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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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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리 원정은 1853년과 1854년, 매튜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해군 함대가 일본에 파견된 사건을 의미한다.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 확대, 일본 연안의 포경선 보호, 유럽 열강의 아시아 진출 견제를 위해 일본의 개항을 추진했다. 1853년 7월, 페리는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에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고, 1854년 3월, 미일 화친 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여 200년 이상 지속된 쇄국 정책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으로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구가 개방되고, 난파된 미국 선원의 보호, 미국 영사관 설립 등이 이루어졌다. 페리 원정은 일본의 근대화와 국제 관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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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원정
페리 원정
페리 제독의 일본 방문
페리 제독의 일본 방문
날짜1853년 ~ 1854년
장소에도 만 (현재의 도쿄 만)
결과미일 화친 조약 체결
교전 세력
미국미합중국 해군
일본에도 막부
지휘관 및 지도자
미국매튜 C. 페리
일본도쿠가와 이에요시
아베 마사히로
전력
미국군함 4척 (1853년), 군함 9척 (1854년)
일본불명
사상자 및 피해
미국없음
일본경미한 피해
배경
목표
주요 사건
1853년페리 함대의 우라가 내항
국서 전달 및 회신 약속
1854년페리 함대의 재방문
미일 화친 조약 체결
영향

2. 배경

매튜 C. 페리 제독


19세기 중반, 미국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 수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의 교역을 늘려가고 있었고, 일본 근해는 미국 포경선들의 중요한 활동 무대였다. 또한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식민 열강들이 급탄 기지를 선점해 나가는 상황에 대한 견제 심리도 작용했다. 이러한 경제적, 전략적 이해관계는 필모어 대통령이 일본에 원정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는 명백한 운명 사상이 퍼져 있었으며, 서구 문명과 기독교의 "혜택"을 당시 미국인들이 후진적이라고 간주하던 아시아 국가들에 전파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했다.[1]

한편, 19세기 초부터 일본의 쇄국 정책은 점차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다. 1844년에는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가 일본 막부에 서한을 보내 외부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기 전에 스스로 문호를 개방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2] 1790년부터 1853년 사이에는 미국의 군함 3척을 포함하여 최소 27척의 미국 선박이 일본을 방문했지만, 모두 일본 측의 거부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외국 선박의 일본 영해 접근이 빈번해지면서, 일본 내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국가의 주권에 미칠 영향과 대응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국내적 배경 속에서 미국은 일본의 개항을 목표로 한 공식적인 함대 파견을 준비하게 된다. 이전에도 1851년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동인도 함대 사령관 존 H. 올릭에게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도록 지시하고 대통령 명의의 서한을 준비하는 등[3]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었으나, 올릭은 내부 문제로 해임되었고[4] 실제적인 함대 파견은 이후 매튜 C. 페리 제독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게 된다.

2. 1. 미국의 아시아 시장 진출

산업 혁명을 거치며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서유럽 각국은 공산품의 수출 시장을 넓힐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영국프랑스 등은 인도동남아시아, 중국 대륙청나라를 상대로 시장 확대를 서둘렀고, 이는 곧 치열한 식민지 획득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쟁 구도 속에서 영국이 우위를 점하고 프랑스 등이 그 뒤를 따랐으나, 인도나 동남아시아에 별다른 거점을 확보하지 못한 미국은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었다.

미국은 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833년에는 특사 에드먼드 로버츠를 파견하여 샴 왕국 및 머스캣 앤드 오만과 통상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로버츠는 1834년 귀국 후 국무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조선 및 북부 중국과 통상을 여는 길은 먼저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1835년 로버츠를 다시 특사로 임명하여 에도 막부청나라와의 조약 체결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동인도 함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로버츠가 1836년 마카오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80] 이 시도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편 전쟁 이후 기회를 포착하여, 1842년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인 〈왕샤 조약〉을 체결하고 마침내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청나라에 파견되었던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은 일본과의 조약 체결 임무도 부여받았다. 그는 1846년 함대를 이끌고 일본 우라가 항에 도착하여 개항을 요구했지만, 당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에도 막부의 거부로 조약을 맺지 못하고 돌아섰다.

2. 2. 보급 기항지 확보

산업 혁명 이후 서구 국가에서는 공장 기계의 윤활유램프 연료로 향유고래의 고래기름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은 포경 활동 범위를 전 세계 바다로 넓혔고, 일본 근해도 중요한 어장 중 하나였다.[81][28] 특히 미국 포경선들은 이즈 제도오가사와라 제도 부근의 '재팬 그라운드'나 캄차카 반도 동쪽의 '캄차카 그라운드'에서 활발하게 고래잡이를 했다. 미국 동부 해안에서 출발한 포경선들은 보통 1년 이상 바다에 머물렀다.[81][28]

긴 항해 동안 포경선들은 배 위에서 고래 기름을 추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양의 땔감과 물이 필요했다. 또한 장기간 항해에 필요한 식량 보급도 문제였다. 따라서 태평양 연안에 안정적인 보급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고, 미국에게 일본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81][28]

와카사 만을 중심으로 한 대권도법


난파선 문제 역시 일본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높였다. 당시 미국 해군은 자국 선박의 난파 시 표류민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실제로 1849년에는 제임스 글린이 난파된 미국 포경선 선원들을 인계받기 위해 나가사키에 온 적이 있었다. 표류민 처리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고 관련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미국에게 유리한 선택이었다.

한편, 미국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이어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하여 캘리포니아를 획득하면서 태평양 연안 국가가 되었다. 이는 거대한 중국 시장과의 무역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 서부 해안에서 중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대권 코스)는 알류샨 열도와 쿠릴 열도를 거쳐 쓰가루 해협과 대한 해협을 통과하는 것이었다.[29][30] 이 항로를 이용하는 선박들에게 쓰가루 해협에 인접한 하코다테와 같은 일본 항구는 이상적인 중간 보급 기지였다. 또한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멕시코만 함대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미 해군은 조직 규모 유지를 위해 동인도 함대의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31] 이러한 경제적, 전략적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국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게 되었다.

2. 3. 미국-멕시코 전쟁

미국은 1846년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오리건의 남쪽 절반을 영토로 편입시킨 데 이어,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이어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하여 캘리포니아를 획득했다. 이로써 미국은 태평양에 접한 국가가 되었고, 태평양 항로 개척의 필요성이 커졌다. 당시 구상되던 항로 중 하나는 미국 서해안에서 북상하여 알류샨 열도, 쿠릴 열도를 따라 남하한 뒤, 쓰가루 해협을 통해 동해로 진입하여 상하이에 도착하는 경로였다.[82][83]

이러한 배경 속에서 쓰가루 해협에 인접한 하코다테에 보급 기지를 마련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해졌다. 또한, 미국-멕시코 전쟁에서의 승리로 기존의 주력 함대였던 멕시코만 함대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미국 해군은 예산 확보 등의 이유로 동인도 함대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매튜 페리 제독


미국과 중국 간의 교역 증가, 일본 근해에서의 미국 포경선 활동,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식민 열강들이 급탄 기지를 점차 독점해가는 상황 등은 필모어 대통령이 일본 원정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인들이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명백한 운명 사상이 퍼져 있었고, 서구 문명과 기독교의 "혜택"을 소위 후진적인 아시아 국가에 전파해야 한다는 인식이 작용하기도 했다.[1]

19세기 초, 일본의 쇄국 정책은 점차 도전을 받고 있었다. 1844년 네덜란드의 빌럼 2세 국왕은 일본 측에 서한을 보내 외부의 압력으로 변화가 강요되기 전에 스스로 쇄국 정책을 끝낼 것을 촉구했다.[2] 1790년부터 1853년 사이에는 군함 3척을 포함하여 최소 27척의 미국 선박이 일본을 방문했지만, 모두 거부당했다.

외국 선박의 일본 영해 진입 증가는 일본 내에서 경제적, 정치적 주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851년 5월, 미국의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동인도 함대 사령관인 존 H. 올릭 준장에게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17명의 조난 일본인 선원을 송환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일본과의 상업 관계를 열 수 있는 기회로 간주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웹스터는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서한 초안을 작성했으며, 이 서한은 필모어 대통령이 서명했다. 서한은 원정대의 목적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우호와 상업" 및 중국으로 향하는 미국 선박에 필요한 석탄 공급을 요청하기 위한 것임을 명시했다.[3] 또한, 이 서한은 미국의 영토 확장과 기술적 역량을 과시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올릭은 브라질 외교관과의 외교적 갈등 및 기함 선장과의 불화에 휘말려 일본 원정을 실행하기 전에 지휘권을 박탈당했다.[4] 그의 후임으로는 미국 해군의 선임 장교이자 외교 경험이 풍부했던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임명되었다.

2. 4. 페리 내항 이전 미국의 대일 관계

페리가 내항하기 이전에도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여러 차례 접촉과 사건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후 미국의 대일 정책 및 페리 원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연도 (일본 연호)주요 사건 내용
1791년 (간세이 3년)모험가이자 상인인 존 켄드릭이 배 2척을 이끌고 기이오시마에 상륙했다. 이는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이다.[32]
1797년 (간세이 9년) ~ 1809년 (문화 6년)프랑스 혁명 전쟁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한 미국 선박들이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무역 활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총 13차례의 내항 기록이 남아있다.[32][33]
1830년 (덴포 원년)오가사와라 제도지치지마섬에 미국인 나다니엘 세이버리가 상륙하여 정착했다.
1835년 (덴포 6년)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에드먼드 로버츠를 특사로 임명하여 청나라 및 일본과의 통상 교섭을 시도했다. 로버츠는 아시아로 파견되었으나 중국 마카오에서 병사하여[80]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로버츠를 아시아로 보내기 위해 미국 해군의 동인도 함대가 창설되었다.[34]
1837년 (덴포 8년)미국 상인 찰스 킹이 상선 모리슨 호를 이용해 오토키치 등 일본인 표류민 7명을 송환하고자 우라가에 접근했다. 하지만 당시 에도 막부1825년에 제정한 이국선 타격령에 따라 일본 측 포대가 모리슨 호를 포격하여 입항을 저지했다. 이 사건을 모리슨 호 사건이라고 부른다.
1845년 (고카 2년)미국 포경선 맨하탄 호가 일본인 표류민 22명을 구조했다. 선장 마케이 터 쿠퍼는 우라가로의 입항을 허가받아 우라가 봉행과 만났다. 이는 1842년 막부가 아편 전쟁의 결과를 보고 이국선 타격령을 완화하여 제정한 급수 급여령[35]에 따른 조치였다.
1846년 (고카 3년) 윤 5월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전열함 콜럼버스 호와 슬루프 빈센스 호를 이끌고 우라가에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 군함의 첫 일본 기항이었으나, 막부는 통상 요구를 거부했다.
1846년 (고카 3년)미국 포경선 로렌스 호의 선원들이 쿠릴 열도 남단의 이투루프섬에 표착했다. 이들은 다음 해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선박을 통해 송환되었다.
1848년 (가에이 원년)미국 포경선 라고다 호의 선원들이 서 에조치(현 홋카이도 서부)에 표착했다. 이들은 로렌스 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나가사키로 호송되었으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투옥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 "일본이 미국인을 학대하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48년 (가에이 원년)라널드 맥도날드가 일본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개인적인 목적으로 홋카이도 리시리섬을 통해 밀입국했다.
1849년 (가에이 2년)동인도 함대 소속 군함 프레블 호의 함장 제임스 글린이 나가사키에 내항했다. 그는 막부 측과 교섭하여 전년에 표착했던 라고다 호 선원들과 밀입국했던 맥도날드를 데리고 일본을 떠났다. 이때 글린이 보여준 단호하고 위협적인 태도는 이후 페리의 개항 요구 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2. 5. 오릭의 일본 개국 지령과 해임

미국아편 전쟁 이후 1842년 과 망하 조약을 체결하여 시장에 진출했지만, 인도동남아시아에 거점이 없어 영국 등에 비해 아시아 시장 확대 경쟁에서 뒤처져 있었다. 1846년(고카 3년)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이 우라가에 내항하여 일본과의 조약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51년 5월 29일(가에이 4년 4월 30일), 제13대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는 일본의 개항과 통상 관계 수립을 목표로 동인도 함대 사령관 존 오릭 제독에게 일본 특사 임무를 부여했다.[37] 1851년 6월 8일, 증기프리깃 서스케하나는 동인도 함대의 기함으로 극동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오릭은 서스케하나 함장과의 문제로 인해 해임되었고, 1852년 2월 매슈 페리 제독이 그 임무를 이어받게 되었다.[38][39]

3. 페리의 일본 원정 계획



1852년 11월 13일, 페리 제독은 해군 장관 존 P. 케네디로부터 일본 원정에 관한 훈령을 받았다. 이 훈령은 페리에게 일본과의 교섭 임무 수행에 있어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했으며, 일본 연안과 주변 지역의 탐사 및 정보 수집을 지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40]

페리는 일본과의 관계 수립이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의 실패 사례들을 근거로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처음에는 이 임무 대신 미국 해군 지중해 함대 지휘를 선호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과거 미국의 대일 교섭 시도는 다음과 같은 선례를 남겼다.


  • 1797년부터 1809년 사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자국 선박을 보낼 수 없었던 네덜란드의 요청으로 여러 척의 미국 상선이 네덜란드 국기를 달고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한 적이 있었다.
  • 1837년, 광저우의 미국 상인 찰스 W. 킹은 일본인 표류민 송환을 명분으로 상선 ''모리슨'' 호를 타고 우라가 해협으로 갔으나, 일본 측의 포격으로 실패했다.
  • 1846년, 제임스 비들 사령관이 군함 두 척을 이끌고 에도 만에 도착하여 통상 조약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5]
  • 1849년, 제임스 글린 선장이 나가사키에서 미국인 선원 송환 협상에 성공했다. 글린은 미국 의회에 일본 개항 협상 시 무력 시위가 필요하다고 건의했고, 이는 페리 원정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6]


가에이 7년(1854년) 요코하마에 흑선 내항. 수행 필기한 화가 빌헬름 하이네의 리토그래프


페리는 원정을 떠나기 전, 일본에 관한 여러 서적을 탐독하고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일본학자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와 직접 만나 조언을 구하는 등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다.[7] 또한, 페리는 당시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요구하여 "완전하고 재량적인 권한"을 확보했는데, 여기에는 일본 측이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되었다.[8] 그는 전문 외교관 대신 화가, 사진가, 농업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일본인 표류민을 통역관으로 대동하여 원정의 실무적인 측면을 강화했다. 페리는 사전에 독자적인 기본 계획을 구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함대 편성을 준비하는 등 임무 성공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다.

3. 1. 페리의 기본 계획

1851년 1월, 페리는 일본 개항 임무가 주어지기 1년 전에 해군 장관 윌리엄 알렉산더 그레이엄에게 일본 원정에 대한 자신의 기본 계획을 담은 계획서를 제출했다.[41] 이 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필요 전력최소 4척의 군함 필요, 그중 3척은 대형 증기 군함이어야 함.
전략 목표일본인에게 증기선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근대 국가의 군사력을 인식시킴.
협상 방식과거 중국에 대한 방식처럼, 우호적 접근보다 "공포에 호소하는 것이 더 많은 이점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 군사력을 통한 압박 강조.
교섭 장소네덜란드의 방해를 우려하여 전통적인 창구인 나가사키에서의 교섭 회피.



페리는 일본인들이 책을 통해 증기선의 존재를 알더라도, 실제로 강력한 증기 군함을 목격하게 되면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실감하고 개항 요구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일본과의 교섭에서 친선보다는 위협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는 당시 서구 열강의 일반적인 팽창주의적 접근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 개항 임무가 주어지자, 페리는 당초 계획을 더욱 확대하여 동인도 함대 소속 함선 외에 본국 함대의 증기함 4척을 포함한 총 13척의 대규모 함대 편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산 문제와 실제 동원 가능한 함선의 한계로 인해 계획은 일부 수정되었다. 예정되었던 본국 함대의 증기 군함 4척 중 실제로 투입된 것은 미시시피뿐이었고, 비용 문제로 전열함 대신 증기 프리깃 포우하탄이 합류하게 되었다.[42]

3. 2. 함대 편성

1851년 1월, 페리는 일본 원정 임무가 주어지기 1년 전에 자신의 기본 계획을 해군 장관 윌리엄 알렉산더 그레이엄에게 제출했다.[41] 이 계획에서 그는 임무 성공을 위해 대형 증기 군함 3척을 포함한 총 4척의 군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증기선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일본에게 근대 국가의 군사력을 인식시키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접근 방식처럼 일본에게도 "공포에 호소하는 것이, 친절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점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네덜란드의 방해 가능성을 고려해 나가사키에서의 교섭은 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본 개국 임무가 공식적으로 주어지자 페리의 계획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는 기존 동인도 함대 소속의 서스케하나 호, 새러토가 호(범선 슬루프), 플리머스 호 외에, 본국 함대에서 증기함 4척, 범선 전열함 1척, 범선 슬루프 2척, 범선 보급함 3척을 추가하여 총 13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 편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산 문제와 가용 함선 부족으로 계획이 축소되었다. 본국 함대의 증기 군함 4척 중에서는 미시시피 호만이 투입 가능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전열함은 제외되었다. 대신 서인도에서 막 귀국한 증기 프리깃 포우하탄 호가 함대에 추가되었다.[42]

미시시피 호


결과적으로 페리 원정 함대는 다음과 같이 총 9척으로 구성되었다.

함종함선명
증기 군함미시시피 호 (기함)
서스케하나 호
포우하탄 호
무장 상선 증기선렉싱턴 호
서플라이 호
사우스햄튼 호
범선 슬루프마케도니안 호
플리머스 호
새러토가 호



페리는 함대를 지휘하기 위해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함께 복무했던 장교들을 선발했다. 프랭클린 뷰캐넌 사령관이 서스케하나 호의 함장을, 조엘 애벗이 마케도니안 호의 함장을 맡았다. 헨리 A. 아담스 사령관은 "함대장"이라는 직함으로 페리 제독의 참모장이 되었다. 미국 해병대 최고위 장교로는 제이콥 자일린 소령(훗날 해병대 사령관)이 미시시피 호에 배치되었다.

원정에는 군사력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인력이 동행했다. 마카오에서는 새뮤얼 윌리엄스를 중국어 통역으로, 상하이에서는 안톤 포트만을 네덜란드어 통역으로 고용하여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한문과 네덜란드어로 번역했다. 또한 독일 화가 빌헬름 하이네와 초기 다게레오타입 사진 작가 엘리파렛 M. 브라운 주니어가 공식 예술가로 참여했으며, 농업 전문가 제임스 모로우 박사도 미국 국무부에 의해 파견되었다. 이 외에도 몇 명의 일본인 표류민이 비공식 통역관으로 동행했으며, 작가 베이야드 테일러도 도중에 합류하여 원정 과정을 기록했다.[52] 페리는 일본인에게 선물할 정부 물품, 특히 쓸모없게 된 M1819 홀 소총, 퍼커션 권총, 포병 검, 콜트 리볼버 등 소형 무기를 가져갈 허가도 받았다.

3. 3. 네덜란드의 내항 예고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


1852년 7월 21일, 네덜란드 상관장인 야뉘스 퀴르티위스는 나가사키 부교에게 ‘별단풍설서’를 제출했다. 이 문서는 막부 말기 데지마의 미공개 문서로 보존되어 있으며, 미국이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함대를 파견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 근해의 미국 군함 5척과 미국 본토에서 파견될 4척의 군함 이름, 사령관 교체 가능성(오릭에서 페리로), 함대에 육전 병력과 무기가 탑재되었다는 소문, 그리고 출발 시기가 4월 하순 이후가 될 것이라는 예측 등이 포함되었다.

같은 해 6월 25일자 서신으로 퀴르티위스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반 투이스토에게 미국의 사절단 파견에 대한 네덜란드의 권고 사항을 전달했다. 여기에는 ‘나가사키 항에서의 통상 허용, 나가사키 주재 공사 수용, 길드 사무소 건축 허가, 에도, 교토, 오사카, 사카이, 나가사키 5개 도시 상인에 한정된 외국인 교역’ 등 총 10개 조항으로 구성된 통상 조약 초안이 제시되었다.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는 이 정보를 여름 무렵 막부에 등성한 후다이 다이묘들에게 회람시켰다. 해안방어어용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통상 조약 체결에 반대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또한 나가사키 부교는 과거 네덜란드 풍설서의 정보(영국 홍콩 총독 존 바우링의 배편 예고)가 부정확했던 사례를 들어 네덜란드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막부의 대응은 미우라반도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가와고에번히코네번의 병력을 증강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정보는 막부 상층부인 부교 수준까지만 공유되었고, 실제 미국 함대의 내항이 예상되던 우라가의 실무 관리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한편, 도자마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연말에 이 정보를 구두로 전달받았다. 그는 이듬해 미국 함대의 류큐 방문 이후 동정을 아베 마사히로에게 보고하며 위기감을 공유했지만, 당시 막부 내에서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미국 정부는 페리의 일본 파견을 결정하면서 네덜란드 헤이그 주재 미국 대리 공사 폴섬을 통해 네덜란드 정부가 일본에 사절 파견의 평화적 목적을 미리 알려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 서한(1852년 7월 2일자)은 퀴르티위스가 자바를 떠나 일본으로 향한 뒤에야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에게 도착하여 일본에 전달되지 못했다. 다만, 페리가 실제로 내항한 1853년에 제출된 특별 풍설서에는 페리 파견의 목적이 평화적인 통상 관계 수립이라는 점이 명시되었다.

4. 1853년 페리의 1차 내항

페리(가운데)와 다른 고위 미국 해군 장교들의 일본 목판화 그림


미국의 매튜 C. 페리 제독은 일본과의 조약 체결 임무를 받고, 검은색 선체의 외륜선인 ''미시시피'' 호를 기함으로 삼아 1852년 11월 24일 버지니아주 햄프턴 로드를 출발했다.[9] 페리 함대는 대서양인도양을 거쳐 아시아로 향하는 긴 항해를 시작했다. 항해 도중 마데이라, 세인트헬레나, 케이프타운, 모리셔스, 실론, 싱가포르, 마카오, 홍콩 등 여러 항구에 기항하며 보급과 정비를 받았다.

홍콩에서는 일본 방문 경험이 있는 중국학자 새뮤얼 웰스 윌리엄스가 합류하여 대통령 친서를 중국어로 번역했고, ''플리머스'' 호와 ''사라토가'' 호가 함대에 추가되었다. 이후 상하이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외교관 안톤 L. C. 포트만이 합류하여 친서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했으며, 페리는 이곳에서 기함을 증기선 ''서스케하나'' 호로 옮겼다.

일본 본토로 향하기 전, 페리 함대는 1853년 5월 26일 류큐 왕국의 나하에 도착했다. 페리는 사쓰마 번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에 통상과 석탄 보급 기지 제공을 요구하며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이는 에도의 막부 당국에 미국의 의도와 힘을 전달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10] 이후 6월에는 당시 영유권이 불분명했던 오가사와라 제도를 탐사하고 미국의 영유를 선언했으나, 영국러시아의 즉각적인 항의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6월 23일 류큐로 잠시 귀환했던 페리는 7월 2일,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4척의 함대를 이끌고 마침내 일본 본토를 향해 출항했다.

4. 1. 류큐 내항

증기외륜 프리깃, 서스퀘해나 호


범주 슬루프, 새라토가 호


상하이에서 기함을 서스퀘해나 호로 옮긴 페리 함대는 1853년 5월 17일 출항하여 5월 26일 당시 사쓰마번의 영향 아래 있던 류큐 왕국의 나하 앞바다에 도착했다. 페리는 슈리성 방문 의사를 전달했으나, 류큐 왕국 측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페리는 이를 무시하고 무장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여 시내를 행진하며 슈리성까지 진군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10]

류큐 왕국은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기 반입과 병사의 입성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페리의 방문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페리는 무장을 해제하고 소수의 장교와 함께 슈리성에 들어갔다. 페리 일행은 북쪽 궁전에서 와 과자 등 간소한 대접을 받으며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친서를 전달했다. 이후 성 밖 오미 저택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가졌다. 페리는 이에 대한 답례로 류큐 고관들을 기함 서스퀘해나 호로 초대하여 동행한 프랑스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대접했다.

페리는 류큐 측에 통상 관계 수립과 석탄 보급 기지용 토지 제공을 요구하며, 응하지 않을 경우 200명의 병력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는 에도일본 당국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의도적으로 하급 관리와의 접촉을 피하며 군사 의장 행사와 함상 연회를 통해 미국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한편, 자신의 방문이 평화적인 목적임을 강조하려 했다.[10]

류큐 왕국이 베푼 환대는 외교적 관례에 따른 것이었으나, 청나라 책봉사에 대한 접대보다 낮은 수준의 요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페리의 요구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이는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던 외교적 수사였다. 류큐는 이러한 방식으로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피했지만, 결과적으로 페리 함대의 일본 본토 항해를 위한 중계 기지로 이용되었다. 페리는 류큐를 떠나기 전 미국과의 완전한 무역 개방 약속을 받아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당시 페리 함대의 류큐 방문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류큐 측 기록인 《류큐왕국 평정소문서》(琉球王国評定所文書)에 남아 있다. 페리는 6월 23일 류큐로 잠시 귀환했다가, 7월 2일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함대 일부를 이끌고 일본 본토로 출항했다.

4. 2. 오가사와라 제도 탐사

페리는 함대의 일부를 나하에 주둔시키고 6월 9일에 출항하여, 6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당시 영유권이 명확하지 않았던 오가사와라 제도를 탐사했다. 이 과정에서 페리는 현지 주민을 만나 토지 한 필지를 구입하기도 했다. 페리는 미국의 이름으로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을 일방적으로 선언했으나, 이는 즉각적인 영국의 항의를 받았고, 러시아 선박 또한 항의를 위해 오가사와라 근해로 남하하면서 페리의 영유권 주장은 사실상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일본하야시 시헤이의 저서 《삼국통람도설》(三国通覧図説)의 기술을 근거로 오가사와라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미즈노 타다노리를 파견하고 하치조섬 주민 등을 적극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통해, 영국, 러시아, 미국 등 당시 열강들로부터 오가사와라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페리는 6월 23일에 다시 류큐로 돌아왔다.

4. 3. 우라가 내항과 협상 과정

1853년 7월 8일(가에이 6년 6월 3일) 오후 5시, 매튜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인도 함대 소속 함선 4척이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나 정박했다. 이전까지 일본인이 보았던 러시아영국범선과는 달리, 검은색 선체를 가진 이 배들은 돛뿐만 아니라 외륜과 증기 기관을 이용해 항해하며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냈다. 특히 증기선이 범선을 한 척씩 끌고 오는 모습은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인들은 이 배들을 '흑선'(黒船)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2][11]

우라가에 정박한 함대는 기함인 증기 외륜 프리깃 서스퀘해나와 미시시피, 그리고 범주 슬루프인 새러토가와 플리머스(USS Plymouth)로 구성되었으며, 총 73문의 대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페리 함대는 일본 측의 기습 공격 가능성을 경계하며 임전 태세를 갖추었고, 상륙에 대비해 에도 만 내부를 허가 없이 측량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독립 기념일 축포라는 명목으로 수십 발의 공포탄을 발사했는데, 이는 일본 측에 위압감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12][13] 사전에 공포탄 발사에 대한 통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포격 소리에 에도는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곧 공포탄임을 알게 된 주민들은 포성이 울릴 때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듯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58]

우라가에는 흑선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일부는 작은 배를 타고 함선에 접근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막부는 질서 유지를 위해 경계를 강화하라는 포고를 내렸으나, 실탄 포격 소문과 함께 불안감은 커져갔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태평한 잠을 깨우는 상희선(上喜撰) 네 잔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광가(狂歌, 사회 풍자적인 노래)로 표현되기도 했다.[59] '상희선'은 고급 녹차의 한 종류를 뜻하는데, 표면적으로는 차를 많이 마셔 잠 못 이룬다는 의미지만, 실제로는 '단 네 척의 증기선(上喜撰, 조키센)' 때문에 나라가 소란스러워 밤잠을 설친다는 뜻을 담아 당시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61]

7월 9일, 막부는 사태 파악을 위해 우라가 봉행소의 요리키(하급 관리) 나카지마 사부로스케를 서스퀘해나 호로 보냈다. 나카지마는 페리의 내항 목적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쇼군에게 전달하기 위함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페리 측은 막부 대표의 직급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친서 수령을 거부했다.[2] 7월 10일, 또 다른 요리키 가야마 에이자에몬이 '우라가 부교'라고 신분을 속이고 다시 서스퀘해나 호를 방문하여 프랭클린 뷰캐넌 함장 등과 회견했다. 그러나 페리 측은 여전히 최고위급 관리가 아니면 친서를 전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가야마가 상부와 논의할 시간으로 4일을 요청하자, 페리는 3일만 기다리겠다며, 만약 그때까지 적합한 관리가 파견되지 않으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상륙하여 쇼군에게 친서를 전달하겠다고 위협했다.[11] 같은 날, 페리는 위협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무장한 보트들을 보내 우라가 항구를 측량하게 했다. 이는 명백히 막부를 압박하기 위한 행동이었다.[53] 7월 11일, 미시시피 호의 호위 아래 측량대는 에도 만 안쪽으로 약 20km 더 깊숙이 들어왔다. 페리는 이러한 무력시위를 통해 막부가 미국의 요구를 더 유리하게 받아들일 것이라 계산했다.

페리 함대의 계속되는 압박과 무력시위에 큰 충격을 받은 막부는 결국 7월 12일, 국서를 수령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제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병환으로 국정을 돌볼 수 없는 상태였고, 로주(막부 최고 관직) 수좌 아베 마사히로가 실질적인 결정을 내렸다. 아베는 미국의 요구를 당장 거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단 국서를 받고 답변은 추후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전달하자"는 방침을 세웠다.[54] 7월 14일, 막부는 페리 일행의 구리하마 상륙을 허가했다. 가와고에 번, 히코네 번 등 여러 번의 병력이 경비를 서는 가운데, 우라가 봉행 도다 우지요시와 이도 히로미치가 막부 대표로 페리와 회견했다.[16]

이 자리에서 페리는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와 제독 신임장 등을 전달하며 일본의 개국을 압박했다.[55][56] 막부 측은 쇼군의 병환을 이유로 답변까지 1년의 시간을 요구했고, 페리는 이를 받아들여 "답변을 듣기 위해 1년 후에 다시 오겠다"고 답했다. 이 회담은 사실상 문서 전달식에 가까웠으며, 실질적인 외교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측 대표인 도다와 이도는 회담 내내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17]

회견이 끝난 후에도 페리는 즉시 떠나지 않았다. 7월 15일, 그는 미시시피 호를 타고 우라가에서 북쪽으로 약 약 32.19km 더 나아가 에도 항구가 보이는 지점까지 접근하여 다시 한번 무력시위를 벌인 뒤 함대를 돌렸다. 7월 17일, 페리 함대는 에도를 떠나 류큐에 머물던 함대와 합류한 뒤 홍콩으로 돌아갔다. 페리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셈이었다.[57]

1853년 우라가에 내항한 미국 함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함명함종건조년도톤수승무원기관출력무장
서스퀘해나
Susquehannaeng
증기 외륜 프리깃1850년적재량 2,450톤(bm톤)
배수량 3,824영톤
300명420 NHP
795 IHP
150파운드 패럿포 x2
9인치 달그렌포 x12
12파운드 포 x1
미시시피
Mississippieng
증기 외륜 프리깃1841년적재량 1,692톤(bm톤)
배수량 3,220영톤
260명434 NHP
650 IHP
10인치 페크산포 x8
8인치 페크산포 x2
새러토가
Saratogaeng
범주 슬루프1843년적재량 882톤(bm톤)260명없음8인치 포 x4
32파운드 포 x18
플리머스
Plymoutheng
범주 슬루프1844년적재량 989톤(bm톤)260명없음8인치 포 x8
32파운드 포 x18



매튜 C. 페리 제독의 흑선, 브루클린 박물관 소장

4. 4. 페리 퇴거 후 막부의 대응

페리가 물러난 지 불과 10일 후인 7월 27일(가에이 6년 6월 22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사망했다.[27] 제13대 쇼군으로 취임한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여 국정을 제대로 이끌기 어려운 상태였다. 당시 막부의 중신이었던 노중(老中)들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외국 세력을 배척하자는 양이론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는 미국의 개국 요구에 대해 깊은 고심에 빠졌다.

8월 5일(가에이 6년 7월 1일), 아베 마사히로는 막부 정치에 참여하지 않던 다이묘, 하타모토(旗本), 심지어 서민들에게까지 외교 정책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이는 막부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로, 국정에 발언권이 없었던 도자마 다이묘들은 이를 반겼으나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 조치는 오히려 국정을 막부 단독이 아닌 여러 세력의 합의로 결정해야 한다는 '공의여론'만 확산시켜 결과적으로 막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53년~1854년 미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에도 만 입구에 건설된 오다이바 포대


오다이바에 설치되었던 대포 중 하나. 80파운드 청동포로 구경 250mm, 길이 3830mm이다.


한편, 아베 마사히로는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비하여 에도 만의 방비를 강화하고자 했다. 8월 26일(가에이 6년 7월 23일)에는 에가와 히데타츠 등에게 포대, 즉 오다이바 건설을 명했다. 에가와는 훗쓰-간논자키, 혼모쿠-기사라즈, 하네다 앞바다, 시나가와 앞바다에 이르는 4중 방어선을 제안했으나, 예산과 공사 기간 등의 문제로 우선 시나가와 앞바다에 11개의 포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62] 12월 14일(가에이 6년 11월 14일)에는 건설 중이던 1~3번 포대의 수비를 가와고에번, 아이즈번, 오시번에 맡겼다.[63]

또한 막부는 기존의 〈대선건조의 금〉 조치를 해제하여 다이묘들에게 대형 선박 건조를 장려했다. 막부 스스로도 서양식 범선인 '호오마루'를 10월 21일(가에이 6년 9월 19일) 우라가 조선소에서 건조하기 시작했으며, 페리가 떠난 지 불과 일주일 뒤인 7월 24일(가에이 6년 6월 19일)에는 네덜란드에 함선 건조를 주문했다.[64] 미국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져, 12월 7일(가에이 6년 11월 7일)에는 2년 전 미국에서 귀국하여 도사번 번교 교수가 되었던 존 만지로를 하타모토 신분으로 등용하여 미국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했다.

5. 1854년 페리의 2차 내항

1854년 2월 13일(가에이 7년 1월 16일), 페리는 류큐를 경유하여 함대를 이끌고 다시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는 막부와 1년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던 약속을 깨고 반년 만에 돌아와 개항 결정을 압박하는 것이었기에 막부 측은 크게 당황했다. 페리는 홍콩에서 쇼군 이에요시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국정 혼란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페리 함대는 2월 11일부터 순차적으로 도착하여 3월 19일까지 총 9척[20]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에도 만에 집결시켰고, 이는 에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페리는 에도 만 도착 후 기함을 포우하탄 호로 옮겼다. 한편 우라가에는 지난번처럼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으며, 일부는 배를 타고 함대에 접근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요시다 쇼인이 외국 유학을 위해 밀항을 시도하며 포우하탄 호에 접촉한 것은 이후 1854년 4월 25일, 함대가 시모다 앞바다에 정박했을 때의 일이다.)

갑작스러운 대함대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이전 내항 때와 마찬가지로 양측 간의 적대적인 행동은 없었다. 미국 측은 오히려 선상에서 일본 측 사절에게 프랑스 요리를 대접하는 등 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도미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도미를 낚아 요리에 사용하는 등 일본 측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본격적인 조약 협상이 요코하마에서 진행되었다.

5. 1. 조약 협상

시모다시에 있는 페리의 흉상


원정대가 선물하여 큰 호평을 받은 소형 증기 기관차 모형


포우하탄호


매슈 페리의 함대(1854년)


페리는 당초 다음 해에 돌아오겠다고 일본 측에 알렸으나, 러시아의 예브피미 푸탸틴 부제독이 나가사키에서 조약 체결을 시도했다는 소식과 영국, 프랑스가 미국의 독점적 특권 확보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으로 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정을 앞당겼다. 결국 페리는 1854년 2월 13일(가에이 7년 1월 16일) 8척의 군함과 1,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다. 함대는 기존 4척 중 플리머스 호를 제외하고 렉싱턴(Lexington), 마케도니안(Macedonian), 포우하탄(Powhatan), 밴댈리아(Vandalia), 사우샘프턴(Southampton) 호가 추가된 구성이었다. 이후 3월 19일 보급선 서플라이(Supply) 호가 합류하여 총 9척의 대함대가 에도 만에 집결했다.[20] 이 갑작스러운 대함대의 출현은 에도 막부를 크게 당황시켰고, 일각에서는 페리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사망을 알고 국정 혼란을 이용하려 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페리가 돌아왔을 때, 에도 막부는 이미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국서에 담긴 요구 대부분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협상 장소를 놓고 양측은 몇 주간 대립했다. 페리는 에도를 고집했지만 일본 측은 다른 장소를 제안했다. 결국 페리가 20일 안에 100척의 함대를 동원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자, 양측은 요코하마에 새로 지은 회관에서 협상하기로 타협했다. 1854년 3월 8일, 페리는 군악대가 성조기를 연주하는 가운데 27척의 보트에 나눠 탄 500명의 해병과 선원들을 이끌고 요코하마에 상륙했다.[21]

약 한 달간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빈 선물 교환과 같은 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졌다. 미국 측은 일본에 소형 증기 기관차 모형, 전신 장치, 각종 농기구, 소화기, 위스키 100갤런, 시계, 난로, 미국 관련 서적 등을 선물했다. 일본 측은 금칠한 가구와 상자, 청동 장식품, 비단 의복, 도자기 술잔, 그리고 페리의 취미를 고려한 조개껍질 수집품 등으로 답례했다. 또한 양측은 문화 공연을 선보였는데, 미국 선원들은 민스트럴 쇼를 공연했고, 일본 측은 여러 스모 선수들이 힘을 과시하는 시범 경기를 열었다.

협상은 하야시 아키라를 일본 측 전권 대표로 하여 진행되었다. 오랜 협상 끝에 1854년 3월 31일(가에이 7년 3월 3일), 요코하마에서 총 12개 조로 이루어진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이 체결되었다.[22] 이 조약으로 미국 선박에 시모다하코다테 두 항구가 개방되었고, 난파된 미국 선원의 구조 및 보호, 시모다에 미국 영사관 설치 등이 결정되었다. 이 조약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래 200년 이상 지속된 일본의 쇄국 정책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조약 체결 후 페리는 함대의 일부를 보내 새로 개항된 항구와 영사관 부지를 조사하게 했다. 5월 하순에는 직접 하코다테항을 방문하여 마쓰마에번의 가로(家老)에게 하코다테항 관련 약정을 요구했으나,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68] 이후 페리는 협상 장소를 이즈국 시모다(현 시즈오카현 시모다시)의 료센지(了仙寺)로 옮겨, 1854년 6월 17일(가에이 7년 5월 22일)에 미일화친조약의 세부 사항을 규정한 총 13개 조의 시모다 조약을 추가로 체결했다.

페리 함대는 6월 25일 시모다를 떠났으며, 귀환하는 길에 류큐 왕국과도 정식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함명함종건조년도톤수승무원기관 출력비포
포우하탄
Pawhatan
증기 외륜 프리깃1852년적재량 2,415 bm톤
배수량 약 3825416.96kg
289420NHP
795IHP
11인치 달그렌포 x1
9인치 달그렌포 x10
12파운드포 x5
서스쿼해나
Susquehanna
증기 외륜 프리깃1850년적재량 2,450 bm톤
배수량 약 3885363.73kg
300420NHP
795IHP
150파운드 패럿포 x2
9인치 달그렌포 x12
12파운드포 x1
미시시피
Mississippi
증기 외륜 프리깃1841년적재량 1,692 bm톤
배수량 약 3271671.34kg
260434NHP
650IHP
10인치 페크산포 x8
8인치 페크산포 x2
사라토가
Saratoga
범선 슬루프1843년적재량 882 bm톤2608인치포 x4
32파운드포 x18
마케도니안
Macedonian
범선 프리깃1852년 개조적재량 1,341 bm톤489(개조 전)8인치포 x6
32파운드포 x16
밴댈리아
Vandalia
범선 슬루프1848년 개조적재량 770 bm톤1508인치포 x4
32파운드포 x16
서샘프턴
Southampton
범선 보급함1845년적재량 567 bm톤불명42파운드포 x2
렉싱턴
Lexington
범선 보급함1843년 개조적재량 691 bm톤190(개조 전)32파운드포 x6
서플라이
Supply
범선 보급함1846년 구입적재량 547 bm톤6024파운드포 x4


6. 결과 및 영향

페리 함대는 1854년 6월 25일 시모다를 떠나 귀국길에 류큐 왕국에 들러 정식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1] 페리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항해 기록인 '일본원정기'(Narrative of the Expedition of an American Squadron to the China Seas and Japaneng)를 정리하여 의회에 제출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페리 원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다.[1] 그러나 페리는 조약 체결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완수한 지 4년 만인 1858년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페리의 원정 이후 미국은 남북전쟁(1861년~1865년)이라는 격렬한 내전에 돌입하면서 일본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다.[1] 이 공백을 틈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이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1]

페리 원정은 이후에도 상징적인 의미를 남겼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거행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에는 페리 함대의 기함이었던 '포우하탄'에 게양되었던 성조기가 본국에서 직접 공수되어 사용되었다.[1] 또한, 1854년 류큐에서 페리 함대에 선물했던 범종은 미국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에 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다가 1987년 오키나와로 반환되었다. 이 종은 1456년에 제작된 '옛 대안선사 종'(旧大安禅寺鐘)으로, 통칭 '호국사 종'(護国寺の鐘)으로 불린다.[1]

1854년 두 번째 내항 당시 페리 함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1]

함명함종건조년도적재/배수량승조원기관출력무장
포우하탄
(USS Powhatan)
증기외륜 프리깃1852년적재량 2415톤 (bm톤)
배수량 3765 영국 톤
289명420NHP
795IHP
11인치 달그렌 포 x1
9인치 달그렌 포 x 10
12파운드 포 x 5
서스퀘해나
(USS Susquehanna)
증기외륜 프리깃1850년적재량 2450톤 (bm톤)
배수량 3824 영국 톤
300명420NHP
795IHP
150파운드 패럿 포 x2
9인치 달그렌 포 x12
12파운드 포 x1
미시시피
(USS Mississippi)
증기외륜 프리깃1841년적재량 1692톤 (bm톤)
배수량 3220 영국 톤
260명434NHP
650IHP
10인치 벡상 포 x8
8인치 벡상 포 x2
새러토가
(USS Saratoga)
범주 슬루프1843년적재량 882톤 (bm톤)260명없음8인치 포 x4
32파운드 포 x18
마케도니안
(USS Macedonian)
범주 슬루프1852년 개조적재량 1341톤 (bm톤)489명없음8인치 포 x6
32파운드 포 x16
밴달리아
(USS Vandalia)
범주 슬루프1848년 개조적재량 770톤 (bm톤)150명없음8인치 포 x4
32파운드 포 x16
사우스햄턴
(USS Southampton)
범주 보급함1845년적재량 567톤 (bm톤)-없음42파운드 포 x 2
렉싱턴
(USS Lexington)
범주 보급함1843년 개조적재량 691톤 (bm톤)190명없음32파운드 포 x 6
서플라이
(USS Supply)
범주 보급함1846년 구입적재량 547톤 (bm톤)60명없음24파운드 포 x 4


7. 역사적 평가



페리는 1855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미국 의회로부터 일본 원정의 공로를 인정받아 2만달러(2022년 기준 약 73.7만달러)의 포상금을 받았다. 그는 이 자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원정 보고서인 《미국 함대의 중국해 및 일본 원정의 기록》(Narrative of the Expedition of an American Squadron to the China Seas and Japaneng) 3권을 준비하고 출판했다. 이 보고서는 원정 중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프랜시스 L. 호크스가 페리의 감독 아래 작성했으며,[23] 1856년 미국 상원에 제출된 후 상업적으로 출판되었다. 페리는 또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퇴역 명단에서 소장으로 진급했다.[24] 그러나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심한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25]

페리는 원정 기록 출판에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 1857년 12월 28일 완성을 발표했으나, 이틀 후 해군 효율 위원회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1858년 3월 4일 뉴욕에서 류머티즘이 심장으로 전이되고 통풍 합병증이 겹쳐 사망했다.[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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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3] 웹사이트 Aulick, John H. (ca. 1791–1873) https://www.encyclop[...] 2020-07-12
[4] 웹사이트 Aulick, John H. (ca. 1791–1873) https://www.encyclop[...] 20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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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웹사이트 Commodore Perry's Expedition to Japan http://www.grifworld[...] Ben Griffiths 2009-09-12
[26] 서적 'Old Bruin' Commodore Matthew Calbraith Perry 1967
[27] 웹사이트 Population statistics: historical demography http://www.populstat[...] 2017-07-30
[28] 간행물 19世紀後半期アメリカ式捕鯨の衰退と産業革命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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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Edmund Roberts, Our First Envoy to Japan http://query.nytimes[...] New York Timex 1905-08-06
[35]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36] 서적 和蘭国使節来朝外交勧告の事 岩倉公実記
[37]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2010
[38] 문서 オーリックを日本に派遣することに際しては、三つの目的があった。一つは、中国との貿易に従事する米国汽船に、日本の石炭購入を許すこと。二つ目は、日本政府は、日本沿岸で難破した米国水兵や財産を保護する義務を負うべきこと。三つ目は、米国船が日本の港で積み荷を販売若しくは交換する権利を獲得すること。さらにオーリックは、日本皇帝(将軍)に当てた大統領の親書を預かっていた。
[39]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2010
[40]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2010
[41] 서적 Graham, Volume IV
[42] 서적 元綱
[43] 문서 フォス美弥子
[44] 웹사이트 日本財団図書館 平成15年度 海事講演会 海・船セミナー2003 ?ペリー来航150周年記念?「黒船来航、その時日本は」 http://nippon.zaidan[...]
[45] 서적 開国起原
[46] 서적 和蘭国所領咬𠺕吧督外交勧告書を幕府に奉呈の事 岩倉公実記
[47] 서적 加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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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서적 福地源一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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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웹사이트 神奈川宿の外国人たち http://www.kaikou.ci[...] 横浜開港資料館報 2001
[53]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2010
[54]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2010
[55] 문서 大統領フィルモアから「日本皇帝」(将軍)にあてた親書には、ペリーを日本へ派遣した目的として、両国間における自由貿易を許すこと、難破船員を優遇しその財産を保護すること、船舶に石炭・食料および水を供給する寄港地として、日本南岸における一港を指定すること、を上げている。そして貿易については、5年ないし10年間試験的に実施し、利益がないことが分かれば、旧法に復することもできると述べるなど、慎重な表現がなされていることが注目される
[56]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2010
[57] 서적 日本開国史 吉川弘文館 2010
[58] 웹사이트 神奈川県域のヒストリック・イベント(7)、第二章 横浜村の黒船騒動、一、異国船の接近に驚く住民 https://web.archive.[...]
[59] 문서 同時代史料においては類似した句が見られるのみで、主に明治11年(1878年)の『武江年表』や大正3年(1914年)『江戸時代落書類聚』など、明治以降に出典が見られることから、後世に喧伝された歌である可能性が指摘され、近年では教科書から姿を消している。しかし平成22年(2010年)になり、黒船来航直後に詠まれたことを示す書簡(嘉永6年(1853年)6月30日付の山城屋左兵衛から色川三中への書簡、静嘉堂文庫所蔵)が見つかっている。
[60] 웹사이트 久里浜村誌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2-11-02
[61] 문서 実際は上記のとおり、黒船4隻中、蒸気船は2艦のみである。
[62] 서적 淺川2009
[63] 서적 淺川2009
[64] 문서 翌嘉永7年9月21日(1854年11月11日)、実際に 蒸気軍艦2隻(咸臨丸および朝陽丸)が発注されている
[65] 서적 幕末外交と開国
[66] 서적 大日本古文書
[67] 서적 現代語訳 墨夷応接録
[68] 웹사이트 函館市史 http://www.lib-hkd.j[...] 函館市 2014-08-06
[69] 웹사이트 沖縄県立博物館・美術館 通訳案内士研修資料 https://www.mlit.go.[...] 国土交通省 2014-06-07
[70] 서적 次席将校
[71] 서적 岩倉公実記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1906
[72] 서적 資料カラー歴史 浜島書店 1994
[73] 서적 江戸の花鳥画 博物学をめぐる文化とその表象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2017
[74] 뉴스 靖国神社は昔、競馬場! https://style.nikkei[...] Nikkei Style 201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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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문서 御侍中先祖書系圖牒
[77] 웹사이트 <海外便り>ペリーが掲げた理想と星条旗の「その後」 アメリカ・アナポリス:東京新聞 TOKYO Web https://www.tokyo-np[...]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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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웹사이트 (7ページ目)「なぜアメリカ相手に戦争?」ペリー来航から“88年の怨念”が導いた太平洋戦争の末路とは https://bunshun.jp/a[...] 2024-03-31
[80] 서적 The Korean struggle for International identity in the foreground of the Shufeldt Negotiation : 1866 - 1882 https://books.google[...]
[81] 논문 19世紀後半期アメリカ式捕鯨の衰退と産業革命 https://www.jstage.j[...] 2010
[82] 문서 1848년 5월 4일 하원 해군 위원회 보고서 석이 1848
[83] 간행물 函館日ロ交流歴史研究会「会報」No.9 函館日ロ交流歴史研究会 199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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