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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무네카쓰 (에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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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무네카쓰는 에도 시대 센다이 번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아들이다. 형인 다테 타다무네 사후, 다테 쓰나무네를 보좌하며 번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쓰나무네가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되자 후견인으로서 센다이 번을 전횡하였고, 1671년 다테 소동(관분 사건)으로 인해 일관번이 개역되고, 자신은 토사 번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167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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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무네카쓰 (에도 시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 (한국어)다테 무네카쓰
이름 (한자)伊達宗勝
로마자 표기Date Munekatsu
출생1621년
사망1679년 12월 6일
사망 장소에도
매장 장소고치시 교코지
국적일본
관직
역임이치노세키 번 번주 (1660년 – 1671년)
가계
아버지다테 마사무네
어머니오카치노카타
배우자다케다 사다노부의 딸
파트너다치바나 다카쓰구의 딸
자녀다테 무네오키
기타 정보
시대에도 시대 전기
어릴 적 이름센가쓰마루
관위종4위하, 병부성 대보
가문다테 씨

2. 생애

겐로쿠 7년(1621년) 무쓰 센다이번 초대 번주인 다테 마사무네의 열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센카쓰마루(千勝丸)'''였다.

이복 형인 다테 다다무네가 생존해 있을 동안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만지 원년(1658년) 다다무네가 사망하고 다테 쓰나무네가 뒤를 잇자, 번조(藩祖) 마사무네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번 내에서 주목받았으며, 쓰나무네의 서형인 다무라 무네요시와 함께 번정을 보좌했다. 적자인 다테 무네오키의 정실에게 사카이 다다키요의 양녀를 맞이하는 등 막부와의 관계도 강했고, 만지 3년(1660년)에는 3만 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같은 해, 쓰나무네가 막부의 명령으로 은거하자, 그의 겨우 2세 된 장남인 다테 쓰나무라가 뒤를 잇게 되면서, 무네카쓰는 그의 후견인이 되어 센다이번을 전횡하게 되었다.

간분 11년(1671년), 다테 소동(관분 사건)이 일어나 센다이번은 개역(改易)의 위기에 처했다. 당시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 밑에서 로우(大老)로 권세를 떨치던 사카이 다다키요와 무네카쓰가 은밀히 계약을 맺고 센다이번을 사실상 장악하려 했다는 설도 있으나, 막부의 재판 결과, 번주 쓰나무라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무사히 넘어가고 센다이번은 안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네카쓰는 연장자인 후견인이면서 함부로 형벌을 내려 센다이번 정치의 혼란을 초래했고, 나아가 에도에서의 칼부림 사건이라는 불상사를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치노세키번은 개역되었다.[3] 무네카쓰 자신은 도사번주 야마우치 도요마사에게, 적남 무네오키는 부젠국 고쿠라번주 오가사와라 다다오에게, 그의 처자는 이요국 우와지마번의 지번 요시다번 주 다테 무네스미에게, 무네카쓰의 측실 2명과 자녀 4명(호노스케, 헤이조, 오타케, 오쓰마)은 이와데야마의 다테 무네토시에게 맡겨졌다. 이 처분으로 이치노세키 다테 가문은 무네카쓰 대에서 멸문했고, 이치노세키 번령 3만 석은 센다이 본번에 귀속되었으며, 가로인 니이츠마 타네자네 이하 이치노세키 번사 일동도 센다이 본번에 귀속되었다.

도사번으로 넘겨진 무네카쓰는 도사 군 고다카사카에 설치된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내다 엔보 7년(1679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향년 59세. 무덤은 고치시 고다이산에 있으며, 고치시 지정 사적(지정일: 쇼와 42년(1967년) 5월 13일)[4]이 되어 있다. 또한, 이치노세키시 간죠지에 일족의 묘가 있다.

2. 1. 야심찬 권력자

센다이번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의 열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다테 다다무네가 살아있을 때에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으나, 1658년 다다무네가 죽고 다테 쓰나무네가 뒤를 이으면서 마사무네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번 내에서 주목받았다. 쓰나무네가 난행을 일삼자, 쓰나무네의 형 다무라 무네요시와 함께 번의 정치를 돌보았다.[3]

1660년 센다이 번으로부터 3만 석의 영지를 분할받고 다이묘가 되었다. 이때 쓰나무네는 막부에 의해 은거를 명령받았고, 2살밖에 안 된 장남 다테 쓰나무라가 번주 자리를 이으면서 무네카쓰는 그 후견인이 되어 권력을 전횡하였다. 사카이 다다키요의 양녀를 아들 무네오키의 아내로 맞아들이며 막부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기도 했다.[3]

1666년 쓰나무라를 독살하고 직접 번주가 되려고까지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671년에는 다테 소동(관분 사건)이 일어나 센다이번은 개역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결국 무네카쓰는 함부로 형벌을 내려 센다이번 정치의 혼란을 초래하고, 에도에서의 칼부림 사건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일관번은 개역되었다.[3]

2. 2. 권력 장악과 전횡

1658년, 다테 다다무네가 사망하자 다테 마사무네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무네카쓰는 다테 쓰나무네가 뒤를 이으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쓰나무네가 난행을 일삼자, 무네카쓰는 쓰나무네가 아둔하다는 이유로 그의 형 다무라 무네요시와 함께 번의 정치를 돌보았다.[3] 사카이 다다키요의 양녀를 아들 무네오키의 아내로 맞아들이며 막부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했으며, 1660년에는 센다이 번으로부터 3만 석의 영지를 분할받고 다이묘가 되었다. 같은 해 쓰나무네는 막부에 의해 은거를 명령받았고, 2살 된 장남 쓰나무라가 번주 자리를 이으면서 무네카쓰는 그 후견인이 되어 권력을 잡고 번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3] 1666년에는 쓰나무라를 독살하고 직접 번주가 되려고까지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671년 다테 소동(관분 사건)이 일어나 센다이번은 개역 위기에 처했다. 무네카쓰는 연장자로서 후견인이었음에도 함부로 형벌을 내려 센다이번 정치의 혼란을 초래했고, 에도에서의 칼부림 사건이라는 불상사를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일관번은 개역되었다.[3]

2. 3. 다테 소동과 몰락

무네카쓰는 하라다 가문과 함께 센다이 번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꾀하였고, 그로 인해 발생한 영지 문제로 인해 가문들 사이의 분란이 커져갔다. 결국 하라다 가문과 아키 다테 가문 사이의 영지 분쟁이 일어나자 아키 다테 가문은 이를 막부에 제소하였고, 재판 과정에서 분쟁 당사자들이 칼싸움으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다테 소동으로 인하여 센다이 번은 개역의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무네카쓰는 소동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도사 번에 유배되었고, 이치노세키 번도 이때 개역되었다.[3] 아들 무네오키는 부젠 고쿠라 번에 유배되었고, 무네오키의 가족들은 이요 요시다 번으로 보내졌으며 무네카쓰의 남은 처자들은 이와테 산으로 보내졌다.

유배지에서 무네카쓰는 새로 지은 거대한 저택을 하사받고 500명의 가신을 거느리는 등 좋은 대접을 받았다. 또 1679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을 때 지어진 무덤의 묘석도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당의 이미지를 재고해야 한다는 설도 있다.

1671년에 발생한 다테 소동(관분 사건)으로 센다이 번은 개역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 밑에서 로우(大老)로 권세를 떨치던 사카이 타다키요와 무네카쓰가 은밀히 계약을 맺고 센다이 번을 사실상 장악하려 했다는 설도 있으나, 막부의 재판 결과, 번주 다테 쓰나무라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무사히 넘어가고 센다이 번은 안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네카쓰는 연장자인 후견인이면서 함부로 형벌을 내려 센다이 번 정치의 혼란을 초래했고, 나아가 에도에서의 칼부림 사건이라는 불상사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치노세키 번은 개역되었다.[3] 또한 무네카쓰의 가족들에게는 영유의 처분이 내려졌고, 무네카쓰 자신은 도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마사에게, 적남 무네오키는 부젠국 고쿠라 번주 오가사와라 다다오에게, 그의 처자는 이요국 우와지마 번의 지번 요시다 번 주 다테 무네스미에게, 무네카쓰의 측실 2명과 자녀 4명(호노스케, 헤이조, 오타케, 오쓰마)은 이와데야마의 다테 무네토시에게 맡겨졌다. 이 처분으로 이치노세키 다테 가문은 무네카쓰 대에서 멸문했고, 이치노세키 번령 3만 석은 센다이 본번에 귀속되었으며, 가로인 니이츠마 타네자네 이하 이치노세키 번사 일동도 센다이 본번에 귀속되었다.

도사 번으로 넘겨진 무네카쓰는 도사군 고다카사카에 설치된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내다 1679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향년 59세. 무덤은 고치시 고다이산에 있으며, 고치시 지정 사적(지정일: 1967년 5월 13일)[4]이 되어 있다. 또한, 이치노세키시 간죠지에 일족의 묘가 있다.

2. 4. 유배 생활과 죽음

무네카쓰는 하라다 가문과 함께 센다이 번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꾀하였고, 그로 인해 발생한 영지 문제로 인해 가문들 사이의 분란이 커져갔다. 결국 하라다 가문과 아키 다테 가문 사이의 영지 분쟁이 일어나자 아키 다테 가문은 이를 막부에 제소하였고, 재판 과정에서 분쟁 당사자들이 칼싸움으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다테 소동으로 인하여 센다이 번은 개역의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무네카쓰는 소동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도사 번에 유배되었고, 이치노세키 번도 이때 개역되었다.[3] 아들 무네오키는 부젠 고쿠라 번에 유배되었고, 무네오키의 가족들은 이요 요시다 번으로 보내졌으며 무네카쓰의 남은 처자들은 이와테 산으로 보내졌다. 유배지에서 무네카쓰는 새로 지은 거대한 저택을 하사받고 500명의 가신을 거느리는 등 좋은 대접을 받았다. 또 1679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을 때 지어진 무덤의 묘석도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당의 이미지를 재고해야 한다는 설도 있다.

도사 번으로 넘겨진 무네카쓰는 도사 군 고다카사카에 설치된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내다 엔보 7년(1679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향년 59세. 무덤은 고치 시 고다이산에 있으며, 고치 시 지정 사적(지정일: 쇼와 42년(1967년) 5월 13일)이다.[4] 또한, 이치노세키의 간죠지에 일족의 묘가 있다.

3. 가계도



'''와가가·와쿠야 이다가와의 관계'''

多田義広|다다 요시히로일본어다다 요시히로
┏ 多田勝吉|다다노 가쓰키치일본어
┗ 勝女|가쓰조일본어
┣━━━
伊達稙宗|다테 다네무네일본어 ━ 伊達晴宗|다테 하루무네일본어 ━ 伊達輝宗|다테 데루무네일본어 ━ 伊達政宗|다테 마사무네일본어
┏ 伊達宗実|다테 무네자네일본어
亘理元宗|와타리 모토무네일본어 ━ 亘理重宗|와타리 시게무네일본어 ━ 伊達定宗|다테 사다무네일본어 ━ 伊達宗重|다테 무네시게일본어



'''다치바나가·사카이가와의 관계'''

伊達政宗|다테 마사무네일본어
┏ 田村宗良|다무라 무네요시일본어
┳ 伊達忠宗|다테 다다무네일본어 ━ ╋ 伊達綱宗|다테 쓰나무네일본어 ━ 伊達綱村|다테 쓰나무라일본어
┗ 鍋姫|나베히메일본어
┣━━━━ 立花鑑虎|다치바나 아키토라일본어
┏ 立花忠茂|다치바나 다다모치일본어
高橋統増|다카하시 쓰네마스일본어 ━ ┫
┗ 立花種次|다치바나 다네쓰구일본어 ━━ 여자
┣━━━━━ 다테 무네오키
다테 무네카쓰
姉小路国影|아네코지 구니카게일본어 ━ ┏ 여자
┗ 여자
酒井忠清|사카이 다다키요일본어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arvard University Press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615-1867 https://archive.org/[...] Stamford University Press
[3] 문서 ""
[4] 웹사이트 文化財情報 史跡 伊達兵部宗勝墓 https://www.city.k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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