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도쿠가와 요시카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쿠가와 요시카쓰는 1824년에 태어나 1883년에 사망한 인물로, 오와리 번의 14대 번주이다. 그는 다카스 사형제 중 한 명으로, 외삼촌은 도쿠가와 나리아키였으며, 사촌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였다. 1849년 오와리 번주가 되었으나, 안세이 대옥으로 은거하였다. 이후 복권하여 막말 정치에 참여, 왕정복고에 참여하고 신정부의 의정을 역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홋카이도 개척을 지도하였으며, 사진술에 능하여 많은 사진을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막말 오와리번 사람 - 우쓰노미야 사부로
    우쓰노미야 사부로는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화학자이자 기술자로, '화학' 용어 정착에 기여하고 일본 최초로 포틀랜드 시멘트 생산에 성공하며 일본 근대화에 공헌했다.
  • 막말 오와리번 사람 - 후타바테이 시메이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소설 『뜬구름』을 통해 사실주의적 묘사와 언문일치 문체를 선보였으며, 러시아 문학 번역 및 에스페란토 연구에도 기여했다.
  • 오와리번주 -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로서, 오와리 번주 재임 동안 경제 발전, 문화 사업, 무예 연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 오와리번주 - 도쿠가와 무네하루
    도쿠가와 무네하루는 에도 시대 오와리번의 7대 번주로, 쇼군의 규제 완화 정책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막부와의 갈등으로 은퇴 후 칩거했고,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양하게 그려진다.
  • 오와리련지 마쓰다이라가 - 마쓰다이라 요시자네
    마쓰다이라 요시자네는 료가와 번 2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카타의 장남이자 어린 나이에 요절한 에도 시대 다이묘로, 번주가 되었으나 어린 나이로 가로가 번정을 운영했고, 요절 후 후계자가 없어 료가와 번은 개역되었다.
  • 오와리련지 마쓰다이라가 -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에도 막부 말기 아이즈 번의 9대 번주로서 교토 수호직을 맡아 활약했지만, 보신 전쟁에서 막부군에 가담하여 패배한 후 칩거하다 닛코 도쇼구의 궁사가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카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도쿠가와 요시카쓰
본명마쓰다이라 요시카쓰
다른 이름마쓰다이라 히데노스케 (어린 시절 이름)
마쓰다이라 요시노리
도쿠가와 요시노리
도쿠가와 요시카쓰
게쓰도
칭호종4위하
시종 겸 중무대보
소묘두
종3위
참의 겸 좌근위권중장
권중납언
종2위
권대납언
정2위
의정
종1위
출생 및 사망
출생1824년 4월 14일, 일본, 에도
사망1883년 8월 1일 (향년 59세)
묘소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사이코안
가문
씨족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가문 (출신)다카스 마쓰다이라 가문 →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가족 관계
아버지마쓰다이라 요시타쓰
어머니규히메 (도쿠가와 하루토시의 딸, 신쇼인)
양아버지도쿠가와 요시타카
형제자매미나모토노스케
요시카쓰
마쓰다이라 다케나리
세이사부로
도쿠가와 모치나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데쓰마루
마쓰다이라 요시타케
여성 (우에스기 모치노리 정실)
배우자니와 나가토미의 딸, 가네히메
측실4명
자녀도쿠가와 요시요리
도쿠가와 요시히로
미치히메 (마쓰다이라 요시오 정실)
도요히메 (도쿠가와 요시노리 선처)
요시히메 (도쿠가와 요시노리 계처)
도미히메 (모리 모토아키라 선처 후 도다 야스타이 계계처)
양자모치나가
요시노리
경력
주군도쿠가와 이에사다
이에모치
요시노부
막부에도 막부, 조슈 정벌군 총독
오와리 번 14대 번주, 17대 번주
오와리 번주
14대1849년 ~ 1858년
전임도쿠가와 요시쓰구
후임도쿠가와 모치나가
17대1870년 ~ 1880년
전임도쿠가와 요시노리
후임도쿠가와 요시아키라

2. 생애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활동한 다이묘로, 오와리 번주로서 번정 개혁을 시도하고 막부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안세이 대옥으로 은거를 겪기도 했으나 복권 후 왕정복고에 참여하는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옛 번사들의 정착 사업을 지원하다 생을 마감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계

1824년(분세이 7년) 에도 요쓰야에 위치한 다카스 번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카스 번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쓰이며, 어머니는 미토 번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시의 딸인 노리히메(규히메)이다. 외삼촌은 도쿠가와 나리아키이며, 그의 아들이자 훗날 마지막 쇼군이 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요시카쓰의 사촌이다.

동생으로는 훗날 오와리 번 15대 번주가 되는 도쿠가와 모치나가(시게노리), 아이즈 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나 번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마쓰다이라 사다요시) 등이 있으며, 이들은 '다카스 사형제'로 불렸다. 다른 동생으로는 하마다 번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시게, 다카스 번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케가 있다.

어릴 적 이름은 '''히데노스케'''(秀之助)였다. 원복 후 다카스 마쓰다이라 가문 시절에는 '''마쓰다이라 요시쿠미'''(松平 義恕)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로부터 편휘를 받아 처음에는 '''도쿠가와 요시쿠미'''(徳川 慶恕)로, 나중에는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 慶勝)로 개명했다.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마쓰다이라 요시타쓰다카스 번 번주
어머니노리히메 (규히메)도쿠가와 하루토시의 딸
부인카네히메니와 나가토미의 딸
오타마노카타
오유키노카타
오타케노카타
오카쓰노카타
자녀 (장남)도쿠가와 요시노리오타마 소생
자녀 (딸)미치히메오타마 소생
자녀 (딸)토요히메오타마 소생
자녀 (딸)요시히메도쿠가와 요시아키라에게 시집감, 오타케 소생
자녀 (딸)토미히메모리 모토아키라에게 시집감, 오타케 소생
자녀 (아들)도쿠가와 요시쿠미 (1878-1946)오카쓰 소생



요시카쓰가 번주가 되기 전, 오와리 번에서는 10대 도쿠가와 나리토모, 11대 도쿠가와 나리하루, 12대 도쿠가와 나리타카, 13대 도쿠가와 요시쓰구까지 4대에 걸쳐 도쿠가와 쇼군가나 고산쿄에서 양자를 들였다. 특히 11대 나리하루는 번주 재임 중 한 번도 오와리에 가지 않고 에도에서만 지내는 등 번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하급 번사들을 중심으로 요시카쓰의 번주 계승을 바라는 움직임(금철당 등)이 있었으나, 12대와 13대 계승 때는 실현되지 못했다. 가에이 2년(1849년) 13대 요시쓰구가 사망하자 마침내 요시카쓰가 14대 번주로 취임하게 되었다.[1][3]

하급 번사들의 기대를 받으며 번주가 되었지만, 이전 번주들과 달리 쇼군가와의 혈연 관계가 약했기 때문에 막부의 중신이나 오와리 번의 고위 가신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요시카쓰가 번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중신들과의 합의가 중요했다.[1][3]

2. 2. 오와리 번주 취임

오와리 번에서는 10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토모, 11대 도쿠가와 나리하루, 12대 도쿠가와 나리타카, 13대 도쿠가와 요시쓰구까지 4대에 걸쳐 쇼군가나 고산쿄 출신의 양자들이 번주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들은 오와리의 사정보다는 막부와의 관계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11대 번주 나리하루는 재위 기간 동안 한 번도 오와리에 들어오지 않고 에도에서만 생활하는 등 번의 실정을 외면하여 번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급 번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인 긴테츠토(金鉄黨) 등은 오와리 번의 문제에 더 깊은 이해를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요시카쓰의 번주 취임을 지지했다. 요시카쓰를 번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은 12대, 13대 번주를 결정할 때도 있었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마침내 가에이 2년(1849년), 13대 번주 요시쓰구가 사망하자 요시카쓰가 제14대 오와리 번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카쓰는 중하급 번사층의 기대를 받으며 번주가 되었지만, 이전 번주들에 비해 쇼군가와의 혈연적 연결고리가 약했기 때문에 막부의 중신들이나 오와리 번의 고위 가신들(오토시요리, 御年寄)로부터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요시카쓰가 번주로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번 내 중신들과의 합의 형성이 필수적이었다.[1][3] 번주 취임 후, 요시카쓰는 우선적으로 번의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한 행정 개혁을 추진하는 데 주력했다.

2. 3. 안세이 대옥과 은거

페리 원정 이후 외국 선박의 내항이 빈번해지자, 도쿠가와 나리아키,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네나리 등의 영향을 받아 대외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막부의 외교 정책, 특히 로주 아베 마사히로 등의 대응에 불만을 품고 반복적으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2][4] 다만 요시카쓰는 고산케 필두로서 막번 체제에 대한 책임감도 강했기에, 이러한 막부 비판은 막부를 보좌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1][3]

안세이 5년(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이 강행되자, 요시카쓰는 이에 반발하여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그의 아들 요시아쓰,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등과 함께 사전에 약속 없이 에도성에 등성하여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에게 직접 항의했다. 이 행동은 이이 나오스케 정권의 분노를 샀고, 결국 반대파를 숙청하는 안세이 대옥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요시카쓰는 은거와 근신 처분을 받았으며, 그의 동생인 도쿠가와 모치나가(시게노리)가 오와리 번의 15대 번주 자리를 이어받았다.

은거 기간 동안 요시카쓰는 서양에서 전래된 사진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직접 사진을 촬영하고 현상하는 기술을 익혔다. 그가 남긴 사진 중에는 메이지 3년(1870년)에 철거되기 전의 나고야 성 니노마루 어전, 막부 말기 히로시마 성의 모습, 에도에 있던 오와리 번의 하야시키(下屋敷, 별저) 등 당시의 풍경을 담은 귀중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약 1,000점 가까운 사진이 남아 있으며, 이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2. 4. 복권과 막말 정치 참여

1860년 (안세이 7년)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외의 변으로 암살된 후, 1862년 (분큐 2년)에 대사면령이 내려져 요시카쓰는 "시카이 고유쿄(悉皆御宥許, 모두 용서받음)"의 신분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교토로 상경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보좌하라는 명을 받았다.

1863년 (분큐 3년), 15대 번주 도쿠가와 모치나가가 은퇴하고, 요시카쓰의 아들 모토치요(안세이 대옥 때 태어남)가 모치나가의 양자가 되어 6세의 나이로 16대 번주 요시노리로 취임했다. 쓰케가로 나루세 마사히로, 타미야 뇨운 등 존왕양이파의 지지를 배경으로 요시카쓰는 요시노리의 후견인으로서 다시 번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한편, 요시카쓰에게 비판적이었던 쓰케가로 타케코시 마사토미 등은 은퇴한 모치나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분큐 시대 이후 오와리 번은 요시카쓰와 모치나가 두 은거 번주 아래에서 파벌 대립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5]

복권 후 요시카쓰는 자주 상경하여 교토의 정치 상황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교토에서는 1863년(분큐 3년) 아이즈번사쓰마번이 결탁하여 일으킨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 세력과 존왕양이파 공경들(7명의 공경의 낙향)이 추방된 상태였다. 다음 해인 1864년 (겐지 원년), 요시카쓰는 유력 번주들로 구성된 산요 회의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조슈번금문의 변을 일으켜 교토를 군사적으로 장악하려다 실패하자 조정의 적으로 규정되었고, 도쿠가와 막부는 제1차 조슈 정벌을 결정했다. 정벌군 총독으로는 처음 기슈번도쿠가와 모치쓰구가 임명되었으나 요시카쓰로 변경되었고, 그는 사쓰마번사이고 기치노스케를 대참모로 삼아 출정했다. 이 정벌에서 조슈번이 항복하자 요시카쓰는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교토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 조슈번에서 다시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자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을 결정했다. 요시카쓰는 재정벌에 반대했으며, 은퇴한 모치나가가 정벌 총독으로 나서는 것도 거부하게 하고 자신은 상경하여 고쇼 경비 임무를 맡았다. 이 두 번째 정벌에서 조슈번은 비밀리에 사쓰마번과 사쓰마-조슈 동맹을 맺고 막부군을 각지에서 격파했고, 이로 인해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2. 5. 왕정복고와 메이지 유신

게이오 2년(1867년) 1월, 요시노부와 대립하던 모치하루 파가 번정에서 밀려나면서 오와리 번 내 가신 간의 대립이 일단락되었다. 이를 계기로 번정 개혁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번교 메이린도 관계자들이 번의 중추로 진출하여 이후 왕정복고를 향한 번의 움직임을 주도하게 된다.

게이오 3년 10월 14일(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단행하자, 요시카쓰는 교토로 상경하여 사쓰마 번, 도사 번 등과 함께 왕정복고 쿠데타에 참여하였고, 새로 수립된 신정부의 의정에 임명되었다.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열린 고고쇼 회의에서는 요시노부에게 사관납지(벼슬과 영지 반납)를 요구하기로 결정되었고, 요시카쓰가 이 결정을 요시노부에게 통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요시카쓰는 도쿠가와 종가를 보필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대정봉환 이후 자신의 관위를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조정에 표명했으며, 고고쇼 회의에서는 요시노부의 참석을 주장하고 의정직 사직원을 제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사관납지에 즈음하여 오와리 번의 영지를 도쿠가와 종가에 반환하겠다는 의향까지 내비쳤다.[6]

다음 해인 게이오 4년 1월 3일(1868년 1월 27일), 교토에서 구 막부군과 사쓰마 번, 조슈 번 군대 사이에 도바·후시미 전투가 발발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군함을 타고 오사카에서 에도로 도주하여 근신에 들어갔다. 1월 15일, 조정은 요시카쓰에게 오와리 번으로 돌아가 번 내의 "간사(막부 지지 세력)"를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월 20일(1868년 2월 13일), 오와리로 돌아온 요시카쓰는 가로 와타나베 신자에몬을 비롯한 좌막파 가신들을 숙청하는 아오마쓰바 사건을 단행했다. 이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오와리 번은 도카이도나카센도 연도의 다이묘 및 하타모토 영지에 사자를 보내 신정부에 대한 충성의 증표로 "근왕 증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이끄는 동정군(東征軍)은 큰 전투 없이 에도로 진군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다만 아오마쓰바 사건과 그에 이은 근왕 유인 활동은 요시카쓰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결탁한 번교 메이린도 관계자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6]

이러한 활동을 하는 한편, 요시카쓰는 모치하루와 협력하여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구와나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의 구명을 위해 조정에 탄원하기도 했다.

윤4월 21일(6월 11일)에 요시카쓰는 의정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2. 6. 메이지 유신 이후

1875년 요시노리가 병으로 사망하자 다시 당주 자리를 상속받았다. 1878년부터는 옛 오와리 번 무사들의 홋카이도 야쿠모정 개척을 지도하였다. 1880년에는 양자인 요시노리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1883년 향년 60세로 사망하였다.

3. 가계

에도의 요쓰야 구역에 있는 다카스 영지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카스 번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쓰이며, 어머니는 미토 번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시의 딸 노리히메이다. 따라서 미토 번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그의 외삼촌이며, 마지막 쇼군이 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촌이다.[1]

어릴 적 이름은 '''히데노스케'''(秀之助)였으며, 원복 후 다카스 마쓰다이라 가문 시절에는 '''마쓰다이라 요시쿠미'''(松平義恕)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한 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로부터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도쿠가와 요시쿠미'''(徳川慶恕)로 개명했고, 이후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慶勝)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형제로는 오와리 번 15대 번주 도쿠가와 모치나가, 아이즈 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나 번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가 있으며, 이들은 요시카쓰를 포함하여 다카스 사형제로 불린다. 그 외 형제로는 하마다 번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시게, 다카스 번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타케 등이 있다.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마쓰다이라 요시타쓰다카스 번주 (1800–1862)
어머니노리히메도쿠가와 하루토시의 딸
정실구히메(矩姫)니와 나가토미의 딸
측실 및 자녀
오타마노카타(お玉の方, 武藤氏)도쿠가와 요시노리3남, 오와리 번 16대 번주
미치히메(倫姫)3녀, 마쓰다이라 요시오의 아내
토요히메(登代姫)4녀, 도쿠가와 요시노리의 부인
오유키노카타(お雪の方, 秋月氏)자녀 없음
오타케노카타(お武の方, 那須氏)료히메(良姫)도쿠가와 요시노리의 계실
토미히메(富姫)모리 모토아키 부인, 후 재혼하여 토다 야스야스 계계실
오카쓰노카타(お勝の方, 鈴木高実 양녀)도쿠가와 요시쿠미(1878-1946)
도쿠가와 요시로11남,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분가 시조, 남작, 시종장 도쿠가와 요시히로의 아버지


  • 그 외 양자가 있었다.

4. 평가

권력이 에도 막부에서 천황 조정으로 넘어가던 시기, 요시카쓰는 주로 교토에서 활동했다. 1863년 봄, 천황이 "攘夷実行の勅命|조이 짓코노 초쿠메이일본어"(외국인 배척 실행의 칙명)을 내렸고, 그해 말에는 강력한 다이묘들로 구성된 군사 기구인 산요 회의(参預会議)를 결성했다. 요시카쓰는 이 회의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금문의 변 이후 조슈 번의 사무라이들이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시도하자, 요시카쓰는 1864년 9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 제1차 조슈 정벌에서 군사령관을 맡았다. 이 원정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부사령관으로 참여했으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슈 번이 다시 막부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요시카쓰는 제2차 조슈 정벌 참여를 거부했다. 그의 이러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막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사이에 비밀 동맹이 형성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동맹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 붕괴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5. 기타

안세이 대숙청으로 가택 연금을 당한 기간 동안, 도쿠가와 요시카쓰는 서양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진 촬영과 현상 기술을 배웠다. 그가 남긴 사진 중에는 1870년에 촬영한 나고야 성의 니노마루 궁전, 히로시마 성, 에도의 오와리 번 교외 저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총 1000여 장에 달하는 이 사진들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촬영한 사진들을 모은 앨범은 다음과 같다.


  • 『사진집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막말・유신 도쿠가와 린세이 사료 연구소 소장 사진』(요시카와코분칸, 2014년) ISBN 978-4-642-03827-0

참조

[1] 간행물 文久・元治期における徳川慶勝の動向と政治的立場 2019-03
[2] 간행물 嘉永・安政期における徳川慶勝の人脈と政治動向 2017-03
[3] 간행물 2019
[4] 간행물 2017
[5] 간행물 2016
[6] 간행물 20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