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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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문수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영조 시대에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이인좌의 난 진압에 기여하여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으로 봉해졌다. 호서 어사, 함경도 진휼사 등을 역임하며 민생 구제에 힘썼으나, 당론에 얽매이지 않는 소신 때문에 정승에는 이르지 못했다.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별견어사로 활동했다. 1756년에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탁지정례》 등의 저서가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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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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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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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이름 | 朴文秀 |
로마자 표기 | Bak Munsu |
자(字) | 성보(成甫) |
호(號) | 기은(耆隱) |
시호(諡號) | 충헌(忠憲) |
생애 | |
출생 | 1691년 10월 28일 |
사망 | 1756년 5월 22일 (64세) |
가족 | |
본관 | 고령(高靈) |
부 | 박항한 |
모 | Lady Yi |
배우자 | 사별 초취 청풍 김씨 부인 재혼 계취 전주 이씨 부인 |
자녀 | 박순규(양자) |
친인척 | 박장원(증조부) 박선(친조부) 이세필(외조부) 박태한(친백부) 박사한(친숙부) 이태좌(외숙부) 박시영(사촌 종형) 이종성(외종사촌 동생) 박대규(종조카) 박치규(종조카) 김통협(초취 장인) 안흥군 이숙(계취 장인) |
관력 | |
직업 | 문신(文臣) 정치가(政治家) 시인(詩人) |
임관 | 1723년 문과 급제 |
정당 | 소론 후예 잔재 완론 세력 |
재임 | 1749년 10월 ~ 1750년 2월 |
임금 | 영조 |
주요 직책 | 조선의 호조판서 |
기타 정보 | |
종교 | 유교(성리학) |
2. 생애
박문수는 증조부 이조판서 문효공 박장원의 손자이자, 소론 영수 이광좌에게서 수학하였다. 1723년 (경종 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초기에는 노론의 집권으로 삭직되기도 하였으나,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 어영대장,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특히, 함경도 진휼사로 있을 때에는 경상도의 곡식을 가져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안동서원 철폐 문제로 탄핵을 받거나, 왕세손인 의소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배를 가는 등 시련도 겪었다. 1753년 유배에서 풀려나 의정부 우참찬에 올랐으며, 1756년에 사망했다.
2. 1. 관직 생활
1723년(경종 3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24년 설서(設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같은 해 (영조 원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1]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되어 경상도 영남안집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다.[1]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成君)에 봉해졌다.[1] 1730년 참찬관을 지냈고, 충청도 호서 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1] 1734년에는 진주사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안동서원 철폐 문제로 탄핵을 받아 황해도 풍덕(豊德) 부사로 좌천되었다.[1]
1741년(영조 17년)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1] 1742년 병조판서가 되었고,[1]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1744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1]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 충청도 충주목사로 다시 좌천되었다.[1] 그 후 영남 균세사(均稅使), 판의금부사, 세손사부를 지냈다.[1] 1752년 왕세손인 의소세자가 죽자 약방제조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도에 안치되었다.[1]
1753년 풀려 나와 의정부 우참찬에 올랐다.[1]
2. 2. 사후
1753년 풀려나 우참찬에 올랐다. 1756년 5월 22일(음력 4월 24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충청도 목천현(후일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학성산(鵲城山) 해좌(亥坐) 언덕에 매장되었다. 묘표는 이종성(李宗城)이 썼다.卒記|졸기중국어
靈城君 朴文秀가 卒하였다. 朴文秀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이 알아줌을 받았으며, 戊申年(1728년) 역변(逆變) 때에 趙顯命과 더불어 함께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를 도와 개가를 아뢰고 돌아오니 임금의 권우(眷遇)가 날로 융숭하여 벼슬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호조 양부(兩府)에서 이정(釐正)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나 연석(筵席)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를 하여 거칠고 조잡(粗雜)한 병통(결점)이 있었다. 또 李光佐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持論)이 시종 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영성군 박문수가 졸(卒)하였다. 박문수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이 알아줌을 받았으며, 무신년(1728년) 역변(逆變) 때에 조현명과 더불어 함께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를 도와 개가를 아뢰고 돌아오니 임금의 권우(眷遇)가 날로 융숭하여 벼슬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호조 양부(兩府)에서 이정(釐正)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나 연석(筵席)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를 하여 거칠고 조잡(粗雜)한 병통(결점)이 있었다. 또 이광좌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持論)이 시종 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배제되지 못하였다.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중국어
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4월 24일 신유 1번째기사 1756년 청 건륭(乾隆) 21년|중국어
3. 평가
관찰사 등 지방관으로서 군정과 세정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진다.[5] 그는 소론이면서도 당론의 폐해를 비판하고 당색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집이 센 성격으로 끝내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다.
4. 암행어사로서의 활동 여부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임금으로부터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은 없으며, 별견어사로만 4번 파견되었다. 보통 당하관이 암행어사에 임명되는데 박문수는 별견어사로 임명되었을 때 모두 당상관이었다.[5][6]
5. 가계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박장원(朴長遠) |
조부 | 박선(朴銑) |
아버지 | 박항한(朴恒漢) |
어머니 | 경주 이씨 - 이세필(李世弼)[7]의 딸 |
초실 부인 | 청풍 김씨 - 김통협(金通浹)의 딸 |
재실 부인 | 전주 이씨 - 안흥군 이숙의 딸 |
양자 | 박순규 - 사촌 형 박시영(朴始榮)의 둘째 아들 |
초배 빙부 | 김통협(金通浹) |
재배 빙부 | 안흥군 이숙 - 양원군 이환의 양자(생부 의원군 이혁) |
백부 | 박태한(朴泰漢) |
백모 | 안동 권씨 - 권두상(權斗相)의 딸 |
외숙부 | 이태좌(李台佐) |
사촌 형 | 박시영(朴始榮) |
사촌 형수 | 광산 김씨 |
외종사촌 동생 | 이종성(李宗城) |
조카 | 박대규(朴大圭) - 양자 박순규 생부 박시영의 첫째 아들 |
조카 | 박치규(朴穉圭) - 양자 박순규 생부 박시영의 셋째 아들 |
6. 저서
- 탁지정례
7. 박문수를 연기한 배우들
참조
[1]
웹사이트
박문수
https://terms.naver.[...]
2019-05-31
[2]
웹사이트
박문수(朴文秀)
https://encykorea.ak[...]
2020-12-17
[3]
문서
생부는 박시영(박문수의 사촌 형)
[4]
문서
음력 4월 24일
[5]
뉴스
박문수, 암행어사 한번도 한 적 없다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10-05-11
[6]
뉴스
대중서로 윤색된 김삿갓ㆍ박문수 이야기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0-05-11
[7]
문서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증손
[8]
문서
피전자와 고종형제 사이이다.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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