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철종 (조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철종은 조선의 제25대 왕으로, 1831년에 태어나 1863년에 사망했다. 그는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였으며,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에 의해 강화도에서 한성으로 불려와 왕위에 올랐다. 철종은 어린 시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즉위 후에는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했으나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 정치로 인해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재위 기간 동안 삼정의 문란, 농민 봉기, 동학의 창시 등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었으며, 서양 열강의 침략 위협에 직면했다. 그는 1863년 후사 없이 사망했고, 고종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강화군 - 풍계군
    풍계군 이당은 조선 후기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아들이며 은전군의 양자가 되었으나, 모역 사건과 난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고, 자녀가 없어 서자 익평군을 두었으며 사후 추봉, 재입적되었으나 관련 기록 부족으로 삶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 강화군 - 이철득
    조선 후기 왕족 이철득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로, 상계군 세자 추대 사건과 여러 의혹에 연루되어 유배 생활을 하다 형의 죽음 이후 석방되었으나, 이후 행적은 미상이다.
  • 19세기 한국의 군주 - 고종 (대한제국)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며,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열강의 각축 속에서 국권을 잃고 강제 퇴위당했다.
  • 19세기 한국의 군주 - 문조 (조선)
    문조는 조선의 추존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순조의 맏아들로서 효명세자에 책봉되어 대리청정을 맡아 국정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며, 문학과 예술에 능해 왕실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사후 익종으로 추존되고 고종 때 문조 익황제로 다시 추존되었다.
  • 조선 순조의 자녀 - 영온옹주
    영온옹주는 조선 순조와 숙의 박씨의 외동딸이자 효명세자의 이복 여동생으로, 11세에 옹주로 책봉되었으나 병약하여 13세에 요절하였으며 효명세자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 조선 순조의 자녀 - 문조 (조선)
    문조는 조선의 추존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순조의 맏아들로서 효명세자에 책봉되어 대리청정을 맡아 국정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며, 문학과 예술에 능해 왕실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사후 익종으로 추존되고 고종 때 문조 익황제로 다시 추존되었다.
철종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61년 철종 어진 (보물 1492호)
1861년 철종 어진 (보물 1492호)[http://sillok.history.go.kr/id/kya_11203022_001 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 13권, 1861년 음력 3월 22일 1번째기사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 of King Cheoljong, vol. 13, 01 May 1861, entry 1)]
이원범(李元範) → 이변(李昪)
도승(道升)
묘호철종(哲宗)
시호조선: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대한제국: 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文顯武成獻仁英孝成章帝)
청나라: 충경(忠敬)
능호예릉(睿陵)
출생일1831년 7월 25일
출생지한성 경행방
사망일1864년 1월 16일
사망지창덕궁 대조전
매장지고양시 서삼릉
왕조전주 이씨
종교유교 (성리학)
재위
즉위일1849년 7월 28일
퇴위일1864년 1월 16일
섭정순원왕후 (1849–1851)
계승자고종
전임자헌종
가계
아버지전계대원군 (친부)
순조 (양부)
어머니용성부대부인 (친모)
순원왕후 (양모)
배우자철인왕후 (1851년)
자녀이융준
영혜옹주
기타
관련항목강화도령

2. 어린 시절

철종의 주요 가계도


철종은 1831년(순조 31년) 7월 25일(음력 6월 17일)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현 서울 종로구) 사제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범이었으며, 왕위에 즉위한 후에 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서자였고, 어머니 용성부대부인 염씨는 전계대원군의 첩으로 평민 염성화의 딸이었다.[6][7][8]

철종의 가계는 조선 왕실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영조이다. 할아버지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 동생이었으나, 1786년 반역 혐의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은언군은 부인과 며느리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9][10]

colspan="2" |본관생년부모비고
전계대원군전주1785년 - 1841년은언군[112], 전산군부인 이씨영조의 증손자
용성부대부인 염씨용담1793년 - 1834년염성화[113], 상주 지씨염덕석의 손녀



1836년 남응중이 은언군의 손자 중 한 명을 왕으로 옹립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고,[14][15] 1844년에는 철종의 이복 형 이원경이 민진용 등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 처형되었다. 이원경의 가족은 연좌제에 의해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16][6]

철종은 어렸을 때 ''천자문''을 배웠고, ''자치통감''과 ''소학''의 입문서를 읽었지만,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공부를 중단했다.[6][13]

강화도로 유배된 후, 철종의 가족은 강화부 유수의 감시와 주민들의 멸시를 받으며 생활했다. 훗날 왕이 된 철종은 자신을 모욕했던 주민을 벌하지 않았고, 자신을 가혹하게 감시했던 유수를 승정원 승지에 임명하기도 했다.

철종의 가족이 살았던 강화도의 잠저는 현재 용흥궁이라 불리며,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관청리 441번지)에 있다.[103][104]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재건하고 용흥궁이라 하였다.[104]


2. 1. 출생과 가계

철종의 가계는 조선 왕실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영조이다. 할아버지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 동생이었으나, 1786년 반역 혐의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은언군은 부인과 며느리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9][10]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였으며, 어머니 용성부대부인 염씨는 평민 염성화의 딸이자 전계대원군의 첩이었다.[6][7][8]

colspan="2" |본관생년부모비고
법부순조 숙황제전주1790년 - 1834년정조 선황제, 현목수비 박씨제23대 국왕
법모순원숙황후 김씨안동1789년 - 1857년영안부원군 김조순, 청양부부인 심씨명경왕대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전계대원군전주1785년 - 1841년은언군[112], 전산군부인 이씨영조의 증손자
용성부대부인 염씨용담1793년 - 1834년염성화[113], 상주 지씨염덕석의 손녀



2. 1. 1. 출생과 성장

철종은 1831년(순조 31년) 7월 25일(음력 6월 17일)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 사제에서 셋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범이었으며, 변이라는 이름은 그가 왕위에 즉위한 후에 개명한 것이다. 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이인의 서자인 전계대원군 이광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로 부친의 첩실이었다.

colspan="2" |본관생년부모비고
전계대원군전주1785년 - 1841년은언군[112], 전산군부인 이씨영조의 증손자
용성부대부인 염씨용담1793년 - 1834년염성화[113], 상주 지씨염덕석의 손녀



철종은 이원범으로 태어났으며,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이자 막내 아들이자 조선 영조의 증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후궁이었으며, 평민 염성화의 딸이었고, 용담 염씨 가문 출신이었다.[6][7][8]

할아버지 은언군은 가톨릭 신자였던 부인과 며느리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9][10] 조선 순조가 1822년 은언군의 자녀들을 사면할 때까지, 이들은 섬에 갇혀 지냈다.[11] 은언군의 아들 이광은 한성으로 돌아와 생활했다.[12] 철종은 어렸을 때 ''천자문''을 배웠고, 나중에는 ''자치통감''과 ''소학''의 입문서를 읽었지만, 그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그 후 몇 년 동안 공부를 중단했다.[6][13]

1836년, 남응중은 은언군의 손자 중 한 명을 옹립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4][15] 1844년 헌종의 비 효현왕후가 죽었을 때, 민진용이 철종의 이복 형인 이원경을 옹립하려다 발각되었고, 이원경은 처형되었다. 이원경의 가족은 연좌제에 의해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16][6]

2. 1. 2. 조부 은언군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홍국영이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정조의 후사로 추대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역모로 몰려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9] 1801년(신유박해) 정순왕후가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를 비밀리에 신봉한 것을 빌미로 은언군을 사사하였다.[10]

2. 1. 3. 아버지 이광

아버지 이광은 상계군 추대 사건, 신유박해, 은언군의 서자라는 점 때문에 왕족으로서 작위를 받지 못하고 교동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 후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생활하다가 1830년에 강화도에서 방면되었고, 1831년 한성 경행방 사제에서 첩실인 염씨에게서 원범(철종)을 얻었다.[112] 정조의 이복 동생이자 서얼인 은언군의 서자 전계대원군염씨의 셋째 아들이었다. 은언군에게는 본래 아들이 셋 있었지만, 두 아들은 권력 다툼의 희생이 되었고, 전계대원군만 살아남았다. 전계대원군에게도 아들 셋이 있었지만, 장남 회평군은 자신의 추대 사건으로 인해 처형되었고, 이로 인해 원범(훗날 철종) 등은 연좌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아버지 전계대원군은언군의 첩 전산군부인 이씨 소생의 아들이었고, 철종 자신도 전계대원군의 첩 소생의 서자였다.

2. 2. 강화도 유배 생활

1836년(헌종 2) '남응중 역모사건'으로 인해[100][101] 철종(원범) 일족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844년(헌종 10) 철종(원범)의 이복형 이원경(또는 이명)이 '민진용 역모사건'에 가담하였다가 발각되어 사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102] 이 일로 인해 아버지 이광을 포함한 철종 일가는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이후에도 철종의 가족들은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그의 일가는 부임해오는 강화부 유수의 감시 및 주민들의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철종실록》의 철종 행장에 의하면 그가 강화도에 있을 당시, 한번은 그가 살던 동리에 완악하고 패려한 자가 술에 취해 그의 집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오만한 말과 모욕을 가했지만, 후일 그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강화부 유수로 부임한 어떤 유수가 방어 및 지킴(방수)을 목적으로 그의 일가를 감시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므로 집사람들이 이를 고통스럽게 여겼지만, 왕위에 오른 철종은 그 유수를 오히려 승정원 승지에 임명하였다 한다.

아버지 이광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이복형제인(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자였기에 작위조차 없었다. 아버지 이광은 아들 철종이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뒤에야 전계군으로 추증되고,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 철종은 아버지 대부터 농토를 얻어 농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일각에서는 그를 가리켜 '강화도령'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2. 3. 잠저 용흥궁

강화도로 이주한 철종의 가족이 살았던 잠저는 현재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관청리 441번지)에 있으며, 용흥궁이라 불린다.[103][104]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104]

3. 즉위와 치세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한성으로 불려와 음력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음력 6월 9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105]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105] 철종의 즉위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관례를 벗어난 것이었다.[105] 철종은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과 같은 항렬이었다.

철종은 선천적으로 병약하고 어리숙하였으며, 안동 김씨의 권세에 휘둘려 관리 한 사람을 뽑는 데에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였고, 아버지 전계대원군은언군의 서자였다. 때문에 재위 기간 중 사대부 가문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었다.

1851년(철종 2년)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철인왕후)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더욱 강화되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실권은 안동 김씨 세력에게 있었다.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조선 통치 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1860년 최제우동학을 창시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동학을 탄압하고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106]

3. 1. 즉위

1849년 (헌종 15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한성으로 불려와 음력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음력 6월 9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105] 철종의 즉위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관례를 벗어난 것이었다.[105] 철종은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과 같은 항렬이었다.

철종은 선천적으로 병약하고 어리숙하였다. 게다가 안동 김씨의 권세에 휘둘려 관리 한 사람을 뽑는 데에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였고, 아버지 전계대원군은언군의 서자였다. 서자의 손자인 서출인데다가 본인도 서자였고,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재위 기간 중 사대부 가문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었다. 조정에선 이러한 행위에 장형을 가하고 벌금을 부과하였으나,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를 서자, 서출, 강화도령이라며 조롱하고 비하하는 발언을 암암리에 계속하였다.

헌종이 1849년에 승하하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정조의 왕통은 끊어지게 되었다. 일부 신하들은 먼 친척인 이하전(李夏銓|이하전중국어)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8세였고,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며, 헌종과는 11촌간이었다. 헌종의 할머니인 순원왕후(순조의 비)는 가까운 친척 중에서 직접 다음 임금을 선택하고자 했다. 순원왕후는 헌종의 재종사촌이자 영조의 몇 안 되는 후손 중 한 명인 이원범을 선택했다. 그녀는 그를 왕세자로 삼기로 결정하고, 관리들을 보내 그 가족에게 강화도에서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이원범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농민으로 시골에서 살았다.[4] 그와 그의 가족은 왕의 사신이 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왕대비는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정원용중국어)을 보내 왕대비의 명을 전달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수도로 옮기도록 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이 한강을 건너려 할 때, 마치 군주를 기다리는 듯한 양떼가 무릎을 꿇었는데, 이는 길조로 여겨졌다. 그들이 수도에 들어가려 할 때, 시민들은 열렬한 환호로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6]

이원범이 궁에 도착하자, 그는 처음에는 "덕완군"(德完君|덕완군중국어)으로 봉해졌고, 은언군의 후손들은 다시 왕족으로 여겨졌다.[17] 철종의 부모는 생전에 왕족의 작위를 받지 못했으므로, 각각 전계대원군용성부대부인으로 추존되었다.[18][19]

1849년 7월 28일, 철종은 창덕궁에서 즉위했고, 순원왕후가 2년 동안 섭정을 맡았다.[21][22]

3. 2. 즉위 초반과 섭정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음력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 이튿날인 음력 6월 9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105] 1851년(철종 2년)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철인왕후)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더욱 강화되었다.

3. 3. 친정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실권은 안동 김씨 세력에게 있었다.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1854년 철종 5년에는 제주도의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육지로 상경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받을 수 있도록, 승정원의 관리가 제주도로 파견되어 합격증서, 교지, 어사화를 지급하게도 하였다.[106]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가 강하여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조선 통치 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이때 발표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都結)[108] 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3. 4. 동학과 민란

1860년 최제우동학을 창시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동학을 탄압하고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106] 최제우 처형 이후 동학에서는 상소와 연판장을 올려 교주가 역적이 아니라며 신원을 요구하였다.[109]

1862년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같은 해 1월에는 경상도 진주에서 향리, 아전들의 착취에 견디지 못하고 난이 발생하였으나 곧 관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1862년 9월 진주 민란의 자극을 받아 제주도에서 강제검(姜悌儉, ?~1863)과 김흥채(金興采, ?~1863) 등을 중심으로 민란이 발생하였다.[110] 이들은 조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 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봉기하였다. 9월, 10월, 11월에 걸쳐 3차례 봉기하였고, 3차 봉기에는 제주관아를 점령하여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진주 민란과 제주 민란 당시 공격 대상은 주로 세금을 거두는 향리와 아전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1863년 1월 제주관아를 점령했던 봉기는 진압되고, 강제검과 김흥채는 체포되어 압송 후 처형되었다.

1862년 5월,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후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이때 발표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都結)[108]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 개혁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시행되지 못했다.

4. 외교와 국제 정세

조선은 수 세기 동안 쇄국 정책을 시행했고, 철종 역시 이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철종 재위 기간 동안 유럽, 미국, 러시아 제국의 선박들이 조선 영해에 자주 나타났다(최소 20건 기록).[33]


  • 1850년, 외국 선박(국적 불명)이 강원도 울진군에 나타났고, 떠나기 전 포격으로 조선 관료 몇 명이 사망했다.[34]
  • 1851년, 청나라 사람들을 태운 프랑스 상선이 제주도를 방문했다.[35]
  • 1852년, 미국 포경선경상도 동래에 정박했고, 처음에는 현지인들이 미국인들과 소통할 수 없었지만, 난파된 후 구조된 일본인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36]
  • 1854년, 러시아 프리깃 팔라다가 탐사를 위해 두만강에 들어와 원산을 "라자레프 항구"라고 명명했고, 이 과정에서 외국 선박을 구경하던 현지 주민들이 총에 맞았다는 보고가 있었다.[37]
  • 1855년, 프랑스는 '비르지니'라는 이름의 프리깃을 타고 부산에서 두만강까지 조선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몇몇 섬의 이름을 지었고, 같은 해 '실비아'라는 이름의 영국 선박도 부산에 도착했다.[38]
  • 1856년, 크림 전쟁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충청도황해도의 일부 해안 도시를 약탈한 프랑스 군인들이 수백 명 있었다.[39][40][41]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영불 연합군에 의해 침략당하고 원명원이 약탈당하고 불탔다. 베이징은 조선과 가까웠고, 이 소식이 퍼지면서 조선에 동요를 일으켰다. 일부 귀족과 관리들은 한성부에서 도망갔고,[42] 사람들은 외국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종종 십자가를 착용했다. 철종은 청나라로부터 더 많은 소식을 얻기 위해 함풍제를 방문하기 위해 여러 사신을 보냈는데, 함풍제는 당시 열하로 피신한 상태였다.[43][44] 전투 이후 유럽 국가들은 중국에서 몇 가지 특권을 얻었고, 조선은 중국의 조공 체제에 있었기에, 이 국가들은 조선에서도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제국은 육군과 해군을 통해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5. 말년과 사후

철종은 몸이 약했고,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뜻을 펼 수 없어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여 건강이 나빠졌다. 1861년 이후 병석에 눕거나 의원의 진찰을 받으며 정무를 겨우 보았고, 1863년 12월, 재위 14년 만에 33세로 후사 없이 사망했다.[98] 강화도 생활을 그리워했으며, 능은 예릉이다.

1864년 1월 16일(1863년 음력 12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한 후,[98] 신정왕후와 대신들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고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이로써 효종의 직계 남자 후손은 단절되었다.

청나라는 "충경왕(忠敬王)"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98] 조선 국왕이 순종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여겨져 재위 중 공식 기록에서 철저히 제거되었고, 외교 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98] 묘호는 철종(哲宗)이며,[111] 정식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 '충경왕'은 청과의 외교 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예릉이다.

1908년(융희 2년), 순종은 철종을 장황제(章皇帝)로 추존했고,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이다.

5. 1. 말년

원래 몸이 병약한 데다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98]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누워있거나 의원의 진찰을 받으면서 겨우 정무를 결재하였다.

조정에서 연회를 열 때나, 후궁, 기녀들과 만찬, 음주를 할 때에도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달려나가 슬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황현은 철종을 가리켜 '철종은 선천적으로 연약하고 아둔하였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1863년 12월, 재위 14년, 33세(만 나이)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강화도에서의 생활을 매우 그리워했다고 한다. 능묘는 예릉(睿陵)이다.

5. 2. 사망

1864년 1월 16일(1863년 음력 12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98] 재위 14년 만이었다. 철종은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신정왕후와 대신들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훗날의 고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철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직계 남자 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철종은 생전에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강화도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능묘는 예릉이다.

청나라로부터 "충경왕(忠敬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98], 이는 조선 국왕이 순종하기를 바라는 청나라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호는 재위 중의 공식 기록에서 철저하게 제거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 조선 국왕의 행적, 《능지문》 등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삭제되었고, 외교 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98] 이는 오랑캐로 여긴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를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으로,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에 조공책봉을 통한 사대를 행하며 공손한 자세를 취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반발심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 3. 사후

묘호는 슬기롭고 명석하다는 의미의 철종(哲宗)이다.[111] 정식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예릉이다.

1908년(융희 2년), 순종정조의 양부인 진종과 고종의 양형 헌종과 양숙부인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여, 철종은 사후 장황제(章皇帝)가 되었다.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6. 가족 관계



구분이름본관생몰년부모비고
법부순조 숙황제전주1790년 - 1834년정조 선황제, 현목수비 박씨제23대 국왕
법모순원숙황후 김씨안동1789년 - 1857년영안부원군 김조순,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명경왕대비
전계대원군전주1785년 - 1841년은언군, 전산군부인 이씨영조의 증손자
용성부대부인 염씨용담1793년 - 1834년염성화, 상주 지씨염덕석의 손녀
왕비철인장황후 김씨안동1837년 - 1878년영은부원군 김문근, 흥양부부인 여흥 민씨명순대비, 1908년 황후로 추존



작호본관생몰년부모비고
귀인귀인 박씨밀양1827년 - 1889년미상1854년 귀인 봉작
귀인귀인 조씨풍양1842년 - 1866년미상1859년 귀인 봉작
귀인귀인 이씨미상미상미상
숙의숙의 방씨온양미상 - 1878년미상1853년 숙의 봉작
숙의숙의 범씨금성1838년 - 1883년범원식, 미상1866년 숙의 봉작
숙의숙의 김씨김해1833년 - 미상김치욱, 미상1899년 숙의 봉작
궁인궁인 이씨미상미상미상
궁인궁인 박씨미상미상미상



군호이름생몰년생모비고
1▨▨군[114]1854년 - 미상귀인 박씨
2▨▨원자[115][116]이융준[117]1858년 - 1859년철인장황후 김씨
3▨▨군[118]1859년 - 미상귀인 조씨
4▨▨군[119]1861년 - 미상귀인 조씨
5▨▨군[120]1862년 - 미상귀인 이씨


  • 조부: 은언군(1754년 - 1801년)
  • 조모: 전산군부인 이씨(1764년 - 1819년)
  • 아버지: 전계대원군(1785년 - 1841년)
  • 어머니: 용성부대부인 염씨(1793년 - 1834년)
  • 정실: 철인왕후 김씨(1837년 - 1878년, 안동 김씨) - 김문근의 딸
  • 원자 이융준(1858년 - 1859년, 요절)
  • 후궁: 귀인 박씨(1827년 - 1889년, 밀양 박씨)
  • 왕자(1854년 - 몰년 미상, 요절)
  • 후궁: 귀인 조씨(1842년 - 1866년, 평양 조씨)
  • 왕자(1859년 - 몰년 미상, 요절)
  • 왕자(1861년 - 몰년 미상, 요절)
  • 후궁: 숙의 방씨(생년 미상 - 1878년, 온양 방씨)
  • 옹주(1851년 - 몰년 미상, 요절)
  • 옹주(1853년 - 몰년 미상, 요절)
  • 후궁: 숙의 범씨(1838년 - 1883년, 금성 범씨)
  • 영혜옹주(1859년 - 1872년) - 박영효 정실
  • 후궁: 숙의 김씨(1833년 - 몰년 미상, 김해 김씨)
  • 옹주(생몰년 미상, 요절)
  • 후궁: 궁인 이씨
  • 왕자(1862년 - 몰년 미상, 요절)
  • 옹주(생몰년 미상, 요절)
  • 후궁: 궁인 박씨
  • 옹주(생몰년 미상, 요절)


철종은 5남 6녀를 두었으나, 영혜옹주를 제외한 5남 5녀는 모두 요절하였다. 영혜옹주마저 1872년에 사망하면서 철종의 직계 자손은 단절되었다.

7. 철종이 등장하는 작품

=== 드라마 ===



=== 영화 ===

7. 1. 드라마

7. 2. 영화

참조

[1] 간행물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 of King Cheoljong, vol. 13, 01 May 1861, entry 1 http://sillok.histor[...]
[2] 간행물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 of King Cheoljong, vol. 15, 16 January 1864, entry 8 http://sillok.histor[...]
[3] 간행물 Ibid. Annals of King Gojong, vol. 1, 16 January 1864, entry 1 http://sillok.histor[...]
[4] 뉴스 [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성왕조이야기 6‧끝] 순조부터 순종까지…외척과 일본에 시달리다 빛 못 본 조선말 다섯 왕 https://www.100ssd.c[...] 2020-09-00
[5] 웹사이트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 http://ganghwado.com[...]
[6] 웹사이트 《哲宗大王行狀》 http://sillok.histor[...]
[7] 웹사이트 憲宗實錄16卷,憲宗十五年六月六日第14條紀錄 http://sillok.histor[...]
[8] 웹사이트 장조의황제자손록(莊祖懿皇帝子孫錄) https://visualjoseon[...]
[9] 웹사이트 正祖實錄22卷,正祖十年十二月廿八日第2條 http://sillok.histor[...]
[10] 웹사이트 純祖實錄3卷,純祖元年六月十日 http://sillok.histor[...]
[11] 웹사이트 純祖實錄25卷,純祖廿二年二月廿八日 http://sillok.histor[...]
[12] 웹사이트 《全溪大院君神道碑銘》 http://royal.aks.ac.[...]
[13] 웹사이트 哲宗實錄1卷,即位年六月九日第2條 http://sillok.histor[...]
[14] 웹사이트 憲宗實錄三卷,憲宗二年十二月廿三日 http://sillok.histor[...]
[15] 웹사이트 제 24대조 헌종성황제 - 시대상 http://www.rfo.co.kr[...]
[16] 웹사이트 憲宗實錄11卷,憲宗十年八月廿一日 http://sillok.histor[...]
[17] 웹사이트 憲宗實錄16卷,15年(1849)6月8日紀錄1 http://sillok.histor[...]
[18] 웹사이트 哲宗實錄1卷,卽位年(1849)6月17日紀錄1 http://sillok.histor[...]
[19] 웹사이트 哲宗實錄1卷,卽位年(1849)6月17日紀錄2 http://sillok.histor[...]
[20]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503책 (탈초본 122책) 철종 1년 4월 12일 갑술 8/13 기사 http://sjw.history.g[...]
[21] 웹사이트 憲宗實錄16卷,15年(1849)6月9日紀錄2 http://sillok.histor[...]
[22]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487책 (탈초본 121책) 철종 즉위년 6월 9일 을해 24/33 기사 http://sjw.history.g[...]
[23] 웹사이트 덕완군어휘(德完君御諱) http://yoksa.aks.ac.[...]
[24]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487책 (탈초본 121책) 철종 즉위년 6월 15일 신사 28/49 기사 http://sjw.history.g[...]
[25]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488책 (탈초본 121책) 철종 즉위년 7월 3일 무술 12/12 기사 http://sjw.history.g[...]
[26] 웹사이트 哲宗實錄3卷,哲宗二年閏八月廿四日 http://sillok.histor[...]
[27]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611책 (탈초본 125책) 철종 10년 1월 27일 무술 13/14 기사 http://sjw.history.g[...] 2018-07-17
[28] 웹사이트 《哲宗實錄》第10卷,哲宗9年10月17日條 http://sillok.histor[...] 2021-10-26
[29] 웹사이트 《哲宗實錄》第11卷,哲宗10年4月23日條 http://sillok.histor[...] 2021-10-26
[30]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525책 (탈초본 122책) 철종 2년 12월 28일 기유 2/15 기사 http://sjw.history.g[...]
[31] 서적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3 리베르 스쿨
[32] 웹사이트 哲宗實錄14卷,哲宗十三年七月十五日 http://sillok.histor[...]
[33] 서적 바로보는 우리 역사 서해역사책방 2004-00-00
[34] 웹사이트 各司謄錄·嶺左兵營啓錄·庚戌三月十五日 http://db.history.go[...]
[35] 웹사이트 《日省錄》哲宗辛亥五月初三日 https://jsg.aks.ac.k[...]
[36] 웹사이트 《日省錄》哲宗癸丑正月初六日 https://jsg.aks.ac.k[...]
[37]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553책 (탈초본 123책) 철종 5년 4월 27일 을미 16/20 기사 http://sjw.history.g[...]
[38] 서적 A Chronological Index: Some of the Chief Events in the Foreign Intercourse of Korea from the Beginning of the Christian Era to the Twentieth Century https://books.google[...] Press of Methodist Publishing House 2022-04-06
[39] 웹사이트 《日省錄》哲宗七年丙辰七月十九日 https://jsg.aks.ac.k[...]
[40] 웹사이트 《日省錄》哲宗七年丙辰八月十四日 https://jsg.aks.ac.k[...]
[41] 서적 中韓關係史(近代卷) http://www.bhlib.com[...] Social Sciences Literature Press 2022-04-06
[42]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636책 (탈초본 125책) 철종 12년 1월 29일 무오 23/23 기사 http://sjw.history.g[...]
[43]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635책 (탈초본 125책) 철종 11년 12월 10일 기사 25/26 기사 http://sjw.history.g[...]
[44] 웹사이트 哲宗實錄13卷,哲宗十二年一月十八日 http://sillok.histor[...]
[45] 웹사이트 대원군 부인의 영세입교 http://www.catholicn[...]
[46] 웹사이트 인조대왕자손록(仁祖大王子孫錄) https://visualjoseon[...] 2022-03-31
[47] 웹사이트 哲宗實錄3卷,哲宗二年十月廿六日第2條 http://sillok.histor[...]
[48] 웹사이트 哲宗實錄12卷,哲宗十一年十一月二日第2條 http://sillok.histor[...]
[49] 웹사이트 선조대왕자손록 권1(宣祖大王子孫錄 卷之一) https://visualjoseon[...]
[50] 웹사이트 哲宗實錄十二卷,哲宗十一年十一月六日 http://sillok.histor[...]
[51] 웹사이트 《梅泉野錄》卷之一·甲午以前上①·14. 이세보의 改名급제 http://db.history.go[...]
[52]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653책 (탈초본 126책) 철종 13년 7월 19일 경자 8/28 기사 http://sjw.history.g[...]
[53] 웹사이트 哲宗實錄十四卷,哲宗十三年七月廿六日第5條 http://sillok.histor[...]
[54] 웹사이트 哲宗實錄14卷,哲宗十三年七月廿五日 http://sillok.histor[...]
[55] 웹사이트 哲宗實錄14卷,哲宗十三年八月十一日第2條 http://sillok.histor[...]
[56] 웹사이트 덕흥대원군파 권3(德興大院君派 卷之三) https://visualjoseon[...]
[57] 웹사이트 족보를 위조해 왕의 외삼촌이 되다 https://www.incheon.[...]
[58]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519책 (탈초본 122책) 철종 2년 7월 23일 정미 2/18 기사 http://sjw.history.g[...]
[59]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543책 (탈초본 123책) 철종 4년 6월 26일 기해 20/26 기사 http://sjw.history.g[...]
[60]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646책 (탈초본 126책) 철종 12년 12월 6일 기미 18/27 기사 http://sjw.history.g[...]
[61]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645책 (탈초본 126책) 철종 12년 10월 25일 경진 7/15 기사 http://sjw.history.g[...]
[62] 웹사이트 哲宗實錄13卷,哲宗十二年十一月六日 http://sillok.histor[...]
[63] 웹사이트 친국정국일기(親鞫庭鞫日記) https://jsg.aks.ac.k[...]
[64] 웹사이트 A Research on the Disease of King Cheoljong in the Joseon Dynasty https://www.koreasci[...]
[65] 웹사이트 왕위 계승 '삼종혈맥론' 아시나요 https://www.whitepap[...]
[66] 뉴스 피 토하던 조선 왕들, 폐 기생충 때문? https://www.donga.co[...] 2022-03-30
[67] 웹사이트 《梅泉野錄》卷之一·甲午以前上①·8. 명성왕후의 출현 http://db.history.go[...]
[68] 웹사이트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https://yn.ugyo.net/[...]
[69] 웹사이트 哲宗實錄15卷,哲宗十四年十二月八日第6條 http://sillok.histor[...]
[70] 웹사이트 哲宗實錄15卷,哲宗十四年十二月八日第9條紀錄 http://sillok.histor[...]
[71] 웹사이트 高宗實錄1卷,高宗即位年十二月八日第2條 http://sillok.histor[...]
[72] 웹사이트 《梅泉野錄》卷之一·甲午以前上③ 11. 대원군의 위세 http://db.history.go[...]
[73] 웹사이트 Ibid. 1권, 1864년 음력 4월 7일 1번째기사 (Ibid. vol. 1, 12 May 1864, entry 1) http://sillok.histor[...]
[74] 웹사이트 高宗實錄1卷,高宗元年四月七日 http://sillok.histor[...]
[75] 웹사이트 고양 서삼릉 - 예릉 이야기 http://royaltombs.ch[...]
[76] 웹사이트 《有明朝鮮國哲仁王后睿陵誌》 http://sillok.histor[...]
[77] 웹사이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http://royal.aks.ac.[...]
[78]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699책 (탈초본 128책) 고종 3년 2월 13일 계묘 1/2 기사 http://sjw.history.g[...]
[79]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773책 (탈초본 130책) 고종 9년 2월 22일 병자 7/33 기사 http://sjw.history.g[...]
[80]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773책 (탈초본 130책) 고종 9년 2월 22일 병자 27/33 기사 http://sjw.history.g[...]
[81]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2778책 (탈초본 130책) 고종 9년 7월 4일 병술 9/23 기사 http://sjw.history.g[...]
[82] 웹사이트 《반남박씨세보 5권》 http://www.bannampar[...] 2020-05-30
[83] 웹사이트 《高宗實錄》1卷·元年九月十九條 http://sillok.histor[...]
[84] 웹사이트 《高宗實錄》1卷·元年九月二十一條 http://sillok.histor[...] 2020-09-07
[85] 웹사이트 창원황씨세보 (昌原黃氏世譜) https://www.familyse[...] 2021-02-08
[86] 웹사이트 창원황씨세보, 봉교공파 (昌原黃氏世譜 奉敎公派) https://www.familyse[...] 2021-02-08
[87] 웹사이트 高宗實錄42卷,1902年2月1日 http://sillok.histor[...]
[88]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3115책 (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11월 12일 [양력12월14일] 병진 6/10 기사 http://sjw.history.g[...]
[89] 웹사이트 高宗實錄40卷,1900年1月28日 http://sillok.histor[...]
[90] 웹사이트 純宗實錄1卷,1907年10月14日 http://sillok.histor[...]
[91] 뉴스 1910年3月23日,第2面:「所往何處」 https://nl.go.kr/new[...] 1910-03-23
[92] 뉴스 Tales from the palace: Cheoljong the beggar king (Part Two) https://www.koreatim[...] 2020-10-00
[93] 문서 A childhood name, according to the Journal of the Royal Secretariat, book 2611, 1 March 1859, entry 13
[9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95] 문서 She married Pak Yung-hio, sometimes nicknamed "the last royal son-in-law of the Joseon dynasty"; her step-granddaughter, Park Chan-ju, became the wife of Yi U, sometimes nicknamed "the last prince of Korea".
[96] 문서 According to an entry in the Journal of the Royal Secretariat, book 124, 5 August 1856
[97] 뉴스 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https://www.chosun.c[...] 2007-09-11
[98] 뉴스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www.chosunonl[...] 2007-09-16
[99] 웹사이트 철종 哲宗 http://krdic.naver.c[...] NAVER 2017-10-20
[100] 백과사전 남응중역모사건 [南膺中逆謀事件] 두산백과
[101] 문서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 12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
[102] 백과사전 이원경옥사 [李元慶獄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844-08-04
[103] 문서 강화경찰서 왼쪽 담옆 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기와집으로 강화도령 철종(1831-1864)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곳(잠저)이다.
[104] 웹인용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 http://ganghwado.com[...] 2011-11-23
[105] 문서 조선 왕조의 왕위 계승에서 손윗사람이 왕통을 계승한 사례는 단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세조가 유일하며, 나머지 왕은 선왕보다 손아랫사람이었다. 이는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경우에도 지켜졌다. 이러한 관례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제사(종묘 제례)를 드릴 수 없다는 유교적 예에서 근거한 것이다. 다만 그 기본적인 관례를 지키고 싶어도 조선 헌종과 같은 항렬 또는 그 아래 항렬의 왕족은 없거나, 너무 촌수가 멀었다. 가장 가까운 촌수인 왕족이 바로 철종과 그 형제들이고, 그다음 가까운 왕족이 흥선군과 그 형제들이었다. 이는 철종 사후 흥선군의 아들 재황(고종)이 익성군의 군호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원인이 된다.
[106] 웹인용 과거 http://jeju.grandcul[...]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1-26
[107] 서적 철종실록 1857-08-10
[108] 문서 전정(田政) 폐해
[109] 문서 여러 사람이 의견이나 주장을 밝히기 위해 서명하거나 도장이나 지장을 찍어 승인한 성명서, 건의서 등의 문서
[110] 웹인용 가렴주구·학정에 맞서 민란 '불길' http://www.ijejutoda[...]
[111] 문서 묘호 결정 1864-01-23
[112] 문서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의황제의 3남
[113] 서적 철종대왕팔고조도
[114] 서적 철종실록 1854-07-10
[115] 서적 철종실록 1858-10-17
[116] 서적 철종실록 1859-04-23
[117] 서적 승정원일기 1859-01-27
[118] 서적 철종실록 1859-10-13
[119] 서적 철종실록 1861-01-15
[120] 서적 철종실록 1862-08-08
[121] 서적 선전관청일기 1853-03-20
[122] 서적 승정원일기 1853-02-22
[123] 서적 승정원일기 1856-07-05
[124] 서적 고종실록 1872-07-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