 음악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모교인 진명여학교를 기생학교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 뒤 김기진1924년 11월신성에 게재된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에서, 여성이고 남성이고 간에 이성을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그의 성격을 위해서든지 또 무슨 다른 점을 위해서든지간에 대단히 좋지 못한 원인이 된다고 전제한 후, 그녀는 무절제한 편이라고 잘라 말했다.[12] 그러나 이것은 문필력에 있어서 앞서가는 선각자적인 '신여성'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당시 남성 문인들의 질투와 자기 방어에서 나오는 학대에 가까운 공격이었으며 이러한 터무니없는 공격의 무차별적인 공세로 인해 그녀는 삶을 추스리고 재기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하며 결국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13]

1920년 7월에는 〈폐허〉지가 발간되자 그는 오상순, 이광수, 염상섭, 이병도 등과 함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폐허지는 반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얼마 못가 폐간되었다.

그녀는 봉건적인 가부장제도에 환멸을 느꼈고, 이는 그녀의 이후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통적인 남녀 간의 모순된 관계를 극복한 새로운 연애를 갈망하며 남성과 여성의 주체적인 관계야말로 올바른 관계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잡지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입선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의심의 소녀』는 전통적인 남녀 관계 그대로 결혼함으로써 발생하는 비극적인 여성의 최후를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여성 해방을 위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2. 2. 3. 문필 활동

1921년 귀국, 그 뒤 신문사에 칼럼과 글, 시, 소설 등을 발표하고 강연활동 등을 하였다.[6] 귀국 직후, 임장화와 헤어지고 길진섭의 모델이 되었다가 그의 연인이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스스로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한국의 여성들이 일종의 노예의 처지에 있다고 보고, 조선 여성을 노예의 처지에서 건지어야 된다. 구습에 젖어서 아직 눈뜨지 못하는 조선 여성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여성들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여자 아이들도 가리지 않고 남자 아이들처럼 학교에 보내어 글을 배우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1년부터 잡지 개벽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로 활약하였으며,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 '상봉'을 번역하기도 하였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문학 평론을 하기도 했다.[6]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 개벽지 외에도 신여성잡지에도 고정필진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3월부터는 「조선일보」에 소설 ‘돌아다 볼 때’를 연재하더니, 6월부터는 ‘탄실이와 주영이’를 연재하였다. 1925년 잠시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를 지낸 적도 있다.

귀국 후 1920-3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해방론자이자 제1세대 여성작가로 활동하였다. 1930년 두 번째 시집 『애인의 선물』을 출간했다. 시적인 문체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묘사에 치중하였으며, 제도로서의 결혼보다는 감정이 소통되는 연애를 우위에 두는 가치관을 표출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는 이광수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고 봉건 제도의 압제 밑에 수백년을 시달려 온 여성의 해방은 자유 연애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 식민통치하의 암울한 현실, 여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대우를 하는 사회적 분위기, 적자와 서자에 대한 차별대우 등에 좌절하였다.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며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였다. 1910년대 등단하여 1930년대까지 작품을 발표한 김명순은 1920년대 중반에 나혜석, 김원주 등과 함께 근대 초기의 여성 문인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5년 잡지 《조선문단 (朝鮮文壇)》지에 시 <창궁 蒼穹>을 발표하고, 단편 <꿈 묻는 날 밤> 등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는 심각한 심리적 갈등과 지적 추리의 경향을 보였다.

김은 1917년 최남선이 편집한 잡지 《소년》(Sonyeon)에 단편소설 《의문의 소녀》(Uimun-ui sonyeo)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6] 192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1년 《개벽》(Gaebyeog)에 발표한 단편소설 《칠면조》(Chilmyeonjo)에서 보여준 예리한 심리 묘사로 유명해졌다.[6] 그녀는 1925년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6]

현재 그녀의 작품에 대해 알려진 바는 상대적으로 적다. 김영희의 지적처럼 학자들이 그녀를 연구하지 않았고, "현대 한국 여성 소설가 계보에서 그녀의 위치를 더 잘 평가하기 위해 분실된 작품들을 발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7]

그녀는 봉건적인 가부장제도에 환멸을 느꼈고, 이는 그녀의 이후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통적인 남녀 간의 모순된 관계를 극복한 새로운 연애를 갈망하며 남성과 여성의 주체적인 관계야말로 올바른 관계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잡지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입선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의심의 소녀』는 전통적인 남녀 관계 그대로 결혼함으로써 발생하는 비극적인 여성의 최후를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여성 해방을 위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이후 단편 『칠면조』(1921), 『돌아볼 때』(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꿈 묻는 날 밤』(1925)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경』, 『옛날의 노래여』, 『창궁』, 『거룩한 노래』 등의 시도 창작하였다.

1925년에는 시집 『생명의 과실』을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빈곤한 생활에 어려움을 겪다가, 복잡한 연애 사건으로 인해 정신병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2. 2. 4. 자유 연애론

그는 사회가 여성에게 일정한 역할과 의무를 강요한다고 전제하고 여성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결혼은 남녀 당사자가 하는 것이므로 부모와 집안의 개입은 부당하다는 점과 여성에게도 연애할 자유, 결혼할 자유를 부여해야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이며 여성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자유 연애, 자유 결혼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여성의 자유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했던 김동인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한다.[11]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개인을 넘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11] 김동인은 그를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이를 두고 김기진은 공개장 형태로 비난하였다.[14] 특히 김기진은 김명순에 대해 성욕생활이 무절제하다고 비판하면서, 그런 사람 치고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난을 가했다.[14] 김기진의 공개 비판에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길 원한다고 맞받아쳤다.

2. 3. 생애 후반

김명순은 1919년 김동인 등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조직한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인 ‘창조’에 참여했다.[4] 매일신보에서 잠시 기자로 일했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영화계에서 일했다.[4] 1927년 초 이경손 감독의 권유로 영화 '광랑'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나운규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같은 해 이경손 감독이 조선시네마에서 제작한 영화 '나의 친구여'에도 출연하였다. 1928년 2월 '나의 친구여'가 상영된 직후 3월에는 이경손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숙영낭자전'에도 출연하였다. 1930년 안종화 감독이 제작하는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김영환 감독이 제작하는 '젊은이의 노래'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영화배우로도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영화수업을 받지 못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의 배우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25년에는 시집 『생명의 과실』을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빈곤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8년 이병도의 집에서 잠시 머물며 「조선유학사」의 원고를 정리하였다. 이병도와는 일본 유학 중 만났으며 폐허잡지의 동인인데다, 그의 부인이 김명순의 진명여학교 동기동창이었으므로, 이병도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뒤 동창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이병도의 집을 나온 뒤, 일시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이까지 데리고 귀국했지만, 그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한 쑥덕거림과 편견, 그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점에 대한 조롱과 비방 등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그 뒤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1939년 이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갔지만 작품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생계를 위해 잡일과 노동 등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장기간 일하지 못하고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림을 당했다.[4]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晩年 정신 질환으로 고생했다.[5] 그는 주로 동경 Y.M.C.A 회관 뒷채의 셋방에서 살았는데 1945년 해방 소식을 접하였으나 돈이 없어 귀국하지도 못했고, 진료도 받지 못했다.[4] 생애 후반에는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가 누군가의 행려병자 신고로 도쿄도아오야마 뇌병원(靑山腦病院)에 수용되어 생활하던 중 1951년 병사하였다. 매장지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고 있다. 그의 최후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0년대 김명순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5]

2. 3. 1. 영화, 연극배우 활동

1927년 초 이경손 감독의 권유로 그 해에 발표된 영화 '광랑(狂浪)'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나운규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같은 해 이경손 감독이 조선시네마에서 제작한 영화 '나의 친구여'에도 출연하였다. 1928년 2월 '나의 친구여'가 상영된 직후 3월에는 이경손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숙영낭자전'에도 출연하였다. 정식으로 영화 배우나 연극 배우로 수업을 받지는 않았으나, 당시에는 여배우의 수가 부족하여 김명순은 문단활동을 하며 외국유학도 해서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던 그가 영화에 여자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1930년 안종화 감독이 제작하는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김영환 감독이 제작하는 '젊은이의 노래'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영화배우로도 유명세를 탔다. 전국 극장에서 그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영화수업을 받지 못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의 배우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과로로 체력이 허약해져서 1930년 잠시 요양하게 되었다.

2. 3. 2. 방랑과 출국

1938년 이병도의 집에서 잠시 머물며 「조선유학사」의 원고를 정리하였다. 이병도와는 일본 유학 중 만났으며 폐허잡지의 동인인데다, 그의 부인이 김명순의 진명여학교 동기동창이었으므로, 이병도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창작기력을 소진한 그는 더 이상의 시나 소설도 발표하지 못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화출연도 교섭이 들어오지 않아, 남의 집에서 밥이나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뒤 동창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이병도의 집을 나온 뒤, 일시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아이까지 데리고 귀국했지만, 그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한 쑥덕거림과 편견, 그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점에 대한 조롱과 비방 등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그 뒤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1939년 1월호 삼천리지에 시 ‘그믐밤’을 발표하였다.

2. 3. 3. 최후

1939년 이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갔지만 작품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생계를 위해 잡일과 노동 등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장기간 일하지 못하고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림을 당했다. 그는 주로 동경 Y.M.C.A 회관 뒷채의 셋방에서 살았는데 1945년 해방 소식을 접하였으나 돈이 없어 귀국하지도 못했고, 진료도 받지 못했다.[4]

이 무렵의 그의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현대문학 1955년 4월호에 실린 전영택의 소설 ‘김탄실과 그 아들’에 일부 전한다. 전영택은 김탄실과 20대에 「창조」동인으로 함께 활약했으므로, 마지막까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생애 후반에는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가 누군가의 행려병자 신고로 도쿄도아오야마 뇌병원(靑山腦病院)에 수용되어 생활하던 중 1951년 병사하였다. 매장지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고 있다. 그의 최후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0년김명순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5]

3. 사상과 신념

3. 1. 자유 연애론

김명순은 조건과 재력 등의 제한 없는 자유 연애를 역설하였다. 그는 자유 연애를 통해 여성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연애의 근대적 이상을 종교처럼 신봉하였고, 자신의 논설과 작품들에 반영시켰다. 그리하여 '남녀 문인을 통틀어서 김명순만큼 철저하게 연애지상주의를 주창한 작가는 없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의 작품 중에는 구여성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있고, 대부분 신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신여성들은 어김없이 연애지상주의 신봉자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자유연애혼의 이상이 제대로 성취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미혼의 여자 주인공이 연애감정을 느끼는 상대는 유부남이라서 결혼할 수 없고, 이미 결혼한 여자 주인공은 남편 아닌 다른 젊은 남자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며 결혼에서의 일탈을 추구한다.

그는 자유 연애 활동 외에도 개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사적 영역에서의 성의 해방과 여성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며 여자들 스스로가 자유를 얻는데 힘써야 함을 역설했다.

3. 2. 남성관

김명순은 망양초라는 필명으로 많은 시를 지었으며, 이따금 탄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등장시키기도 했다.[16] 25세에 처음 발표한 '조로(朝露)의 화몽(花夢)'에서는 자신을 백장미와 홍장미 두 개의 성격으로 설정하고, 동생 홍장미의 말을 통해 남성을 묘사했다.[16]

"왜 내가 더 피거든 온다고 약속하고 가신 이 말이요, 그이가 왔는데 제게는 아니오고 저어, 언니께로 왔어요. 그리고 저를 돌려다도 안보았어요. 그럴 동안에 언니도 저를 안보시고 아주 득의스럽게 미소하시지요?[16]"

김명순은 당시의 조선 여성들과는 달리, 남성 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16] 133행이나 되는 긴 시에서 남호접(藍胡蝶)으로 은유한 남성에 대한 깊은 동경과 망양초의 연애사건을 자유롭게 전개시켰다.[16] 한편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세계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남성을 기다리다가 지친 김탄실 자신의 모습이 탐미적으로 그려져 있다.[16] 그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모성상실감 속에서 배다른 남매들 속에 자랐으므로, 그의 시에서는 고아의식과 죽음의식이 자생적으로 표출되었다.[16]

3. 3. 머더 콤플렉스와 조국관

김명순은 불우한 성장 환경으로 인한 고아 의식을 자전적인 표현 기법으로 작품에 담아냈다.[16] 그의 작품에서는 계모와 서모 슬하에 놓인 비운의 고아의 처지가 조국을 잃은 식민지 백성에 비유되어 나타난다.

{{인용문2|차디찬 어머니의 품에

차디찬 어머니의 품에

머리 많은 처녀는 울었다.

그 냉락(冷落)한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 어머니

왜 돌아가셨오 하고 부르짖으며

누가 미워서 그리했소 하고 울면서|탄실의 초몽(初夢)>에서}}

어떤 시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과 생활고 등의 비애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특히 사랑은 가버리고 없는 님으로 표현되었다.[16]

{{인용문2|추억

작은 금방울 소리에

옛날 생각을 이으면

하늘은 꽃으로 가리고

우리는 기도로 굽혔었어요.

아아 옛날 생각 옛날 믿음

고만 님도 꽃도 못 보았지요.

작은 금방울 소리에

옛날 일을 생각내면은

생각 못미칠데 생각 미쳐

행복은 앓는 가슴에 있었지요.

아아 맘 아픈 파랑새는 파랑새는

하늘을 울리며 그 가슴에 왔었지요.|<추억>에서}}

'옛날에는 함께했던 님이 이제는 옆에 없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꽃구경을 했건만, 이제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금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그 옛날로 돌아가 추억을 더듬고, 가슴 아픈 행복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실감은 결국 모든 겨레의 공통 관심이었던 조국 상실감으로 이어진다.[16]'는 평이 있다. 그는 주권을 잃은 조국을 어머니를 잃은 고아 혹은 자신의 처지와 승화시켜 표현하였다.

김명순은 특별한 저항 시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젊은 날 가졌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자 결국 조국을 빼앗겼다는 사실까지 뼈에 사무쳐, 민족의 탄식을 대변하게 되었다.[16]

{{인용문2|그때까지 조선의 민중

너희는 피땀을 흘리면서

같이 살 길을 준비하고

너희의 귀한 벗들을 맞으라.|<탄식>에서}}

이 시에서는 현재 옆에 없는 님을 그리워하고 과거 회상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님, 조국을 만날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대책 없는 탄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광복에 대한 예시적 영상을 표출하였다.[16]

3. 4. 자유주의 수용과 여성 계몽론

김원주, 나혜석 그리고 김명순 등으로 대표되는 부류의 신여성은 동경 유학시절 공통된 경험을 했는데, 서구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의 수용, 낭만적 사랑이야기를 담은 고전 소설 탐독, 일본의 여성 선각자 목격 그리고 조혼으로 인해 대부분 기혼이었던 조선인 남자유학생들과의 연애 등이 그것들이다.[17]

이러한 유학시절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신여성으로서의 개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자신들을 포함한 여성이 봉건적 유습에서 해방되기 위해 자유 연애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17]

4. 작품

김명순의 주요 작품은 소설에 <의심의 소녀>, <칠면조>(1921), <외로운 사람들>(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돌아다 볼 때>(1925), < 뭇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갓치>(1929) 등이 있다. 시에는 <동경>(1922), <표현파의 시>(1922), <창궁>, 〈옛날의 노래여〉(1922), <거룩한 노래>, 〈시로 쓴 반생기〉(1938), 시극 <조로의 화몽(1920) 등이 있다.

재조명받지 못하여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유실되었지만 2000년까지 밝혀진 김명순의 작품은 시 86편(번역시 포함), 소설 22편, 기타 번역서들, 시 60편, 번역시 9편, 수필·평론 20편, 희곡 2편 등이 현재 전하고 있다. 그의 소설 작품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 묘사에 치중하였으며, 시 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작품집으로는 1925년 작품집 《생명의 과실(果實)》(한성도서주식회사)과 1930년 작품집 《애인의 선물》(회동서관)을 출간하였다.

4. 1. 소설

김명순은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1917년에는 ''의문의 소녀''를 발표했고, 1921년에는 ''칠면조''를 발표했다. 1924년에는 ''돌아 볼 때''와 ''탄실이와 주영이''를 발표했다. 1925년에는 ''꿈 묻는 날 밤''과 ''창궁''을 발표했다. 1926년에는 ''손님''과 ''나는 사랑한다''를 발표했고, 1929년에는 ''모르는 사람같이''를 발표했다. 그 외에도 <거룩한 노래>, <고구려 성을 찾아서>, <동경>, <옛날의 노래여>, <언니 오시는 길에>, <석공의 노래>, <시로 쓴 반생기> 등을 발표했다.

4. 2. 시집

김명순은 생명의 과실(果實)과 애인의 선물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4. 3. 시

5. 평가와 비판

김명순은 남성 문인들에 의해 탕녀로 낙인 찍혔으며,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끝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극단적인 가부장 체제의 억울한 피해자이자 희생양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평가는 여성의 관점에 기반한 최근의 연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인용문2|그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녀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이지만 탄실이라는 여성은 그 식민지 남성의 또 다른 식민지였다.

그래서 그녀의 싸움은 바깥을 향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폭압에 맞서 내부의 적들과 쟁투해야 했다.|김별아 장편소설 <탄실> 중에서}}

6. 논란과 의혹

6. 1. 표절, 아류 의혹

1917년 그의 소설작 의심의 소녀를 선발하면서 이광수는 '상당히 세련되었으며 기능도 있으며 신비적인 분위기도 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1942년 이광수는 자신의 지인에게 현상모집 여성당선작가인 그를 일본 문학의 표절작가로 전락시켰다. 또한 일본 문학의 아류라고도 비꼬았다. 이때문에 그의 뛰어난 문학적 세련미가 오히려 후일 의심의 소녀가 타 작품에서 힌트를 얻은 모방작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으며, 그것은 현재까지도 의혹이 되고 있다.

7.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김탄실(1896-?) 성의 갈등과 상실을 민족사랑으로 승화시킨 여류문인 http://www.womenshis[...] 2017-12
[3] 서적 Questioning Minds University of Hawaii Press
[4] 서적 Questioning Minds University of Hawaii Press
[5] 서적
[6] 서적
[7] 서적 Questioning Minds University of Hawaii Press
[8] 웹사이트 金明淳 http://koreandb.nate[...]
[9] 웹사이트 金明淳 http://100.daum.net/[...]
[10] 서적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11] 서적 역사에 사랑을 묻다 이숲
[12] 간행물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3] 서적 탄실 - 김별아 장편소설
[14] 간행물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5] 뉴스 소외받은 근대女작가 3인 탐구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0-02-09
[16] 웹사이트 김탄실(1896-?) http://www.womenshis[...]
[17] 간행물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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