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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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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는 1904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잠수함 전문가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프랑코 정부에서 부총리, 총리 등을 역임하며 프랑코주의를 이어가려 했으나, 1973년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 ETA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스페인 민주화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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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노 라호이는 1981년 국민동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한 스페인의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장관직과 국민당 대표를 거쳐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스페인 총리를 역임하며 경제 위기, 카탈루냐 독립, 부패 스캔들 등에 직면했다.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출생일1904년 3월 4일
출생지칸타브리아주산토냐
사망일1973년 12월 20일
사망지마드리드
배우자마리아 델 카르멘 로사나 아베오 (1946년 결혼)
자녀5명
안장지밍고루비오 묘지, 엘 파르도, 마드리드
정치 경력
소속 정당팔랑헤당 (국민운동)
관직
직책스페인의 총리
임기 시작1973년 6월 9일
임기 종료1973년 12월 20일
총통프란시스코 프랑코
전임프란시스코 프랑코
후임 (권한대행)토르콰토 페르난데스미란다
직책스페인 부총리
임기 시작1967년 9월 22일
임기 종료1973년 6월 9일
총통프란시스코 프랑코
전임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
후임토르콰토 페르난데스미란다
직책총리부 차관
임기 시작1941년 5월 5일
임기 종료1973년 6월 9일
임명자프란시스코 프랑코
전임발렌틴 갈라르사 모란테
후임호세 마리아 가마소
직책코르테스 에스파뇰 의원
임기 시작1943년 3월 16일
임기 종료1946년 3월 24일
임명자프란시스코 프랑코
군사 경력
소속스페인 해군
복무 기간1918년 – 1973년
최종 계급대장
참전리프 전쟁
스페인 내전
국민파
서명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서명
사망 원인
사인폭탄 테러에 의한 암살

2. 생애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는 1904년 3월 4일 칸타브리아 현 산토냐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18] 군인의 길을 따라 스페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해군 장교가 되었고, 제3차 리프 전쟁에 참전했으며 잠수함 전문가로 경력을 쌓았다.[18] 1929년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4][18]

스페인 내전 발발 당시 해군대학 교관이었던 그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인해 공화파 지역을 탈출하여 1937년 국가파에 합류했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측근이 되었다.[18] 내전 중에는 국가파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코 정권 수립 후 1939년 해군 작전 참모로 임명되었다.[5] 이후 군 내에서 주요 직책을 거치며 1966년 제독까지 진급했다.[18]

군 경력과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프랑코의 신임을 얻어 1941년 정부 대통령 차관으로 임명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프랑코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정권 내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1951년부터 총리부 관방장관, 1962년부터 부총리를 역임하며 프랑코 정권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19] 특히 노쇠한 프랑코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정부 운영을 책임졌으며,[19] 프랑코 사후 체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6]

1973년 6월, 프랑코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20][21] 그러나 총리 취임 6개월 만인 1973년 12월 20일, 마드리드에서 ETA에 의해 차량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7] 그의 암살은 프랑코 정권의 종말과 스페인의 민주화 이행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1. 군인 경력

카레로 블랑코가 간도 공항에 있는 모습 (1947)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는 1904년 3월 4일 칸타브리아 현 산토냐의 해안가 마을에서 태어났다.[18] 그의 아버지 카밀로 카레로 구티에레스는 육군 중령이었다. 가족의 군사 전통을 따라 1918년 14세의 나이에 카디스주 산 페르난도에 있는 스페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세에 이미 중위 계급을 달았고, 전함 ''알폰소 XIII''에 탑승하여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스페인-모로코 전쟁 중 하나인 제3차 리프 전쟁에 참전했다. 1926년에는 잠수함 작전을 전문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잠수함 ''B-2''에서 부사령관으로, ''B-5''에서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1929년 마리아 델 카르멘 피쇼트 이 비야(1909–1984)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4][18]

1936년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에밀리오 몰라 장군의 쿠데타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 카레로 블랑코는 마드리드 해군대학에서 잠수함 전술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군인이었던 그는 공화파 지역에서 위험을 느껴 처음에는 멕시코 대사관, 이후 프랑스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후 산 세바스티안을 통해 프랑스로 국경을 넘어 1937년 6월 국가파 측에 합류했다. 그는 내전 중 먼 친척 관계였던 프랑코의 측근이 되었다.[18]

국가파 해군 소속으로 구축함 ''우에스카''와 잠수함 ''헤네랄 산주르호''에서 호위함장으로 복무했다. 1938년 3월 파로스 곶 해전에서 마누엘 비에르나 벨란도(Manuel Vierna Belando)가 전사하자, 카레로 블랑코가 그의 후임으로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내전에서 국가파가 승리하고 프랑코 독재 정권이 수립된 후, 카레로 블랑코는 1939년 8월 해군 작전 참모로 임명되었다.[5] 이후 해군 사관학교 교관, 해군 참모 본부장, 해군 사령관 등 군 내 주요 직책을 거쳤다.[18] 1963년에는 부제독, 1966년에는 제독으로 진급했다.

2. 2. 정치 경력

스페인 내전 발발 당시, 카레로 블랑코는 마드리드 해군대학에서 잠수함 전술을 가르치는 해군 교관이었다. 보수적인 군인이었던 그는 공화파 진영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처음에는 멕시코 대사관, 나중에는 프랑스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후 산 세바스티안에서 국경을 넘어 1937년 6월 국가파 측에 합류했다.

카레로 블랑코는 국가파 해군에서 구축함 ''우에스카''와 잠수함 ''헤네랄 산주르호''의 호위함장으로 복무했다. 국가파의 승리로 프랑코가 스페인의 ''카우디요''로 집권한 후, 1939년 8월 해군 작전 참모로 임명되었다.[5]

1941년 5월, 프랑코는 당시 37세였던 카레로를 발렌틴 갈라르사 모란테의 후임으로 정부 대통령 차관에 임명했다. 1942년 베고냐 사건 이후, 카레로는 프랑코에게 라몬 세라노 수네르를 장관직과 FET y de las JONS 정치 위원회 회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조언했고, 프랑코는 이를 받아들였다. 카레로는 프랑코에게 매우 충성스러웠는데, 이는 프랑코가 점차 부담스러워했던 세라노 수네르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카레로 블랑코는 1951년 제6차 프랑코 내각에서 총리부 관방장관으로 입각하여 1962년까지 11년간 재임했고, 이어서 1962년부터 1973년까지 부총리를 역임했다.[19] 군에서는 1963년 부제독, 1966년 제독으로 진급했다. 1967년부터 부총리를 맡아, 노쇠한 프랑코를 대신하여 정부의 일상적인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졌다. 당시 프랑코는 1965년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하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19] 카레로는 프랑코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며 행정부를 장악하는 데 능숙했다.

1969년 프랑코가 자신의 후계자로 부르봉 왕가의 후안 카를로스를 지명했을 때, 카레로가 이끄는 권위주의적 군주제가 프랑코 사후에도 프랑코주의를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는 후안 카를로스 지명 연설에서 프랑코 자신이 언급한 está atado y bien atado|에스타 아타도 이 비엔 아타도es ('모든 것이 묶여 있고 잘 묶여 있다')라는 말에서도 드러났다.[6]

1973년 6월 8일, 카레로 블랑코는 1967년 국가 유기법에 따라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의 기능이 분리되자 프랑코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정치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20][21]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총리 취임 연설에서는 ETA와의 투쟁을 선언했다.[22]

그러나 프랑코주의 정권을 이어가려던 continuista|콘티누이스타es 세력의 계획은 1973년 카레로 암살과 1974년 포르투갈에서의 정권 전복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 3. 암살

총리로 임명된 지 6개월 만인 1973년 12월 20일, 카레로 블랑코는 ETA 소속 공작원 4명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카레로 블랑코는 매일 미사를 드리는 마드리드예수회 계열 산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 교회를 닷지 3700 공용차를 타고 나와 귀가하던 중이었다.[7] ETA는 그의 동선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ETA의 치키아(작은곰자리) 부대 소속 6명의 대원들은[22] 처음에는 카레로 블랑코 납치를 계획했으나, 이후 암살로 계획을 변경하고 Operación Ogro|오그로 작전es이라는 작전명을 붙였다.[23][27] 그들은 카레로 블랑코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로 이동하며 경비가 허술하다는 점을 이용했다.[24] ETA 대원들은 예술가를 가장하여 클라우디오 코엘료 거리에 인접한 건물의 지하 공간을 아틀리에로 임대했다.[22] 이들은 10일 동안 지하에서 도로 밑으로 지름 50cm, 길이 10m, 깊이 2m의 터널을 파고 총 75kg의 폭약을 설치했다.[22]

원래 작전 실행일은 12월 18일이었으나, 당일 미국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스페인을 방문하면서 주변 경계가 강화되어 이틀 뒤인 12월 20일로 연기되었다.[25] 1973년 12월 20일 오전 9시 20분경, 미사를 마치고 나온 카레로 블랑코가 탄 차량이 클라우디오 코엘료 거리에 들어서자 미리 설치된 폭탄이 폭발했다.[26]

폭발의 충격으로 닷지 3700GT 차량은 공중으로 솟구쳐 5층 높이의 수도원 건물을 넘어 안뜰에 추락했다.[27] 카레로 블랑코와 그의 운전사, 측근은 현장에서 즉사했다.[27] 폭발 현장에는 직경 10m가 넘는 큰 구멍이 생겼다.[26]

ETA는 이후 인터뷰를 통해 카레로 블랑코가 프랑코 독재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오푸스 데이와 결탁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며, 국가 내에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에 암살 목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카레로 블랑코를 프랑코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인물로 간주했다.[8] 이 암살은 프랑코 정권에 반감을 가진 많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카레로 블랑코를 "스페인 최초의 우주 비행사"라고 농담하기도 했다.[9]

카레로 블랑코의 후임 총리가 된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는 1974년 2월 첫 의회 연설에서 정치 단체 결성 권리 등 자유화 개혁을 약속하며 스페인의 민주화 과도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카레로 블랑코 암살에 연루된 ETA 조직원 중 한 명인 아르갈라는 1978년 12월 21일 프랑스 남부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 이 암살의 배후에는 스페인 해군 정보부, CESID 요원 등이 포함된 특수팀이 있었으며, OAS,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 국가 전위 등 극우 준군사조직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암살에 사용된 폭발물은 미국 해군의 로타 해군 기지나 토레혼 공군 기지에서 유출된 것으로 전해졌으나, 미국 측은 폭발물의 용도를 몰랐다고 주장했다.[10] 이 암살은 바스크 스페인 대대(BVE)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배후 세력이 이용한 위장 명칭 중 하나라는 증언도 있다.[11]

3. 사상과 정책

카레로는 정권 내 특정 계파에 속하기보다는 프랑코 개인에게 극도로 충성하며 그의 업적에 헌신하는 순수한 프랑코주의자로 평가받는다.[5] 그의 이념적 특징으로는 반혁명, 반공주의, 그리고 프리메이슨을 사탄으로 여기는 반프리메이슨주의가 꼽히며, 이는 역사를 음모론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연결된다.

카레로는 공공연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1941년 그는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의 상황을 "그리스도의 신앙의 기사인 스페인은 다시 진정한 적, 즉 유대교에 맞서 싸우고 있다. ... 세상은,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영구적인 종교적 전쟁, 즉 기독교와 유대교의 투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선과 악의 투쟁과 같은 죽음의 전쟁이어야 한다"고 묘사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스페인 식민 통치에 대해 가부장주의적 시각을 가졌던 그는 탈식민지화 흐름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특히 서사하라에 대해서는 "모로코 제국에 의해 통제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이 지역이 마치 스페인 본토의 쿠엔카 주처럼 "스페인"이라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 ''Mundo''를 통해 친독일 성향을 보였으나, 1943년 추축국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연합국에 대한 비판 수위를 낮추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반소련 메시지로 대체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측의 승리가 국제적인 반대 세력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며, 1950년대에도 "이것이 바로 스페인의 문제이며, 스페인은 선을 구현하려 하고, 세상에 풀려난 악의 세력들이 그것을 막으려 한다"고 주장하며 외부 세력에 대한 불신을 보였다.[16]

정책적으로는 스페인의 비밀 핵무기 개발 계획인 Project Islero를 지지한 인물 중 하나였다.[17] 또한, 프랑코 사후에도 프랑코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로페스 로도와 함께 권위주의적 군주제를 구상하고 추진했다. 이는 1969년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며 남긴 está atado y bien atado|에스타 아타도 이 비엔 아타도es ('모든 것이 묶여 있고 잘 묶여 있다')라는 발언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는 카레로가 구상한 체제의 연속성을 프랑코가 보증한 것으로 해석되었다.[6] 그러나 이러한 continuista|콘티누이스타es (연속주의자)들의 계획은 1973년 카레로 자신의 암살과 1974년 포르투갈에서의 독재 정권 붕괴로 인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4. 사후

카레로 블랑코의 장례식은 프랑코의 마지막 공개 석상 중 하나가 되었으며, 다음 날 마드리드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는 인근 엘 파르도 자치구의 밍고루비오 묘지에 묻혔다.[12] 카레로는 사후에 "해군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카레로 블랑코 공작"으로 선포되었다.[13][14]

출신지 산토냐에 있는 기념비


ETA는 사건 직후 프랑스령 바스크바욘에서 범행 성명을 발표하고, 스페인 정부의 탄압을 규탄했다.[28] 사건 발생 직후에는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카레로 블랑코가 사망했다고 보도되었지만, 발생 7시간 후에는 ETA에 의한 암살 사건으로 보도되었다.[29] 12월 21일, 후안 카를로스 왕세자에 의해 국장이 거행되었다.[30]

암살 실행범 6명은 살라망카코임브라를 거쳐, 포르투갈을 경유하여 프랑스령 바스크로 도주했다.[29] 이들은 후에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1974년 9월에 집행되었다. 이 사형 집행으로 프랑코 정권은 국내외의 반 프랑코파 매체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31] 스페인 국내 다수 매체에서는 사형 집행을 비판 없이 보도했다.

카레로 블랑코의 암살은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프랑코 독재 체제의 붕괴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암살 당일인 12월 20일부터 토르쿠아토 페르난데스미란다가 잠정적으로 수상직을 맡았고, 12월 31일에는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가 신임 수상으로 취임했다.[27] 이후 프랑코가 다시 수상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다음 해인 1974년에는 프랑코가 수술을 위해 입원하면서 후안 카를로스 왕세자가 임시 국가 원수로 취임했는데, 프랑코 체제 하에서 프랑코 이외의 인물이 국가 원수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19] 1975년 11월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스페인은 민주화로의 이행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5. 저작

카레로 블랑코는 스페인 해군 및 해군 군사 역사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후안 데 라 코사(Juan de la Cosa)라는 가명으로 공산주의프리메이슨을 비판하는 정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Las Baleares durante la guerra de América en el siglo XVIII|18세기의 미국 전쟁 중 발레아레스fra (1933)
  • España y el mar|스페인과 바다spa (1941)
  • Cinemática aeronaval|항공해군 운동학spa (1941)
  • Arte naval militar: El buque de guerra (de la galera al portaaviones)|해군 군사 예술: 군함 (갤리선에서 항공모함까지)spa (1943)
  • La guerra aeronaval en el Atlántico y en el Ártico|대서양과 북극에서의 항공해전spa (1947)
  • La guerra aeronaval en el Mediterráneo y en el Pacífico|지중해와 태평양에서의 항공해전spa (1947)
  • La victoria del Cristo de Lepanto|레판토의 그리스도의 승리spa (1948)
  • La gran baza soviética|소련의 거대한 이점spa (1949, 후안 데 라 코사 명의)
  • Las doctrinas del Komsomol|콤소몰 교리spa (1950, 후안 데 라 코사 명의)
  • España ante el mundo: proceso de un aislamiento|세상 앞의 스페인: 고립의 과정spa (1950, 후안 데 라 코사 명의)
  • Gibraltar|지브롤터spa (1952, 후안 데 라 코사 명의)
  • Las modernas torres de Babel|바벨의 현대적 탑spa (1956, 후안 데 라 코사 명의)
  • Lepanto (1571–1971)|레판토 (1571–1971)spa (1971)
  • Comentarios de un español; Las tribulaciones de don Prudencio; Diplomacia subterránea|스페인인의 논평; 돈 프루덴시오의 고난; 지하 외교spa (1973, 후안 데 라 코사 명의)

참조

[1] 간행물 Decreto de 19 de julio de 1951 por el que se nombra Ministro Subsecretario de la Presidencia del Gobierno a don Luis Carrero Blanco https://www.boe.es/d[...] Agencia Estatal Boletín Oficial del Estado 1951-07-20
[2] 뉴스 In 1973, I applauded an Eta killing. Not now https://www.irishtim[...] 2019-11-12
[3] 뉴스 The day ETA struck a lethal blow to the Franco regime and his dictatorship https://elpais.com/e[...] 2019-11-11
[4] 웹사이트 Luis Carrero Blanco, 1. duque de Carrero Blanco http://www.geneall.n[...]
[5] 기타
[6] 서적 Twentieth-Century Spain. Politics and Society in Spain, 1898–1998 Macmillan Press
[7] 서적 NL ARMS Netherlands Annual Review of Military Studies 2016 T.M.C. Asser Press
[8] 서적 Operation Ogro: The Execution of Admiral Luis Carrero Blanco Quadrangle/The New York Times Book Company
[9] 서적 Resolving Insurgencies https://books.google[...] Strategic Studies Institute
[10] 뉴스 Yo maté al asesino de Carrero Blanco http://www.elmundo.e[...] Mundinteractivos, S.A. 2019-05-10
[11] 웹사이트 Argala, Jose Miguel Beñaran Ordeñana http://www.45-rpm.ne[...] 2019-05-10
[12] 뉴스 Estos serán los 18 compañeros de tumba de Franco en el cementerio de El Pardo https://www.elespano[...] 2019-03-10
[13] 웹사이트 Mañana finalizan los tres días de luto oficial en homenaje a don Luis Carrero Blanco https://linz.march.e[...] 1973-12-22
[14] 웹사이트 Duque de Carrero Blanco https://linz.march.e[...] 1973-12-22
[15] 뉴스 Antonio Elorza, "La muerte del valido de Franco" http://elpais.com/di[...] El País 2003-12-14
[16] 기타
[17] 간행물 Reseña del libro 'Proyecto Islero. Cuando España pudo desarrollar armas nucleares' http://asclepio.revi[...] Consejo Superior de Investigaciones Científicas
[18] 기타
[19] 기타
[20] 기타
[21] 기타
[22] 기타
[23] 기타
[24] 기타
[25] 기타
[26] 기타
[27] 기타
[28] 기타
[29] 기타
[30] 기타
[3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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