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주선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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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복주선정국은 1866년 청나라 말기에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근대식 조선소이다. 1867년 건설을 시작하여 프랑스 해군 장교와 유럽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용광로와 해군 조선소를 건설하고, 11척의 수송함과 5척의 감시선을 건조했다. 청나라 정부는 아편 수입으로 운영 자금을 조달했으며, 1869년 최초의 함선인 만년청을 진수했다. 청불전쟁 중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고, 신해혁명을 거쳐 1926년 해군마미조선창으로 개칭되었다. 복주선정국은 동아시아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해군력 강화와 기술 도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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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주선정국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푸저우 조선창 |
중국어 간체 | 福州船政局 |
중국어 번체 | 福州船政局 |
병음 | Fúzhōu Zàochuánchǎng |
웨이드-자일스 표기 | Fu-chou Tsao-ch'uan-ch'ang |
다른 이름 | 마미 조선창 |
중국어 간체 (다른 이름) | 马尾造船厂 |
중국어 번체 (다른 이름) | 馬尾造船廠 |
병음 (다른 이름) | Mǎwěi Zàochuánchǎng |
웨이드-자일스 표기 (다른 이름) | Ma-wei Tsao-ch'uan-ch'ang |
![]() | |
위치 | |
위치 | 민강 어귀 |
좌표 | 25°99′41″N 119°45′69″E |
역사 | |
개장 | 1866년 |
착공 | 1867년 |
폐지 | 알 수 없음 |
상세 정보 | |
용도 | 조선소 |
건축가 | 알 수 없음 |
건설사 | 알 수 없음 |
엔지니어 | 알 수 없음 |
계약자 | 알 수 없음 |
개발사 | 알 수 없음 |
소유주 | 알 수 없음 |
건축 기간 | 알 수 없음 |
건축 비용 | 알 수 없음 |
2. 역사
1866년(동치 5년) 선정학당을 포함한 시설 건설 계획이 시작되어 1867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좌종당이 섬감총독으로 전임되면서 심보정이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어 사업을 총괄하였다. 프랑스 해군 장교 프로스페르 지켈과 폴 데그벨을 고문으로 초빙하고, 약 40명의 유럽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건설을 진행했다.
5년 계획으로 용광로와 서양식 해군 조선소를 건설하고, 11척의 수송함과 5척의 포함을 건조, 선정학당에서 병력과 기술자를 양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청 정부는 원자재와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5년간 운영비와 선박 유지비 일부는 아편 수입세로 충당했다. 처음 건조된 것은 150 마력의 "만년청"으로, 1869년에 진수되었다.
1884년 청불전쟁 중 마강해전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이후 재건되었고, 신해혁명을 거쳐 1926년에 '''해군마미조선창'''(海軍馬尾造船廠)으로 개칭되었다.
2. 1. 설립 배경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면서 해군력 강화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좌종당은 1866년 복주선정국 설립을 주도했다.[4][5][6] 1867년 건설이 시작될 무렵 좌종당은 섬감총독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그가 추천한 심보정이 선정대신이 되어 선정국 사무를 장악했다.[4]프랑스 해군 장교인 프로스페르 기켈과 폴 다이게벨은 프랑스 제국 해군에서 휴가를 받아 약 40명의 유럽 엔지니어와 기술자를 모집했다.[4][5][6] 이들은 금속 가공 공장, 서양식 해군 조선소 건설, 11척의 수송선과 5척의 군함 건조, 항해 및 해양 공학 교육 학교 설립을 5년 이내에 감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4][5][6] 청나라 정부는 자재와 노동력을 제공했으며,[7] 5년간의 운영 비용은 은 로 추정되었고, 생산된 선박 유지 보수 비용은 아편 수입 관세 수입으로 일부 충당되었다.[9]
2. 2. 건설 과정 (1866년 ~ 1869년)
1866년(동치 5년)에 선정학당을 포함한 시설 건설 계획이 시작되어, 1867년에 본격적인 건설에 착수하였다. 좌종당이 섬감총독으로 전임되면서 심보정이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어 사업을 총괄하였다.[4][5][6] 프랑스 해군 장교 프로스페르 지켈과 폴 데그벨을 고문으로 초빙하고, 약 40명의 유럽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건설을 진행했다.[4][5][6]5년 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 정부는 원자재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5년간 운영비(약 )와 선박 유지비 일부는 아편 수입세로 충당했다.[9] 1872년까지 노동자 수는 초기 1,600명에서 2,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8] 1869년, 최초로 건조된 150마력 증기선 '만년청'(萬年淸)이 진수되었다.[10]
2. 3. 청불전쟁과 그 이후 (1884년 ~ 1926년)
1884년(광서 11년) 청불전쟁 중 마강해전에서 복주선정국의 시설 대부분이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11] 이후 재건되었고,[12] 신해혁명을 거쳐 1926년에 '''해군마미조선창'''(海軍馬尾造船廠)으로 개칭되었다.3. 시설
1866년(동치 5년) 좌종당의 계획으로 시작되어 1867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복주선정국에는 조선소와 선정학당 등의 시설이 있었다. 섬감총독으로 전임된 좌종당을 대신하여 심보정이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어 건설을 지휘했다.
청불전쟁 중 1884년 마강해전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이후 재건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1926년에는 '해군마미조선창'(海軍馬尾造船廠)으로 개칭되었다.
3. 1. 조선소
1866년(동치 5년) 좌종당의 계획으로 시작되어 1867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복주선정국의 조선소는 서양식 기술을 도입한 근대식 조선소였다. 섬감총독으로 전임된 좌종당을 대신하여 심보정이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어 조선소 건설을 지휘했다. 두 명의 프랑스 해군 장교 프로스 지켈과 폴 데그벨이 고문으로 영입되었고, 이들은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약 40명의 유럽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복주에 용광로와 서양식 해군 조선소를 건설했다.[4][5][6]청나라 정부는 원자재와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5년간의 운영비 약 과 선박 유지비의 일부는 아편 수입세로 충당했다.[9] 조선소에서는 11척의 수송함과 5척의 감시선(포함)을 건조했다.[4][5][6] 최초로 건조된 선박은 150마력의 증기선 '만년청'(萬年淸)으로, 1869년(동치 8년)에 진수되었다.[10]
1884년 청불전쟁 중 마강해전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이후 재건되었다.[11][12] 신해혁명 이후 1926년에는 '해군마미조선창'(海軍馬尾造船廠)으로 개칭되었다.
3. 2. 선정학당 (船政學堂)
1866년 심보정이 푸젠성 푸저우에 설립한 선정학당(船政學堂)은 해군 장교 및 기술자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다.[4][5][6]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프로스페르 지켈과 폴 다이게벨 등 프랑스 해군 장교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이들은 약 40명의 유럽 기술자들과 함께 항해술, 해양 공학 등 서양의 선진 학문을 가르쳤다.[4][5][6]4. 영향
복주선정국은 19세기 후반 청나라가 추진한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근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의 개화기에 근대식 조선소 건설과 해군력 강화에 대한 자극을 주었다.
1866년 좌종당에 의해 설립이 추진된 복주선정국은 프랑스의 기술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심보정이 선정대신으로 임명되어 운영을 총괄하였으며, 프랑스 해군 장교 프로스 지켈과 폴 데그벨이 고문으로 참여하여 유럽 기술자들을 초빙, 용광로 건설과 서양식 해군 조선소 건설을 이끌었다.[4][5][6]
복주선정국은 11척의 수송함과 5척의 감시선을 건조하고, 선정학당을 통해 해군 인력을 양성하는 등 청나라 해군력 강화에 기여했다. 운영 비용은 약 300만 테일로 추정되며, 아편 수입세로 일부 충당되었다.[9] 최초로 건조된 선박은 150마력의 '만년청'으로, 1869년에 진수되었다.[10]
복주선정국은 청불전쟁 중 마강해전으로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재건되어 신해혁명을 거쳐 1926년 '''해군마미조선창'''으로 개칭되었다.
4. 1. 기술 이전 및 인재 양성
복주선정국은 서양의 선진 조선 기술과 해군 관련 지식을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정학당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이후 청나라 해군력 강화에 기여했으며,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4][5][6]1866년 선정학당 설립과 함께 시작된 기술 이전은 프랑스 해군 장교 프로스 지켈과 폴 데그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프랑스 해군에서 휴가를 받아 유럽의 엔지니어와 기술자 약 40명을 모집하여 복주에 서양식 해군 조선소와 금속 가공 공장을 건설했다.[4][5][6] 이들은 5년 동안 11척의 수송선과 5척의 군함을 건조하고, 항해 및 해양 공학 교육을 담당했다.[4][5][6]
선정학당에서는 조선 기술뿐만 아니라 서양식 해군 운영 및 전략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양성된 인재들은 청나라 해군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 2. 동아시아 근대화의 자극
1866년 좌종당이 복주선정국 설립을 추진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구 기술 도입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복주선정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개화기 조선의 해군력 강화와 근대식 조선소 건설 노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1884년 청불전쟁 중 마강해전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재건되어 신해혁명을 거쳐 1926년에 '''해군마미조선창'''(海軍馬尾造船廠)으로 개칭되었다.[11][12]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복주선정국의 사례를 통해 자주적인 국방력 강화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5. 평가
복주선정국은 1866년 좌종당이 설립을 추진하고 1867년 심보정의 주도로 건설이 시작되어, 서구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아편 수입세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청불전쟁 중 시설이 파괴되는 등 한계점도 있었다.[9][11]
5. 1. 긍정적 평가
1866년 좌종당이 섬감총독으로 전근되기 전 설립을 추진하여 1867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복주선정국은 심보정의 주도하에 서구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프랑스 해군 장교 프로스 지켈과 폴 데그벨을 영입하고 유럽의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를 건설하였다.[4][5][6]복주선정국에서는 11척의 수송함과 5척의 포함을 건조하였고, 선정학당을 통해 해군과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등 해군력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4][5][6] 1869년에는 최초의 증기선 '만년청'을 진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10]
이러한 노력은 청나라가 자주적인 국방력을 강화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자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선정학당을 통해 근대적 인재를 양성하여 동아시아 근대화에 이바지한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5. 2. 부정적 평가
청나라가 운영비와 선박 유지비 일부를 아편 수입세로 충당한 것은 당시 청나라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보여주며,[9]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1884년 청불전쟁 중 마강해전에서 복주선정국 시설 대부분이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것은 외세 의존의 한계를 드러내며,[11] 자주적 국방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France-Chine : Quand deux mondes se rencontrent
Gallimard
2004
[2]
논문
1952
[3]
간행물
Hong Kong Port and Maritime Board
[4]
논문
1987
[5]
논문
1982
[6]
논문
2002
[7]
논문
1987
[8]
논문
1987
[9]
논문
1987
[10]
논문
1987
[11]
논문
2002
[12]
웹사이트
Father Shipyard
https://web.archive.[...]
2012-06-03
[13]
논문
1952
[14]
간행물
Hong Kong Port and Maritime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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