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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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습은 후한 말에서 조위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인물이다. 젊어서 진군, 신비, 조엄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후한 말의 혼란을 피해 형주로 이주했다. 조조를 섬기며 서악현의 백성을 다스리고, 한중 공방전에서 활약했다. 조비가 황제가 된 후 관내후에 봉해졌고, 명제 시대에는 제갈량의 북벌에 대비하여 대장군군사로 임명되었다. 진수는 두습을 온화하고 줏대 있는 인물로 평가했으며, 아들 두회가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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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딩산시 출신 - 대니얼 추이
대니얼 추이는 분수 양자 홀 효과를 호르스트 루트비히 슈퇴르머와 함께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중국계 미국인 물리학자이며, 벨 연구소 연구원과 프린스턴 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를 역임 후 현재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 핑딩산시 출신 - 풍이 (사람)
후한의 장군 풍이는 왕망 정권의 관리에서 광무제를 도와 후한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대수장군이라 불리며 신망을 받았다. - 후한의 시중 - 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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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의 문인이자 관료인 왕찬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기억력으로 이름을 떨치며 건안칠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 조위의 정치인 - 정무
정무는 중국 삼국시대 인물로, 정사 삼국지에는 정욱의 아들로 조비를 섬겼다는 기록만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무의 참군으로 촉한의 제1차 북벌 때 조운을 상대로 계책을 내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묘사되지만, 관흥과 장포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남안으로 퇴각한 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 조위의 정치인 - 하후무
하후무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하후돈의 아들이며 조조의 사위였고, 조비의 총애를 받아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을 방어했으나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제갈량의 북벌 당시 탄핵을 받았지만 복귀하여 진동장군에 이르렀다.
두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두습 |
원어 이름 | 杜襲 |
자 | 자서(子緒) |
시호 | 정후(定侯) |
작위 | 평양향후(平陽鄉侯) |
출생지 | 예현, 허난 성 |
사망일 | 미상 |
자녀 | 두휘 |
직업 | 장군 |
관직 | |
태중대부 | 미상 ~ 미상 |
대장군 군사 | 228년 ~ 231년 |
황제 | 조예 |
상서 | 미상 ~ 227년 |
황제 | 조비 |
독군량어사 | 220년 ~ 미상 |
황제 | 조비 |
승상 장사 | 216년 ~ 220년 |
황제 | 헌제 |
승상 | 조조 |
부마도위 | 216년 |
황제 | 헌제 |
승상 | 조조 |
2. 행적
두습은 젊어서 진군, 신비, 조엄과 함께 명성이 있었다.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여 허창으로 천도하자 조조에게 임용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조비와 조예 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다.
사례교위 종요와 순욱의 천거를 받아 조조에게 중용되었다. 조조가 위공이 되는 데 공헌하였고, 왕찬, 위기, 화흡과 함께 시중이 되었다. 조조는 왕찬보다 두습과 화흡을 더 존경했다.[7]
조비가 위왕이 되자 관내후에 봉해졌고, 조비가 황제가 된 후에는 독군량어사, 무평정후, 상서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7] 조예가 즉위한 후에는 평양향후에 봉해졌고, 제갈량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진과 사마의를 보좌하여 대장군군사를 역임했다.[7] 이후 질병으로 조정에 돌아와 태중대부가 되었다.[7]
2. 1. 후한 말의 혼란과 피난
두습은 젊어서 진군, 신비, 조엄과 함께 명성이 있었다.[7] 후한 말기의 전란을 피해 형주로 이주하여, 조엄, 번흠(繁欽)과 함께 재산과 회계를 같이하며 한 집안을 이루며 살았다.[7] 은거하면서도 때를 보아 비상할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유표에게 빈객으로 예우를 받았으나, 유표를 낮게 평가했다. 번흠이 유표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자, 유표가 난세를 평정할 인물이 아니라며 그에게 몸을 맡기려 하면 절교할 것이라고 충고했다.[7] 번흠은 두습의 충고를 따랐고, 두습은 장사로 옮겼다.[7]2. 2. 조조의 휘하
건안 원년(196년),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여 영천군 허현(허창)으로 천도하자, 두습은 고향 영천으로 돌아와 조조에게서 서악장(西鄂長)으로 임명되었다.[7] 당시 서악현은 남쪽 변경에 있어 잦은 침략을 받아 황폐해졌고, 관리들은 백성들을 모아 성곽을 수비하기만 하였으므로, 농사가 되지 않아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현의 창고는 텅텅 비었다.[7] 두습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을 알고, 노약자들은 돌려보내 농사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강정한 장정을 남겨 수비하게 했고, 관리와 백성들은 기뻐했다.[7]형주에서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보내 서악현을 쳤다.[7] 건안 6년(201년)의 일이다.[9] 두습은 관민 중에서 수비를 맡은 50명을 불러모았고, 함께 저항하기로 서약하였다.[7] 친척이 밖에 있어서 스스로 나가서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허락했으나, 관민들이 모두 함께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다.[7] 두습은 스스로 화살과 돌을 쥐고 지휘했으며, 관민들은 두습에게 감격하여 기꺼이 부림에 응했다.[7] 두습은 분전하여 적군의 머리 수백여 급을 베었으나, 두습 군도 30여 명이 죽고 나머지 18명도 모조리 상처입어, 결국 적에게 성을 내어주었다.[7] 두습은 부상당한 관민들을 이끌고 포위를 뚫었는데, 거의 다 죽었으나, 배신한 자는 없었다고 한다.[7]
사례교위 종요의 천거로 의랑참군사가 되었고, 순욱이 또 두습을 천거하여, 조조에게서 승상군제주로 임명되었다.[7] 조조가 위공이 되는 데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노력하였으며,[10] 건안 18년(213년) 11월에 상서와 시중, 6경이 설치되면서[11] 왕찬, 위기, 화흡과 함께 시중이 되었다.[12][7] 비록 왕찬이 기억력이 뛰어나고 견문이 넓어 조조가 유람을 나갈 때마다 곁에서 함께 있는 일이 많았지만, 조조는 두습과 화흡을 더 존경했다.[7]
건안 20년(215년), 조조를 따라 한중의 장로를 쳤고, 돌아가는 조조에게서 부마도위를 배령받았고, 남아서 한중의 군무를 감독했다.[7] 민중을 안정시키고 교도했기 때문에, 8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낙양과 업으로 이주했다.[7] 건안 24년(219년) 정월, 한중을 수비하던 하후연이 유비에게 져 죽임을 당하자, 탕구장군[13] 장합, 정서장군사마[13] 곽회와 함께 군무를 행하면서, 장합으로 도독을 삼아 원수를 잃어 실색한 장병들을 안정시켰다.[7] 조조가 결국 한중을 상실하고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유부장사를 골라 뽑아 장안을 지키게 하려 했는데, 담당자가 천거한 사람이 부적당했으므로 조조가 친히 영을 내려 두습으로 유부장사를 삼고 관중에 주둔시켰다.[7] 당시 관중의[14] 장군 허유(許攸)가 조조를 따르지 않고 불손하게 굴자, 조조가 분노하여 토벌하려 하고 간언을 듣지 않았다.[7] 두습은 조조를 설득하여 허유를 토벌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해 마침내 조조가 허유를 위무하여 귀순하게 하도록 했다.[7]
하후상이 태자 조비와 친근했는데, 두습은 하후상을 특별히 대할 이유가 없다고 조조에게 말했다.[7] 조비는 이를 듣고 처음에는 심히 불쾌히 여겼으나, 나중에 자신이 하후상의 애첩을 죽인 후 하후상이 죽은 애첩을 잊지 못해 추태를 보이자 분노하여 두습이 말한 바를 추억했다.[7][15]
2. 3. 한중 공방전과 그 이후
건안 6년(201년), 형주에서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보내 서악현을 공격했다.[9][7] 두습은 관민 중에서 수비병 50명을 모아 함께 저항하기로 서약했다.[7] 밖에 친척이 있는 자는 나가서 지켜도 좋다고 허락했으나, 모두 함께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7] 두습은 직접 화살과 돌을 쥐고 지휘했으며, 관민들은 감격하여 기꺼이 따랐다.[7] 분전하여 적군의 머리 수백여 급을 베었으나, 아군도 30여 명이 죽고 나머지 18명도 모두 상처를 입어 결국 성을 내주었다.[7] 두습은 부상당한 관민들을 이끌고 포위를 뚫었는데, 거의 다 죽었으나 배신한 자는 없었다.[7]건안 20년(215년), 조조를 따라 한중의 장로를 쳤고, 돌아가는 조조에게서 부마도위를 배령받고 남아 한중의 군무를 감독했다.[7] 백성을 안정시키고 교도했기 때문에, 8만여 명이 낙양과 업으로 이주했다.[7] 건안 24년(219년) 정월, 한중을 수비하던 하후연이 유비에게 전사하자, 탕구장군[13] 장합, 정서장군사마[13] 곽회와 함께 군무를 행하면서 장합을 도독으로 삼아 장병들을 안정시켰다.[7] 조조가 한중을 상실하고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유부장사를 뽑아 장안을 지키게 하려 했는데, 담당자가 천거한 사람이 부적당했으므로 직접 두습을 유부장사로 삼고 관중에 주둔시켰다.[7] 당시 관중의[14] 장군 허유(許攸)가 조조를 따르지 않고 불손하게 굴자, 조조는 토벌하려 했으나, 두습은 허유를 토벌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하여 조조가 허유를 위무하여 귀순하게 했다.[7]
연강 원년(220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관내후에 봉해졌다.[7] 같은 해 조비가 황제가 되자 독군량어사가 되었고 무평정후에 봉해졌으며, 다시 독군량집법이 되었고,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7]
태화 원년(227년), 명제가 즉위하자 평양향후에 봉해졌다.[7] 태화 2년(228년), 촉한의 제갈량이 침입해 오자 대장군 조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러 가면서 두습을 대장군군사로 삼았다.[7] 태화 5년(231년)[15] 조진이 죽자 사마의가 후임이 되고서도 두습은 대장군군사에 임명되었다.[7]
2. 4. 위나라에서의 관직 생활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여 영천군 허현(허창)으로 천도하자, 두습은 고향 영천으로 돌아와 조조에게서 서악[8]장(西鄂長)으로 임명되었다.[7] 당시 서악현은 남쪽 변경에 있어 잦은 침략을 받아 황폐해졌고, 관리들은 백성들을 모아 성곽을 수비하기만 하였으므로, 농사가 되지 않아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현의 창고는 텅텅 비었다.[7] 두습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을 알고, 노약자들은 돌려보내 농사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강정한 장정을 남겨 수비하게 했고, 관리와 백성들은 기뻐했다.[7]형주에서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보내 서악현을 쳤다.[7] 201년(건안 6년)의 일이다.[9] 두습은 관민 중에서 수비를 맡은 50명을 불러모았고, 함께 저항하기로 서약하였다.[7] 친척이 밖에 있어서 스스로 나가서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허락했으나, 관민들이 모두 함께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다.[7] 두습은 스스로 화살과 돌을 쥐고 지휘했으며, 관민들은 두습에게 감격하여 기꺼이 부림에 응했다.[7] 두습은 분전하여 적군의 머리 수백여 급을 베었으나, 두습 군도 30여 명이 죽고 나머지 18명도 모조리 상처입어, 결국 적에게 성을 내어주었다.[7] 두습은 부상당한 관민들을 이끌고 포위를 뚫었는데, 거의 다 죽었으나, 배신한 자는 없었다고 한다.[7]
사례교위 종요의 추천으로 의랑참군사가 되었고, 순욱이 또 두습을 천거하여, 조조에게서 승상군제주로 임명되었다.[7] 조조가 위공이 되는 데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노력하였으며,[10] 213년(건안 18년) 11월에 상서와 시중, 6경이 설치되면서[11] 왕찬, 위기, 화흡과 함께 시중이 되었다.[12][7] 비록 왕찬이 기억력이 뛰어나고 견문이 넓어 조조가 유람을 나갈 때마다 곁에서 함께 있는 일이 많았지만, 조조는 두습과 화흡을 더 존경했다.[7]
215년(건안 20년), 조조를 따라 한중의 장로를 쳤고, 돌아가는 조조에게서 부마도위를 배령받았고, 남아서 한중의 군무를 감독했다.[7] 민중을 안정시키고 교도했기 때문에, 8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낙양과 업으로 이주했다.[7] 219년(건안 24년) 정월, 한중을 수비하던 하후연이 유비에게 져 죽임을 당하자, 탕구장군[13] 장합, 정서장군사마[13] 곽회와 함께 군무를 행하면서, 장합으로 도독을 삼아 원수를 잃어 실색한 장병들을 안정시켰다.[7] 조조가 결국 한중을 상실하고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유부장사를 골라 뽑아 장안을 지키게 하려 했는데, 담당자가 천거한 사람이 부적당했으므로 조조가 친히 영을 내려 두습으로 유부장사를 삼고 관중에 주둔시켰다.[7] 당시 관중의[14] 장군 허유(許攸)가 조조를 따르지 않고 불손하게 굴자, 조조가 분노하여 토벌하려 하고 간언을 듣지 않았다.[7] 두습은 조조를 설득하여 허유를 토벌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해 마침내 조조가 허유를 위무하여 귀순하게 하도록 했다.[7]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위왕이 되자 관내후에 봉해졌다.[7] 이해 조비가 황제가 되자, 독군량어사가 되었고 무평정후에 봉해졌으며, 다시 독군량집법이 되었고,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7]
227년(태화 원년), 명제가 즉위하자 평양향후에 봉해졌다.[7] 228년(태화 2년), 촉한의 제갈량이 침입해 오고 대장군 조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러 가면서, 두습을 대장군군사로 삼았다.[7] 231년(태화 5년)[15] 조진이 죽으면서 사마의가 후임이 되고서도 두습은 대장군군사에 임명되었다.[7] 나중에 질병을 이유로 조정으로 돌아와 태중대부가 되었다.[7]
3. 평가
진수는 전의 본문에서 "온화하지만 줏대가 있고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평했으며, 권말의 평에서는 "온화하고 순수하며 사람을 통솔하는 도리를 아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4. 가족 관계
5. 《삼국지연의》에서의 두습
하후연의 부장으로 등장한다.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을 따라 서쪽 강을 지켰으나, 촉나라 장수 황충의 공격을 받아 도주한다. 하후연이 황충에게 토벌당하자, 그대로 도주한다.
참조
[1]
서적
九州春秋
201年
[2]
서적
九州春秋
[3]
서적
魏氏春秋
[4]
서적
武帝紀
219年01月-02月
[5]
서적
武帝紀
219年03月
[6]
문서
袁紹配下の許攸とは別人
[7]
삼국지
화상양두조배전
[8]
문서
남양군의 속현
[9]
서적
구주춘추
[10]
위서
위서
[11]
삼국지
무제기
[12]
위씨춘추
위씨춘추
[13]
삼국지
만전견곽전
[14]
자치통감
자치통감
[15]
삼국지
제하후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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