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사다모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이라노 사다모리는 헤이안 시대의 무장으로, 935년 아버지 다이라노 구니카가 다이라노 마사카도와의 항쟁에 휘말려 사망한 후, 마사카도와 대립했다. 940년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등과 협력하여 마사카도를 토벌한 공로로 종5위상에 서임되었으며, 이후 진수부장군 등을 역임했다.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운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자손들은 간토 지방에서 유력한 무사 가문으로 성장했다. 《곤자쿠모노가타리슈》에는 그의 용맹함과 잔혹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989년 사망 - 장회황후
장회황후는 북송 진종의 황후로, 대명 출신 충무군 절도사 반미의 딸이며, 진종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고, 인종 때 시호가 개칭되었으며, 그녀의 생애는 역사 기록과 예술 작품에서 다르게 묘사된다. - 989년 사망 - 야른크네 (10세기)
- 히타치국 사람 - 마미야 린조
마미야 린조는 1775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나 홋카이도 이북 지역 측량, 사할린 섬 확인, 마미야 해협 발견 등 지도 제작에 기여하고 흑룡강 하구 탐사로 러시아 동향을 파악한 에도 막부의 탐험가이자 관리였다. - 히타치국 사람 - 사타케 요시시게 (1547년)
사타케 요시시게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용맹함으로 인해 '귀신 사타케'라는 이명을 얻었으며 히타치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문은 데와국 구보타번으로 감봉되었다. - 헤이시 - 노구치 히데요
노구치 히데요는 1876년 일본에서 태어나 2살 때 화상을 입었지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에서 매독과 황열병 연구를 수행하며 매독 스피로헤타를 발견하는 등 업적을 남겼지만 황열병으로 사망한 세균학자이다. - 헤이시 - 다이라노 기요모리
헤이안 시대 후기 무장이자 정치가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승리로 권력을 획득하고 무사 최초로 다이조다이진에 올랐으나, 권력 남용과 독재로 겐페이 전쟁을 초래하여 몰락, 그의 생애는 무사 사회 발전 기여와 폭력 및 독재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다이라노 사다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명 | 환무 평씨 구니카류(国香流), 반도 평씨 |
다른 이름 | 히사노 헤이타(常平太), 다이라 노 쇼군(平将軍) |
시대 | 헤이안 시대 중기 |
생애 | |
출생 | 917년?, 920년?, 911년? |
사망 | 989년? 또는 979년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
관직 | 좌마윤, 진수부장군, 히타치다이죠, 무쓰노카미, 단바노카미 |
가계 | |
아버지 | 다이라노 구니카 |
어머니 | 후지와라노 무라오의 딸?, 미나모토 마모루의 딸? |
형제 | 시게모리, 다이라노 가네토, 남자 |
배우자 | 세키구치노 사다노부의 딸 |
자녀 | 다이라노 고레마사, 다이라노 고레토시, 다이라노 고레히라, 헤구리노 도시카타의 아내 |
양자 | 다이라노 고레노부?, 다이라노 고레모토, 다이라노 고레모치, 다이라노 고레토모, 다이라노 고레토키, 다이라노 고레스케, 다이라노 다카히라?, 다이라노 고레타다?, 다이라노 나가모리?, 다이라노 가와치기미?, 다이라노 마사노리?, 다이라노 마사스미? |
기타 | |
![]() |
2. 생애
조헤이 5년(935년), 교토에서 사마노조(左馬允)로 재임하던 중, 아버지 다이라노 구니카가 사촌 다이라노 마사카도와의 항쟁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귀향한 사다모리는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들을 돌보았다. 초기에는 간토에서의 분쟁보다 교토에서의 출세에 관심이 있어 마사카도와의 화친을 모색했으나, 숙부 다이라노 요시카네의 설득으로 결국 마사카도와 대립하게 되었다.
항쟁은 마사카도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사다모리는 여러 차례 패배를 겪으며 덴교 2년(939년)에는 후견인이었던 요시카네마저 병사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덴교 3년(940년),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후지와라노 다메노리 등과 협력하여 마침내 마사카도를 '기타야마(北山) 결전'에서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16][11]
마사카도 토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종5위상(정5위상이라고도 함)에 서임되었으며, 이후 진수부장군에 임명되고 단바노카미와 무쓰노카미 등을 역임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종4위하의 관위에 올라 '다이라 쇼군(平將軍)'으로 불리기도 했다.[12]
일설에 따르면,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은 마사카도의 아버지 다이라노 요시마사가 진수부장군 시절 오슈 지역에서 구축한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었으며, 난 이후 사다모리가 이 기반을 계승하여 진수부장군에 임명되었다고 한다.[17][13] 사다모리의 활동을 기점으로 오우 지방의 전란 기록이 줄고 도호쿠 지방에 대한 정보가 증가했으며, 그와 혼인 관계로 맺어진 후지와라 씨 고이치조류(小一条流)가 4대에 걸쳐 무쓰노카미를 독점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17][13]
2. 1. 초기 생애와 아버지의 죽음
조헤이 5년(935년), 다이라노 사다모리는 교토에서 사마노조(左馬允)로 재임하고 있었다. 같은 해, 아버지 다이라노 구니카가 사촌 마사카도 및 외숙부(미나모토노 마모루) 등과의 항쟁에 휘말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은 사다모리는 조정에 휴가를 신청하고 급히 귀향했다. 그는 불타버린 자택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산속으로 피신했던 어머니와 아내를 찾아 데려왔다.처음에 사다모리는 항쟁의 발단이 외숙부들이 마사카도를 습격한 것이라 생각하여 마사카도를 비난하지 않았다. 또한 간토에서의 분쟁보다는 교토에서의 관인으로서 출세하기를 더 원했기 때문에,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아버지 구니카 사망 직후에는 그의 후임으로 히타치 다이죠(常陸大掾)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숙부인 요시카네가 결과적으로 마사카도의 행동 때문에 구니카가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설득하자, 사다모리는 결국 요시카네와 요시마사 등이 마사카도를 공격하는 데 가담하여 마사카도와 대립하는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2. 2. 마사카도와의 대립
조헤이 5년(935년), 다이라노 사다모리는 교토에서 사마노조(左馬允)로 재임 중이었다. 그해 아버지 구니카(國香)가 사촌 마사카도 및 외숙부들과의 항쟁에 휘말려 사망하자, 사다모리는 급히 휴가를 얻어 귀향했다. 그는 불타버린 집터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산으로 피신했던 어머니와 아내를 찾아왔다.당시 사다모리는 항쟁의 발단이 외숙부들이 마사카도를 습격한 것이라 여겨 마사카도를 비난하지 않았고, 간토에서의 분쟁보다는 교토에서의 관료 생활에 더 관심이 많아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아버지 구니카가 결과적으로 마사카도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숙부 요시카네(良兼)의 설득에 넘어가, 요시카네와 요시마사(良正) 등이 마사카도를 공격하는 데 가담하면서 마사카도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항쟁은 마사카도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조헤이 8년(938년), 사다모리는 몰래 교토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를 미리 알아챈 마사카도는 2월 29일 시나노국 지사가타군의 시나노 고쿠분지(信濃國分寺) 부근에서 사다모리를 공격했다. 사다모리는 시게노 쓰네나리(滋野恒成) 등과 함께 싸웠으나 패배했고, 마사카도의 추격을 피해 간신히 교토로 도망쳤다.
사다모리는 마사카도 추포를 명하는 관부(官符)를 받아 귀국하려 했지만, 조정은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덴교 2년(939년) 6월에는 후견인이었던 숙부 요시카네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같은 해 10월, 무쓰노카미(陸奥守)로 부임하는 다이라노 고레스케(平維扶)를 따라 무쓰국으로 가려 했으나 또다시 마사카도의 추격을 받아 도망쳐야 했고, 고레스케는 사다모리를 버리고 떠났다. 11월에는 히타치국에서 일어난 분쟁을 기회 삼아 마사카도를 공격하려 했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사촌인 후지와라노 다메노리(藤原爲憲)와 함께 몸을 숨겼다.
덴교 3년(940년), 사다모리는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 및 다메노리와 협력하여 마사카도를 공격했다. 2월 14일, '기타야마(北山) 결전'에서 마침내 마사카도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11][16] 마사카도 토벌 후 조정에서는 사다모리가 오랜 고난을 겪으며 모반인 토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종5위상(정5위상이라고도 함)의 관위를 내렸다.
2. 3. 마사카도의 난 진압
조헤이 8년(938년), 사다모리는 교토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를 미리 알아챈 마사카도에게 2월 29일 시나노국 지사가타군의 시나노 고쿠분지(信濃國分寺) 부근에서 공격당했다. 시게노 쓰네나리(滋野恒成) 등과 함께 싸웠으나 패배하고, 마사카도의 추격을 피해 가까스로 교토로 달아났다.사다모리는 마사카도 추포를 명하는 관부(官符)를 받아 귀국하려 했지만 조정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덴교 2년(939년) 6월에는 후견인이었던 숙부 요시카네가 병사했고, 10월에는 무쓰노카미(陸奥守) 다이라노 고레스케(平維扶)를 따라 무쓰국으로 가려 했으나 다시 마사카도의 추격을 받아 실패했다. 11월에는 히타치국에서의 분쟁을 이용해 마사카도를 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사촌인 후지와라노 다메노리(藤原爲憲)와 함께 몸을 숨겼다.
같은 해 12월, 마사카도는 스스로 "신황"(新皇)이라 칭했다. 덴교 3년(940년), 마사카도는 히타치국 북부에서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사다모리와 다메노리를 수색했지만 찾지 못하고, 대신 사다모리의 아내 등이 붙잡혔다. 마사카도는 이들을 풀어주고 수색을 중단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다모리는 어머니 쪽 외삼촌인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의 협력을 얻어 다메노리와 함께 4,000여 명의 병사를 모아 마사카도를 공격했다. 2월 14일, '기타야마(北山) 결전'에서 마침내 마사카도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16][11]
마사카도 토벌 이후 논공행상에서, 조정은 오랜 고난 끝에 마사카도를 토벌한 사다모리의 공로를 인정하여 종5위상(정5위상이라고도 함)에 서임했다.
2. 4. 진수부장군 임명과 이후 활동
덴교 3년(940년) 2월 14일,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후지와라노 다메노리 등과 협력하여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기타야마(北山) 결전"에서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16] 마사카도 토벌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오랜 기간 고난을 겪으며 마사카도 등 모반 세력을 토벌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종5위상(정5위상이라고도 함)에 서임되었다.이후 진수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단바노카미와 무쓰노카미를 역임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종4위하의 관위에 올라 '다이라 쇼군(平將軍)'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의 배경에는 마사카도의 아버지인 다이라노 요시마사(平良将)가 진수부장군 시절에 오슈 지역에서 확보한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17] 마사카도의 난 이후, 요시마사와 마사카도 부자가 가졌던 오슈 지역의 세력 기반은 사다모리에게 계승된 것으로 보이며[17], 이것이 그가 진수부장군으로 임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사다모리가 데키노사카마루(狄坂丸)에 대해 군사 활동을 벌인 것을 기점으로, 오우 지방에서의 전란 관련 기록은 줄어들고 도호쿠 지방에 대한 정보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또한 사다모리는 후지와라 씨의 고이치조류(小一条流)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이 가문은 이후 4대에 걸쳐 무쓰노카미 직책을 독점하기도 하였다.[17]
3. 가계
아버지는 다이라노 구니카이며,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무라오의 딸로 히데사토의 자매이다. 아내는 세키구치 사다노부의 딸이다.
장남으로 알려진 다이라노 고레노부는 실제로는 구교(公卿) 후지와라노 나리토키의 아들로서 사다모리의 양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12] 이로 인해 초기 적통(嫡流)은 차남 다이라노 고레마사의 계통으로 여겨진다. 고레마사의 자손들은 후대에 호조 씨와 구마가이 씨를 칭하게 되며, 넷째 아들 다이라노 고레히라는 이세 헤이시의 시조가 되어 훗날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배출하는 가문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다모리는 동생 시게모리(繁盛)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자인 고레토키(維時, 고레마사의 아들) 등 가까운 친족들을 양자로 삼아 가문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3. 1. 자손
사다모리의 장남 고레노부(다이라노 고레노부)는 본래 구교(公卿) 후지와라노 나리토키의 아들이었으나 사다모리의 양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12] 그 이전의 적류(嫡流)는 사다모리의 차남인 고레마사(다이라노 고레마사)의 계통이었다. 고레마사의 아들 고레토키(다이라노 고레토키) 역시 할아버지인 사다모리의 양자가 되었다. 고레마사의 손자인 다이라노 나오카타의 자손들은 후대에 호조 씨와 구마가이 씨를 칭하게 된다. 또한 나오카타의 딸이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와 결혼하여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등을 낳아, 가와치 겐지에는 모계를 통해 고레마사의 혈통이 이어졌다.넷째 아들인 고레히라(다이라노 고레히라)는 이세 씨의 시조이며, 훗날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배출한 이세 헤이시의 조상이기도 하다. 이세 씨 계통에서는 전국 시대에 호조 소운을 시조로 하는 고호조 씨가 나왔다.
사다모리는 동생 시게모리(다이라노 시게모리)의 아들들도 양자로 삼았는데, 도가쿠시(戸隠)의 오니메(鬼女) 모미지(紅葉) 퇴치 전설로 유명한 여오장군(余五将軍) 다이라노 고레시게(다이라노 고레시게)는 시게모리의 아들로서 사다모리의 양자가 된 인물이다.
이 외에도 『신편 히타치국지』에는 차남으로 히타치노스케 다이라노 고레카제가 있으며, 다이라노 사다노부, 다이라노 나가모리, 다이라노 센코 (다이라노 간코?), 다이라노 마사노리, 다이라노 마사즈미 등을 양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10]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다이라노 구니카 | |
어머니 | 후지와라노 무라오의 딸 | 히데사토의 자매 |
아내 | 세키구치 사다노부의 딸 | |
자녀 (생모 불명) | ||
차남 | 다이라노 고레마사 | 남계 자손은 호조 씨, 구마가이 씨를 칭함 |
아들 | 다이라노 고레토시 | |
4남 | 다이라노 고레히라 | 이세 헤이시의 시조 |
딸 | 헤구리노 토시카타의 처? | 다이라노 나가모리의 어머니 |
양자 | ||
양자 | 다이라노 고레노부 | 후지와라노 나리토키의 친아들[12] |
양자 | 다이라노 고레모토 | |
양자 | 다이라노 고레시게 | 동생 다이라노 시게모리의 아들 |
양자 | 다이라노 고레토키 | 고레마사의 아들 (사다모리의 손자) |
양자 | 다이라노 고레스케 | 고레노부의 아들 (사다모리의 양손자) |
양자 | 다이라노 타카히라? | 가네타다(兼忠)의 아들 (『마에다가 평씨 계도』) |
양자 | 다이라노 고레타다? | 가네타다(兼忠)의 아들[9] |
3. 2. 가족 관계
- 아버지: 다이라노 구니카(平國香)
- 어머니: 후지와라노 무라오(藤原村雄)의 딸 (히데사토의 자매)
- 아내: 세키구치 사다노부(関口貞信)의 딸
- 생모 불명의 자녀
- * 차남: 다이라노 고레마사(平維將) - 초기 적류(嫡流) 계통. 그의 자손은 호조 씨(北条氏)와 구마가이 씨(熊谷氏)를 칭했다. 고레마사의 손자인 다이라노 나오카타(平直方)의 딸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와 결혼하여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등을 낳아, 가와치 겐지에도 여계를 통해 고레마사의 혈통이 이어졌다.
- * 아들: 다이라노 고레토시(平維敏)
- * 4남: 다이라노 고레히라(平維衡) - 이세 헤이시의 시조이다. 후손으로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나왔으며, 이세 씨 계통에서는 전국 시대에 호조 소운을 시조로 하는 고호조 씨가 배출되었다.
- * 딸: 헤구리노 토시카타(平群利方)의 처? - 다이라노 나가모리(平永盛)의 어머니
- 양자
- * 다이라노 고레노부(平維叙) - 장남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구교(公卿) 후지와라노 나리토키(藤原済時)의 친아들이다.[12] 이 때문에 초기 적류는 차남 고레마사 계통으로 여겨진다.
- * 다이라노 고레모토(平維幹)
- * 다이라노 고레시게(平維繁) - 동생 다이라노 시게모리(平繁盛)의 아들이다. 도가쿠시(戸隠)의 오니메(鬼女) 모미지(紅葉) 퇴치 전설로 유명한 여오장군(余五将軍) 다이라노 고레모치(平維茂)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 * 다이라노 고레토키(平維時) - 차남 고레마사의 아들, 즉 손자이다.
- * 다이라노 고레스케(平維輔) - 양자 고레노부의 아들이다.
- * 다이라노 타카히라(平高衡)? - 다이라노 가네타다(平兼忠)의 아들 (『마에다가 평씨 계도』(前田家本平氏系図) 기록)
- * 다이라노 고레타다(平維忠)? - 다이라노 가네타다(平兼忠)의 아들[9]
『신편 히타치국지』(新編常陸国誌)에는 위에 언급된 인물 외에도 차남으로 히타치노스케(常陸介) 다이라노 고레카제(平維風)가 있으며, 다이라노 사다노부(平貞叙), 다이라노 나가모리(平永盛), 다이라노 센코(平専光) (다이라노 간코(平寬光)?), 다이라노 마사노리(平正度), 다이라노 마사즈미(平正済)를 양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10]
사다모리는 동생 시게모리(繁盛)의 아들들뿐 아니라, 손자인 고레토키(維時) 등도 양자로 들였다.
4. 《곤자쿠모노가타리슈》 속의 일화
《곤자쿠모노가타리슈》에는 다이라노 사다모리의 상반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곤자쿠모노가타리슈》는 사다모리를 무용이 뛰어나고 호탕한 인물이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양면적인 인물로 묘사한다.[18]
권 제29 '본조부악행(本朝付悪行)' 편의 제5화 「다이라노 사다모리 아손, 법사의 집에 있던 도둑을 활로 쏘아 잡은 이야기(平貞盛朝臣、法師ノ家ニ於テ盗人ヲ射取リシ語)」에서는 그의 용맹함이 드러난다. 무쓰에서 교토로 돌아오던 사다모리가 평소 알고 지내던 법사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때 침입한 도둑을 활로 쏘아 잡는 무용담이 그려진다.[18]
반면, 같은 편 제25화 「단바노카미 다이라노 사다모리, 아이의 간을 꺼낸 이야기(丹波守平貞盛、児ノ肝ヲ取リシ語)」에서는 그의 잔혹한 면모가 나타난다. 화살 맞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태아의 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임신한 여성 여럿의 배를 갈라 태아의 간을 꺼내 약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치료법을 알려준 의사마저 살해하려고 시도했다고 전해진다.[18]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2]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3]
서적
東北中世史 : 岩城氏とその一族の研究
https://iss.ndl.go.j[...]
白銀書房
[4]
서적
系図纂要
[5]
서적
平将門と東国武士団
https://iss.ndl.go.j[...]
吉川弘文館
[6]
간행물
出羽清原氏と海道平氏(下)
http://id.nii.ac.jp/[...]
山形県立米沢女子短期大学国語国文学会
2018-12
[7]
문서
[8]
문서
[9]
서적
中世東国武士団の研究
https://iss.ndl.go.j[...]
戎光祥出版
[10]
서적
新編常陸國誌
https://dl.ndl.go.jp[...]
加納與右衞門
[11]
문서
[12]
서적
尊卑分脈
[13]
서적
常陸平氏
戎光祥出版
[14]
문서
계도찬요(系圖纂要)
[15]
문서
계도찬요
[16]
문서
[17]
서적
常陸平氏
戎光祥出版
[18]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