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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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조는 조선 순조의 장남으로, 1809년에 태어나 1830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1827년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3년 만에 요절했다. 사후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고종 때 문조 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능은 동구릉의 수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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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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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휘 | 이영(李旲) |
이름 (한글) | 영 |
이름 (한자) | 旲 |
자 | 덕인(德人) |
시호 | 효명(孝明), 강목왕(康穆王, 청나라에서 받음) |
묘호 | 문조(文祖, 사후 추존) |
출생 | 1809년 9월 18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사망 | 1830년 6월 25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희정당 |
배우자 | 신정왕후 |
자녀 | 헌종 |
아버지 | 순조 |
어머니 | 순원왕후 |
왕세자 책봉 | 1812년 7월 6일 |
섭정 | 1827년 1월 17일 ~ 1830년 5월 6일 |
능 | 수릉 |
능 위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왕족 정보 | |
작위 | 왕세자 |
씨족 | 전주 이씨 |
존호 (전체) |
2. 생애
문조는 순조의 맏아들이자 신정왕후의 남편, 헌종의 아버지이다.[1] 1812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17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819년 조만영의 딸 조씨(신정왕후)와 가례를 올렸다.[1]
문학과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 여러 궁중 정재를 직접 창작하였고, 이러한 궁중 의례와 예술을 통해 왕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아버지 순조의 건강 문제로 18세 때인 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2] 대리청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 인물들을 등용하며 여러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비록 외척 세력 일부와는 대립하기도 했으나, 친족 등용을 피하고 재능 있는 인물을 등용하려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인 1830년에 22세(만 20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2]
사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익종(翼宗)이라는 묘호로 추존되었고, 1899년(광무 3년) 고종에 의해 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에 있는 수릉(綏陵)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강목왕(康穆王)'이었으나,[5]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라 하여 치욕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실록을 비롯한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이 시호는 삭제되었고, 외교 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事大) 관계 속에서도 조선 지배층 내부에 뿌리 깊게 남아있던 반청 감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5]
2. 1. 탄생
이름은 '''영'''(旲)이며, 1809년(순조 9년)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와 순원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6]왕비가 적통 원자를 낳은 것은 명성왕후가 숙종을 낳은 이후 약 150년 만의 경사였다. 이에 창덕궁 인정전에서는 백관들이 모여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하례를 올렸다.[7] 순조는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법적 어머니인 효의왕후, 그리고 생모인 수빈 박씨에게 직접 축하의 글(치사, 전문)과 선물(표리)을 올리며 기쁨을 나누었다. 특히 생모 수빈 박씨에게는 '저하(邸下)'라는 존칭을 사용하도록 명하며 각별한 예우를 보였다.[7] 또한 원자의 탄생을 기념하여 죄수 석방, 세금 감면 등 백성들을 위한 구휼 조치를 시행하도록 지시했다.[7] 순조는 왕실 어른들께 올린 글에서 원자의 탄생으로 종묘사직이 반석 위에 놓이게 되었다며 기쁨을 표현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2. 2. 세자 책봉
1812년(순조 12년) 7월 6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8]1817년(순조 17년) 3월,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성균관에 입학하였다.[9] 이때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를 기념하여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7호로 지정되었다.[10] 당시 세자의 나이는 9세였으며, 자질이 온순하고 단아하며 예의범절이 성숙했다고 전해진다. 입학례에서 박사 남공철과의 문답이 《순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명륜당에 앉아 《소학》(小學)의 제사(題辭)를 강(講)하였는데, ‘오직 성인(聖人)만이 천성을 온전히 보존한 자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박사 남공철에게 묻기를,
::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까?"
: 하니, 박사가 일어서서 대답하기를,
:: "저하(邸下)의 이 물으심은 참으로 종묘 사직과 신민의 복입니다. 세자께서 어린 나이에 입학하여 이미 성인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는 뜻이 있으시니, 참으로 이 마음만 잘 미루어 확충하신다면 요(堯)임금도 될 수 있고 순(舜)임금도 될 수 있으니 지금부터가 그 시작입니다." 하였다.
: 세자가 또 묻기를,
:: "여기에서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라.’고 하였는데, 효도를 하려면 무엇부터 먼저 하여야 합니까?"
: 하니, 박사가 대답하기를,
:: "효도를 하는 길에 대하여 그 허다한 절목을 논하자면 갑자기 다 대답해 올릴 수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덕을 닦고 착한 행실을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에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수신(修身)은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인 만큼 효도의 큰 근본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 하니, 세자가 기쁘게 받아들였다.
:
: 이때 세자의 보령은 9세가 되어 비로소 입학하였는데, 자질이 온순 단아하고 예의 범절이 숙성하였다. 선성(先聖)을 지알(祗謁)하는데 주선(周旋)이 법도에 맞았고, 강독할 때에 글 읽는 소리가 가락에 맞았으며, 천인(天人) · 성명(性命)의 토론과 문답에 있어서 마치 덕을 완성한 것처럼 찬란하게 이루어졌으니 시종하던 신하들과 많은 선비들이 다리[橋]를 에워싸고, 구경한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송축하였다.
:: — 《순조실록》 20권,
순조 17년(1817년 청 가경(嘉慶) 22년) 3월 11일 (갑인)
1819년(순조 19년) 3월, 경희궁 경현당에서 관례를 치르고, 같은 해 10월 조만영의 딸 조씨(신정왕후)와 가례를 올렸다.[1]
2. 3. 대리청정
1827년(순조 27년) 2월, 순조의 명으로 인정전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11][12] 당시 순조는 세도정치로 인해 안동 김씨에게 집중된 국정의 주도권을 바로잡고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이에 효명세자는 세자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세력을 비롯하여 여러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며, 이인좌의 난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소론 계열 인사들을 등용하여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다. 같은 해 7월 18일에는 아들 헌종이 태어났다.[13]효명세자는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창덕궁 안에 사대부의 집을 본떠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하였고, 글과 춤에 재능이 있어 직접 궁중 무용인 춘앵전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하들에게 명하여 구양수와 소식의 글을 가려 뽑아 『사문조영(文史咀英)』이라는 문집을 편찬, 간행하도록 하였다.
1828년(순조 28년) 2월에는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를 기념하는 작헌례(酌獻禮, 잔치를 열어 술잔을 올리는 의례)를 행하였고,[14] 다음 해인 1829년(순조 29년) 2월 9일에는 창경궁 명정전에서 아버지 순조의 재위 30주년과 40세를 기념하는 작헌례와 함께 대규모의 진하연(進賀宴,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는 잔치)을 열었다.[15] 이러한 행사를 통해 부모에 대한 효를 실천함과 동시에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때 효명세자는 연회에 사용될 진찬시(進饌詩)와 악장(樂章)의 가사를 직접 지었으며, 송나라의 장생보연지악(長生寶宴之樂)을 바탕으로 새로운 궁중 무용인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를 만들어 순조의 진찬연에서 선보였다.[16]
왕과 신하들은 세자의 학문 진흥책과 여러 당파를 아우르는 균형 잡힌 정국 운영을 보며 그가 장차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정을 쇄신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4년 만인 1830년(순조 30년)에 22세(만 20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2]
2. 4. 최후
1830년 5월 6일(음력), 창덕궁 희정당 서쪽 방에서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7] 아버지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는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당시 기록인 《효명세자 지문(孝明世子誌文)》에는 임금 부부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백성들까지 모두 세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순조는 아들이 죽은 지 두 달여가 지난 7월 12일, 빈궁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지내며 슬픔을 담은 제문을 지었다. 제문에는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비통한 심정과 함께, 왕세자로서 기대를 모았던 아들의 요절로 인해 위태로워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사후 시호는 효명(孝明)으로 정해졌다. 묘소의 이름은 연경원(延慶園)이라 하였고, 사당의 이름은 문호묘(文祜廟)라 하여 한성부 북부 순화방의 창의궁(彰義宮) 터 근처, 의소세손의 사당 가까이에 세워졌다.[1] 효명은 순조의 맏아들이자 신정왕후의 남편이며, 헌종의 아버지이다.[1]
1827년부터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맡아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 인물들을 중용하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으나, 불과 3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2] 그의 죽음은 왕권 강화와 정치 개혁을 기대했던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주었다.
아들 헌종이 즉위한 후 익종(翼宗)이라는 묘호로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 때 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수릉(綏陵)이다.
한편, 청나라에서는 '강목왕(康穆王)'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5], 조선에서는 이를 치욕으로 여겨 실록을 비롯한 공식 기록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 관계 속에서도 조선 왕실과 지배층이 가지고 있던 청나라에 대한 깊은 반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5]
3. 사후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는 원손(헌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18] 그러나 효명세자가 죽고 2년 뒤인 1832년, 그의 누이동생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가 연이어 사망하자 순조는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져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였다.[19]
효명세자는 1830년 사망 후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천장산(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 부근)의 연경묘(延慶墓)에 안장되었다. 이후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였다. 능은 풍수지리상의 문제로 1846년과 1855년 두 차례 이장되어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세자는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여 제작된 6폭 화첩에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3] 이는 조선 시대 궁중 기록화의 한 예이다. 또한, 현존하는 조선 정재 53종 가운데 26종이 그의 손에서 창작되거나 정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만든 '춘앵전'은 부드럽고 시적인 춤사위로 유명하여 오늘날까지 가장 사랑받는 전통 궁중 무용 중 하나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효명세자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 궁중 의례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효명세자는 조선의 왕족 중에서 매우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3. 1. 추존
세자의 시호는 '''효명'''(孝明)이며, 뜻을 이어 사업을 이루었다는 '효(孝)'와 사방에 빛을 비춘다는 '명(明)'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다.[20] 익종의 신주는 종묘 정전에 배향되었는데, 이는 추존 국왕의 신주를 영녕전에 모시는 관례를 깬 것으로 추존 국왕 중 유일하게 정전에 배향된 사례이다.1863년(철종 14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21] 1899년(광무 3년), 고종에 의해 '''익황제'''(翼皇帝)로 추존되면서 익종에서 '''문조'''(文祖)로 묘호가 개칭되었다.[22]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수릉(綏陵)으로, 아내 신정왕후와 합장되어 있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강목왕(康穆王)’이다.[5] 조선에서는 이 시호를 치욕으로 여겨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식 기록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청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은 사실만을 기록할 뿐 시호 자체는 기록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에 사대(事大)하며 공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반감이 깊었기 때문이다.[5]
3. 2. 능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수릉(綏陵)으로, 아내 신정왕후와 합장되어 있다.[22]1830년 승하 당시 세자의 시호는 '''효명'''(孝明)이었다. 이후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다.[20] 익종의 신주는 종묘 정전에 배향되었는데, 이는 추존 국왕은 영녕전에 모시는 관례를 깨고 추존 국왕 중 유일하게 정전에 배향된 경우이다. 1899년(광무 3년)에는 양자인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가 익종에서 '''문조'''(文祖)로 다시 바뀌었다.[22]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강목왕'''(康穆王)이다.[5]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며 이 시호를 받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이 시호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외교 문서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5]
4. 평가
세도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1827년 대리청정을 시작하며[11][12] 외척인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처가인 풍양 조씨와 이인좌의 난 이후 정계에서 밀려났던 소론 인사들을 등용하는 등, 특정 세력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 다양한 인재를 활용하여 국정을 쇄신하고자 하였다.[13] 이러한 노력은 당시 왕과 신하들로부터 장차 왕권 강화와 국정 쇄신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또한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 궁중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창덕궁 안에 사대부 가옥을 본떠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하고, 직접 궁중 무용인 춘앵전을 창작했으며[16], 신하들에게 명하여 구양수와 소식의 글을 모아 『사문조영(文史咀英)』을 편찬하게 하는 등 문화 진흥에 힘썼다. 특히 현존하는 53종의 조선 정재(呈才) 중 26종이 효명세자의 작품이거나 그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만든 춘앵전은 대표적인 궁중 무용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효명세자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 궁중 의례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부모에 대한 효심도 깊어 1828년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신과 1829년 아버지 순조의 재위 30주년 및 40세 생신을 맞아 성대한 진찬연(進饌宴)을 열었다.[14][15] 이때 연회에 사용된 악장과 시를 직접 짓고, 송나라의 고사를 바탕으로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를 만들어 공연하게 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16]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불과 4년 만에 요절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의 짧은 생애와 갑작스러운 죽음은 조선 후기 역사에서 아쉬움으로 남았다.
5.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조부 | 정조 | 1752년 ~ 1800년 | 제22대 국왕 |
조모 | 수빈 박씨 | 1770년 ~ 1822년 | |
외조부 | 김조순 | 1765년 ~ 1832년 | |
외조모 |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 | 1766년 ~ 1828년 | |
부 | 순조 | 1790년 ~ 1834년 | 제23대 국왕 |
모 | 순원왕후 김씨 | 1789년 ~ 1857년 | |
왕비 | 신정왕후 조씨 | 1809년 ~ 1890년 | 풍양 조씨 |
아들 | 헌종 | 1827년 ~ 1849년 | 제24대 국왕 |
양자 | 고종 | 1852년 ~ 1919년 | 제26대 국왕 철종 사후 신정왕후가 입양 |
- 아들인 헌종은 후사 없이 요절하였고, 딸(문조의 손녀) 역시 일찍 사망하여 직계 후손은 없다.
6. 저서
- 《경헌집 (敬軒集)》 12권, 시집 모음
- 《담여헌시집 (淡如軒詩集)》, 시집 모음
- 《경헌시초 (敬軒詩草)》
- 《학석집 (鶴石集)》 6권, 문집
7. 관련 문화재
8. 미디어에서
참조
[1]
웹사이트
효명세자
http://nationalcultu[...]
[2]
웹사이트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http://weekly.donga.[...]
2011-01-31
[3]
웹사이트
동궐도에 숨어있는 효명세자에 대한 배려
https://www.kyobosto[...]
[4]
뉴스
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https://www.chosun.c[...]
2007-09-11
[5]
뉴스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www.chosunonl[...]
2007-09-16
[6]
서적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9일 (정유) 원자가 탄생하다
[7]
서적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15일 (계묘) 왕대비전 · 혜경궁 · 가순궁에 올린 치사와 전문의 내용
[8]
서적
순조실록 16권, 순조 12년(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7월 6일 (병자) 인정전에 나아가 왕세자를 책봉하였다.
[9]
서적
순조실록 20권, 순조 17년(1817년 청 가경(嘉慶) 22년) 3월 11일 (갑인) 왕세자가 문묘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다
[10]
간행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 고시
서울특별시장
2010-06-17
[11]
서적
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왕세자에게 서무를 대리하도록 하다
[12]
서적
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18일 (갑자) 인정전에서 하례를 받고 세자 청청에 관한 반교문을 내리다
[13]
서적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세자빈이 원손을 낳자 대신들이 하례하다
[14]
서적
순조실록 30권, 순조 28년(1828년 청 도광(道光) 8년) 2월 12일 (임오) 왕세자가 대전과 중궁전에게 술잔을 올리다
[15]
서적
순조실록 30권, 순조 29년(1829년 청 도광(道光) 9년) 2월 9일 (계유) 명정전에서 술잔을 받다
[16]
서적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17]
서적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5월 6일 (임술) 왕세자가 죽다.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왕세자가 창덕궁의 희정당에서 훙서하였다.
[18]
서적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9월 15일 (경오) 왕세손을 책봉하다
[19]
서적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20]
서적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19일 (경진) 대행 대왕과 효명세자의 시호를 정하다
[21]
서적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대왕대비가 국상 중에 정사를 대리할 사람을 정하고 철종의 뒤를 흥선군의 두 번째 아들로 정하다
[22]
서적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12월 7일 태조, 장종, 정종, 순조, 익종 황제를 소급하여 높일 묘호와 황제 칭호를 의정하여 상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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