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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소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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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다 소카쿠는 1859년 일본 아이즈에서 태어난 무술가로, 대동류 합기유술의 창시자이다. 그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무술을 배우고 전국을 유랑하며 다양한 무술을 연마했다. 이후 사무라이 계급 폐지 이후 유술 중심의 기술을 강조하여 대동류 합기유술을 창시, 전국을 돌며 무술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합기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있으며, 다케다 소카쿠의 가르침은 현대 무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가계, 무술 경력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논란이 있으며, 최근 연구에서는 그의 가문이 농민 출신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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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소카쿠
기본 정보
다케다 소카쿠 사진
1888년경 다케다 소카쿠의 재보정된 사진
이름다케다 소카쿠
일본어 이름武田 惣角
로마자 표기Takeda Sōkaku
출생일1859년 10월 10일
출생지아이즈, 후쿠시마현, 일본
사망일1943년 4월 25일
사망지일본
국적일본
직업일본 학자, 무술가
무술 정보
무술 유파대동류 합기유술
스승사이고 다노모
도마 시부야
사카키바라 겐키치
제자우에시바 모리헤이
히사 다쿠마
요시다 고타로
최용술
오쿠야마 류호
가족다케다 도키무네 (자녀)
기타 정보
별명원정의 (源正義)
약 150cm
주석
주석대동류의 전승에서는 중흥의 조상으로 여겨지지만, 사료 연구에서는 소카쿠가 창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2. 생애

다케다 소카쿠는 아이즈 번(후쿠시마현)의 사무라이이자 농부였으며, 불교 사찰 서당에서 가르치던 다케다 소키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어머니 토미 구로코치는 창술과 검술의 달인 구로코치 덴고로[3]의 딸이었다. 소카쿠는 아버지 소유의 도장에서 무술 훈련을 받았다.[4]

다케다 소키치는 칼과 창에 능했고, 스모 선수이기도 했다. 소카쿠는 호조인류 창술과 오노하 일도류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5]

이후 소카쿠는 수행을 위해 여러 스승 문하에서 수련하고 싸우며 여행했다.[8] 가시마 신덴 지키신카게류 도장장이자 유명 검객 사카키바라 겐키치의 제자로 수련했다는 설이 있으나, 역사적 기록은 없다.[6][7] 소카쿠는 실제 검과 시나이로 여러 시합과 결투를 벌여 뛰어난 검객으로 여겨졌다.[8]

폐도령 이후, 소카쿠는 맨손 유술 중심 기술을 강조했다.[9] 1875년 사이고 다카모리메이지 정부에 맞서 사쓰마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지원하려 규슈로 갔으나, 오사카로 돌아와 10년간 모모노이 슌조의 경신명치류 도장에서 지냈다.

소카쿠는 전국을 여행하며 군인, 경찰, 무술 애호가 등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영명록'과 '사례록'에 가르친 사람들의 기록을 남겼다.[11]

2. 1. 초기 생애와 배경 (1859-1875)

다케다 소카쿠는 1859년 일본 후쿠시마현 아이즈 지역에서 태어났다.[2] 그의 가문은 아이즈 번의 무사 가문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농민 출신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8] 아버지 다케다 소키치는 스모 선수이자 검술, 창술 등 무술에 능한 인물이었으며, 소카쿠는 아버지로부터 처음 무술을 배웠다.[4] 어머니 토미 구로코치는 창술과 검술에 능한 구로코치 덴고로[3]의 딸이었다.

소카쿠는 어린 시절 "아이즈의 작은 텐구"라고 불릴 정도로 무술 실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오노하 일도류 검술, 호조인류 창술, 스모, 유술 등을 익혔다.

2. 2. 무사 수행과 검술 연마 (1875-1898)

다케다 소카쿠는 여러 스승 밑에서 무술을 수련하고 실력을 겨루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수행 시기를 가졌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8] 소문에 따르면, 소카쿠는 가시마 신덴 지키신카게류 도장장이자 당대 최고 검객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사카키바라 겐키치의 제자로 함께 생활하며 수련했다고 한다.[6][7]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역사적 기록은 없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카쿠가 실제 칼과 시나이를 사용한 여러 시합과 결투를 통해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검객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8]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 계급이 폐지되고 칼 휴대 금지령(폐도령)이 내려지자, 소카쿠는 선조의 무술에서 맨손, 유술 중심의 기술을 강조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9] 1875년경, 사이고 다카모리메이지 신정부에 맞서 사쓰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소카쿠는 즉시 지원하러 가려 했다. 규슈까지 갔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오사카로 돌아와, 이후 10년 동안 검객 모모노이 슌조의 경신명치류 도장에서 머물렀다.

소카쿠는 전국을 여행하며 군인, 경찰, 무술 애호가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사람들의 기록을 '영명록'과 '사례록', 즉 참석자와 수강료 명부에 남겼다.[11]

2. 3. 대동류 합기유술 창시와 보급 (1898-1943)

1898년, 영산신사(霊山神社)의 궁사(宮司)였던 호시나 치카노리(保科近悳)로부터 "검술을 버리고 합기유술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지시를 받고,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気柔術)을 창시했다고 전해진다.[10]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신분, 나이, 출신에 상관없이 대동류 합기유술을 가르쳤다. 그는 '영명록(英名録)'과 '사례록(謝礼録)'이라는 기록을 남겨 가르친 사람들과 수강료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11]

1903년에는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의 검호 시모에 슈타로(下江秀太郎)와 검술 시합을 하여 이겼다고도, 비겼다고도 전해진다. 다만, 당시 시모에는 죽기 전 해였고, 실명 상태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케다 소카쿠는 생애 동안 도장을 열고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고, 부탁을 받으면 어디든 찾아가 대동류 합기유술의 기술을 널리 전파했다. 1910년경부터는 홋카이도(北海道)를 주요 거점으로 활동했다.

1915년 2월, 제자 요시다 고타로(吉田幸太郎)의 소개로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훗날 합기도 창시자)를 만났다.

1936년 여름,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大阪朝日新聞社)의 무도 교수로 취임했다.

2. 4. 만년과 가족

1912년, 다케다 소카쿠는 제자인 야마다 스에와 홋카이도에서 재혼하여 무소, 타에, 도키무네, 에이코, 소코, 시즈카, 소키치 등 4남 3녀를 두었다. 이후 홋카이도를 근거지로 삼았다.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3년아오모리현에서 객사하였다. 향년 84세였다.[20]

다케다 소카쿠의 장남 다케다 소세이(武田宗清)는 아이즈와카마치(会津坂下町)에 남아 소카쿠로부터 배운 계통의 다이토류(大東流)를 가르쳤으나, 마을 의원이 되면서 종가(宗家)를 도키무네(時宗)에게 물려주고 무술가들에게는 가르치지 않았다.

소카쿠의 삼남 도키무네는 홋카이도 경찰(北海道警察)과 야마다 수산(山田水産)에 근무했다. 홋카이도 아바시리시(網走市)에 다이토칸(大東館)을 열고, 제36대 종가(宗家)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로부터 다이토류 합기무도 종가를 계승했다. 도키무네는 후계자가 될 남자가 없어, 말년에 건강이 악화된 후 딸인 요코야마 노부코(横山信子)를 차기 종가로 발표했지만, 곧 다이토칸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에 빠져 해체되었다.

소세이의 증손자 다케다 무네미쓰(武田宗光)는 현재 아이즈와카마치(会津坂下町)에서 다이토류 합기유술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무네미쓰는 처음에는 아이즈와카마치(会津坂下町)에서 종조부 소세이가 아버지 소카쿠로부터 배운 계통의 다이토류를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받았지만, 후에 도키무네와 그의 고제(高弟)의 지도도 받았다. 도키무네는 야마다 수산(山田水産)을 정년퇴직한 후, 아바시리시(網走市)에서 아이즈와카마치(会津坂下町)로 통학하며 무네미쓰에게 지도하기도 했다.

3. 주요 제자

다음은 다케다 소카쿠의 주요 제자들이다.


  • 다케다 도키무네(武田時宗): 다케다 소카쿠의 아들로, 대동류 합기무도(大東流合気武道)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12]
  • 다쿠마 히사(久琢磨): 오사카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간부로, 다쿠마카이(琢磨会)를 설립했다.[13][14]
  • 도네다테 마사오: 오사카 아사히 신문 간부로, 다이부칸(大武館)을 설립했다.[14]
  •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대동류 합기무술 제36대 종가.[15]
  • 호리카와 코도(堀川幸道, 고타로): 고도카이(古道会)와 롭포카이(六方会)를 설립했다.[15]
  • 요시다 고타로(吉田幸太郎):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다케다 소카쿠에게 소개했다.[15]
  •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합기도(合気道)의 창시자.[16]
  • 최용술(崔龍述): 한국 합기도(Hapkido)의 창시자. 다케다 소카쿠에게 입양되어 그와 함께 수련했다는 기록이 있다.[16]

4. 영향

우에시바 모리헤이합기도를 창시하여 현대 무술 형태의 인기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오늘날 다이토류에 대한 관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호사쿠 마츠다는 소가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소가쿠는 다시 오쿠야마 요시지에게 가르쳤다. 오쿠야마 요시지는 합각류 유술 학교를 설립했고, 나카노 미치오미에게 가르쳤다. 나카노 미치오미는 나중에 일본 쇼린지 껫포의 창시자 도신 소가 되었다. 최용술은 소가쿠에게 입양되어 그와 함께 수련했다.[16]

이러한 다케다 소카쿠의 가르침은 합기도, 합각류, 일본 쇼린지 껫포, 합기도유도의 고신주츠 자기방어 형( 토미키 겐지를 통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17]

5. 논란과 재조명

다케다 소카쿠의 가문 내력, 아이즈번에서의 지위, 그리고 소카쿠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명확한 문서 기록이 매우 부족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많다. 한편으로는, 선조 대대로 같은 땅에 뿌리내린 가문이 대부분인 농촌 지역 사회에서는 지역의 일들이 100년, 200년 동안 지역 주민들에 의해 구전되기 때문에 근거 없는 이야기가 나오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다케다 가문이나 대동류의 전승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어떤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사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19]

최근 무도 연구가인 이케즈키 다쓰히데(池月映)는 무도학회 등에서 다케다 소카쿠의 소년기 경력에 대해 기존 유파의 전승과는 다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케즈키는 당시 기록, 촌장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호적 관련 사본, 그리고 다케다의 자녀 기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18]


  • 보신 전쟁 명부에 따르면, 아버지 다케다 소키치는 원래 다케다(武田) 성이 아닌 다케다(竹田) 성을 가진 농민 출신이었다. 소카쿠의 친어머니는 사이토 가문의 토하이며, 메이지 호적에는 계모가 번사 구로코치 곤스케의 차녀 다쓰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는 사이토 가문이며, 막말에는 다케다(竹田) 성이었고, 메이지 5년 호적부터 다케다(武田) 성을 사용했다.
  • 시부야 도마는 무진전쟁에서 싸웠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신정부의 감시가 엄격하여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따라서 다케다 소카쿠의 스승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 다케다 소카쿠는 쌍둥이 남매였고, 여동생 만은 7세경 안 질환으로 실명했다. 아버지는 전쟁으로 집을 비웠고, 친어머니는 병사했기 때문에, 소카쿠는 여동생을 돌보는 과정에서 무예의 소질을 갈고 닦았다. 메이지 5년 호적과 다케다 도키무네(武田時宗)의 노트는 일치하며, 출생 배경은 재검토되었다. 현재 원호적에 따르면, 메이지 18년 5월 장녀 데루가 태어났고, 이웃 사토 기네몬의 손녀 콘과 결혼했다. 메이지 20년 12월 장남 소세이가 태어났다.
  • 무술을 전수한 사람은 시부야가 아니라, 동거인인 사토 기네몬과 역술가인 나카가와 만노조이다. 농민 신분인 다케다 소카쿠는 사족인 시부야에게 배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진전쟁 후, 다케다가 동거인인 사토 기네몬은 번주 호위역인 고쿠반으로 무예 십팔반, 아이즈번 고식내의 유술을 다케다 소카쿠에게 가르쳤다. 사토의 손자 사토 다다타카는 다케다 소카쿠와 함께 오노파 일도류 양기관 시부야 도바 도장에서 수련했다.(다케다 도키무네의 노트에 다다타카의 기록이 있다.)
  • 보코로부터 고식내를 전수받았다는 건은, 최근 무술사의 연구와 조사로 거의 부정되고 있다. 보코가 다케다에게 무술을 가르친 도장 자체가 이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 선조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는데, 현지에 남아있는 다케다 구니쓰구, 고헤이의 묘지에 따르면, 다케다의 계보는 마을 내 친척인 다케다가로부터 빌린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 가이 다케다 가문에서 왔고, 무술을 전수했다는 증거는 없다. 다케다 구니쓰구 부부의 위패가 남아있다. 사이코지를 지었다는 설은 사이코지 관세음보살 연기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연기는 사찰 유지회의 것이지만 소식이 끊긴 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케다 소카쿠의 조부인 다케다 소에몬은 막말아이즈번 가로인 사이고 다노모에게 식내와 음양도를 가르쳤다. 또한 성내에서도 식내를 가르쳤다고 한다. 교토의 도고몬가로부터 내장두의 관명을 받은 음양사이기도 했다. 시호는 무로옹신령(武老翁神霊)이다. 이름이 소자에몬(惣左衛門)이었다고도 한다.[19] 그러나 다케다 가문에는 과거장이 확인되지 않는다. 무라우치 사이코우지의 소에몬 묘비에는 아버지 소키치가 태어나기 20년 전, 사이고 다노모가 태어나기 30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메이지 호적에는 조부 소에몬으로 되어 있으며 이미 사망한 상태이다. 아이즈의 농촌에서는 같은 직종의 수행자(선달)가 지배했고, 음양사가 활약했다는 기록은 없다. 소카쿠에게 기합술(기합·합기)을 가르친 역술가 나카가와 만노조는 음양도의 식반 점과 주술을 익혔다.

다케다 소키치(1820년 ~ 1906년)는 아이즈 번사이자 궁중 스모의 력사(力士)였다. 시코나는 시로이토였다. 검술, 창술, 봉술, 유술의 달인이기도 했으며, 체격이 작았던 다케다 소카쿠와는 달리 거구였다. 무술과 학문 모두에 능했고, 다케다 저택에 인접한 사이코지에 서당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자택의 토장을 도장으로 개조하여 무술과 스모를 가르치기도 했다. 겐지 원년(1864년)의 금문의 변에서는 공을 세워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로부터 은상을 받았다. 보신 전쟁에는 250명을 거느리는 력사대의 대장으로 참전했다. 아이즈 전쟁에서는 사이고 다노모의 부대에 소속되어, 아이즈 번의 항복 후에는 에치고국다카다번의 감시하에 1년 반을 보냈다. 메이지 시대에는 궁중 스모의 장로 친방으로서 스모 번부에 이름이 남아 있다. 시호는 소키치 신령이다. 정정으로 보신 전쟁 명부에는 다케다(竹田) 성, 농민 출신의 아시가루(메이지 호적에는 농민), 력사대의 임무는 대포 운반으로 150명, 중상자가 있었지만 전사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6. 다케다 소카쿠가 등장하는 작품


  • 쓰모토 아키라의 소설: 『귀의 관』(신초문고), 『고루의 명인』(문예춘추), 『심연의 색은 - 사가와 유키요시전』(실업之日本사)
  • 이마노 빈의 소설: 『소각 유랑』(슈에이샤 문고), 『산아란』(슈에이샤 문고)
  • 이케즈키 에이의 저서: 『아이즈의 다케다 소각 - 야마토류 합기유술 삼대기』(호노노모리, 2007), 『합기의 발견 - 아이즈 비전 다케다 소각의 기적』(호노노모리, 2009, 북동문예협회 장려상), 『합기의 창시자 다케다 소각』(호노노모리, 2012), 『역사소설 합기의 다케다 소각 - 무사시를 넘어선 남자』(역사춘추사, 2015, 일본점자도서관 녹음 CD 채용), 『아이즈 잡학Ⅱ』(역사춘추사, 2021, 「아이즈 발상의 대동류」「다케다 소각 일대기」「아이즈번 어식내」「합기의 의미는」), 『아이즈 인군상№46』(역사춘추사, 2023, 「역사 중가와 만노죠의 업적」(유품『주법』은 초공개))
  • 야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왕도의 개』, 『건과 巽 - 자바이칼 전기 -』
  • 마쓰다 타카토모의 만화: 『권아』
  •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동천의 사자』(소요샤)

7. 에피소드

; 대필

어린 시절 서당에 가는 것을 싫어하며 "나는 평생 글자를 쓰지 않겠다. 남에게 써주게 하는 입장이 될 것이다"라고 맹세했기 때문에 글을 쓰지 못했다.[21] 아버지 소우키치(惣吉)는 "너를 위해 글을 써줄 사람이 있겠느냐"라며 화를 냈지만, 훗날 판사, 경찰서장, 육해군 고관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들이 소우카쿠(惣角)의 제자 또는 후원자가 되어 제자들에게 대필을 시켰다. 그러나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신문을 읽는 등 최신 지식 습득에 열심이었다.

; 의심

의심이 많아 틈을 주는 것을 싫어했다. 음식은 상대가 독살 시험을 할 때까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 다케다 토키무네(武田時宗)를 데리고 검도가 다카노 사자부로(高野佐三郎)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내놓은 과자를 먹지 않고, 토키무네가 다카노 앞을 걷자 "다카노에게 뒤에서 껴안겨 찔리면 어쩌겠느냐"라고 꾸짖었다.[22] 토키무네가 "설마 다카노 선생님이 그러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설마, 설마 하다가 모두 살해당한다. 그것을 모르겠다면 돌아가라"고 심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 수리검술

소우카쿠가 수리검술을 가르칠 때, 발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웃었다. 소우카쿠가 "무엇이 우스운가"라고 묻자 제자는 "그런 뾰족한 것은 박히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하며, 천천히 동전을 꺼내 기둥에 던졌다. 동전은 기둥에 박혔고, 소우카쿠는 그것을 본 후 수리검술 지도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 이노우에 아키아키(井上鑑昭)와의 관계

친영체도(親英体道) 창시자 이노우에 아키아키(井上鑑昭)는 어린 시절(본인의 말에 따르면 12세) 삼촌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합기도 창시자)에게 이끌려 다이토류(大東流) 수련을 참관했다. 소우카쿠는 "얘야, 함께 수련하자"라고 권유했지만, 이노우에는 "나는 삼촌의 수련이 싫다. 삼촌의 수련을 해도 소용없고 강해지지 않는다"라며 다이토류 수련법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오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건방진 이노우에 소년을 소우카쿠는 꾸짖지 않고, "그렇구나 그렇구나"하고 웃으며 용서했다고 한다.

; 복장

외모에 신경을 써서, 하오리하카마에 산고모를 쓰고, 키높이 게다를 신었다.[24] 체격이 매우 작아 키는 150cm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25] 2·26사건 이후, 우익 단체가 횡행하고 시대가 긴박해지는 가운데, 폭도에게 습격당했을 때 보기 흉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문하생이 기증한 3척 5촌(약 105cm)의 철장을 짚고, 허리에 와키자시(脇差)를 찼다.[26]

; 신통력(영능력)

소우카쿠는 어린 시절 맹인 여동생을 돌보면서 기척에 민감해졌다. 23세 때 후쿠시마에서 격투를 벌이다 죽을 뻔한 중상을 입고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는데, 이 경험으로 신통력(영시)이 생겼다고 한다. 첫 만남에 경찰서장부터 평순사까지 계급 순서대로 나열했다(영시). 검도 사범 유카와 칸이치(湯川寛一)에게 부동금속법(不動金縛り法)을 걸어 움직임을 봉쇄했고, 문하생 호리카와 타이소(堀川太宗)에게는 발목잡기, 불러들이는 기술을 걸었다. 인근 마을의 역술가 나카가와 만노죠(中川万之丞)가 소우카쿠에게 가르쳤다는 증거로, 책자 『주법(呪法)』—호부와 민간요법-에 같은 기술의 기록이 있다.

참조

[1] 서적 Unlocking the Secrets of Aiki-Jujutsu NTC Publishing Group
[2] 웹사이트 History of Daito-ryu: prior to the 19th century http://www.daito-ryu[...] Daito-ryu Aikijujutsu Headquarters 2007-07-18
[3] 서적 Aizu-han kyōiku kō, Nihon Shiseki Kyōkai hen Tōkyō Daigaku Shuppankai
[4] 서적 Deadliest Men: The World's Deadliest Combatants Throughout the Ages Paladin Press
[5] 간행물 The Meiji Man The JMAS Newsletter
[6] 웹사이트 Famous Swordsmen of Japan (1): Kenkichi Sakakibara https://web.archive.[...] Aikido Journal 2012-08-06
[7] 웹사이트 History of Daito-ryu: Takeda Sōkaku http://www.daito-ryu[...] Daito-ryu Aikijujutsu Headquarters 2007-07-18
[8] 서적 Samurai Aikijutsu Dragon Books
[9] 서적 Aizu hanro Saigo Tanomo: Jijoden "Seiunki" shichu Tokyo Shoseki
[10] 서적 武田惣角と大東流合気柔術 改訂版
[11] 간행물 Daito ryu Aikijujtsu Aikinews
[12] 서적 会津の武田惣角
[1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al Dictionary of Japan Librairie Sansaisha
[14] 간행물 Daito-ryu Aikijujutsu; Hiden Mokuroku Aiki News
[15] 서적 Classical fighting arts of Japan Ko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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