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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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중양은 1872년 또는 1874년 출생하여 1959년 사망한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관료이다. 그는 일본 유학 후 러일 전쟁 통역관으로 참전하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관료로 활동하며 대구읍성을 해체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도지사,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하며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무죄를 주장했고, 이후에도 친일 행위에 대한 반성 없이 정부를 비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4년에는 재산이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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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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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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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박중양 |
한자 이름 | 朴重陽 |
일본어 가나 표기 | ぼく・じゅうよう |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 パク・チュンヤン |
로마자 표기 | Park Jung-yang |
별명 | 자 원근(源根), 호 해악(海岳), 일소(一笑), 거옥(車玉), 박원근(朴源根), 박작대기, 朴忠重陽 |
본관 | 밀양박씨 |
출생일 | 1872년 5월 3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양주군 |
사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정실: 김옥경, 첩실: 일본여자 야마다상 |
자녀 | 아들: 박문웅, 아들: 박무웅, 아들: 박정웅, 딸: 박금희, 박정자 |
관직 및 경력 | |
작위 | 조선귀족 백작 |
국가 | 일제강점기 |
군주 | 요시히토, 히로히토 |
주요 경력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총독부 충청북도 도지사 |
학력 | |
학력 정보 | 일본 도쿄 중학교 수료 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 졸업 일본 도쿄 부기학교 전문학사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박정호, 어머니: 전주 이씨 |
형제 | 형: 박원양, 동생: 박계양, 박수양, 박종양 |
기타 정보 | |
임기 | 1921년 2월 12일 ~ 1923년 2월 24일 |
총독 | 사이토 마코토 |
2. 생애
박중양은 1872년 혹은 1874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5] 조상이 향리 신분이었으나 몰락하여, 아버지는 타지에서 소작농과 하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897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0년 도쿄 아오야마 학원 중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도쿄부기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시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문하생이었다.
1905년 러일 전쟁에 일본군 통역관으로 종군했다.[6] 1906년 군무부 주사, 군기창 기사 등을 역임하고 일본에서 열린 관병식에 파견되었다. 1907년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주사, 진주 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를 역임했다. 같은 해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재직 중 대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대구읍성을 해체했다.[6] 이후 전라남도 관찰사, 평안남도 관찰사 겸 평안남도 세무서 세무관, 1908년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평안남도와 경상북도에 재직했을 때 단발령을 강행했다.
1910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으나, 한국 병합 후에도 유임되어 충청남도 도장관을 지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가 되고, 1921년 황해도 도지사, 1923년 충청북도 도지사를 지냈다. 1925년 속리산에서 음주 중 사찰의 여승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대기 발령되었다.
1927년 중추원 참의, 1928년 황해도 도지사를 역임하고 1929년 중추원 참의로 복귀했다. 1936년 중추원 고문, 1943년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전시 자문 기관인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여에 임명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싱가포르와 타이완 주재 일본군 위문을 다녔다.
1945년 2월 훈일등 훈장을 받고, 4월 3일 귀족원 조선칙선의원이 되었다.[7] 같은 달 조선인 참정권 허용에 대한 감사 사절단 대표로 윤치호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조선인의 가능성을 부정했으며, 학교나 교육 시설에 기부했던 윤치호와 달리, 조선의 발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았다. 1946년 7월 4일 자격 소멸로 귀족원 의원직을 사퇴했다.[8]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검거되었으나, 무죄를 주장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었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고 평가했다.[9] 그는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사이비 애국자라고 조롱하며,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이승만 등은 도망갈 것이라고 말했고,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다. 사망년도는 1955년과 1959년 두 가지 설이 있다.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어 재산이 몰수되었다.
2. 1. 생애 초반
1903년 관리서 주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1904년 러일 전쟁에 고등통역관으로 참전했다. 같은 해 농상공부 주사를 거쳐 1905년 진주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를 역임했다. 1905년 일본 유학 후 1906년 대구판관, 군부 주사와 군기창 기사를 지냈다. 1906년 경상북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를 맡았다. 1907년에는 전라남도와 평안북도 관찰사를, 1907년부터 1908년까지는 평안남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경상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단발령을 강행했다.2. 1. 1. 출생과 가계
박중양은 1872년 혹은 1874년 5월 3일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현 양주시)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5]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아 1872년생 설과 1874년생 설이 있다. 그의 본관은 불확실하며, 밀양 박씨와 반남 박씨라는 설이 있다.[148][149] 아버지 박정호는 머슴살이로 생계를 유지했다.[150]그의 가계는 선대가 중인 출신이었다가 몰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6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의 선대가 양주군에서 아전 노릇을 했다고 전해진다.[149] 아버지 박정호에게 추서된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박중양이 출세한 뒤에 내려진 것이다.[150]
구분 | 내용 |
---|---|
출생일 | 1872년 또는 1874년 5월 3일 |
출생지 |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현 양주시) |
본관 | 불분명 (밀양 박씨, 반남 박씨 설 존재) |
아버지 | 박정호 (머슴살이) |
가계 | 몰락한 양반 가문 (선대 중인 추정) |
2. 1. 2. 소년기 및 일본 유학
박중양은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5] 출생년도는 1872년과 1874년 두 가지 설이 있다. 조상은 향리 신분이었으나 몰락하여, 아버지는 타지에서 다른 사람 집의 소작농, 하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897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아오야마 학원 중학교에 입학, 190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도쿄부기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에 졸업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시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문하생이었다.
2. 1. 3.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도쿄 체류 중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져 위급했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다.[23][24] 박중양은 어떠한 대가도 사양하였고, 값진 선물도 사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부인을 구한 박중양을 각별히 신뢰하였다.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토는 그를 비롯하여 자신의 문하를 찾아온 조선인 유학생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처지를 탓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이토의 인품에 감화된 박중양은 평생 이토 히로부미를 이토 히로부미라 하지 않고 이등 공(公), 춘보 공(公), 이토 공이라고 꼬박 존칭을 붙여서 불렀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이토를 인격자로 칭송했다. 1904년 귀국 이후 한국 통감으로 부임해 온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나면서, 그의 관료 생활의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2. 2. 대한제국기 활동
1903년 관리서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종군, 인천, 황해남도 진남포, 용암포와 중국 청나라 안둥현 등지에서 활동했다.1905년 러일 전쟁에 일본군 통역관으로 종군했다.[6] 같은 해 군무부 주사, 군기창 기사 등을 역임하고, 1906년 일본에서 열린 관병식에 파견되었다.[6] 1907년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주사, 진주 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를 역임했다.[6] 이후 전라남도 관찰사, 평안남도 관찰사 겸 평안남도 세무서 세무관, 1908년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6]
1906년 10월 일본인들과 함께 대구읍성 철거를 계획하고 조정에 건의서를 올렸으나 불가 회신을 받았다. 그러나 박중양은 건의서를 올리기 열흘 전부터 부산에서 데려온 인부들을 통해 성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고, 회신이 왔을 때는 이미 성첩을 허물은 뒤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두 아들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계획까지 세웠다.[45] 1907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재직 중 대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대구읍성을 해체했다.[6]
1908년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본적지를 경기도 양주군에서 경상북도 달성군으로 옮겼다. 그는 단발령의 효율성을 알리고 보급하는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부임 후 영해군 초도순시에서 연설로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고 군청 내아에서 인사를 받는 척하며 일본 순사들을 시켜 강제로 상투를 자르게 했다.[53] 1907년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시에도 단발령을 강행하며, 면담을 신청한 뒤 도청에 출입할 때 강제로 머리카락을 자르게 했다.
1908년 대구에서 들개 소탕 작전을 펼쳐 '개백정 관찰사', '야견 투살대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09년 순종의 남행 때 수행원의 한 사람이었으며,[6] 대구 수창학교에서 일장기를 게양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학교 폐지를 건의하기도 했다.[6]
박중양은 평소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인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때로는 일본 순사를 사설 감방에 가두는 등의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64][52]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64][52]
2. 2. 1. 귀국과 러일전쟁 종군
1903년 6월 16일 관리서 주사(管理署主事) 판임관 8등에 임용되었으나,[25] 곧 사직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고등통역관으로 종군하여 인천, 황해남도 진남포, 용암포와 중국 청나라 안둥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박중양은 일본인과의 교제, 일본 생활, 종군 생활을 통해 일본인을 신뢰하고 일본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우수성을 높게 평가하고, 그들의 친절에 감탄했으며, 일본인 기녀에 대한 좋은 추억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국정 개선을 위해 자원하는 일본인의 의협심을 높이 샀다. 반면 조선인에 대해서는 '사기에 능하고, 도벽이 있으며, 파괴적'이라며 야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인이 공공 정신이 없고, 사기와 거짓말에 능하며, 사람을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것과 도벽, 허세가 심한 점을 들어 조선인과 일본인을 비교하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2. 2. 2. 관료 생활
1905년 러일 전쟁에 일본군 통역관으로 종군했다.[6] 같은 해 군무부 주사, 군기창 기사 등을 역임하고, 1906년 일본에서 열린 관병식에 파견되었다.[6] 1907년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주사, 진주 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를 역임했다.[6] 1907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재직 중 대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대구읍성을 해체했다.[6] 이후 전라남도 관찰사, 평안남도 관찰사 겸 평안남도 세무서 세무관, 1908년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6] 평안남도와 경상북도에 재직했을 때,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령에 따라 단발령을 강행했다.대구 군수 재직 시 일본인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칭송하였다.[22] 경부선 개통으로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왔고,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생겨났다. 이때 대구 군수 박중양은 주로 일본인들의 편에서 일하였다.[22]
박중양은 대구읍성이 대구읍내를 관통하여 시내 왕래가 불편한가 여부를 검토했고,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고 보고 대구읍성 철거를 지시했다. 1906년 6월 그가 경북관찰사 서리를 겸하게 되면서, 곧바로 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당시 일본거류민들이 가장 소원했던 바는 바로 대구읍성의 철거 문제였다. 결국 성을 철거함으로써 성내 상권까지도 일본 상인들이 침투하게 되었다.[22]
박중양은 1906년 10월 오카모토, 카게야마 등 몇몇 일본 사람들과 함께 성을 헐어버릴 계획을 짜고, '대구 도시계획 상 방해가 되니 성첩을 헐겠다.'는 건의서를 조정에 올렸다.[158] 조정의 회신은 '불가'였다.[158] 그러나 중앙에서 회신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성첩을 허물은 뒤였다. 박중양은 건의서를 올리기 열흘 전부터 카케야마 등이 부산에서 데려온 60여 명의 일급 노동자를 배불리 먹이고 밤새 성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던 것이다.[158] 성벽 파괴작업은 박중양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그는 목이 달아날 각오를 갖고 임했다.[66]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는 두 아들인 박문웅과 박무웅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계획도 세웠다.[45] 일본인이 기록한 대구물어에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두 아들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준비도 하였다.[66]'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읍성 철거를 두고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야마모토 군수의 '과감한 조치'라고 극찬하였으나,[22] 그는 일본인들의 칭찬을 외면하였다.
2. 2. 3. 경상북도 관찰사 재직 시절
1908년 6월 11일 경상북도 관찰사 겸 경상북도재판소 판사 칙임관 3등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1907년 2월부터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는 등 일본에 대한 저항이 강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는 곧 부임해온 경북관찰사였던 박중양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52] 그해 7월 1일 겸임 평안남도관립일어학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08년 박중양은 본적지를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경상북도 달성군 북면 침산리로 옮겼다.대구 군수 재직 시절, 경부선 개통으로 대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때문에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생겨났는데, 이때 대구군수 박중양은 주로 일본인들의 편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일본거류민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부르며 칭송하였다.[22]
박중양은 당시 대구읍성이 대구읍내를 관통하여 시내 왕래가 불편한가 여부를 검토했고, 을사늑약 이후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고 보고 대구읍성 철거를 지시한다. 당시 일본거류민들이 가장 소원했던 바는 바로 대구읍성의 철거 문제였다. 그런데 1906년 6월 그가 경북관찰사 서리를 겸하게 되면서, 곧바로 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결국 성을 철거함으로써 성내 상권까지도 일본 상인들이 침투하게 되었다.[22] 일본인이 기록한 대구물어에도 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두 아들을 일본으로 망명시킬 준비도 하였다.[66]'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읍성 철거를 두고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야마모토 군수의 '과감한 조치'라고 극찬하였다.[22] 그러나 그는 일본인들의 칭찬을 외면하였다.
2. 2. 4. 개혁 정책과 단발령 강행
그는 일찍부터 단발령의 효율성을 알리고, 이를 보급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발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박중양은 영해군으로 초도순시를 간 뒤, 연설로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고 나서 "나에게 따로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연설회가 끝난 뒤 군청 내아(內衙)로 들어오시오."라고 선언했다.[53] 도백(道伯)이 자기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 인사를 받겠다고 하는데 감지덕지한 유지, 기관장급들은 좋아하며 내아로 줄을 지어 들어갔다. 그런데 내아 삼문(三門) 뒤에 숨어 있던 일본 순사들이 관찰사 박중양에게 인사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위로 들이대고 상투를 잘라 버렸다. 한꺼번에 수백 명의 상투가 잘려 나갔으니 내아는 금세 통곡바다를 이루었다.[53] 이후 그는 위생의 편리함을 이유로 단발령을 권고했고, 호응이 적은 곳은 직접 찾아가 순사들을 매복시킨 뒤 단발을 강행하였다.1907년 평안남도 관찰사 재직 중에도 그는 단발의 필요성과 위생상 편리성을 역설하고 단발령을 강행하였다. 단발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으면 면담을 신청한 뒤 도청에 출입할 때, 도청사 정문 또는 관찰사 집무실 입구에 가위를 든 관리들을 숨겨두고 출입자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게 했다.
박중양은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등 조선의 구습에 반감을 품었다. 그는 단발령을 비롯한 제사 문화와 허례허식 문화, 관혼상제 문화에 대해,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인습들로 규정하였다. 그는 단발령에 대해서도 확신을 품었다. 단발을 하면 상투를 틀 때보다 머리 관리 시간도 절약되고, 머리 감기도 편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1912년에는 군청 통폐합작업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논산군 은진면 유지들이 도장관 면담을 요청했다.[70] 이때 은진에서 찾아온 유지들 가운데 한 노인이 상투머리에 갓을 쓴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발령이 내린 지 언제인데 지금까지 상투를 하다니... 에잇! 다들 나가시오.' 그러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70]
2. 2. 5. 들개 사냥
1908년 대구에서 들개 소탕 작전을 펼쳐 많은 개를 죽였다. 이는 일본인이 들개에게 물린 사건과 박중양 자신이 기생집에 다녀오다 들개에게 물린 사건 등이 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개백정 관찰사', '야견 투살대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2. 6. 순종 남행길 수행
1909년 순종의 남행 때 박중양은 수행원의 한 사람이었다.[6] 그는 대구 수창학교에서 일장기를 게양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학교 폐지를 건의하기도 했다.[6] 순종의 방문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2. 2. 7. 일본인 관료 응징
박중양은 평소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인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때로는 일본 순사를 사설 감방에 가두는 등의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64][52] 그는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조선인을 횡포하는 일본인을 보면 작대기로 때려 응징하였다.[64][52]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64][52]
2. 3. 일제 시대 활동
1910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은 그해 한일병합을 맞았다. 그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를 위해 국민이 충성할 이유가 없다'며 한일병합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한일병합 후에도 유임되어 충청남도 도장관을 지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가 되었다.1921년 황해도 도지사, 1923년 충청북도 도지사를 지냈다. 1925년에는 속리산에서 음주 중 사찰의 여승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대기 발령되었다.
1927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28년 황해도 도지사가 되었으나, 1929년 중추원 참의로 복귀했다. 1936년 중추원 고문,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의 전시 자문 기관인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을 역임하고,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싱가포르와 타이완 주둔 일본군을 위문하기도 했다.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여에 임명되었다.
1945년 2월, 훈일등 등의 훈장을 받고, 같은 해 4월 3일 귀족원 조선칙선의원이 되었다.[7] 같은 해 4월 조선인 참정권이 허용되자, 윤치호와 함께 감사 사절단 대표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조선인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했으며, 학교나 교육 시설에 기부, 장학금을 지급했던 윤치호와는 달리, 조선의 발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았다. 1946년 7월 4일, 자격 소멸로 귀족원 의원직을 사퇴했다.[8]
2. 3. 1. 한일병합 직전
1909년(융희 3년) 대구에 십자도로를 개통하였다.[65] 대구 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인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이 도로가 개통될 무렵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65] 대구 시가지를 정비하고 십자도로를 개설함으로써 대구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순종의 남행을 수행하고 돌아온 뒤 칙임관 2등(勅任官二等)으로 승급하였다. 같은 해 7월 재조선 일본인 농업관계자와 유지들이 만든 조선중앙농회의 경상북도지회장에 선임되었다. 한편으로 조선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들을 발견하면 자신이 들고 있던 작대기로 무례한 일본인을 두들겨 패고 그 일본인이 저지른 횡포를 경찰에 따졌으므로 일본인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밉게 보인 순사 몇명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이나 옷을 벗겨서 거리로 내쫓기도 했다.
그는 일본 순사 때리기를 예사로 하였다 한다.[66] 한번은 일본인 순사들이 노점행상으로 떡을 팔고 있는 어느 노파에게 교통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장사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말을 못 알아들은 이 노파가 그 다음날에도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자, 화가 난 순사들은 떡함지를 발로 걷어차 떡이 죄다 쏟아져 소동이 발생했다. 이를 본 박중양은 바로 관할 경찰서장을 호출하고, 해당 순사에게 땅바닥에 떨어진 떡을 입에 물리고 떡함지를 머리에 이게 하여 장터거리에 조리를 돌려 민심을 수습했다.
그의 위세는 막강하여 '작대기를 휘두르면 기차가 섰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66] 그러나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각별히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인들도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그는 밀주와 탁주 등 술을 즐겼다. 한편 마땅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소문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고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도 했다.
2. 3. 2. 일제 시대 초반
1910년 8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박중양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영전되었을 때 대구부민은 사은의 뜻으로 금줄이 달린 시계를 선물하였는데, 시계 뒤 뚜껑 안쪽에 이중 십자형을 새겨 넣었으니 이는 성벽 파괴의 공적과 십자로 개통의 배려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39] 그해 한일병합을 맞았다. 그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를 위해 국민이 충성할 이유가 없다'며 한일병합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1910년 9월 경상북도에서 각 면민들을 대상으로 특별 강연을 했는데, 연사의 한 사람으로 초빙되었다. 여기서 그는 한일병합 조약의 이유, 합병 조건을 설명한 후 새 정부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후 그는 "폭풍과 홍수를 방어할 지력이 없고, 대세를 저항할 실력이 없다. ... 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한일병합 후에도 유임되어 충청남도 도장관을 지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가 되었다.
2. 3. 3. 밀주 단속 무마와 고미술품 수집
박중양은 밀주와 탁주 등 술을 즐겼다. 한편 마땅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소문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가 술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밀주 항아리를 갖다 주고,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도 했다.2. 3. 4. 복직과 일제 시대 중반
1927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1928년 황해도 도지사로 복직했으나, 1929년 다시 중추원 참의로 복귀했다. 1936년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고,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거둘 것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조선인 참정권 운동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 3. 5. 도지사 퇴직 이후
1927년 2월 중추원 칙임참의로 임명된 뒤[93] 1941년 5월까지 네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2500KRW의 수당을 받았다. 속리산 여승 변사 문제로 지탄받았지만 조선총독부로부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94] 1927년 11월 9일 대구상공협회의 조직에 참여하고, 대구상공협회 고문이 되었다.[95]그는 가정에서 밀주를 만들다가 적발된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또한 담배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세금 면제를 적극 도와주기도 했다. 그가 애주가, 애연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치하에서도 밀주는 엄벌에 처할 정도로 단속이 심하였다. 그러나 단속 때면 사람들은 박작대기 집에 밀주 항아리를 갖다주곤 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94] 술을 좋아했던 그에게 밀주를 갖다주면 그는 밀주 단속이 나온 순사들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주었다.
골동품과 고미술품을 감정할 줄 알았던 그는 고미술품의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사들이기도 했다. 이는 6.25 전쟁 와중에도 박중양이 각별하게 숨기고 아껴서 1950년대 고서 감정가 석진수가 방문할 때까지도 대부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후일 그가 수집한 고미술품은 아들에 의해 석진수 등에게 판매되었다. 석진수는 '이런 물건을 보려고 꿈에 용을 봤구나 하는 생각에 서화, 고서, 나전칠기 등 수집점을 값을 깎지도 않고 일괄해서 구입했다. 화폐개혁 전 값으로만 쳐서 수백만원이었다.[94]'고 한다. 1927년 겨울에는 약초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순례하기도 하였으며, 경성부의 고미술품상을 찾아가 서화를 구입하였다.
2. 3. 6. 일제 시대 후반
1936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전시 자문 기관인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을 맡았으며,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7]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싱가포르와 타이완 주둔 일본군을 위문하기도 했다.[7]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여에 임명되었다.2. 3. 7. 참정권 허용 감사 사절 파견과 귀국
1945년 4월 3일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었다.[7] 같은 해 4월 조선인에게 참정권이 허용되자, 윤치호와 함께 감사 사절단 대표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학교나 교육 시설에 기부, 장학금을 지급했던 윤치호와는 달리, 조선의 발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았다. 1946년 7월 4일, 자격 소멸로 귀족원 의원직에서 물러났다.[8]2. 4. 해방 이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박중양은 대구 오봉산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녀 '박 작대기 영감'으로 불렸으며, 오봉산은 한때 '박작대기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135]2007년 8월 13일 박중양이 소유했던 대구 북구 침산동 산16-1 임야 등 37필지, 총 82082m2가 국가 귀속 결정 처분을 받고 강제 압수되었다.[103] 압수 당시 토지들의 평가액은 2185653000KRW였다.[103]
2. 4. 1. 해방 직후
1945년 광복 이후 박중양은 친일파로 비판받았으나, "나는 친일은 하였으나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라고 항변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9] 반민특위에 의해 일기장이 압수되었고,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135] 그는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박중양은 1946년부터 일기, 회고 비슷하게 써온 일부 글을 모아 술회라는 자서전을 엮었다.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 하여 주민들로부터 '박 작대기 영감'이라 불렸다. 또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던 오봉산 근처 땅을 사들여서 한때 오봉산을 박작대기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구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여생을 보냈다. 1996년 11월 그의 후손들이 일소대를 자진 철거하였고, 바위에 새겨둔 그의 친필 휘호는 파괴, 유실되었다.
1957년 1월에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되어 대구지검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에 의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36][137] 9월 16일 검찰출두명령이 떨어졌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38] 그러나 그는 계속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결국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 역시 피신하거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
2. 4. 2. 반민특위 기소와 석방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검거되었으나, 무죄를 주장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었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고 평가했다.[9] 그는 폐렴으로 병보석을 허가받아 석방되었다. 이후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135]2. 4. 3. 삼일절에 대한 조롱
1945년 광복 이후, 박중양은 3.1절을 기념하는 행위를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관공서 공무원이었던 사람들이 광복 후 애국자인 척하는 것을 비웃으며, '시세 변천에 따른 활계희극의 광경'이라고 묘사했다.[134]그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롱했는데, 해외 망명 후 귀국한 인사들 외에는 3.1 운동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도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134] 그는 소수의 독립운동가들만의 노력으로 독립했다는 시각은 허구이며, 미국의 덕으로 독립했다고 주장했다.
박중양은 일제강점기 후반 대다수의 국민들이 창씨개명을 한 사실을 지적하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독립 후 애국자 행세를 하는 것을 비판했다.[134] 이러한 그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큰 분노와 비난을 불러일으켰지만, 박중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위선이라며 무시했다.
2. 4. 4. 오봉산 은거와 정부 비판
석방 후 박중양은 대구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이승만을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고[136],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을 비꼬았다. 1957년 1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이승만을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되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기도 했다.[136][137] 그는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하였으나, 박중양은 피신하거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2. 4. 5. 출판물 사건과 최후
1957년 1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 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되어 대구지검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에 의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36] 그는 신년사라는 책자를 발간, 경무대에까지 전달했는데,[137] 신년사에서 이승만을 조롱한 것이 '행정수반인 이 대통령을 모욕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137]'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9월 16일 검찰 출두 명령이 떨어졌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38] 그러나 그는 계속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결국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 역시 피신하거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녔다 하여 주민들로부터 '박 작대기 영감'이라 불렸다. 또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던 오봉산 근처 땅을 사들여서 한때 오봉산을 박작대기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구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 여생을 보냈다. 일소대는 후일 1996년 11월에 그의 후손들이 자진 철거하였다. 또한 바위에 일소대라고 새겨 둔 그의 친필 휘호는 파괴, 유실되었다.
2. 4. 6. 사후
박중양은 친일파의 거두로 비판받았으며, 독립 이후에도 반성하지 않고 자신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여 더욱 비난을 받았다.[9] 그의 묘소는 2004년까지 대구 침산1동 오봉산 제2봉에 있다가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고,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그의 부모 묘소도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이장, 합장되었으나 역시 2004년 3월 30일 종손자에 의해 화장되었다.[117] 합장묘 앞에 있던 '아들 중양이 울면서 세웠다(子重陽泣建)'는 문구와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연호인 소화(昭和)가 새겨진 비문도 철거되었다.[117] 오봉산에 있던 아들 박문웅 내외의 묘소와 일본인 첩의 묘소 역시 후손들에 의해 이장되었다.1991년 대구 주간 매일신문에 언론인 김용진은 '김용진의 대구이야기'를 투고하면서 박중양이 조선 고등학생을 잡아 넣은 일본 헌병 대장을 혼내 준 이야기와 동족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소개해 준 이야기 등을 소개하였다.[143] 또한, 언론인 박용진은 박중양이 일본 유학 경력 중에 습득한 것을 '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려 함'이라고 변호하기도 했다.[143]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7년 8월 13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박중양이 남긴 대구 북구 침산동 일대 3671100000KRW 상당의 토지 82082m2를 대한민국 국고로 귀속 조치하였다.[144][145][146]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논란과 의혹
박중양은 여러 논란과 의혹에 휩싸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풀려난 후, 공공연하게 '친일긍정론'을 주장하여 대구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135]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135] 1957년 1월에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에서 이승만을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 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하여 대구지검에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136]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고[135], 이후에도 이승만과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으나, 박중양은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 그는 오랫동안 작대기를 짚고 다녀 '박 작대기 영감'으로 불렸으며, 오봉산 근처 땅을 사들여 오봉산을 박작대기 산이라고 불리게도 했다. 대구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으나, 1996년 11월 그의 후손들이 자진 철거하였다.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에 관해 명예훼손 발언을 하여 검찰에 불려갔다.[140] 또한 그는 평소 이승만은 '미국과 주한미군만 퇴거하면 즉시 보따리를 싸서 도망칠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조지훈은 박중양을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라고 평가했다.
3. 1. 출신 성분 논란
박중양의 가계와 선대는 불확실하다. 박중양 자신은 아버지가 양주군 주내면에서 머슴으로 살았다고 하였다.그는 자신의 본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르게 이야기 했다.
- 1907년에 간행된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에서는 밀양 박씨라 하였다.[148]
- 1913년에 발간된 《조선신사대동보 (朝鮮紳士大同譜)》 에서는 반남 박씨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이름 끝에 반남 박씨 항렬자 중 하나인 양(陽)자가 있는 것에 착안하여 꾸며낸 말이다.
그의 가문은 아전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49]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6일자 2면 보도에 의하면 본시 양주군퇴리(本以楊州郡退吏)라고 하여 그의 선대가 양주군에서 아전노릇을 했다고 한다. 가계가 불확실한 탓에 보통 그의 가계는 선대에 중인 출신이었다가 몰락한 것으로 본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경기도 양주군에 와서 마름 노릇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였다. 아버지 박정호에게 내려진 가선대부 규장각제학 벼슬은 사후 박중양의 출세로 추증된 증직 벼슬이었다.[150]
3. 2.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 논란
박중양은 오랫동안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박중양은 양자설은 거짓말이라며 부인하고, 이토를 자신의 은사(恩師)라고 밝혔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153]' 또는 이토 히로부미를 의부(義父)로 삼았다[154]'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호가호위하던 자[155]'였을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반민특위의 수사관들도 그를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알고 있었다.[19]임관 얼마 뒤 이등박문을 만나게 되면서 친일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대담하게도 스스로 ‘이등’을 찾아가 “조선엔 희망이 없어 미국 유학이나 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 했더니, “당신 같은 기백 있는 조선 청년은 처음이다”라며 주선해준 자리가 대구 군수 감투였다고 한다.[140] 그가 “이등의 양자였다”는 소문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양자는 아니고 은사였지”라며 ‘이등’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간접적으로 시인한 바 있었다.[140]
1949년 3월 1일 기자들과의 면담에서 건국공론사의 모 기자가 이등박문과의 관계를 물었다.[67] 건국공론사 모 기자가 그에게 "이등박문 하고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처음에는 나의 은사라고 했다가, 기자들이 "항간에서는 양자 관계라고들 하는데?"라고 파고 들자, 박중양은 "그건 거짓말이다."하고 얼버무렸다.[67]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 양자설에 대해 시중에서 확장된 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래 내가 이등공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대관(大官)들이 온갖 뇌물을 가지고 아부를 해 왔지만[67] 나는 그것을 다 물리치고 내가 의도하던 개혁을 실시했을 따름이다.[156]"라고 했다.
3. 3. 땅 투기 의혹
대구읍성과 진주성 철거 당시 박중양은 철거한 성돌 일부를 일본인에게 팔아 돈을 받았다. 1905년 진주에 있을 때 그는 진주성의 성곽 일부를 헐어서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벌기도 했다.[26]'군수 노릇할 때는 성첩 헐어 매식하고, 관찰사가 된 뒤에는 객사까지 훼손하니 황상 폐하 남순(南巡) 시에 일기불현(日旗不縣)하였다고 수창학교 폐지코자 학무대신에게 보고하니 포악하고 돈 잘 먹기 박중양이 날개로다.[26]'라는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춘불춘(春不春)'이라는 노래는 박중양의 행각을 전한다.[26]
박중양이 대구 성첩을 헐어내고 돌멩이를 일본인들에게 팔면서 대구의 부동산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통감부가 설치된 1904년 당시 대구에 들어와 있던 일본 상인은 약 120명이었다.[157] 경부선 공사 현장이 부산에서 대구 쪽으로 뻗어 가면서 일본 상인들은 공사 현장을 따라 등짐을 짊어지고 내륙 도시로 흘러들었다.[157] 일본인들은 달서문 밖에 판잣집을 띄엄띄엄 짓고 살았다. 1906년 일본 이사청 부이사 오카모토(岡本)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대표격인 카게야마(影山)는 박중양을 구워삶았다. 박중양은 대구역이 어디에 지어질지 알지 못했다. 철도역이 들어서면 역을 중심으로 도로를 새로 내야 하고 도로 변에는 반드시 신흥 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땅값도 달라진다. 카게야마 등은 대구역 건설에 편승하여 성을 헐고 떼돈을 벌어보라고 충동질했다.[157]
대구읍성 성 안과 성 밖은 성 둘레 한 칸을 놓고 땅값이 4배나 차이가 났다. 성 밖, 특히 일본 상인들과 경부선 철도 공사 인부로 온 일본 노동자들의 숙소 근처인 진동문 밖에다가 엄청난 땅을 사두고 성을 헐어내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박중양은 혹했다. 카게야마의 제의대로 박중양은 성을 헐어 버리기로 결심한다.[158] 경부선 철도역이 남문 밖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돈 있는 사람들은 남문 밖 빈터를 사두기 시작했다. 정거장 바람은 남문 밖으로 휘몰아쳤으며 진동문 쪽의 땅값은 거꾸로 헐값으로 떨어졌다. 소문을 퍼뜨려 놓고 일본인들과 박중양은 비밀리에 동문 밖의 잡초밭을 마구 사들이면서 성곽을 헐어 버리는 비밀 작전에 들어간다.[158] 1906년 3월부터 성곽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성을 허무는 작업은 1908년까지 3년이나 계속되었다.[158]
일본인 거류민단에서는 성이 뚫린 동문 밖으로 도로를 놓아 달라고 박중양에게 5000JPY을 희사했으며, 성을 헌 돌과 흙은 일본인 거류 지역의 유곽 시설이나 건설 예정지를 메우고 집을 짓는 데 쓰였다.[158] 일부는 선교사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기도 했다. 비만 오면 물이 괴던 대구읍성 동부의 저지대에 자리 잡았던 일본인 거류 지역은 일등 대지가 되었다. 성 안은 평당 23JPY, 성 밖은 평당 6JPY씩 부르던 대지값은 같아졌다. 성내의 땅값은 떨어지고 철도 정거장이 들어온 동문 밖 대지는 최고 60JPY까지 뛰었다. 박중양이 사들인 땅값은 순식간에 10배나 뛰어올랐다.[158] 이를 두고 박중양의 일화는 그가 시대를 앞선 땅 투기꾼이었음을 보여준다[26]는 평도 있다.
3. 4. 친일파론에 대한 반론
일부에서는 박중양을 맹목적인 친일파가 아니었으며, 변절자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1991년 대구 주간 매일신문에 언론인 김용진은 '김용진의 대구이야기'를 기고하면서, '조선의 고등학생을 잡아 넣은 일본 헌병 대장을 혼내준 이야기', '지나가는 허름한 동족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소개해 준 이야기'[143]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언론인 박용진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넘겨주기 위해 성곽을 허문 것을 '신작로를 내기 위함'이라고 하고, 박중양이 일본 유학 중에 습득한 것을 '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려 함'[143]이라고 변호하기도 했다.조지훈은 박중양을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라고 평가했다.
3. 5. 발언 파문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박중양은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135]1957년 1월에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 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 대구지검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에 의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36] 신년사에서 그는 이승만을 조롱했는데, '행정수반인 이대통령을 모욕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137]'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9월 16일 검찰출두명령이 떨어졌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38] 그러나 그는 계속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결국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 역시 피신하거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텼다.
1957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의 젊은 시절에 관해 명예훼손 발언을 하는 바람에 검찰에 불려가야만 했다.[140] 또한 그는 평소 이승만은 '미국과 주한미군만 퇴거하면 즉시 보따리를 싸서 도망칠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다녀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의사 애국자로 조롱하며, 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철수하면 이승만과 같은 자들은 도망갈 것이라고 말했고,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다.[9]
3. 6. 침산 토지에 대한 의혹
그가 은거했던 침산이 대구읍성 철거의 대가로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4. 사상과 신념
박중양은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노령임을 핑계로 '친일긍정론'을 공공연히 주장하여 대구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135]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소환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135] 그는 1946년부터 일기, 회고 등을 모아 술회라는 자서전을 엮었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48세의 일본 여성과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며 친일 긍정론을 펼쳤고,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주민들은 그를 '박 작대기 영감'이라 불렀으며, 오봉산은 한때 박작대기 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구 오봉산 제일봉에 일소대(一笑臺)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으나, 1996년 11월 그의 후손들이 자진 철거하였다.
1957년 1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 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되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36] 그는 신년사를 경무대에까지 전달했는데, '행정수반인 이대통령을 모욕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137]'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9월 16일 검찰 출두 명령을 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거절했다.[138]
1957년 1월 1일 "미국인이 퇴거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봇짐을 싸느라고 분망할 것이다"라는 조롱 섞인 신년 소감을 경무대에 보냈다.[139]
1957년 10월 이승만, 함태영 등의 젊은 시절에 관해 비방, 명예훼손 발언을 하여 검찰에 불려갔다.[140] 그는 '명예훼손이란 반대 세력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만든 괴상한 법'이라며 조소하였다. 1957년 10월 20일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141]
1957년 12월 4일 한옥신 부장검사는 대구정신병원에서 보내온 정신감정서를 접수하고 12월 5일자로 기소유예 판정을 내렸다.[142] 12월 8일 대구시내 소주영(蘇柱永) 정신병원장은 "심신 모약으로 노쇠상태[139]"라 진단하였다. 이는 대통령 이승만에게까지 직접 보고되었다. 1958년 2월 3일과 3월 14일 강제로 서울경찰에 구인되어 성신대학 부속 성모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았으나 풀려났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쓴 회고록 〈술회〉에서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강변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4. 1. 양의, 의학교 설립론
러일전쟁에서 군의관이 부상 장병을 신속하게 응급처치하는 것을 목격한 박중양은 1906년(광무 9년) 1월 조정에 지역에도 신식 병원을 설립할 것과,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묵살당했다. 신식 병원과 의사 양성기관 설립 상소가 묵살되자 그는 실망했다. 1906년 가을부터 평양동인의원 개원을 후원하였다. 1906년 12월 평양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 참석하고 이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7년 대구동인의원 개원과 1907년 2월 대구동인의원 부속 의학교 개교에도 참석, 동인의원과 부속의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164]4. 2. 단발령에 대한 확신
박중양은 斷髮令일본어을 위생과 시간 절약에 도움이 되는 근대적인 조치로 인식하고,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시행해야 한다고 믿었다.4. 3. 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
박중양은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해 강한 비판 의식을 가졌다. 그는 한국인의 편협함, 배타성, 나태함 등을 지적하며 이러한 악습이 조선이 식민지가 된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특히, 애국심을 명분으로 범죄를 정당화하고, 위선과 무능을 숨긴다며 비판했다.4. 4. 개화파 애국자론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 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는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4. 5. 국가와 국민관
박중양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을 배려하지 않는 국가에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조선 조정이 백성을 위해 한 일이 없다고 비판하며, 자신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했다.[135]4. 6.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한 긍정론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135]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4. 7. 조선의 일본화
박중양은 조선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면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인의 문명 개화를 위해 일본인의 협조와 지원을 당부했다.[135][136][137] 그는 대구읍성과 진주성 철거 시 성돌 일부를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받기도 했다. 1905년 진주에 있을 때 그는 진주성의 성곽을 일부 헐어서 일본인에게 팔고 돈을 벌기도 했다.[26]1906년 일본 이사청 부이사 오카모토(岡本)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대표격인 카게야마(影山)는 박중양에게 대구역 건설에 편승하여 성을 헐고 떼돈을 벌어보라고 충동질했다.[157] 대구읍성 성 안과 성 밖은 성 둘레 한 칸을 놓고 땅값이 4배나 차이가 났는데, 박중양은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동문 밖의 잡초밭을 마구 사들이면서 성곽을 헐어 버리는 비밀 작전에 들어갔다.[158] 성곽 철거 작업은 1906년 3월부터 1908년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158]
일본인 거류민단에서는 성이 뚫린 동문 밖으로 도로를 놓아 달라고 박중양에게 5000JPY을 희사했으며, 성을 헌 돌과 흙은 일본인 거류지역의 유곽 시설이나 건설 예정지를 메우고 집을 짓는데 쓰였다.[158]
4. 8.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
주어진 원본 소스에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어 작성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전 결과물을 그대로 출력합니다.(박중양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에 대한 내용은 주어진 소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관련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9. 한일병합 기여론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박중양은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폈고,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135]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4. 10. 현실주의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펼쳤고, 종종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함태영 부통령 등을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135]5. 약력
- 1903년: 관리서 주사
- 1904년: 러일 전쟁 때 고등통역관으로 참전, 농상공부 주사
- 1905년: 진주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 일본 유학
- 1906년: 대구판관, 군부 주사, 군부 군기창 기사, 경상북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 1907년: 전라남도 관찰사(도지사에 해당), 평안북도 관찰사
- 1907년 - 1908년: 평안남도 관찰사
- 1908년 - 1910년: 경상북도 관찰사
- 1910년: 충청남도 도장관(도지사에 해당)
- 1915년: 중추원 찬의
- 1916년: 중추원 참의
- 1919년: 3.1 만세 운동의 격화를 자제하기 위해 자제단 조직
- 1920년 5월: 중추원 참의직 사퇴
- 1921년: 황해도 지사
- 1923년: 충청북도 지사, 10월 간토 대지진에 조선인 관련성을 부정
- 1927년 2월 18일: 의원면직,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 1928년: 황해도 지사
- 1929년: 중추원 참의
- 1933년: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 1938년: 중추원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 1939년: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 1941년: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사양,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 1943년: 중추원 부의장
- 1945년 4월: 칙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
- 1945년 9월: 미군정 주둔 후 귀족원 의원, 중추원 부의장에서 파면
- 1949년 1월: 반민특위 조사관에 의해 체포, 서울로 이송,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반민특위 재판, 2월 폐렴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 병보석 허가
- 1957년 1월: 신년소감이라는 책자 발간, 이승만 대통령을 모욕한 혐의로 대구지검에 의해 불구속 기소[136]
6. 저서
술회한국어(述懐)는 박중양이 1946년부터 일기, 회고 비슷하게 써 온 일부 글을 모아 엮은 자서전이다.[135]
- 술회한국어(述懐)
- 박중양 일기(朴重陽日記)
7. 평가와 비판
박중양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고 일본인에게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친일 행위와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비판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었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고 평가했다.[9]
석방 후에도 '친일긍정론'을 공공연히 주장하며 대구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1949년 특별 검찰부에 다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135], 1957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의 책자를 발간하여 대구지검에 고소되기도 했다.[136] 그는 이승만, 함태영 등을 사이비 애국자라며 조롱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으나, 고령을 이유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조선인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했으며, 학교나 교육 시설에 대한 기부나 장학금 지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발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았다.
7. 1. 긍정적 평가
일부에서는 그가 대구를 근대 도시로 발전시킨 선각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일본인에게 굴하지 않고 기개를 보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7. 2. 부정적 평가
박중양은 반민특위에 검거되었으나 무죄를 주장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위원회는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었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고 평가했다.[9] 그는 1949년 7월 특별 검찰부에 다시 끌려가 문초를 받았으며[135], 노령임을 핑계로 공공연히 '친일긍정론'을 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대구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135] 1957년 1월에는 신년소감(新年所感)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이승만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바로 짐싸서 도망가기 바쁠 것'이라고 조롱했다가 대구지검에 고소, 대구지검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에 의해 불구속 기소로 조사받았다.[136]그는 '조선인의 악벽'이라 하여 조선인들에게 존재하는 악질적인 버릇으로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166]'를 지적했다. 이러한 악질적인 습관 때문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며, 일본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신뢰를 가볍기 여기고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악습을 갖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박중양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할 자신도 없으면서 누군가 나서서 악습을 타파하고 개신하려 들면 방해하고 험담하여 좌절, 무산시킨다'고 비판했다.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으면서, 하려는 사람들을 (뒤에서)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15]라며, 이것이 조선인 최대의 결점이라 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부터 독립 이후의 반탁 테러꾼들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많다며 그들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일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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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규칙'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8-30
[61]
서적
역주 매천야록 2
문학과지성사
2005
[62]
뉴스
100년전 대구 '황제의 길' 을 다시 걷다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09-01-08
[63]
뉴스
개교 100돌 맞는 대구 수창초등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07-07-07
[64]
뉴스
순종 남행이 박중양의 정치적 입지 높여
http://www.dailian.c[...]
데일리안
2010-01-30
[65]
뉴스
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 (8) 대구읍성 (하)
http://life.imaeil.c[...]
주간매일
200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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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월간문학 35권 제3호
월간문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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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68]
서적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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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70]
뉴스
일제 첫 '충남도장관'의 엽기 행각:변평섭의 '충남의 옛이야기' 7
http://www.chungnam.[...]
충남인뉴스
2009-06-04
[71]
서적
나는 과학자이다
양문
2008
[72]
뉴스
갑부가 된 '충남 운전면허 1호 문갑동':변평섭의 '충남의 옛이야기' 9
http://www.chungnam.[...]
충남인뉴스
2009-06-27
[73]
뉴스
예산농업학교-예산시절4
http://www.yesm.kr/n[...]
무한신문
200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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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종교계의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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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매일신보
1914-09-21
[76]
뉴스
매일신보
1914-11-07
[77]
뉴스
매일신보
1915-04-06
[78]
서적
2009 명승 우수자원 지정 정밀조사:경상남·북도
문화재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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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매일신보
1916-07-23
[80]
뉴스
매일신보
19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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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사설 朴重陽과 친일파 재산의 국가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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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2007-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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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http://koreandb.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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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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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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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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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동아일보
19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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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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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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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사내리, 사찰과 이어진 관광마을
국립민속박물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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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리, 사찰과 이어진 관광마을
국립민속박물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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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동아일보
1925-03-06
[92]
서적
사내리, 사찰과 이어진 관광마을
국립민속박물관
2012
[93]
간행물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
[94]
뉴스
서화 골동 야화 <38> 호신불
매일경제
198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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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안중근과 한인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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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교회의 사회사:1885 1945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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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朴重陽·崔麟 등 反民特委에 기재된 죄
자유신문
194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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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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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일본 국회의 하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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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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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매일신보
1932-01-19
[102]
뉴스
매일신보
1932-02-20
[103]
뉴스
시가 257억원 상당의 친일파 재산 국가귀속
http://www.upkorea.n[...]
업코리아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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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매일신보
1934-08-08
[105]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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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200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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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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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200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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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일제가 현대 조선 개신 해방후에도 망발…친일파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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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2010-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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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04:한국현대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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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인사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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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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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구의 인사조정
동아일보
193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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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일본판 개천절 '기원절'에 초대받은 '충성스런' 친일 조선인들의 면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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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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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친일 시비’ 김성수등 300명 1940년 日 건국행사 초청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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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0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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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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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침산공원 '親日 혹' 떨어졌다...박중양 부모 묘 改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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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200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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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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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금융연구:조선식산은행과 식민지 경제 (역비한국학연구총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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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전집 04:한국현대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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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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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현암 조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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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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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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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4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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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반민 특위의 조직 과 활동: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
도서출판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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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흥식·이종영 드디어 해부대에 등장
경향신문
1949-01-29
[130]
뉴스
경향신문
197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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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연합신문
1949-02-03
[132]
뉴스
朴重陽等保釋 朴興植도 昨日申請
남조선민보
1949-02-15
[133]
뉴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황국신민 대우를...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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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민족문제연구 9권
민족문제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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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경향신문
1949-07-31
[136]
뉴스
박중양씨 입건, 이대통령 명예훼손혐의
동아일보
1957-09-15
[137]
뉴스
박중양씨를 문초, 출판물이 말썽
경향신문
1957-09-17
[138]
뉴스
박중양씨 신병으로 검찰에 출두를 거부
동아일보
1957-09-20
[139]
뉴스
대통령의사가 관건, 박중양씨 피의 사건
경향신문
1957-12-08
[140]
뉴스
(대구이야기) 대구 친일거두 '박짝때기'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06-01-23
[141]
뉴스
"정신감정 의뢰, 친일파 박중양씨"
경향신문
1957-10-23
[142]
뉴스
"朴重陽氏 起訴猶豫(大邱)"
동아일보
1957-12-07
[143]
서적
부끄러운 문화답사기
실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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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민영휘 등 친일파 재산 257억 국가귀속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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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달성과 가산산성, 국가사적다운 대구의 대표 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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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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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민영휘 등 친일파 재산 257억 국가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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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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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외식경영 2008년 5월호:통권 제40호
푸드미학
2008
[148]
서적
대한제국관원이력서
국사편찬위원회
1971
[149]
서적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2004
[150]
신문
평양관찰사 박중양씨는 본이 양주군 퇴리로 적인 시세하야 도득관찰터니....
대한매일신보
1907-12-06
[151]
간행물
월간문학 35권 제3호
월간문학사
2003
[152]
서적
조선시대 대구의 모습과 사람 1권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2
[153]
서적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
2003
[154]
서적
한국 근대사와 의병투쟁
중명출판사
2007
[155]
뉴스
유치환이 노래하고 이중섭이 소를 그린 그곳
https://news.naver.c[...]
한겨레
2009-10-30
[156]
서적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157]
서적
통일 한국의 땅 이야기
동연
1995
[158]
서적
통일 한국의 땅 이야기
동연
1995
[159]
서적
조지훈: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3
돌베개
2003
[160]
서적
조지훈: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3
돌베개
2003
[161]
뉴스
정영진의 대구이야기-(5)대구 친일거두 '박짝때기'
http://www.imaeil.co[...]
대구매일신문
2006-01-23
[162]
뉴스
[문화칼럼] 大邱城(대구성)을 짓자
http://www.imaeil.co[...]
대구매일
2012-09-07
[163]
서적
친일, 그 과거 와 현재
아세아문화사
1994
[164]
서적
한국근대 서양의학 교육사
청년의사
2008
[165]
서적
한국근대 서양의학 교육사
청년의사
2008
[166]
서적
민족문제연구 9권
민족문제연구소
1996
[167]
서적
민족문제연구 9권
민족문제연구소
1996
[168]
서적
민족문제연구 9권
민족문제연구소
1996
[169]
서적
권력변환: 한국언론117년사, 1883-2000
인물과사상사
2000
[170]
뉴스
中學期成會 創立 大邱儒林 中心으로
조선일보
1939-06-29
[171]
서적
민족문제연구 9권
민족문제연구소
1996
[172]
뉴스
京城의 赤痢 발생, 경성의 적리병이 발생해, 여름이 왔으니 조심할 일
매일신보
1913-06-14
[173]
뉴스
박중양씨 입건 '이 대통령'의 명예훼손 혐의
동아일보
1957-09-15
[174]
서적
한국문학과 언어의 이해
학문사
1997
[175]
간행물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76]
뉴스
영남제일관 원래위치에 완벽복원을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10-09-11
[177]
서적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178]
간행물
신인간 338호 (1976년 7월호)
신인간사
1976
[179]
서적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180]
서적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181]
뉴스
동산언덕에 대구100년 근대사 오롯이
http://www.idaegu.co[...]
대구신문
201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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