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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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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혜석은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화가, 작가, 여성운동가이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했으며, 1910년대부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를 주장하는 등 시대를 앞선 사상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여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유럽 여행 중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불륜 관계를 맺어 이혼 후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여성의 권리,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말년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다가 194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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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 [인물]에 관한 문서
한자 표기羅蕙錫
로마자 표기Na Hyeseok
아명나아지, 나명순
아호정월(晶月)
기본 정보
나혜석, 18-19세 경 (c.1915)
출생일1896년 4월 28일
출생지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현재 대한민국 수원시 행궁동)
사망일1948년 12월 10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원효로1가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직업시인, 언론인, 소설가, 서양화가, 판화가, 조각가, 교육자,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장르시, 소설, 미술, 회화, 에세이, 연극
종교불교
가족 관계
나기정
최시의
배우자김우영 (1920년 결혼, 1930년 이혼)
자녀김나열(맏딸)
김선(첫째아들)
김진(둘째아들)
김건(셋째아들)
친척나경석(동복 오빠)
나계석(이복 언니)
나지석(동복 여동생)
나영완(할아버지)
나기형(큰아버지)
나홍석(법적 사촌 오빠)
나영균(친정 조카딸)
전민제(친정 조카사위)
김재민(손자)
김성민(손자)
김황민(손자)
나문희(친정 조카손녀)
정승호(친정 재종손서)
학력
학교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전문학사
작품 세계
분야서양화, 판화, 조각, 시
사조자유주의, 페미니즘

2. 학력


3. 생애

나주 나씨 가문 출신으로, 아명은 '''나아지'''(羅兒只) 또는 '''나명순'''(羅明順)이며, 아호는 정월(晶月)이다.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1918년 귀국하여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했으며, 여성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로서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귀국 직후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이후 박인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했으며,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5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여 만주와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그림, 조각, 문필, 시 등 다방면에서 예술 활동을 펼쳤다. 1927년에는 남편의 구미 시찰에 동행하여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29] 프랑스 체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으며 예술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 사회적 논란에 휩싸였다.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했으나 결국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 1930년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게 되었고, 이후 최린과도 결별했다.

이혼 후 나혜석은 더욱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펼쳤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을 통해 자신의 이혼 과정을 상세히 밝히며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과 남성 중심적인 도덕 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1935년에는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여, 순결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의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그는 남성들의 위선적인 태도, 자유 연애의 필요성, 당사자의 의사가 무시되는 결혼 관행, 가정폭력 문제 등을 지적하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평가받는 나혜석은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근대 여성이었다. 그는 여성 해방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봉건적 인습에 도전하며 이혼 후에도 사회 활동을 이어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중 한 명이자, 뛰어난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일본 유학 시절부터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한 여성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30] 배우 나문희는 그의 고모할머니이다.[31]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그의 주장과 활동은 당시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이혼과 사회적 논란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악화, 사회적 고립 속에서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 1933년에는 화재로 작품 대부분을 잃는 아픔을 겪었고, 서울에 설립한 '여자미술학사'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25] 1944년 서울의 한 양로원에 들어갔으며,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한 시립 자선 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3. 1. 초기 생애 (1896-1913)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6] 일찍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1913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7]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 서양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3. 1. 1. 출생과 가계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32]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재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45번지)에서 태어났다.[6] 할아버지 나영완(羅永完)은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을 지냈으며, 증조부 등에게도 증(贈) 호조참판 등의 벼슬이 내려져 집안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집안은 '나 참판 댁' 또는 '나부잣집'으로 불릴 만큼 부유했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은 구한말의 개명인사로, 대한제국 시기 수원면장[33],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군 군수를 역임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공직을 이어가 용인군 군수를 지냈다.[34] 어머니는 수성 최씨 최시의(崔是議)이다. 나혜석은 나주 나씨 가문의 5남매(요절한 자녀 포함 시 弘錫, 景錫, 蕙錫, 芝錫) 중 넷째이자 딸로는 둘째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32][6]

어린 시절 이름은 아지(兒只)였고, 유아기에는 명순(明順)으로 불렸다. 이후 일본 유학 시절부터 혜석(蕙錫)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호는 정월(晶月)이다. 1906년 8월, 열 살 때 여동생과 함께 메리 F.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이 세운 선교 계열 학교인 사밀여학교(혹은 삼일여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며 특히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이후 진명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 3월 수석으로 졸업했다.[7]

졸업 후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같은 해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이소노 요시오(磯野吉雄), 오카다 사부로스케, 아스케 코타로(足助恒) 등에게서 서양화와 유화를 배웠다.[25]

3. 1. 2. 유년 시절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조선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대로 관료를 지낸 유복한 나주 나씨 가문 출신이었다.[6] 어린 시절 이름은 아지(兒只, 아이를 뜻함)였고, 유아기에는 명순(明順)이라 불렸으며, 이후 일본 유학 시절부터 혜석(蕙錫)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호는 정월(晶月)이다.

그에게는 이복 언니 나계석(羅稽錫), 여동생 나지석, 오빠 나홍석, 나경석이 있었다. 이복 언니 계석은 일찍 시집을 갔고, 큰오빠 나홍석(羅弘錫)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나기형(羅基亨)의 양자로 가게 되면서, 나혜석은 주로 둘째 오빠 경석과 동생 지석과 함께 자랐다. 특히 오빠 나경석은 나혜석의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했다.

아버지 나기정은 개화된 인물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에 힘썼으며, 덕분에 나혜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울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였다고 하며, 일찍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수원 화성,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침인 융건릉, 방화수류정, 서호 등을 찾아다니며 풍경 그림을 그리곤 했다.

1906년, 10살 때 여동생과 함께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선교 계열 학교인 사밀여학교에 입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큰아버지의 양자로 간 큰오빠 나홍석이 1909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혜석은 그를 통해 신교육 사상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34] 나혜석은 오빠의 집(수원면 남창리 55번지)에 자주 드나들었다.[34]

한편, 아버지 나기정에게는 여러 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나혜석보다 나이가 많은 이복 언니 나계석의 생모였고, 다른 첩은 나혜석과 비슷한 또래였다. 특히 나혜석이 사춘기일 때 아버지가 들인 첩은 나혜석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여성이었다. 어머니 최시의가 어린 첩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혜석은 당시 사회의 정조 관념과 축첩 제도, 가부장제에 대해 깊은 회의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사상과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진명여고에 진학하여 1913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수석 졸업했다.[7]

3. 2. 청소년기 (1910-1913)

이 시기 나혜석은 수원과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1913년까지 그림에 대한 재능을 키우고 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3. 2. 1. 삼일여학교와 진명여학교 시절

아버지 나기정은 첫딸 계석을 제외하고 딸과 아들 모두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딸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나혜석은 '아기', 막내딸 나지석은 '간난이'라고 불렀는데,[35] 이는 개화한 관료였음에도 봉건적인 인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35]

1910년(융희 4년) 6월, 나혜석은 수원 삼일여학교(현재 수원 매향중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삼일여학교는 나혜석의 사촌 오빠인 나중석이 1902년(광무 5년) 수원 보시동 북감리교회 내에 세운 사립 삼일여학당으로, 1909년(융희 2년) 삼일여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혜석은 1910년 새로운 학제에 따른 제1회 졸업생 4명 중 한 명이었다. 삼일여학교 재학 중이던 1910년, 월간지 '개벽'을 위해 단색 목판화 '개척자'를 제작하기도 했다.[36][37] 그녀는 1910년 8월 삼일여학교를 졸업했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오빠 나경석이 이를 후원했다.[34] 이후 진명여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 3월 수석으로 졸업했다. 젊은 시절 나혜석은 명랑하고 당찬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역할을 거부하고 화가이자 지식인이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8]

3. 2. 2. 일본 유학과 여성 의식의 성장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제3회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다.[35]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었기에, 수려한 외모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주목받았다.[35][38]

같은 해,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4월 도쿄 여자미술학교(女子美術学校|조시 비주쓰 각코일본어)에 입학하여 서양화, 특히 유화를 공부했다.[38][9] 그곳에서 이소노 요시오(磯野吉雄일본어), 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郎助일본어), 아스케 코타로(足助恒일본어) 등의 지도를 받았다.[25]

도쿄 유학 시절은 나혜석의 여성 의식이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김원주, 김명순 등 다른 신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자유주의개인주의 사상을 접하고, 낭만적 사랑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탐독했으며, 일본의 여성 선각자들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다.[141] 또한, 당시 조선인 남자 유학생들과의 교류 속에서 자유 연애 사상을 접하고 이를 옹호하게 되었다.[141] 이러한 경험을 통해 봉건적 유습에서 벗어나 개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여성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41]

나혜석은 유학 중에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다. 여러 에세이를 통해 전통적인 "현모양처" 상을 비판하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10] 18세 때인 1914년 12월, 잡지 『학지광』에 발표한 「이상적 부인」은 근대적 여성 권리를 주장하는 글로 평가받는다. 또한 일본의 신여성 운동가인 히라츠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일본어)나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 등에 깊이 공감하며 여성 해방에 대한 의식을 키웠다.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 윤정원이 주장한 '양처현모론'을 비판하며 남녀평등을 강조하기도 했다.

유학 생활 중 개인적인 어려움도 겪었다. 1914년 여름방학에 귀국했을 때 아버지로부터 결혼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학비 지원이 끊기자 1년간 휴학하고 모교인 진명여고에서 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한 뒤 다시 도쿄로 돌아갔다.

도쿄에서 나혜석은 활발히 교류하며 활동했다. 1915년 4월에는 일본 유학 중인 한국 여학생회의 주요 조직자로 활동했다.[11]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던 최승구(당시 게이오기주쿠 대학 학생이자 『학지광』 편집인), 염상섭, 이광수 등과 교류했으며, ‘재동경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통해 김마리아, 황애덕, 유영준 등과도 만났다. 특히 시인이자 경성제국대학 최초의 조선인 사학 전공자였던 최승구와는 연인 관계였으나,[11] 1916년 4월 그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학업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11] 이광수와도 문학적,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11]

이후 유영준, 김마리아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여자계』 발간에 참여했으며,[26] ‘정월(晶月)’이라는 필명으로 1918년 3월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여성이 자아를 발견하고 신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8]

1918년 도쿄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이듬해인 1919년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5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12] 이러한 경험들은 나혜석이 화가이자 작가로서, 그리고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지식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 3. 일본 유학 시기와 초기 작품 활동 (1913-1919)

1913년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권유와 스스로의 의지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30] 당시 여성 유학생이 드물었던 만큼 그의 유학 생활은 국내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주목받았으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35]

유학 시절 나혜석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조선여자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했으며,[40] 일본의 신여성 운동과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아 현모양처라는 전통적 여성상을 거부하고 화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는 자의식을 키워나갔다.[8] 이러한 생각은 「이상적부인」(1914)과 같은 초기 글과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여자계』[26] 발간 참여, 그리고 여성의 자아 발견 과정을 그린 소설 「경희」(1918) 발표 등으로 이어졌다.[8]

1918년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나혜석은 이듬해인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12] 이 시기는 나혜석이 화가이자 작가로서, 그리고 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 3. 1. 유학 생활과 최승구와의 만남

1913년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나혜석은 일본 유학 중이던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와 스스로 신미술인 서양화를 전공하고자 하는 의지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30] 같은 해 4월, 오빠가 추천한 도쿄의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했다. 당시 일본 유학생은 증가하는 추세였지만 여성 유학생은 드물었기에, 그의 유학 생활은 국내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주목받았다. 나혜석은 학업에 매진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이는 1914년 4월 9일 자 매일신보에 "제일 학업 성적이 남보다 출중한 여자 유학생" 중 한 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35]

: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 여학생 수효는 30명에 이르나 번화한 도회 문물에 접촉함과 부모의 감독을 가까이 받지 못하는 까닭으로 모두 성적이 좋다고 이르기 어려우나,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학업을 닦기 위하여 만리 해외에 괴로움을 달게 여김은 청년 남자가 도리어 부끄러이 여길 바이라. 그중에도 제일 학업 성적이 남보다 출중한 여자 유학생은 여자미술학교 생도 나혜석, 여의학교(女醫學校) 생도 허영숙[39], 일본여자대학교 부속 고등여학교 졸업생 김수창 등 세 규수이다.[35]

: — 매일신보, 1914.04.09

유학 시절 나혜석은 교포 여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친목회'를 결성하고 기관지를 발간하는 등 문필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40] 또한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며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던 최승구(崔承九), 염상섭, 이광수 등을 만났고, '재동경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통해 김마리아, 황애덕, 유영준 등과도 교류했다.

이 무렵 게이오기주쿠 대학 학생이자 잡지 『학지광』의 편집인이었던 시인 최승구와 사랑에 빠졌다.[11] 나혜석과 최승구의 관계는 당시 일본 유학생 사회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광수와의 문학적, 개인적 교류 또한 주목받았다.[11] 한편, 일본인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佐藤彌太)가 나혜석에게 깊은 호감을 보이며 "제가 조선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고백하며 청혼했으나, 나혜석은 이를 거절했다.[34]

1914년 여름방학에 귀국했을 때, 아버지는 유력 가문과의 혼담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11] 나혜석은 이를 거부했고, 학비 지원이 끊기자 1년간 휴학하고 모교인 진명여고에서 교사로 일하며 스스로 학비를 마련한 뒤 1915년 말 도쿄로 돌아가 학업을 재개했다.[11] 그러나 1916년 4월, 연인 최승구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혜석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학업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11]

유학 기간 동안 나혜석은 일본의 신여성 운동과 입센의 『인형의 집』 등 유럽의 새로운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신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키워나갔다. 그는 히라츠카 라이초, 요사노 아키코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적인 현모양처상에 도전하며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글들을 발표했다.[10] 18세에 쓴 「이상적 부인」(『학지광』, 1914)과 유영준,[84] 김마리아 등과 함께 창간한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여자계(女子界)』[26]에 필명 '정월(晶月)'로 발표한 소설 「경희」(1918) 등은 그의 근대적 여성 의식을 잘 보여준다.[88]

나혜석은 1918년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했다.[83] 졸업 후 귀국하여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이후 화가와 작가, 여성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최승구와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훗날 김우영과 결혼할 당시, 약혼자에게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이를 관철시킬 만큼 그에게 최승구는 중요한 존재였다.[52]

3. 3. 2. 여성 해방론과 문필 활동

일본 유학 시절부터 나혜석은 문필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현지 조선인 유학생 단체에 가입하고 잡지 『학지광』에 글을 기고하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34] 교포 여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친목회'를 결성하여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40] 이 시기 나혜석은 일본의 신여성 운동과 유럽의 새로운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신여성'으로서의 자각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히라쓰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 헤르만 주더만(Hermann Sudermannde)의 『고향(故郷)』,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인형의 집』 등에 깊이 공감했다. 특히 윤정원의 '현모양처론'을 비판하며 남녀평등을 강하게 주장했다.[8]

나혜석의 친필 편지


18세 때인 1914년 12월, 『학지광』에 발표한 「이상적부인」은 근대적 여성 권리 의식을 보여주는 글로 평가받는다. 이후 유영준,[26] 김마리아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여자계(女子界)』를 창간하고,[26] "정월(晶月)"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1918년 3월 『여자계』에 발표한 단편 소설 「경희(瓊姬)」는[8] 여성이 자아를 발견하고 '신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전통적인 현모양처상에 대한 거부와 화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8][10]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5개월간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12] 이듬해인 1920년에는 김일엽, 염상섭 등 10명의 남성들과 함께 문학 동인지 『폐허』 창간에 참여했다.[13] 1920년대 초, 나혜석은 김일엽과 함께 여성 잡지 『신여자』에 여성 의복 개량에 관한 글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들은 여성의 위생, 건강, 자아상 향상을 위해 더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복장을 주장하며, 여성의 신체적 편안함, 보호,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고 디자인된 전통 한복을 비판했다.[9]

결혼 후에도 나혜석의 비판적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1923년 발표한 에세이 「모(母)된 감상기」(원제: 모가 되어 생각하는 바)에서는 남편 김우영이 자녀 양육의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미루는 현실을 비판하며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10]

1930년 최린과의 관계로 남편 김우영과 이혼했다.[4][9] 이후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하며 다시 한번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혼 과정을 상세히 밝히면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도덕 관념과 성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나아가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억압을 고발하고, 전 남편과의 성생활에 대한 불만을 솔직하게 언급하며 결혼 전 남녀가 함께 살아보는 '시험 결혼'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16] 그러나 당시 유교적 관념이 지배적이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솔직한 발언은 금기시되었기에, 「이혼고백장」은 큰 사회적 비난을 받으며 사실상 그녀의 화가 및 작가로서의 활동에 치명타를 안겼다.[17] 또한, 최린이 이혼 후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비록 생전에는 시대를 앞서간 주장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최근 그녀의 선구적인 여성 해방 사상과 문학적, 예술적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4]

3. 3. 3.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나혜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3·1 운동에 참여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12]

3. 4. 결혼과 유럽 여행, 그리고 이혼 (1920-1930)

1920년 4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정동의 결혼식장에서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13] 결혼 후 서울에서 그림 활동에 전념하여 1921년 3월 18일에는 한국 여성 화가 최초로 개인 유화전을 열었으며,[14][25] 같은 해 4월 첫 딸을 출산했다.[25] 1921년 9월 남편 김우영이 중화민국 안동현(현재의 단동시) 부영사로 임명되자 함께 이주하여 두 아이를 더 낳았다.[25] 이 시기에도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했으며,[25] 1926년에는 〈천후궁〉이 특선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1923년에는 "모(母)된 감상기"를 발표하여 육아를 여성에게만 전담시키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10]

1927년, 남편 김우영의 안동현 부영사 임기가 끝나자 '오지 근무 위로 여행'의 명목으로[25]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아[15] 남편과 함께 유럽미국 등지를 여행했다. 약 1년 8개월간의[73] 여행 중 남편이 독일과 영국 등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혜석은 주로 파리에 머물며 미술관을 순례하고 그림 공부에 매진했다.[10][25] 이 파리 체류 기간 동안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만나 관계를 맺게 되었다.[25]

1929년 3월 부부는 귀국했으나,[25] 파리에서의 최린과의 관계가 남편에게 알려지면서[25] 결국 1930년 11월 김우영과 이혼하게 되었다.[4][9][25] 이혼 과정에서 재산 분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녀들의 친권 또한 박탈당했다.

3. 4. 1. 김우영과의 결혼

동경 유학 시절 이광수와 염문이 있었으나, 결국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였다.[52] 김우영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으며,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다.[52]

나혜석은 결혼 전 김우영에게 자신의 과거 연애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김우영은 이를 받아들였다.[52] 결혼을 결정하며 나혜석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평생 자신만을 사랑하고 예술 활동의 자유를 보장할 것, 전처의 자녀 및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등이었다.[52] 특히 마지막 조건은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매우 파격적인 요구였으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김우영은 이 모든 조건을 수락했다.[52]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1920)


1920년 4월 10일, 두 사람은 서울 정동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3] 결혼 후 나혜석은 서울에서 그림 활동에 몰두했다. 1921년 3월 18일에는 임신 중이었음에도 한국 여성 화가 최초로 개인 유화전을 서울에서 개최했고,[14][25] 같은 해 4월에는 첫 딸을 낳았다.[25]

1921년 9월, 남편 김우영이 중화민국 안동현(현재의 단동시) 부영사로 임명되면서 함께 이주했다. 안동으로 이주한 후 두 아이를 더 낳았다.[25] 나혜석은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6년 연속 입선하며 화가로서 꾸준히 활동했다.[25] 1923년에는 "모(母)된 감상기"라는 글을 통해 육아를 여성에게만 전담시키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10]

3. 4. 2. 유럽 여행과 예술적 성장

1927년,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과 함께 일본 정부의 후원으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는 기회를 얻었다.[15][25] 이는 김우영의 만주 안동현 부영사 근무를 마친 후 주어진 '오지 근무 위로 여행'의 성격이었다.[25] 약 1년 8개월[73] 동안 부부는 15개국을 돌아보았다.[73] 남편 김우영이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혜석은 파리에 머물며 미술관을 순례하고 그림 공부에 매진하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10][25] 이 시기 그는 파리에서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했으며,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만나 관계를 맺게 된다.[10][25]

유럽 체류는 나혜석에게 예술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서구의 발달된 문물과 활기찬 사회 분위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는 귀국 후 발표한 '구미만유기'나 삼천리 1932년 1월호에 실린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등의 글에서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서구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 참여를 목격하며 여성으로서의 자각을 더욱 확고히 했다. 그는 당시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여긔서는 여자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로만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듸다.[73] (‘구미만유하고 온 여류화가-나혜석씨와 문답기’, <별건곤> 1929년 8월호)


그러나 나혜석은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다. 그는 서구 사회의 풍요와 발전 이면에 가려진 제국주의적 침탈과 약소민족의 희생을 간파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124] 일례로 최남선이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 칭송했던 영국의 공원에 대해 “식민지에서 빼앗아온 것으로 시가지 시설이 모두 풍부하다. 공원은 전부 돈덩어리”라고 지적하며 서구 문명의 물질적 기반이 식민지 수탈에 있음을 비판했다.[124] 또한 유럽 여행을 통해 오히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현실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73]

나는 여성인 것을 학실이 깨다랏다. …그리하여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적은 것이 갑 잇난 것으로 보고 십고 나뿐 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 사람이 알앗스면 십흐다.[73]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삼천리> 1932년 1월호)


1929년 3월, 부부는 귀국했다.[25] 나혜석은 고향 수원에서 유럽 여행 중 그린 작품과 현지에서 수집한 판화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15] 그러나 파리에서의 최린과의 관계가 남편에게 알려지면서 결국 1930년 이혼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4][9][25] 이혼 후에도 나혜석은 예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1931년에는 파리의 클뤼니 미술관을 그린 작품 「정원」으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특선을 수상하고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도 입선하는 등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었다.[25]

3. 4. 3. 최린과의 염문과 이혼

1927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일본 정부의 후원으로 유럽과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15] 이는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안겨주었다.[29] 김우영이 독일과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혜석은 파리에 머물며 미술관을 탐방하고 그림 공부를 위해 온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25] 파리 체류 중 천도교 지도자이자 김우영의 절친한 친구였던 최린과 만나 연애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4][9][87]

1929년 3월 부부가 귀국한 후,[25] 김우영은 외교관 생활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준비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64] 나혜석은 동래의 시댁에서 지내며 처음 겪는 경제적 궁핍과 시집살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64]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데다 시댁 식구들의 곱지 않은 시선까지 더해지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날로 쇠약해졌다.[64] 나혜석은 최린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연애편지로 오해받아 김우영의 귀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했다.[64][45] 최린과의 관계는 지인들의 입을 통해, 혹은 사진 등으로 김우영에게 알려졌다.[47]

귀국 이듬해 셋째 아이 건(健)을 낳았지만, 김우영은 이미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린 상태였고,[47] 최린과의 관계를 빌미로 이혼을 요구했다.[4][9] 김우영은 이혼을 거부하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으며, 시댁 식구들까지 가세하여 압박했다.[47] 결국 나혜석은 1930년 11월 경성법원에서 이혼 도장을 찍었다. 이혼 조건으로 '2년 후 재결합 가능'이라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KRW 상당의 전답을 받았으나,[47] 실질적인 재산 분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녀들에 대한 친권마저 박탈당했다.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위자료를 청구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이 남성에게 위자료를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김우영은 이혼 4개월 만인 1931년 3월 신정숙과 재혼했다.[47]

이혼 후 최린과의 관계도 끝이 났다. 최린이 이혼 후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및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혼과 사회적 불명예 속에서도 나혜석은 화가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파리의 클뤼니 미술관을 그린 「정원」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으며, 이 작품으로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도 입선하는 등 예술적 성취를 이어갔다.[52][25]

1934년에는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이혼 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조선 사회의 성 불평등과 가부장제적 모순,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16][91][60] 이 글에서 나혜석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며 전 남편 김우영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외면하고 관련 논의를 거부했다고 폭로했으며, 결혼 전 서로를 알아갈 시간을 갖는 '시험 결혼'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16] 그러나 당시 유교도덕 관념이 지배적이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적 경험과 주장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이혼고백장」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나혜석의 사회적 평판을 실추시키고 예술가로서의 경력마저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7]

3. 5. 이혼 후의 삶과 사회적 논란 (1931-1948)

프랑스 파리 체류 중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 1931년 남편 김우영에게 간통을 사유로 이혼당했다.[4][9] 이혼 과정에서 재산 분할은 없었으며 자녀에 대한 친권도 박탈당했다.

이혼과 사회적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그림 활동을 계속하여,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파리의 클뤼니 미술관을 그린 작품 「정원」으로 특선을 수상했으며,[25]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도 입선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25]

그러나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면서 다시 한번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글에서 그는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과 성 불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시험 결혼'과 같은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으나,[16] 이는 유교적 관념이 강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그의 사회적 평판과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17] 또한, 이혼 후 생활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최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인왕산 절에서 (1944)


이후 나혜석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33년에는 전람회 출품을 위해 그린 작품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고, 서울에 설립한 '여자미술학사' 역시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25] 점차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그는 1944년 양로시설인 서울 자제원에 들어갔으며, 1948년 12월 10일, 한 자선 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4]

사후 오랫동안 잊혔던 나혜석은 최근 그의 시대를 앞서간 예술적, 문학적 업적과 선구적인 여성 해방 사상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00년에는 서울예술의전당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는 등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조명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4]

3. 5. 1. '이혼 고백장' 발표와 정조 취미론

프랑스 체류 중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 남편 김우영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1930년 이혼하게 되었다. 당시 간통을 사유로 이혼당했으며, 재산 분할이나 자녀 양육권도 인정받지 못했다.[4][9] 최린은 이혼 후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나혜석은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글들을 발표하며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16]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를 상세히 밝히면서 당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적 모순과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 성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글에서 그는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성적 억압을 비판하고, 전 남편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부부가 결혼 전에 함께 살아보는 '시험 결혼'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16] 그러나 이러한 솔직하고 파격적인 내용은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오히려 그의 사회적 평판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7]

이듬해인 1935년에는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여 더욱 논쟁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순결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며,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의 이중 잣대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성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지적하며 자유 연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나혜석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강점기 봉건적 사회 질서와 인습적 관념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으나,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탓에 대중의 공감을 얻기보다는 사회적 비난과 냉대에 직면해야 했다.[56] 그의 글은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예술 활동과 사회적 입지를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 5. 2. 여성 해방 운동과 사회 활동

일본 유학 시절부터 일본의 신여성 운동과 유럽의 새로운 사상에 접하면서 여성 해방에 대한 의식을 키웠다. 특히 히라츠카 라이초, 요사노 아키코 등 일본 여성 운동가들과 헤르만 주더만, 헨리크 입센의 작품 속 주체적인 여성상에 깊이 공감했다. 18세 때인 1914년,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부인」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당시 윤정원 등이 주장하던 현모양처론을 비판하고 남녀평등에 기반한 근대적 여성상을 제시했다. 1915년에는 도쿄의 한국 여자 유학생 친목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유영준, 김마리아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여자계』 발간에도 힘을 보탰다.[26] 1918년 발표한 단편 소설 『경희』는 신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1918년 도쿄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나혜석은 잠시 정신여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영향을 받아 1918년 말부터 박인덕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12]

결혼 후에도 나혜석의 사회 비판 의식과 여성 해방에 대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1920년에는 김일엽, 염상섭 등과 함께 문학 동인지 『폐허』 창간에 참여했으며,[13] 1920년대 초에는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를 통해 여성 의복 개량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비실용적인 전통 한복을 비판하며 여성의 활동성과 건강을 고려한 새로운 복식을 제안했다.[9] 1923년 발표한 수필 「모(母)된 감상기」에서는 남편이 육아 책임을 아내에게만 전가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가부장제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10]

이혼 후 나혜석의 주장은 더욱 급진적이고 대담해졌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장」은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성 불평등과 가부장제의 위선을 고발하는 글이었다.[16] 그는 이 글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고, 전 남편과의 관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결혼 전 서로를 알아갈 필요성을 강조하는 '시험결혼'을 제안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다.[16] 이는 유교적 도덕관념이 지배적이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여성의 성(性) 담론을 금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17] 1935년에는 「정조는 취미론」을 발표하여, 순결과 정조 관념이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는 '도덕이나 법률이 아닌 취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나 딸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면서 다른 여성에게는 성적 욕망을 품는 남성들의 이중성을 질타하고 자유 연애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또한 당사자의 의사가 배제된 결혼 관행과 가정폭력 문제 등 당시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끊임없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나혜석은 일제강점기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예술가이자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과 사회 참여를 외친 선구적인 운동가였다.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더불어 봉건적 인습에 도전하며 이혼 후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 활동을 이어간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꾸준히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며 한국 여성 운동의 지평을 열었으며,[30] 인습적인 '현모양처' 상을 거부하고 화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8]

3. 5. 3. 실험 결혼론과 남성들의 이중 잣대 비판

프랑스 체류 중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 1931년 남편 김우영에게 간통을 사유로 이혼당했다.[4][9]

이혼과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하여 당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적 질서,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 유교적 도덕과 전통이 강요하는 성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16] 그녀는 이 글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지적하고, 전 남편과의 관계를 포함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나아가 부부가 결혼 전에 함께 살아보는 '시험 결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16]

이듬해인 1935년에는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여, 순결과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여성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성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한 자유 연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한 채 집안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결혼과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 중심의 문화를 비판하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특히 여성의 성(性)에 대해 솔직하게 논하고 결혼 전 동거를 주장한 「이혼고백장」은 유교적 가치관이 뿌리 깊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용납되기 어려웠고, 결국 그녀의 사회적 평판과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17]

3. 6. 말년과 죽음 (1937-1948)

이혼과 사회적 비난 이후, 나혜석은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악화 속에서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 여러 곳을 떠돌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고 점차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1944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머물기도 했다. 결국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한 시립 자선 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잊혔던 그의 예술과 문학은 최근 활발히 재평가되고 있으며, 예를 들어 2000년 서울예술의전당에서 회고전이 열렸다.[4]

3. 6. 1. 작품 활동과 사회적 고립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졸업 후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5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만주와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그림, 조각, 문필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3월, 서울에서 한국 여성 화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으며,[14]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했다.[25] 1926년에는 「천후궁」으로 특선을 차지했다. 또한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폐허』 창간에 참여했고,[13]신여자』 잡지에 여성의 의복 개량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며 전통 한복의 비실용성을 비판하고 여성의 활동성과 편의성을 강조했다.[9] 1923년에는 "모(母)된 감상기"를 발표하여 육아를 여성에게만 전담시키는 현실을 비판했다.[10]

1927년 남편의 구미 시찰에 동행하며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29]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야수파, 인상주의 등 새로운 미술 사조를 접하고 그림 공부에 매진했으나,[10] 이때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몰두하여 1930년 제9회 선전에 '화가촌', '어린이' 등을 출품했고, 1931년 제10회 선전에서는 파리 클뤼니 미술관을 그린 '정원'으로 특선을 차지했다. 이 작품은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도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52][25]

그러나 최린과의 관계는 결국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이어졌다. 1930년 6월 삼천리지에 유럽의 실험결혼론을 소개하며 결혼 전 동거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귀국 후 남편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최린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한 편지가 불륜의 증거로 오해받고,[45][64] 남편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하며 간통죄 고소까지 언급했다.[47] 결국 1930년 11월 이혼에 합의했고, 김우영은 4개월 만인 1931년 3월 재혼했다. 나혜석은 이혼 시 김우영에게 위자료를 청구하지 않고 재산 분할만 요구했으나, 이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최린에게는 위자료 소송을 제기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혼과 사회적 비난 속에서도 나혜석은 창작 활동과 사회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장"은 자신의 이혼 경위를 밝히며 남성 중심적인 조선 사회의 성차별과 도덕적 위선을 고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고, 전 남편과의 성적 불화를 솔직하게 드러냈으며, '시험 결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6] 1935년에는 "정조 취미론"을 통해 순결과 정조는 도덕이나 법률이 아닌 개인의 '취미' 문제라고 주장하며, 남성들의 이중적인 성 관념과 가부장제적 결혼관, 가정폭력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적인 주장은 당시 유교적 관습이 강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큰 반발을 샀고, 결국 그의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7]

1933년 전람회 출품을 위해 그린 작품 340여 점이 화재로 소실되고, 서울에 설립한 "여자미술학사"도 경영난을 겪는 등[25]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혼 후 자녀들과의 만남도 쉽지 않았다. 큰딸을 만나러 개성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리기도 했고, 1943년 봄에는 충청남도청 참여관으로 있던 전 남편 김우영을 찾아 대전 관사로 가서 아들 김진을 학교 복도에서 잠시 만났다.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은 남루한 모습의 생모를 알아보지 못했고 재회는 짧게 끝났다.[100][77] 김우영은 자녀들에게 나혜석을 만나지 말라고 당부했다.[100] 오빠 나경석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오빠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 할 정도로 가족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99]

1937년 극심한 정신 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곧 자유로운 연애관을 피력한 글을 발표하고 1938년에는 기행문 "해인사 풍광"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복사 사업을 언급하며 조선총독부만주국 황제에게 이를 헌상하기 위해 진행하는 불사 과정과 총독부 관리들의 감독 행태를 상세히 기록하여 은연중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97] 이때 그린 그림 해인사 풍경은 당시 머물렀던 홍도 여관 주인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 조선총독부는 나혜석의 계몽 활동과 여성 해방 사상을 위험하게 여겨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학무국에서는 내선일체 협력을 조건으로 진료비와 집, 화실 제공을 제안하며 회유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97] 1940년 창씨개명령과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전시 협력 및 징용 독려 강연 요청도 모두 거부했다.

만년에는 파킨슨병, 중풍, 관절염 등으로 거동이 불편해졌고, 화재로 인한 작품 소실과 자녀들과의 단절은 그의 정신적 고통을 가중시켜 신경쇠약과 우울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1944년 무렵 경성 인왕산의 한 사찰에 정착했으며,[97] 해방 후에는 청운양로원 등지를 전전하다가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한 시립 자선 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예술과 문학은 오랫동안 잊혔으나, 최근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져 2000년 서울예술의전당에서 회고전이 열리는 등 그의 선구적인 삶과 업적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4]

3. 6. 2. 요양원 생활과 최후

1943년 수덕여관을 떠난 후, 나혜석의 말년은 병고와 외로움 속에서 이어졌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내선일체에 협력하면 진료비와 거처를 제공하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97] 그러나 파킨슨병중풍 등의 병세가 깊어져 거동이 불편해졌고, 화재로 작품 대부분을 잃고 자녀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를 겪었다.

일정한 거처 없이 경성 인근의 절집을 떠돌던 나혜석은 1944년 무렵 인왕산의 한 사찰에 잠시 머물렀다. 만년에도 파킨슨병, 관절염, 중풍으로 고통받으면서 강연과 계몽 활동을 시도했으나, 그의 활동을 위험하게 본 조선총독부는 그를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1940년 창씨개명령을 거부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총독부의 각종 협력 요청도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깊어지는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으로 경성부립 남부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 인왕산의 청운양로원에서 잠시 머물다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가족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오빠 나경석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오빠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 했다. 조카 나영균(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 교수)은 어린 시절, 남루한 차림으로 찾아온 고모 나혜석을 아버지 몰래 골방에 숨겨야 했던 일을 회고했다.[99] 나혜석은 이혼 후 줄곧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1943년 봄에는 전 남편 김우영충청남도청 간부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의 관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둘째 아들 김진은 학교 복도에서 처음으로 생모 나혜석과 마주쳤다. 김진은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화장기 없이 푸석하고 주름진 얼굴에 여러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지고 구질구질한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고 회고했다.[77] 나혜석은 아들에게 "내가 네 어미다"라고 밝혔지만, 아들은 갑작스러운 만남에 충격을 받았다.[100]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우영은 아들에게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100]

화령전 옆에 있는 나혜석 표석


병세가 악화되고 주변의 외면과 조롱 속에서 그는 더욱 고립되었다. 한때 안양의 양로원에 머물다가 1944년 10월 22일, 오빠 나경석에 의해 '최고근'(崔古根)이라는 불교식 이름으로 인왕산 근처 청운양로원에 맡겨졌다. 당시 양로원 원장은 나경석의 친구였고, 올케 배숙경은 심하게 늙고 병든 나혜석을 환갑 넘은 노인이라고 속여 입소시켰다. 파킨슨병과 중풍 등으로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워지자 정신이상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양로원을 몰래 빠져나오기도 했지만, 전 남편 김우영이 경찰까지 동원하여 막는 바람에 만날 수 없었다.

1945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청운양로원에서 퇴소한 나혜석은 해관 오긍선(海觀吳兢善)이 운영하던 경기도 시흥군 안양의 경성 기독보육원 농장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전 남편의 방해와 경찰 신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서울 시내를 떠돌아다니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한 시립 자제원(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장소나 무덤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수원 화령전 옆에는 그의 삶을 기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4. 사후 평가와 재조명

나혜석은 생전에 "혼외정사는 진보된 사람의 행동[44]"이라거나 여성에게도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75]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등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이혼 후에도 사랑할 자유를 외쳤으나[44], 유학자들을 비롯한 당시 사회로부터 거센 비난과 외면을 받았다.[44]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는 1948년 한 자선 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으며[4], 이후 오랫동안 그의 삶과 업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1988년, 그가 1918년에 발표했던 소설 「경희」가 발굴되면서[25] 나혜석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예술적, 문학적 성과와 함께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으로서의 선구적인 면모가 재조명받기 시작했으며,[4] 수원에 나혜석거리가 조성되고[27] 서울예술의전당에서 회고전이 열리는[4]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4. 1. 사후의 폄하와 복권

이혼과 당시 사회 통념에 도전하는 주장들로 인해 생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한 자선 병원에서 사망한 이후[4] 한동안 그의 예술적, 문학적 업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잊혔다.

그러나 1988년, 나혜석이 1918년에 발표했던 소설 「경희」가 발굴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그에 대한 재발견과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5] 이후 그의 예술적, 문학적 업적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4] 고향인 수원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25] 2000년에는 "나혜석거리"가 조성되었다.[27] 같은 해 서울예술의전당에서는 나혜석 회고전이 열렸으며,[4] 탄생 100주년이었던 2016년에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시대의 선구자, 만나다"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가 개최되는 등[25]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기리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4. 2. 선구자적 여성으로서의 재평가

1948년 자선 병원에서 사망한 이후 오랫동안 잊혔던 나혜석은 1988년, 그녀의 초기 단편소설 「경희」가 발굴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25] 이후 그녀의 예술적, 문학적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졌다.[4]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서양화가이자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과 사회 참여를 주장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30] 특히 그녀는 결혼과 정조에 대한 기존의 가부장제적 관념에 도전하며 자유 연애와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강조했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장」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나, 오늘날에는 성 평등 문제와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을 담은 중요한 글로 인정받고 있다.[16] 그녀의 소설 「경희」(1918)는 여성의 자기 발견과 신여성으로서의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전적 작품으로, 당시 염상섭, 김동인, 김일엽, 김명순 등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통적 가부장제에 기반한 성적 금기에 도전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19]

이러한 재평가 움직임 속에서 나혜석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과 행사가 진행되었다. 2000년에는 서울예술의전당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4] 그녀의 고향인 수원에는 동상이 세워지고[25] "나혜석 거리"가 조성되었다.[27] 2016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시대의 선구자, 만나다" 특별 전시회가 개최되었고,[25] 2019년 4월 28일에는 구글 두들이 그녀의 탄생 123주년을 기념하기도 했다.[20]

4. 3. 문화적 영향과 기념 사업

1988년 소설 「경희」가 발굴된 이후[25] 나혜석의 예술적, 문학적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나혜석의 생애를 다룬 전기(傳記)로는 《나혜석 일대기 -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동화출판공사, 1974), 《나혜석 평전》(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등이 있으며, 그의 글을 모은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다》(다할미디어, 2007)도 출간되었다. 또한 나혜석의 삶을 소재로 한 연극 《불꽃의 여자, 나혜석》도 공연되었다.

2000년에는 서울예술의전당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4] 탄생 100주년인 2016년에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시대의 선구자, 만나다"라는 제목의 기념 전시회가 개최되었다.[25]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는 나혜석을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가 2000년에 조성되었고,[27][153] 거리에는 동상도 세워졌다.[25] 2008년부터는 나혜석 문화예술제가 개최되고 있다.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의 나혜석거리.


나혜석이 한때 머물렀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앞의 수덕여관은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3호로 지정되었다.[154]

2019년 4월 28일에는 구글 두들이 나혜석의 탄생 123주년을 기념하기도 했다.[20]

5. 사상과 신념

나혜석은 글과 그림을 통해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특히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제 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89] 그는 여성 편력을 즐기면서도 아내에게는 정절을 요구하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위선이자 허위 의식이라며 거침없이 지적했다.[91] 또한 외부에서는 소극적이면서 가정 내에서만 폭군처럼 구는 가부장들을 '종이 호랑이'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 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이 부당함을 알리고, 나아가 이러한 관념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조선의 지식인 남성 사회와 그들의 이중적인 정조 관념에 대해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고 반박하며 기존의 통념에 도전했다.[85] 죽은 애인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거나,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파격적인 행보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혼 후에도 "내 갈 길은 내가 찾아 얻어야 한다"는 신념으로[85]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참정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함을 거듭 주장하며 여성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했다. 또한 성실성과 진실만이 사회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었으며, 서양인권 운동이나 노동 문제 등을 한국 사회에 소개하기도 했다.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기는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에 맞서, 자유롭고 다양한 여성의 삶 역시 소중하다고 주장했다.

나혜석은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다[118]”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을 거부하고 화가이자 지식인이 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8] 그의 초기 소설 『경희』(1918)는 여성이 자아를 발견하고 신여성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다.[8] 나혜석을 비롯한 일부 신여성들은 이처럼 남성 중심의 권위도덕률에 도전하며,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의무라는 전통적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하려는 힘겨운 길을 선택했다.[117]

5. 1. 여성 해방과 남녀평등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평가받는 나혜석은 화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과 남녀평등을 주장한 선구적인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30] 일본 유학 시절부터 여성의 권리 신장에 대한 글을 발표하며 여권운동에 앞장섰다.[30]

나혜석은 일본 유학 중 서양자유주의개인주의 사상을 접하고, 일본 여성 운동가들의 활동을 보며 '신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키웠다.[141] 그는 평塚라이트(平塚らいてう),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 등 일본의 신여성 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18세 때 쓴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에서는 전통적인 현모양처론이 여성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근대적인 여성 권리 의식을 드러냈다.[41][87] 그의 초기 단편소설 《경희》는 신여성이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주변 인물들을 설득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여성의 자기 발견과 주체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8]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55]라는 신념 아래, 여성 역시 남성과 동등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역설했다.[119] 그는 글과 강연, 작품 활동을 통해 여성에게만 정조순결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히 1935년 발표한 정조 취미론에서는 정조란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아내나 딸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면서 다른 여성에게는 성욕을 느끼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위선을 지적하며 자유 연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91]

프랑스로 출국하기 직전 (1926년)


1927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떠난 유럽 여행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파리에서 여성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존재이며 행복한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술회했고,[52]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을 접하고 귀국 후 여행기 '구미유기'를 통해 이를 소개했다. 그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 결혼 등 다양한 여성 문제를 사회에 알리고 해결을 촉구하는 등[52] 사회 운동에 힘썼다.

결혼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당사자의 의사가 무시된 채 집안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혼을 비판했으며, 결혼이 여성에게 억압의 족쇄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47] 또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기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를 통해 비극을 예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47] 가정 폭력을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서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여성들에게 이혼을 권하기도 했다.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 1931년 이혼한 후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글에서 그는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자신의 결혼 생활과 이혼 과정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남성 중심적인 도덕률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89][117] 비록 이 글로 인해 더 큰 사회적 비난과 고립에 직면했지만, 나혜석은 이를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조선 여성 전체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85] 이혼 후에도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냉대 속에서 여성 해방을 위한 주장을 멈추지 않았으며,[91] 자신의 삶 자체가 조선 여성의 진일보를 위한 걸음이 되리라 확신했다.[122]

나혜석은 작품 활동을 통해서도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고 연대의식을 표현했다. 연작 판화 <섣달대목, 초하룻날>과 신문 삽화 등에서는 명절을 비롯한 여성들의 고된 가사 노동과 일상을 묘사하며 여성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43] 이러한 문제 제기는 훗날 '명절 증후군'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는 통찰을 보여준다.[120]

그는 또한 개인의 존엄성과 자아실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다"[118]고 말했으며, 실연 등으로 좌절한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것을 촉구했다.[130] 이러한 나혜석의 사상과 활동은 김일엽, 김명순 등 다른 신여성들과 함께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나, 조선총독부와 보수적인 지식인층에게는 외면당했다. 나혜석의 자유 연애론은 종종 방종으로 오해받기도 했으며,[41] 시대를 앞서간 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다만, 남녀평등을 강력히 주장했던 나혜석도 가정 내 부부 관계에서의 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는 이상적인 가정을 언급하며 오히려 남편이 아내보다 우월감을 갖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낫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는 한계를 지적받기도 한다.[140]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일제강점기라는 억압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여성 해방과 남녀평등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던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삶과 사상은 후대에 재조명되면서 한국 여성 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4]

5. 2. 자유 연애와 신(新)정조론

프랑스 체류 중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4][9] 1930년 남편 김우영에게 간통을 이유로 이혼당했다.[4][9] 이 과정에서 재산 분할 없이 자녀의 친권도 박탈당했으며, 이후 최린과도 관계가 정리되었다. 최린이 "이혼 후 생활 전반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나혜석은 그를 상대로 ‘정조 유린죄’ 명목의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67]

이혼 후 나혜석은 더욱 적극적으로 기존의 사회 관습과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77] 이 글에서 그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개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본능적 사랑'이었다고 술회하며,[77] 여성에게만 일방적인 희생과 순결을 강요하는 도덕 및 인습을 강렬하게 비판했다.[67] 또한 당시 금기시되던 여성의 성욕을 공론화하고, 자신들은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서 여성에게만 이를 요구하는 남성들의 이중성을 통렬히 비판했다.[76] 그는 전 남편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했다고 주장했고, 결혼 전 동거를 통해 서로를 알아보는 '시험 결혼'을 제안하기도 했다.[16] 그러나 이 글은 전통적인 유교 문화 속에서 여성의 성 담론을 금기시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나혜석의 사회적 평판을 떨어뜨리고 활동에 제약을 가져왔다.[17]

1935년에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47]라는 도발적인 선언을 담은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며[136]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순결과 정조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며, 배고플 때 밥을 먹듯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역설했다.[47][75] 이는 순결을 미화하던 유교 사상가들과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여성 스스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75] 그는 남성들이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면서 다른 여성의 정조는 가볍게 여기는 위선적인 행태를 '이중 잣대'이자 '허위 의식'이라며 거침없이 비판했다.[91][80]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 합니다."[80]라며 남성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여성과의 관계를 '따먹는다'고 표현하는 당시의 유행어까지 비판했다.

나혜석은 자유 연애를 옹호하며, 연애 감정 없는 의무적인 결혼은 상대방을 속이는 기만이라고 비판했다.[137] 엘렌 케이의 사상을 받아들여 '연애가 있는 결혼은 덕이요, 연애가 없는 결혼은 부덕'이라 주장하며, 자유로운 연애가 개인 해방의 길임을 강조했다.[41] 그는 결혼만이 인생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며, 독신 생활이나 시험 결혼, 심지어 남자 매춘부와 같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결혼 제도의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138] 또한 성적 욕망 해소를 위해 결혼하더라도, 배우자 외 다른 이성과 교류하는 것이 권태를 피하는 길일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129]

그는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55]라는 신념 아래 여성 해방과 참정권 획득, 성 평등을 끊임없이 외쳤다.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강요하는 사회 통념에 맞서 여성 개개인의 다양한 삶과 욕망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75]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다"[118]며 개인의 주체성과 자기애를 강조했다. 여성에게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성욕이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질 것을 촉구했다.[75]

하지만 그의 시대를 앞서간 주장들은 당시 조선총독부와 보수적인 지식인, 유학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으며,[119] 사회적으로는 '방종', '애욕의 순례자'라는 비난과 오해에 시달려야 했다.[41][136] 김명순, 김일엽 등 다른 신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진보적인 사상은 종종 스캔들로만 천박하게 소비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41]

5. 3. 모성애 비판

나혜석은 모성애가 여성에게 본능적으로 내재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강요한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는 에미의 살점을 떼어먹는 악마[127]'라고 표현하며, 모성애라는 이름 아래 어머니가 감내해야 하는 수많은 희생이 본능이 아닌 사회적 강요의 결과물임을 지적했다. 즉, 모성애는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되는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42]

나혜석은 당시 사회가 이상적으로 여기던 현모양처상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42]'라고 주장하며, 모성애가 천성이라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대신 그는 모성이란 인간으로서 자식과 관계를 맺으며 쌓아가는 경험적 인간관계라고 보았다. 또한, 동물이 자기 새끼를 버리거나 새끼를 해친 수컷과 관계를 맺는 예를 들며 모성애가 반드시 본능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모성애가 의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혼 1년 만에 첫 아이를 낳은 그는 예상치 못한 빠른 임신과 고통스러운 출산, 육아 과정에서의 복잡한 심경을 1923년 『동명』지에 발표한 '모(母) 된 감상기'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냈다.[134] 이 글에서 그는 모성애가 본능이 아니며, 다른 신식 엄마들과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취지를 밝혔다.[134] 그는 입덧 중에도 임신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심정, 태어날 아이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촉망받던 예술가로서의 삶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헝클어진 것에 대한 원통함을 고백했다.[134] 이를 통해 여성이라고 해서 임신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며, 자신에게 임신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음을 토로했다.[134]

'모된 감상기'가 발표되자 일부 지식인 남성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백결생이라는 필명의 논객은 모성애의 숭고함을 강조하며 임신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자 의무라고 주장하며 나혜석의 태도를 비난했다.[134] 이에 나혜석은 자신의 글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의 솔직한 감정이며, 일부 여성들에게는 분명 공감을 얻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며 사회가 여성에게 이를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134]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보수적인 유학자들을 비롯한 사회 일각의 강한 반감을 샀지만, 나혜석은 모든 어머니나 여성이 모성애를 가지거나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가 이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을 이어갔다.

5. 4. 가부장제 비판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신여성 중 한 명인 나혜석은 화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하며 당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와 성차별적 관습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했다. 그는 글과 그림, 강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주장하며 여성 해방과 여권 신장을 외쳤다.[89][119]

나혜석은 특히 여성에게만 정조순결을 강요하는 사회적 통념에 강하게 반발했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 이러한 그의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 글에서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모순을 질타하며, 자신의 이혼 경험이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조선 여성 전체가 처한 현실임을 지적했다.[85][89] 그는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라고 비판하며,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타인의 정조 관념 부재를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못하는 조선 남성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했다.[47][128] 나아가 1935년에는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여, 순결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옹호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면서 다른 여성에게는 성욕을 품는 남성들의 위선을 거침없이 비판하며 자유 연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가부장제 비판은 결혼 제도와 가정 내 불평등 문제로도 이어졌다. 그는 당사자의 의사가 무시된 채 집안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혼과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을 비판했다. 또한 남편과 부인, 모든 가족 구성원이 평등한 권리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부장이나 시어머니, 남편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가족 문화를 비판했다. 그는 시 '노라'를 통해 아버지와 남편의 '인형'으로 살아온 여성의 삶을 고발하고, 스스로 '사람'임을 선언하며 여성들의 각성과 연대를 촉구했다.[132]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역시 나혜석의 가부장제 비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인 1914년,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기고한 글 '이상적 부인'에서부터 현모양처론을 비판했다. 그는 '양부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은 없으면서 여성에게만 현모양처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附屬物)된 교육주의'라고 지적하며, 이는 여성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8][87][135] 그는 모든 여성이 현모양처가 되어야 할 의무는 없으며, 여성 개개인의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현모양처가 이상적인 여성상이라면, 남성 역시 아내를 위해 내조하는 '현부양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 '경희'(1918)는 신여성현모양처의 굴레를 벗어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으며[102], '모가 되어 생각하는 바'(1923)에서는 남편이 자녀 양육을 아내에게만 떠맡기는 현실을 비판했다.[10]

나혜석은 여성의 인간적인 권리 확보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참정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여성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했다. 유럽 여행 후 발표한 '구미유기'에서는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을 소개하며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당위성을 알렸다.[52] 또한 노동권, 산아제한, 시험결혼(동거혼) 등 다양한 여성 문제를 제기하고, 명절에 여성에게만 과도한 가사 노동이 집중되는 현실을 '섣달대목'이라는 신문 삽화를 통해 고발하기도 했다.[120]

이러한 나혜석의 급진적인 주장과 행보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이혼 고백장' 발표 이후 그는 극심한 사회적 비난과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85][91] 조선총독부와 일제, 보수적인 지식인과 유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외면하거나 비난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내 갈 길은 내가 찾아 얻어야 한다"는 신념으로[85] 기존의 관습과 통념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남성 중심의 권위와 도덕률에 맞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하려는 고난의 길을 걸었던 선구적인 인물이었다.[117]

5. 5.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며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글과 그림을 통해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했다.[89] 그는 여성 편력을 즐기면서도 정절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이중적인 모습, 즉 여러 여자를 가까이하면서 여성에게만 정절과 순결을 요구하고, 자신은 다른 이의 아내나 딸에게 욕정을 품으면서 자신의 가족 여성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는 모순을 지적하며, 이는 남성들의 이중 잣대이자 위선, 허위 의식이라고 거침없이 비판하였다.[91] 또한 집 밖에서는 아무 말 못 하면서 집안에서만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군처럼 구는 아버지들과 가부장들을 종이 호랑이에 비유하며 그들의 비굴함을 조롱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 관념을 강요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며, 나아가 이러한 관념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조선의 지식인 남성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며, 그들의 이중적인 정조 관념에 대해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고 반박하기도 했다.[85] 죽은 애인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거나, '정조 취미론'을 펼치고,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행동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참정권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임을 거듭 주장하고 여성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했다. 유럽 여행 후 발표한 기행문 ‘구미유기’에서는 영국의 참정권 운동을 소개하며,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52] 당시 정치인이나 정부를 과거 양반의 연장선으로 보며 상전처럼 여기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의 주장은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참정권 운동 외에도 서양의 인권 운동, 노동 문제(임금 인상, 해고되지 않을 권리, 정당한 노동의 대가 등) 등을 한국 사회에 소개했으며[52], 결혼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동거혼과 시험 결혼 등에 대해서도 언론 기고와 강연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렸다.[52][16] 또한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기는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에 맞서 자유롭고 다양한 여성으로서의 삶 역시 소중하다고 주장했다.

나혜석은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다[118][139]”고 주장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기주의나 병적인 상태로 치부되는 것을 비판하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여성의 자유와 평등도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130] 그는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합리적인 사고를 강조하며 생활 개량에 관한 글도 다수 발표했다.[52] 양복이나 양장이 활동하기 편하다는 점을 알리며 복식의 실용성을 강조하기도 했다.[121]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동아일보를 통해 김일엽의 여성 의복 개량론에 대해 미술가적 관점에서 조선 옷의 특색을 살리자는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며 논쟁을 벌였는데[52], 이는 무조건적인 서구화보다는 합리적인 개선을 추구했던 그의 생각을 보여준다.

나혜석을 비롯한 일부 신여성들은 이처럼 남성 중심의 권위도덕률에 도전하며[117],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의무라는 전통적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하려는 힘겨운 길을 선택했다.[117] 그의 주요 저서인 『경희』(1918)는 여성이 자아를 발견하고 "신여성"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8]

6. 작품 세계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로서 미술과 문학 두 영역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당대 신여성으로서의 자의식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도전을 깊이 반영하고 있다.[8]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그는 1921년 한국 여성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열었으며,[14]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며 화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25][18] 초기에는 인상주의 화풍을 보였으나, 유럽 여행 이후에는 야수파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더욱 대담하고 강렬한 색채의 작품을 선보였다.[30][91][52]

문학 분야에서도 그는 선구적인 활동을 펼쳤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잡지 『학지광』 등에 글을 기고하며 전통적인 여성상인 현모양처를 비판하고 예술가로서의 포부를 밝혔다.[10] 그의 대표적인 초기 소설 「경희」(1918)는 신여성의 자기 발견 과정을 그렸으며,[41] 이후 김일엽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폐허』에 참여하고[13] 『신여자』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등 활발한 문필 활동을 이어갔다.[9] 특히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서」는[4][9]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며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16]

나혜석의 작품 세계는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 일제강점기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여성 해방과 자아실현을 추구했던 한 지식인 여성의 치열한 삶과 사상을 담고 있다. 3·1 운동 참여[12] 등 사회 활동 역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비록 시대를 앞서간 그의 생각과 행동은 당시 사회의 몰이해와 비난 속에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17] 오늘날 그의 예술과 문학은 한국 근대 여성사와 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재평가받고 있다.[4]

6. 1. 미술 작품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30] 그는 화가이자 작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 활동했으며, 그림 외에도 동양화, 조각, 판화, 문필, 시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 주제는 인물화, 정물화, 초상화, 누드화, 삽화, 풍경화, 자화상 등 매우 폭넓었다.[91][50]

그의 작품 활동은 크게 파리 체류(1927-1929)를 기점으로 나눌 수 있다. 파리에 가기 이전 초기 작품들은 주로 사실적인 기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보였다.[91][30] 미술사학자 김성림은 나혜석 스스로 초기 화풍이 "일본 교수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으며, 이는 형태, 색채, 조명을 중시하는 후기 인상파 및 사실주의 양식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18]

1927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야수파표현파 등 당시 유럽의 새로운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받았다.[30] 이 시기 이후 그의 작품은 한결 참신하고 대담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하고 단순화하며, 거침없는 필치와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색채를 사용하여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였다.[91][52]

나혜석은 1921년 귀국 후 조선에 유화를 소개하고, 국내 풍경을 담은 유화와 판화를 발표하며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특히 1920년대와 1930년대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던 누드화를 과감하게 그려 발표하며 인습에 도전했고, 1921년 잡지 '개벽'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한국 근대 판화의 효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미술을 대중에게 알리는 활동에도 힘썼다. 그는 그림과 글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선구적인 예술가였다.[67]

6. 1. 1. 주요 작품

나혜석의 작품 '스페인 해수욕장'


나혜석은 서양화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동양화, 조각, 판화('이른 아침' 등), 목각, 석각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었다. 그의 작품 주제는 인물화, 정물화, 초상화, 누드화, 삽화, 풍경화, 자화상 등 매우 폭넓었다.[91][50]
작품 경향나혜석의 화풍은 시기에 따라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초기 작품('만주 봉천 풍경' 등)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91] 파리 체류 시기(1927-1929)를 거치며 그린 '스페인 국경', '파리 풍경', '별장', '농촌 풍경' 등은 인상파적 경향을 유지하면서도[50], 점차 거침없는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를 사용하는 야수파표현파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91][30][52] 이 시기 그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하고 단순화하며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는 등 새로운 조형 언어를 모색했다.[52] 그의 풍경화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신선한 구도 등을 특징으로 한다.[52] 미술사학자 김성림에 따르면, 나혜석 스스로 "일본 교수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으며, 이는 형태, 색채, 조명을 중시하는 후기 인상파 및 사실주의 양식으로 나타났다.[18] 이후 개성을 추구하며 점차 덜 선명한 색채로 변화하기도 했고[18], 대담하고 즉흥적인 붓놀림과 질감 실험 또한 그의 특징으로 분석된다.[18]

그러나 최린과의 관계 및 이혼 등으로 사회적 비난에 직면한 1930년대 이후, 그의 화풍은 다시 변화하여 '환룡정 앞 모란'(1933), '홍류폭포'(1937) 등에서는 다소 느슨한 구조와 거칠고 성급한 붓놀림이 나타난다.[18]
주요 작품 및 평가나혜석은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며 예술적 재능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2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은 인상파적 기조 위에 대담한 터치와 생략을 통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52] 특히 1920~30년대 사회적 금기였던 누드화를 과감하게 제작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무희', '스페인 해수욕장', '중국인 촌'을 비롯하여 '나부', '등을 돌린 나부', '해인사 홍류동', '선죽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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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의 자화상 (약 1928년)
    자화상 (약 1928년):''' 1930년대 초반에 제작된 유화로, 서구적이고 지적인 신여성의 모습을 담은 수작으로 평가된다.[50] 전통 한복 대신 현대적 복장과 헤어스타일, 서구식 화장을 한 모습은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어두운 배경과 다소 지치고 고뇌하는 듯한 표정은 당시 보수적 사회에서 신여성이 겪었던 어려움을 암시하지만, 정면을 응시하는 단호한 시선은 자신의 이상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이 작품의 구도, 표현, 색채가 당대 최고 수준의 창조성을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했다.[112] 2022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한국 현대미술 전시회 "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에 포함되었고, BTS의 RM이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소개하여 현대에도 그의 예술이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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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의 무희들 (약 1927-1928년)
    무희들 (약 1927-1928년):''' 파리 체류 시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털코트를 입은 두 명의 서구 여성을 그렸다. 서구적인 외모 묘사와 세련된 분위기는 당시 나혜석이 접했던 현대성을 반영한다. '자화상'과 유사한 어두운 색조는 작가의 심리 상태나 시대적 분위기와 연결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 ''' 스페인 해수욕장, 스페인 항구:''' 유럽 여행 중 스페인에서 그린 작품들로 추정된다. '파리 풍경'과 달리 녹색, 주황색, 파란색 등 밝고 다채로운 색상과 유려한 필선으로 풍경의 세부 묘사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나혜석이 파리에서의 경험(최린과의 관계 등)과 다른 유럽 지역에서의 경험을 다르게 인식하고 표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해인사의 풍경:''' 두터운 붓질을 중첩하여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리는 독특한 임파스토 기법이 돋보인다. 화면 전면의 탑 뒤로 대웅전 일부가 보이는 구도이다.[113] 예술의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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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의 화령전 작약 (1935)
    화령전 작약 (1935):''' '이혼고백장' 발표(1934) 후 그린 작품이다. 두터운 물감의 질감이 느껴지는 붓놀림과 생생한 색채(주황, 녹색, 노랑, 흰색)로 바람에 흔들리는 작약을 포착했다. 이는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과 생동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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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의 파리 풍경화
    파리 풍경 (1927-1928년):''' 파리 체류 중 그린 프랑스 마을 풍경화이다. 대담한 붓놀림으로 대상을 단순화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했으며, 야수파표현주의의 영향이 감지된다. 'HR' 서명이 확인되어 진품으로 인정받았다. 다른 유럽 풍경화와는 대조적으로 갈색, 회색 등 차분하고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여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개척자 (1921년):''' 잡지 '개벽' 13호에 발표한 목판화로, 한국 근대 판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002년에 공개된, 노동하는 여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또 다른 목판화는 그의 페미니즘 사상과 연결되기도 한다.[50]


일부에서는 나혜석의 그림이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와 일본 화풍의 영향을 받은 다른 화가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50] 그러나 이는 서구 미술 도입 초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공통된 경향으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50] 또한, 그의 명성이 극적인 삶과 맞물려 다소 신비화되거나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91]
수상 내역나혜석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 및 특선을 수상했으며,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도 입선하는 등 미술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25][18]

연도전시회수상 내역작품명 (알려진 경우)
1922년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입선봉황성의 남문[18]
1923년제2회 조선미술전람회3등낭랑묘[18]
1924년제3회 조선미술전람회4등가을의 정원[18]
1925년제4회 조선미술전람회3등[18]
1926년제5회 조선미술전람회특선[18]천후궁
1927년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입선
1931년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특선[18]정원 (파리 클뤼니 미술관)[25]
1931년제국미술원전람회 (제전)입선[25]정원[25]


작품 목록 및 유실나혜석은 생전에 800점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나, 대부분 한국 전쟁 중에 소실되었고, 이혼 후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전체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카 나영균은 해방 직후 서울 신교동 자택에 나혜석의 원고가 50cm 높이로 쌓여 있었고 그림도 여러 점 보관되어 있었으나, 6.25 전쟁 피난에서 돌아온 후 모두 사라졌다고 증언했다.[99]

아래는 현재까지 알려진 주요 작품 목록의 일부이다.


  • 자화상 (유화, 약 1928년)
  • 무희 (유화, 약 1927-1928년)
  • 스페인 해수욕장 (유화)
  • 스페인 항구 (유화)
  • 파리 풍경 (유화, 1927-1928년)
  • 화령전 작약 (유화, 1935년)
  • 해인사 홍류동 (유화)
  • 나부 1, 2 (유화)
  • 선죽교 (유화)
  • 스페인 국경 (유화)
  • 이화원 풍경 (유화)
  • 중국인 촌 (유화)
  • 수원 서호 (유화)
  • 수원성 (유화)
  • 염노장, 여승 초상화
  • 인천풍경
  • 개척자 (목판화, 1921년)
  • 조조 (목판화)
  • 농촌 풍경 (유화)
  • 별장 (유화)
  • 만주 봉천 풍경 (유화)
  • 등을 돌린 나부 (유화)
  • 천후궁 (유화)
  • 정원 (유화, 파리 클뤼니 미술관)
  • 봉황성 남문 (유화, 1923년)
  • 낭랑묘 (유화)
  • 가을의 정원 (유화)
  • 환룡정 앞 모란 (유화, 1933년)
  • 홍류폭포 (유화, 1937년)


6. 2. 문학 작품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중 한 명일 뿐만 아니라, 문필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신여성 담론을 이끌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여권 신장의 글을 발표하며 여성 해방과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선구자적 면모를 보였다.[30] 18세 때인 1914년에는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부인」을 발표하여 근대적 여성 권리론을 제시했으며,[30] 유영준, 김마리아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여자계(女子界)』를 발행하기도 했다.[26] 이 잡지에 '정월(晶月)'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단편 소설 「경희」(1918)는 신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41] 그의 문학적 재능과 뚜렷한 여성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115]

귀국 후 1920년에는 김일엽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폐허』 창간에 참여했으며,[13] 그림뿐 아니라 소설과 시를 통해 새로운 시대 감각과 여성 의식을 꾸준히 표현했다.[115] 그의 소설은 고백체 형식을 통해 가부장제의 억압과 성적 금기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116] 특히 1934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서」는[4][9]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성 중심 사회의 위선과 성 불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16] 또한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적 여성관인 삼종지도를 비판하는 등, 그의 문학 작품들은 당대 여성의 현실과 저항 의식을 담은 선구적인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6. 2. 1. 주요 작품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115]

=== 문학 작품 ===

나혜석의 문학 작품은 당대 여성의 현실과 자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18년에 쓴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로,[41]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1910년대 가장 뛰어난 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41][115]

그의 소설은 고백체 소설의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1920년-1930년염상섭, 김동인, 김일엽, 김명순 등 여러 작가가 시도했던 사조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했다.[116] 그러나 외도를 고백했던 나혜석, 배신당한 경험을 고백한 김일엽, 성폭력 피해를 고백한 김명순 등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아픔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탕녀'로 낙인찍히며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반면, 유사한 고백체 소설을 쓴 염상섭이나 김동인 등 남성 작가들은 근대 고백소설의 모범으로 기록되는 불평등한 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116]

나혜석은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 유교삼종지도를 비판하며,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순종적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비판했다. 또한 1937년 10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는 구식 어머니와 신식 교육을 받은 딸 사이의 갈등을 묘사했다.

주요 문학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나혜석전집(羅蕙錫全集)
  • 나혜석 작품집
  • 나혜석 자서전(유고)
  • 첫사랑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다
  • 이혼 고백서
  • 자유 연애
  • 해인사 풍광(기행문)
  • 소설, 규원 (閨怨)
  • 소설, 현숙 (玄淑)
  • 소설, 경희 (1918)
  • 소설, 정순
  • 희생한 손녀에게 (원제: 살아난 손녀딸)
  • 원한 (怨恨)
  • 어머니와 딸 (1937)
  • 시 냇물
  • 시 사 (砂)
  • 노라를 놓아주게
  • 이상적부인 (1914)


=== 미술 작품 ===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중 한 명으로, 1921년 3월 18일 서울에서 한국 여성 화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14]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6년 연속 입선했고,[25] 1926년에는 「천후궁」이 특선으로 선정되었다.[25] 1931년에는 파리의 클뤼니 미술관을 그린 「정원」이 선전에서 특선으로 선정되었고,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도 입선했다.[25]

그녀의 작품은 인물, 풍경, 정물 등 다양하며, 특히 유럽 여행 이후 인상주의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화풍을 보여준다.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자화상 (1928년경)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전통 한복 대신 서양식 의상을 입고 서구적인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모습에서 당시 신여성으로서의 고뇌와 당당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어두운 색조와 강렬한 표정은 보수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의 내면적 갈등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2000년 서울예술의전당 회고전[4] 및 20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 전시회에 소개되었으며, 방탄소년단RM이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무희들 (약 1927-1928년)은 서구 여성을 그린 작품으로, 자화상과 유사한 화풍과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여 현대성과 세련됨을 표현하면서도 작가의 내면 상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화령전 작약 (1935년)은 이혼 고백서 발표 후 사회적으로 고립된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두껍고 생생한 붓터치와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작약의 순간을 포착했으며, 이는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에는 1928년 파리 체류 중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파리 풍경화가 공개되었다. 가로 60cm, 세로 50cm 크기의 이 작품은 프랑스 마을 풍경을 대담한 붓놀림으로 묘사했으며, 포비즘과 표현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작품 하단에는 나혜석이 사용했던 'HR' 서명이 확인되었다.

유럽 체류 중 그린 다른 작품으로는 스페인 항구스페인 해변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파리 풍경화와는 달리 다채로운 색상을 사용하여 밝은 분위기를 나타낸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또 다른 파리 풍경 (1927-1928)은 갈색과 회색 계열의 차분한 색조를 사용하여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당시 파리에서 겪었던 개인적인 사건(최린과의 관계)과 관련된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주요 미술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자화상 (Self-Portrait), 1928년경
  • 화령전 작약 (Peonies at Hwaryeongjeon), 1935년
  • 파리 풍경 (Paris Landscape)
  • 무희들 (Dancers), 1927년–1928년경
  • 스페인 항구 (Harbor in Spain)
  • 스페인 해변 (Beach in Spain)
  • 파리 풍경 (Scene of Paris), 1927년–1928년
  • 정원 (Garden, 클뤼니 미술관 풍경), 1931년 (선전 특선)
  • 천후궁 (Cheonhugung), 1926년 (선전 특선)

7. 논란

나혜석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삶과 시대를 앞서간 주장으로 인해 당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146] 그녀의 삶과 예술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다양한 시각으로 나뉜다.

일각에서는 비슷한 시기 거리에서 객사한 남성 화가 이중섭은 비운의 천재 예술가로 추앙받는 반면, 나혜석은 사생활 문제와 사회적 논란 속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여성으로만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147] 이는 여성 예술가에게 유독 가혹했던 당시 사회의 이중적인 잣대와 편견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신여성은 소수에 불과했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쉬웠다. 이 때문에 나혜석을 비롯한 많은 신여성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그들의 선구적인 주장은 종종 조롱 속에 묻히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148] 나혜석이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고 이를 공표했지만, 가부장제 사회가 설정한 여성의 역할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배척당했다는 평가도 있다.[149]

그녀의 여성 해방 운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특수한 사회경제적 상황과 서구 여성 운동의 배경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150] 즉, 그녀의 주장이 실패한 원인을 단순히 '급진성'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안이한 분석이라는 지적이다.

나혜석의 삶은 종종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시대를 앞서간 재능과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사회적 편견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여성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과 유사한 운명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151] 또한, 전통적인 결혼관과 여성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도 비견된다.[86] 조르주 상드는 여성을 억압하고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했으며,[152] 이혼 소송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되찾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나혜석과 공통점을 보인다.[86]

7. 1. 최린과의 불륜과 사회적 비난

1927년, 외교관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미국 등 구미(歐美) 여행길에 올랐다.[29] 이 여행은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삶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최린과 만나 관계를 맺었다.[10] 이 사실은 소문으로 퍼져 1929년 3월 귀국 후[25] 남편 김우영에게 알려졌고, 결국 1930년 김우영은 나혜석의 간통을 이유로 이혼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재산 분할 없이 친권마저 박탈당한 채 이혼하게 되었다.[4][9]

이혼 후 사회적 비난 속에서도 나혜석은 그림 활동을 이어갔으며,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파리의 클뤼니 미술관을 그린 작품 「정원」으로 특선을 수상했다.[25] 그러나 사회의 냉대는 계속되었다.

1934년,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에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며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정면으로 맞섰다.[16] 이 글에서 그는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순결을 강요하는 당시 사회의 가부장제적이고 위선적인 도덕 관념을 강하게 비판했다.[47] 그는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 합니다.[80]"라며 남성들의 이중 잣대를 지적하고, 자신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면서 다른 여성의 정조는 가볍게 여기는 남성들의 행태를 비난했다.[91] 또한, 결혼 전 남녀가 함께 살아보는 '시험 결혼'을 제안하고, 전 남편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불만 등을 솔직하게 드러내며[16]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자유 연애를 주장했다. 나아가 남편 김우영에게도 다른 여인이 있었음을 암시하며, 남성의 외도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여성의 외도만 비난하는 사회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남성이 첩을 두거나 유흥을 즐기는 것이 용인된다면 자신의 행동 또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성리학도덕주의와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격렬한 비난과 맹공의 대상이 되었다.[137]

한편, 나혜석은 "이혼 후 생활 전반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불륜 상대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죄'라며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67]

「이혼 고백장」 발표 이후 나혜석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더욱 거세졌고, 이는 그의 예술 활동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작품 활동은 위축되었고, 사생활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18] 결국 그는 화가로서의 경력을 사실상 마감하게 되었고, 이후 불우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17]

7. 2. 문화인물 선정 논란

1999년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나혜석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반대가 있었다. 정부인 안동 장씨는 1999년 11월의 문화인물로, 나혜석은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정해지면서, 두 여성 인물의 선정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106]

문화관광부는 장씨 부인이 ‘자녀교육에 귀감을 보임으로써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에,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기 때문에 선정됐다고 설명했다. 당초 여성계에서는 장씨 부인의 인고의 삶이 현대 여성의 귀감이 될 수 없다며 반발했다. 반면 나혜석의 선정 과정에서는 일부 자문위원들이 나혜석이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이유로 문화인물 선정에 반대하며 반발을 샀다.[106]

나혜석이 문화인물로 부적합하다는 일부 자문위원들의 보수적인 주장에 대해 여성운동가들과 여성단체들은 집단으로 반발하며 항의했다. 이는 장씨 부인이 가부장제 사회에 순응했다는 점, 나혜석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각각 논란이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106] 여러 차례의 논란 끝에 2000년 1월, 나혜석은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최종 선정되었다.

8. 가족 관계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시흥군 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이고, 어머니는 최시의(崔是議)이다.


손녀: 나문희 (본명: 나경자(羅敬子), 1941년 11월 30일 - ), 배우. 나혜석은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이다.[31]
이종손: 안우성(1966년 - ) - 건축가[142]

  • ** 조카: 나상균(1934년 - )
  • ** 조카딸: 나정균
  • * '''여동생''': 나지석(羅芝錫)
  • '''서모''': 이름 미상
  • * '''이복 언니''': 나계석(羅稽錫)
  • * '''이복 형부''': 최기환
  • '''서모''': 백홍산(白弘山, 1896년 ~ ?)[143]

  • '''백부''': 나기원(羅基元)
  • '''백모''': 철원 송씨(1848년 - 1929년)
  • * '''사촌 오빠''': 나중석(羅重錫, 1878년 - 1970년)
  • * '''사촌 올케''': 충주 지씨
  • ** '''5촌 조카''': 나세균(羅世均)
  • ** '''5촌 조카''': 나재균 (다른 이름은 정균)
  • '''백부''': 나기형(羅基亨) - 오빠 나홍석의 양부

9. 대중문화

나혜석의 삶과 사상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나혜석을 소재로 한 대중문화 작품
연도작품명매체배우/제작자비고
1977년《화조》연극전양자
1978년《화조》영화윤정희
1986년《선구자, 영원히 날고 싶은 새》드라마황정아KBS1
2000년《불꽃의 여자 나혜석》연극박호영
2003년《곽은숙, 나혜석 괴담》곽은숙
2005년《뮤지컬 나혜석》뮤지컬정명옥
2012년《인형의 가》연극우현주
정보 없음《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영화정보 없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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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뉴스 [화제의 책]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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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뉴스 [야!한국사회] 연예가 결별 괴담, 남 일이다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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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뉴스 [화제의 책]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0-02-25
[123] 뉴스 사슬에 묶인 성(性) http://legacy.www.ha[...] 한겨레 2002-02-03
[124] 뉴스 100년 전 기억된 ‘타자’의 세계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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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뉴스 '불꽃의 여자 나혜석' 산울림 장기공연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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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뉴스 [ 시(詩)가 있는 아침 ] - 노라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2-02-01
[133] 뉴스 "봉건의 벽에 저항했던 나혜석의 외침은 아직도…"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0-11-20
[134] 뉴스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다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11-10-13
[135] 뉴스 나혜석은 어떻게 금기를 깼나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10-10
[136] 뉴스 [근대의 풍경 20선] <15>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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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뉴스 우리가 죄졌나? 여성들 야만적 결혼관 흔들다 http://news20.busan.[...] 부산일보 2012-06-02
[139] 뉴스 [야!한국사회] 연예가 결별 괴담, 남 일이다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10-29
[140] 뉴스 1920년대 이 어린 신부에게 결혼이란… http://www.munhwa.co[...] 동아일보 2012-06-01
[141] 간행물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994
[142] 뉴스 '국전 스타' 안상철 미술관 개관 http://art.chosun.co[...] 조선일보 2008-10-14
[143] 백과사전 나기정의 호적 KBS 한국사전
[144] 뉴스 CTN '불꽃여인' 나혜석의 삶과 예술 조명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2-02-25
[145] 뉴스 20. 신여성-욕망이냐 현모양처냐(박노자 교수)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3-06-26
[146] 뉴스 '가지 않은 길' 걸어온 여성들의 삶…서울여성사 전시회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2-01-29
[147] 뉴스 성형중독·난자 매매… 여성학에 묻다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7-11-30
[148] 뉴스 근대 노동사, 신여성 다룬 책 동시에 펴낸 김경일 교수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4-07-28
[149] 잡지 말하는 여자의 천역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1-05-03
[150] 뉴스 최정무 美캘리포니아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1-11-15
[151] 웹페이지 여성과 광기 http://legacy.www.ha[...]
[152] 간행물 그녀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했다 한길사 2011
[153] 웹페이지 아름다운길 나혜석거리 - 야후!거기 http://kr.gugi.yahoo[...]
[154] 뉴스 수덕여관이 썩어간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1-08-11
[155] 뉴스 그림과 글이 만나니 책향기가 그윽… http://art.chosun.co[...] 조선일보 200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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