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다 마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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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시다 마사타카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야구 평론가이다. 선수 시절에는 강견을 바탕으로 포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곤약 타법'으로 주전 자리를 굳혔다.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 연속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며 팀을 대표하는 포수로 활약했다. 지도자로서 긴테쓰 버펄로스를 2001년 퍼시픽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를 2009년 리그 우승, 2009년 일본 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으로도 활동했으며, 현재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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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다 마사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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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953년 8월 4일() |
출생지 | 시마네현 하마다시 |
신장 | 178 |
체중 | 80 |
포지션 | 포수 / 감독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 1971년 ()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2위 |
첫 출장 | 1972년 7월 2일 |
마지막 출장 | 1988년 10월 19일(더블헤더 제2경기) |
선수 경력 | |
선수 | 긴테쓰 버펄로스(1972 – 1988)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감독 및 코치 | 긴테쓰 버펄로스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993 – 2004)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8 – 2011)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16 – 2018) |
타격 성적 | |
타율 | .254 |
안타 | 874 |
타점 | 439 |
감독 기록 | |
감독 성적 | 805–776–31 |
승률 | .509 |
수상 내역 | |
수상 | 6× NPB 올스타 (1979 - 1981, 1983, 1985, 1986) 4×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979 - 1981, 1983) 3× 베스트 나인 (1979 - 1981) |
2. 선수 시절
1971년 고시엔 대회에 춘계, 하계 연속으로 출전했지만 모두 1차전에서 패했다.[6][7] 같은 해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긴테쓰 버펄로스에 2순위로 입단했다.
1972년 프로 1년차부터 강한 어깨를 무기로 1군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8월부터 주전 포수로 기용되어 52경기에 선발 출장했고, 1974년에는 개막전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115경기에 출장했다.[5]
1975년 아리타 슈조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양팔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독특한 타격폼인 ‘곤약 타법’(コンニャク打法일본어)을 개발하여 승부에 강한 타격을 보여주며 다시 주전 포수 자리를 되찾았다.[5] 1977년부터 2년간은 아리타와 함께 번갈아 가며 출전했다.
1979년 주전 포수 자리를 탈환, 규정 타석에는 3타석 부족했지만 긴테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일본 시리즈 6차전에서 오노 유타카에게서 2점 홈런을 쳤으나, 팀은 "에가와의 21구" 때문에 패했다.
1980년 리그 2연패에 기여했는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3안타를 기록하는 등 활약했지만 이후 1안타에 그치며 팀은 일본 시리즈에서 패했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 규정 타석(403타석)에 14타석이 부족했지만, 시리즈 종료 후 열린 3경기에 모두 1번 타자로 출전하여 15타석을 채워 첫 규정 타석 (19위, 타율 .292)을 달성했다.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 연속 베스트 나인과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재의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긴테쓰의 리그 2연패(1979년, 1980년) 당시 주전 포수였지만, 당시 에이스였던 스즈키 게이시는 "(성격이 좋고, 투수를 띄워주는) 네 미트는 불이 안 붙어"라고 말했고, 반대로 악처 타입인 아리타를 좋아하여 대부분의 경기에서 아리타와 배터리를 이루었다.[10] 반대로 이모토 타카시는 나시타를 지명했다.[11]
1986년 이후 어깨와 타격이 예전같지 않아 야마시타 가즈히코, 후루쿠보 겐지, 미쓰야마 히데카즈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1987년 오프 시즌에는 오른쪽 어깨 수술과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지만, 오기 아키라 감독의 만류로 다음 해에도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12]
1988년 같은 나이인 후키이시 도쿠이치와 함께 35세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역 마지막 안타는 ‘10.19’ 더블헤더 1차전에서 때린 결승 적시타였다. 또한 같은 날 2차전에서는 연장 10회 말에 마지막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2. 1. 프로 입단 전
시마네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1년 춘계·하계 고시엔 대회에 연속으로 출전(제43회 선발 대회, 제53회 선수권 대회)했지만 모두 1차전에서 패했다.[6][7] 같은 해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했다.하마다 시립 제1 중학교에 입학한 후,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키가 큰 순서로 3번째였던 나시다는 강제로 포수를 맡게 되었다. 중학교 야구부 1년 선배로는 미사와 준이 있다.[5]
시마네현립 하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가을부터 포수로 활약했다. 1970년 춘계 중국 대회 현 예선 결승에 진출했지만, 고쓰 공업의 미사와 준에게 막혀 패했다. 같은 해 여름 시마네 대회 준결승에서 야스기 고등학교에 패했다.
1971년에는 4번 타자로 춘·하계 고시엔에 출장했다. 봄의 선발 대회 1회전에서 사카이데 상업에 3-4로 패했다.[6] 여름의 선수권 대회 1회전에서 이케다 고등학교에 4-5로 패했다.[7] 같은 해 고교 일본 선발 하와이 원정에 미즈타니 히로아키, 오카 요시로 등과 함께 참가했다. 당시 집에서 가까운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팬이었고, 카프로부터 드래프트 지명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8] 드래프트 회의에서 긴테쓰 버팔로스로부터 2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2. 2. 긴테쓰 시절
드래프트에서 2위로 긴테쓰에 입단한 나시다 마사타카는 프로 1년차인 1972년부터 강한 어깨를 무기로 1군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8월부터 주전 포수로 기용되어 52경기에 선발 출장했고, 1974년에는 개막전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115경기에 출장했다.[5]1975년에는 아리타 슈조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타석에서 양팔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독특한 타격폼인 일명 ‘곤약 타법’(コンニャク打法일본어)을 개발하여 승부에 강한 타격을 보여주며 다시 주전 포수 자리를 되찾았다.[5] 1977년부터 2년간은 아리타와 함께 번갈아 가며 출전했다.
1979년에는 주전 포수 자리를 탈환하여 규정 타석에는 3타석 부족했지만, 긴테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6차전에서 오노 유타카에게서 2점 홈런을 쳤으나, 팀은 "에가와의 21구" 때문에 패했다.
1980년에도 리그 2연패에 기여했는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3안타를 기록하는 등 활약했지만 이후 1안타에 그치며 팀은 일본 시리즈에서 패했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 규정 타석(403타석)에 14타석이 부족했지만, 시리즈 종료 후 열린 3경기에 모두 1번 타자로 출전하여 15타석을 채워 첫 규정 타석 (19위, 타율 .292)을 달성했다.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 연속 베스트 나인과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재의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등 긴테쓰를 대표하는 포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긴테쓰의 리그 2연패 당시(1979년과 1980년) 주전 포수였지만, 당시 에이스였던 스즈키 게이시는 나시다에게 "(성격이 좋고, 투수를 띄워주는) 네 미트는 불이 안 붙어"라고 말했고, 반대로 악처 타입인 아리타를 좋아하여 대부분의 경기에서 아리타와 배터리를 이루었다.[10] 반대로 이모토 타카시는 나시타를 지명했다.[11]
1986년 이후에는 어깨와 타격이 예전같지 않아 야마시타 가즈히코, 후루쿠보 겐지, 미쓰야마 히데카즈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1987년 오프 시즌에는 오른쪽 어깨 수술과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지만, 오기 아키라 감독의 만류로 다음 해에도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12]
1988년에 같은 나이인 후키이시 도쿠이치와 함께 35세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역 마지막 안타는 ‘10.19’ 더블헤더 1차전에서 때린 결승 적시타였다. 또한 같은 날 2차전에서는 연장 10회 말에 마지막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2. 2. 1. 아리나시 콤비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시절부터 아리타 슈조와 함께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시다와 아리타는 ‘'''아리나시 콤비'''’(ありなしコンビ일본어)라고 불렸다. 당시에는 “두 명 모두 다른 구단에 가면 주전은 틀림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13] 시즌이 끝나면 긴테쓰에 “둘 중 한 명을 트레이드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아리타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아리나시 콤비’의 성공 이후, 여러 포수를 함께 기용하는 방식은 긴테쓰 전술의 특징이 되었고, 1985년 나시다 이후 긴테쓰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포수는 한 명도 없었다.2. 2. 2. 후쿠모토 유타카와의 대결
프로 1년차부터 강한 어깨를 무기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타격에서는 침체를 겪었던 나시다는 후쿠모토 유타카의 도루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후쿠모토가 1루에 있을 때 미리 오른쪽 다리를 빼고 준비를 하고, 투구를 잡은 후 글러브 안의 공을 오른손으로 빼내 송구하는 것이 아니라 글러브로 공을 뒤로 받아 넘겨 그대로 오른손으로 포구하여 송구 시간을 단축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나시다는 후쿠모토가 누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5할이 넘는 도루 저지율을 기록했다.[5]2. 3. 10.19
현역 생활 마지막 안타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의 명승부로 꼽힌 ‘10.19’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때린 결승 적시타였다.[14]3. 지도자 시절
1993년에 1군 작전 코치 겸 배터리 코치로서 친정팀인 긴테쓰에 복귀했고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긴테쓰 2군 감독을 거쳐 2000년에 1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고바야시 시게루, 마유미 아키노부와 함께 긴테쓰 백화점 CF에 출연하여 긴테쓰 노선의 역내 포스터와 전동차 내부의 열차 광고로 등장했고 모로조프의 화이트 데이 이미지 캐릭터로도 활동했다.[19]
감독 취임 첫 해인 2000년에는 최하위(6위)로 끝났지만, 이듬해 2001년에는 긴테쓰 구단 역사상 4번째이자 구단으로서의 마지막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전년도 최하위 팀에서 우승을 달성한 사례는 1975년 최하위에서 다음 해 1976년에 우승한 나가시마 시게오가 이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래의 기록이다. 2001년 일본 시리즈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1승 4패로 패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후 2002년에는 2위, 2003년에는 3위를 기록하며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긴테쓰에서 한 시즌 이상을 맡은 역대 16명의 감독 중에서 통산 성적에서 승수가 많은 감독은 미하라 오사무, 니시모토 유키오, 오기 아키라, 나시다 등 4명이다.
언행이 부드럽고 농담을 좋아하는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긴테쓰 2군 감독 시절에 낫아웃 상황에서 벤치에 글러브를 벗어 내팽개친 마에카와 가쓰히코를 때려 눕힌 적도 있었다.
긴테쓰 감독 시절, 외국인 선수에 대한 사전 평가와 실제 결과가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2000년 개막전 선발 투수였던 밥 월코트는 3승 4패, 평균자책점 6점대의 초라한 성적으로 1년 만에 방출되었고, 2001년 스프링 캠프에서 “15승은 기대할 수 있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윌 플린트는 1승도 올리지 못한 채 시즌 도중에 방출되었다. 타자 중에서는 “부머 웰스와 닮았다”라고 극찬한 프레디 가르시아는 타율 1할 대, 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중반에 팀을 떠났고, “대단한 투수가 왔다”라고 평가한 케빈 번도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긴테쓰가 2001년에 우승할 당시에는 숀 버그만이나 제레미 파웰의 활약이 있었지만, 이들은 구단 어드바이저였던 토미 라소다의 추천으로 입단했다.
2004년 시즌 중, 나시다는 그 해를 마지막으로 긴테쓰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되어 소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 전날, 나시다는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모두 가슴을 펴며 플레이를 해라. 너희가 붙이고 있는 등번호는 모두 긴테쓰 버펄로스의 영구 결번이다.
오릭스와의 합병 당시, 긴테쓰의 색깔을 남기기 위해 배려한 오릭스 측은 나시다에게 수석 코치를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당시 오릭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오기 아키라의 만류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나시다는 어디까지나 '긴테쓰의 나시다'로서 유니폼을 벗는 것을 원했고, 긴테쓰 구단이 해체되기 전인 10월 15일부로 팀을 떠났다. 오기는 나시다의 입장을 이해했고, 나시다 본인도 은사 중 한 명인 오기의 힘이 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3. 1. 긴테쓰 코치·감독
1993년에 1군 작전 코치 겸 배터리 코치로서 친정팀인 긴테쓰에 복귀했고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긴테쓰 2군 감독을 거쳐 2000년에 1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나시다는 고바야시 시게루, 마유미 아키노부와 함께 긴테쓰 백화점 CF에 출연하여 긴테쓰 노선의 역내 포스터와 전동차 내부의 열차 광고로 등장했고 모로조프의 화이트 데이 이미지 캐릭터로도 등장했다.[19]감독 취임 1년째인 2000년에는 최하위(6위)로 끝났지만 이듬해 2001년에는 긴테쓰 구단 역사상 4번째이자 구단으로서의 마지막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전년도 최하위 팀에서 우승을 달성한 사례는 1975년 최하위에서 다음해 1976년에 우승한 나가시마 시게오가 이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래의 기록이다. 2001년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상대 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와카마쓰 쓰토무 감독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으나, 1승 4패의 성적으로 우승에는 실패했다. 2002년에는 2위, 2003년은 3위를 기록하며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긴테쓰에서 한 시즌 이상을 맡은 역대 16명의 감독 중에서 통산 성적에서 승수가 많은 감독은 미하라 오사무, 니시모토 유키오, 오기 아키라, 나시다 등 4명이다.
- 언행이 부드럽고 농담을 좋아하는 온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긴테쓰 2군 감독 시절에 낫아웃 상황에서 벤치에 글러브를 벗어 내팽개친 마에카와 가쓰히코를 때려 눕힌 적도 있었다.
- 긴테쓰 감독 시절, 외국인 선수에 대한 사전 평가와 실제 결과가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2000년 개막전 선발 투수였던 밥 월코트는 3승 4패, 평균자책점 6점대의 초라한 성적으로 1년 만에 방출되었고, 2001년 스프링 캠프에서 “15승은 기대할 수 있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윌 플린트는 1승도 올리지 못한 채 시즌 도중에 방출되었다. 타자 중에서는 “부머 웰스와 닮았다”라고 극찬한 프레디 가르시아는 타율 1할 대, 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중반에 팀을 떠났고 “대단한 투수가 왔다”라고 평가한 케빈 번도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긴테쓰가 2001년에 우승할 당시에는 숀 버그만이나 제레미 파웰의 활약이 있었지만, 이들은 구단 어드바이저였던 토미 라소다의 추천으로 입단했다.
3. 1. 1. 2004년 긴테쓰 구단 합병
2004년 시즌 중, 나시다는 그 해를 마지막으로 긴테쓰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되어 소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 전날, 나시다는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 가슴을 펴며 플레이를 해라. 너희가 붙이고 있는 등번호는 모두 긴테쓰 버펄로스의 영구 결번이다.
오릭스와의 합병 당시, 긴테쓰의 색깔을 남기기 위해 배려한 오릭스 측은 나시다에게 수석 코치를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당시 오릭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오기 아키라의 만류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나시다는 어디까지나 '긴테쓰의 나시다'로서 유니폼을 벗는 것을 원했고, 긴테쓰 구단이 해체되기 전인 10월 15일부로 팀을 떠났다. 오기는 나시다의 입장을 이해했고, 나시다 본인도 은사 중 한 명인 오기의 힘이 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3. 2. 닛폰햄 감독

나시다 마사타카는 닛폰햄 감독을 맡은 적은 없지만, 2011년 10월 16일 한신 타이거스가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의 퇴임과 함께 차기 감독 후보로 나시다의 이름을 거론했다.[19] 그러나 구단은 와다 유타카 1군 타격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키면서 나시다는 초빙되지 않았다.
2015년 11월, 나시다가 라쿠텐 감독으로 취임했을 당시 캠프에서 우치다 야스히토에게 현역 시절 자신의 '곤약 타법'을 전수해준 에피소드가 있다. 나시다 감독은 캠프에서 우치다의 타격을 보고 "버릇이 있다"는 이유로 타법을 전수해 주었다.[36]
3. 3. 라쿠텐 감독
나시다 마사타카는 닛폰햄 감독 시절(2010년 5월 13일)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취임 첫 해에는 선수들의 특징과 기술 등 선수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파악하는 데 힘썼다.[37]
- 선수들을 여러 상황에서 시험하고 검증하는 선수 기용을 했다.[37]
- 어떤 경기 방식이 가장 적합한지 방침을 정했다.[37]
과거 긴테츠, 니혼햄 감독 시절 모두 2년 차에 우승하여 "취임 2년 차에는 우승한다"는 징크스가 있었다.[37] 그러나 라쿠텐의 2년 차에는 이 "징크스"가 실현되지 않았다.
4. 야구 평론가 시절
1989년에 NHK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되어 긴테쓰에 복귀할 때까지 맡았다.[1] 같은 해 월드 시리즈 취재를 위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홈구장인 오클랜드 알라메다 카운티 콜리세움을 방문했을 때 로마 프리에타 지진이 일어나 현지 피해 상황을 보도하는 리포터를 맡기도 했다.[1] 1990년과 1991년에는 NHK 종합 텔레비전의 스포츠 뉴스 프로그램 《선데이 스포츠》의 사회를 맡았다.[1]
2012년부터는 NHK 야구 해설위원과 닛칸 스포츠 신문 서일본의 전속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선데이 스포츠》에 부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1] 같은 해부터 ‘조지아혼’상의 심사위원도 맡았다.[1]
5. 상세 정보
2015년 10월 8일, 오쿠보 히로모토 감독이 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군 감독으로 발탁되었다.[38] 나시다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등번호 '''99'''번을 선택했다.
2018년에는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 시절처럼 시미즈 마사지를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로 영입했다.[39] 같은 해 5월 2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승리하며 감독 통산 800승을 달성했으나, 시즌 초반부터 팀이 부진을 겪었고, 결국 6월 16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패배한 후 성적 부진(21승 1무 41패, 최하위)을 이유로 감독직에서 사임했다.[40]
2018 시즌 후 라쿠텐 감독에서 물러난 나시다는 2019년에 NHK 야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으며, 동시에 오사카 닛칸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5. 1. 수상·타이틀 경력
- 베스트 나인 : 3회(1979년 ~ 1981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4회(1979년 ~ 1981년, 1983년)
- 올스타전 MVP : 1회(1983년 2차전)
연도 | 구단 | 포수 | ||||
---|---|---|---|---|---|---|
시합 | 기도수 | 허도루 | 도루자 | 저지율 | ||
1972 | 킨테츠 | 1 | 1 | 1 | 0 | .000 |
1973 | 60 | 47 | 28 | 19 | .404 | |
1974 | 115 | 86 | 52 | 34 | .395 | |
1975 | 45 | 20 | 11 | 9 | .450 | |
1976 | 45 | 16 | 8 | 8 | .500 | |
1977 | 77 | 57 | 35 | 22 | .386 | |
1978 | 53 | 30 | 16 | 14 | .467 | |
1979 | 108 | 69 | 32 | 37 | .536 | |
1980 | 102 | 48 | 25 | 23 | .479 | |
1981 | 98 | 80 | 47 | 33 | .413 | |
1982 | 67 | 50 | 27 | 23 | .460 | |
1983 | 82 | 76 | 47 | 29 | .382 | |
1984 | 70 | 56 | 38 | 18 | .321 | |
1985 | 114 | 104 | 77 | 27 | .260 | |
1986 | 77 | 64 | 44 | 20 | .313 | |
1987 | 27 | 13 | 8 | 5 | .385 | |
1988 | 25 | 5 | 5 | 0 | .000 | |
통산 | 1166 | 822 | 501 | 321 | .391 |
- '''굵은 글씨'''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5. 2. 개인 기록
- 베스트 나인: 3회 (1979년 ~ 1981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4회 (1979년 ~ 1981년, 1983년)
- 올스타전 MVP: 1회 (1983년 제2전)
5. 2. 1. 첫 기록
梨田 昌孝|나시다 마사타카일본어는 1972년부터 1988년까지 긴테쓰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다음은 선수 시절의 기록을 나타낸 표이다.
연도 | 구단 | 포수 | ||||
---|---|---|---|---|---|---|
시합 | 기도수 | 허도루 | 도루자 | 저지율 | ||
1972 | 긴테쓰 | 1 | 1 | 1 | 0 | .000 |
1973 | 60 | 47 | 28 | 19 | .404 | |
1974 | 115 | 86 | 52 | 34 | .395 | |
1975 | 45 | 20 | 11 | 9 | .450 | |
1976 | 45 | 16 | 8 | 8 | .500 | |
1977 | 77 | 57 | 35 | 22 | .386 | |
1978 | 53 | 30 | 16 | 14 | .467 | |
1979 | 108 | 69 | 32 | 37 | .536 | |
1980 | 102 | 48 | 25 | 23 | .479 | |
1981 | 98 | 80 | 47 | 33 | .413 | |
1982 | 67 | 50 | 27 | 23 | .460 | |
1983 | 82 | 76 | 47 | 29 | .382 | |
1984 | 70 | 56 | 38 | 18 | .321 | |
1985 | 114 | 104 | 77 | 27 | .260 | |
1986 | 77 | 64 | 44 | 20 | .313 | |
1987 | 27 | 13 | 8 | 5 | .385 | |
1988 | 25 | 5 | 5 | 0 | .000 | |
통산 | 1166 | 822 | 501 | 321 | .391 |
- '''굵은 글씨'''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5. 2. 2. 기록 달성 경력
연도 | 소속팀 | 직책 | 비고 |
---|---|---|---|
1993년 ~ 1995년 | 긴테쓰 버펄로스 | 1군 작전 겸 배터리 코치 | |
1996년 ~ 1999년 | 긴테쓰 버펄로스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 2군 감독 | |
2000년 ~ 2004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 감독 | |
2008년 ~ 2011년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감독 | |
2013년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 야수 종합 코치 | |
2016년 ~ 2018년 6월 16일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감독 | 2018년 5월 25일 감독 통산 800승 달성[38], 2018년 6월 16일 성적 부진으로 사임[40] |
1989년 ~ 1992년, 2005년 ~ 2007년, 2012년 ~ 2015년, 2019년 ~ | NHK | 야구 해설위원 | |
2005년 ~ 2007년, 2012년 ~ 2015년 | 닛칸 스포츠 | 야구 평론가 |
5. 2. 3. 기타
2015년 10월 8일, 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한 오쿠보 히로모토의 후임으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군 감독으로 발탁되었다.[38] 등번호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99'''번으로 정했다.2018년에는 닛폰햄 시절처럼 하마다 고교 후배인 시미즈 마사지를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로 불렀다.[39] 같은 해 5월 2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승리하며 감독 통산 800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시즌 개막 이후 팀은 침체를 겪었고, 6월 16일 한신전에서 패배한 뒤 성적 부진(21승 1무 41패, 최하위)을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40]
2018시즌을 마치고 라쿠텐 감독에서 퇴임한 후 2019년에 NHK 야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동시에 오사카 닛칸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베스트 나인: 3회 (1979년 ~ 1981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4회 (1979년 ~ 1981년, 1983년)
- 올스타전 MVP: 1회 (1983년 제2전)
연도 | 구단 | 경기 | 기도 | 허도루 | 도루자 | 저지율 |
---|---|---|---|---|---|---|
1972 | 킨테츠 | 1 | 1 | 1 | 0 | .000 |
1973 | 60 | 47 | 28 | 19 | .404 | |
1974 | 115 | 86 | 52 | 34 | .395 | |
1975 | 45 | 20 | 11 | 9 | .450 | |
1976 | 45 | 16 | 8 | 8 | .500 | |
1977 | 77 | 57 | 35 | 22 | .386 | |
1978 | 53 | 30 | 16 | 14 | .467 | |
1979 | 108 | 69 | 32 | 37 | .536 | |
1980 | 102 | 48 | 25 | 23 | .479 | |
1981 | 98 | 80 | 47 | 33 | .413 | |
1982 | 67 | 50 | 27 | 23 | .460 | |
1983 | 82 | 76 | 47 | 29 | .382 | |
1984 | 70 | 56 | 38 | 18 | .321 | |
1985 | 114 | 104 | 77 | 27 | .260 | |
1986 | 77 | 64 | 44 | 20 | .313 | |
1987 | 27 | 13 | 8 | 5 | .385 | |
1988 | 25 | 5 | 5 | 0 | .000 | |
통산 | 1166 | 822 | 501 | 321 | .391 |
- '''굵은 글씨'''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5. 3. 등번호
梨田 昌孝일본어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연도 | 소속팀 | 등번호 |
---|---|---|
1972년 ~ 1973년 | 시마네 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 52 |
1974년 ~ 1988년 | 8 | |
1993년 ~ 2004년 | 73 | |
2008년 ~ 2011년 | 88 | |
2016년 ~ 2018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99[38] |
나시다 마사타카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감독으로 발탁되었을 때, 자신의 희망에 따라 등번호 '''99'''번을 사용했다.[38]
5. 4. 등록명
- '''52''' (1972년 - 1973년)
- '''8''' (1974년 - 1988년)
- '''73''' (1993년 - 2004년)
- '''88''' (2008년 - 2011년)
- '''99''' (2016년 - 2018년)[38]
5. 5.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팀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4사구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
1972 | 긴테쓰 | 9 | 3 | 2 | 0 | 0 | 0 | 0 | 0 | 0 | 0 | .667 | .667 | .667 |
1973 | 60 | 142 | 28 | 2 | 0 | 2 | 5 | 0 | 4 | 20 | .197 | .224 | .254 | |
1974 | 115 | 247 | 48 | 10 | 0 | 2 | 18 | 4 | 22 | 41 | .194 | .274 | .259 | |
1975 | 45 | 69 | 11 | 2 | 0 | 2 | 9 | 0 | 7 | 15 | .159 | .235 | .275 | |
1976 | 48 | 48 | 13 | 1 | 1 | 3 | 10 | 1 | 5 | 13 | .271 | .352 | .521 | |
1977 | 80 | 190 | 47 | 5 | 0 | 0 | 10 | 2 | 8 | 29 | .247 | .287 | .274 | |
1978 | 58 | 120 | 32 | 4 | 2 | 7 | 30 | 2 | 9 | 15 | .267 | .321 | .508 | |
1979 | 114 | 357 | 97 | 14 | 0 | 19 | 57 | 4 | 25 | 44 | .272 | .322 | .471 | |
1980 | 118 | 360 | 105 | 26 | 2 | 15 | 55 | 0 | 27 | 58 | .292 | .343 | .500 | |
1981 | 106 | 374 | 102 | 16 | 0 | 17 | 48 | 3 | 29 | 47 | .273 | .327 | .452 | |
1982 | 91 | 279 | 81 | 8 | 0 | 10 | 35 | 0 | 22 | 42 | .290 | .340 | .427 | |
1983 | 111 | 313 | 84 | 14 | 0 | 8 | 42 | 1 | 35 | 37 | .268 | .341 | .390 | |
1984 | 84 | 241 | 60 | 9 | 2 | 7 | 29 | 3 | 22 | 26 | .249 | .321 | .390 | |
1985 | 118 | 373 | 92 | 15 | 3 | 11 | 51 | 4 | 32 | 46 | .247 | .310 | .391 | |
1986 | 79 | 199 | 43 | 8 | 0 | 6 | 25 | 0 | 17 | 27 | .216 | .281 | .347 | |
1987 | 35 | 64 | 15 | 5 | 0 | 2 | 7 | 3 | 4 | 19 | .234 | .271 | .406 | |
1988 | 52 | 65 | 14 | 2 | 0 | 2 | 8 | 1 | 6 | 13 | .215 | .282 | .338 | |
통산: 17년 | 1323 | 3444 | 874 | 141 | 10 | 113 | 439 | 29 | 274 | 492 | .254 | .312 | .399 |
5. 6.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 | 소속 팀 | 수비 경기 | 실책 | 도루 저지율 |
---|---|---|---|---|
1972년 | 긴테쓰 | 2 | 0 | - |
1973년 | 74 | 2 | .310 | |
1974년 | 115 | 8 | .333 | |
1975년 | 48 | 1 | .250 | |
1976년 | 34 | 2 | .154 | |
1977년 | 67 | 2 | .389 | |
1978년 | 71 | 1 | .355 | |
1979년 | 121 | 7 | .536 | |
1980년 | 124 | 11 | .447 | |
1981년 | 129 | 5 | .443 | |
1982년 | 117 | 4 | .340 | |
1983년 | 121 | 3 | .365 | |
1984년 | 110 | 4 | .311 | |
1985년 | 116 | 3 | .273 | |
1986년 | 63 | 2 | .300 | |
1987년 | 38 | 2 | .235 | |
1988년 | 31 | 0 | .200 | |
통산(17년) | 1381 | 57 | .355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기록.
5. 7.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
나시다 마사타카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2008~2011년)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16~2018년)의 감독을 역임했다. 닛폰햄 감독 시절인 2009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라쿠텐 감독 시절인 2017년에는 팀을 창단 최초로 3위에 올려놓았다.2016년 5월 17일 오릭스전에서 지연 행위로 퇴장당했다.[25] 9월 6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승리하며 NPB 통산 19번째로 감독 700승을 달성, 기념 플레이트와 위닝볼을 선물받았다.[26]
2018년 5월 2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승리하며 감독 통산 800승을 달성했으나, 6월 16일 한신 타이거스전 패배 후 성적 부진(21승 41패 1무)으로 사임했다.[28][29]
5. 7. 1. 정규 시즌
2008년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4년 만에 현장으로 복귀했다. 2007년 11월 25일에 삿포로 돔에서 열린 닛폰햄 팬 페스티벌에서 전임 감독이던 트레이 힐만으로부터 나시다에게 등번호 '''88'''번을 계승하는 행사가 열렸다. 취임 1년째의 시즌에는 3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스테이지에서는 오릭스 버펄로스를 누르고 2연승을 기록하여 제2스테이지에 진출했지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게 2승 4패(리그 우승 팀에게 줄 수 있는 어드벤티지를 포함한다)로 패하면서 일본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1]닛폰햄 감독 2년째인 2009년에는 팀을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긴테쓰 감독 시절인 2001년에 리그 우승을 이끈 이후 8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정규 시즌 종료 후에 열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1 스테이지 상대 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접전 끝에 승리했고 삿포로 돔에서 가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제2 스테이지에서도 4승 1패(리그 우승 팀에게 줄 수 있는 어드벤티지를 포함한다)의 성적을 기록하며 일본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현역 시절을 포함해서 네 번째로 출전하게 된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상대했지만 2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1]
그 해 1월, 1군 투수 코치였던 고바야시 시게루가 심부전으로 사망했고 긴테쓰 감독 시절인 2004년에 2군 타격 코치였던 스즈키 다카히사도 급성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다. 이후 정규 시즌에서는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성적 부진이 잇따르면서 팀은 침체되었고 결국 B클래스(4위 ~ 6위)에 해당되는 4위로 끝나 닛폰햄은 5년 만에 B클래스를 기록하여 시즌을 마쳤다.[1]
개막전 상대인 세이부와의 2연전(삿포로 돔)에서 연패를 당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4월에는 10승 5패의 성적을 남기며 극복하는 등 순조로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시즌 전반기에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2강 구도를 형성해 선두 경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시즌 종반인 9월에 6승 1무 18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선두 소프트뱅크와의 17경기 반차이가 되는 2위로 시즌을 마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 스테이지에서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상대했지만 시즌 종반에 부진했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어 결국 2연패를 당했다. 시즌 종료가 1개월 여를 앞둔 시점에서 일부 언론에서는 나시다의 향후 거취에 대한 관심이 쏠렸고 나시다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9월 15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2011년 시즌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1]
5. 7. 2. 포스트 시즌
200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4년 만에 현장으로 복귀했다. 취임 첫 해에는 3위를 기록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에서 오릭스 버펄로스를 2연승으로 꺾고 2스테이지에 진출했으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2승 4패(리그 우승팀 어드밴티지 포함)로 패했다.[19]2009년에는 닛폰햄을 2년 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스테이지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꺾고, 2스테이지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4승 1패(리그 우승팀 어드밴티지 포함)로 꺾고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2승 4패로 패했다.[19]
2010년에는 주력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팀이 침체되어 4위로 시즌을 마감, 5년 만에 B클래스(4~6위)를 기록했다.
2011년에는 시즌 전반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선두 경쟁을 벌였으나, 9월에 6승 1무 18패로 부진하며 최종 2위로 시즌을 마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에서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2연패를 당했다.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19]
2017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구단 최초로 3위를 달성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세이부를 2승 1패로 꺾고 퍼스트 스테이지를 돌파했지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소프트뱅크에 2승 4패로 패했다.
2018년 5월 2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 승리로 감독 통산 800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6월 16일 한신 타이거스전 패배로 21승 41패 1무, 최하위로 부진하자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사임했다.[28][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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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gles manager Masataka Nashida steps down
https://www.japantim[...]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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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gles promote interim manager Yosuke Hiraishi to mana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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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田監督=ナッシー」定着しない問題 カネシゲタカシの『ぷぷぷぷプロ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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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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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プロ野球監督 プロ野球解説者 梨田昌孝インタビュ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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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宮清純 「名将が流儀を語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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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本隆 近鉄のリーグ連覇に大きく貢献した右腕/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野球コ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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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田昌孝氏 とても大切な“昭和最後の1日”/連載 - プロ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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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鉄バファローズを探して、近鉄歴代監督16人の肖像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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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弓・梨田「男前対決」 阪神、30日から日ハム戦 - スポ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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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ァイターズ50年史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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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鉄監督時代の2004年にも、二軍打撃コーチだった鈴木貴久を急性気管支炎で失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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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田監督、今季限り=日本ハム「後任は白紙」-プロ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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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事ドットコ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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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阪神 来季監督に梨田昌孝氏招へい 真弓監督が後を託す人物としては最適
https://www.spon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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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ベースボー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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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ジャパン 監督、コー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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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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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侍ジャパン 監督、コーチ背番号決定のお知らせ
http://www.npb.or.jp[...]
20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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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個々の能力を引き出しながら、ひとつの目標に向かう」梨田昌孝監督 就任会見
https://www.rakutene[...]
[24]
뉴스
楽天 1軍バッテリーコーチに古久保氏 梨田新監督の右腕に
https://www.spon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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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楽天・梨田監督、遅延行為で退場…5分以上抗議続ける
http://www.sanspo.co[...]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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楽天うっぷん晴らしの10得点 西武に初の勝ち越し - 野球
https://www.nikkan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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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楽天が元ロッテ・清水雅治コーチ招聘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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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監督人事に関するお知らせ
https://www.rakutene[...]
[29]
문서
残り80試合は一軍ヘッド兼打撃コーチの平石洋介が監督代行として指揮を執った。
[30]
뉴스
梨田昌孝氏がコロナ陽性 重度の肺炎で集中治療室に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新聞社
2020-04-01
[31]
뉴스
梨田氏が退院「一命取り止めた」コロナで50日闘病
https://www.nikkansp[...]
2020-05-20
[32]
뉴스
梨田昌孝氏が2回連続PCR陰性 不整脈で入院継続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新聞社
2020-05-07
[33]
트윗
【お帰りなさい】
2020-10-04
[34]
웹사이트
プチ鹿島が11月のスポーツ新聞を切る! 梨田監督と力道山の偉大さを考える。
http://number.bu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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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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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楽天・梨田監督にオコエ激怒事件の真相を直撃!
https://news.yahoo.c[...]
THE PAGE
2017-02-10
[36]
뉴스
熱血梨田塾開講!楽天・内田に“こんにゃく打法” 伝授
https://www.sanspo.c[...]
サンケイスポーツ
201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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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OBが語る楽天快進撃の理由とは?梨田監督の3度目“2年目V”へ根拠あり
https://sports.yahoo[...]
スポーツナビ
20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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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個々の能力を引き出しながら、ひとつの目標に向かう」梨田昌孝監督 就任会見
http://www.rakutenea[...]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공식 홈페이지
2015-10-08
[39]
뉴스
楽天が元ロッテ・清水雅治コーチ招聘
도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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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監督人事に関するお知らせ
https://www.rakutene[...]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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