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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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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인제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외과 의사이자 교육자, 사회 운동가이다. 오산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1 운동 참여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가 되었고, 이후 백외과를 개원하고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하여 한국 의료 발전에 기여했다. 6·25 전쟁 중 납북된 후 행방이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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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백인제
백인제 박사
백인제 박사
출생일1899년 1월 28일
출생지대한제국 평안북도 정주군 부호
사망일1950년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대한민국
직책 및 경력
직책외과 전문의관
임기1923년 6월 8일 ~ 1927년 1월 29일
소속조선총독부
전문 분야외과 의사
기타 경력경성의학전문학교 수석 졸업, 도쿄 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정치
총독사이토 마코토
섭정히로히토(1921~1926)
군주요시히토
히로히토
총리가토 일본 총리
우치다 일본 총리
야마모토 일본 총리
기요우라 일본 총리
가토 일본 총리
와카쓰키 일본 총리 권한대행
와카쓰키 일본 총리
정당무소속
가족 관계
부모백희행(부), 청주 한씨 부인(모)
배우자광주 이씨 부인(사별), 최경진(재혼)
자녀2남 5녀
백난영
백낙조
백낙훤
백남주
백향남
백금주
형제백용제(첫째 형)
백봉제(둘째 형)
백붕제(막내 남동생)
친인척백낙환(친질)
백낙청(친질)
기타
비고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였으며, 납북된 이후, 사망하였다.

2. 생애

백인제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의 의사로, 오산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나,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총독부의원에서 근무하며 마취 기술을 익혔고, 의학 연구에도 힘써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를 역임했다.

1932년과 1936년 두 차례 독일 유학을 다녀왔고, 1935년 조선의사협회 간사를 맡았다.[4] 1941년 백외과(현재 인제대학교 부속 백병원)를 개업했고, 1946년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를 잠시 역임했으며, 대한외과학회 초대 회장, 대한의학협회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1948년 미 군정청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김구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5.10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했고, 서재필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19일, 북한 공산당 정보원에게 납북되었다.[2][4][6] 이후 백병원은 인제의과대학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평안북도 정주군 부호(鳧湖) 출신이다. 관서지방 최고의 명문가인 백경한, 백경해 집안의 증손으로 아버지 백희행은 오산학교 초대 교장인 백이행(白彛行)과 사촌간이었다. 고조부 백경해(白慶楷)는 한성부 좌윤(오늘날의 서울시 부시장에 해당)을, 증조부 백종걸(白宗杰)은 병조참의와 우승지를 지냈다. 이처럼 백인제의 가문은 전통적인 문신 학자 자손이었다.[3] 1912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했다. 재학 4년 동안 수석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3]

1916년 관립 의학교육 기관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3][4] 재학 중, 학교 당국의 민족차별과 일부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의 오만함에, 더 나아가 식민지라는 현실에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3] 그래서 3학년 학기 말에 발생한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3]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가 시위 때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다.[3] 그리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했다.[3] 조선총독부경성의학전문학교의 유화조치에 힘입어 1920년 4월에 4학년으로 복학했다.[3] 1921년 3월 전 학년 수석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2][3][4] 그러나 수석 졸업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했다.[3]

2. 2. 의사 및 연구 활동

백인제는 1921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전 학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3·1 운동 가담 전력이 있어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 면허를 받지 못했다.[3] 조선총독부는 총독부의원에서 2년간 부수로 근무하면 의사 면허를 주겠다고 제안했다.[3]

총독부의원 외과에 들어갔지만,[2][3][4] 의사 면허가 없어 마취 업무를 전담했다.[3] 당시 마취 전문의가 없었기에 외과의사에게 마취는 중요한 일이었고, 이는 백인제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3] 백인제는 2년 동안 뛰어난 마취 기술을 습득했고, 이는 훗날 외과의사로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3]

백인제는 부수 생활 2년 동안 의학 연구에도 힘써 기리하라(桐原眞) 교수와 공동으로 「일선인(日鮮人) 간에 있어서 혈액속별(血液屬別)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호 잡지』 제40호(1922년 12월)에 발표했다.[3] 이 논문은 학문적 가치가 높았고, 일본인 교수들에게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3]

1923년 5월, 백인제는 의사 면허를 취득했고,[3] 다음 달 조선총독부 의원에 임명되어 외과에서 근무했다.[3] 이후 4년 동안 「실험적 구루병(佝僂病)의 연구」 등 4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3] 1926년에는 조선의학회로부터 장학금과 상장을 받기도 했다.[3] 1927년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강사로 발탁되었다.[3]

1928년 4월, 도쿄제국대학에서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전편): 실험적 흰쥐 구루병의 생성 및 그 일반적 재검색」이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3] 백인제는 30세에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가 된 것이다.[3] 당시 의학박사는 매우 희귀하여 일간신문에 크게 보도될 정도였다.[3] 1928년 6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가 되었다.[3] 당시 한국인 학생이 관립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경성의학전문학교 한국인 주임교수가 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백인제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가 된 것이다.[3]

2. 3. 백병원 설립과 사회 활동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사임하고 백외과(白外科: 현재 인제대학교 부속 백병원)를 서울 저동에서 개업하였다.[4] 1946년 12월, 한국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947년 1월에 사임하였다.[4]

1946년 대한외과학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47년 대한의학협회 상임이사를, 1948년 11월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4]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윌리엄 F.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5] 1948년 5.10 총선에 서울 중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7월 19일 사복 차림의 공산당 정보원 2명에게 체포되어 동생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었다.[2][4][6] 당시 백인제는 조선일보 감사역을 맡고 있었다.[6]

이후 재단법인 백병원은 학교법인 인제학원(1979년 1월 12일 문교부 정식 허가, 설립자 대표 백낙조)으로 변경되었으며, 백중앙의료원이 탄생하였다. 초대 학교법인 인제학원 이사장에 백낙조, 백중앙의료원 원장에 백낙환이 선임되었으며, 초대 학장은 전종휘 박사가 취임하였다. 학교 명칭은 백병원의 창립 이념인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인(仁)'자와 '제(濟)'자를 따서 '인제의과대학'으로 결정되었으며, 이는 창립자의 함자인 인제(麟濟)와 음이 같다.[7]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조부백시증(白時增)1844년 ~ 1917년
조모밀양 박씨(密陽朴氏)? ~ ?박민주(朴敏柱)의 딸
백희행(白禧行)1869년 ~ 1954년
청주 한씨(淸州韓氏)? ~ ?한응모(韓應模)의 딸
백용제(白龍濟)1887년 ~ 1909년
백봉제(白鳳濟)1896년 ~ 1946년
부인광주 이씨(廣州李氏)? ~ ?
백난영(白蘭英)1917년 ~ 2015년
계실최경진(崔慶珍)1908년 ~ 2011년전주 최씨(全州崔氏) 최건유(崔建柔)의 딸, 배화여고 교사
백향주(白香洲)1931년 ~스탠퍼드대학교 식물학박사
아들백낙조(白樂晁)1934년 ~ 2000년독일 본대학교 의학박사, 학교법인 인제학원 초대 이사장
아들백낙훤(白樂暄)1938년 ~학교법인 인제학원 이사
백남주(白南洲)1939년 ~
백향남|
백금주|
동생백붕제(白鵬濟)1910년 ~ 1950년
조카백낙환인제대학교 초대 총장
조카백낙청서울대학교 명예교수


4. 백인제가 등장한 작품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강승원이 백인제 역을 맡았다.[8]

5.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명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48년총선국회의원서울 중구무소속5,688표8.69%3위낙선


참조

[1] 문서 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였으며, 납북된 이후, 사망하였다.
[2] 웹인용 백인제 https://terms.naver.[...] 2020-09-02
[3] 웹인용 백인제 https://terms.naver.[...] 2020-09-02
[4] 웹인용 백인제 https://terms.naver.[...] 2020-09-02
[5] 간행물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6] 서적 6.25전쟁 납북 도서출판 기파랑 2006-08-14
[7] 문서 동생인 [[백붕제]]의 처가 일찍 죽어 할아버지(백희행) 손에서 자란 백낙환을 서울의 집으로 불러들여 중학교부터 공부시킨 백인제는 백낙환의 친아버지와 다름이 없었다. [[백낙환]]은 백인제의 권유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진학했다.
[8] 문서 추정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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