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쓰카사 후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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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쓰카사 후사코는 레이겐 천황의 후궁으로, 중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1669년 레이겐 천황에게 입내하여 뇨고가 되었으며, 고미즈노오 천황 이후 처음으로 천황의 정식 후궁이 되었다. 천황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츄나곤텐시의 퇴출 이후 관계가 개선되었다. 1682년 준삼후에 선하되었고, 이듬해 중궁에 책립되었다. 1687년 레이겐 천황이 히가시야마 천황에게 양위한 후 신조사이몬인의 여원 칭호를 받았으며, 171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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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후사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타카츠카사 후사코 |
일본어 | 鷹司房子 |
신죠사이몬인 | 新上西門院 |
출생일 | 1653년 10월 12일 |
사망일 | 1712년 5월 19일 |
묻힌 곳 |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이즈미야마초 쓰키노와 능 |
씨족 | 후지와라 씨 (타카츠카사 가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타카츠카사 노리히라 |
어머니 | 레이제이 타메미츠의 딸 |
배우자 | 레이겐 천황 |
자녀 | 마사코 내친왕 |
경력 | |
황후 즉위 | 덴나 3년 2월 14일 (1683년 3월 11일) |
여원호 | 신죠사이몬인 (新上西門院) |
여원 즉위 | 조쿄 4년 3월 25일 (1687년 5월 6일) |
기타 정보 | |
휘 | 후사코 (房子) |
입궁 | 간분 9년 11월 21일 (1669년 12월 13일) |
여원 | 덴나 2년 12월 7일 (1683년 1월 4일) |
2. 생애
간분 9년(1669년 11월 21일), 1살 연하인 레이겐 천황에게 입내하여 뇨고가 되었다. 이는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도쿠가와 마사코(도후쿠몬인)가 입내한 이후 첫 정실 입내였다[2]. 고미즈노오인과 도후쿠몬인 등의 주도로 입내가 추진되었으나, 초기에는 천황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에도 막부가 개입하여 조정한 후에야 관계가 개선되었다[3][4].
간분 13년(1673년) 8월 23일에는 딸 에이코 내친왕을 낳았다. 이후 덴나 2년(1682년) 12월 7일 준삼후 선하를 받았고, 이듬해 2월 14일에는 중궁에 책립되었다. 레이겐 천황이 조쿄 4년(1687년) 3월 21일에 히가시야마 천황에게 양위하자, 후사코는 같은 해 3월 25일에 신조사이몬인이라는 여원 칭호를 받았다. 겐로쿠 8년(1695년)에는 막부로부터 소령 천 석을 하사받았다. 쇼토쿠 2년(1712년) 4월 14일에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 이즈미야마초의 게쓰린릉이다.
2. 1. 출생과 가계
아버지 다카쓰카사 노리히라는 좌대신이자 종1위였다. 이복 형제자매로는 관백 다카쓰카사 후사스케, 좌대신 구조 가네하루,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정실 다카쓰카사 노부코가 있다. 일설에는 후사코가 노리히라의 여동생이었으나 딸로 입적되었다고도 한다.2. 2. 입내와 갈등
간분 9년(1669년) 11월 21일, 후사코는 한 살 연하인 레이겐 천황에게 입내(入内)하여 뇨고(女御)가 되었다. 천황의 정실이 입내한 것은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도쿠가와 마사코(도후쿠몬인)가 입내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2].같은 해 4월 28일, 고미즈노오인과 도후쿠몬인은 나카인 미치시게에게 명하여, 교토 쇼시다이 이타쿠라 시게노리에게 후사코를 천황의 비로 맞이할 것을 은밀히 제안하도록 했다는 뇨보 봉서가 남아 있다. 당시 레이겐 천황은 여러 후궁 여관들에게 손을 대어 아이를 낳게 했고, 이로 인해 여관과 그 관계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는 등(간분 8년의 금궐 소동) 후궁의 질서가 문란했다. 이에 정식 비를 맞이하여 그 소생의 황자를 다음 천황으로 세우는 것이 황위 계승과 후궁 질서 유지에 바람직하다고 여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5월에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이 혼인에 찬성한다는 노중 봉서가 이타쿠라에게 전달되었고, 6월에는 막부로부터 정식 요청이 다카쓰카사 가문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사정을 눈치챈 천황은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으며, 8월에는 이타쿠라에게 산조니시 사네노리의 제거에 동의하지 않으면 양위하여 입내 계획을 백지화하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이타쿠라는 산조니시의 칩거 처분에 동의하여 입내를 성사시켰다[3].
그러나 입내 후에도 천황과 후사코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당시 천황의 총애를 받던 주나곤노텐지(오구라 사네오키의 딸)가 후사코를 질투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마침 주나곤노텐지가 황자를 출산했다. 고미즈노오인과 에도 막부는 후사코가 낳을 황자에게 황위를 계승시킬 방침이었으므로, 질투 문제와 임신을 구실로 주나곤노텐지를 궁중에서 내보내고 태어난 황자(훗날의 사이신 법친왕)를 황위 계승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주나곤노텐지가 퇴출된 이후 천황과 후사코의 관계는 개선되었다[4].
2. 3. 화재와 이궁
간분 13년(1673년) 5월 9일에 내리가 화재로 소실되어, 우다이진 고노에 모토히로의 저택을 임시 어소로 삼았다. 사실 선대 고사이 천황 역시 만지 4년(1661년) 정월의 화재 때 고노에 모토히로의 저택을 임시 어소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화재 당시 후사코는 임신 중이었고, 같은 해 8월 23일에 딸 마사코 내친왕을 낳았다. 앞서 내리를 소실시킨 교토 대화재로 인해 연호는 엔포로 개원되었다.
엔포 3년(1675년) 11월 25일, 새로운 내리가 완공된 직후 이번에는 임시 어소였던 고노에 모토히로 저택이 화재 피해를 입었다. 천황과 후사코는 잠시 吉田兼敬|요시다 가네유키일본어의 저택에 머물다가, 27일에 새로 지어진 내리로 들어갔다.
2. 4. 중궁 책립과 여원 칭호
덴나 2년(1682년) 12월 7일, 후사코는 준삼후 선하를 받았다. 이듬해인 덴나 3년(1683년) 2월 14일에는 중궁에 책립되었다. 이로써 후사코는 레이겐 천황의 정실이 되었는데, 에도 시대에 정실이 중궁에 책립된 경우는 후사코를 포함하여 단 네 차례뿐이었다.[2]레이겐 천황은 조쿄 4년(1687년) 3월 21일에 황태자 아사히토 친왕(히가시야마 천황)에게 양위하였다. 천황의 양위에 따라 후사코는 같은 해 3월 25일에 新上西門院|신조사이몬인일본어이라는 여원 칭호를 받았다. 겐로쿠 8년(1695년) 7월에는 막부로부터 소령 천 석을 하사받았다.
후사코는 쇼토쿠 2년(1712년) 4월 14일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이즈미야마초에 있는 쓰키노와 능이다.
2. 5. 말년
덴나 2년(1682년) 12월 7일, 후사코는 준삼후 선하를 받았고, 이듬해인 덴나 3년(1683년) 2월 14일에는 중궁에 책립되었다. 적처로서 입후된 셈이었는데, 에도 시대에 적처가 입후된 예는 후사코를 포함해 4건밖에 없다.[2] 레이겐 천황은 조쿄 4년(1687년) 3월 21일에 아사히토 친왕에게 양위하였다. 후사코는 천황의 양위에 따라 같은 해 3월 25일에 신조사이몬인의 여원 선하를 받았다. 겐로쿠 8년(1695년) 7월에 막부로부터 소령 천 석을 하사받았다. 쇼토쿠 2년(1712년) 4월 14일에 붕어하였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 이즈미야마초의 게쓰린릉이다.참조
[1]
문서
鷹司房子→栄子内親王→二条吉忠→二条舎子→後桜町天皇
[2]
서적
2021
[3]
서적
2021
[4]
서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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