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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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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에도 막부의 3대 쇼군으로, 1604년에 태어나 1651년에 사망했다. 그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이며, 162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쇼군에 취임했다. 이에미쓰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산킨코타이 제도를 법제화하여 다이묘들을 통제했으며, 쇄국 정책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하고 대외 무역을 제한했다. 그의 치세는 무단 정치로 평가되며, 1632년 히데타다의 사망 이후 친정을 시작하여 막부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4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남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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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미쓰
기본 정보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미쓰 초상 (금산사 소장, 오카야마 현립 박물관 기탁)
이름도쿠가와 이에미쓰
본명다케치요 (竹千代)
시호다이유인(大猷院)
계명다이유인덴조쇼이치이다이상코쿠코(大猷院殿贈正一位大相国公)
출생일1604년 8월 12일
출생지에도, 도쿠가와 막부(현재의 도쿄, 일본)
사망일1651년 6월 8일
사망지에도, 도쿠가와 막부
묘소닛코 산 린노지
부모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
어머니: 오에요
형제자매도요토미 사다코
센히메
타마히메
카츠히메
도쿠가와 나가마루
하츠히메
이에미쓰
도쿠가와 다다나가
도쿠가와 마사코
호시나 마사유키
배우자정실: 타카츠카사 다카코
측실: 후리 외 다수
자녀치요히메
도쿠가와 이에쓰나
도쿠가와 가메마쓰
도쿠가와 쓰나시게
도쿠가와 쓰나요시
도쿠가와 쓰루마쓰
그 외 다수
관직 및 작위
관위정3위
종2위
권대납언
우근위대장
우마료고감
정2위
내대신
정이대장군
종1위
좌대신
좌근위대장
증 정1위태정대신
막부에도 막부 제3대 정이대장군(재임: 1623년 ~ 1651년)
재위 기간
재위 시작1623년 8월 23일
재위 종료1651년 6월 8일
천황고미즈노오 천황
메이쇼 천황
고코묘 천황
가문
씨족도쿠가와 씨
기타
서명

2. 생애

게이초 9년(1604년) 7월 17일 에도 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서 에도 막부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그의 정실 에요 사이에서 태어났다. 히데타다에게는 장남 나가마루(長丸)가 있었으나 요절하여, 이에미쓰가 사실상 후계자로 여겨져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명인 '''다케치요'''(竹千代)를 물려받았다. 유모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이었던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이자 이나바 마사나리의 정실인 가스가노 쓰보네이다.[1]

1606년 동복 동생인 구니마쓰(国松, 후일의 도쿠가와 다다나가)가 태어났다. 『무야촉담(武野燭談)』에 따르면, 병약하고 말을 더듬었던 이에미쓰보다 다다나가를 더 총애한 부모가 다다나가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위기감을 느낀 가스가노 쓰보네가 오고쇼 이에야스에게 장유유서를 명분으로 직소하여 이에미쓰를 후계자로 확립했다고 한다. 이 기록의 진위는 불분명하나, 기록상 이에미쓰가 후계자로 확실시된 시점은 겐나 원년(1615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겐나 2년(1616년) 5월 사카이 다다토시, 나이토 기요쓰구, 아오야마 다다토시 등을 가신으로 맞이하고, 9월에는 약 60명의 소년들을 시동으로 들여 가신단을 구성하였다. 겐나 3년 정식으로 쇼군 후계자의 거처인 니시노 마루에 들었고, 겐나 4년 조정의 칙사를 맞이하는 등 공식 행사를 수행하였다.

겐나 6년(1620년) 관례를 치르고 다케치요에서 '''이에미쓰'''(家光)로 개명한 뒤 종3위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임명되었다. 본래는 「이에타다(家忠)」로 개명할 것이 결정되었으나, 스덴의 추천으로 「이에미쓰」가 낙점되었다.[13]

겐나 9년(1623년) 3월 5일 쇼군 후계자로서 우코노에곤다이쇼(右近衛大将)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아버지 히데타다와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7월 27일 후시미 성에서 정식으로 쇼군 선지를 받고 3대 쇼군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나다이진(内大臣)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셋케의 일원인 다카쓰카사(鷹司) 가문의 다카코(孝子)와 혼인하여 정실로 맞아들였다.[1]

히데타다오고쇼로서 군사 지휘권 등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사실상 히데타다-이에미쓰의 2원 체제로 운영되었다. 1626년 고미즈노오 천황의 니조 행차 때 히데타다와 함께 교토에 상경했는데, 쇼군인 이에미쓰보다 오고쇼인 히데타다가 다테 마사무네, 사타케 요시노부 등 유력 다이묘하타모토를 다수 거느리고 상경하였다. 천황 알현 후 이에미쓰는 사다이진(左大臣) 겸 사코노에곤다이쇼(左近衛大将)로 승격했지만, 히데타다는 태정대신으로 승격하였다.

1632년 히데타다가 사망하면서 이에미쓰는 1인 통치 체제를 갖추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1633년에는 다다나가가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의 형제가 할복으로 사망할 때까지 조심스럽게 통치했다.[5]

1651년 향년 48세로 에도 성에서 사망하였고, 홋타 마사모리, 아베 시게쓰구 등이 이에미쓰를 따라 순사하였다. 태유원(太猷院)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1] 닛코의 태유원(大猷院)에 안장되었다.[9]

도쿠가와 이에미쓰 초상화 (도쿠가와 기념재단 소장)

2. 1. 유년기 (1604년 ~ 1623년)

게이초 9년(1604년) 7월 17일 에도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서 에도 바쿠후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그의 정실 에요 사이에서 태어났다. 히데타다에게는 장남 나가마루(長丸)가 있었으나 요절하여, 이에미쓰가 사실상 후계자로 여겨져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명인 '''다케치요'''(竹千代)를 물려받았다. 유모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이었던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이자 이나바 마사나리의 정실인 가스가노 쓰보네이다.[1]

1606년 동복 동생인 구니마쓰(国松, 후일의 도쿠가와 다다나가)가 태어났다. 후세의 기록인 『무야촉담(武野燭談)』에 따르면, 병약하고 말을 더듬었던 이에미쓰보다 다다나가를 더 총애한 부모가 다다나가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위기감을 느낀 가스가노 쓰보네가 오고쇼 이에야스에게 장유유서를 명분으로 직소하여 이에미쓰를 후계자로 확립했다고 한다. 이 기록의 진위는 불분명하나, 기록상 이에미쓰가 후계자로 확실시된 시점은 겐나 원년(1615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겐나 2년(1616년) 5월 사카이 다다토시, 나이토 기요쓰구, 아오야마 다다토시 등을 가신으로 맞이하고, 9월에는 약 60명의 소년들을 시동으로 들여 가신단을 구성하였다. 겐나 3년 정식으로 쇼군 후계자의 거처인 니시노 마루에 들었고, 겐나 4년 조정의 칙사를 맞이하는 등 공식 행사를 수행하였다.

겐나 6년(1620년) 관례를 치르고 다케치요에서 '''이에미쓰'''(家光)로 개명한 뒤 종3위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임명되었다. 본래는 「이에타다(家忠)」로 개명할 것이 결정되었으나, 스덴의 추천으로 「이에미쓰」가 낙점되었다.[13]

겐나 9년(1623년) 3월 5일 쇼군 후계자로서 우코노에곤다이쇼(右近衛大将)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아버지 히데타다와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7월 27일 후시미성에서 정식으로 쇼군 선지를 받고 3대 쇼군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나다이진(内大臣)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셋케의 일원인 다카쓰카사(鷹司) 가문의 다카코(孝子)와 혼인하여 정실로 맞아들였다.[1]

2. 2. 쇼군 취임 (1623년)

이에미쓰일본어는 1623년, 히데타다가 쇼군직에서 물러나면서 쇼군 자리를 이어받았다.[3] 히데타다는 오고쇼(大御所, 은퇴한 쇼군)로서 계속 통치했지만, 이에미쓰일본어막부 관료 조직의 공식적인 수장 역할을 맡았다.[3] 그는 여러 다이묘들 앞에서 "조부와 아버지와는 달리, 나는 태어날 때부터 쇼군이 될 운명이었다"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다테 마사무네의 조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4]

히데타다는 정권을 이양한 후에도 오고쇼로서 군사 지휘권 등 정치적 실권을 계속 장악했고, 막정(幕政)은 본마루 연로(本丸年寄)와 니시노마루 연로(西の丸年寄)의 합의에 의한 이원정치 체제 하에 놓였다. 이에미쓰일본어는 쇼군이 되자마자 수역(守役)인 아이야마 다다토시(青山忠俊)를 로주(老中)에서 파면하고, 간에이(寛永) 2년(1625년)에는 개역(改易) 처분을 내렸다.[14]

간에이 9년(1632년) 1월에 히데타다가 사망하자 이원정치는 해소되고, 쇼군에서 공방(公方)으로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 겐나 9년(1623년) 3월 5일: 우근위대장에 임관되고 우마료고감을 겸임.
  • 같은 해 7월 27일: 정이위에 서임되고 내대신에 전임. 정이대장군, 겐지장자 선하를 받음.

2. 3. 치세 (1632년 ~ 1651년)

히데타다오고쇼로서 군사 지휘권 등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사실상 히데타다-이에미쓰의 2원 체제로 운영되었다. 1626년 고미즈노오 천황의 니조 행차 때 히데타다와 함께 교토에 상경했는데, 쇼군인 이에미쓰보다 오고쇼인 히데타다가 다테 마사무네, 사타케 요시노부 등 유력 다이묘하타모토를 다수 거느리고 상경하였다. 천황 알현 후 이에미쓰는 사다이진(左大臣) 겸 사코노에곤다이쇼(左近衛大将)로 승격했지만, 히데타다는 태정대신으로 승격하였다.

1632년 히데타다가 사망하면서 이에미쓰는 1인 통치 체제를 갖추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1633년에는 타다나가가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의 형제가 할복으로 사망할 때까지 조심스럽게 통치했다.[5]

1651년 향년 48세로 에도 성에서 사망하였고, 홋타 마사모리, 아베 시게쓰구 등이 이에미쓰를 따라 순사하였다.

2. 3. 1. 내정

간에이 9년(1632년) 아버지 히데타다가 사망하면서 이에미쓰는 1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하타모토를 중심으로 직할 영지를 재편하여 막부의 재정과 권력을 확고히 하였으며, 로주, 와카도시요리, 부교, 오메쓰케 제도를 도입하여 현직 쇼군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간에이 12년(1635년)에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개정하여 다이묘들 사이에 이미 관례로 자리잡아 있던 산킨코타이를 법적으로 제도화하였다.[6]

산킨코타이


대외적으로는 나가사키 무역의 이익을 막부가 독점하기 위하여 무역을 통제하고 기독교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간에이 14년(1637년) 시마바라의 난을 거쳐 간에이 18년(1641년)에는 쇄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막부의 권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이에미쓰 시대까지의 정치는 후세의 '문치 정치'와 대비하여 '무단 정치'로도 불린다.

간에이 19년(1642년) 간에이 대기근이 일어났으나 막부 체제는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후 농민 통제의 일환으로 전답 매매를 금지하였다.[32]

히데타다는 자신의 고문들(모두 베테랑 다이묘들)이 이에미쓰의 섭정으로 활동하도록 남겨두었다. 1633년, 그의 형제가 사망한 후, 이에미쓰는 이들을 해임했다. 이에미쓰는 아버지의 고문들 대신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임명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이에미쓰는 강력하고 중앙집권화된 행정부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많은 다이묘들의 반감을 샀지만, 이에미쓰는 단순히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산킨코타이 제도는 다이묘들이 에도에 번갈아 거주하도록 강제했는데, 에도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고, 고향 영지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 정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다이묘들을 그들의 고향 영지로부터 분리하고, 에도와 고향 영지 사이의 왕복 여행(그리고 많은 수행원들과 함께)에 수반되는 막대한 여행 경비에 상당한 금액을 정기적으로 지출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들이 너무 많은 부나 권력을 축적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이 제도에는 또한 다이묘의 아내와 상속인들이 에도에 남아, 그들의 영주와 고향 영지와 단절되어, 다이묘들이 쇼군에 대항하여 반란을 모의할 경우 해를 입거나 살해될 수 있는 인질 역할을 하는 것을 포함했다.[6]

히데타다 사후, 이전부터 로주였던 도이 도시카쓰, 사카이 다다카쓰, 사카이 다다요가 계속해서 정사를 맡았지만, 이에미쓰는 그때까지 정사 한 명이 할 수 있었던 일도, 정사 3명의 합의가 없으면 쇼군에게 보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무는 침체되었고, 여러 다이묘들이 막부에 약간의 진물을 바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간에이 16년(1639년)에는 제도를 개혁하여, 정사 3명의 담당을 월번제로 하고, 육인중(와카도시요리의 전신)을 보좌로 두었다. 처음에는 이 제도가 원활하게 움직였지만, 후에 정사들이 안건을 다음 달로 미루는 일이 많아져, 더욱 침체를 불러왔다.

그 후, 육인중에서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아베 다다아키 등이 로주가 되고, 도이 도시카쓰와 사카이 다다카쓰는 중요한 사항만 다루는 타이로가 되었다. 또한, 메쓰케와 오메쓰케를 설치하고, 정사들을 거치지 않고 쇼군이 직접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소쿠슈 배하에 첩보기관을 설치하는 등[17], 막부의 여러 직책은 이에미쓰 시대에 확립되었다.

2. 3. 2. 대외 관계

나가사키 무역의 이익을 막부가 독점하기 위해 무역을 통제하고 기독교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간에이 14년(1637년) 시마바라의 난을 거쳐 간에이 18년(1641년)에는 쇄국 체제가 완성되었다.[1]

17세기 동안 일본에 머물렀던 천주교 상인들과 선교사들은 1630년대 이에미쓰가 거의 모든 유럽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들의 활동이 끝을 맺었다. 일본과의 무역 관계는 매년 네덜란드 배 한 척만 허용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이에미쓰의 이러한 정책은 일본의 이전 외교 무역 정책 재건을 호소하기 위해 온 두 명의 포르투갈인 처형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1630년대 말까지 이에미쓰는 국내외 인적, 물적, 정보의 흐름에 대한 제한 시스템을 더욱 자세히 규정한 일련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1630년대에 걸쳐 이에미쓰는 일본의 대외 관계를 제한하는 일련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른바 사카쿠(鎖國)령(1635년)으로, 이에미쓰가 도입한 주요 제한 사항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모든 일본 배와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여행하거나 일본 해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금지했고, 위반 시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159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를 광범위하게 여행했던 일본인들은 이제 사형의 위협 아래서 해외 여행이나 귀국이 금지되었다.

이 포고령은 비밀리에 종교를 실천하고 전국에 전파하는 사제들과 그 추종자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는 후한 선물과 상을 제공했다. 또한 새로 도착하는 모든 배는 천주교 사제들과 추종자들을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 이 문서는 들어오는 외국 선박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온 상인들은 무역 허가를 받기 전에 가져온 물품 목록을 제출해야 했다. 추가 조항에서는 무역의 시기와 물류에 대한 세부 사항을 명시했다. 예를 들어, 한 조항에서는 "외국 선박의 귀국 출발일은 9월 20일 이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에미쓰는 생사(生絲)의 가격 변경을 금지하여 무역 도시 간의 경쟁을 최소화했다.

1637년, 시마바라에서 이에미쓰의 반 기독교 정책에 대한 무장 반란이 일어났지만, 과도한 세금과 현지 영주에 의한 농민에 대한 잔혹한 대우와 같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 기간의 국내 불안은 시마바라의 난으로 알려져 있다.[7] 막부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반란군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막부가 포르투갈인을 추방하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제한하는 편리한 구실로 사용되었다.

이 포고령 이후 일본은 네 가지 경로를 통해 국제 무역, 정보 및 문화 교류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나가사키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및 독립적인 중국 상인들과의 무역 및 기타 거래의 중심지였다. 사쓰마번은 류큐왕국과의 관계를 통제했고(류큐를 통해 중국 상품과 정보뿐만 아니라 류큐를 통과하는 대체 무역로를 통해 더 먼 곳의 제품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쓰시마번은 조선 왕조 한국과의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처리했고, 마쓰마에번아이누(아이누 족),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의 원주민들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사할린 근처 본토에 있는 관련 민족들과의 제한적인 소통을 관리했다. 이 시기의 일본은 종종 "폐쇄된" 또는 "사카쿠(鎖國, '쇠사슬로 묶인 나라')" 상태에 있었다고 묘사되지만, 1980년대 이전부터 학자들은 '카이킨'(海禁, '해상 제한')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해왔다. 즉, 일본이 외부 세계에 "폐쇄"되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제한된 경로를 통해 외부 세계와 매우 적극적으로 교류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8] 그러나 이에미쓰가 제정한 조치는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본의 항구가 더 넓은 범위의 무역 파트너에게 개방되었고, 서구인들은 일본 내에 정착하고 여행할 자유가 주어졌으며, 일본인들은 다시 해외 여행의 자유를 얻었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한 탄압 정책을 추진했다. 예를 들어, 간에이 원년 4월 27일에는 남자 5명, 여자 7명의 천주교 신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12월 1일에는 어린이를 포함한 13명이 물고문형으로 처형되었다. 또한 가신 중가와 모(某)는 일단 배교했지만, 신앙을 재개했기 때문에 톱으로 켜는 형벌에 처해졌다. 덴쇼 천주교 사절단의 나카우라 줄리안(中浦ジュリアン)도 간에이 10년에 구멍에 매달아 죽이는 형벌로 처형되었다.

2. 4. 사망 (1651년)

慶安|게이안일본어 4년(1651년) 4월, 향년 48세로 에도성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홋타 마사모리, 아베 시게쓰구 등이 이에미쓰를 따라 순사하였다.[32] 퇴위가 아닌 죽음으로 막을 내린 최초의 도쿠가와 쇼군이었다. 태유원(太猷院, Daiyūin)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1] 닛코의 태유원(大猷院)에 안장되었다.[9] 이에미쓰는 사망 전에 닛코 도쇼궁을 확장하였으나, 그의 능의 상징물이 조부의 것을 능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을 주의 깊게 피했다.[10]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이자 상속자인 이에쓰나가 쇼군이 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도쿠가와 히데타다
어머니오에요
어머니 쪽 동생도요토미 사다코(豊臣佐多子)도요토미 히데요시요도도노에게 입양, 구죠 유키에와 결혼.
젖먹이가스가노쓰보네
정실다카쓰카사 다카코
측실지쇼인
장녀지요히메오와리 도쿠가와가 제2대 당주 도쿠가와 미쓰토모의 정실
측실호주인
장남도쿠가와 이에쓰나제4대 쇼군
측실오마사노가타
차남가메마쓰
측실준쇼인
3남도쿠가와 쓰나시게고후 번 재상,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생부
측실게이쇼인
4남도쿠가와 쓰나요시다테바야시번 참의, 제5대 쇼군
측실조코인
5남쓰루마쓰
측실에이코인자녀 없음
측실호신인



이에미쓰의 삼남 쓰나시게와 사남 쓰나요시는 각각 고후 도쿠가와가와 다테바야시 도쿠가와가를 창설하여 '''고료덴'''(御両典)이라 불렸다.[31] 이 가문들은 도쿠가와 고산케보다 영지는 적었지만 가격은 높았다. 이 두 가문이 멸문한 이후에야 고산케에서 쇼군이 나올 수 있었다.

4. 인물상


  • 15명의 에도 막부 쇼군 중 측실이 아닌 정실 소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미쓰 및 요시노부 3명 뿐이며, 그 중에서도 미다이도코로(御台所) 슬하 태생으로는 이에미쓰가 유일하다.[34] 그러나 이에미쓰가 쇼군 후계자가 되기 전에는 이에야스의 숨겨진 아들로, 어머니가 그의 유모인 가스가노 쓰보네라는 낭설이 떠돌았다. 이는 사실 무근이라는 발표 아래 2대 쇼군 히데타다의 후계로서 3대 쇼군의 자리에 올랐지만, 현재까지도 이에 대한 진실과 관련된 연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 미복 차림으로 성에서 나와 잠행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가쓰 가이슈의 『히카와 세이와(氷川清話)』에는 이 같은 이에미쓰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한 노승이 힘 센 남자 한 명을 고용하여 이에미쓰에게 싸움을 걸게 하였다는 속화가 기록되어 있다. 쇼군이 된 뒤에도 말을 타고 수행원들을 따돌리며 멀리 나가거나 성 밖 다이묘의 저택으로 행차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무예를 즐겨 간에이 어전 검도대회, 게이안 어전 검도대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검술을 좋아하여 야규 무네노리에게 사사받은 뒤 야규 신카게류(柳生新陰流)의 면허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 이에야스, 히데타다와 같이 (能)를 좋아하였으나 풍류로 즐기거나 배우의 공연을 보는 것보다는 다이묘나 가신들이 연기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고 한다.
  • 도쇼 다이곤겐(東照大権現)으로 추숭된 조부 이에야스로부터 사랑받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미쓰의 유모 가스가노 쓰보네가 남긴 「도쇼 다이곤겐 축사(東照大権現祝詞)」에 따르면, 병약하게 태어나 3세 무렵 중병을 앓던 이에미쓰가 이에야스가 직접 조제한 약을 먹고 쾌유하였고, 이후 이에미쓰가 병을 앓을 때마다 이에야스가 이에미쓰의 꿈에 나타나 병이 낫는 일이 많았다. 또한 이에미쓰를 소홀하게 취급하는 히데타다와 스겐인에게 격노한 이에야스가 이에미쓰를 직접 자신의 거처인 슨푸로 불러 양자로 삼은 뒤 3대 쇼군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며 아들 부부를 크게 질책하였다고 한다. 이에미쓰 또한 간에이 13년(1636년) 도쇼구(東照宮)가 완공되자 전 생애에 걸쳐 10회 방문하였으며,[33] 만년에 종종 이에야스를 꿈에 보고 가노 단유(狩野探幽)에게 몇 번씩 이에야스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였다. 또한 몸에 지니고 다녔던 부적 주머니에 「2세 곤겐, 2세 쇼군」,「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뭐든지 다이곤겐님 뜻대로」등의 글귀가 쓰인 종이를 넣고 다니기도 하였다.
  • 젊은 시절에는 남색을 즐겨[34]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아 후계자 문제를 걱정한 가스가노 쓰보네가 몇 차례 이에미쓰 취향의 여인들을 각처에서 모집하여 이에미쓰의 관심을 끌어보려 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측실 오후리가 장녀 지요히메를 낳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자녀들이 태어났으며, 몇 명의 측실을 총애하기도 하였다. 반면 정실 다카코와는 혼인 초부터 말년까지 계속 사이가 험악하여, 결국 다카코를 오오쿠로부터 나카노마루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임종 당시 유품을 분배할 때에도 다카코에게는 금 50냥과 몇 가지 소소한 다도 도구만을 주었고, 측실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다카코가 양자로 삼도록 허락해주지도 않는 등 평생에 걸쳐 다카코를 푸대접하였다.
  •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자주 병을 앓았다. 병이 들 때마다 이불을 5, 6겹씩 두껍게 덮는 습관이 있었고, 의사들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보이면 격렬하게 화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어 병이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센고쿠 시대에 살아남은 무장들인 다테 마사무네, 도도 다카토라, 모리 히데모토,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을 총애하여 그들로부터 전투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였다. 특히 다테 마사무네를 깊이 존경하여 에도 시대 도쿠가와 바쿠후를 섬긴 영주에 대한 대접으로는 지나칠 정도의 정중한 대우를 하였다고 한다. 마사무네가 사망한 뒤에는 그의 중신인 다테 시게자네를 총애하여 시게자네가 등성할 때마다 그로부터 전쟁 이야기를 청하여 히토토리바시 전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즐겨 들었다. 이에미쓰가 쇼군 취임 이후 "나는 태어날 때부터 쇼군으로 태어났다"라는 호전적인 발언을 한 데에는 마사무네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설도 있다.
  • 『당대기(当代記)』에는 출생 당시 10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순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산이었다.
  • 이에미쓰는 병이 들면 이불 5~6장을 덮고 두꺼운 옷을 입고 자는 요양법을 행했기 때문에, 오히려 병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의원들이 의견을 말하면 격렬하게 화를 내고, 처벌 직전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야마모토 히로후미는 정신적인 압박이 초래한 불안신경증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23]
  • 간에이 5년(1628년)에는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 회복 직후 6월에 각기병에 걸렸다. 이후 매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각기병으로 자주 고생하게 된다. 사망한 게이안 4년(1651년) 1월에는 가슴이 압박된다는 증상을 호소했는데, 각기 충심으로 보인다.[24]
  • 게이안 4년(1651년) 4월 19일, 이에미쓰는 진상품인 차완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떨림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다음 날 4월 20일에 그대로 훙거했다. 죽기 직전부터 보행 장애도 생겼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사인은 뇌졸중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25]

5. 평가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에도 막부 3대 쇼군으로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쇼군 계승의 정통성, 무예와 (能) 등 문화 애호, 조부 이에야스와 센고쿠 시대 무장들에 대한 존경심 등이 있다.

반면 부정적인 면으로는 과도한 재정 지출, 강압적인 통치 방식, 개인적인 문제점들이 지적된다. 닛코 도쇼구 개축, 대규모 참배, 호화 군선 건조 등에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여 재정을 탕진하고, 산킨코타이 제도화, 쇄국 정책, 농민 통제 등 강압적인 통치로 다이묘와 백성들을 억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실 다카쓰카사 다카코를 푸대접하고 잦은 병치레와 괴팍한 성격을 보인 것도 부정적 평가 요인이다.

어린 시절 이에미쓰는 내성적이었지만, 증조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를 닮았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33]

5. 1. 긍정적 평가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여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쇼군 계승: 에도 막부 쇼군 중 정실 소생은 이에야스, 이에미쓰, 요시노부 3명뿐이며, 그 중에서도 미다이도코로(御台所) 슬하에서 태어난 유일한 쇼군이다.[33] 어린 시절에는 이에야스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2대 쇼군 히데타다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 무예 애호: 미복잠행을 즐겼으며, 무예를 좋아하여 간에이 어전 검도대회, 게이안 어전 검도대회 등을 개최하고 야규 무네노리에게 검술을 배워 야규 신카게류(柳生新陰流)의 면허를 획득했다.[34]
  • 노(能) 애호: (能)를 좋아했으며, 다이묘나 가신들이 연기하는 것을 즐겨 보았다.
  • 조부 이에야스 존경: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깊이 존경하여 도쇼구(東照宮)를 자주 방문하고, 가노 단유(狩野探幽)에게 이에야스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부적 주머니에 "2세 곤겐, 2세 쇼군",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뭐든지 다이곤겐님 뜻대로" 등의 글귀가 쓰인 종이를 넣고 다녔다.
  • 센고쿠 시대 무장 존경: 다테 마사무네, 도도 다카토라, 모리 히데모토,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을 총애하고 그들의 전투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특히 다테 마사무네를 존경하여 극진히 대우했으며, 그의 중신인 다테 시게자네에게서 히토토리바시 전투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이에미쓰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쇼군으로 태어났다"라는 호전적인 발언을 한 데에는 마사무네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다.

5. 2. 부정적 평가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에도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확립했지만, 여러 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 막대한 재정 지출:


항목내용비고
닛코 도쇼구 대규모 개축56만 8천 냥, 은 100관 투입[33]
대규모 참배 (3회)수만 명 수행원 동반, 막대한 비용 소요
상락(上洛) 3회교토와 에도에서 천황, 공경, 백성들에게 헌금 및 축의금 지급 (100만 냥 이상 지출)
호화 군선 건조 및 유지무카이 쇼칸에게 명하여 건조한 오자부네 아타카마루는 막대한 유지비 소요


  • 재정 탕진:


항목내용
이에야스 축재 탕진금은 산출량 감소와 맞물려 막부 재정 궁핍의 시초를 만듦
1대에 500만 냥 이상 사용다음 대 이에쓰나에게 600만 냥을 남겼으나, 각 방면에 52만 냥 상속


  • 강압적인 통치:
  • 1635년 부케 법도 개정을 통해 다이묘들의 산킨코타이를 법적으로 제도화하여 다이묘 통제 강화.
  • 나가사키 무역 이익 독점을 위해 무역 통제,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1641년 쇄국 체제 완성.
  • 농민 통제: 1642년 간에이 대기근 이후 전답 매매 금지.[32]

  • 개인적인 문제:
  • 정실 푸대접: 정실 다카쓰카사 다카코와 불화, 오오쿠에서 강제 퇴거, 유품 분배 시 홀대.
  • 병약함과 괴팍한 성격: 잦은 병치레, 의사들과 마찰, 이불을 겹겹이 덮는 습관.

6. 등장 작품

구분작품명비고연기자
소설야마오카 소하치 『도쿠가와 이에미쓰』고단샤 야마오카 소하치 역사문고, 1987년ISBN 4-06-195065-7, ISBN 4-06-195066-5, ISBN 4-06-195067-3, ISBN 4-06-195068-1
소설네기시 아키오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황녀 와노미야』일본도서간행회, 1997년ISBN 4-89039-379-X
소설하뉴 미치히데 『도쿠가와 이에미쓰 영명·무용의 3대 장군PHP문고, 1999년ISBN 4-569-57338-X
만화다나카 마사오 『도쿠가와 이에미쓰』가켄 만화인물일본사
만화요시나가 후미 『대옥』하쿠센샤※남녀 역전 설정
만화나카지마 켄지 『코믹판 일본의 역사(28) 에도인물전 도쿠가와 이에미쓰』포푸라샤
만화이마이 무지이 『장군의 피』KADOKAWA
영화하세가와·롭파의 이에미쓰와 히코자1941년하세가와 카즈오
영화장군 이에미쓰와 천하의 히코자1957년나카야마 쇼지
영화이에미쓰와 히코자와 이치심타스케1961년 1월나카무라 니시노스케(만야 킨노스케)
영화류생일족의 음모1978년 1월 21일마츠카타 히로키
영화장군 이에미쓰의 난심 격돌1989년 1월 14일쿄모토 마사키
영화대옥 백화요란2008년 11월 8일스즈키 유키
텔레비전 드라마대옥 (1968년판)간사이테레비, 1968년나카야마 진
텔레비전 드라마이에미쓰가 간다니혼테레비, 1972년나카 아미
텔레비전 드라마도쿠가와 삼국지텔레비 아사히, 1975년카타오카 타카오(현·카타오카 진자에몬)
텔레비전 드라마에도꼬 축제 타스케·이에미쓰·히코자후지테레비, 1981년타나카 켄
텔레비전 드라마에도의 대소동 타스케·이에미쓰·히코자후지테레비, 1982년타나카 켄
텔레비전 드라마도쿠가와 이에야스NHK 대하드라마, 1983년시마 에이지
텔레비전 드라마풍운 에도성 격랑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텔레비 도쿄, 1987년키타노미치 킨야
텔레비전 드라마신춘시대극 스페셜 이에미쓰와 히코자와 이치심타스케텔레비 아사히, 1989년나카무라 토오루
텔레비전 드라마장군 이에미쓰 닌자 여행텔레비 아사히, 1990-1993년미타무라 쿠니히코
텔레비전 드라마신춘 와이드 시대극 도쿠가와 무예장 류생 삼대의 검텔레비 도쿄, 1993년츠츠미 다이지로
텔레비전 드라마신춘대형시대극 3시간 스페셜 이에미쓰 모살텔레비 아사히, 1995년엔도리 히로시
텔레비전 드라마아오이 도쿠가와 삼대NHK 대하드라마, 2000년오노에 타츠노스케(유년기-소년기: 우치다 가가쿠→요시나가 카즈마→사토 케이스케→사카이 나가키→야마다 타카유키)
텔레비전 드라마대옥〜제1장〜후지테레비, 2004년니시지마 히데토시
텔레비전 드라마대옥〜탄생[유공·이에미쓰편](TBS, 2012년, 연기: 타베 미카코) ※남녀 역전 설정TBS, 2012년타베 미카코
텔레비전 드라마신춘 드라마 스페셜 홀리데이〜에도의 휴일〜텔레비 도쿄, 2023년모치즈키 아유무
텔레비전 드라마대옥NHK드라마 10, 2023년호리타 마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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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Homosexuality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4] 웹사이트 『世は生まれながらの将軍である!』という家光の発言の後、政宗は『もしこの言葉を聞いて徳川に敵対する者があれば、まず、この政宗がお相手いたそう!』と、周りの武将を睨み付けた https://study-z.net/[...] Samurai library 2024-07-22
[5] 서적
[6] 서적 Tour of Duty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8
[7]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2006
[8] 논문 The Entrenchment of the Concept of "National Seclusion"; Research Trends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Japanese Foreign Relations at the Start of the Early Modern Period: On the Reexamination of 'National Seclusion' – From the 1970's to 1990's; Foreign Relations during the Edo Period: Sakoku Reexamined; Reopening the Question of Sakoku: Diplomacy in the Legitimation of the Tokugawa Bakufu 1994; 1982; 1977
[9] 서적 Kaempfer's Japan: Tokugawa Culture Observed https://books.google[...]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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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征夷大将軍の辞令(宣旨)「孝亮宿禰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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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江戸開府四〇〇年記念 徳川将軍家展 NHK・NHKプロモーション編集 2003
[22] 웹사이트 御守袋文書にみる徳川家光の心理 https://cir.nii.ac.j[...]
[23] 서적 江戸城の宮廷政治
[24] 서적 病が語る日本史 講談社 2008
[25] 서적 徳川将軍家十五代のカルテ 新潮新書 2005-05
[26] 뉴스 将軍の肖像画、下絵はリアル 徳川宗家に伝来、研究進む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12-08-08
[27] 뉴스 徳川将軍家:家光の駕籠、福井の寺で発見 専門家「驚き」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8-07-31
[28] 서적 博物館資料集2 ―徳川歴代将軍の書画― 久能山東照宮博物館 1971
[29] 디지털자료 扶桑画人伝 https://www.ndl.go.j[...]
[30] 뉴스 徳川家光は「ヘタウマ」画家? 水墨画を公開へ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18-12-20
[31] 문서 以貴小伝、幕府祚胤伝
[32] 문서 겐로쿠 시대 고후 번 농민 통제령
[33] 문서 이에미쓰 사후 닛코 참배
[34] 문서 이에미쓰의 사랑을 받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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