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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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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방은 한국에서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커피를 비롯한 음료를 판매하는 영업소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현대적인 다방이 생겨났으며, 1923년 명동의 후타미, 충무로의 금강산과 같은 일본인 소유 다방이 등장했다. 1927년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최초의 다방인 카카두가 문을 열었다. 1950년대에는 종합 예술 공간으로 기능했으며, 1960년대 이후 여성 주인이 운영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1970년대에는 인스턴트 커피의 보급과 함께 고급화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커피 자동판매기 보급, 음료 고급화 등으로 인해 점차 쇠퇴했다. 21세기 초부터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티켓 다방'의 문제도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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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개요
종류음료 판매점
관련 용어별다방
역사
유래대한민국 고유의 카페 문화
특징커피 등 음료 판매
간단한 다과 판매
음악 감상
담소
기타
관련 용어다방 (영화)

2. 역사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한국이 서구 문화에 노출되면서 다방과 같은 형태의 영업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방은 한국 다례의 기원이 되었다. 8세기와 9세기에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다도가 성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 서민을 위한 다도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다도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1] 그러나 다도 문화는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대에는 다를 마시는 곳인 다원(茶院)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다실"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고려 시대에는 국가가 차, 술, 과일 등을 관리했다. 조선 시대에는 조상에 대한 전통 의례와 관련된 전통을 포함하는 조약이 있었고, 다례는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사용되었다. 인천에 외국인이 세운 대불호텔과 스튜어드 호텔과 관련된 카페들이 초기 다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대적인 기능과 스타일을 갖춘 다방은 1919년 3·1 운동 이후에 등장했다. 서울 최초의 호텔식 다방은 1902년 독일계 러시아인인 쏜탁 여사가 서울 정동에 지은 쏜탁호텔 안에 있었다. 이 호텔은 한국 주재 외국 외교관들을 위해 세워졌다.[2]

1923년경 현대적인 다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 명동의 "후타미"와 충무로의 "금강산"이라는 두 곳의 일본인 소유 다방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특히 후타미는 음식점이라기보다는 커피숍과 닮은 현대적인 다방의 형태를 취했다. 1927년 영화 제작자 이경손은 관훈동 입구에 "카카두"라는 다방을 열었다. 카카두는 한국인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으로 볼 수 있다. 1929년 종로2가에는 조선 YMCA 강당 근처에 "멕시코 카페"가 문을 열었고, 주인은 배우 김용규[3]와 심영이었다.[4]

명동의 러시아식 다방 "트로이카", 음악 다방 "에리사", 프랑스식 다방 "미모사", 독일식 다방 "빈", 매주 음악회로 유명한 "푸가로", 서울역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소로 이용되던 "돌체" 등이 다방 문화의 선구자들이다. 그 이후 다방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쇠퇴하기 시작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설탕과 커피 수입이 차단되면서 문을 닫았다. 8·15 광복과 6·25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이전 스타일의 다방은 점차 사라지고 상업적인 카페로 변모했다. 1953년 한국 전쟁 직후 문화 시설이 부족했던 시기에 다방은 종합 예술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1950년대 다례는 고급 실업자들의 집결지 역할을 하는 사회적 자선 대상이었다. 카카두 이후 명동과 같이 문화적 다방에서 상업적 다방으로 변모한 한아람, 아시아, 경성, 그래머 등 많은 카페들이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다방은 지식인 남성 주인 대신 여성 주인이 점원, 계산대, 요리사를 맡는 시스템으로 변모했다. 1970년대 이후 다방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차 맛보다는 상업적 만남의 편리함 때문에 다방을 찾았다. 사무실이 없는 고용주들도 다방 전화를 업무에 이용하고 다방에서 일하는 비서와 거래를 했다. 특히 1970년대 동서식품인스턴트 커피 생산으로 한국인들이 집에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다방은 점차 고급화되고 전문화되었다. 1970년대는 젊은 DJ들이 있는 음악 전문 카페가 유행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차, 높은 가격,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춘 다방들이 많았고 차 가격도 자율화되었다. 체인점 형태의 다방은 '난다랑', '00 갤러리' 등으로 시작되었고,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대도시에 심야 다방이 등장했다. 1990년대에는 커피 자동판매기의 보급, 음료의 고급화, 고급 다방의 증가로 다방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일부 카페는 "다방"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성매매를 하는 이른바 '티켓 다방'이 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하면서 다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퍼져 나갔다.

3. 현대

1975년 다도 제한이 해제된 이후 매년 다도 횟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다방의 수는 1992년 약 45,000개를 정점으로 1997년 외환 위기 이전에는 약 33,000개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IMF 위기 이후 다방의 수가 소폭 늘어났지만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는 못했다. 21세기 초부터 한국 전역의 커피숍 수는 급격히 감소했고, 국내외 브랜드 프랜차이즈와 같은 카페와 전문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4. 한국 사회와 다방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다방은 단순한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다양한 사회 계층이 교류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장소였다. 1923년명동의 "후타미"와 충무로의 "금강산" 같은 일본인 소유 다방이 생겨났고, 1927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다방 "카카두"가 문을 열었다.[2] 1929년에는 배우 김용규[3]와 심영[4]이 "멕시칸 카페"를 열었다.

1950년대에는 다방이 사회 고위층 실업자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다방은 여성 주인이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1970년대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다방들이 등장했다. 1970년대 동서식품인스턴트 커피 생산으로 다방은 고급화, 전문화되기 시작했고, 젊은 DJ들이 있는 음악 전문 카페가 유행했다.

1980년대에는 차 가격 자율화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차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춘 다방이 등장했다. 체인점 형태의 다방도 생겨났고,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심야 다방도 등장했다. 1990년대에는 커피 자동판매기 보급과 음료 고급화로 다방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지만, 일부는 "다방"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그러나 '티켓 다방'과 같은 불법적인 성매매 영업으로 인해 다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나기도 했다.[2]

4. 1. 사회·문화적 역할

다방은 단순한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다양한 사회 계층이 교류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장소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정치, 사회,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1923년명동의 "후타미"와 충무로의 "금강산" 같은 일본인 소유 다방이 생겨났고, 1927년에는 영화감독 이경손이 관훈동 입구에 한국인 최초의 다방 "카카두"를 열었다.[2] 1929년에는 종로2가에 배우 김용규[3]와 심영[4]이 "멕시칸 카페"를 열었다.

명동에는 러시아식 다방 "트로이카", 음악다방 "에리사", 프랑스식 다방 "미모사", 독일식 다방 "윈" 등 다양한 형태의 다방들이 생겨났다. 서울역 앞의 "돌체"는 만남과 이별의 장소로 유명했다.

1950년대에는 다방이 사회 고위층 실업자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카카두' 이후 '한가람', '아시아', '경성', '그래머' 등 문화 다방에서 상업 다방으로 변화해 갔다.

1960년대 이후 다방은 여성 주인이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1970년대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다방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차 맛보다는 만남의 편리함 때문에 다방을 찾았고, 사무실이 없는 고용주는 다방 전화를 업무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970년대 동서식품인스턴트 커피 생산으로 다방은 고급화, 전문화되기 시작했고, 젊은 DJ들이 있는 음악 전문 카페가 유행했다.

1980년대에는 차 가격 자율화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차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춘 다방이 등장했다. 체인점 형태의 다방도 생겨났고,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심야 다방도 등장했다. 1990년대에는 커피 자동판매기 보급과 음료 고급화로 다방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지만, 일부는 "다방"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그러나 '티켓 다방'과 같은 불법적인 성매매 영업으로 인해 다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나기도 했다.[2]

4. 2. 다방과 여성

1960년대 이후 다방은 여성 주인이 운영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 여성 주인은 면마담, 계산대, 요리사 등을 담당했다.[1] 1970년대부터 다방 객실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졌고, 사람들은 상업적인 만남을 위해 다방을 찾았다.[1] 사무실이 없는 고용주도 다방 전화를 업무용으로 활용해 다방에서 일하는 비서와 거래를 하기도 했다.[1]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티켓 다방'과 같이 매춘부를 운영하는 다방이 지방 곳곳에서 성행하면서 다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나기도 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Dado culture https://terms.naver.[...]
[2] 웹사이트 다방 茶房 http://100.nate.com/[...]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11-06-10
[3] 웹사이트 Lee Young-gyu https://web.archive.[...] 2018-06-14
[4] 웹사이트 Simyeong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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