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츠부르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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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렌츠부르크성은 스위스 아르가우주에 위치한 역사적인 성으로,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11세기부터 렌츠부르크 백작 가문의 소유였으며, 이후 키부르크 백작, 합스부르크 가문, 베른의 지배를 거쳐 아르가우 주 정부 소유가 되었다. 현재는 아르가우 박물관이 입주해 있으며, 북쪽 구역, 란트포크트 거주지, 동쪽 보루, 팔라스, 탑, 기사관, 슈타프퍼 하우스 등 다양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아르가우 박물관은 생활사, 무기고, 종교 예술, 연회 문화 등을 전시하며, 렌츠부르크성을 포함해 할빌 성, 합스부르크 성, 쾨니히스펠덴 수도원 등 여러 시설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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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츠부르크 - 렌츠부르크 (스위스)
렌츠부르크는 스위스 아르가우주에 위치한 도시로, 렌츠부르크 성을 포함한 주요 문화유산과 A1 고속도로 및 렌츠부르크역을 통해 교통의 요충지이며, 서비스 산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이다. - 아르가우주의 박물관 - 쾨닉스펠덴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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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츠부르크성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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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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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산성 |
위치 | 렌츠부르크 |
좌표 | 47.38738°N 8.18548°E |
높이 | 해발 508m |
역사 | |
축성 | 1036년 이전 |
상태 | |
상태 | 보존 |
2. 역사
렌츠부르크성이 위치한 언덕은 이미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1959년에는 성 주차장 부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로마 제국 시대와 알레만니 시대의 작은 유물들도 발견되었다.
2. 1. 전설
전설에 따르면, 과거 성이 위치한 언덕의 동굴에는 용이 살았다고 한다. 이 용은 볼프람과 군트람이라는 두 명의 기사에 의해 퇴치되었다. 용을 물리친 것에 감사한 사람들은 이 두 기사를 렌츠부르크 백작으로 삼고, 언덕 위에 성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전해진다.2. 2. 귀족 시대 (11세기 ~ 1415년)

1036년 문서에는 아르가우 백작 울리히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황제의 포크트였으며, 취리히의 수도원과 베로뮌스터 수도원, 셰니스의 감독관이었다. 성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10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리히의 손자 역시 울리히였는데, 그는 서임권 투쟁에서 황제의 입장을 취했으며 두 명의 교황 사절을 반년 동안 감금했다.[2] 당시 렌츠부르크 백작은 스위스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봉건 영주 중 하나였으며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173년에 이 가문은 단절되었다. 렌츠부르크의 마지막 백작인 울리히 4세는 유언을 통해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를 자신의 개인적인 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들은 제2차 십자군에 함께 참여했었다. 황제는 렌츠부르크 성에 와서 직접 영지 분할을 감독했고, 영지의 대부분을 자신의 아들인 팔츠 백작 부르고뉴의 오토에게 주었다.[3] 그러나 1200년 오토가 사망한 후 호엔슈타우펜 왕가는 아르가우에서 철수해야 했다. 약 1230년경, 인근 귀족 가문인 안데흐스-메라니아와 샬롱을 통해 렌츠부르크 성은 결혼을 통해 키부르크 백작의 소유가 되었다. 그들은 성 언덕 서쪽 기슭에 요새화된 시장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렌츠부르크 마을이다.
키부르크의 마지막 백작인 하르트만은 1264년 남성 후손 없이 사망했다. 합스부르크 백작이자 후일 로마 왕인 루돌프 1세는 상속자인 키부르크의 안나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고, 그녀는 후에 합스부르크-라우펜부르크의 에버하르트 1세와 결혼했다. 1273년 루돌프는 가난해진 친척들로부터 영지를 차지했고, 1275년에는 그곳에서 법정을 열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의 권력이 점점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면서 성은 지역 행정 중심지로 쇠퇴했다. 1306년 8월 20일, 렌츠부르크는 백작 미남 프리드리히로부터 도시 헌장을 받았다. 1339년부터 티롤-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 백작이 성에 거주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딸과 결혼할 예정이었고, 그 목적을 위해 기사 홀을 지었지만, 1344년 신부를 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여 건물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1369년 이후 슐트하이스-리비 가문이 성의 세입자가 되었다. 1375년에는 구글러에 의해 성이 포위되었다.
2. 3. 베른 통치 시대 (1415년 ~ 1798년)
지기스문트 황제와 프리드리히 4세 공작 사이의 갈등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격화되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4세가 당시 세 명의 교황 중 한 명이었던 요한 23세의 콘스탄츠 탈출을 도왔기 때문이다. 지기스문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주변 세력에게 제국의 이름으로 프리드리히 4세의 영토를 점령하라고 명령했고, 베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르가우 서부 지역을 정복했다.렌츠부르크 마을은 1415년 4월 20일 진격해오는 베른 군대에 즉시 항복했지만, 성 자체는 잠시 동안 이 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황제의 대리인이었던 바인스베르크의 콘라드는 제국을 위해 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포위 공격 준비 과정에서 계획의 무익함을 깨닫고 1418년에 성을 다시 슐트하이스 가문에게 돌려주었다. 오랜 협상 끝에 베른은 1433년에 렌츠부르크 백작령의 소작인 자격으로 성에 대한 권리를 얻었고, 마침내 1442년에는 성의 완전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1444년부터 베른에서 파견된 첫 번째 란트포크트(Landvogt, 지방관)가 성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렌츠부르크 지역을 다스렸다. 란트포크트의 주요 임무는 세금 징수, 행정 조치 시행, 사법 및 경찰 업무 처리, 군사 지휘권 행사 등이었으며, 성의 유지 관리 또한 책임졌다. 란트포크트는 4년 임기로 베른 시의회에서 선출되었다. 렌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했던 란트포크트 중 한 명은 1457년부터 1461년까지 재임한 아드리안 1세 폰 부벤베르크로, 그는 훗날 베른의 슐트하이스(시장)이자 모라 전투의 영웅이 되었다.
1509년에서 1510년 사이에는 미완성 상태였던 기사 홀의 일부를 철거하고 재건하는 등 성에서 광범위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1518년에는 성에 심각한 화재가 발생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건물이 파괴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북쪽에 위치한 '아르부르하우스'(Arburghaus)로 추정된다). 1520년에는 란트포크트를 위한 새로운 거처인 '란트포크타이'(Landvogtei)가 마련되었다. 1531년 제2차 카펠 전쟁 동안에는 성이 개신교 세력의 주요 작전 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624년, 당시 란트포크트였던 요제프 플레프는 성의 정밀한 도면과 계획을 작성했는데, 이는 성을 요새로 확장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당시 성은 요새화된 농가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625년에는 북쪽 구역의 새로운 위치에 이중 성벽과 이중 문루가 건설되었고, 동쪽과 남쪽 측면의 흙으로 된 제방 높이가 보강되었다. 1642년부터 1646년까지는 11m 높이의 벽을 세워 동쪽 보루를 구축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나머지 요새화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또한, 동쪽 보루는 빗물이 인접한 벽을 통해 스며들어 란트포크트의 거처가 지속적인 습기로 인해 거주하기 어려워지는 심각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72년부터 1674년까지 북쪽 구역에 새로운 란트포크트 거처가 건설되었다.
18세기 동안 베른 사람들은 성을 대규모 곡물 저장소로 활용했다. 이를 위해 성 내부의 개별 건물들을 연결하고 일부 공간을 파내어 확장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5,000톤 이상의 밀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1798년 3월, 71번째이자 마지막 란트포크트였던 빅토르 폰 바텐빌은 진격해오는 프랑스 군대에 성을 항복했다. 이로써 렌츠부르크성에 대한 베른의 오랜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4. 근현대 (1798년 ~ 현재)
1803년 아르가우주가 설립되었고, 1년 후 성은 주의 소유가 되었다. 주 당국은 성을 어떻게 사용할지 확신하지 못하여 거의 20년 동안 비어 있었다. 정부 청사로 사용하기에는 과거 억압적인 통치의 상징성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침내 호프빌에서 활동하던 교사 크리스티안 리페가 성을 임대하여 1822년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교육 원리에 기반한 교육 기관을 열었다. 이 기관은 학생 50명과 교사 12명을 둘 정도로 번창했으며, 주로 바젤과 알자스 지역의 유력 제조업 가문 자제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성의 'Hintere Haus'(뒤쪽 건물)는 학교 건물로, 'Landvogtei'는 교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53년, 리페가 심각한 병에 걸리면서 이 교육 기관은 문을 닫게 되었다.1860년, 아르가우 주는 6만스위스 프랑에 취리히 출신의 콘라트 페스탈로치-스코치번에게 성을 매각했다.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872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데킨트가 9만스위스 프랑에 성을 사들였다. 그는 1849년 3월 혁명 실패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시기 토지 투기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인물이었다. 1864년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며 다시 스위스로 이주하여 렌츠부르크성에 정착했다. 그의 여섯 자녀 중에는 훗날 가수가 된 에리카 베데킨트와 작가 프랑크 베데킨트, 도널드 베데킨트가 있었으며, 이들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상속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베데킨트 가문은 1893년 미국인 산업가 어거스터스 에드워드 제섭에게 12만스위스 프랑에 성을 매각했다. 필라델피아 출신이었지만 영국에 오랫동안 거주했던 제섭은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고모인 밀드레드 마리온 제섭과 결혼하여 영국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섭은 성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중세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힘썼다. 그는 새로 지어진 구조물과 군사 시설을 철거하는 한편, 값비싼 가구로 내부를 채우고 중앙 난방, 배관, 전기 등 현대적인 설비를 도입했다. 이 개조 작업에는 개인 재산 50만스위스 프랑이 투입되었다.
1911년, 성은 또 다른 미국인 산업 거물이자 중세 미술품 수집가였던 제임스 엘스워스에게 55만스위스 프랑에 팔렸다. 엘스워스는 성 안에 있던 프리드리히 1세 시대의 테이블을 자신의 컬렉션에 추가하고 싶어 했으나, 성 전체를 구매하지 않고는 테이블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을 통째로 사들였다. 그의 아들이자 극지 탐험가인 링컨 엘스워스가 1925년에 성을 상속받았지만, 가끔씩만 이곳에 머물렀다.
1951년 링컨 엘스워스가 사망하자 성의 소유권은 그의 미망인 마리 루이즈 엘스워스-울머에게 넘어갔다. 1956년 그녀는 성과 그 안의 소장품들을 렌츠부르크 시와 아르가우 주가 공동으로 설립한 재단에 50만스위스 프랑에 매각했다. 이로써 성은 대중에게 개방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60년에는 문화 재단인 ''슈타퍼하우스 렌츠부르크''가 설립되어 성의 'Hintere Haus'에 자리를 잡았다.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성은 다시 한번 철저하게 개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남서쪽 구역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조성되었다. 1987년, 아르가우 주는 성에 포괄적인 문화 역사 컬렉션을 이전하여 ''Historisches Museum Aargau''(아르가우 역사 박물관)를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2007년에 ''Museum Aargau''(아르가우 박물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2009년부터는 전시 내용에 대한 단계적인 개조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3. 주요 건물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북동쪽에 위치한다. 옛 성길이나 계단을 따라가면 1625년에 지어진 하부 문루에 도착하고, 이어서 외부 성벽으로 이어진다. 1625년에 건설되고 1761년에서 1762년 사이에 확장된 중앙 문루 안쪽에서 길은 180도 방향을 틀어 도개교로 연결되며, 내부 문루를 통과하면 내부 보루로 들어서게 된다.
내부 보루는 성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말굽 모양으로 배치된 일곱 개의 주요 건물들로 구성된다. 이 건물들은 북쪽 구역, 란트포크트 거주지, 동쪽 보루, 팔라스, 탑, 기사관, 슈타프퍼 하우스이다. 내부 보루의 남서쪽 성벽 안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성벽 안의 지면은 비교적 평탄하지만, 성벽 밖으로 나가면 지형이 급격하게 낮아진다. 단, 동쪽 방향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안장 모양의 지형을 이루며 고퍼스베르크(해발 507m)로 이어진다.
3. 1. 북쪽 구역
북쪽 구역은 서로 연결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부 문루, 북쪽 요새의 잔해, 그리고 새로운 란트포크트 저택으로 구성된다.내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인 상부 문루는 1518년에 부분적으로 더 오래된 기초 위에 세워졌다. 이곳은 1330년 화재로 파괴된 '아르부르하우스'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출입구 위에는 1596년에 제작된 명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 베른 주, 그리고 폰 에를라흐 가문의 문장이 함께 새겨져 있으며, 당시 란트포크트였던 '안토니 폰 에를라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문루의 동쪽에는 북쪽 요새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요새는 1718년부터 1720년 사이에 완전히 재건되면서 인접 건물들과 연결되었다. 과거에는 이곳에 문루와 지하 감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원래 건물의 서쪽 벽과 남쪽 및 동쪽 벽의 기초 일부만이 남아 있다.
새로운 란트포크트 저택은 1672년부터 1674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이 자리에는 원래 1625년에 지어진 초소와 세탁소가 있었다. 당시 북동쪽 모퉁이에 있던 기존의 '란트포크타이'는 동쪽 보루가 건설된 후 벽에 습기가 차 더 이상 거주하기 어려워지자, 이 저택을 새로 짓게 되었다. 오늘날 이 건물은 아르가우 박물관의 행정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3. 2. 란트포크트 거주지
3층 규모의 후기 고딕 건축 양식의 ''란트포그타이''는 계단식 박공으로 1520년에 지어졌다. 이곳은 1518년 화재로 14세기 건물들이 파괴된 후, 베른 출신의 란트포크트들을 위한 새로운 사무실이자 거주지 역할을 했다. 다른 건물들과는 대조적으로 란트포크트의 거주지는 성벽에 직접 붙어 있지 않고 1m~2m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예외는 1626년에 지어진 남동쪽 구석의 작은 둥근 탑으로, 돌출창 역할을 했던 바깥채를 대체했다.1630년에 파사드에 부착된 오각형 계단 탑은 건물 내부의 가파른 계단을 대체했다. 원래 양파 돔은 1760년에 우진각 지붕으로 교체되었다. 현관은 부분적으로 146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65년에 건설된 갤러리는 1층 북쪽 전체를 차지한다.
1646년부터 1894년까지 건물은 동쪽 보루 건설 이후 습기가 스며들어 거주할 수 없게 되었다. 1902년 둑이 철거된 후에야 개보수가 가능했다. 개보수에는 내부 성채를 향하는 새로운 파사드도 포함되었다. 오늘날 이 건물에는 아르가우 박물관의 일부가 있으며, 중세 후기부터 20세기까지 성 소유주들의 삶을 보여주는 상설 전시관이 있다.
3. 3. 동쪽 보루
내성 동쪽 외곽에 위치한 보루는 1642년부터 1646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 구조물은 기존에 있던 성가퀴가 있는 둔벽을 대체하였으며, '팔라스'(Palas|팔라스de)와 란트포크트(Landvogt|란트포크트de)의 거주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또한 고퍼스베르크(Goffersberg|고퍼스베르크de) 방향에서 오는 대포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건설 당시 거대한 흙 제방으로 인해 인접한 거주 건물에 습기가 차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1659년에는 동쪽 보루 위에 시계탑이 세워졌고, 1760년에는 이 시계탑의 뾰족했던 지붕이 양파 모양의 돔으로 교체되었다.
1893년부터 1894년 사이에는 외부 벽의 높이를 6.5m 낮추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란트포크트 거주지 남쪽에 벽으로 막혀 있던 창문을 다시 열 수 있게 되었고, 건물 벽의 습기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낮아진 제방 위에는 현재 장미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후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이루어진 종합적인 개보수 과정에서 흙 제방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 제거되었고, 지하층이 발굴되었다. 현재 이 지하 공간은 아르가우 박물관의 일부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3. 4. 팔라스
팔라스(백작의 거처)는 1100년에 지어진 4층짜리 요새 건물로, 높이는 18m에 달한다. 인접한 탑과 함께 렌츠부르크성 단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다. 건물 입구는 원래 2층에 있었으며, 나무로 만든 야외 계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주요 층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가장 위층은 침실로 사용되었으며, 아래 두 개 층은 창고 용도로 쓰였다.베른 통치 시대에는 건물 내부에 고문실이 있었기 때문에 '킬(Kil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1598년에서 1599년 사이에 1층에 새로운 아치형 입구가 만들어졌다. 이후 1978년부터 1986년까지 건물을 역사 박물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내부 층의 구획과 계단 연결 방식이 재배치되었다.
3. 5. 탑
탑은 남쪽 요새라고도 불리며, 크기는 10m 정사각형이고 벽 두께는 3m에 달한다. 1170년경 팔라스(궁전) 서쪽 끝에 경계벽 역할로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건설을 지시한 울리히 4세가 사망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후 약 200년간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탑은 1344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17세기 초 베른 통치 시기에는 1층이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공간은 오늘날에도 방문할 수 있다. 1728년부터 1729년까지 곡물 저장 공간을 늘리기 위해 탑과 옆의 기사 홀, 그리고 그 사이의 우물을 포함하여 실용적인 건물로 개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탑과 기사 홀의 정렬이 맞지 않아 북쪽 파사드(정면 외벽)가 철거되었다.
1896년, 성의 소유주였던 어거스터스 제섭이 이 곡물 창고 부분을 철거하고 탑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1369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우물은 복원 과정에서 다시 야외 공간에 위치하게 되었다.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개조 공사를 통해 아르가우 역사 박물관의 일부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내부 바닥과 계단 구조가 변경되었다.
3. 6. 기사관
기사관의 건설은 1339년 합스부르크가 통치 하에 시작되었다. 당시 티롤-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 공작은 렌츠부르크성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과 결혼할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 적합한 고딕 건축 양식의 주거 건물을 짓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젊은 공작이 공사가 완료되기 직전인 1344년에 사망하면서, 건물 벽은 플라스터칠이 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1508년에는 서쪽 부분이 심하게 노후되어 철거 후 재건이 이루어졌다. 동쪽 부분은 외벽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 구조를 완전히 재배치했다. 건물에는 새로운 서까래와 여러 기둥을 설치하여 구조 하중을 개선했으며, 이때 벽에 플라스터칠을 했다. 서쪽 끝 외벽을 이전보다 약간 동쪽으로 옮겨 재건축하면서 건물의 전체 길이는 조금 줄어들었다.
1590년경, 이 건물은 곡물을 저장하고 포도주 압착기를 두는 큰 헛간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이 시기에 총안구가 설치되었다. 1758년에는 내부가 다시 한번 크게 변경되었는데, 새로 중간 층을 만들어 더 많은 곡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했다.
1893년, 건물은 가능한 한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곡물 저장을 위해 만들었던 중간 층을 제거하고, 위층 대강당의 아치형 창문도 복원했다. 오늘날 기사관의 홀은 사교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대여되고 있다.
3. 7. 슈타프퍼 하우스
1599년부터 1600년 사이에 성 단지 남서쪽에 2층짜리 건물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힌테레 하우스'(Hintere Haus|힌테레 하우스de) 또는 뒷 건물이라고 불렸다. 이 건물은 마구간과 제분소를 하나의 지붕 아래 통합하여 지어졌다. 1705년부터 1707년까지는 동쪽으로 건물을 확장하여 곡물 저장 능력을 더했다. 1822년부터 1853년까지 교육 개혁가 크리스티안 리페는 이곳에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교육 원리에 기반한 교육 기관을 운영했다. 1893년에는 곡물 창고 부분이 철거되고, 상부 정문으로 이어지는 재건된 성벽으로 대체되었다.오늘날 이 건물은 헬베티 공화국의 혁명가이자 장관이었던 필립 알베르트 슈타프퍼의 이름을 따 '슈타프퍼 하우스'로 불린다. 1960년부터는 렌츠부르크 슈타프퍼 하우스 재단(Stiftung Stapferhaus Lenzburgde)이 운영하는 행사 센터로 사용되고 있으며, 시사 관련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제공하고 있다.
4. 아르가우 박물관
아르가우 박물관(de)은 2007년까지 아르가우 역사 박물관(de)으로 불렸으며, 렌츠부르크성 외에도 할빌 성, 합스부르크 성(2009년부터), 쾨니히스펠덴 수도원을 포함하는 복합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칸톤 소유, 칸톤에 유증된 개인 소장품, 공공 소장품, 구매 및 기증 등 다양한 경로로 수집된 약 40,000점의 역사적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렌츠부르크성에는 아르가우 박물관의 다섯 개 섹션이 마련되어 있다.
- 생활사 박물관: 중세 후기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1900년까지의 근대 초기에 이르는 성 거주자들의 생활 방식을 보여준다.
- 무기고: 중세 시대부터 18세기까지 사용된 다양한 무기를 전시한다. 특히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두 자루의 검이 중요한 유물이다.
- 신앙, 경건, 예술: 아르가우주의 다양한 종교 예술 작품을 전시한다.
- 연회 문화와 아르가우 은세공: 18세기의 연회 모습을 재현하며, 여러 귀중한 식탁 세팅과 세속적인 은 제품들을 함께 전시한다.
- 어린이 박물관: 란트포크트(de) 거주지의 다락방에 위치해 있다.
성은 성 언덕 기슭의 주차장에서 도보로 올라가거나, 탑과 기사 홀 사이에 설치된 리프트를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으며, 장애인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참조
[1]
문서
Swiss inventory of cultural property of national and regional significance
1995
[2]
HDS
Ulrich II of Lenzberg
[3]
HDS
Ulrich IV of Lenzberg
[4]
문서
스위스 국가 및 지역 중요문화재 목록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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