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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불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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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불 동맹은 1890년 비스마르크 사임 이후 독일의 외교 변화와 프랑스의 고립 탈피, 러시아의 경제적 필요성이 맞물려 맺어진 동맹이다. 1891년 협약과 1892년 군사 협정을 통해 공식화되었으며, 삼국 동맹에 대항하는 성격을 지녔다. 러시아는 프랑스 자본을 유치하여 시베리아 철도 건설 등을 추진했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식민 정책을 강화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협력했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부가 수립되면서 무효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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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불동맹
개요
크림 전쟁 중인 프랑스군의 러시아 상륙
크림 전쟁 중인 프랑스군의 러시아 상륙
명칭러불 동맹
존속 기간1892년 ~ 1917년
배경
주요 원인삼국 동맹의 형성
프랑스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 후 국제적 고립 심화
러시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베를린 회담에서의 외교적 고립
직접적 계기독일 제국재보장 조약 갱신 거부 (1890년)
주요 내용
군사 협력독일 또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격 시 상호 군사 지원
동원령 발령 시 즉각적인 상호 군사 지원
정치적 협력유럽의 평화 유지 및 공동 이익 추구
역사
협상 시작1880년대
군사 협정 체결1892년
정식 동맹 체결1894년
동맹 강화영국과의 관계 개선 (영국-프랑스 협상, 영국-러시아 협상)
동맹 종료1917년 러시아 혁명
영향
유럽 세력 균형 변화삼국 협상의 기반 형성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요인동맹 관계가 전쟁 확대로 이어짐
평가
긍정적유럽의 평화 유지에 기여, 독일의 팽창 저지
부정적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

2. 배경

1890년 독일 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사임에 따라, 기존의 독일 외교에 변화가 초래되었다. 지금까지 독일 외교는 프랑스를 고립화시키는 관점에서 대 러시아 외교를 중시했지만(비스마르크 체제 참조), 그 나이부터 친정을 실시한 황제 빌헬름 2세가 이 일에 충실하지 않았다. 따라서 1887년부터 계속하고 있었던 ‘독·러 재보장 조약’이 갱신되지 않았고, 러시아는 새로운 동맹 상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또한 국내의 현대화 추진을 위해서도 외자 도입이 필요했으며, 프랑스와의 동맹 수립은 경제적 관점에서도 장점이 있었다. 한편, 프랑스 측도 비스마르크 외교 시대의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했기 때문에 양국의 협상이 진행되어 갔다.[1]

러불 동맹의 역사는 1870년대 초,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야기된 모순에서 시작된다. 러시아 정부는 1875년 전쟁 공포 당시 러시아와 영국의 항의로 독일이 프랑스 공격 위협을 중단하도록 강요했을 때 프랑스를 지지했다.[1] 1876년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의 동방 정책에 대한 독일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대가로 알자스-로렌 영토를 독일의 일부로 보존하겠다는 보장을 러시아로부터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877년 새로운 프랑스-독일 전쟁 공포 시기 동안 러시아는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영국 및 독일과의 화해를 목표로 한 프랑스 외교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프랑스의 러시아 소외 및 식민지 점령 정책은 1885년 안남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후 프랑스-독일 모순이 심화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887년 초, 프랑스-독일 관계에 새로운 복잡한 상황이 발생했다. 프랑스는 러시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1887년 독일과의 소위 재보험 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는 독일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해 규정한 것과 동일한 조건을 프랑스에 유지할 것을 고집했다.[2]

1880년년대 말, 러시아-독일 경제적 불일치는 더욱 심화되었다. 러시아-프랑스 정치적 화해는 프랑스 자본의 러시아 유입에 기여했다. 1880년년대 말과 1890년년대 초,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여러 차례 대규모 차관을 받았다. 러시아-독일 관계의 악화, 1891년 삼국 동맹의 부활, 그리고 영국이 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는 소문은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정치적 합의 체결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독일이 주도하는 군사 블록(삼국 동맹)의 형성에 대한 대응이었다. 유럽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블록이 형성되었다.[3]

1901년 프랑스 군사 훈련 기념 엽서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는 식민 정책을 강화했다. 1898년 영국과의 파쇼다 사건 이후,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또한 1890년년대 차르 정부의 만주로의 확장을 용이하게 했다. 러불 동맹의 준비 기간과 초기 몇 년 동안 러시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바뀌었다. 프랑스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차관을 받으면서 러시아 차르 체제는 점차 프랑스 제국주의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양국의 참모 본부 간의 협력이 더욱 긴밀한 형태를 취했다. 1912년 러불 해군 협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 조약에 의해 하나로 묶여 전쟁에 참전했다. 이는 전쟁 초부터 독일이 두 전선에서 싸우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마른 전투에서의 독일 패배, 슐리펜 계획의 붕괴,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일의 패배로 이어졌다. 러불 동맹은 1917년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4]

2. 1. 비스마르크 체제의 변화

1890년 독일 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사임하면서 독일 외교에 변화가 생겼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러시아와의 외교를 중시했지만(비스마르크 체제), 빌헬름 2세는 이 정책을 유지하지 않았다. 그 결과 1887년부터 유지되던 ‘독러 재보장 조약’이 갱신되지 않았고, 러시아는 새로운 동맹 상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국내 현대화를 위한 외자 도입이 필요했고, 프랑스와의 동맹은 경제적 이점도 있었다. 프랑스 역시 비스마르크 외교 시대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양국 간 협상이 진행되었다.[1]

러불 동맹의 기원은 1870년대 초,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5년, 러시아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위협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하며 프랑스를 지지했다.[1] 1876년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 영토를 독일의 일부로 보존하는 대가로 러시아의 동방 정책에 대한 독일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877년 프랑스-독일 간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러시아는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프랑스는 영국 및 독일과의 화해를 추구하며 러시아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프랑스의 러시아 소외 및 식민지 점령 정책은 1885년 안남에서 프랑스가 승리하여 프랑스-독일 간 갈등이 심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87년, 프랑스는 러시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독일과의 재보험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우호적인 조건을 유지했다.[2]

1880년년대 말, 러시아-독일 간 경제적 불일치가 심화되었다. 러시아-프랑스 간 정치적 화해는 프랑스 자본의 러시아 유입에 기여했다. 러시아는 1880년년대 말과 1890년년대 초 프랑스로부터 여러 차례 대규모 차관을 받았다. 러시아-독일 관계 악화, 1891년 삼국 동맹의 부활, 그리고 영국의 동맹 가입 소문은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정치적 합의 체결 기반을 마련했다.[3] 이는 독일 주도의 군사 블록 형성에 대한 대응이었고, 유럽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블록이 형성되었다.[3]

프랑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식민 정책을 강화했고, 1898년 파쇼다 사건 이후 러시아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1890년년대 차르 정부의 만주 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러불 동맹 초기에는 러시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는 프랑스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양국 참모 본부 간 협력이 긴밀해졌고, 1912년 러불 해군 협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 조약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고, 이는 독일이 두 전선에서 싸우게 만들어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른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 슐리펜 계획의 붕괴, 그리고 최종적인 독일의 패배로 이어졌다. 러불 동맹은 1917년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4]

2. 2. 프랑스와 러시아의 경제적 필요성

1890년 독일 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사임하면서 독일 외교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1] 기존 독일 외교는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러시아와의 외교를 중시했지만(비스마르크 체제 참조), 빌헬름 2세는 이러한 정책을 유지하지 않았다. 1887년부터 유지되던 '독·러 재보장 조약'은 갱신되지 않았고, 러시아는 새로운 동맹 상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2]

러시아는 국내 현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외자 도입이 필요했고, 프랑스와의 동맹은 경제적 관점에서도 이점이 있었다. 프랑스 역시 비스마르크 외교 시대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양국 간 협상이 진전되었다.[1]

1880년대 말, 러시아와 독일 간 경제적 불일치는 더욱 심화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정치적 화해는 프랑스 자본이 러시아로 유입되는 데 기여했다. 1880년대 말과 1890년대 초,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여러 차례 대규모 차관을 받았다.[3] 러시아는 크림 전쟁이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등에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1848년 혁명으로 빈 체제가 흔들리고, 프로이센이 부상하면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프로이센은 메리노 울의 국제 경쟁력을 바탕으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벨기에를 통해 산업 합리화를 추진했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독일에 빼앗기고, 오스만 채무 관리국을 통해 지중해 개발 사업에서 배상금에 대한 대가를 얻고자 했다. 프랑스는 로스차일드 가문 등을 통해 오스만 제국 분할에 힘썼고, 독일은 러시아 국채 인수를 거절하면서까지 자금을 할당하여 아나톨리아 철도 사업 등에 진출했다.

1888년 11월, 프랑스 은행단은 러시아에 5억 프랑 규모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결정했고, 이 중 3억 2500만 프랑을 인수했다. 나머지는 런던, 암스테르담,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은행들이 인수했다. 러시아는 이듬해에도 파리 증권 거래소에서 7억 프랑과 12억 프랑의 외채를 모집하여 인수자를 찾았다.

1891년, 금·은 비율 문제가 심화되면서 대공황의 여파가 독일에까지 미쳤다.

3. 동맹의 성립과 발전

기념 깃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삼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1891년 7월 프랑스 함대의 크론시타트 방문 동안 외무 장관 간의 서한 교환 형식으로 1891년 협약이 체결되었다.[1] 프랑스는 군사 동맹에 더 관심이 많았고, 1891년 협약을 군사적 의무로 보완하려 했다.[1] 협상 결과, 러시아와 프랑스 참모 본부 대표는 1892년 8월 17일 (러시아력 8월 5일) 독일의 공격 시 상호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군사 협약을 체결했다.[1] 1893년 12월 27일 (12월 15일)과 1894년 1월 4일 (1893년 12월 23일) 사이에 이루어진 서한 교환을 통해 양국 정부는 군사 협약의 비준을 발표하여 러시아-프랑스 군사-정치 동맹이 공식화되었다.[1]

당시 유럽 왕실, 황실의 상례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인척 관계였고, 청일 전쟁 이후 1895년 삼국 간섭 때처럼 각 나라마다의 국익에 따라 서로 손을 잡을 여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오히려 동맹 성립 초기에 러시아-프랑스 양국의 현안은 영국이었다. 러시아에게는 중앙아시아, 이란 등에서의 남하 정책을, 프랑스에 있어서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의 걸림돌로 3C 정책을 취했던 영국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세계 정책(신항로 정책)을 내걸고 〈함대법〉 제정 이후 영국과 전함 건조 경쟁에 돌입하고, 중동 진출(‘3B 정책’)을 도모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 결과, 러불 동맹은 대(對)독일 동맹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했고, 이후 영불 협상, 영국-러시아 협상과 결합하여 대 독일 포위망의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동맹을 전제로 프랑스에서 투자를 받게 되었고, 1891년부터 건설에 착수한 시베리아 철도도 프랑스 자본에 의한 바가 크다. 이 시기의 투자의 대부분은 러시아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회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3. 1. 1891년 협약과 군사 협정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삼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1891년 7월 프랑스 함대의 크론시타트 방문 동안 외무 장관 간의 서한 교환 형식으로 1891년 협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군사 동맹에 더 관심이 많았고, 1891년 협약을 군사적 의무로 보완하려 했다. 협상 결과, 러시아와 프랑스 참모 본부 대표는 1892년 8월 17일 (러시아력 8월 5일) 독일의 공격 시 상호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군사 협약을 체결했다. 1893년 12월 27일 (12월 15일)과 1894년 1월 4일 (1893년 12월 23일) 사이에 이루어진 서한 교환을 통해 양국 정부는 군사 협약의 비준을 발표하여 러시아-프랑스 군사-정치 동맹이 공식화되었다.

당시 유럽 왕실, 황실의 상례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인척 관계였고, 청일 전쟁 이후 1895년 삼국 간섭 때처럼 각 나라마다의 국익에 따라 서로 손을 잡을 여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오히려 동맹 성립 초기에 러시아-프랑스 양국의 현안은 영국이었다. 러시아에게는 중앙아시아, 이란 등에서의 남하 정책을, 프랑스에 있어서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의 걸림돌로 3C 정책을 취했던 영국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세계 정책(신항로 정책)을 내걸고 〈함대법〉 제정 이후 영국과 전함 건조 경쟁에 돌입하고, 중동 진출(‘3B 정책’)을 도모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 결과, 러불 동맹은 대(對)독일 동맹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했고, 이후 영불 협상, 영국-러시아 협상과 결합하여 대 독일 포위망의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동맹을 전제로 프랑스에서 투자를 받게 되었고, 1891년부터 건설에 착수한 시베리아 철도도 프랑스 자본에 의한 바가 크다. 이 시기의 투자의 대부분은 러시아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회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3. 2. 삼국 동맹에 대한 대응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삼국 동맹에 대항하여, 러시아 제국프랑스러불동맹을 맺었다.[3] 이 동맹은 중부 유럽과 남유럽 국가들을 동서에서 협공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러불 동맹과 삼국 동맹이 반드시 전쟁에서 대립하는 관계로 설정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인척 관계였으며, 각국의 국익에 따라 협력할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세계 정책(신항로 정책)을 추진하며 영국과 전함 건조 경쟁을 벌이고, 3B 정책을 통해 중동 진출을 도모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러불 동맹은 대(對)독일 동맹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했고, 이후 영불 협상, 영러 협상과 결합하여 독일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투자를 받아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투자의 대부분은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회수 불가능하게 되었다.

1870년대 초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야기된 모순은 러불 동맹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1] 1875년, 러시아는 프랑스를 지지하며 독일의 공격 위협을 중단시켰다.[1] 1880년대 말, 러시아-독일 경제적 불일치가 심화되면서 러시아-프랑스 정치적 화해가 이루어졌고, 프랑스 자본이 러시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2] 1891년 삼국 동맹이 부활하고 영국이 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는 소문은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정치적 합의 체결의 기반을 마련했다.[3] 유럽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블록이 형성되었다.[3]

프랑스는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식민 정책을 강화했고, 파쇼다 사건 이후 러시아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4] 프랑스와의 동맹은 차르 정부의 만주 진출을 용이하게 했다.[4] 초기에는 러시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양국 참모 본부 간의 협력이 긴밀해졌고, 1912년 러불 해군 협약이 체결되었다.[4]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 조약에 의해 전쟁에 참전하여 독일이 두 전선에서 싸우도록 강요했고, 이는 마른 전투에서의 독일 패배와 슐리펜 계획의 붕괴로 이어졌다.[4] 러불 동맹은 1917년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4]

3. 3. 영국과의 관계 변화



러시아 제국프랑스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 중부 및 남유럽 국가를 동서에서 협공하는 체제를 갖추고, 삼국 동맹을 가상 적으로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동맹 초기에는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인척 관계였고, 1895년 삼국 간섭 때처럼 각국의 국익에 따라 협력할 여지도 있었다.

당시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의 주요 관심사는 영국이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이란 등에서의 남하 정책에 대한 영국의 방해를 받았고, 프랑스는 3C 정책을 추진하던 영국이 자국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세계 정책(신항로 정책)을 내세우며 함대법 제정 이후 영국과 전함 건조 경쟁을 벌이고, 중동 진출(3B 정책)을 시도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 결과, 러불 동맹은 대(對)독일 동맹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했고, 이후 영불 협상, 영국-러시아 협상과 결합하여 대 독일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4. 경제 협력과 영향

러시아는 러불 동맹을 전제로 프랑스에서 투자를 받게 되었다. 1891년부터 건설에 착수한 시베리아 철도도 이때 프랑스 자본에 의한 바가 크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투자의 대부분은 러시아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회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벨기에 투자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독일에 지불한 배상금 50억 프랑에 대한 대가를 어딘가에서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오스만 채무 관리국을 통한 지중해 개발 사업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재정을 쥐고 있던 카몬도 가문, 차관을 이용하여 수에즈 이권을 손에 넣은 디즈레일리 수상, 어느 쪽에도 안면이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채널로 하여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분할에 힘썼다. 웅대한 비즈니스였기 때문에 독일은 러시아 국채 인수를 거절하면서까지 자금을 할당하여, 선객인 영불에게 혐오를 받으면서도 바이에른 등 오스트리아에 가까운 독일 남부 제후국의 이익이 되는 범위에서 아나톨리아의 철도 사업 등에 진출해갔다.

1888년 11월 12일의 기밀 제73호 전보에서, 모집액 5억 프랑 중 프랑스 은행단이 3억 2500만 프랑을 인수하고 나머지는 런던·암스테르담·베를린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몇몇 은행 신디케이트가 인수한다고 발표되었다。러시아는 이듬해에도 7억 프랑과 12억 프랑의 외채를 파리 증권 거래소에서 모집하여 인수자를 찾을 수 있었다. 1890년, 독일 제국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사임과 함께, 기존의 독일 외교에 변화가 찾아왔다. 지금까지의 독일 외교는 프랑스의 고립화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대(對) 러시아 외교를 중시했지만(비스마르크 체제 참조), 이 해부터 친정을 하게 된 황제 빌헬름 2세는 이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1887년부터 지속되던 독·러 재보장 조약이 갱신되지 않게 되었다. 1891년, 금·은 비율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기 시작했고, 대공황의 클라이맥스가 독일에 솟아있는 (배상금의 일부를 보관)을 빛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오스만 채무 관리국이 개설된 해에 즉위했으며, 그의 통치와 그 전후로 벨기에 자본이 움직였다. 선대인 알렉산드르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폴란드인에게 암살당했다.

그 당시 이미 프라하에서 코카릴 계열의 바르샤바 제강(Towarzystwo Warszawskiej Fabryki Stali)이 정식 인가를 받았다. 1888년이 되자, 코카릴 본사가 크리비 리](크리비리)] 철광산에 진출하여 바르샤바 제강과 합작으로 남러시아 제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코카릴은 1894년에 알마즈나야 탄광을, 1895년에는 니콜라예프 조선소를 설립했다. 이러한 생산력은 모회사에 필적하며, 높은 배당을 가져왔다. 부러워진

4. 1. 벨기에 자본의 역할

러시아는 러불 동맹을 기반으로 프랑스로부터 투자를 받았다.[6] 1891년 건설을 시작한 시베리아 철도도 프랑스 자본에 의한 영향이 컸다.[6] 이 시기 투자의 대부분은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회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6]

알렉산드르 3세 통치 기간과 그 전후로 벨기에 자본이 활발하게 움직였다.[6] 1888년, 코카릴 본사는 크리비 리](크리비리)] 철광산에 진출하여 바르샤바 제강과 합작으로 남러시아 제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6] 코카릴은 1894년에 알마즈나야 탄광을, 1895년에는 니콜라예프 조선소를 설립했다.[6]

4. 2. 프랑스 자본의 우위



러불 동맹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을 동서에서 협공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1895년 삼국 간섭에서처럼 각국의 국익에 따라 협력할 여지도 있었지만,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세계 정책(신항로 정책)을 추진하며 3B 정책을 통해 중동 진출을 시도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러시아는 이 동맹을 기반으로 프랑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1891년 건설을 시작한 시베리아 철도도 프랑스 자본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 투자의 대부분은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회수할 수 없게 되었다.

5. 제1차 세계 대전과 동맹의 종말

삼국 동맹의 부활과 영국이 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는 소문은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정치적 합의 체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3] 이는 독일이 주도하는 군사 블록 형성에 대한 대응이었다. 유럽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블록이 형성되었다.[3]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는 식민 정책을 강화했다. 1898년 영국과의 파쇼다 사건 이후, 러시아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또한 1890년대 차르 정부의 만주로의 확장을 용이하게 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양국의 참모 본부 간의 협력이 더욱 긴밀한 형태를 취했다. 1912년 러불 해군 협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 조약에 의해 하나로 묶여 전쟁에 참전했다. 이는 전쟁 초부터 독일이 두 전선에서 싸우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4] 이는 마른 전투에서의 독일 패배, 슐리펜 계획의 붕괴,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일의 패배로 이어졌다.[4]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인한 갈등은 러불 동맹의 초기 배경이 되었다. 1875년, 러시아는 독일의 프랑스 공격 위협을 저지하는 데 영국과 함께 프랑스를 지지했다.[1] 그러나 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프랑스는 영국 및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며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외교 정책은 1885년 안남에서의 프랑스 승리 이후 프랑스-독일 간 갈등이 심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2]

1880년대 말, 러시아와 독일 간의 경제적 불일치가 심화되면서,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정치적 화해가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여러 차례 대규모 차관을 받았으며, 이는 러시아-독일 관계 악화와 1882년 삼국 동맹의 부활, 그리고 영국이 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는 소문과 맞물려 양국 간 정치적 합의 체결의 기반을 마련했다.[3]

프랑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식민 정책을 강화했으며, 1898년 파쇼다 사건 이후 러시아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1890년대 차르 정부의 만주로의 확장을 용이하게 했다. 초기에는 러시아가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로부터 지속적인 차관을 받으면서 러시아는 점차 프랑스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양국의 참모 본부 간 협력은 더욱 긴밀해졌고, 1912년에는 러불 해군 협약이 체결되었다.

러불 동맹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4]

5. 1.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협력

삼국 동맹의 부활과 영국이 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는 소문은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정치적 합의 체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3] 이는 독일이 주도하는 군사 블록 형성에 대한 대응이었다. 유럽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블록이 형성되었다.[3]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는 식민 정책을 강화했다. 1898년 영국과의 파쇼다 사건 이후, 러시아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또한 1890년대 차르 정부의 만주로의 확장을 용이하게 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양국의 참모 본부 간의 협력이 더욱 긴밀한 형태를 취했다. 1912년 러불 해군 협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 조약에 의해 하나로 묶여 전쟁에 참전했다. 이는 전쟁 초부터 독일이 두 전선에서 싸우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4] 이는 마른 전투에서의 독일 패배, 슐리펜 계획의 붕괴,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일의 패배로 이어졌다.[4]

5. 2. 러시아 혁명과 동맹의 해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인한 갈등은 러불 동맹의 초기 배경이 되었다. 1875년, 러시아는 독일의 프랑스 공격 위협을 저지하는 데 영국과 함께 프랑스를 지지했다.[1] 그러나 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프랑스는 영국 및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며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외교 정책은 1885년 안남에서의 프랑스 승리 이후 프랑스-독일 간 갈등이 심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2]

1880년대 말, 러시아와 독일 간의 경제적 불일치가 심화되면서,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정치적 화해가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여러 차례 대규모 차관을 받았으며, 이는 러시아-독일 관계 악화와 1882년 삼국 동맹의 부활, 그리고 영국이 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는 소문과 맞물려 양국 간 정치적 합의 체결의 기반을 마련했다.[3] 이는 독일 주도의 군사 블록 형성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유럽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블록이 형성되었다.[3]

프랑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식민 정책을 강화했으며, 1898년 파쇼다 사건 이후 러시아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1890년대 차르 정부의 만주로의 확장을 용이하게 했다. 초기에는 러시아가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로부터 지속적인 차관을 받으면서 러시아는 점차 프랑스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양국의 참모 본부 간 협력은 더욱 긴밀해졌고, 1912년에는 러불 해군 협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 조약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는 독일이 두 전선에서 싸우게 만들어 마른 전투에서의 독일 패배와 슐리펜 계획의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다.[4] 러불 동맹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4]

6. 한국에 미친 영향

6. 1. 대한제국 시기

6. 2. 일제강점기

6. 3.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7. 결론

참조

[1] 논문 From 'War-in-Sight' to Nearly War: Anglo–French Relations in the Age of High Imperialism, 1875–1898 2006
[2] 서적 Great power diplomacy, 1814-1914 1992
[3] 서적 Great power diplomacy, 1814-1914 1992
[4] 서적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1848-1918 1954
[5] 서적 The Beginnings of Russian Industrialization 1800–186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6] 간행물 ベルギーの経済発展とヨーロッパ経済
[7] 서적 Pioneers for Profit, Foreigin Entrepreneurship and Russian Industrialization 1885–1913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8] 간행물 金融資本の成立と展開 ロシア 1979
[9] 서적 Der Imperialismus Frankfurt am Main 1917
[10] 서적 Emprunts russes et investissements français en Russie, 1887-1914 CHEFF 1999
[11] 웹사이트 2자 동맹 http://www.britannic[...]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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