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다다나오 (1595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쓰다이라 다다나오(1595년)는 유키 히데야스의 장남으로, 1595년에 태어나 1650년에 사망한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1607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에치젠 후쿠이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1614년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했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기행을 일삼다 1623년 은거하여 동생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했으며,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쿠이번주 - 유키 히데야스
유키 히데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으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으며, 유키 가문의 가독을 잇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치젠의 영주가 되었다. - 후쿠이번주 - 마쓰다이라 무네마사
마쓰다이라 무네마사는 에치젠 마쓰오카 번주를 거쳐 후쿠이 번주를 지낸 에도 시대 다이묘로, 후계자가 없어 양자를 맞이하면서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이래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 유키 히데야스
유키 히데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으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으며, 유키 가문의 가독을 잇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치젠의 영주가 되었다. -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 다카다번
다카다번은 에치고국에 위치했던 번으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가 다카다 성을 건설하며 시작되어 여러 다이묘 가문이 통치하다가 사카키바라 씨를 거쳐 폐번치현되었고, 간분 대지진과 에치고 소동, 보신 전쟁 등의 사건을 겪었다. - 1595년 출생 - 보흐단 흐멜니츠키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17세기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헤트만이자 흐멜니츠키 봉기의 지도자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며,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체결하는 등 우크라이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1595년 출생 - 성이성
성이성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암행어사, 지방관을 역임하며 청렴한 관리로 칭송받았고, 춘향전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으며, 저서로 《계서유고》가 있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1595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松平 忠直) |
출생 | 1595년 7월 16일 |
출생지 | 일본, 에도 |
사망 | 1650년 10월 5일 |
사망지 | 일본, 셋쓰국 |
묻힌 곳 | 일본, 오이타현, 오이타시 |
국적 | 일본 |
다른 이름 | 결성 센치요 (幼名)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
호 | 이치하쿠(一伯) |
계명 | 서암원전전 에치젠 태수 원삼위상공 상예연우대거사(西巌院殿前越前太守源三位相公相誉蓮友大居士) |
다른 계명 | 서암원전 상예연우일박대거사(西巌院殿相誉蓮友一泊大居士) |
묘소 | 오이타현 오이타시의 정토사 오이타현 오이타시의 아사히사 와카야마현 이토군 고야정의 금강봉사 도쿄도 분쿄구의 정토사 후쿠이현 사바에시의 초큐사 도쿄도 시나가와구의 해안사 |
관직 | |
관위 | 종사위하・시종 미카와노카미(三河守) 우근위권소장(右近衛権少将) 종사위상・좌근위권소장 종삼위・참의(参議) 좌근위권중장 에치젠노카미(越前守) |
정치 경력 | |
직함 | 기타노쇼 번 번주 |
임기 | 불명 |
이전 | 유키 히데야스 |
이후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
가문 | |
씨족 | 결성 씨 → 에치젠 마쓰다이라 종가(越前松平家)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유키 히데야스 |
어머니 | 오카야마 (세이료인) |
배우자 | 가쓰히메(勝姫)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
자녀 | 미쓰나가(光長) 네이시/아야코(寧子) 쓰루코(鶴子) 여자 나가미 나가요리 나가미 나가요시 시즈 |
2. 생애
1595년(분로쿠 4년) 유키 히데야스의 장남으로 셋쓰국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센치요마루'''(仙千代)였다. 어머니는 유키 히데야스의 측실 나카가와씨(中川氏)이다. 1603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에도로 가서 숙부이자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처음 알현했는데, 히데타다는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1605년에는 관위인 미카와노카미를 받았고, 종4위 하의 관위를 받았다. 이듬해인 1606년 그의 관위는 우코노우에곤쇼쇼로 승격되었다.
1607년(게이초 12년) 아버지 유키 히데야스가 사망하자 12세의 나이에 에치젠 후쿠이번 75만 석 (67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611년(게이초 16년) 16세 때 숙부이자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녀 가쓰히메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또한, 그는 ''겐푸쿠'' 의식을 치렀고 히데타다의 이름에서 한자를 받아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되었으며, 그의 관위는 사코노우에곤추쇼로 변경되었고, 관위는 종4위 상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612년부터 1613년까지 후쿠이 번 내에서 여러 수석 가신들 간에 무력 충돌(에치젠 소동)이 있었다. 이 문제는 쇼군가에 의해 어렵게 해결되었는데, 쇼군가는 다다나오의 젊음과 미숙함으로 인해 상황이 통제 불능으로 흘러갔다고 비난했다.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에 참여하였다. 첫 실전인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군졸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장수로서 미숙한 모습을 보여 할아버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12월 4일의 사나다마루 전투에서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군세에 이어 이이 나오타카의 군세와 선봉을 다투며 진격했지만, 사나다마루에 갇힌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에 의해 480명의 전사자를 내는 패배로 끝났다.
이듬해 오사카 여름 전투 때에는 도요토미 측의 장수인 사나다 노부시게 등을 죽이고 오사카성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등 공을 세웠다. 5월 6일의 야오·와카에 전투에서 방관하여 아군을 돕지 않은 것을 이에야스에게 질책받았다. 이튿날 7일의 텐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는 오명을 씻기 위해 불타올라, 무단으로 전선에 진군하여 돌격해 온 노부시게의 군세와 격전을 벌였다. 한때는 후방이 무너져 다다나오의 주변에 병사들이 몰려드는 혼란도 보였지만, 이윽고 반격에 나서 사나다 군을 격파, 니시오 무네쓰구가 노부시게를 쳐서 수급을 확보, 오야도 마사토모도 노모토 우콘을 쳐서, 오사카성에 쳐들어가 제일 먼저 돌입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전후 10일에 니조 성에서 여러 다이묘들이 늘어선 가운데 이에야스에게 천하 제일의 훈공을 칭찬받아, 첫 피어난 찻잔과 다카기 사다무네가 만든 와키자시를 받았으며, 히데타다로부터도 목계가 만든 기러기 그림을 받았다. 23일에는 벤 수급의 수를 3753개라고 보고했고, 여러 다이묘 중에서 1번의 전과였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는 타다나오의 은상은 이것뿐이었고, 동생인 다다마사가 가증된 것과 대조적으로 자신에게 가증이 없었던 것에 불만을 품어, 차츰 막부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1595년(분로쿠 4년) 유키 히데야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센치요마루(仙千代)였다. 1607년(게이초 12년) 아버지 유키 히데야스가 사망하자 12세의 나이로 에치젠 후쿠이번 75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12] 1611년(게이초 16년)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가쓰히메와 결혼했다.[12]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첫 전투인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미숙한 모습을 보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나,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를 죽이는 등의 공을 세웠다.[12] 그러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12]
1616년부터는 손아랫 숙부인 요시나오, 요리노부, 요리후사가 히데타다에게 중용되면서 다다나오의 서열은 그들 아래로 낮아졌다. 에도 성 내 배하식에서 자리가 요리후사 다음이었고, 병에 걸린 이에야스를 문병할 때도 요시나오, 요리노부, 요리후사만 동석이 허락되었다. 1617년에는 요시나오와 요리노부가 권중납언에 임명되어 관위에서도 차이가 났다. 1619년 히데타다가 상락했을 때 후시미성에서 열린 사루가쿠에서도 요시나오와 요리노부는 공경과 함께, 다다나오는 여러 다이묘들과 함께 착석했다. 이러한 냉대에 굴욕감을 느낀 다다나오는 가증이 없었던 것에 대한 불만과 함께 분노를 폭발시켰다.
1621년(겐나 7년) 병을 핑계로 참근교대 의무를 게을리하고,[12] 에도로 가지 않고 세키가하라에 머무르다 에치젠으로 돌아왔다. 1622년(겐나 8년)에는 쇼군의 딸이자 아내인 가쓰히메를 살해하려다 적발되었고, 가신들을 이유 없이 벌주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12] 1622년 3월, 히데타다의 명령으로 에치젠을 출발했지만, 이때도 세키가하라에 머무르고 되돌아갔다. 부젠 고쿠라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아버지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다다나오는 에치젠으로 돌아와 틀어박혀 지내고, 10월 8일에 가쓰히메의 시녀 2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켜 가신들이 모두 의논하여 당을 결성하고 다다나오를 불러도 오지 않는 자가 속출했다.
결국 1623년(겐나 9년) 쇼군 히데타다에 의해 은거를 명령받고 출가하여 동생 다다마사에게 다이묘 직을 물려주었다.[12]
1595년(분로쿠 4년) 유키 히데야스의 아들로 태어난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1607년(게이초 1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에치젠 후쿠이번 75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나,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 미숙함을 보였다.[2] 이듬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를 죽이는 등의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12]
1621년(겐나 7년) 병을 핑계로 참근교대 의무를 게을리하고,[12] 1622년(겐나 8년) 아내 살해를 기획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결국 1623년(겐나 9년) 쇼군 히데타다에 의해 은거를 명령받고 동생 다다마사에게 다이묘 직을 물려준 뒤 출가하여 '''잇파쿠'''(一伯)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처음 3년 동안은 해안의 오기와라 마을에 살았으나, 탈출 우려로 내륙으로 이사했다.[4][5][6] 1650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분고국에 유배되었다.[2] 그의 아들 미쓰나가는 다카다 번으로 옮겨졌고,[2] 마쓰다이라 타다마사는 후쿠이 번을 에도 시대 말까지 유지했다.[2]
2. 1. 유년기 및 번주 취임
1595년(분로쿠 4년) 유키 히데야스의 장남으로 셋쓰국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센치요마루(仙千代)였다. 어머니는 유키 히데야스의 측실 나카가와씨(中川氏)이다. 1603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에도로 가서 숙부이자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처음 알현했는데, 히데타다는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1605년에는 관위인 미카와노카미를 받았고, 종4위 하의 관위를 받았다. 이듬해인 1606년 그의 관위는 우코노우에곤쇼쇼로 승격되었다.1607년(게이초 12년) 아버지 유키 히데야스가 사망하자 12세의 나이에 에치젠 후쿠이번 75만 석 (67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611년(게이초 16년) 16세 때 숙부이자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녀 가쓰히메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또한, 그는 ''겐푸쿠'' 의식을 치렀고 히데타다의 이름에서 한자를 받아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되었으며, 그의 관위는 사코노우에곤추쇼로 변경되었고, 관위는 종4위 상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612년부터 1613년까지 후쿠이 번 내에서 여러 수석 가신들 간에 무력 충돌(에치젠 소동)이 있었다. 이 문제는 쇼군가에 의해 어렵게 해결되었는데, 쇼군가는 다다나오의 젊음과 미숙함으로 인해 상황이 통제 불능으로 흘러갔다고 비난했다.
2. 2. 오사카 전투 참전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에 참여하였다. 첫 실전인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군졸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장수로서 미숙한 모습을 보여 할아버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12월 4일의 사나다마루 전투에서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군세에 이어 이이 나오타카의 군세와 선봉을 다투며 진격했지만, 사나다마루에 갇힌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에 의해 480명의 전사자를 내는 패배로 끝났다.이듬해 오사카 여름 전투 때에는 도요토미 측의 장수인 사나다 노부시게 등을 죽이고 오사카성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등 공을 세웠다. 5월 6일의 야오·와카에 전투에서 방관하여 아군을 돕지 않은 것을 이에야스에게 질책받았다. 이튿날 7일의 텐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는 오명을 씻기 위해 불타올라, 무단으로 전선에 진군하여 돌격해 온 노부시게의 군세와 격전을 벌였다. 한때는 후방이 무너져 다다나오의 주변에 병사들이 몰려드는 혼란도 보였지만, 이윽고 반격에 나서 사나다 군을 격파, 니시오 무네쓰구가 노부시게를 쳐서 수급을 확보, 오야도 마사토모도 노모토 우콘을 쳐서, 오사카성에 쳐들어가 제일 먼저 돌입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전후 10일에 니조 성에서 여러 다이묘들이 늘어선 가운데 이에야스에게 천하 제일의 훈공을 칭찬받아, 첫 피어난 찻잔과 다카기 사다무네가 만든 와키자시를 받았으며, 히데타다로부터도 목계가 만든 기러기 그림을 받았다. 23일에는 벤 수급의 수를 3753개라고 보고했고, 여러 다이묘 중에서 1번의 전과였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는 타다나오의 은상은 이것뿐이었고, 동생인 다다마사가 가증된 것과 대조적으로 자신에게 가증이 없었던 것에 불만을 품어, 차츰 막부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2. 3. 논공행상 불만과 막부와의 갈등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1595년(분로쿠 4년) 유키 히데야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센치요마루(仙千代)였다. 1607년(게이초 12년) 아버지 유키 히데야스가 사망하자 12세의 나이로 에치젠 후쿠이번 75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12] 1611년(게이초 16년)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가쓰히메와 결혼했다.[12]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첫 전투인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미숙한 모습을 보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나,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를 죽이는 등의 공을 세웠다.[12] 그러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12]
1616년부터는 손아랫 숙부인 요시나오, 요리노부, 요리후사가 히데타다에게 중용되면서 다다나오의 서열은 그들 아래로 낮아졌다. 에도 성 내 배하식에서 자리가 요리후사 다음이었고, 병에 걸린 이에야스를 문병할 때도 요시나오, 요리노부, 요리후사만 동석이 허락되었다. 1617년에는 요시나오와 요리노부가 권중납언에 임명되어 관위에서도 차이가 났다. 1619년 히데타다가 상락했을 때 후시미성에서 열린 사루가쿠에서도 요시나오와 요리노부는 공경과 함께, 다다나오는 여러 다이묘들과 함께 착석했다. 이러한 냉대에 굴욕감을 느낀 다다나오는 가증이 없었던 것에 대한 불만과 함께 분노를 폭발시켰다.
1621년(겐나 7년) 병을 핑계로 참근교대 의무를 게을리하고,[12] 에도로 가지 않고 세키가하라에 머무르다 에치젠으로 돌아왔다. 1622년(겐나 8년)에는 쇼군의 딸이자 아내인 가쓰히메를 살해하려다 적발되었고, 가신들을 이유 없이 벌주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12] 1622년 3월, 히데타다의 명령으로 에치젠을 출발했지만, 이때도 세키가하라에 머무르고 되돌아갔다. 부젠 고쿠라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아버지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다다나오는 에치젠으로 돌아와 틀어박혀 지내고, 10월 8일에 가쓰히메의 시녀 2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켜 가신들이 모두 의논하여 당을 결성하고 다다나오를 불러도 오지 않는 자가 속출했다.
결국 1623년(겐나 9년) 쇼군 히데타다에 의해 은거를 명령받고 출가하여 동생 다다마사에게 다이묘 직을 물려주었다.[12]
2. 4. 은거 및 유배
1595년(분로쿠 4년) 유키 히데야스의 아들로 태어난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1607년(게이초 1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에치젠 후쿠이번 75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나, 1614년 오사카 전투에서 미숙함을 보였다.[2] 이듬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를 죽이는 등의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12]1621년(겐나 7년) 병을 핑계로 참근교대 의무를 게을리하고,[12] 1622년(겐나 8년) 아내 살해를 기획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결국 1623년(겐나 9년) 쇼군 히데타다에 의해 은거를 명령받고 동생 다다마사에게 다이묘 직을 물려준 뒤 출가하여 '''잇파쿠'''(一伯)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처음 3년 동안은 해안의 오기와라 마을에 살았으나, 탈출 우려로 내륙으로 이사했다.[4][5][6] 1650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분고국에 유배되었다.[2] 그의 아들 미쓰나가는 다카다 번으로 옮겨졌고,[2] 마쓰다이라 타다마사는 후쿠이 번을 에도 시대 말까지 유지했다.[2]
3. 가족 관계
- 정실 가쓰히메(勝姫) :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녀[7]
- * 장남 마쓰다이라 미쓰나가(松平光長) : 에치고 다카다번주[7]
- * 장녀 가메히메(亀姫) : 다카마쓰노미야 요시히토 친왕(高松宮好仁親王)의 비(妃)[7]
- * 차녀 쓰루히메(鶴姫) : 구조 미치후사의 정실[7]
- 측실
- * 히라가도노[7]
- * 나가미도노[7]
- * 코이토도노[7]
- * 이코쿠도노[7]
- * 차남 나가미 나가요리(永見長頼)[7]
- * 삼남 나가미 나가요시(永見長良)[7]
- * 삼녀 閑[7]
- 아버지: 유키 히데야스[7]
- 어머니: 나카가와 부인[7]
- 정실: 쇼키 -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셋째 딸[7]
- 생모 불명의 자녀
- * 사녀: 칸 - 오구리 마사노리의 처[7]
4. 인물 및 평가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충직에 관한 자료나 실상을 보여주는 1차 자료가 극히 적고, 번정과의 관련이나 생각 등도 밝혀지지 않아, 남겨진 일화·설화에서 그려진 인물상은 실상과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성격도 파악되지 않아, 『후쿠이시사(福井市史)』에서는 "자성이 강건하고, 힘센 사람을 능가한다", 『에치젠인물지(越前人物志)』에서는 "품성이 강건하며", 『도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서는 "이 경(충직)은 강강하다"라고 하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직한 성질로 여겨지지만 자세한 것은 불명확하다.
가증 건으로 쌓인 불만의 배출구 중 하나로 철포·포술에 열중하여, 1612년에 오미국 히코네번 번사·사와무라 가쿠에몬으로부터 이나토미류 포술을 전수받았고, 1618년에 가신 나카가와 우쿄에게 포술 전서인 "직화창지권(直矢倉之巻)"을 준 것이 확인된 한편, 성의 망루에서 통행인을 쐈다는 진위 불명의 소문도 있다. 또한 아라이 하쿠세키는 『한판보』에서 충직은 은상의 불만으로 술에 빠졌다고 기록했으며, 『국사총기(国事叢記)』 「『속편롱기(続片聾記)』 - 충직경어난행지사(忠直卿御乱行之事)」 등에 따르면 1618년경부터 포학한 짓을 반복하게 되었고, 오야마다 다몬이라는 총신에게 명령하여 죄인이나 납치해온 영민을 참살하게 한 뒤, 그 모습을 일국 어전이라고 불린 첩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구경하며 즐겼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진위는 분명하지 않다.
배류지인 분고에서도 진위 불명의 포학 전설이 있으며, 하기와라 거주기인 1624년에 사망한 시녀 오란의 죽음에 즈음하여, 여자 종 18명 중 12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한편 츠모리 거주기에 용무를 맡았던 촌역인들과 친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들은 충직이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 교류를 맺었고, 사후에도 충직의 법요를 계속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들이 쓴 연대기는 충직의 은거 생활을 알 수 있는 사료가 되고 있다.
한편 충직의 선정을 칭찬하는 지역도 있으며, 후쿠이현 사바에시의 구 토바노 지구에서는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하여, 여우·너구리·들새의 서식지로 주민과 여행객의 골칫거리였던 원생림인 토바노를 농촌으로 개척하여, 주민들에게 감사를 받았다. 충직이 배류된 후에도 주민들은 그의 덕을 사모하여, 하치만 신사에 어신체의 하나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충직이 죽은 2년 후인 1652년에 토바의 대표가 규슈까지 가서 충직의 묘소를 참배한 후, 가져온 수호 본존과 그의 영을 모시는 비와 신사까지 세울 정도였으며, 두 신사 모두 현존하고 있다.
5. 이와사 마타베에와의 관계
1617년경,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화가 이와사 마타베를 흥종사 제10대 신간을 통해 교토에서 기타쇼로 불렀다고 한다. 엠포 3년(1675년)에 구로카와 도유가 쓴 수필 『엔페키켄키』에서 후쿠토미 릿키라는 노인의 증언을 기록한 글에 "에치젠 잇파쿠 전하(타다나오의 호)의 눈에 띄어"라는 구절이 있어, 이와사 마타베가 타다나오와 면식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기사를 다룬 쓰지 노부오는 두 사람의 관계는 불분명하다고 했지만, 같은 기사에 주목한 구로다 히데오는 타다나오가 좋아했던 오토기조시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조루리 이야기를 그림 두루마리에 그리게 하려고 마타베를 교토에서 기타쇼로 불렀다고 추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마타베풍 그림 두루마리군(고조루리 그림 두루마리군)』이며, 제작 시작 시기는 1617년경으로 추정된다.
마타베풍 그림 두루마리군 중 『야마나카 토키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조루리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호리에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는 타다나오의 주문이었다고 하며, 마타베는 제자들을 동원하여 그림 두루마리군을 제작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조루리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호리에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는 마타베의 관여가 적다는 견해도 있으며, 제작 시기도 타다나오의 유배 후로 여겨진다. 이는 쓰지의 견해이지만, 구로다는 이견을 제기하며, 『조루리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와 『호리에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도 타다나오 유배 전에 그의 주문을 받아 마타베를 중심으로 하는 공방이 제작했다고 생각하고, 타다나오의 의향을 엿보면서 고조루리 그림 두루마리군을 제작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구로다는 쓰지가 그림 두루마리군의 주문자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주문자를 타다나오로 보고, 5가지 관점에서 타다나오의 관여 없이는 그림 두루마리군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로다는 간에이 5년 2월 길일에 타다나오가 유배지인 분고 쓰모리에서 『구마노 곤겐 연기 그림 두루마리』를 쓰모리 구마노 신사에 봉납한 것을 지적하며, 마타베 공방에 의뢰하여 그림 두루마리를 그리게 하여 신사에 봉납했다고 가정했다. 제작 연대도 특정하여, 하한을 간에이 5년 2월 길일에 특정하고, 상한은 같은 해 초 또는 전년인 간에이 4년 말로 추정하고 있다. 아울러 그림 두루마리군의 순서와 제작 연대도 추정하여, 순서는 『호리에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잔결본)』, 『야마나카 토키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조루리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오구리 한간 그림 두루마리』, 『호리에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호리에 권 쌍지)』, 『무라마츠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 『구마노 곤겐 연기 그림 두루마리』로 추정, 제작 연대의 상한은 마타베가 온 1617년, 하한은 간에이 5년 2월 길일에 정하고 있다.
마타베의 다른 작품은 고조루리 그림 두루마리군 외에 『구 금곡 병풍』, 『36가선 화책』, 『히토마로・관지상』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타다나오가 기타쇼 번주였던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타다나오가 유배된 후에도 마타베는 기타쇼(후쿠이)에 머물렀고, 타다마사가 번주였던 시대에 『이케다 병풍』, 『태평기 본성방 진력도』, 『화한 고사 설화도(화한 고사 인물도권)』 등을 그려, 간에이 14년(1637년)에 에도로 내려갈 때까지 후쿠이에서 제작을 계속했다.
6. 관련 작품
; 소설
- 기쿠치 칸 『충직경행상기』 ISBN 4003106318
- 가이온지 조고로 『마쓰다이라 타다나오』 - 「악인 열전」수록. 분게이슌주(분슌 문고)
- 가이온지 조고로 『에치젠 소동』 - 「열번 소동록」수록. 고단샤(고단샤 문고)
- 가이온지 조고로 『충직경행상기』 - 「호걸조」수록. 분게이슌주(분슌 문고)
- 칸자카 지로 『슬픈 폭군 - 에치젠 재상 타다나오』 - 「우스운 다이묘들」수록. 주오코론신샤(주코 문고), 1995년.
- 아베 류타로 『충직경 어좌선』 - 「충직경 어좌선」수록. 고단샤(고단샤 문고), 2001년.
; 영화
- 『에치젠 소동』 (1916년, 닛카쓰) - 연기: 오타니 키와카
- 『충직경행상기』 (1930년, 닛카쓰) - 연기: 가타오카 지에조
- 『충직경행상기』 (1960년, 다이에 교토) - 연기: 이치카와 라이조
; 텔레비전 드라마
- 『충직경행상기』 (1958년, 닛폰 TV) - 연기: 나카다이 타츠야
- 『충직경행상기』 (1961년, 닛폰 TV) - 연기: 나카야 노보루
- 『봄의 언덕길』 (1971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사사키 이사오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사카모토 료스케
- 『사나다 태평기』 (1985년, NHK 대형 시대극) - 연기: 마사키 신타로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기타 나오키
- 『고 ~공주들의 전국~』 (2011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나미우치 겐고
; 만화
- 야마다 요시히로 『헤우게모노』 (2005년 - 2017년) - 종반에 등장하여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이와사 또베를 돕는다.
6. 1. 소설
기쿠치 칸의 소설 『충직경행상기』(ISBN 4003106318), 가이온지 조고로의 소설 『마쓰다이라 타다나오』(분게이슌주 분슌 문고), 『에치젠 소동』(고단샤 고단샤 문고), 『충직경행상기』(분게이슌주 분슌 문고), 칸자카 지로의 소설 『슬픈 폭군 - 에치젠 재상 타다나오』(주오코론신샤 주코 문고, 1995년), 아베 류타로의 소설 『충직경 어좌선』(고단샤 고단샤 문고, 2001년) 등이 있다.6. 2. 영화
- 『에치젠 소동』 (1916년, 닛카쓰) - 연기: 오타니 키와카
- 『충직경행상기』 (1930년, 닛카쓰) - 연기: 가타오카 지에조
- 『충직경행상기』 (1960년, 다이에 교토) - 연기: 이치카와 라이조
6. 3. 텔레비전 드라마
- 『충직경행상기』 (1958년, 닛폰 TV) - 연기: 나카다이 타츠야
- 『충직경행상기』 (1961년, 닛폰 TV) - 연기: 나카야 노보루
- 『봄의 언덕길』 (1971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사사키 이사오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사카모토 료스케
- 『사나다 태평기』 (1985년, NHK 대형 시대극) - 연기: 마사키 신타로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기타 나오키
- 『고 ~공주들의 전국~』 (2011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나미우치 겐고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1906
[3]
문서
[4]
웹사이트
松平忠直卿居館跡
http://www.oishiimat[...]
一般社団法人 大分市観光協会
[5]
간행물
大分今昔 (24) 滝尾かいわい
http://www.nan-nan.j[...]
大分合同新聞社
2008-01-25
[6]
간행물
大分今昔 (27) 萩原かいわい
http://www.nan-nan.j[...]
大分合同新聞社
2008-02-15
[7]
문서
[8]
웹사이트
松平忠直(1595-1650)
https://www.city.sab[...]
鯖江市
2020-11-07
[9]
웹사이트
松平忠直公廟
https://www.oishiima[...]
一般社団法人大分市観光協会
2020-11-07
[10]
웹사이트
ザ・AZABU 第44号
https://www.city.min[...]
港区麻布地区総合支所
2020-11-07
[11]
웹사이트
有名な茶道具に「初花茶入」があるが、これによく似た名前の「初花茶壺」があって、本に載っているものは逸話など混乱しているように思う。どちらがどちらの逸話なのかはっきり知りたい
https://crd.ndl.go.j[...]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12]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