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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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예직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용천군수, 중추부첨지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했으며, 허균을 비호하고 인목왕후 폐위에 반대하다 파직되기도 했다. 인조반정 이후 포상을 받았으나 그 해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의헌이다. 그의 가계는 분성 김씨이며, 광해군의 외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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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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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예직 |
한자 이름 | 金禮直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조선 경기도 수원 |
본관 | 김해(金海) |
종교 | 유교(성리학) |
출생일 | 1565년 |
사망일 | 1623년 (59세) |
아버지 | 김희철(金希哲) |
어머니 | 안동 권씨 부인(安東 權氏 夫人) |
친인척 | 광해군 이혼(생질) |
형제 | 공빈 김씨(누이) 김의직(남동생) |
국가 | 조선 |
직책 | 무관 |
직업 | 무관 |
2. 생애
1565년(명종 20년) 10월 11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같은 해 문음으로써 관직에 천거되고 이듬해 1593년(선조 26) 무과에 급제한 뒤, 1604년 평안도 용천군수(龍川郡守)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정3품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가 되었다.
1616년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 兵馬節度使가 되어 부임하였다가 탐학한 행위가 많다 하여 삭출되고, 뒤에 재기용되어 포도대장(捕盜大將)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하였다.
그 사이 모역죄로 처형된 허균을 비호하였다 하여 탄핵받았고, 1618년에는 조카 광해군이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위하려 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외숙이기도 한 그는 임금에게 죄를 청하였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大北派)의 무고로 여러 차례 관직에서 물러난 사실이 확인되어 오히려 포상을 받았는데 그 해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의헌(毅憲)이다.
2. 1. 출생과 가계
김예직의 증조부는 분성군 김영정(盆城君 金永貞)의 아들 김세균(金世鈞)이고, 증조모는 진주 강씨(晉州 姜氏)로 강이행(姜利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종수(金從壽)이고, 할머니는 하동 정씨(河東 鄭氏)로 정승우(鄭承祐)의 딸이다. 아버지는 해령부원군 김희철(海寧府院君 金希哲)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로 권장(權璋)의 딸이다.부인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복흥수(復興守) 이몽은(李夢殷)의 딸이다. 장남은 김수온(金守溫)이고 며느리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이며, 손자는 김대성(金大聲)이다. 차남은 김수량(金守良)이고 며느리는 원주 이씨(原州 李氏)이며, 손자는 김대형(金大亨)과 백부 김수온에게 출계한 김대성(金大聲)이다. 또한 성후술(成後述)에게 출가한 손녀가 있고, 서손으로 김대율(金大律)이 있다. 삼남은 김수검(金守儉)이고 며느리는 청해 이씨(靑海李氏)이며, 손자는 김대임(金大任)이다. 그 외에 심가(沈榎), 오정위(吳挺緯)에게 출가한 손녀가 있고, 서손으로 김대정(金大鼎), 김대현(金大鉉)과 신세기(愼世基)에게 출가한 서손녀가 있다. 딸은 한익명(韓翼明)에게 출가하였다.
김예직에게는 여러 누나가 있었는데, 이민병(李民秉), 박윤(朴潤)에게 출가한 누나가 있었다. 또한 공빈 김씨(恭嬪 金氏)는 제14대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 진(臨海君 珒)과 제15대 광해군 혼(光海君 琿)의 어머니였다. 그 외에도 성준(成準), 이준(李壿), 박건(朴楗), 남간(南侃), 박진남(朴震男), 하순(河淳)에게 출가한 누이들이 있었다.
2. 2. 임진왜란과 관직 생활
1565년(명종 20년) 10월 11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같은 해 문음으로써 관직에 천거되고 이듬해 1593년(선조 26) 무과에 급제한 뒤, 1604년 평안도 용천군수(龍川郡守)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정3품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가 되었다.
1616년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 兵馬節度使가 되어 부임하였다가 탐학한 행위가 많다 하여 삭출되고, 뒤에 재기용되어 포도대장(捕盜大將)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하였다.
그 사이 모역죄로 처형된 허균을 비호하였다 하여 탄핵받았고, 1618년에는 조카 광해군이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위하려 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외숙이기도 한 그는 임금에게 죄를 청하였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大北派)의 무고로 여러 차례 관직에서 물러난 사실이 확인되어 오히려 포상을 받았는데 그 해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의헌(毅憲)이다.
2. 3. 광해군 시대와 인조반정
김예직은 1565년(명종 20년) 10월 11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종군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같은 해 문음으로써 관직에 천거되었고, 1593년(선조 26) 무과에 급제하였다. 1604년 평안도 용천군수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정3품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1616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였다가 탐학한 행위가 많다 하여 삭출되었다. 이후 재기용되어 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그 사이 모역죄로 처형된 허균을 비호하였다 하여 탄핵받았고, 1618년에는 조카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폐위하려 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외숙이기도 한 그는 임금에게 죄를 청하였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의 무고로 여러 차례 관직에서 물러난 사실이 확인되어 오히려 포상을 받았는데 그 해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의헌(毅憲)이다.
3. 가계
김예직의 증조부는 분성군 김영정(盆城君 金永貞)의 아들 김세균(金世鈞)이며, 증조모는 진주 강씨(晉州 姜氏)로 강이행(姜利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종수(金從壽), 할머니는 하동 정씨(河東 鄭氏)로 정승우(鄭承祐)의 딸이다. 아버지는 해령부원군 김희철(海寧府院君 金希哲),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로 권장(權璋)의 딸이다.
김예직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혼인하였는데,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복흥수(復興守) 이몽은(李夢殷)의 딸이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의 사이에서 김수온(金守溫), 김수량(金守良), 김수검(金守儉)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 김수온(金守溫)은 창녕 성씨(昌寧 成氏)와 혼인하여 아들 김대성(金大聲)을 두었다. 차남 김수량(金守良)은 원주 이씨(原州 李氏)와 혼인하여 김대형(金大亨)과 김대성(金大聲)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김대성(金大聲)은 백부 김수온에게 출계하였다. 김수량(金守良)은 서자 김대율(金大律)도 두었다. 삼남 김수검(金守儉)은 청해 이씨(靑海李氏)와 혼인하여 김대임(金大任)을 비롯한 여러 자녀를 두었다. 김예직의 딸은 한익명(韓翼明)에게 출가하였다.
김예직에게는 여러 명의 누나가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민병(李民秉), 박윤(朴潤)에게 출가한 누이와, 제14대 선조(宣祖)의 후궁 공빈 김씨(恭嬪 金氏)가 있다. 공빈 김씨(恭嬪 金氏)는 임해군 진(臨海君 珒)과 제15대 광해군 혼(光海君 琿)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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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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