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신 (장갑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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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닛신은 1903년 일본 제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해군으로부터 구입한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이다.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베리아 출병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했으며,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활약했다. 1935년 퇴역 후 폐함으로 지정되었고, 1935년 10월 9일 46cm 포탄 실험 중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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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신 (장갑순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
함선 정보 | |
함선 이름 | 닛신 |
함선 종류 | 장갑순양함(일등 순양함) |
기공 | 1902년 3월 29일 |
진수 | 1903년 2월 9일 |
준공 | 1904년 1월 7일 |
소속 국가 | 일본 제국 |
![]() | |
건조 조선소 | 안살도 조선소(이탈리아 제노바) |
제적 | 1935년 4월 1일 |
최후 | 1936년 표적함으로 침몰, 이후 인양되어 다시 표적함으로 사용 (1942년 1월 18일) |
함급 | 가스가급 장갑순양함 |
제원 | |
배수량 | 7,700 톤 (영국 톤) |
전체 길이 | 111.73 미터 |
폭 | 18.71 미터 |
흘수 | 7.35 미터 |
깊이 | 12.1 미터 |
추진 방식 | 2축 |
주기관 | 직립 3단 팽창식 3기통 왕복 증기 기관 2기 |
보일러 | 원통형 보일러 석탄 전소 8기 |
출력 | 13,500 마력 |
속력 | 20.0 노트 |
항속 거리 | 10 노트에서 5,500 해리 |
승무원 | 600명 |
무장 | |
주포 | 45구경 20.3cm 연장포 2기 4문 |
부포 | 40구경 15.2cm 단장포 14문 |
기타 | 40구경 7.6cm 단장포 8문 QF 3파운드 호치키스 포 6문 45.7cm 수중 어뢰 발사관 4문 |
장갑 | |
수선대 | 70–150 mm |
갑판 | 20~40 mm |
버벳 | 100~150 mm |
사령탑 | 150 mm |
2. 역사
메이지 35년(1902년) 3월 29일, 아르헨티나가 발주한 장갑순양함 "모레노"가 이탈리아 안살도사에서 기공되었다. 이 함선은 메이지 36년(1903년) 2월 9일에 진수되었고, 같은 해 12월 30일 일본 해군이 구입하여 메이지 37년(1904년) 2월 2일 1등 순양함 '''닛신'''으로 명명되었다. 2월 7일 준공 후, 2월 16일 요코스카항으로 회항하여 제3함대에 배속되었다. 4월에는 가스가와 함께 뤼순항 공격에 참가했고, 이후 제3함대가 합류하면서 제5전대에 편입되었다. 6월 20일에는 제3함대 기함이 되었으며, 8월 10일에는 황해 해전에 참가했다.
메이지 38년(1905년) 1월, 닛신은 제1함대 제1전대 기함이 되었다.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 참가하여 활약했고, 7월 4일부터는 제3함대 제5전대에 소속되어 사할린 점령 작전에 참가했다. 메이지 39년(1906년) 11월 22일에는 다시 제1함대 기함이 되었다. 다이쇼 원년(1912년) 11월 18일, 승무원의 방화로 탄약고가 폭발하여 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49]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북태평양, 보르네오, 싱가포르, 남태평양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다이쇼 6년(1917년) 4월 29일부터는 제1특무함대에 소속되어 호주와 인도양에서 선단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다이쇼 7년(1918년) 11월 22일에는 제2특무함대에 소속되어 몰타 기지에서 지중해 선단을 호위한 후, 일본으로 회항하는 구독일 잠수함을 호위했다.
다이쇼 10년(1921년) 9월 1일, 닛신은 1등 해방함으로, 다이쇼 11년(1922년) 4월 4일에는 시베리아 출병으로 연해주 방면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쇼와 6년(1931년) 6월 1일에는 해방함으로 분류가 변경되었다.
쇼와 10년(1935년) 4월 1일, 닛신은 제적되어 폐함 제6호가 되었다. 이후 구레로 회항하여 가메가후치 발사 실험장에서 야마토급 전함용 46cm 포탄 실험에 사용되던 중, 함저에 명중한 포탄으로 인해 침수가 멈추지 않아 전복, 침몰했다.[50] 이후 후카다 해사 공업에 의해 인양되어 얕은 바다에 좌초 처리된 후 해체되었다.[51]
2. 1. 건조 배경 및 구입
러일 전쟁 발발 직전, 일본 제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해군으로부터 매입한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 2척 중 하나이다. 원래 아르헨티나 해군이 이탈리아 안살도사에 발주하여 건조되었으며, 당시 이름은 '모레노'였다.[1] 1903년 일본이 가스가와 함께 긴급 구매했다.[1] 러시아도 이 함선의 구매를 시도했으나,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의 중재로 일본에 매각되었다.[1]닛신은 1902년 3월 29일 "산 로카"라는 임시 명칭으로 기공되었고, 1903년 2월 9일 진수되어 아르헨티나 측에 의해 "마리아노 모레노"로 명명되었다.[6] 1903년 12월 30일 일본에 판매되었고,[7] 1904년 1월 1일 "닛신"으로 개명되었다. 닛신과 새로 개명된 자매함 "카스가"는 1월 7일 일본에 정식으로 취역되었다.[7]
일본 제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두 자매함에 대해 1530000GBP (14,937,390엔)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개입하여 이를 매입했다.[2] 이미 러시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일본 정부는 러일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뤼순항 해전에 대한 기습 공격을 함선들이 싱가포르를 떠나 다른 열강에 의해 지연되거나 억류될 수 없게 된 시점까지 늦추었다.[2]
2. 2. 러일 전쟁 참전
러일 전쟁 발발 직전, 일본 제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해군으로부터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 2척 중 하나인 '모레노'를 구입하여 '닛신'으로 명명했다. 닛신은 가스가와 함께 일본 해군이 구입했으며, 러시아 발틱 함대도 이 함을 구입하려 했으나 영국의 중재로 일본에 매각되었다.[9]처음에는 제3함대에 소속되어 뤼순 봉쇄에 참가했다. 뤼순 봉쇄 중 일본 해군은 기뢰로 인해 전함 2척(야시마, 하쓰세)을 상실했다.[14] 이후 닛신은 전함과 동등한 사거리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스가와 함께 제1함대 제1전대에 편입되어 주력함으로 활약했다.
1904년 황해 해전[18]과 1905년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여 큰 활약을 했다.[20] 특히 쓰시마 해전에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당시 다카노 이소로쿠)가 사관학교 생도로 승선하여 전투 중 포신 폭발로 중상을 입기도 했다.[23]
쓰시마 해전에서 닛신은 제1전대 기함으로, 한때 선두에 서기도 하며 많은 포격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해군 대령 마누엘 도메크 가르시아가 관전 무관으로 승선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41][42]
1906년 5월 10일 아이치현 아이치군의 가구야마(香久山), 하쿠야마(白山), 이와사키(岩崎) 세 마을이 합병했을 때, 닛신의 러일 전쟁에서의 활약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새 마을의 이름을 닛신이라 지었다.
2. 3. 1차 세계 대전 및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닛신은 북태평양, 보르네오, 싱가포르, 남태평양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49] 1917년 4월 29일부터는 일본 해군 제1특무함대 소속으로 호주, 인도양에서 연합군 선단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49]1918년 11월 22일, 닛신은 제2특무함대에 소속되어 몰타 기지에서 지중해 함대를 호위한 후, 일본으로 회항하는 독일 잠수함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49]

1921년 9월 1일, 닛신은 일등 해방함으로 분류가 변경되었다.[49] 1922년 4월 4일에는 시베리아 출병에 따라 연해주 방면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49] 1931년 6월 1일에는 해방함으로 분류가 다시 변경되었다.[49]
2. 4. 퇴역 및 최후
1935년 4월 1일 닛신은 제적되어 폐함 제6호로 지정되었다.[50] 1935년 10월 9일 구레로 회항하여 가메가후치 발사 실험장에서 야마토급 전함의 46cm 주포 포탄 실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실험 중 함저에 명중한 포탄 한 발로 인해 침수가 멈추지 않고 전복되어 침몰했다.[50]1935년 10월 12일, 후카다 해사 공업에 의해 인양된 후 얕은 바다에 좌초 처리되었고, 이후 해체되었다.[51]
3. 설계
''닛신''은 전장 111.73m, 선폭 18.71m, 형심 12.1m, 흘수 7.35m로, 표준 배수량은 7700ton이었다. 2개의 수직 삼팽창 증기 기관이 각각 1개의 샤프트를 구동했으며, 8개의 석탄 연소 스코치 해양 보일러에서 증기를 공급받았다. 최대 13500ihp 출력과 20kn 속력으로 설계되었으나, 1903년 11월 6일 해상 시운전에서 14896ihp 출력을 기록하며 20.15kn 속력을 달성했다. 10kn 속력으로 5500nmi의 항속 거리를 가졌으며, 승무원은 장교 포함 560명이었다.[3][4]
주무장, 부무장, 어뢰 발사관, 방호띠, 장갑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각 "특징", "무장", "장갑"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3. 1. 특징

''닛신''은 주세페 가리발디급의 마지막 함선으로 건조되었다. 전장은 111.73m, 선폭은 18.71m, 흘수는 7.35m였고, 표준 배수량은 7700ton이었다. 2기의 수직 3팽창 증기 기관과 8개의 석탄 연소 스코치 해양 보일러를 탑재하여 최대 13500ihp 출력으로 20kn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903년 11월 6일 해상 시운전에서는 14896ihp의 출력을 기록하며 20.15kn의 속력을 기록했다.[3] 10kn 속력으로 5500nmi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 승조원은 장교와 사병을 포함하여 560명이었다.[4]
주무장은 2연장 포탑에 장착된 4문의 약 20.32cm Type 41 포였으며, 상부 구조물 앞뒤에 배치되었다. 부무장인 10문의 속사(QF) 약 15.24cm Type 41 포 중 6문은 주 갑판의 선측 포곽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4문은 상부 갑판에 장착되었다. 또한 어뢰정 방어를 위해 10문의 QF 약 7.62cm Type 41 포와 6문의 QF 3-pounder (약 3.81cm) 호치키스 포를 장착했다. 양쪽에 2문씩 4문의 수중 약 45.72cm 어뢰 발사관도 장착되었다.[6]
함선의 수선 방호띠는 선체 중앙에서 최대 150mm 두께였으며, 선체 말단으로 갈수록 70mm로 얇아졌다. 주포 바벳 사이에는 상부 갑판까지 선체 전체 측면을 덮었다. 중앙 장갑 요새 끝부분은 120mm 두께의 횡단 격벽으로 덮여 있었다. 앞쪽 바벳, 함교, 포탑 역시 150mm 장갑으로 보호받았으며, 뒤쪽 바벳은 100mm 장갑으로 보호되었다. 갑판 장갑은 20mm 에서 40mm 두께였고, 상부 갑판의 6인치 포는 포 방패로 보호되었다.[5]
3. 2. 무장
닛신의 주무장은 2연장 포탑에 장착된 4문의 약 20.32cm Type 41 포로, 선수와 선미에 배치되었다. 부무장인 10문의 약 15.24cm Type 41 속사포 중 6문은 주 갑판의 선측 포곽에, 나머지 4문은 상부 갑판에 장착되었다. 닛신은 또한 어뢰정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10문의 약 7.62cm Type 41 포와 6문의 QF 3-pounder (약 3.81cm) 호치키스 포를 장착했다. 함선에는 양쪽에 2문씩 4문의 어뢰 발사관이 수중에 장착되었다.[6]3. 3. 장갑
함선의 수선 방호띠는 선체 중앙에서 최대 150mm 두께를 가지며, 선체 말단으로 갈수록 70mm로 얇아졌다. 주포 바벳 사이에는 상부 갑판까지 선체의 전체 측면을 덮었다. 중앙 장갑 요새의 끝부분은 120mm 두께의 횡단 격벽으로 덮여 있었다. 앞쪽 바벳, 함교, 포탑은 150mm 장갑으로 보호받았으며, 뒤쪽 바벳은 100mm 장갑만 있었다. 갑판 장갑은 20mm에서 40mm 두께였고, 상부 갑판의 약 15.24cm 포는 포 방패로 보호되었다.[5]4. 사건 사고
닛신은 1912년 11월 18일 승무원의 방화로 탄약고가 폭발하여 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탄약고 폭발 사고' 하위 문단 참조)
1905년 5월 27일에는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북태평양, 보르네오, 싱가포르, 남태평양 등지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28] 1914년 10월 12일에는 산다칸 인근 암초에 부딪혀 싱가포르에서 수리를 받기도 했다.[28] 1917년에는 인도양에서 연합군 선박 호위,[32] 1918년에는 지중해에서 연합군 수송 선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33]
1935년 4월 1일 제적되어 폐함 제6호가 되었다. 그해 10월 9일 구레로 회항하여 야마토급 전함의 46cm 포탄 실험에 사용되던 중 침몰했다.[35] 이후 인양되어 1942년 1월 18일, 무츠에 의해 18.1인치 포를 장착한 야마토의 표적으로 다시 사용되어 침몰했다.[38]
4. 1. 탄약고 폭발 사고
1912년 11월 18일, 훈련 및 관함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미즈항에 정박해 있던 장갑순양함 "닛신"에서 탄약고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43] 오후 6시 50분경 후부 8인치 포탑 부근에서 폭발이 일어났지만, 탄약고에 물을 채우는 등의 신속한 조치로 손상은 경미한 수준에 그쳤다.[43] 이 사고로 승무원 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43] "닛신"은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에 요코스카로 돌아갔고, 쓰쿠바 함장 스즈키 간타로 대좌를 위원장으로 하는 요코스카 진수부 조사위원회가 사고 조사를 진행했다.[44] 약 10일간의 조사 결과, 폭발 원인은 화약 자연 발화로 결론 내려졌으나,[45] 훗날 진실이 밝혀졌다. 1913년 8월 살인 사건을 일으킨 예비역 이등병조가 "닛신"의 탄약고를 폭발시켰다고 자백한 것이다.[46]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함장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함선을 폭파하려 했다.[46] 이후 예비역 이등병조는 1914년 7월 7일 마이즈루 진수부 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15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47][48] 이 사건은 해군형법 상 함선 파괴 미수죄로 사형이 집행된 유일한 사례이다.5. 기타
1906년 5월 10일 아이치현 아이치군의 가구야마(香久山), 하쿠야마(白山), 이와사키 (岩崎) 세 마을이 합병했을 때, 러일 전쟁에서 닛신의 활약과 공적을 기려 새 마을의 이름을 닛신 마을(현 닛신시)로 지었다.
아르헨티나 해군 대령이자 닛신의 건조 책임을 맡았던 마누엘 도메크 가르시아(Manuel Domecq García)는 관전 무관으로 닛신에 승함하여 러일 전쟁을 참관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전기》를 남겼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아르헨티나 해군 박물관에는 러일 전쟁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가르시아가 전쟁이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귀국해서 저술한 《러일 전쟁 관전 무관의 기록》(전 5권 1400 페이지)이 있다. 이 기록은 전투 현장 보고서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해군의 전략과 일본 국민이 러시아 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전쟁에 임했는지를 담고 있다. 오랫동안 기밀 자료로 아르헨티나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993년 해상자위대의 고미보쿠게 해상자위보(이후 해상자위 함대 사령관)가 연습함대 사령관으로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역사 자료관에서 이 기록을 발견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해군 관계자에게 쓰시마 해전 관련 자료를 일본에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고, 1998년에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41] 그 후, 쓰시마 해전 100주년에 해당하는 2005년에 그 증보·개정판[42]이 출판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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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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