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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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안지는 일본 나라현에 위치한 사찰로, 639년 조메이 천황 치세에 백제대사로 창건되었다. 이후 덴무 천황 시대에 아스카로 이전되었고, 헤이조쿄 천도와 함께 다이안지로 재건되었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 배치가 밝혀졌으며, 1921년에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본당, 嘶堂 등을 포함한 여러 건물이 있으며, 십일면관음, 마두관음 등의 중요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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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안지 | |
---|---|
기본 정보 | |
![]() | |
위치 | 나라현나라시 다이안지 2초메 18-1 |
산호 | 없음 |
종파 | 고야산 진언종 |
본존 | 십일면관음 (중요문화재) |
창건 연도 | 전해지는 바로는 아스카 시대 |
개기 | 전해지는 바로는 조메이 천황 |
순례지 | 야마토 13불 영장 제13번 쇼토쿠 태자 영적 제23번 야마토 북부 88개소 영장 제1・2번 난토 7대사 신불 영장 순례의 길 제17번 (나라 제4번) |
문화재 | 목조 마두관음 입상, 목조 불공견삭관음 입상, 목조 양류관음 입상 외 (중요문화재) 다이안지 구 경내 부속 석교 와요지 자취 (국가의 사적) |
공식 웹사이트 | 병 치료, 암 봉쇄 기도 및 부적 나라현 절|다이안지 난토 7대사 |
일반 정보 | |
일본어 이름 | 大安寺 (다이안지) |
2. 역사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이안지의 전신인 百済大寺|백제대사일본어는 조메이 천황 재위 기간인 639년에 창건되었고, 곧이어 9층 탑이 세워졌다.[1] 덴무 천황 때 절이 대관대사라는 이름으로 가구 산 남쪽 700m 지점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2] 이후 야쿠시지, 간고지와 함께 716~717년에 수도가 헤이조쿄로 이전하면서 다이안지로 재건되었다.[3]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였고, 1017년 화재로 주요 당탑을 소실한 이후에는 이전의 융성함을 회복하지 못했다. 현재 남아있는 다이안지의 건물들은 모두 근세 말에서 근대에 재건된 것으로,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나라 시대의 유물로는 8세기 말경 제작된 목조 불상 9체만이 남아있다.
나라 시대 말기 교토로 수도가 옮겨지면서 다이안지는 중요성이 쇠퇴했다. 잇따른 화재, 1459년의 태풍, 1585년과 1596년의 지진으로 인해 사찰 대부분이 파괴되었다.[4] 1889년에는 쌍둥이 탑의 석조 기반이 가시하라 신궁 재건에 사용하기 위해 옮겨졌으며,[5] 다른 건물 유적은 인접 부지에 남아 있다.[3]
오늘날 다이안지는 암 퇴치에 영험이 있는 절로 알려져 있다. 참배객들이 대나무 통에 넣어 데운 일본술을 마시며 건강을 기원하는 "사사자케 축제"는 나라 시대 말 고닌 천황의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14]
2. 1. 창건과 백제대사(百済大寺)
일본서기에 따르면, 조메이 천황 치세인 639년에 다이안지의 전신인 百済大寺|백제대사일본어가 창건되었고, 곧이어 9층 탑이 세워졌다.[1] 전승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세운 "웅응정사"(くまごりしょうじゃ, "웅응도장"이라고도 함)가 관사가 되었고, 그 후 이전을 반복하며 개칭되었다고 한다.
스메이 천황 11년(639년), 다무라 황자(田村皇子)는 태자의 뜻을 받아 백제강(百済川)가에 대궁(大宮)과 대사(大寺)를 짓기 시작했다. 『일본서기』 같은 해 7월 조에는 "올해, 대궁 및 대사를 조작(만들)게 한다", "곧 백제강 가를 궁궐 터로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백제대궁과 '''백제대사'''이다. 백제대사는 일본 최초의 관사(官寺)이며, 국가의 대사로서 존숭을 받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이카 원년(645년) 8월, 고토쿠 천황이 대사에 사신을 파견하여 십사를 정했고, 이때 혜묘(혜묘(慧妙)라고도 함)가 백제대사의 사주가 되었다.
백제대사의 위치는 오랫동안 불명이었다. 나라현기타카쓰라기군고료초의 백제사를 백제대사 터로 보는 설은 에도 시대부터 있었지만, 아스카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과 스메이 천황과의 관련성은 명확하지 않았고, 부근에서 천황 건립의 사찰로 보이는 사찰 터 발견이나 고와(古瓦) 출토도 없었다.

나라 문화재 연구소(나라 국립 문화재 연구소) 조사 결과, 1997년(헤세 9년) 나라현 사쿠라이시 남서부 기비이케 폐사지가 백제대사 터로 추정된다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이 사찰 터는 후지와라궁 터 동쪽, 과거 이와레(磐余)라고 불리던 지역에 있다. 2002년(헤이세이 14년)까지 지속된 발굴 조사에서 기비이케 폐사지 가람 모습이 밝혀졌다. 기비이케 폐사지는 동쪽에 금당, 서쪽에 탑이 세워진 호류지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었고, 발굴된 고와(古瓦) 양식 연대로부터 이 사찰이 스메이 천황 11년(639년)에 건립된 백제대사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2. 2. 다카이치 대사(高市大寺)와 대관대사(大官大寺)
일본서기에는 다이안지의 전신인 백제대사가 조메이 천황 치세인 639년에 창건되었고, 곧이어 9층 탑이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1] 덴무 천황 치세에 절이 옮겨졌으며,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 대관대사로 알려진 부지의 기초가 가구 산에서 남쪽으로 7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2]덴무 천황 2년(673년) 12월 17일, 미노 왕(御野王)과 키노노 카타마로가 조사(造寺司)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절을 백제 땅에서 다이시(高市)의 땅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다이안지 자재장』). 『일본서기』의 같은 날짜의 기록에는 미노 왕과 키노노 카타마로가 '''다이시 대사'''(高市大寺)의 사(司)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 해인 덴무 천황 원년(672년)은 임신 정변에서 덴무 천황(오아마 황자)이 승리한 해이다. 다이시에 절을 옮긴 해는 덴무 천황의 아버지인 조메이 천황의 33주기, 어머니인 사이메이 천황의 13주기에 해당한다고 지적되고 있다.

『일본서기』와 『대안사 자재장』에는 덴무 천황 6년(677년) 9월, 이 [다카이치]의 절을 개칭하여 '''대관대사'''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몬무 천황 (재위 697년 - 707년)의 치세에도 대관대사의 당탑 조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덴무 천황 시대의 대관대사(다카이치 대사)와 몬무 천황 시대의 대관대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1965년에 다무라 요시나가가 별사설을 주장했다. 이후의 발굴 조사와 연구의 진전에 따라, 양자는 다른 장소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고 있다. 개칭 전의 다카이치 대사의 소재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가구야마의 서북, 후지와라 궁의 동쪽에 있었던 기노모토 폐사가 유력한 후보로 여겨지고 있다.
헤이조쿄 천도에 따라 본사도 신도로 옮겨(→#대안사), 현지에는 유구가 남게 되었다. 후에 편찬된 석일본기에는 사찰 명칭의 읽는 법을 "다이콴다이지"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오호츠카사노오호테라"라는 읽는 법도 붙어 있다. 문자 그대로 "관립의 대사"라는 의미이다. 절터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 땅에는 강당터와 탑터의 토단이 남아 있었고, 이곳이 대관대사의 터라는 전승이 근세부터 있었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오카모토 토우리라는 인물이 절터를 조사했을 때, 강당터에는 45개의 초석, 탑터에는 심초와 34개의 초석이 남아 있었지만, 1889년부터 시작된 가시하라 신궁의 조영 공사 때문에 초석은 거의 다 옮겨져 버렸다. 또한, 강당터의 토단에 대해서는, 부근의 소자명을 "코도"라고 불렀기 때문에, 강당터로 여겨졌지만, 후년의 발굴 조사 결과, 정확히는 금당터인 것이 판명되었다. 1904년에 혼자와 세이자부로가 조사했을 때에는 몇 개의 초석만을 남겨두었지만, 초석을 뽑아낸 흔적의 구멍은 남아 있었다. 혼자와가 작성한 지도를 보면, 강당은 자리수 9칸, 보머리 4칸, 탑은 방 5칸이었다("칸"은 길이의 단위가 아니라, 기둥 사이의 수를 의미한다).
2. 3. 헤이조쿄 천도와 다이안지(大安寺)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이안지의 전신인 백제대사(百済大寺)는 조메이 천황 재위 기간인 639년에 창건되었고, 곧이어 9층 탑이 세워졌다.[1] 덴무 천황 재위 시기에 절이 옮겨졌는데,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 대관대사(大官大寺)로 알려진 부지의 기초가 가구 산에서 남쪽으로 7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2]710년 헤이조쿄 천도에 따라, 아스카 지역에 있던 7세기 건립 사찰 중 간고지(호코지, 아스카데라), 야쿠시지(천도 후의 야쿠시지), 고후쿠지(우마야사카데라) 등은 신도로 이전했다. 다이칸다이지도 716년에 헤이조쿄 좌경 육조 4방의 땅으로 이전하여 '''다이안지'''가 되었다.[3] 이들은 모두 후에 도다이지, 사이다이지, 호류지 (혹은 도쇼다이지)와 함께 난토 7대 사찰로 꼽힌다.
738년경에는 동탑 · 서탑 외에 가람이 거의 완성되었다. 동탑은 나라 시대 후반에, 서탑은 주요 가람에서는 마지막이 되는 나라 시대 말기부터 헤이안 시대 초두에 건립되었다. 탑은 다이칸다이지까지는 9층탑이었지만, 이번에는 7층탑으로 건립되었다. 주요 가람 외에 선원, 태중원, 천원, 원원, 창원, 화원 등이 있었다.
헤이조쿄의 가로(街路)는 1정(약 109미터)마다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되어, 4정마다 동서로는 이조대로, 니조대로…, 남북으로는 이보대로, 니보대로… 등으로 불렸다. 다이안지의 정문인 남대문은 육조대로에 면해 있었지만, 사역은 육조대로의 남쪽으로도 뻗어 동서 3정, 남북 5정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였다. 가람 배치의 특징은 동서 양 탑이 금당에서 크게 떨어져 남대문 바깥쪽(남쪽)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며, "다이안지식 가람 배치"라고 불렸다. 또한 가람 북쪽에는 스기야마 고분이 있어 경내로 편입되는 형태였다.
다이안지의 금당에 모셔져 있던 본존 · 건칠조 석가여래상은 『다이안지 자재장』에 덴지 천황 발원 상으로 기록되어 명작으로 알려져 있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 1140년에 난토의 여러 사찰을 순례한 오에노 지카미치는 『7대 사찰 순례 사기』에서 야쿠시지의 본존상(현존, 국보)에 대해 "야쿠시지의 본존상은 훌륭한 작품이지만, 다이안지의 석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와양 조각 양식을 완성한 불사(佛師) · 조초도 다이안지의 석가상을 모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다이안지는 간고지와 함께 일본 산론종의 2대 유파를 이루었다. 산론종은 수나라 시대에 가상대사 길장이 대성한 종파로, 지장의 제자로 당나라에 16년간 체류한 유학승 · 도지는 호국 경전으로 중시된 신역 『금광명최승왕경』을 일본에도 가져와 다이안지 정비에 진력하는 등, 나라 시대에 상고 불교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다이안지 자재장』의 747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 다이안지에는 887명의 승려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나라 승려 감진을 일본에 초청하기 위해 당에 파견된 부조와 에이예이, 구카이와 사이초와 교류가 있었던 킨소, 또 사이초의 스승에 해당하는 교효도 다이안지의 승려였으며, 다이안지가 일본 상고 불교 발전에 기여한 역할은 컸다.
736년, 다이안지에는 교기, 리쿄, 에이예이, 부조 등의 초청으로 인도 승려 보리선나, 당나라 승려 도선, 림읍(참파, 현재의 베트남) 승려 불철이 일본을 방문하여 체류하는 등, 귀화승 · 유학승을 포함한 유명한 승려도 있었다. 보리선나는 도다이지 대불 개안의 도사를 맡은 승려로 알려져 있다.
2. 4. 쇠퇴와 재건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이안지의 전신인 백제대사(百済大寺)는 조메이 천황 재위 시기인 639년에 창건되었고, 곧이어 9층 탑이 세워졌다.[1] 덴무 천황 때 옮겨졌으며,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 대관대사(大官大寺)로 알려진 부지의 기초가 카구 산에서 남쪽으로 7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2] 야쿠시지, 간고지와 마찬가지로 716~717년에 수도가 헤이조쿄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고, 729년에 다이안지로 재건되었다.[3]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점차 쇠퇴하여 1017년 화재로 주요 당탑을 소실한 이후로는 한때의 융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현존하는 다이안지의 당우는 모두 근세 말에서 근대의 재건이며, 규모도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로는 8세기 말 무렵 제작으로 보이는 목조 불상 9체만이 남아 있다.
수도가 나라 시대 말기에 교토로 다시 옮겨지면서 그 중요성이 쇠퇴했다. 잇따른 화재, 1459년의 태풍, 1585년과 1596년의 지진으로 인해 사찰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4] 예전 쌍둥이 탑의 석조 기반은 1889년에 가시하라 신궁으로 재사용하기 위해 옮겨졌으며,[5] 다른 건물들의 유적은 인접한 부지에 남아 있다.[3]
평안경으로 도읍이 옮겨진 후, 829년에는 구카이가 다이안지의 벳토에 임명되었다.[15] 이 무렵 신불습합이 진행되어, 859년에는 하치만 신을 권청하여 하치만궁(현재 모토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을 동탑 북쪽에 건립했다. 그러나 불교는 도지와 엔랴쿠지를 중심으로 한 밀교로 중심이 옮겨감에 따라 종풍은 점차 쇠퇴해 갔다.
911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가람에 피해가 발생했다. 949년에 서탑이 낙뢰로 소실되자, 1017년 3월 1일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본존 석가여래상과 동탑을 제외하고 당사는 모두 소실되었다.[15] 1116년까지는 주요 가람이 재건되었지만, 이 이후에는 예전 규모를 되찾지 못하고 점차 쇠퇴해 갔다. 그 후, 고후쿠지의 말사가 되었다.
1298년 4월 1일, 사이다이지, 도쇼다이지, 홋케지 등과 함께 쇼군가의 기도소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596년 윤 7월 20일의 게이초 후시미 지진으로 본존 석가여래상은 결국 유실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작은 관음당 하나만 남게 되었다.
1882년 오쿠야마 게이즈이, 사에키 코스미에 의해 소당과 고리가 건립되어 다이안지가 재흥되었고, 1922년에는 이시도 에이타케 등에 의해 현재의 본당이 세워졌다.
현대에는 암 퇴치 등에 영험(りやく)이 있는 절이 되었다. 참배자가 대나무 통에 넣어 따뜻하게 데운 일본술을 마시며 건강을 기원하는 "사사자케 축제"는 나라 시대 말기의 고닌 천황의 고사에 유래한다고 전해진다[14]。
3. 가람 배치
와도 3년(710년) 평성경 천도에 따라, 아스카 지방에 있던 7세기 건립 사찰 중 호코지(간고지), 야쿠시지(야쿠시지), 우마야사카데라(산카이데라, 고후쿠지) 등은 신도로 이전했다. 다이칸다이지도 레이키 2년(716년) 평성경 좌경 육조 4방의 땅으로 이전하여 '''다이안지'''가 되었다. 이들은 도다이지, 사이다이지, 호류지 (혹은 도쇼다이지)와 함께 난토 7대 사찰로 꼽힌다.
가람은 덴표 10년(738년)경 동탑 · 서탑 외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동탑은 나라 시대 후반, 서탑은 주요 가람에서는 마지막으로 나라 시대 말기부터 헤이안 시대 초두에 건립되었다. 다이칸다이지까지는 9층탑이었지만, 다이안지는 7층탑으로 건립되었다. 주요 가람 외에 선원 · 태중원 · 천원 · 원원 · 창원 · 화원 등이 있었다.
평성경의 가로(街路)는 1정(약 109미터)마다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되어, 4정마다 뻗은 동서로는 이조대로, 니조대로…, 남북으로는 이보대로, 니보대로… 등으로 불렸다. 다이안지의 정문인 남대문은 육조대로에 면해 있었지만, 사역은 육조대로 남쪽으로 동서 3정, 남북 5정에 달하는 광대한 것이었다. 가람 배치의 특징은 동서 양 탑이 금당에서 크게 떨어져 남대문 바깥쪽(남쪽)에 세워졌다는 점이며, "다이안지식 가람 배치"라고 불렸다. 가람 북쪽에는 스기야마 고분이 있어 경내로 편입되었다.
4. 문화재
다이안지에는 다이안지 양식으로 알려진 9개의 조각상이 있으며, 12세기 오에노 지카미치가 《시치다이지 준레이 시키》에서 나라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한 석가모니상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3][6] 나라 시대의 조각상들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불상 종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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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면관음[7] | |
천수관음[8] | |
불공견삭관음[9] | |
요류관음[10] | |
성관음[11] | |
사천왕 세트[12] |
덴표 시대(747년)의 사찰 기록 또한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지바현에 소장되어 있다.[13]
아래는 나라 시대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불상들이다. 각 상의 양 팔 등은 대부분 후세에 보충된 것으로, 파손이 심하다. 덴표 19년의 『다이안지 자재장』에는 이들 상에 해당하는 것이 발견되지 않아 그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들은 도쇼다이지의 구 강당 불상군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 다이안지의 본존. 머리 부분은 후세의 것으로 바뀌었다.
- 목조 마두관음 입상 - 중요문화재 지정 명칭은 "목조 천수관음 입상"
- 목조 불공견삭관음 입상
- 목조 양류관음 입상
- 목조 성관음 입상
- 목조 사천왕 입상
다이안지 옛 경내 부석교기와요터(大安寺旧境内附石橋瓦窯跡)는 1921년(다이쇼 10년) 3월 3일에 "다이안지 옛 경내"로 지정되었으며, 1968년, 2006년, 2014년, 2015년에 추가 지정되었다.[16] 사적 지정지에는 현 다이안지 경내 외에도 남쪽의 동서 양탑터, 북쪽의 스기야마 고분이 포함된다.[17] 2006년에 명칭이 변경되고 추가 지정된 석교 기와 가마터(石橋瓦窯跡)는 교토부쓰즈키군이데정에 있다.[16]
5. 현대의 다이안지
현대에는 암 퇴치 등에 영험(りやく)이 있는 절이 되었다. 참배자가 대나무 통에 넣어 따뜻하게 데운 일본술을 마시며 건강을 기원하는 "사사자케 축제"는 나라 시대 말기의 고닌 천황의 고사에 유래한다고 전해진다.[14]
1882년(메이지 15년) 오쿠야마 게이즈이, 사에키 코스미에 의해 소당과 고리가 건립되어 다이안지가 재흥되었고, 1922년(다이쇼 11년)에는 이시도 에이타케 등에 의해 현재의 본당이 세워졌다.
다이안지 자체에서 학술 논문집 《남도 대안사론총》(남도 국제 불교 문화 연구소 편, 1995년·헤이세이 7년)과 《대안사사·사료》(1984년·쇼와 59년)가 간행되었다.
당 사찰 남쪽에는 옛 진수사였던 모토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이 있다.
경내(국가 사적)에는 본당, 嘶堂(이나나키도) 등이 세워져 있지만, 모두 근대의 건물이다.
- 본당 - 1922년(다이쇼 11년) 재건. 본존 십일면관음 입상(중요 문화재)을 안치한다. 본존은 비불로, 10~11월에만 공개된다.
- 소자방
- 嘶堂 - 마두관음 입상(중요 문화재)을 안치한다. 상은 비불로, 3월에만 공개된다. 당의 주변에는 인도 8성지 시코쿠 팔십팔 곳 오사후미 영장이 설치되어 있다.
- 호마당
- 선사공양탑 - 다이안지에 살았던 명승 지식의 공양탑.
- 미류쿠(미루쿠) 묘 - 유방암 예방 기원의 묘.
- 고리
- 사자후전
- 찬앙전 - 1963년(쇼와 38년)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조의 수장고로, 양류관음 입상(중요 문화재) 등 7구의 목조 불상을 안치한다.
- 십삼중 석탑
- 산문(남문) - 고후쿠지 구 이치조인의 문을 이전한 것이다. 복원된 남대문의 기단 위에 서 있다.
- 서탑터 - 칠중탑의 터. 심초가 남아 있다.
- 동탑터 - 칠중탑의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6. 주변 시설
- 모토이와시미즈 하치만구 (구 진수사)
- 나라현립 도서 정보관
- 자이세이회 나라 병원
참조
[1]
서적
The Four Great Temples (''vid.'' pp. 90, 8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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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笹酒」で無病息災 奈良・大安寺で祭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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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図説日本の史跡 5 古代2
同朋舎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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