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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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쿄도 전차(도덴)는 1882년 일본 최초의 마차 철도로 시작하여, 1903년 전기 동력으로 전환된 후 도쿄 시내의 주요 대중교통 수단으로 발전했다. 1911년 도쿄 시가 인수하여 도쿄시 전기국으로 운영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관동 대지진을 거치며 노선 확장과 혼잡 문제를 겪었다. 1943년 도쿄도제 시행으로 도쿄도 교통국으로 이관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지하철과의 경쟁과 도로 정비로 인해 노선이 대폭 축소되었다. 현재는 아라카와선(도쿄 사쿠라 트램)만이 운행 중이며, 8500형, 9000형, 8800형, 8900형, 7700형 등 5가지 차량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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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전차 - [철도 노선]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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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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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 종류 | 노면 전차 |
노선 수 | 1 |
노선 | 아라카와 선 |
운영 기관 | 도쿄도 교통국 |
웹사이트 | https://www.kotsu.metro.tokyo.jp |
운영 정보 | |
개업 | 1903년 |
노선 길이 | 12.2 km |
정류장 수 | 30개 |
일일 승객 수 | 47,504명 (2018년) |
전력 방식 | 직류 600V (가공 전차선) |
최고 속도 | 40 km/h |
차량 정보 | |
차량 | 7700계 8500계 8800계 8900계 9000계 |
2. 역사
1872년(메이지 5년)경 일본 최초의 철도 개업과 거의 동시에 합승 마차(엔타로 마차)와 인력거가 등장했다. 1876년(메이지 9년)에는 합승 마차가 170대, 인력거가 2만 4000대 이상 활약했다.
도쿄 인구는 1873년(메이지 6년) 60만 명에서 1881년(메이지 14년)에는 114만 명으로 증가했다.. 대량 수송에 적합한 교통 기관으로 마차 철도 계획이 제기되었고, 1880년 (메이지 13년) 2월, 전 사쓰마 번사 타니모토 미치유키, 타네다 세이이치 등에 의해 신바시에서 니혼바시 혼초, 우에노, 아사쿠사를 거쳐 다시 혼초에 이르는 총 길이 10마일(약 16km)의 순환선 부설이 출원되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인가되었고, 일본 최초의 사철이 되는 '''도쿄 마차 철도 주식회사''' (자본금 30만 엔, 본사 시바구시오도메쵸 2초메)가 설립되었다.
마차 철도의 영업은 1년 반 후인 1882년 (메이지 15년) 6월 25일에 먼저 신바시 - 니혼바시 구간에서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순환선이 전선 개업했다.. 개업 초에는 인력거부들의 반대 운동에 부딪혔지만, 도쿄 시의 인구 증가와 우에노・아사쿠사 방면으로의 유람 수송을 배경으로 마차 철도는 큰 성공을 거두어 개업 20년째인 1902년 (메이지 35년)에는 연수입 140만 엔, 객차 300량과 마필 2000두를 보유하고, 다객 시에는 1시간에 60-70대나 되는 고빈도 운전을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897년 (메이지 30년) 12월에는 시나가와・야쓰야마시타 - 신바시 사이에 '''시나가와 마차 철도'''가 개업했지만, 1899년 (메이지 32년)에 도쿄 마차 철도에 흡수 합병되었다.
마차 철도는 도쿄 시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 반면, 과제도 적지 않았다. 경영적으로는 말 사육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 승객의 증가에 대해 운행 횟수가 한계에 달해 더 이상의 수요 확대를 대응할 수 없는 것이 과제였다.. 또한 말의 굽에 의해 노면이 손상되고, 말똥이 섞인 먼지가 흩날리는 것에 대한 연선 주민들의 불만은 끊이지 않았다.
1889년 (메이지 22년), 오쿠라 기하치로, 후지오카 시스케 등 도쿄 전등 관계자와 다치카와 유지로 등의 실업가들이 정부에 전차 부설 계획을 출원했다. 그러나 당시 전기 철도 기술은 초기 단계였고, 시기상조로 여겨져 인가되지 않았다.. 1890년 (메이지 23년)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제3회 내국 권업 박람회에서 도쿄 전등이 미국에서 구입한 전차의 데모 운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여, 전차 부설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895년 (메이지 28년) 교토 전기 철도[3]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전기 철도가 개업했다.
1893년 (메이지 26년)부터 1899년 (메이지 32년)까지 도쿄에서는 35개 회사와 출원이 잇따라 특허권 획득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했다. 도쿄 마차 철도, 아마미야 게이지로 등의 도쿄 전차 철도, 후지야마 라이타 등의 도쿄 전기 철도, 미쓰히카리 쓰루마쓰 등의 도쿄 자동 철도 4사의 대립이 격렬했고, 자유당과 진보당의 정쟁, 전차의 민영/시영 논쟁 등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도쿄 시구 개정 위원회의 개입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1900년 (메이지 33년), 내무성은 도쿄 시가이 철도, 오카다 하루에타 등이 설립한 가와사키 전기 철도, 그리고 도쿄 마차 철도 3사에 특허를 부여했다.
1903년 (메이지 36년)
- '''8월 22일:''' 마차 철도의 '''도쿄 마차 철도'''가 동력을 말에서 전기로 바꾸면서 탄생한 '''도쿄 전차 철도'''(통칭: 전차, 동전, 전철)가 시나가와 - 신바시 간을 전철화하여 개업했다.
- '''9월 15일:''' '''도쿄 시가이 철도'''(통칭: 거리 철)가 스키야바시 - 간다바시 간에서 개업했다.
- 1904년 (메이지 37년) 12월 8일, 가와사키 전기 철도에서 개칭한 '''도쿄 전기 철도'''(통칭: 외호선, 전기)가 도바시 - 오차노미즈바시 간에서 개업했다.
3개 회사에 의해 별도로 정비된 노면 전차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했고, 운임 공통화 요구가 커졌다. 1906년 (메이지 39년) 9월 11일, 3사는 합병하여 '''도쿄 철도'''(통칭: 동철)를 설립하고, 다음날 운임을 4전 균일로 인상했다. 이는 격렬한 반대 운동을 야기했고, 히비야 공원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전차에 투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전차 사업의 공익성이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도쿄에서도 전차의 시유 시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도쿄시는 오자키 유키오시장의 주도로 도쿄 철도의 시유화를 추진했으나, 매수 가격 문제와 정부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1909년 (메이지 42년) 체신 대신 고토 신페이의 중재와 1911년 (메이지 44년) 히라타 도스케내무대신의 권고로 매수 교섭이 재개되어, 7월 6일 매수 가격 6416만 5518엔[14]으로 합의되었다. 1911년 8월 1일, 도쿄 시내의 노면 전차는 '''도쿄시 전기국'''에 인계되어 '''도쿄시전'''이 탄생했다.
1911년 도쿄 시(Tokyo City)가 도쿄 철도를 매입하고 전기국을 설립하여 도쿄 시 노면전차(東京市電) 시스템을 개시했다. 도쿄 시전 발족 후, 도쿄시 전기국은 노선망의 대규모 확충을 도모하여, 1913년 (다이쇼 2년)부터 1916년 (다이쇼 5년)까지 4년 동안 총 1317만 6000엔을 투입하여 미완성선 128.7km를 정비하는 제1차 계속 사업 계획에 착수했다. 도쿄 시전은 발족 시점에 이미 영업 킬로미터 98.8km (궤도 연장 192.4 km), 국원 7861명, 차량 1054량, 하루 승객 수 약 51만 명이라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쿄 철도 시대에 특허권을 취득하여 개업에 이르지 못한 미완성선도 180km 정도를 인계받았으며, 시유화로 전차 정비가 진행되면서 시민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적극적인 확대 방침에 따라, 도쿄 시전의 영업 킬로미터는 시유화 이후 1914년 (다이쇼 3년) 말까지 5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30km 이상 늘어 128.0 km (궤도 연장 255.3 km)가 되었으며, 시내뿐만 아니라 메구로, 시부야, 신주쿠, 오쓰카, 스가모 등 당시 아직 도쿄시 외의 군부였던 지역에도 전차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금융 시장의 혼란으로 시채 발행에 의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는 대전 경기라고 불리는 호황으로 물가가 현저하게 폭등하여 노선 정비에도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1915년 (다이쇼 4년) 2월에는 시회의 의결을 얻어 수정 예산안과 사업 기간의 2년 연장을 결정했지만, 1915년도의 신규 개업은 불과 0.4 km, 1916년 (다이쇼 5년)도는 전무에 그쳐, 대규모 신선 건설은 시유화 후 수년간 추진된 것만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운임도 물가 상승에 따라 1916년 7월에는 편도 4전에서 5전(왕복 9전), 1920년 (다이쇼 9년) 6월에는 7전(왕복 14전)으로 인상되었다.
한편, 호황으로 교통 수요도 현저하게 증가하여, 하루 승객 수는 1916년도의 약 72만 명에서 1919년 (다이쇼 8년)도에는 약 108만 명, 1922년 (다이쇼 11년)도에는 약 131만 4000명으로 6년 남짓한 기간에 약 1.8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영업 계수 34.3 을 기록한 1917년 (다이쇼 6년)경부터 경영 상황이 호전되어, 이후에도 1921년 (다이쇼 10년)도, 1922년도에는 감채 기금의 적립 및 시 경제에의 전입을 행하여도 400만 엔 이상의 잉여금을 계상하는 등 대폭적인 흑자 경영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의 도쿄 시전은 거의 유일한 근대적 교통 기관으로서 시내 교통의 8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 전반에 걸친 시기는 바로 도쿄 시전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승객이 늘어나도 이를 수송할 노선이나 전차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황금기의 시전에서는 만성적인 혼잡이 큰 문제가 되었다. 특히 1910년대부터 등장한 통근 러시 시간대의 혼잡은 심각하여, 승차까지 30분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나, 다 타지 못한 승객이 차 외부에까지 매달리는 현상이 상시화되어, "도쿄 명물 만원 전차"로 당시의 그림 엽서나 속요 (도쿄절)의 소재로 사용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 시 전기국은 일본의 노면 전차 차량으로는 최초로 3도어 전차 1653형 200량을 제조한 외에 단차라고 불리는 소형 전차의 2량 연결 운전을 하는 등의 대책을 취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1920년도부터 새롭게 제2차 계속 사업 계획에 착수했다. 제2차 계속 사업 계획은 총 사업비 1억 3230만 엔을 투입하여 미완성선 약 80km의 건설과 차량 2050량의 신조 및 개조, 차고 15곳과 변전소 20곳의 신설, 더 나아가 기존선의 가선 및 궤도의 개량도 실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지만, 결국 관동 대지진의 발생으로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되었다.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도쿄시 전차는 전력 설비 기능 정지로 인해 전 노선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지진 후 대화재로 전기국 본청사, 영업소 4곳, 차고 5곳, 차량 공장 등이 불탔으며, 소실된 전차는 779량에 달했다. 궤도 152km, 가선 66km, 교량 26곳 등 설비 피해가 발생했으며, 피해 총액은 시전차만 2500만 엔, 전기국 전체로는 4000만 엔이었다.[16]
전기국은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오사카시 전기국 등의 협력으로 복구에 착수했다. 피해가 적었던 야마노테 방면부터 복구하여, 9월 6일 신메이초 차고 앞 - 우에노 미쓰바시 구간, 9월 8일 아오야마 6초메 - 사쿠라다몬, 요츠야 시오초 - 센가쿠지 앞 구간 운행을 재개했다. 시타마치 방면도 10월 20일 야나기시마 - 가메자와초 구간 운행 재개를 시작으로, 1924년 6월 12일 전 노선 복구가 완료되었다. 1924년 1월 18일부터는 도영 버스의 전신인 도쿄 시영 버스 운행이 시작되어, 시전차 복구 후에도 시민들의 교통 수단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 이후, 도쿄 시전 이용자 수는 1924년 1일 평균 136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1934년에는 약 78.8만 명까지 줄었다. 이는 자동차의 유용성이 널리 인식되면서 일본 국내 모터리제이션이 시작되었고,[17] 노선 버스 및 택시 사업자와의 경쟁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18] 또한, 성전철과 사철이 교외로 노선망을 확장한 반면, 시전은 기존 시가지에만 노선을 가지고 있어 교통 수요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1935년에는 시채 상환 부담이 커져, 승객 감소와 함께 시채 비용이 운임 수입의 96%까지 증가했다.[19]
1943년(쇼와 18년) 7월 1일 도쿄도제 시행으로 시 전기국은 도쿄도 교통국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도쿄도 전차'''(도덴)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잠시 동안 "시전차"로 불렸다.[28]
1944년(쇼와 19년) 5월 4일에는 전시 체제 하에서 불요불급 노선으로 간주된 아래 9개 구간의 운행이 중단되었다.[28]
- 덴겐지바시 - 에비스초자마루 간
- 야라이시타 - 에도가와바시 간
- 시오도메 - 미하라바시 간
- 도쿄역 (마루노우치 출구) 남쪽 출구 -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 맞은편) - 도청 앞 (현・미쓰비시 UFJ 은행 본점 앞)
- 닌교초 - 료고쿠 (니혼바시 료고쿠) 간
- 도쿄항 입구 - 시바우라 2초메 (선로교 앞) 간 (철거하지 않고, 1969년 제4차 도덴 철거 시까지 차량 공장 인입선으로 존속)
- 스키야바시 - 도바시 간
- 오차노미즈 - 니시키초 가시 간
- 스이텐구마에 - 도슈바시 (현・도쿄 시티 에어 터미널 앞) 간
1945년 일본 점령 기간 동안 도쿄도 전차(도덴) 네트워크는 천천히 발전했다.[28][29] 1952년에는 히가시-아라카와역과 이마이바시역 사이의 이마이선 구간이 트롤리 버스로 대체되었다.[28][29]
1959년 1월 24일, 도 교통국은 "노면 전차는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공식 견해를 발표하고, 국가공안위원회와 경시청에 궤도 내 자동차 운행 단속 강화 요청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29일, 경시청은 札の辻 (札의 辻) - 아카바네바시 간의 궤도 철거를 요청했고, 6월 12일에는 경시청 통달에 의해 궤도 부지 내 자동차 진입이 실시되었다.
1961년 3월 17일, 긴자통 연합회의 "긴자 거리 노면 전차 철폐에 대해" 청원은 도의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7월에는 수도권 정비 사업 계획에 따라 도덴과 요코하마 시전 철거가 지시되었고, 9월에는 수도권 정비 심의회가 도덴 스기나미선 철거를 권고했다.
1962년 6월, 정부는 도덴 이이다바시선 및 아오야마선의 일부 철거 방침을 결정하고 도에 대해 실시를 강력히 요청했다.
1963년 10월 1일,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에 따른 도로 정비를 위해 기타아오야마 1초메 – 미야케자카 간 및 한조몬 – 구단시타 간이 폐지되었다. 12월 1일에는 영단 지하철 오기쿠보선과의 경쟁으로 인해 스기나미선 신주쿠역 앞 - 오기쿠보역 앞 간이 폐지되었다.
1967년 1월 1일, 교통국은 재정 재건 단체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1972년 11월 12일까지 재정 재건 계획에 따라 7단계에 걸쳐 도덴 철거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노선이 폐지되고, 와세다 - 오지(오지 역 앞) - 미노와바시 구간만 남게 되었다.
1974년(쇼와 49년)10월 1일, 잔존 구간 철거 계획이 철회되고 영구화가 결정되면서 운행 계통이 단일화되고 "아라카와선"이라는 명칭이 채택되었다.[31]
1977년(쇼와 52년)10월 1일, 일부 차량에서 원맨화가 시작되었다.[31] 1978년(쇼와 53년)10월 1일에는 전 차량이 원맨화되었다.
1990년(헤이세이 2년)4월, 28년 만의 신형 차량인 85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1993년(헤이세이 5년)11월 11일에는 선불 카드(T카드)가 도입되었고, 1994년(헤이세이 6년)10월 1일에는 버스 공통 카드 사용이 시작되었다.
2000년(헤이세이 12년)11월 11일, 아라카와 1초메 정류장이 신설되었다.
2007년(헤이세이 19년)에는
- 3월 18일: PASMO 사용 시작 (동시에 Suica로 승차 가능).
- 5월 27일: 9000형 운행 시작. 동시에 아라카와 전차 영업소 내에 구형 차량(5500형・7500형) 전시 시설이 설치됨.
2009년(헤이세이 21년)4월 26일, 88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2015년(헤이세이 27년)9월 18일, 89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2016년(헤이세이 28년)5월 30일, 77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2017년(헤이세이 29년)4월 28일, 아라카와선의 애칭이 "도쿄 사쿠라 트램"으로 결정되었다.[32]
2. 1. 탄생과 발전 (1882년 ~ 1943년)
1872년(메이지 5년)경 일본 최초의 철도 개업과 거의 동시에 합승 마차(엔타로 마차)와 인력거가 등장했다. 1876년(메이지 9년)에는 합승 마차가 170대, 인력거가 2만 4000대 이상 활약했다.도쿄 인구는 1873년(메이지 6년) 60만 명에서 1881년(메이지 14년)에는 114만 명으로 증가했다.. 대량 수송에 적합한 교통 기관으로 마차 철도 계획이 제기되었고, 1880년 (메이지 13년) 2월, 전 사쓰마 번사 타니모토 미치유키, 타네다 세이이치 등에 의해 신바시에서 니혼바시 혼초, 우에노, 아사쿠사를 거쳐 다시 혼초에 이르는 총 길이 10마일(약 16km)의 순환선 부설이 출원되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인가되었고, 일본 최초의 사철이 되는 '''도쿄 마차 철도 주식회사''' (자본금 30만 엔, 본사 시바구시오도메쵸 2초메)가 설립되었다.
마차 철도의 영업은 1년 반 후인 1882년 (메이지 15년) 6월 25일에 먼저 신바시 - 니혼바시 구간에서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순환선이 전선 개업했다.. 개업 초에는 인력거부들의 반대 운동에 부딪혔지만, 도쿄 시의 인구 증가와 우에노・아사쿠사 방면으로의 유람 수송을 배경으로 마차 철도는 큰 성공을 거두어 개업 20년째인 1902년 (메이지 35년)에는 연수입 140만 엔, 객차 300량과 마필 2000두를 보유하고, 다객 시에는 1시간에 60-70대나 되는 고빈도 운전을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897년 (메이지 30년) 12월에는 시나가와・야쓰야마시타 - 신바시 사이에 '''시나가와 마차 철도'''가 개업했지만, 1899년 (메이지 32년)에 도쿄 마차 철도에 흡수 합병되었다.
마차 철도는 도쿄 시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 반면, 과제도 적지 않았다. 경영적으로는 말 사육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 승객의 증가에 대해 운행 횟수가 한계에 달해 더 이상의 수요 확대를 대응할 수 없는 것이 과제였다.. 또한 말의 굽에 의해 노면이 손상되고, 말똥이 섞인 먼지가 흩날리는 것에 대한 연선 주민들의 불만은 끊이지 않았다.
1903년 (메이지 36년)
- '''8월 22일:''' 마차 철도의 '''도쿄 마차 철도'''가 동력을 말에서 전기로 바꾸면서 탄생한 '''도쿄 전차 철도''' (전철)가 시나가와 - 신바시 구간을 개통.
- '''9월 15일:''' '''도쿄 시가이 철도''' (가이테츠)가 스키야바시 - 간다바시 구간을 개통[20]
2. 1. 1. 마차 철도 시대 (1882년 ~ 1903년)
1872년(메이지 5년)경 일본 최초의 철도 개업과 거의 동시에 합승 마차(엔타로 마차)와 인력거가 등장했다. 1876년(메이지 9년)에는 합승 마차가 170대, 인력거가 2만 4000대 이상 활약했다.도쿄 인구는 1873년(메이지 6년) 60만 명에서 1881년(메이지 14년)에는 114만 명으로 증가했다.. 대량 수송에 적합한 교통 기관으로 마차 철도 계획이 제기되었고, 1880년 (메이지 13년) 2월, 전 사쓰마 번사 타니모토 미치유키, 타네다 세이이치 등에 의해 신바시에서 니혼바시 혼초, 우에노, 아사쿠사를 거쳐 다시 혼초에 이르는 총 길이 10마일(약 16km)의 순환선 부설이 출원되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인가되었고, 일본 최초의 사철이 되는 '''도쿄 마차 철도 주식회사''' (자본금 30만 엔, 본사 시바구시오도메쵸 2초메)가 설립되었다.
마차 철도의 영업은 1년 반 후인 1882년 (메이지 15년) 6월 25일에 먼저 신바시 - 니혼바시 구간에서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순환선이 전선 개업했다.. 개업 초에는 인력거부들의 반대 운동에 부딪혔지만, 도쿄 시의 인구 증가와 우에노・아사쿠사 방면으로의 유람 수송을 배경으로 마차 철도는 큰 성공을 거두어 개업 20년째인 1902년 (메이지 35년)에는 연수입 140만 엔, 객차 300량과 마필 2000두를 보유하고, 다객 시에는 1시간에 60-70대나 되는 고빈도 운전을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897년 (메이지 30년) 12월에는 시나가와・야쓰야마시타 - 신바시 사이에 '''시나가와 마차 철도'''가 개업했지만, 1899년 (메이지 32년)에 도쿄 마차 철도에 흡수 합병되었다.
마차 철도는 도쿄 시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 반면, 과제도 적지 않았다. 경영적으로는 말 사육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 승객의 증가에 대해 운행 횟수가 한계에 달해 더 이상의 수요 확대를 대응할 수 없는 것이 과제였다.. 또한 말의 굽에 의해 노면이 손상되고, 말똥이 섞인 먼지가 흩날리는 것에 대한 연선 주민들의 불만은 끊이지 않았다.
- 1903년 (메이지 36년)
- '''8월 22일:''' 마차 철도의 '''도쿄 마차 철도'''가 동력을 말에서 전기로 바꾸면서 탄생한 '''도쿄 전차 철도''' (전철)가 시나가와 - 신바시 구간을 개통.
- '''9월 15일:''' '''도쿄 시가이 철도''' (가이테츠)가 스키야바시 - 간다바시 구간을 개통[20]
2. 1. 2. 전차 시대의 개막과 경쟁 (1903년 ~ 1911년)
1889년 (메이지 22년), 오쿠라 기하치로, 후지오카 시스케 등 도쿄 전등 관계자와 다치카와 유지로 등의 실업가들이 정부에 전차 부설 계획을 출원했다. 그러나 당시 전기 철도 기술은 초기 단계였고, 시기상조로 여겨져 인가되지 않았다. 1890년 (메이지 23년)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제3회 내국 권업 박람회에서 도쿄 전등이 미국에서 구입한 전차의 데모 운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여, 전차 부설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895년 (메이지 28년) 교토 전기 철도[3]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전기 철도가 개업했다.1893년 (메이지 26년)부터 1899년 (메이지 32년)까지 도쿄에서는 35개 회사와 출원이 잇따라 특허권 획득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했다. 도쿄 마차 철도, 아마미야 게이지로 등의 도쿄 전차 철도, 후지야마 라이타 등의 도쿄 전기 철도, 미쓰히카리 쓰루마쓰 등의 도쿄 자동 철도 4사의 대립이 격렬했고, 자유당과 진보당의 정쟁, 전차의 민영/시영 논쟁 등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도쿄 시구 개정 위원회의 개입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1900년 (메이지 33년), 내무성은 도쿄 시가이 철도, 오카다 하루에타 등이 설립한 가와사키 전기 철도, 그리고 도쿄 마차 철도 3사에 특허를 부여했다.
1903년 (메이지 36년) 8월 22일, 도쿄 마차 철도에서 개칭한 '''도쿄 전차 철도'''(통칭: 전차, 동전, 전철)가 시나가와 - 신바시 간을 전철화하여 개업했다. 같은 해 9월 15일, '''도쿄 시가이 철도'''(통칭: 거리 철)가 스키야바시 - 간다바시 간에서 개업했다. 1904년 (메이지 37년) 12월 8일, 가와사키 전기 철도에서 개칭한 '''도쿄 전기 철도'''(통칭: 외호선, 전기)가 도바시 - 오차노미즈바시 간에서 개업했다.
3개 회사에 의해 별도로 정비된 노면 전차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했고, 운임 공통화 요구가 커졌다. 1906년 (메이지 39년) 9월 11일, 3사는 합병하여 '''도쿄 철도'''(통칭: 동철)를 설립하고, 다음날 운임을 4전 균일로 인상했다. 이는 격렬한 반대 운동을 야기했고, 히비야 공원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전차에 투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전차 사업의 공익성이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도쿄에서도 전차의 시유 시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도쿄시는 오자키 유키오시장의 주도로 도쿄 철도의 시유화를 추진했으나, 매수 가격 문제와 정부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1909년 (메이지 42년) 체신 대신 고토 신페이의 중재와 1911년 (메이지 44년) 히라타 도스케내무대신의 권고로 매수 교섭이 재개되어, 7월 6일 매수 가격 6416만 5518엔[14]으로 합의되었다. 1911년 8월 1일, 도쿄 시내의 노면 전차는 '''도쿄시 전기국'''에 인계되어 '''도쿄시전'''이 탄생했다.
2. 1. 3. 제1차 세계 대전과 시전 황금기 (1911년 ~ 1923년)
1911년 도쿄 시(Tokyo City)가 도쿄 철도를 매입하고 전기국을 설립하여 도쿄 시 노면전차(東京市電) 시스템을 개시했다. 도쿄 시전 발족 후, 도쿄시 전기국은 노선망의 대규모 확충을 도모하여, 1913년 (다이쇼 2년)부터 1916년 (다이쇼 5년)까지 4년 동안 총 1317만 6000엔을 투입하여 미완성선 128.7km를 정비하는 제1차 계속 사업 계획에 착수했다. 도쿄 시전은 발족 시점에 이미 영업 킬로미터 98.8km (궤도 연장 192.4 km), 국원 7861명, 차량 1054량, 하루 승객 수 약 51만 명이라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쿄 철도 시대에 특허권을 취득하여 개업에 이르지 못한 미완성선도 180km 정도를 인계받았으며, 시유화로 전차 정비가 진행되면서 시민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적극적인 확대 방침에 따라, 도쿄 시전의 영업 킬로미터는 시유화 이후 1914년 (다이쇼 3년) 말까지 5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30km 이상 늘어 128.0 km (궤도 연장 255.3 km)가 되었으며, 시내뿐만 아니라 메구로, 시부야, 신주쿠, 오쓰카, 스가모 등 당시 아직 도쿄시 외의 군부였던 지역에도 전차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금융 시장의 혼란으로 시채 발행에 의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는 대전 경기라고 불리는 호황으로 물가가 현저하게 폭등하여 노선 정비에도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1915년 (다이쇼 4년) 2월에는 시회의 의결을 얻어 수정 예산안과 사업 기간의 2년 연장을 결정했지만, 1915년도의 신규 개업은 불과 0.4 km, 1916년 (다이쇼 5년)도는 전무에 그쳐, 대규모 신선 건설은 시유화 후 수년간 추진된 것만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운임도 물가 상승에 따라 1916년 7월에는 편도 4전에서 5전(왕복 9전), 1920년 (다이쇼 9년) 6월에는 7전(왕복 14전)으로 인상되었다.
한편, 호황으로 교통 수요도 현저하게 증가하여, 하루 승객 수는 1916년도의 약 72만 명에서 1919년 (다이쇼 8년)도에는 약 108만 명, 1922년 (다이쇼 11년)도에는 약 131만 4000명으로 6년 남짓한 기간에 약 1.8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영업 계수 34.3 을 기록한 1917년 (다이쇼 6년)경부터 경영 상황이 호전되어, 이후에도 1921년 (다이쇼 10년)도, 1922년도에는 감채 기금의 적립 및 시 경제에의 전입을 행하여도 400만 엔 이상의 잉여금을 계상하는 등 대폭적인 흑자 경영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의 도쿄 시전은 거의 유일한 근대적 교통 기관으로서 시내 교통의 8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 전반에 걸친 시기는 바로 도쿄 시전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승객이 늘어나도 이를 수송할 노선이나 전차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황금기의 시전에서는 만성적인 혼잡이 큰 문제가 되었다. 특히 1910년대부터 등장한 통근 러시 시간대의 혼잡은 심각하여, 승차까지 30분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나, 다 타지 못한 승객이 차 외부에까지 매달리는 현상이 상시화되어, "도쿄 명물 만원 전차"로 당시의 그림 엽서나 속요 (도쿄절)의 소재로 사용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 시 전기국은 일본의 노면 전차 차량으로는 최초로 3도어 전차 1653형 200량을 제조한 외에 단차라고 불리는 소형 전차의 2량 연결 운전을 하는 등의 대책을 취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1920년도부터 새롭게 제2차 계속 사업 계획에 착수했다. 제2차 계속 사업 계획은 총 사업비 1억 3230만 엔을 투입하여 미완성선 약 80km의 건설과 차량 2050량의 신조 및 개조, 차고 15곳과 변전소 20곳의 신설, 더 나아가 기존선의 가선 및 궤도의 개량도 실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지만, 결국 관동 대지진의 발생으로 재검토를 불가피하게 되었다.
2. 1. 4. 관동 대지진과 복구 (1923년 ~ 1943년)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도쿄시 전차는 전력 설비 기능 정지로 인해 전 노선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지진 후 대화재로 전기국 본청사, 영업소 4곳, 차고 5곳, 차량 공장 등이 불탔으며, 소실된 전차는 779량에 달했다. 궤도 152km, 가선 66km, 교량 26곳 등 설비 피해가 발생했으며, 피해 총액은 시전차만 2500만 엔, 전기국 전체로는 4000만 엔이었다.[16]전기국은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오사카시 전기국 등의 협력으로 복구에 착수했다. 피해가 적었던 야마노테 방면부터 복구하여, 9월 6일 신메이초 차고 앞 - 우에노 미쓰바시 구간, 9월 8일 아오야마 6초메 - 사쿠라다몬, 요츠야 시오초 - 센가쿠지 앞 구간 운행을 재개했다. 시타마치 방면도 10월 20일 야나기시마 - 가메자와초 구간 운행 재개를 시작으로, 1924년 6월 12일 전 노선 복구가 완료되었다. 1924년 1월 18일부터는 도영 버스의 전신인 도쿄 시영 버스 운행이 시작되어, 시전차 복구 후에도 시민들의 교통 수단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 이후, 도쿄 시전 이용자 수는 1924년 1일 평균 136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1934년에는 약 78.8만 명까지 줄었다. 이는 자동차의 유용성이 널리 인식되면서 일본 국내 모터리제이션이 시작되었고,[17] 노선 버스 및 택시 사업자와의 경쟁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18] 또한, 성전철과 사철이 교외로 노선망을 확장한 반면, 시전은 기존 시가지에만 노선을 가지고 있어 교통 수요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1935년에는 시채 상환 부담이 커져, 승객 감소와 함께 시채 비용이 운임 수입의 96%까지 증가했다.[19]
2. 2. 도쿄도 전차 시대 (1943년 ~ 현재)
1943년(쇼와 18년) 7월 1일 도쿄도제 시행으로 시 전기국은 도쿄도 교통국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도쿄도 전차'''(도덴)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잠시 동안 "시전차"로 불렸다.[28]1944년(쇼와 19년) 5월 4일에는 전시 체제 하에서 불요불급 노선으로 간주된 아래 9개 구간의 운행이 중단되었다.[28]
- 덴겐지바시 - 에비스초자마루 간
- 야라이시타 - 에도가와바시 간
- 시오도메 - 미하라바시 간
- 도쿄역 (마루노우치 출구) 남쪽 출구 -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 맞은편) - 도청 앞 (현・미쓰비시 UFJ 은행 본점 앞)
- 닌교초 - 료고쿠 (니혼바시 료고쿠) 간
- 도쿄항 입구 - 시바우라 2초메 (선로교 앞) 간 (철거하지 않고, 1969년 제4차 도덴 철거 시까지 차량 공장 인입선으로 존속)
- 스키야바시 - 도바시 간
- 오차노미즈 - 니시키초 가시 간
- 스이텐구마에 - 도슈바시 (현・도쿄 시티 에어 터미널 앞) 간
1945년 일본 점령 기간 동안 도쿄도 전차(도덴) 네트워크는 천천히 발전했다.[28][29] 1952년에는 히가시-아라카와역과 이마이바시역 사이의 이마이선 구간이 트롤리 버스로 대체되었다.[28][29]
1959년 1월 24일, 도 교통국은 "노면 전차는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공식 견해를 발표하고, 국가공안위원회와 경시청에 궤도 내 자동차 운행 단속 강화 요청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29일, 경시청은 札の辻 (札의 辻) - 아카바네바시 간의 궤도 철거를 요청했고, 6월 12일에는 경시청 통달에 의해 궤도 부지 내 자동차 진입이 실시되었다.
1961년 3월 17일, 긴자통 연합회의 "긴자 거리 노면 전차 철폐에 대해" 청원은 도의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7월에는 수도권 정비 사업 계획에 따라 도덴과 요코하마 시전 철거가 지시되었고, 9월에는 수도권 정비 심의회가 도덴 스기나미선 철거를 권고했다.
1962년 6월, 정부는 도덴 이이다바시선 및 아오야마선의 일부 철거 방침을 결정하고 도에 대해 실시를 강력히 요청했다.
1963년 10월 1일,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에 따른 도로 정비를 위해 기타아오야마 1초메 – 미야케자카 간 및 한조몬 – 구단시타 간이 폐지되었다. 12월 1일에는 영단 지하철 오기쿠보선과의 경쟁으로 인해 스기나미선 신주쿠역 앞 - 오기쿠보역 앞 간이 폐지되었다.
1967년 1월 1일, 교통국은 재정 재건 단체로 지정되었다.
1974년 10월 1일, 남은 궤도를 폐지하는 계획이 취소되었다. 남은 노선은 아라카와선이라는 단일 노선으로 통합되었다.
1978년: 1인 운전이 시작되었다.
1990년: 8500계 차량이 도입되었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디자인이다.
2000년: 두 기존 역 사이에 새로운 역인 가 개통되었다.
2007년: 9000계 차량이 도입될 예정이었다.
2. 2. 1. 도제 시행과 전시 체제 (1943년 ~ 1945년)
1943년(쇼와 18년) 7월 1일 도쿄도제 시행으로 시 전기국은 도쿄도 교통국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도쿄도 전차'''(도덴)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잠시 동안 "시전차"로 불렸다.[28]1944년(쇼와 19년) 5월 4일에는 전시 체제 하에서 불요불급 노선으로 간주된 아래 9개 구간의 운행이 중단되었다.[28]
- 덴겐지바시 - 에비스초자마루 간
- 야라이시타 - 에도가와바시 간
- 시오도메 - 미하라바시 간
- 도쿄역 (마루노우치 출구) 남쪽 출구 -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 맞은편) - 도청 앞 (현・미쓰비시 UFJ 은행 본점 앞)
- 닌교초 - 료고쿠 (니혼바시 료고쿠) 간
- 도쿄항 입구 - 시바우라 2초메 (선로교 앞) 간 (철거하지 않고, 1969년 제4차 도덴 철거 시까지 차량 공장 인입선으로 존속)
- 스키야바시 - 도바시 간
- 오차노미즈 - 니시키초 가시 간
- 스이텐구마에 - 도슈바시 (현・도쿄 시티 에어 터미널 앞) 간
2. 2. 2. 전후 부흥과 쇠퇴 (1945년 ~ 1972년)
1945년 일본 점령 기간 동안 도쿄도 전차(도덴) 네트워크는 천천히 발전했다.[28][29] 1952년에는 히가시-아라카와역과 이마이바시역 사이의 이마이선 구간이 트롤리 버스로 대체되었다.[28][29]1959년 1월 24일, 도 교통국은 "노면 전차는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공식 견해를 발표하고, 국가공안위원회와 경시청에 궤도 내 자동차 운행 단속 강화 요청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29일, 경시청은 札の辻 (札의 辻) - 아카바네바시 간의 궤도 철거를 요청했고, 6월 12일에는 경시청 통달에 의해 궤도 부지 내 자동차 진입이 실시되었다.
1961년 3월 17일, 긴자통 연합회의 "긴자 거리 노면 전차 철폐에 대해" 청원은 도의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7월에는 수도권 정비 사업 계획에 따라 도덴과 요코하마 시전 철거가 지시되었고, 9월에는 수도권 정비 심의회가 도덴 스기나미선 철거를 권고했다.
1962년 6월, 정부는 도덴 이이다바시선 및 아오야마선의 일부 철거 방침을 결정하고 도에 대해 실시를 강력히 요청했다.
1963년 10월 1일,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에 따른 도로 정비를 위해 기타아오야마 1초메 – 미야케자카 간 및 한조몬 – 구단시타 간이 폐지되었다. 12월 1일에는 영단 지하철 오기쿠보선과의 경쟁으로 인해 스기나미선 신주쿠역 앞 - 오기쿠보역 앞 간이 폐지되었다.
1967년 1월 1일, 교통국은 재정 재건 단체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1972년 11월 12일까지 재정 재건 계획에 따라 7단계에 걸쳐 도덴 철거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노선이 폐지되고, 와세다 - 오지(오지 역 앞) - 미노와바시 구간만 남게 되었다.
2. 2. 3. 아라카와선 시대 (1974년 ~ 현재)
1974년(쇼와 49년)10월 1일, 잔존 구간 철거 계획이 철회되고 영구화가 결정되면서 운행 계통이 단일화되고 "아라카와선"이라는 명칭이 채택되었다.[31]1977년(쇼와 52년)10월 1일, 일부 차량에서 원맨화가 시작되었다.[31] 1978년(쇼와 53년)10월 1일에는 전 차량이 원맨화되었다.
1990년(헤이세이 2년)4월, 28년 만의 신형 차량인 85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1993년(헤이세이 5년)11월 11일에는 선불 카드(T카드)가 도입되었고, 1994년(헤이세이 6년)10월 1일에는 버스 공통 카드 사용이 시작되었다.
2000년(헤이세이 12년)11월 11일, 아라카와 1초메 정류장이 신설되었다.
2007년(헤이세이 19년)에는
- 3월 18일: PASMO 사용 시작 (동시에 Suica로 승차 가능).
- 5월 27일: 9000형 운행 시작. 동시에 아라카와 전차 영업소 내에 구형 차량(5500형・7500형) 전시 시설이 설치됨.
2009년(헤이세이 21년)4월 26일, 88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2015년(헤이세이 27년)9월 18일, 89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2016년(헤이세이 28년)5월 30일, 7700형 운행이 시작되었다.
2017년(헤이세이 29년)4월 28일, 아라카와선의 애칭이 "도쿄 사쿠라 트램"으로 결정되었다.[32]
3. 노선
아오야마 - (롯폰기 선) - 롯폰기 - (카스미초 선) - 다메이케 - (타메이케 선) - 도라노몬 - (토라노몬 선) - 사쿠라다몬으로 경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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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12월 10일부터 카스미초 선·타메이케 선의 철거에 따라 아오야마 - 사쿠라다몬 간을,
아오야마 - (롯폰기 선) - 가미야초 - (토라노몬 선) - 사쿠라다몬으로 경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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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10계통
| 시부야 역 앞 - (아오야마 선) - 미야케자카 - (한조몬 선) - 한조몬 - (반초 선) - 구단시타 - (쿠단 선) - 오가와마치 - (료고쿠바시 선) - 스다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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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10월 1일부터 아오야마 - 미야케자카 간과 반초 선의 철거에 따라 아오야마 - 구단 상 간을,
아오야마 - (시나노마치 선) - 요츠야 산초메 - (신주쿠 선) - 요쓰야 - (우시고메 선) - 이치가야 - (이치가야 선) - 구단 상으로 경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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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11계통
| 신주쿠 역 앞 - (신주쿠 선) - 한조몬 - (한조몬 선) - 히비야 공원 - (츠키지 선) - 쓰키지 - (캇토키바시) - 쓰키시마 (일부 신쓰쿠다지마까지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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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계통은 13m급의 대형차 운행이 가능한 노선이었기 때문에 2501형, 5000형이 운행한 실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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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12계통
| 신주쿠 역 앞 - (신주쿠 선) - 요쓰야 - (우시고메 선) - 이치가야 - (이치가야 선) - 구단 상 - (쿠단 선) - 오가와마치 - (료고쿠바시 선) - 료고쿠 - (료고쿠 역 인입선) - 료고쿠 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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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계통은 13m급의 대형차 운행이 가능한 노선이었기 때문에 2501형, 5000형이 운행한 실적이 있었다. 1968년 3월 31일부터 운행 구간을 신주쿠 역 앞 - 이와모토초 간으로 단축.
|-
! rowspan="2"| 13계통
| 신주쿠 역 앞 - (신주쿠 선) - 요쓰야 - (츠노즈 선) - 이이다바시 - (오차노미즈 선) - 아키하바라 역 동쪽 출구 - (이즈미바시 선) - 스이텐구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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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3월 31일부터 운행 구간을 신주쿠 역 앞 - 이와모토초 간으로 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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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계통
(스기나미 선)
| 신주쿠 역 앞 - (고엔지 선) - 고엔지 - (오기쿠보 선) - 오기쿠보 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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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계통
| 다카다노바바 역 앞 - (토츠카 선) - 오모카게바시 - (와세다 선) - 와세다 - (에도가와 선) - 구단시타 - (쿠단 선) - 오가와마치 - (칸다바시 선) - 오테마치 - (지요다바시 선) - 가야바초 (일부 스자키까지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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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계통
| 오츠카 역 앞 - (오츠카 선) - 덴쓰인 - (토미자카 선) - 분쿄구청 앞 - (키리도시 선) - 우에노 - (우마야바시) - 혼조 - (토요 선) - 이시와라초 - (이시하라 선) - 긴시초 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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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17계통
| 이케부쿠로 역 앞 - (이케부쿠로 선) - 고코쿠지 - (고코쿠지 선) - 오쓰카 - (오츠카 선) - 덴쓰인 - (토미자카 선) - 분쿄구청 앞 - (스이도바시 선) - 신토키와바시 - (
3. 1. 현존 노선
아라카와선(도쿄 사쿠라 트램)이 현재 운행 중이다.3. 2. 폐지 노선
나리히라바시 – 아사쿠사에키마에 (현재의 도부 나리히라바시역.)후쿠시마바시 (에이타이니초메) – 가메즈미초 (후카가와잇초메)
도라노몬 – 레이난자카
다이헤이초산초메 – 가메이도텐진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