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르틴 부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르틴 부처는 1491년 엘자스 지방에서 태어나, 1506년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으나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토론에서 루터를 만나 개종한 후,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1549년 잉글랜드로 건너가 교회 개혁에 참여했지만, 1551년 사망했다. 부처는 성찬론에서 츠빙글리의 입장을 따랐고, 목회와 교회 조직에 관한 선구적인 사상으로 칼뱅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하여'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51년 사망 - 오다 노부히데
    오다 노부히데는 오와리 국의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이며, 사이토 도산, 이마가와 요시모토 등과 대립하며 오와리 지역 세력 확장에 힘썼으나, 가문 내부 분쟁과 주변 세력과의 싸움으로 오와리 통일에는 실패했고, 지략과 용맹함을 갖췄지만 시대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551년 사망 - 허자
    허자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김안국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을사사화에 가담하여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나 이기 등과의 갈등으로 유배되어 사망한 인물이며,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고, 저서로는 《동애유고》와 미완성작인 《역대사감》이 있다.
  • 독일의 복음주의자 - 필리프 멜란히톤
    필리프 멜란히톤은 마르틴 루터의 동료로서 종교 개혁 운동에 기여한 독일의 종교 개혁가, 신학자, 교육자, 인문주의자이다.
  • 독일의 복음주의자 - 디트리히 본회퍼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 반나치 운동가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즘에 저항하다 처형되었으며, 그의 저서와 '값싼 은혜' 비판, '고난을 함께하는 신학'은 현대 기독교 윤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의 종교 개혁가 -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로, '오직 믿음으로' 칭의 교리를 확립하고 95개 논제를 발표하여 종교 개혁을 촉발했으며, 독일어 성경 번역과 성직자 결혼 허용에 기여했으나 후기에는 반유대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 독일의 종교 개혁가 - 필리프 멜란히톤
    필리프 멜란히톤은 마르틴 루터의 동료로서 종교 개혁 운동에 기여한 독일의 종교 개혁가, 신학자, 교육자, 인문주의자이다.
마르틴 부처
기본 정보
마르틴 부서의 초상화 (독일 학교)
독일 화파의 무명 화가가 그린 초상화
본명마르틴 부처 (Martin Bucer)
출생일1491년 11월 11일
출생지슐레트슈타트, 신성 로마 제국 (현재 셀레스타, 프랑스)
사망일1551년 2월 28일 (59세)
사망지잉글랜드, 케임브리지
국적독일
사용 언어독일어
라틴어
직업 및 활동
직업목사
소속 교단칼뱅주의
관심사에큐메니즘
주요 저서De Regno Christi
영향 관계
서명
마르틴 부처 서명
마르틴 부처 서명

2. 생애

1506년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지만,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토론에서 루터를 만나 개신교로 개종했다.

1532년부터 알자스에서 개신교 포교 활동을 했고, 가톨릭으로부터 파문당했다. 이후 스트라스부르 교회 개혁에 힘썼다. 1540년부터 이듬해까지 가톨릭과의 화해를 위한 회의를 열었지만 실패했고, 1549년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로 건너가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잉글랜드 교회 개혁에 참여했으며, "그리스도 왕국론"(''De regno Christi'')을 저술했다.

1540년대 초, 부처는 아내 엘리자벳을 포함한 가족 9명을 흑사병으로 잃는 개인적인 시련을 겪었다. 이후 동료 볼프강 카피토의 미망인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Wibrandis)와 재혼했다.[19] 1546년 마르틴 루터가 사망하고, 슈말칼덴 동맹(Schmallkaldische Bund)이 결성되어 황제 카를 5세와 개신교 군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개신교 동맹군이 패배하면서 슈트라스부르크는 아욱스부르크 잠정안(Augsburger Interim)을 강요받았으나, 부처는 이를 거부했다.

1549년 부처는 동료 파기우스(Fagius)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추방되어 토마스 크랜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551년 그는 이국땅에서 피난민으로 생을 마감했다.

2. 1. 출생과 학창 시절 (1491년 ~ 1523년)

1491년 11월 11일 엘자스(Elsaßde) 지방의 슐레트슈타트(Schlettstadtde)에서 태어났다.[11] 그의 아버지는 통 제조업자였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만 6세부터 만 15세 때까지 슐레트슈타트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서 교육받았는데, 이 학교는 야코프 빔펠링(Jacob Wimpfelingde)과 같은 인문주의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계속 공부하고 싶었으나 재정 문제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어 차선책으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1507년 수도원에 입문하여 1년간 예비 과정을 거친 후, 1508년 수도사 서약을 하고 도미니칸 수도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 작품들 대신 토마스 아퀴나스와 피터 롬바르두스의 작품을 접했다. 17세에 수도원에 입문한 부처는 10년간 수도사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들을 연구했는데, 이는 그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인츠(Mainz)에서 1년 정도 사제(신부)로 봉사했다. 1517년 하이델베르크(Heidelbergde)에 있는 도미니칸 수도원으로 옮겼다. 그곳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1517년 1월에 등록했다. 요하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de)에게서 헬라어를 배워 플라톤을 비롯한 그리스 고전 작품들을 읽었다. 로테르담 출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작품을 연구하고 강의할 기회도 가졌다.

프란츠 폰 지킹겐은 초기 부처의 보호자이자 옹호자였다.


부처가 도미니코회를 떠난 것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다른 인문주의자 및 개혁가들과 접촉이 늘면서였다. 동료 도미니코회원 야코프 판 호흐스트라텐(쾰른 대심문관)은 인문주의 학자 요한 로이힐린을 기소하려 했다. 울리히 폰 후텐과 제국 기사 프란츠 폰 지킹겐 등 다른 인문주의자들은 로이힐린 편을 들었다. 호흐스트라텐은 좌절되었지만 부처를 표적으로 삼았다. 1520년 11월 11일, 부처는 볼프강 카피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흐스트라텐이 루터 추종자인 자신을 본보기로 삼겠다고 위협한다고 말했다. 도미니코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도 서약을 취소해야 했다. 카피토 등의 도움으로 1521년 4월 29일 공식적으로 도미니코회에서 해방되었다.[1]

이후 2년간 부처는 지킹겐과 후텐의 보호를 받았다. 루트비히 5세 궁정에서 일하며 그의 동생 프레데리크의 채플린으로 있었다. 지킹겐은 루트비히 궁정의 고위 인물이었다. 이 임명으로 부처는 뉘른베르크에서 살 수 있었는데, 그곳 통치 관료들은 강력한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곳에서 인문주의자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 뉘른베르크 개혁가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등 자신의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1521년 9월, 부처는 지킹겐이 란츠툴의 목사직을 제안하자 수락했고, 1522년 5월에 그 마을로 이사했다.[1] 1522년 여름, 전직 수녀였던 엘리자베스 질베라이젠과 결혼했다.[2]

지킹겐은 부처가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 지원을 제안했다. 가는 길에 비스부르크에 들렀고, 그곳 개혁가 하인리히 모테러가 채플린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부처는 여행을 중단하고 즉시 일하며 매일 설교를 통해 전통 교회 관행과 수도회를 비판했다. 성경이 구원을 위한 유일한 지식 원천이라는 믿음(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미사를 그리스도의 재현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받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설교했다. 수도사들이 성경 외 추가 규칙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자신의 신념을 6가지 논제로 요약하고 공개 토론을 요구했다. 지역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그를 무시했지만, 그의 설교는 마을 사람들을 자극하여 수도원을 위협하게 했다. 슈파이어 주교는 부처를 파문했고, 비록 마을 의회가 그를 계속 지지했지만, 비스부르크 너머 사건들은 부처를 위험에 빠뜨렸다. 주요 후원자 프란츠 폰 지킹겐은 기사 전쟁에서 패배하고 살해되었고, 울리히 폰 후텐은 도망자가 되었다. 비스부르크 의회는 부처와 모테러에게 떠나라고 촉구했고, 1523년 5월 13일 스트라스부르로 도망쳤다.

2. 2. 종교개혁가로의 전향 (1518년 ~ 1523년)

1518년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열린 어거스틴 수도회 종단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부처는 처음으로 루터를 만났다. 이 만남은 부처의 생애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가 강변한 ‘십자가 신학’은 장차 위대한 종교개혁가가 될 브렌츠와 부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슈트라스부르크의 도미니칸 수도사 마르틴은 비텐베르크(Wittenbergde)의 어거스틴 수도사 마르틴 루터를 따라 수도사에서 종교개혁가로 전향하게 되었다. [12] 부처는 다른 편지에서 비텐베르크의 개혁가 루터를 가리켜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진지하시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존경하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부처는 루터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1519년 봄, 부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학사 학위(B.A.)와 석사 학위(M.A.)를 취득했다.

부처는 에라스무스와 루터 두 사람 모두 교회개혁의 선구자요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이 두 사람처럼 교회개혁의 대열에 서고자 했으므로 더 이상 수도원에 머물 수 없었다. 1520년 11월 자신의 29번째 생일을 즈음하여 수도원을 떠났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평생 수도사로 살겠다고 맹세한 자신의 수도원 서약이었다. 부처는 스스로 그 서약을 파기하지 않고 합법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마인츠 대주교인 알브레히트(Albrecht)를 모시고 있던 독일 남부 도시인 하게나우(Hagenau) 출신이자 후에 부처와 더불어 슈트라스부르크의 개혁가가 될 볼프강 카피토에게 이 문제를 논의했고, 그 결과 1521년 4월 29일에 자신의 도미니칸 수도원 서약으로부터 합법적으로 해방될 수 있었다. [1] 자유의 몸이 된 부처는 이후 3년 동안 세속 사제의 신분으로 사역하게 되었다. 먼저 에베른부르크(Ebernburg)의 프란츠 폰 지킹겐(Franz von Sickingen) 곁에서 일하다가, 1년간은 팔츠(Pfalz)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의 궁정 설교자로 사역했다. 기사 전쟁 동안에는 다시 지킹겐의 보호 아래 란트슈툴(Landstuhl)에서 목회자로서 일했다. 1522년 여름에는 수녀였던 엘리자베트 질버아이젠(Elisabeth Silbereisen)과 결혼함으로써 최초로 성직자의 개혁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522년 11월에는 새로운 목회지 바이센부르크(Weissenburg)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부처가 도미니코회를 떠나게 된 사건들은 그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다른 인문주의자 및 개혁가들과의 접촉이 증가하면서 발생했다. 동료 도미니코회원인 야코프 판 호흐스트라텐, 쾰른의 대심문관은 인문주의 학자 요한 로이힐린을 기소하려 했다. 울리히 폰 후텐과 제국 기사 프란츠 폰 지킹겐을 포함한 다른 인문주의자들은 로이힐린의 편을 들었다. 호흐스트라텐은 좌절되었지만, 이제 부처를 표적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1520년 11월 11일, 부처는 개혁가 볼프강 카피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흐스트라텐이 루터의 추종자인 그를 본보기로 삼겠다고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미니코회 관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는 수도 서약을 취소해야 했다. 카피토와 다른 사람들은 그의 서약 무효화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 후 2년 동안 부처는 지킹겐과 후텐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또한 루트비히 5세, 팔츠 선제후의 궁정에서 한동안 일했으며, 루트비히의 남동생 프레데리크의 채플린으로 있었다. 지킹겐은 루트비히 궁정의 고위 인물이었다. 이 임명으로 부처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인 뉘른베르크에서 살 수 있었는데, 그곳의 통치 관료들은 강력한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문주의자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와 미래의 뉘른베르크 개혁가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포함하여 그의 관점을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1521년 9월, 부처는 지킹겐이 성을 가지고 있던 란츠툴의 목사직을 제안하자 이를 수락했고, 1522년 5월에 그 마을로 이사했다.[2]

지킹겐은 또한 부처가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지불할 것을 제안했다. 가는 길에 부처는 비스부르크 마을에 들렀고, 그곳의 지도적인 개혁가인 하인리히 모테러가 그에게 자신의 채플린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부처는 여행을 중단하기로 동의하고 즉시 일하기 시작하여 매일 설교를 통해 전통적인 교회 관행과 수도회를 비판했다. 성경이 구원을 얻기 위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그의 믿음('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그는 미사를 그리스도의 재현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성경에 포함된 것 외에 추가적인 규칙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6가지 논제로 요약하고 공개 토론을 요구했다. 그의 반대자들인 지역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그를 무시했지만, 그의 설교는 마을 사람들을 자극하여 마을의 수도원을 위협하게 했다. 슈파이어 주교는 부처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비록 마을 의회가 그를 계속 지지했지만, 비스부르크 너머의 사건들은 부처를 위험에 빠뜨렸다. 그의 주요 후원자인 프란츠 폰 지킹겐은 기사 전쟁 중에 패배하고 살해되었고, 울리히 폰 후텐은 도망자가 되었다. 비스부르크 의회는 부처와 모테러에게 떠나라고 촉구했고, 1523년 5월 13일 그들은 근처의 스트라스부르로 도망쳤다.

2. 3.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사역 (1523년 ~ 1549년)

1523년 3월 카피토와 카스파르 헤디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초빙된 후, 부처도 이곳에 도착했다. 그는 파문당하고 추방된 기혼 사제였고, 과격한 성격으로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의회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권자인 부처의 아버지가 아들의 보호를 요청하자 의회는 이를 수락했다. 1523년 11월, 부처는 의회에 시민권을 신청하여 획득했다. 이는 결혼한 사제도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부처는 종교개혁가로서 결혼과 이혼 문제를 상세히 다룬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De regno Christi)를 저술했다. 안토니 피른과 마테우스 젤(Matthäus Zellde) 부부 등이 사제의 합법적 결혼을 지지했다. 빌헬름 폰 호헨슈타인(Wilhelm von Hohensteinde) 주교는 이들에게 파문을 선언했지만, 당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불성실한 성직자들이 첩을 두는 경우가 많아 성실한 기혼 성직자만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슈트라스부르크는 구텐베르크(Gutenbergde)의 인쇄술 발명지이자 인문주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16세기에는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요한 가일러(Johann Geilerde)가 교회의 악습을 비난하는 설교를 시작했고, 1510년 그가 사망한 후 마테우스 젤이 뒤를 이었다. 젤은 부처에게 성경 강해를 맡겼고, 1523년 출판된 소책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야곱 슈투름(Jakob Sturmde)은 카피토와 부처가 시의회 승인 아래 성경을 강해하도록 도왔다. 1524년 2월 31일, 부처는 성 아우렐리아(St. Aurelia) 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고, 5월 31일에는 목사로 선출되었다.[15] 부처는 강력한 설교를 통해 슈트라스부르크의 개혁가로 부상했다.

마르틴 부처


1524년부터 니그리의 도움으로 슈트라스부르크 교회의 예배 의식이 변화되었다. 부처는 수도원들을 철폐하고 그 재산을 구제 및 교육 사업에 투자하도록 했다. 각 교구에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남녀 아이들 모두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고, <교리교육서(Catechismus)>를 만들어 청소년 신앙 교육을 시작했다. 1535년 슈트라스부르크에는 2개의 소녀학교, 6개의 소년학교, 3개의 라틴어 학교가 있었다. 1538년에는 목사 양성 기관인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요한 슈투름(Johann Sturmde)이 초대 학장이 되었다. 존 칼빈도 이 학교에서 3년간 가르쳤으며, 부처와 카피토는 성경, 헤디오는 교회사를 담당했다. 1542년에는 피터 버미글리와 엠마누엘 트레멜리우스가 합류했다. 이것이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전신이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에르(Speier) 국회 결정에 반대하고, 1530년 아욱스부르크 국회에 대비하기 위해 슈트라스부르크는 콘스탄츠(Konstanzde), 린다우(Lindaude), 메밍겐(Memingende)과 함께 <4개 도시 신앙고백서(Confessio Tetrapolitana)>를 작성했다. 1531년 10월 30일에는 장로들로 구성된 감독회(Kirchenpflegerde)를 만들어 7개 교구에서 각각 3명씩[17] 선출하여 교인들의 예배, 설교, 성례 참석 및 생활을 감독하고, 목회 관련 문제를 처리했다. 칼빈의 제네바 교회 치리회(Consistoir)는 이를 적용한 것이었다. 1534년 시의회는 <4개 도시 신앙고백서>와 16개 조항의 새 교회법을 승인했다.

16세기재세례파들은 슈트라스부르크를 "희망의 도시", "의의 피난처"로 불렀다.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온 재세례파 피난민들을 관용했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Andreas Karlstadtde)[18], 발타자르 후버마이어(Balthasar Hubmaierde), 한스 뎅크(Hans Denckde),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ckfeldde), 멜히오어 호프만(Melchior Hofmannde), 필그람 마르펙(Pilgram Marpeckde) 등 많은 재세례파 대표자들이 이곳에 체류했다. 1530년-1540년 사이 슈트라스부르크는 재세례파 논쟁으로 혼란스러웠다. 1534년 시의회는 아욱스부르크(Augsburgde) 신앙고백과 불일치하는 것을 불허하는 칙령을 발표했고, 1538년에는 재세례파 추방 칙령을 공포했다. 부처는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재세례파의 완고함과 교회 분열 조장 때문에 적대자가 되었다.

부처는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을 때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는 도시 시민이 아니었고,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시민권이 필요했다. 1523년 6월 9일, 취리히의 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에게 스위스에서 안전한 자리를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다행히 스트라스부르 의회는 개혁가 마테우스 첼의 영향 아래 있었고, 부처는 처음 몇 달 동안 첼의 비공식 채플린으로 일하며 성경 강의를 할 수 있었다. 1523년 8월 24일, 스트라스부르에서 가장 큰 길드인 정원사(Gärtner)는 그를 생트 오렐 교회의 목사로 임명했다. 한 달 후, 의회는 그의 시민권 신청을 받아들였다.

부처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풍자에서 루터를 공격했던 수도승 토마스 무르너와 논쟁하는 것이었다. 시의회는 종교 문제에 대해 망설였지만,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전통적인 성직자에 적대적인 사람들의 수가 증가했다.

이러한 적대감은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장 콘라트 트레거가 개혁주의 설교자들과 스트라스부르의 부르주아들을 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1524년 9월 5일, 분노한 폭도들은 수도원에 쳐들어가 약탈하고 종교적 이미지를 파괴했다. 트레거를 포함한 많은 종교 개혁 반대자들이 체포되었다. 의회가 개혁가들에게 공식 성명을 요청한 후, 부처는 믿음에 의한 의롭다 함(sola fide)을 포함하여 종교 개혁의 가르침을 요약한 12개의 조항을 작성했다. 그는 미사와 가톨릭의 개념인 수도 서약, 성인 숭배, 연옥을 거부했다. 그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신 정부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다. 트레거는 10월 12일에 석방되어 스트라스부르를 떠났고, 종교 개혁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는 도시에서 끝났다.

개혁가들의 첫 번째 목표는 새로운 예배 순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 개혁가들은 츠빙글리의 전례를 따랐다. 그들은 종교 개혁 운동 전체를 위한 일반적인 예배 순서에 대한 제안을 비텐베르크와 취리히의 신학자들에게 제시했다. 부처의 책 "Grund und Ursach"(기본과 원인)은 1524년 12월에 출판되었으며, 미사를 희생으로 생각하는 것을 공격하고 예복, 제단, 특정 형태의 의식을 거부했다. 또한 이 출판물은 도시에서 회중 독일 찬송가 부르기의 도입을 인정했다.[3] 1525년 5월까지 전례 개혁이 스트라스부르의 교구 교회에서 시행되었지만, 시의회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생 토마 교회, 생 피에르 르 죈느 프로테스탄트 교회, 구 생 피에르 교회, 스트라스부르에서 미사를 계속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개혁가들 사이의 신학적 분열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그들의 견해를 제시하도록 요청했을 때 명백해졌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의 주요 대표자였으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초안을 준비했다.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은 성찬에 관한 조항 없이 스트라스부르가 그것을 채택하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이에 부처는 ''Confessio Tetrapolitana''(테트라폴리타나 신앙 고백)을 썼다. 멜란히톤의 초안을 시작점으로 사용, 성찬 조항의 문구만 변경했다. 테트라폴리탄 신앙 고백의 성찬 조항은 "이 성사에서 그의 참된 몸과 참된 피가 참으로 먹고 마시도록 주어지며, 영혼의 양식이 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그 안에 머물고 그가 그들 안에 머물게 된다"고 명시했다. "참으로"라는 단어는 정의되지 않았다.

카를은 9월 22일에 모든 개혁가들이 가톨릭 신앙과 화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포고했다. 멜란히톤은 부처와 회의, 아홉 가지 테제에 합의하여 루터와 스트라스부르에 보냈다. 스트라스부르 행정관들은 바젤과 취리히로 전달했다. 부처는 9월 26-28일에 코부르크에서 루터를 만났다. 루터는 부처의 테제를 거부했지만, 화합을 계속 추구하도록 격려했다. 부처는 울름, 이스니, 콘스탄츠, 멤밍겐, 린도우, 바젤, 취리히로 여행했다. 10월 12일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에게 조항들을 제시했는데, 츠빙글리는 반대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

1531년 2월, 제국의 복음주의 군주들과 도시들은 개혁된 종교를 방어하기 위해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했다. 스트라스부르의 야콥 슈투름 폰 슈투르메크는 테트라폴리탄 신앙 고백을 기반으로 도시의 참여를 협상했다. 이때쯤 부처와 츠빙글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스트라스부르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정치적 유대, 부처의 부분적인 루터 신학 지지는 츠빙글리에게 너무 컸고, 1531년 2월 21일, 그는 부처에게 편지를 써 우정을 끝냈다. 1532년 3월 23-24일 울름에서 남부 독일 도시 대표자들이 슈말칼덴 동맹과의 동맹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을 때, 부처는 압력을 받는다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서명하라고 조언했다. 부처가 자신의 버전 대신 경쟁적인 신앙 고백을 추천하는 것은 스위스 도시들을 놀라게 했다. 루터는 부처를 공격했지만, 부처는 "어떤 경우든,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합과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 썼다. 1533년 4월과 5월에 그는 다시 남부 독일 도시와 스위스 도시를 순회했다. 후자는 설득되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마르틴 부처 시대부터 존재해 온 목조 가옥 뒤로 참회하는 막달레나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가들은 천천히 진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시의회에 모든 미사를 금지하도록 압력을 가해 성공했다. 1529년 2월 20일, 스트라스부르는 미사 집행을 공식 중단, 공개적으로 종교개혁에 동참했다. 모든 교구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두 번의 설교 예배(''Predigtgottesdienste'')가 열렸다. 1530년 1월 5일, 스트라스부르가 스위스 도시들의 동맹에 가입했을 때, 시의회는 교회에서 이미지와 측면 제단을 체계적으로 제거했다. 부처는 처음에는 숭배하지 않는 한 예배 장소에서의 이미지를 용인했다. 그는 나중에 이미지의 남용 가능성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고, 질서 있는 제거를 위한 논문을 썼다. 먼저 행정관의 권한을 얻은 다음, 사람들에게 이미지 숭배를 버리도록 지시해야 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부처의 최우선 과제는 교회에 도덕적 규율을 심는 것이었다. 평신도 중에서 선출된 특별 감독관(''Kirchenpfleger'')들이 교리와 실천을 모두 감독하기 위해 각 교구에 배정되었다. 그의 관심은 스트라스부르의 관대한 망명 정책에 매료된 난민 인구의 영향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 1528년 이후 난민 유입은 혁명적인 설교자들을 스트라스부르로 데려왔다. 이들은 다양한 종말론 및 신비주의 교리에 영감을 받았으며, 사회 질서와 공식적인 교회의 개념에 대한 적대감도 있었다. 난민은 재세례파와 멜키오르 호프만, 카스파 슈벵크펠트, 클레멘스 지글러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이었다. 부처는 이러한 설교자들을 공격하여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추방을 확보하는 책임을 졌다. 1532년 11월 30일, 목사들과 감독관들은 시의회에 윤리적 기준을 시행하고, 개혁 신앙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분파" 교리를 반박해 줄 것을 청원했다. 분파적인 교회가 난민과 하층 계급 사이에서 번성하도록 허용한 통치 당국은 문제아들만 추방할 뿐이었다. 부처는 시의회가 공익을 위해 도시의 모든 기독교 예배를 시급히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 시의회는 도시 시노드를 제안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부처는 교회 교리에 관한 16개 조항의 초안 문서를 제공했다. 시노드는 1533년 6월 3일 참회하는 막달레나 교회에서 부처의 문서를 논의, 완전히 수용했다. 분파 지도자들은 시노드에 소환되어 부처에게 질문을 받았다. 지글러는 해고되어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는 것이 허용되었고, 호프만은 국가에 위험한 존재로 투옥되었으며, 슈벵크펠트는 자발적으로 스트라스부르를 떠났다.

시노드 이후 시의회는 몇 달 동안 늑장을 부렸다. 부처와 카피토를 포함한 시노드 위원회는 주도권을 잡고 교회의 규제를 위한 초안 조례를 만들었다. 이는 시의회가 교리의 감독, 교회 감독관 임명, 도덕적 기준 유지를 책임지고 교회를 거의 완전하게 통제할 것을 제안했다. 시의회는 지연되었고, 목사들을 사임 직전으로 몰아갔다. 뮌스터 반란에서 호프만의 추종자들이 뮌스터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시의회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여 행동했다. 1534년 3월 4일, 시의회는 부처의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과 그의 교회 교리에 관한 16개 조항이 공식적인 교회 신앙 선언임을 발표했다. 모든 재세례파는 이 문서에 서명하거나 도시를 떠나야 했다. 이 결정은 스트라스부르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했으며, 카피토는 "부처는 우리 교회의 주교입니다."라고 선언했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개혁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신학적 문서에서 부처와 긴밀히 협력했다.


1534년까지 부처는 독일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비텐베르크, 남부 독일 도시들, 스위스 간의 교리적 합의를 확보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주도했다. 1534년 12월, 부처와 멜란히톤은 카셀에서 회담을 가졌고, 부처는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이 받아들인 10개의 테제를 작성했다. 1535년 10월, 루터는 개신교 분파 간의 완전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아이제나흐에서 회동을 제안했다. 부처는 남부 독일인들이 참석하도록 설득했지만, 츠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이끄는 스위스인들은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1536년 2월 1일 바젤에서 만나 자신들의 신앙 고백을 초안했다. 부처와 카피토가 참석하여 스위스인들에게 루터교인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을 성찬에 대한 타협적인 문구를 채택하도록 촉구했다.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는 인정되었지만, 그리스도와 요소들 사이의 자연적이거나 국지적인 연합은 부인되었다. 그 결과는 제1헬베틱 신앙 고백이었고, 부처는 루터와의 회동에 대한 희망을 높였다.

루터가 병들어 회동이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1536년 5월 21일에 시작되었다. 루터는 성찬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공격했다. 카피토가 개입하여 상황을 진정시켰고, 부처는 루터가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오해했다고 주장했다. 루터교인들은 성찬에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부처와 남부 독일인들은 빵과 포도주의 요소만을 받는다고 믿었다. 요하네스 부겐하겐은 루터가 승인한 타협안을 제시, 가치 없는 자(''indigni'')와 불신자(''impii'')를 구별했다. 남부 독일인들은 가치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불신자들이 무엇을 받는가에 대한 질문은 답이 없는 채로 남겨졌다. 양측은 다른 문제와 5월 28일에 비텐베르크 협약에 서명했다. 스트라스부르는 즉시 문서를 지지했지만, 부처의 많은 설득이 필요했고, 그는 모든 남부 독일 도시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스위스 도시는 저항했고, 특히 취리히가 그랬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성찬 요소의 연합을 암시하는 온건한 진술조차 거부했다. 부처는 스위스인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국가 시노드를 개최하도록 조언했고, 최소한 베른과 바젤을 설득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시노드는 1538년 5월 28일부터 4월 4일까지 취리히에서 열렸지만, 부처는 단 하나의 도시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스위스인들은 비텐베르크 협약을 결코 수락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부처의 스위스에 대한 영향력은 결국 간접적으로 나타났다. 1538년 여름, 그는 제네바의 미래 개혁가 존 칼빈을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 난민 회중을 이끌도록 초대했다. 부처와 칼빈은 신학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오랜 우정을 유지했다. 부처가 칼빈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지만, 칼빈이 나중에 제네바에서 시행한 전례와 교회 조직을 포함한 많은 개혁은 원래 스트라스부르에서 개발되었다.

2. 4. 개혁의 실패와 말년 (1540년대 ~ 1551년)

1540년대 초반, 부처는 아내 엘리자벳을 포함한 가족 9명을 흑사병으로 잃는 개인적인 시련을 겪었다. 이후 그는 동료 볼프강 카피토의 미망인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Wibrandisde와 재혼했다.[19] 그는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 개혁을 위해 노력하며, 교회 치리와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나 개신교도는 참석하지 않았다. 1546년 마르틴 루터가 사망하고, 슈말칼덴 동맹Schmallkaldische Bundde이 결성되어 황제 카를 5세와 개신교 군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개신교 동맹군이 패배하면서 슈트라스부르크는 아욱스부르크 잠정안(Augsburger Interim)을 강요받았으나, 부처는 이를 거부했다.

1549년 부처는 동료 파기우스(Fagius)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추방되어 토마스 크랜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551년 그는 이국땅에서 피난민으로 생을 마감했다.

부처의 슈트라스부르크 개혁 노력은 제네바(Geneva)[20] 등 다른 도시에서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후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은 요한 마르바흐Johann Marbachde와 같은 루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1534년까지 부처는 독일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비텐베르크, 남부 독일 도시들, 그리고 스위스 간의 교리적 합의를 위해 노력했다. 1536년 비텐베르크 협약에 서명하여 남부 독일 도시들을 설득했지만, 스위스 도시들은 저항했다.

부처는 존 칼빈을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 난민 회중을 이끌도록 초대하여, 칼빈의 신학과 교회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1539년, 헤센의 필리프는 그의 영토 내 유대인 보호에 관한 법률 만료 후 부처에게 새로운 정책을 만들도록 의뢰했다. 부처는 유대인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제공하는 직업을 제외한 모든 직업을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

썸네일는 일련의 구어체와 제국 회의를 통해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을 다시 얻으려 시도했다. 화해에 실패하자, 그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을 억압하려 했다.]]

1539년 프랑크푸르트 휴전에서 카를과 슈말칼딕 동맹 지도자들은 제국 내 모든 종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구어체에 합의했다. 부처는 이 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대부분의 독일 가톨릭교도들이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한 논의의 기초로 ''오직 믿음''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부처는 프로테스탄트 측 대표로 참여했으나, 가톨릭 측과의 이견으로 인해 회의는 실패했다.

부처가 레겐스부르크에서 돌아온 후, 스트라스부르크시는 흑사병에 시달렸다. 먼저, 부처의 친구이자 동료인 볼프강 카피토가 그 질병으로 사망했고, 그 다음 부처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1541년 11월 16일에 사망했다.

1542년 2월 5일, 부처는 헤르만 폰 비트(쾰른 대주교 겸 선제후)를 만나 그의 대교구 내 교회 개혁 도입에 대해 논의했다.

개혁을 향한 첫 단계는 1543년 8월 17일 카를 5세와 그의 군대가 본에 진입하면서 중단되었다. 부처는 그 직후 스트라스부르로 돌아가야 했다.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시작되면서, 개신교는 제국 내에서 점진적인 후퇴를 시작했다. 1547년 3월 21일, 스트라스부르가 황제군에 항복했고, 다음 달 뮐베르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황제의 승리로 대부분의 개신교 저항이 종식되었다.

토마스 크랜머는 마르틴 부처에게 잉글랜드에서 망명할 곳을 제공했고, 부처는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3. 신학

부처는 성찬례 논쟁에서 마르틴 루터울리히 츠빙글리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실재적 임재를 믿었고, 츠빙글리는 성령에 의한 영적 실재적 임재를 믿었다. 부처는 처음에는 육체적인 실재적 임재를 부정하고 츠빙글리의 해석을 따랐지만, 양측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다고 보고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5]

1526년 3월, 부처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는 ''Apologia''를 출판했다. 그는 양측이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의 통일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이 오류를 범했다고 여겼지만, 믿음의 기본 원리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루터와 요하네스 부겐하겐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텍스트에 삽입하여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을 격분시켰다.

1528년, 루터가 그리스도의 만찬에 관한 고백을 출판하여 성례적 연합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자, 부처는 ''Vergleichnung D. Luthers, und seins gegentheyls, vom Abendmal Christi'' (그리스도의 만찬에 관하여 루터 박사와 그의 반대자들 사이의 화해)로 응답했다. 부처는 루터가 임파나티오를 거부했기 때문에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둘 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믿었지만, 루터는 부처의 해석을 가혹하게 거부했다.

부처는 츠빙글리와 종교적 이미지 사용 및 전례와 같은 신학과 실천의 다른 측면들을 논의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527년, 부처와 카피토는 베른 논쟁에 참석하여 츠빙글리를 지원했고, 이는 베른에 개혁을 가져왔다.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루터와 츠빙글리는 14가지 주제 중 13가지에 동의했지만, 츠빙글리는 실재적 임재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의는 실패로 끝났고, 부처는 교리적 유연성의 부족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개혁가들에게 견해를 제시하도록 요청했을 때, 필리프 멜란히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준비했다. 부처는 테트라폴리타나 신앙 고백을 썼는데, 이는 스트라스부르와 다른 세 곳의 남부 독일 도시만이 채택했다.

1531년, 제국의 복음주의 군주들과 도시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했다. 부처는 자신의 버전 대신 경쟁적인 신앙 고백을 추천하여 스위스 도시들을 놀라게 했다.

1534년부터 부처는 독일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로서 교리적 합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536년 비텐베르크 협약에서 부처와 남부 독일인들은 가치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불신자들이 무엇을 받는가에 대한 질문은 답이 없는 채로 남겨졌다. 스트라스부르는 즉시 그 문서를 지지했지만, 스위스 도시는 저항했다.

부처는 제네바의 존 칼빈을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 난민 회중을 이끌도록 초대했다. 부처와 칼빈은 신학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칼빈이 나중에 제네바에서 시행한 많은 개혁은 원래 스트라스부르에서 개발되었다.

1539년, 헤센의 필리프는 부처에게 중혼에 대한 신학적 변론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부처는 마지못해 동의했고, 중혼은 비밀로 유지될 것을 조건으로 했다. 이 결혼으로 인해 발생한 스캔들로 인해 필리프는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고, 제국 내의 종교 개혁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1539년 프랑크푸르트 휴전 이후, 부처는 독일 국가 교회를 홍보하는 팸플릿을 출판했다. 1540년 하게나우와 보름스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부처는 요하네스 그로퍼와 협력하여 23개의 조항에 합의했지만, 네 가지 논쟁적인 문제는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그 결과는 "보름스 서"에 출판되었다.

썸네일는 일련의 구어체와 제국 회의를 통해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을 다시 얻으려 시도했다. 화해에 실패하자, 그는 슈말칼덴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을 억압하려 했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양측은 믿음에 의한 칭의 문제에 대해 합의했지만, 교회의 가르침 권위에 대해 합의할 수 없었다. 교황 사절 가스파로 콘타리니는 미사와 주의 만찬에 대한 조항에 화체설의 개념을 삽입했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회의의 실패는 부처에게 큰 좌절이었다.

3. 1. 주요 저술

부처의 저술은 논쟁서, 주석서, 번역서, 소논문, 서신 등 다양하다. 로마 가톨릭 학자, 루터주의자, 재세례파와의 논쟁을 다룬 글이 많다. 주석서로는 에베소서 주석, 공관복음 및 요한복음 주석, 로마서 주석, 시편 주석, 스바냐 주석 등이 있다. 특히 로마서 주석은 30만 개가 넘는 라틴어 단어로 기록된 방대한 분량이다. 칼뱅은 부처의 로마서 주석을 “바쁜 사람들의 관심을 보류시키는 너무 장황한” 주석이라고 평가했지만, 이는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며 칼뱅은 부처의 로마서 주석의 탁월함을 알고 있었다.[21] 부처는 루터의 초기 독일어 작품 일부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는데, 칼뱅은 이를 통해 루터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부처 연구가들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 1523년 출판된 소논문 <아무도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Das ym selbs niemant, sonder anderen leben soll, und wie der mensch dahyn kummen mogde)
  • 1538년 출판된 <참된 목회와 바른 목회사역에 관하여: 어떻게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세워지고 시행되어야하는가> (Von der waren Seelsorge und dem rechten Hirtendienst, wie derselbige in der Kirchen Christi bestellet und verrichtet werdende)
  • 1551년 기록되었으나 1557년에야 출판된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 (De regno Christide)


프랑수아 방델(François Wendel프랑스어)의 노력으로 결성된 국제부처위원회(Die Internationale Bucer-Kommissionde)는 부처의 저술들을 현대 활자로 편집하기 시작했다. 원작품의 저작년도 순으로 편집, 출판되고 있는 부처 작품의 비평 편집 판은 지금까지 25권 넘게 출간되었다. 독일어 작품은 독일 귀터슬로의 게르트 몬 출판사(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de)와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대학 출판부(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프랑스어)가, 라틴어 작품과 서신들은 네덜란드의 브릴(E.J. Brill) 출판사가 출판을 맡고 있다.

성찬론에서는 츠빙글리의 입장에 가깝다. 또한, 목회와 교회 조직에 관한 교회론에서의 선구적인 사상은 칼뱅에게 영향을 주었다.

4. 유산 및 영향

부처는 영국에서 류머티즘, 기침, 장 질환 등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구토, 전율, 발한 등의 증상은 심각한 결핵을 시사했다. 1551년 2월 건강이 악화되었고, 2월 28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메리 더 그레이트 교회에 매장되었다.[1]

존 치크는 피터 마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처를 "참된 종교에 대한 지식, 삶의 청렴함과 순수함, 가장 거룩한 것에 대한 연구에 대한 갈망, 경건함을 증진하기 위한 소모적인 노력, 가르침의 권위와 충만함"을 갖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2]

부처는 아내 위브란디스에게 가구와 방대한 장서를 유산으로 남겼다. 위브란디스는 바젤로 돌아가 1564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메리 1세는 부처와 파기우스를 사후에 이단으로 재판하고 관을 파내어 유해와 책을 불태웠다.[4] 1560년 엘리자베스 1세는 두 개혁가를 공식적으로 복권시켰고, 세인트 메리 더 그레이트 교회 바닥의 놋쇠 명판은 부처의 원래 무덤 위치를 표시한다.[5]

마르틴 부체르를 기리며, 옛 성서 신학 교수, 그의 시신이 A.D. 1551년 이 성가대에 묻혔다. A.D. 1557년에 발굴되어 포럼에서 화장되었고, A.D. 1560년 그의 기억을 기리는 두 번째 장례식을 거행했다.
마르틴 부처를 기리는 명판은 그가 묻힌 세인트 메리 더 그레이트 교회에 있다.


부처 사후 그의 저술은 유럽 전역에서 번역, 재인쇄, 배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루터교회멜란히톤이나 개혁교회의 칼뱅처럼 체계적인 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주의" 교파는 나타나지 않았다.[6] 성공회, 청교도, 루터교, 칼뱅주의 등 여러 그룹이 그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주장했다. 그의 신학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고 목회적인 것으로 평가되며, 너무 관대하다는 비판도 있었다.[7] 그는 교리적 통일성, 즉 에큐메니즘을 장려하고 포용적인 교회를 만들기 위해 평생 노력한 인물로 기억된다.[8]

참조

[1] 인용
[2] 인용
[3] 서적 The Singing of the Strasbourg Protestants, 1523–1541 Ashgate
[4] 서적 The Singing of the Strasbourg Protestants, 1523-1541
[5] 인용
[6] 인용
[7] 인용
[8] 인용
[9] 인용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간행물 Bibliographia Bucerana C. Bertelsman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