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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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현령은 당나라 초기의 재상으로, 당 태종 이세민을 보좌하여 '정관의 치'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나라 출신으로 수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법을 어겨 좌천된 후, 이세민을 만나 현무문의 변을 돕고 당나라 건국에 참여했다. 두여회와 함께 당나라의 제도 정비에 힘썼으며, 역사서 편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643년 능연각 24공신에 선정되었으며, 15년간 재상으로 재직하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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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령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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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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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방교 (房喬) 양 문소공 (梁文昭公) |
아버지 | 방언겸 |
배우자 | 노부인 |
자녀 | 방이지 방이애 방이측 딸 둘 |
직업 | 정치가, 작가, 역사가 |
주요 작품 | 진서 |
생애 | |
출생 | 579년 |
출생지 | 쯔보 시, 산둥 성 |
사망 | 648년 |
사망지 | 퉁촨 시, 산시 성 |
가문 | |
본관 | 남양 |
경력 | |
작위 | 능연각공신 |
공훈 | 능연각공신 |
2. 생애
방현령은 본래 제나라 사람으로, 당(唐)의 대신(大臣) 방언겸(房彦謙)의 아들이다. 현재의 산동(山東) 지방인 제주(齊州) 임치(臨淄) 출신이다.
젊은 시절 수나라에서 관리를 지내기도 했으나 법을 어겨 좌천된 경험이 있다.[6] 개황 15년(595년)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당시 이부시랑 고구(高翿)[3]는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하며 장차 크게 성공할 인물이라 예견했다.
수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당나라에 투신하여, 태종 이세민이 아직 진왕(秦王)이던 시절부터 그를 섬겼다. 621년에는 이세민 휘하의 문학관(文學館)에 설치된 18학사(十八學士)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7] 두여회와 함께 당나라 초기의 여러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방현령은 정책 구상과 계획 수립에 뛰어났고, 두여회는 명확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의 조화로운 협력 관계는 '방두'(房杜) 또는 '房謀杜斷|방모두단중국어'이라는 말로 칭송받으며 후대 재상 정치의 모범으로 여겨졌다.[8][9] 방현령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매우 두터워, 후한 광무제의 명신(名臣) 등우(鄧禹)에 비견되기도 했다.
626년, 황태자 이건성과의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을 때, 방현령은 두여회, 장손무기 등과 함께 현무문의 변을 계획하고 성공시켜 태종 이세민이 황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8][9]
태종 즉위 후, 방현령은 정관의 치 시대의 핵심 재상으로 활약했다. 629년 감찰어사 진사합이 방현령과 두여회의 겸직을 비판했으나, 태종은 "두 사람이 겸직을 하는 것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라며 이들을 두둔하고 진사합을 귀양 보냈다.[10][8] 630년에는 행정 최고 책임자인 상서좌복야와 국사 편찬을 총괄하는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임명되었다. 그는 위징 등과 함께 북제, 양, 진, 수, 주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을 총괄하여 636년에 완성시켰다. 또한 저수량 등과 함께 진서 편찬에도 직접 참여했다.
재상으로 15년간 봉직한 후 만년에는 병을 얻어 명예직인 태자태부에 임명되었다. 648년 병세가 위독해지자 태종이 머물던 옥화궁(玉華宮)으로 옮겨져 극진한 간호를 받았으며, 임종 직전에는 고구려 원정 중단을 간청하는 글을 올려 태종을 감동시켰다. 같은 해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4] 사후 태위(太尉)와 병주도독(幷州都督)에 추증되고 태종의 능묘인 소릉에 배장되었다.[4]
연도 | 주요 경력 및 사건 |
---|---|
595년 | 과거 급제, 수나라 관리 임용 |
617년 | 이세민 휘하 합류 |
621년 | 진왕부(秦王府) 18학사 임명[7] |
626년 | 현무문의 변 주도, 중서령 임명 |
627년 | 중서령 |
629년 | 상서좌복야 임명, 양국공(梁國公) 봉작 |
630년 | 감수국사 겸임, 5대 왕조 역사서 편찬 총괄 시작 |
636년 | 5대 왕조 역사서 편찬 완료 |
639년 | 태자태사 임명[5] |
642년 | 사공 임명[5] |
643년 | 능연각 24공신 선정, 황태자 이승건 폐위 사건 조사 참여 |
648년 | 진서 편찬 완료, 사망[4], 태위 및 병주도독 추증, 소릉 배장[4] |
2. 1. 수나라 시기
방현령은 579년에 태어났으며, 이는 수나라가 건국되기 직전인 북주 시대였다. 그의 아버지는 수나라에서 현령을 지낸 방언겸(房彦謙)이다.방현령은 젊은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으며, 특히 서예에 능숙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 방언겸을 따라 수도 장안에 갔을 때, 당시 평화로워 보이던 수나라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은밀히 "황제(수 문제)는 업적이나 덕이 없고 속임수로 권력을 얻었으며, 후손들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 없이 아들들 간의 경쟁과 사치를 조장하고 있다. 결국 서로 죽이며 나라는 보존되지 못할 것이고, 지금은 평화롭지만 곧 멸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하였다. 그의 예상은 훗날 적중했다.
개황 15년(595년)에 방현령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당시 이부시랑이었던 고구(高翿)[3] (혹은 문부시랑 고효기)는 방현령을 보고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그만큼 훌륭한 인물은 본 적이 없다.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한때 수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나 법을 어겨 좌천되기도 했으며,[6] 이후 서성현(隰城, 현재의 산시성 여량시)의 현령을 지냈다. 아버지 방언겸이 병에 걸리자 10년 동안 헌신적으로 간호했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5일 동안 금식했다고 전해진다.
수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방현령은 당나라에 투신하였다. 617년 이연이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의 아들인 이세민의 진영으로 가서 참모가 되기를 자청했다. 이세민은 방현령을 만나자마자 마치 오랜 친구처럼 여겼고, 그를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방현령은 이세민을 충실히 섬겼으며, 이세민이 여러 지역을 정벌할 때 다른 참모들이 전리품을 챙기는 동안 그는 그 지역의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 이세민의 참모로 영입하는 데 힘썼다.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고 이세민이 진왕(秦王)에 봉해진 후에도 방현령은 계속해서 그의 핵심 참모로 활동했다.
2. 2. 당나라 건국과 이세민과의 만남
수나라 말기, 방현령은 595년 과거에 급제하였다.[3] 당시 이부시랑 고효기(高孝基)는 그를 높이 평가하며 장차 크게 성공할 인물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부친 방언겸이 병에 걸려 10년 동안 간호하는 등 오래 봉직하지는 못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수나라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간파하고 수 문제의 통치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서성현(隰城, 현재 여량시, 산시성) 현령을 지내다가 법을 어겨 좌천되기도 했다.[6]617년, 이연이 수 양제에게 반기를 들자, 방현령은 이연의 아들인 이세민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세민은 방현령을 만나자마자 깊이 신뢰하여 자신의 핵심 참모로 삼았다. 방현령은 이세민을 충실히 보좌하며, 전투 후에는 전리품보다 인재를 발굴하여 이세민에게 추천하는 데 힘썼다.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고 이세민이 진왕(秦王)에 봉해진 뒤에도 방현령은 그의 곁을 지켰다.

621년, 이세민이 왕세충을 격파하고 낙양을 점령했을 때, 방현령은 수나라의 기록을 보존하려 했으나 이미 파괴되어 실패했다. 같은 해, 이세민이 천책상장(天策上將)에 임명되자 그의 막부에 설치된 문학관(文學館) 소속의 18학사(十八學士) 중 한 사람이 되었다.[7]
방현령은 두여회와 함께 당나라의 여러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9] 방현령은 뛰어난 계획 능력으로 정책의 큰 그림을 그렸고, 두여회는 명확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의 조화로운 협력 관계는 '방두'(房杜) 또는 '방현령은 계획하고 두여회는 결정한다'(房謀杜斷|방모두단중국어)는 말로 칭송받았다.[8][9] 방현령은 두여회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이세민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그의 핵심 참모로 삼게 하기도 했다.
626년, 황태자 이건성 및 그의 동생 이원길과 이세민 사이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이세민에게 선제적으로 행동할 것을 여러 차례 조언했다. 이건성 측은 이들의 지략을 경계하여 고조에게 거짓으로 고발했고, 이로 인해 방현령과 두여회는 이세민의 진왕부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626년 여름, 이세민이 마침내 형제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자, 방현령과 두여회를 비밀리에 다시 불렀다. 처음에는 고조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이세민이 보낸 장군 위지공이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명을 전하며 설득하자, 결국 도교 승려로 변장하고 이세민의 저택으로 들어가 거사를 계획했다. 방현령은 장손무기, 두여회 등과 함께 현무문의 변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이세민이 황태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8][9] 이세민이 태자가 된 직후, 방현령은 중서성의 최고 책임자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2. 3. 현무문의 변과 정관의 치
626년 두여회, 장손무기 등과 함께 현무문의 변을 계획하여 태종 이세민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6] 당시 태종 이세민은 형인 황태자 이건성 및 동생 제왕 이원길과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이건성 측의 견제를 받아 잠시 이세민의 참모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 이세민이 형제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자 위지공을 통해 다시 부름을 받았다. 처음에는 고조 이연의 명령을 이유로 거절했으나, 위지공의 설득 끝에 도교 승려로 변장하고 이세민의 저택으로 가 거사를 도왔다.[8][9]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통해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하고 태자가 되었으며, 방현령과 두여회는 참모로 복귀했다. 방현령은 곧 중서령, 즉 입법부의 수장이자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두 달 후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당 태종이다.태종 즉위 직후인 626년 후반, 동돌궐의 가리 칸 아시나 두비가 대규모로 침공하여 수도 장안까지 진격해왔다. 이때 방현령은 고사렴과 함께 태종을 보좌하여 직접 아시나 두비를 만나 담판을 벌였고, 추가 조공을 약속하며 돌궐군을 물러나게 했다. 같은 해 말, 태종은 공신들의 공적을 평가하여 봉토를 내렸는데, 방현령은 장손무기, 두여회, 위지공, 후군집과 함께 최고 등급 공신으로 인정받아 한공(漢公)에 봉해졌다. 고조의 사촌 이신통이 문관인 방현령과 두여회보다 낮은 평가를 받은 것에 불만을 표했으나, 태종은 "그들의 전략 덕분에 내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고 일축했다.
627년, 방현령은 태종의 명을 받아 중앙 정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간소화하여 관리 수를 634명으로 줄였다. 629년에는 두여회와 함께 행정 부서인 상서성의 수장인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방현령은 계획 수립에 뛰어났고 두여회는 결단력이 뛰어나 서로 보완하며 정사를 처리했는데, 이들의 협력을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 일컬으며 재상 정치의 모범으로 삼았다.[8][9] 당시 감찰어사 진사합이 방현령과 두여회가 여러 직책을 겸하는 것을 비판했으나, 태종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라며 진사합을 귀양 보냈다.[10][8] 방현령은 최고위직에 올랐음에도 황제 앞에서 매우 겸손했으며, 질책을 받으면 큰 재앙을 만난 듯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630년, 방현령은 상서좌복야에 더해 국사 편찬을 감독하는 감수국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는 위징 등과 함께 북제, 양, 진, 수, 주 다섯 왕조의 역사서 편찬을 총괄하여 636년 완성시켰다. 또한 태종이 황태자 이승건에게 일부 국정을 맡기자, 방현령은 이강과 함께 태자를 보좌하도록 지시받았다. 630년 그의 작위는 위공(魏公)으로 변경되었다.
636년, 방현령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사저에 머물렀다. 그해 장손황후가 임종하며 태종에게 "방현령은 평생 폐하를 섬겼으니 해임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유언을 남겼고, 태종은 황후 사후 방현령을 복직시켰다. 637년, 태종은 황족과 공신들에게 영구적인 봉토로 현(縣)을 하사하는 제도를 시행하려 했다. 이때 방현령의 작위는 양공(梁公)으로 변경되었고 송주(宋州)를 봉토로 받았으나, 장손무기 등의 강력한 반대로 제도는 곧 폐지되었다. 다만 방현령의 양공 작위는 유지되었다. 같은 해, 방현령이 주도한 법률 개정이 완료되었는데, 이는 수나라 형법보다 훨씬 관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그와 위징이 편찬한 의례 법전도 완성되었다.
638년, 당 태종은 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내가 즉위하기 전에는 방현령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즉위한 후에는 위징의 도움으로 나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고 말하며 두 사람에게 검을 하사했다. 639년, 방현령은 태자 이승건의 최고 고문인 태자태부에 임명되었고, 태종은 태자에게 방현령을 자신에게 하듯 예우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방현령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여 칭송받았다. 이 시기 그의 가문도 번성하여, 둘째 아들 방유애는 태종의 딸 고양공주와 혼인했다.
642년, 방현령은 명예직인 삼공 중 하나인 사공에 임명되었다. 643년, 태종이 당대 최고 공신 24명을 선정하여 능연각에 초상화를 걸게 했을 때, 방현령도 능연각 24공신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 그해 말, 태자 이승건이 동생 위왕 이태에게 밀려날 것을 두려워하여 후군집 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태종은 방현령, 장손무기, 소우, 이세적 등에게 조사를 명했고, 이승건의 유죄가 확인되어 폐위되었다. 이후 태종은 다른 아들 이지를 새 태자로 책봉하고, 방현령, 장손무기, 소우를 태자의 최고 고문으로 삼았다. 같은 해, 태종이 자신의 치세에 대한 공식 기록을 열람하고 싶어 하자, 방현령은 황제가 자신의 역사를 읽는 것은 역사가의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며 반대했으나 결국 제출했다. 태종은 현무문의 변에 대한 기록이 미흡하다고 지적하며 더 상세히 기록할 것을 명했다.
645년, 태종이 직접 고구려 원정에 나섰을 때, 방현령은 장안에 남아 수도 방어를 책임졌다. 이때 한 사람이 방현령이 반란을 꾀한다고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방현령은 그를 묶어 태종에게 보냈고, 태종은 고발자를 즉시 처형하며 오히려 방현령에게 "스스로 결단하지 못했다"고 질책했다. 646년경, 방현령은 사소한 이유로 다시 해임되었으나, 저수량의 간언으로 태종이 직접 그의 집을 찾아가 복직시켰다.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여, 647년 이위라는 인물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을 때, 방현령이 "턱수염이 멋지다"고 평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은 이를 그가 부적합하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즉시 좌천시키기도 했다.
648년, 방현령이 수석 편집자로 참여한 진서 편찬이 완료되었다. 그해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태종은 그를 옥화궁(玉華宮)으로 불러 극진히 간호했다. 방현령은 임종 직전, 고구려 원정을 중단할 것을 간청하는 글을 올렸다. 태종은 "그가 이토록 위중한데도 여전히 짐의 제국을 걱정하는구나"라며 감동했다고 한다. 방현령은 정관 22년(648년)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사후 태위와 병주도독에 추증되었으며, 태종의 능묘인 소릉에 배장되었다.
당나라 역사가 유방은 방현령과 두여회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는 방현령이 32년간 태종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재상으로서 봉사했으며, 백성들은 그를 훌륭한 재상으로 칭송했지만 정작 그의 개인적인 공헌은 잘 알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덕행이 뛰어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한 태종이 혼란을 평정하는 데 방현령과 두여회가 공을 세우고도 스스로 업적을 내세우지 않았고, 왕규와 위징이 황제에게 진심으로 간언할 때 그들의 정직함을 칭찬했으며, 이세적과 이정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정치적으로 크게 도왔다고 평가했다. 유방은 그들이 시대에 평화를 가져오고 모든 영광을 황제에게 돌렸으므로, 당나라의 위대한 공헌자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방현령 사후 그의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653년, 차남 방유애와 고양공주가 당 고종을 폐위하고 이원경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반 혐의로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방현령은 황실 사당에서 배향되는 영예를 박탈당했다.
2. 4. 만년과 죽음
636년,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방현령은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사저에 머물렀다. 같은 해 장손황후가 임종하며 태종에게 "방현령은 폐하를 오랫동안 섬겼으니 절대 내치지 마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태종은 황후의 장례 후 방현령을 복직시켰다.[6]637년, 태종은 친척과 공신들에게 영지를 영구히 하사하는 봉건제를 시행하려 했고, 방현령은 양공(梁公)에 봉해지고 송주(宋州)를 식읍으로 받았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 제도는 장손무기 등의 반대로 곧 폐지되었지만, 방현령의 양공 작위는 유지되었다.[6] 같은 해, 방현령이 주도한 법률 개정이 완료되어 수나라의 형법보다 훨씬 관대한 법체계가 마련되었으며, 그와 위징이 편찬한 의례 법전도 완성되었다.[6]
638년, 태종은 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짐이 천하를 얻기 전에는 방현령의 공이 컸고, 천하를 얻은 후에는 위징이 짐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말하며 두 사람에게 황실 검을 하사했다.[6]
639년, 방현령은 황태자 이승건의 최고 자문인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태종은 태자에게 방현령을 자신에게 하듯 예우하라 명했으나, 방현령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여 칭송받았다.[6] 이 시기 그의 아들 방유애(房遺愛)는 태종의 딸 고양공주와 혼인하는 등 가문의 영예도 높았다.[6]
641년, 방현령과 고실련이 황실 건축 문제로 담당 관리에게 문의한 일이 태종의 권한 침해로 여겨져 질책을 받았다. 그러나 위징이 재상의 책무를 들어 변호하자 태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6]
642년, 방현령은 삼공의 하나인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5][6] 같은 해 설연타와의 화친 문제가 논의될 때 방현령은 혼인을 통한 평화를 지지했으나, 태종은 나중에 이를 번복했다.[6]
643년, 태종이 공신 24명의 초상화를 능연각에 걸게 했을 때 방현령도 능연각 24공신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6] 같은 해, 태자 이승건이 이태와의 경쟁 속에 폐위를 두려워하여 후군집 등과 모반을 꾀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방현령은 장손무기, 소우, 이세적 등과 함께 사건 조사를 맡았고, 이승건은 폐위되었다. 이후 태종은 이지를 새 태자로 책봉하고 방현령 등을 그의 보좌역으로 삼았다.[6] 태종이 자신의 치세에 대한 역사 기록 열람을 원하자, 방현령은 처음에는 황제가 실록을 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대했으나 결국 태종의 뜻에 따라 기록을 제출했다. 태종은 현무문의 변 등 민감한 내용이 빠진 것을 지적하고 더 상세히 기록할 것을 명했다.[6]
645년, 태종이 직접 고구려 원정에 나섰을 때 방현령은 수도 장안의 유수(留守)를 맡았다. 이때 어떤 이가 방현령의 모반을 고발했으나, 태종은 고발자를 즉시 처형하고 오히려 방현령에게 "스스로 결단하라"며 강한 신뢰를 보였다.[6]
646년경, 사소한 이유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추수량의 간언 후 태종이 직접 그의 집을 찾아와 어가를 함께 타고 궁으로 돌아오며 복직시켰다.[6] 647년, 방현령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었다. 태종이 이위(李緯)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자, 장안에 있던 방현령은 "이위는 수염이 멋지군"이라고만 평했다. 태종은 이를 이위가 재상감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를 낙주(洛州, 대략 낙양) 지사로 좌천시켰다.[6]
648년, 방현령이 수석 편집자로 참여한 진서가 완성되었다.[6] 같은 해, 방현령은 병세가 깊어져 태종이 머물던 옥화궁(玉華宮)으로 불려가 황실 의관의 간호를 받았다.[6] 병상에서도 그는 당시 제국의 가장 큰 우환이 고구려 원정이라 여겨, 태종에게 원정 중단을 간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태종은 이를 보고 고양공주에게 "그는 이토록 병약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제국을 걱정하는구나"라며 감동했다.[6] 태종이 직접 문병하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648년 방현령은 옥화궁에서 세상을 떠났다.[4][6] 사후 태위(太尉) 겸 병주도독(幷州都督)에 추증되었으며, 시신은 태종의 능인 소릉(昭陵)에 배장되었다.[4][6]
후대의 역사가 유방(柳芳)은 방현령과 두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방현령은 32년 동안 당 태종을 도와 제국을 정복하고 평정했으며, 마침내 재상으로 봉사했다. 백성들은 모두 그를 훌륭한 재상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개인적인 공헌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덕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준다. 당 태종은 혼란을 평정했고, 방현령과 두여회는 자신들의 업적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왕규와 위징은 진심으로 황제에게 건의했고, 방현령과 두여회는 그들의 정직성을 칭찬했으며, 이세적과 이정은 곳곳에서 싸워 승리했고, 방현령과 두여회는 정치적으로 그들을 크게 도왔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평화를 가져왔고, 모든 영광을 황제에게 돌렸다. 그들을 당나라의 위대한 공헌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6]
그러나 방현령 사후 가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653년, 아들 방유애와 고양공주 부부가 이각, 이원경 등과 함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당했고, 방현령은 황실 사당에서 제향이 중단되는 비운을 맞았다.[6]
3. 업적
방현령은 당 태종 치세 동안 행정 및 법률 정비에 큰 공헌을 한 재상이다. 그는 중앙 정부 조직을 간소화하고, 두여회와 함께 상서성을 이끌며 효율적인 국정 운영에 기여했다. 또한 수나라보다 완화된 새로운 당나라 형법과 의례 관련 법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주도했으며, 진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진서 편찬을 완료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3. 1. 행정 및 법률 정비
627년, 당 태종의 지시 아래 방현령은 중앙 정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간소화하여 관리 수를 634명으로 줄이는 작업을 주도했다.629년에는 두여회와 함께 행정의 핵심 부서인 상서성의 최고 책임자인 상서좌우복야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방현령과 두여회는 모범적인 재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방현령은 재상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황제 앞에서 매우 겸손했으며, 질책을 받을 때면 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황실 기록을 정리하고 공식 역사를 편찬하는 임무도 맡았다. 같은 해, 보조 감찰관 권만기가 방현령과 왕규가 관리 선발 과정에서 편파적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있었다. 당 태종은 처음에는 후군집에게 조사를 명했으나, 다른 재상 위징이 방현령과 왕규는 신뢰할 만한 관리들이며 세세한 부분을 문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자 조사를 중단시켰다.
637년, 방현령이 주도한 법률 개정 작업이 완료되었다. 새롭게 정비된 당나라의 형법은 이전 수나라의 형법에 비해 훨씬 관대해진 것으로 평가받으며, 총 500개의 법 조항과 20등급의 형벌 체계를 갖추었다. 같은 해, 방현령은 위징과 함께 의례에 관한 법전 편찬도 완료하였다.
641년, 방현령과 고실련이 황실 건축 계획에 대해 황실 부 건축가 두덕소에게 문의한 일이 있었다. 당 태종은 이를 자신의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여겨 그들을 질책했으나, 위징이 재상은 모든 국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변호하자 태종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647년에는 방현령의 행정에 대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었다. 당 태종이 여름 별궁인 취미궁에 머물며 방현령에게 수도 장안의 정무를 맡겼을 때, 이위라는 인물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태종이 장안에서 온 사신에게 방현령이 이위의 임명에 대해 어떻게 평했는지 묻자, 사신은 "방현령은 이위가 장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위는 수염이 참 멋지군'이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당 태종은 이것이 이위가 장관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방현령의 우회적인 비판임을 알아차리고 즉시 이위를 낙주(현재의 낙양) 지사로 좌천시켰다.
648년, 방현령은 수석 편집자로서 진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진서 편찬 작업을 완료했다.
4. 평가
이세민은 방현령을 매우 총애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한 공신들을 기리는 시 〈위풍부〉(威風賦)를 지어 그에게 하사하였다.[11] 또한 15년간 재상직에 있었던 방현령이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자 이세민은 "유능한 재상이 사라지면 두 팔을 잃은 듯한 심정이 들 터이니 정 힘들어 버틸 수 없을 때에 다시 상소를 올리라."고 말하며 만류했다.[12] 이후 방현령은 더 이상 사직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
방현령은 두여회, 위징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았다. 정관의 치세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관정요』에도 태종의 자문에 답하는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태종이 "창업과 수성,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왕조를 세우는 것과 그것을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려운가)라고 질문했을 때의 문답이 유명하다. 방현령은 이에 대해 "천하가 혼란해져 군웅들이 서로 다투어 일어납니다.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항복을 받으며, 싸움에서 이기고 나서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창업이 어렵다고 봅니다."라고 답했다. 반면 위징은 수성이 어렵다고 답한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5. 가족 관계
방현령에게는 방유직(房遺直), 방유애(房遺愛), 방유칙(房遺則) 세 아들이 있었다.
- '''방유직'''(房遺直): 장남으로, 변주(汴州) 자사(刺史)를 지냈다.
- '''방유애'''(房遺愛): 차남으로, 당 태종의 딸인 고양공주(高陽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형왕 이원경(李元景)을 황제로 옹립하려던 모의가 실패하면서 처형되었다.
- '''방유칙'''(房遺則): 삼남으로, 형왕 이원경의 딸과 혼인하였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7. 기타
참조
[1]
서적
Jiu Tang Shu
[2]
웹사이트
明星显赫家世曝光 成龙系唐宰相后人
https://www.chinanew[...]
2013-09-06
[3]
서적
隋書
[4]
서적
학습만화 중국의 역사 인물사전
2008년 10월 8일 발행
[5]
서적
貞観政要
[6]
서적
왕도
국일미디어
[7]
서적
중국의 황태자 교육
김영사
[8]
서적
중국을 말한다9
신원문화사
[9]
서적
십팔사략
미래사
[10]
서적
이세민
[11]
서적
이세민
[12]
서적
이세민
[13]
웹사이트
공처가 남편, 기가 센 부인
https://story.kak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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