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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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녹색 행진은 1975년 11월 6일, 모로코가 서사하라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 약 35만 명의 비무장 모로코인을 동원하여 서사하라로 진입시킨 대규모 시위이다. 모로코는 스페인령 사하라가 역사적으로 모로코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 의견 발표 전에 "조국의 재통합"을 명분으로 녹색 행진을 조직했다. 행진 이후 모로코는 군대를 서사하라 북동부에 주둔시켰고, 스페인과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하여 서사하라를 분할 점령했다. 현재까지 서사하라의 지위는 해결되지 않은 채, 폴리사리오 전선과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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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모로코 - 마드리드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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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행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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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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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녹색 행진 |
갈등 | 서사하라 분쟁의 일부 |
날짜 | 1975년 11월 6일 |
장소 | 스페인령 사하라 |
원인 | 모로코의 영토 침공 |
결과 | 마드리드 협정 |
영토 변경 | 스페인이 영토에서 철수하고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부분적으로 점령 |
교전 세력 | |
지휘관 1 | 후안 카를로스 1세}}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 |
지휘관 2 | 하산 2세 아흐메드 오스만 (정치인) |
병력 규모 1 | 스페인 군단 5,000명 |
병력 규모 2 | 민간인 350,000명 군인 25,000명 |
부대 1 | Tropas Nómadas 부대 제3 및 제4 군단의 경 기병 그룹 카나리아 보병 연대 50의 원정 대대 |
부대 2 | 모로코 왕립군 |
관련 정보 | |
캠페인 | 히스패닉-모로코 분쟁 |
분쟁의 일부 | 서사하라 분쟁 |
2. 역사
녹색행군은 서사하라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 과정에서 모로코가 주도한 대규모 시위 행진이다. 모로코는 역사적으로 서사하라가 자국 영토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며, 1975년 스페인의 식민 통치 종식 시점에 해당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당시 모리타니 역시 영유권을 주장했고, 알제리의 지원을 받는 폴리사리오 전선은 사하라위족의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2]
모로코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서사하라에 대한 역사적 권리 확인을 요청했다. 1975년 10월 16일, ICJ는 판결에서 과거 모로코 술탄과 일부 사하라위 부족 간의 법적 유대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영토 주권을 의미하지 않으며 서사하라 주민에게 자결권이 있다고 명시했다.[3]
그러나 하산 2세 모로코 국왕은 ICJ 판결 중 역사적 유대 관계 부분만을 근거로 삼아, 판결 직후 서사하라를 "모국과 재결합"시키기 위한 '녹색행군'을 조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ICJ가 강조한 자결권 원칙과는 다른 행보였다. 이후 모로코군은 알제리의 개입 가능성에 대비하고 폴리사리오 전선에 대응하기 위해 1975년 10월 31일 서사하라 북동부 지역으로 진입했다.[4]
2. 1. 선사 시대
(내용 없음)2. 2. 고대
모로코 지역의 고대사는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의 기간을 포함한다. 이 시기에는 카르타고와 로마 제국의 지배 또는 영향을 받았으며, 지역 왕국인 모리타니아와 로마 속주인 모리타니아 팅기타나가 존재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엑사르키트 시기를 거쳤다.2. 3. 이슬람 시대
1975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서사하라 문제에 대한 자문 의견에서, 과거 모로코 술탄과 일부 사하라위 부족 사이에 역사적인 법적 유대 관계가 존재했음을 인정했다.[3] 이는 모로코의 이슬람 시대 통치자들이 남쪽의 사하라 지역 부족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ICJ는 이러한 관계가 스페인 식민지화 시점에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의 영토 주권을 입증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3]2. 4. 근세 시대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근세 시대'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음.2. 5. 프랑스-스페인 보호령 시대 (1912-1956)
1912년 페스 조약 체결 이후 모로코는 프랑스 보호령과 스페인 보호령으로 분할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모로코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이에 맞서 모로코인들은 자이안 전쟁과 리프 전쟁 등 여러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탕헤르는 탕헤르 의정서에 따라 탕헤르 국제 지구로 설정되어 여러 열강의 공동 관리하에 놓이는 독특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유럽 열강의 지배에 대한 반발은 꾸준히 이어졌으며, 결국 모로코 독립의 중요한 배경이 된 국왕과 국민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2. 6. 독립 이후
모로코는 서사하라 북쪽에 위치하며, 오랫동안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모로코의 중요한 일부였다고 주장해왔다. 남쪽의 모리타니 역시 이 지역이 자국 영토라고 유사하게 주장했다. 1973년부터는 알제리의 지원을 받는 폴리사리오 전선이 이끄는 사하라위 게릴라전이 스페인의 통치에 도전했다. 1975년 10월, 스페인은 엘 아윤과 알제에서 반군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권력 이양 협상을 시작했다.[2]모로코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 (ICJ)에 판결을 요청했고, 1975년 10월 16일 판결이 내려졌다. ICJ는 일부 사하라위 부족과 모로코 술탄 사이에 역사적 법적 유대 관계가 있었으며, 모리타니와 다른 사하라위 부족 사이에도 토지 관련 권리를 포함한 관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3] 그러나 ICJ는 스페인 식민지화 당시 서사하라와 모로코 또는 모리타니 사이에 영토 주권 관계는 없었다고 명확히 했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의 관계가 두 국가의 병합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신 법원은 원주민인 사하라위 주민들이 자결의 권리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이는 영토의 미래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스페인, 모로코, 모리타니와의 통합, 분할 또는 독립)이 무엇이든 간에, 해당 지역 주민들의 명시적인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UN 방문단 역시 ICJ 판결 하루 전인 10월 15일, 사하라위 주민들의 독립 지지가 "압도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하산 2세 모로코 국왕은 ICJ 판결 중 과거 모로코와 사하라위 간의 충성 관계 언급만을 강조하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고, 법원이 강조한 자결권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7년 후, 그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 앞에서 국민투표 실시에 공식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ICJ 판결이 발표된 지 몇 시간 후, 하산 2세는 서사하라를 "모국과 재결합"시키기 위해 "녹색행군"을 조직하겠다고 발표했다.
알제리의 군사적 대응 가능성에 대비하여 모로코군은 1975년 10월 31일, 서사하라 지역의 북동쪽으로 진입했다. 이곳에서 모로코군은 당시 2년 된 독립 운동 단체인 폴리사리오 전선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4]
3. 서사하라 분쟁
서사하라는 북서아프리카의 분쟁 지역으로, 모로코가 대부분을 실효 지배하고 있으나 폴리사리오 전선이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SADR)의 이름으로 독립을 주장하며 알제리 틴두프에 망명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분쟁은 스페인 식민 통치 말기인 1970년대 초반 시작되었다. 모로코는 역사적 권리를 내세워 서사하라 영유권을 주장했고, 남쪽의 모리타니도 유사한 입장이었다. 반면, 사하라위 원주민들은 1973년 결성된 폴리사리오 전선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16] 스페인 철수를 앞둔 1975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모로코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 과거 일부 부족과의 관계는 인정하나 영토 주권은 없으며, 사하라위 주민에게 자결권이 있다고 판결했다.[3][17]
그러나 모로코의 하산 2세 국왕은 ICJ 판결 직후 약 35만 명의 시민을 동원한 녹색행군을 감행했다.[5] 정치적 혼란 속 스페인은 모로코, 모리타니와 마드리드 협정을 맺고 행정권을 넘겨주었다.[11] 모로코는 북부 2/3, 모리타니는 남부 1/3을 점령했으나, 폴리사리오 전선은 무장 투쟁을 지속했다. 모리타니는 1979년 영유권을 포기했고, 모로코는 이 지역까지 추가 점령했다.
1991년 유엔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고, MINURSO가 파견되어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투표 자격 문제 등으로 국민투표는 현재까지 실시되지 못하고 있다. 모로코는 자치안을 제시했지만, 폴리사리오 전선과 알제리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하고 있어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과거 식민 종주국 스페인은 최근 모로코의 자치안 지지로 입장을 변경하여 국제적인 논란을 낳기도 했다.[13]
3. 1. 녹색 행진 (1975)
모로코는 오랫동안 서사하라가 역사적으로 자국의 중요한 일부라고 주장해왔다. 반면 남쪽에 위치한 모리타니 역시 해당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1973년부터 알제리의 지원을 받는 폴리사리오 전선이 이끄는 사하라위 게릴라전은 스페인의 통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75년 10월, 스페인은 엘 아윤과 알제에서 폴리사리오 지도부와 비밀리에 권력 이양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 외무장관 페드로 코르티나 이 마우리는 알제에서 폴리사리오 지도자 엘 왈리를 만나기도 했다.[2]모로코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문제를 제소하여 자국의 주장을 입증하려 했다. 1975년 10월 16일, ICJ는 자문 의견을 통해 과거 일부 사하라위 부족과 모로코 술탄 사이에 법적 유대 관계가 있었으며, 모리타니와 다른 사하라위 부족 사이에도 토지 관련 권리를 포함한 관계가 존재했음을 인정했다.[3] 그러나 ICJ는 스페인 식민지화 시점에 서사하라 영토와 모로코 또는 모리타니 사이에 영토 주권을 나타내는 관계는 없었다고 명확히 밝혔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의 관계가 모로코나 모리타니의 영토 병합 주장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신 ICJ는 서사하라 원주민인 사하라위 주민들이 자결의 권리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이는 영토의 주권 문제(스페인 잔류, 모로코 또는 모리타니와의 통합, 분할, 독립 등)에 대한 정치적 해법이 무엇이든, 해당 지역 주민들의 명시적인 동의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ICJ 판결 발표 하루 전인 10월 15일, 유엔 방문단은 사하라위 주민들의 독립 지지가 "압도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모로코의 국왕 하산 2세는 ICJ 판결 중 모로코와 사하라위 부족 간의 과거 관계 언급만을 강조하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고, 사하라위 주민의 자결권에 대한 법원의 판결 내용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7년 후, 그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 앞에서 국민투표 실시에 형식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ICJ 판결이 발표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하산 2세는 서사하라를 "모국과 재결합"시키기 위해 "녹색 행진"을 조직하겠다고 발표했다.

녹색 행진은 매우 대규모로 기획되고 널리 홍보된 대중 시위였다. 1975년 11월 6일, 약 35만 명의 비무장 모로코인[5](일부 자료에 따르면 모로코 공군의 공중 지원이 동반되었다)이 모로코 남부 도시 타르파야에 집결하여 하산 2세 국왕의 신호를 기다렸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서사하라의 사기아 엘 함라 지역으로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모로코 국기와 쿠란을 흔들었고, "모로코 사하라의 반환"을 요구하는 현수막과 국왕의 사진, 쿠란을 들고 있었다. 행진의 명칭에 사용된 '녹색'은 이슬람의 상징색을 의미했다. 행진 대열이 국경에 도달했을 때, 스페인군은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페인군은 또한 사전에 매설했던 지뢰 지대를 제거하기도 했다.
한편, 모로코는 행진과 동시에 잠재적인 알제리의 군사적 반격에 대비하고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모로코군을 서사하라 북동부 지역에 진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모로코군은 이미 2년 동안 독립 운동을 벌여온 폴리사리오 전선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4]
3. 2. 마드리드 협정 (1975)
녹색 행군은 스페인을 정치적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스페인을 36년간 통치했던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병세가 위중했으며, 정부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22] 스페인군은 서사하라 주둔 병력 면에서 모로코군보다 군사적, 물류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나, 스페인 정부는 모로코와의 분쟁이 아프리카에서의 공개적인 식민지 전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다. 이는 프랑코 체제의 정당성을 위협하고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었다. 불과 1년 전 포르투갈에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의 식민지 전쟁 부담 끝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무너진 선례가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코를 대신하여 국가 원수 대행을 맡은 후안 카를로스 1세 왕자와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 총리가 이끄는 스페인 정부는 식민지 문제에 깊이 관여하기를 꺼렸다. 결국 스페인은 전쟁을 피하고 서사하라 내에서의 이익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모로코와 직접 양자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비슷한 영유권을 주장하던 모리타니 역시 협상에 참여했다. 모로코의 압력으로 인해, 사하라위 원주민 대표들은 1975년 11월 14일 마드리드 협정으로 이어진 협상 과정에서 배제되었다.[11][22]
마드리드 협정은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분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협정 제3항에 따라 스페인은 사하라 주민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조건 하에 식민지 소유권을 모로코와 모리타니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11] 스페인은 부크라아 지역의 인산염 광산 지분 35%와 해상 어업권을 확보했으나, 모로코는 이후 이 권리를 제대로 존중하지 않았다.[12][23]
협정에 따라 모로코는 북부 지역인 사기아 엘 함라와 리오 데 오로의 약 절반을 공식적으로 병합했다. 모리타니는 남부 1/3을 티리스 알 가르비야라는 이름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1979년 8월, 모리타니는 해당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포기하고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SADR, 폴리사리오 전선)에 이 지역을 양도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즉시 모로코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럼에도 모리타니는 자국의 주요 항구인 누아디부의 안보를 위해 라 구에라 지역에 소규모 전초 기지를 유지했다.
알제리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폴리사리오 전선은 마드리드 협정을 거부하고, 사하라위 주민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권고적 의견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폴리사리오와 모로코 정부 간의 갈등은 격화되었으며, 이 분쟁은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1991년, 분쟁 해결을 위해 모로코와 폴리사리오 전선 간에 분쟁 해결 계획이 합의되어 휴전이 발효되었다. 이 계획은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를 목표로 했으며, 유엔은 휴전을 감시하고 국민투표를 조직하기 위해 MINURSO 평화 유지 임무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국민투표는 여러 차례 연기되었고 아직 실시되지 못하고 있다. 모로코는 2000년 국민투표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거부하고, 대신 모로코 주권 하의 서사하라 자치 안을 제기했지만, 이는 폴리사리오 전선 및 알제리에 의해 거부되었다. 모로코 정부에 따르면 해당 자치안은 2007년 4월에 유엔에 제시될 예정이었다.
스페인은 과거 식민 통치국으로서의 국제법적 책임과, 세우타, 멜리야 등지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로코와의 관계 유지 사이에서 복잡한 입장에 놓여 있다.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 이전까지 스페인 정부는 전통적으로 서사하라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유엔이 주관하는 국민투표 실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사파테로 행정부 하에서 스페인은 모로코의 입장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인 외무장관 트리니다드 히메네스는 2010년 의회 연설에서 이를 부인하며 양측 간의 합의를 지지한다고 밝혔으나, 2022년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모로코를 방문하여 스페인이 모로코의 자치 계획을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13]

3. 3. 모로코의 주장
모로코는 서사하라 북쪽에 위치하며, 역사적으로 이 영토가 모로코의 중요한 일부였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남쪽의 모리타니 역시 이 영토가 자국의 일부라고 유사하게 주장했다. 모로코 정부에 따르면, 모로코 국가의 주권 행사는 술탄에 대한 공식적인 충성 맹세를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충성은 스페인의 점령 이전 여러 세기 동안 존재했던 법적, 정치적 유대였다.[6][18] 모로코는 술탄 하산 1세가 1886년에 이 지역에 대한 외국의 침략을 종식시키고 여러 카이드와 카디에게 공식적으로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두 차례 원정을 수행한 사실[6], 조세 징수[7][19], 지역 관리(지사 및 군 장교) 임명[8][20] 등을 주권 행사의 증거로 제시했다. 또한 1861년 스페인, 1786년과 1836년 미국, 1856년 영국과의 조약 등 여러 국가와의 조약 체결 사실도 근거로 들었다.[9][10][21]모로코는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판결을 요청했다. 1975년 10월 16일, ICJ는 자문 의견을 통해 "일부, 그러나 일부" 사하라위 부족과 모로코 술탄 사이의 역사적 법적 관계, 그리고 모리타니와 다른 사하라위 부족 사이의 토지 관련 권리를 포함한 관계가 존재했음을 인정했다.[3][17] 그러나 ICJ는 스페인 식민지화 당시 서사하라 영토와 모로코 또는 모리타니 간의 영토 주권 관계는 없었으며, 이러한 과거의 관계가 두 국가의 병합 요구를 뒷받침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명확히 했다. 대신 법원은 원주민인 사하라위족이 자결권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이는 주권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이 무엇이든, 해당 영토 주민들의 명시적인 승인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ICJ 판결 발표 하루 전인 10월 15일, UN 방문단은 사하라위 주민들의 독립 지지가 "압도적"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하지만 모로코의 하산 2세 국왕은 ICJ 판결 중 과거 모로코와 사하라위 간의 충성 관계 언급만을 자신의 입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내세웠고, 자결권에 대한 법원의 중요한 판결 내용은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7년 후 아프리카 통일 기구 앞에서 국민투표에 공식적으로 동의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ICJ 판결이 발표된 지 몇 시간 만에 하산 2세는 서사하라를 "모국과 재결합"시키기 위해 녹색 행진을 조직하겠다고 발표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최종적으로 "모로코가 의존하는 내부적 또는 국제적 행위는 서사하라와 모로코 국가 간의 영토 주권에 대한 법적 유대의 존재 또는 국제적 인정을 관련 기간에 나타내지 않았다. 심지어 그 국가의 특정 구조를 고려하더라도, 그들은 모로코가 서사하라에서 효과적이고 배타적인 국가 활동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판시하며 모로코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았다.[3]
3. 4. 국제사회의 입장
모로코는 서사하라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문제를 제소했다. 1975년 10월 16일, ICJ는 과거 일부 사하라위 부족과 모로코 술탄 사이에 법적 유대가 있었으며, 모리타니와 다른 사하라위 부족 간에도 토지 관련 권리가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권고 의견을 발표했다.[3][17] 그러나 ICJ는 스페인의 식민지화 시점에 모로코나 모리타니가 서사하라에 대한 영토 주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명확히 밝혔다. 따라서 과거의 관계가 양국의 영토 병합 주장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판단했다. 대신 ICJ는 서사하라의 원주민인 사하라위 주민들이 자결권을 가지며, 영토의 최종 지위는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ICJ 판결 발표 하루 전인 10월 15일, 유엔 방문단은 사하라위 주민들이 "압도적으로" 독립을 지지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로코의 하산 2세 국왕은 ICJ 권고 의견 중 모로코와 사하라위 부족 간의 역사적 유대만을 강조하며 녹색 행군을 정당화했고, 사하라위 주민의 자결권에 대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녹색 행군은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사망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겪고 있던 스페인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스페인 정부는 서사하라에서 모로코와의 군사적 충돌이 전면적인 식민지 전쟁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했다. 이는 국내 정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었으며, 특히 1년 전 포르투갈에서 식민지 전쟁의 여파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붕괴된 사례는 스페인에게 큰 부담이었다. 결국 스페인은 전쟁을 피하고 자국의 경제적 이익(부크라 인산염 광산 채굴권, 어업권 등)을 일부 확보하기 위해 모로코, 모리타니와 직접 협상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사하라위 주민 대표는 배제되었고, 1975년 11월 14일 마드리드 협정이 체결되었다.[11] 이 협정에 따라 스페인은 서사하라의 행정권을 모로코와 모리타니에 넘겼지만, 협정에는 사하라 주민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페인은 인산염 광산 지분 35%와 어업권을 확보했으나, 모로코는 이후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12]
마드리드 협정 이후, 알제리의 지원을 받는 폴리사리오 전선은 협정을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계속했다. 유엔은 문제 해결을 위해 개입하여 1991년 분쟁 해결 계획을 통해 휴전을 이끌어냈고, 서사하라 국민투표를 위한 유엔 임무(MINURSO)를 파견하여 휴전 상황을 감시하고 독립 또는 통합을 묻는 주민투표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모로코의 반대로 주민투표는 현재까지 실시되지 못하고 있다. 모로코는 2000년대 들어 주민투표 대신 서사하라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서사하라 자치 계획을 제안했지만, 폴리사리오와 알제리는 이를 거부하며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스페인의 입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보였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정부는 서사하라 주민의 자결권을 존중하고 유엔의 주민투표 실시 노력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 문서에 따르면,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 재임 기간 중 스페인이 모로코의 자치안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스페인 정부는 이를 공식 부인했으나[13], 2022년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모로코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자치 계획을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13] 기존의 입장을 번복했다. 이는 국제법적 책임과 현실적인 외교 관계 사이에서 스페인이 겪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서사하라 문제 해결에 대한 국제 사회의 복잡한 입장을 반영한다.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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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san II lance la Marche ve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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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1
[6]
문서
ICJ, Reports 1975, p. 83. For more details, Cf. pp. 83-102. Cf. also individual opinion of Judge M. Forster. Idem p. 103 and Annex no. 7.
[7]
문서
ICJ, Western Sahara Pleadings, Arguments, Documents, Volume 111, Written Statements and Documents, pp. 205 to 497.
[8]
문서
'* Nomination Dahirs, dating back to the reign of Moulay Abdelaziz Bel Hassan, (Two Dahirs in 1886 and two in 1899), of Abdelhafid Bel Hassan (1907 and 1909), and Dahirs of El Hassan Ben Mohammed (1877 and 1886) of Abdelaziz Ben El H~Hassan (1901)'
[9]
문서
The treaties are the following: * Trading Treaty between Morocco and Spain in Madrid on 20 November 1861 * [[Moroccan–American Treaty of Friendship|Treaty of Friendship]] with the USA on 23 to 28 June 1786. * Treaty of peace and friendship between the USA and Morocco, signed in Meknes on 16 September 1856 * [[Anglo-Moroccan Accords]], 9 December 1856.
[10]
웹사이트
Historical Foundations of the Moroccanity of the Sahara
http://www.mincom.go[...]
Ministry of Communication, Morocco
2015-04-21
[11]
문서
Trilateral Agreement concluded exclusively between the Spanish, Moroccan and Mauritanian Governments, the text of which has been transmitted to the Secretary General of the UN on 18 November 1975. (Resolution 3458 (XXX) B. 10/12/197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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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ern Sahara Initiative
http://www.arso.org/[...]
Support Association to a free and fair referendum in Western Sa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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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s Sanchez visits Morocco, marking ‘new phase’ after Western Sahara re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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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san II lance la Marche ve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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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Neutrality or Complicity? The United States and the 1975 Moroccan takeover of the Spanish Sahara
Journal of North Afric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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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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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Western Sahara, Avisory Opinion - 16 October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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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2
[18]
문서
ICJ, Reports 1975, p. 83. より詳細にはpp. 83-102.およびM. Forster裁判官の個人意見についてIdem p. 103およびAnnex n° 7.を参照。
[19]
문서
ICJ, Western Sahara Pleadings, Arguments, Documents, Volume 111, Written Statements and Documents, pp. 205 to 497.
[20]
문서
"- Nomination Dahirs, dating back to the reign of His Majesty Moulay Abdelaziz Bel Hassan, (Two Dahirs in 1886 and two in 1899), of His Majesty Abdelhafid Bel Hassan (1907 and 1909).\n- Dahirs of His Majesty El Hassan Ben Mohammed (1877 and 1886) of His Majesty Abdelaziz Ben El H~Hassan (1901)"
[21]
문서
諸条約はそれぞれ1861年11月20日、マドリードで調印されたモロッコ=スペイン通商条約、1786年7月23日から28日の合衆国との条約、1856年9月16日メクネスで調印の合衆国=モロッコ平和友好条約、1856年12月9日の英=モロッコ協約である。
[22]
문서
三国間同意はスペイン、モロッコ、モーリタニアの政府間で締結され、当該文書は1975年11月18日、国連事務総長に送付された(Resolution 3458 (XXX) B. 10/12/1975)。
[23]
웹사이트
CLAIHR
http://www.arso.org/[...]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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