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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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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란덴부르거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 정보국(아프베어)이 운용한 특수부대로, 테오도르 폰 히펠 대위의 제안으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사보타주, 외국어 구사 능력, 게릴라 전술 훈련을 받은 소규모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적 후방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지휘, 통신, 병참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발칸 전역, 바르바로사 작전 등 주요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1944년에는 보병 사단으로 재편되어 동부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종전 후에는 프랑스 외인 부대, 용병, 군사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전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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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거즈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브란덴부르크 부대 차량 휘장
브란덴부르크 부대 차량 휘장
국가나치 독일
종류특수 부대
소속아프베어
모토(없음)
별칭브란덴부르크
복무 기간
창설1939년 - 1945년
규모'대대' – 1939년 12월
'사단' – 1943년 2월 – 1944년 3월
'기갑척탄병 사단' – 1944–1945년
주둔지슈텐달
프리덴탈
지휘관
주요 지휘관테오도르 폰 히펠
아드리안 폰 푈커잠
참전
주요 전투제2차 세계 대전

2. 창설 배경과 소속원

브란덴부르크 사단의 창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파울 폰 레토우-포르베크 장군의 게릴라전 경험과 중동에서 T. E. 로렌스의 전술에 영향을 받은 테오도르 폰 히펠 대위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히펠은 사보타주 훈련을 받고 외국어에 능통한 소규모 특수부대가 적 후방에서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전쟁 방식을 고수하던 독일 국가방위군의 보수적인 장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히펠은 독일 정보기관인 아프베어의 사령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에게 직접 제안했다. 카나리스 제독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비정규전 방식이 볼셰비키와 유사하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히펠은 아프베어 내에서 그의 구상을 지지한 헬무트 그로스커스 과장과 협력하여 결국 1939년 9월 말,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서방을 상대하기 위한 파괴 공작 부대" 창설 승인을 얻어냈다.[1] 히펠은 아프베어 제2국 소속으로 부대 창설 임무를 맡았다.

부대의 직접적인 전신으로는 1939년 폴란드 침공 직전 조직된 Freikorps Ebbinghaus|에빙하우스 자유군단de을 들 수 있다. 이 부대는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실레지아인과 독일인 민간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전투조(K-Trupps|카-트룹스de)로 시작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독일 국방군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폴란드 전역 후 정식 국방군 부대로 편입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사단원의 모집은 힘러의 친위대와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전형적인 아리아인 외모보다는 실제 작전에 필요한 능력, 특히 외국어 구사 능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독일 내 슬라브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 배경을 가진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최소 한 개 이상의 외국어 능력이 필수였으며, 작전 지역의 언어와 문화, 관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지 위장 및 침투, 효과적인 사보타주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초기에는 자원병으로만 구성되었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원칙은 점차 완화되었다. 지원자에게는 민첩성, 임기응변 능력, 주도성, 팀워크, 높은 신체 능력 등 다양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대원들은 5개월에서 7개월간 정찰, 수영, 격투, 폭파, 각종 무기 사용법, 일반 보병 전술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적군 병사나 현지인으로 위장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해 파괴 공작, 정보 수집, 주요 시설 확보 등 비정규적인 특수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러한 활동 방식 때문에 일부 전통적인 독일군 장교들에게는 불명예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부대는 창설 초기 중대 규모에서 시작하여 점차 대대로 확대되었고, 작전 지역에 따라 전문화된 중대들로 구성되었다. 부대의 별칭인 "브란덴부르거"는 첫 영구 주둔지가 위치했던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 1. 창설 배경

브란덴부르거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파울 폰 레토우-포르베크 장군이 구사했던 게릴라 전술과, 중동에서 T. E. 로렌스가 아랍 반란 중 활용했던 기습 및 도주 전술에 영감을 받은 테오도르 폰 히펠 대위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히펠은 아프리카에서 레토우-포르베크 휘하에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도의 사보타주 훈련을 받고 외국어에 능통한 소규모 특수부대가 적 후방에서 지휘, 통신, 보급선을 교란할 수 있다고 구상했다.

그러나 히펠이 독일 국가방위군에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보수적인 프로이센 군 장교들은 이러한 비정규적인 전투 방식이 전쟁 규칙에 어긋나며 불명예스럽다고 여겨 거부했다. 이에 히펠은 독일 정보국인 아프베어의 사령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에게 직접 접근했다. 카나리스 제독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부대 운용이 볼셰비키의 방식과 유사하다며 히펠의 제안에 반대했으나, 히펠은 포기하지 않고 아프베어 내에서 자신의 구상을 지지한 정보부 과장 헬무트 그로스커스와 협력했다. 결국 1939년 9월 27일, 히펠과 그로스커스는 부대 창설에 대한 협의를 마쳤고, 며칠 뒤 육군참모총장은 "서방을 상대하기 위한 파괴 공작 부대" 창설을 승인하는 명령을 내렸다. 히펠은 아프베어 제2국 소속으로 이 새로운 부대의 창설 임무를 맡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사단의 직접적인 전신은 1939년 폴란드 침공 이전에 창설된 에빙하우스 자유군단(Freikorps Ebbinghausde)으로 볼 수 있다. 아프베어 제2국 소속 에르빈 폰 라호우젠 대령은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실레지아인과 독일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전투 부대(''K-Trupps'')를 조직했다. 이들의 임무는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독일 국방군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유지하는 것이었다. 초기 구성원들은 군 복무 경험이 없는 민간인이었으나 아프베어의 훈련을 받았다. 폴란드 전역 이후 이들은 정식 국방군 부대로 통합되었다.

히펠이 처음 구성한 부대는 ''Deutsche Kompagnie''로 명명되었으나, 1939년 10월 25일 '''제800 특수 임무 건설·교도 중대'''(Baulehrkompanie z. b. V.|바울레어콤파니 체트 베 파우de[1] 800)로 개칭되었다. 이후 1939년 12월 15일 신병이 입대하면서 부대는 대대 규모로 확대되어 '''제800 특수 임무 건설·교도 대대'''(Baulehrbataillon z.b.V.|바울레어바타일리온 체트 베 파우de 800)가 되었다. 부대의 별칭인 "브란덴부르거"는 첫 영구 주둔지가 위치했던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부대원 모집은 하인리히 힘러의 친위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전형적인 아리아인의 외모보다는, 독일을 위해 싸울 의지가 있는 슬라브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 배경을 가진 인원들을 모집했다. 지원자에게는 최소 한 개 이상의 외국어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으며, 특정 지역의 언어, 관습, 문화를 습득하여 현지 위장 및 침투, 효과적인 사보타주 작전 수행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받았다. 초기에는 자원병으로만 구성되었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원칙은 점차 희미해졌다.

최초의 대대는 목표 작전 지역에 맞춰 4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오토바이 소대와 낙하산 소대도 포함되었다.

이후 부대는 코카서스 출신 인원으로 구성된 아랍 여단과 같은 혼성 부대를 추가 창설하며 확대되었다.

2. 2. 초기 구성 및 명칭 변화

브란덴부르크 사단의 창설은 테오도르 폰 히펠 대위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사보타주 훈련을 받고 외국어에 능통한 소규모 특수부대가 적진 후방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적의 지휘, 통신, 보급선을 교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 국가방위군이 그의 제안을 거부하자, 히펠은 독일 정보국 아프베어의 사령관인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에게 접근했다. 카나리스 제독은 처음에는 이러한 부대 운용이 볼셰비키의 방식과 유사하다며 반대했지만, 히펠은 포기하지 않고 정보부 과장인 헬무트 그로스커스의 지지를 얻어냈다. 1939년 9월 27일, 히펠과 그로스커스는 부대 창설에 합의했고, 며칠 후 육군참모총장은 "서방을 상대하기 위한 파괴 공작 부대" 창설을 승인하는 명령을 내렸다.[1] 히펠은 아프베어 제2국 소속으로 이 새로운 부대의 창설 임무를 맡게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사단의 직접적인 전신은 1939년 폴란드 침공 이전에 창설된 Freikorps Ebbinghaus|프라이코르프 에빙하우스de였다. 아프베어 제2국의 에르빈 폰 라호우젠 대령은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실레지아인과 독일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전투 부대, 이른바 K-Trupps|카-트룹스de를 조직했다. 이들의 임무는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독일 국방군 정규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유지하는 것이었다. 초기 K-Trupps 구성원들은 대부분 군 복무 경험이 없는 민간인이었으나, 아프베어의 훈련을 받고 군 장교의 지휘를 받았다. 폴란드 전역 이후 이 특공대는 정식으로 국방군의 일원이 되었다. 카나리스는 히펠에게 국방군 정보부 관할 하에 에빙하우스 대대와 같은 부대를 창설하도록 지시했고, 1939년 10월 25일 히펠은 전 에빙하우스 대대 멤버를 중심으로 첫 부대를 창설했다.

히펠이 처음 구성한 부대는 Deutsche Kompagnie|도이체 콤파니de로 명명되었다. 이후 부대 명칭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한국어 명칭 (참고) |
Deutsche Kompagnie|도이체 콤파니de | 독일 중대 |
Baulehrkompanie z. b. V. 800|바울레어콤파니 체트 베 파우 800de | 제800 특수 임무 건설·교도 중대[1] |
Baulehrbataillon z.b.V. 800|바울레어바타일론 체트 베 파우 800de | 제800 특수 임무 건설·교도 대대 |



부대의 별칭인 "브란덴부르거"는 첫 번째 영구 주둔지가 위치했던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부대의 병영은 베를린 근교 슈텐달에 설치되었고, 훈련장은 오라니엔부르크 부근 프리덴탈에 마련되었다.

모집 방식은 하인리히 힘러친위대와는 달랐다. 히펠은 금발 벽안과 같은 아리아인의 이상을 구현한 전형(Übermensch|위버멘슈de)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국내의 슬라브인, 폴란드인 및 기타 민족 중에서 독일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인재를 찾았다. 지원자에게는 최소 한 개 이상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 필수 조건이었으며, 많은 대원들은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 또한 특정 지역의 관습과 전통에 대한 교육을 받아 작전 지역에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도록 했다. 초기에는 자원병으로만 부대를 구성했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정규군과 통합되고 부대의 활용도가 높아짐에 따라 이 원칙은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1939년 12월 15일 신병 입대로 창설된 지 3개월이 채 안 되어 중대에서 대대로 확대되었다. 최초의 대대는 목표 지역의 민족 구성에 맞춰 4개의 중대로 편성되었으며, 오토바이 소대와 낙하산 소대도 포함되었다.

부대 ! 담당 지역/특징 |
발트 3국 / 러시아 지역 출신 인원 |
영어권 지역 및 북아프리카 거주 경험자 |
주데텐 독일인 / 유고슬라비아인 |
폴란드 등 구 외지 거주 독일인 |
기동 임무 지원 |
낙하산 소대 | 공중 침투 임무 수행 |



이후 대대는 코카서스 출신 인원으로 구성된 Arabische Brigade|아라비셰 브리가데de(아랍 여단)과 같은 추가 혼성 부대를 창설하며 확대되었다. 이들은 브란덴부르크와 연계하여 중동 지역 작전에 투입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사단 대원들은 5개월에서 7개월간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 과정에는 정찰, 수영, 백병전, 폭파, 독일 및 연합군 무기 사격술, 일반 보병 전술 및 기타 특수 기술 교육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파괴 공작, 파괴 공작 방지, 정보 수집, 전략적 요충지 확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적군 병사로 위장하여 명령 체계를 교란하거나 보급선을 차단하는 등의 비정규전 방식 때문에, 전통적인 군사관을 가진 일부 독일 장교들은 브란덴부르크 부대의 활동을 불명예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2. 3. 소속원 선발 및 훈련

브란덴부르크 사단 창설의 핵심 아이디어는 테오도르 폰 히펠 대위로부터 나왔다. 그는 사보타주 훈련을 받고 외국어에 능통한 소규모 특수부대가 적진 후방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적의 지휘, 통신, 보급선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1] 히펠의 이러한 구상은 국방군의 보수적인 장교들에게는 비전통적이고 불명예스럽게 여겨져 거부당했으나, 국방군 정보부 사령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초기 반대[1]에도 불구하고 정보부 과장 헬무트 그로스쿠르트의 지지를 얻어[1] 결국 부대 창설로 이어졌다.[1]

브란덴부르크 사단의 전신은 1939년 폴란드 침공 이전에 창설된 ''에빙하우스 자유군단''(Freikorps Ebbinghaus)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아프베어 제2국 소속 에르빈 폰 라호우젠 대령은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실레지아인과 독일계 민족으로 구성된 소규모 전투 부대, 이른바 ''K-트루프''(K-Trupps)를 조직했다. 이들의 임무는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독일 국방군 정규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확보하는 것이었다. 초기 K-트루프 대원들은 군 복무 경험이 없는 민간인이었으나, 아프베어로부터 단기간 훈련을 받고 군 장교의 지휘를 받았다. 폴란드 전역 이후 이들은 정식 국방군 소속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사단원의 선발 기준은 힘러의 친위대와는 달랐다. 아리아인의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실제 작전에 필요한 능력, 특히 언어 능력을 중시했다. 이에 따라 독일 내 슬라브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 배경을 가진 인원들이 모집되었으며, 심지어 영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자원한 이들도 있었다. 지원자는 최소 한 개 이상의 외국어에 능통해야 했으며, 다수의 언어를 구사하는 대원도 많았다. 또한, 작전 지역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기에 관련 교육도 이루어졌다.

선발된 대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높았다. 초기에는 자원병으로만 구성되었으나[1],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원칙은 점차 희미해졌다. 대원들은 민첩성, 임기응변 능력, 주도성, 팀워크 정신을 갖추어야 했으며, 외국어 능력과 외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높은 수준의 신체 능력이 요구되었다.

훈련은 5개월에서 7개월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정찰, 수영, 백병전, 폭파 기술
  • 독일군 및 연합군 무기 사격술
  • 일반 보병 전술
  • 낙하산 강하, 은밀 작전, 차량 및 항공기 운용 기술
  • 전차를 포함한 적군 무기 사용법 숙달
  • 작전 지역의 언어, 관습, 전통 교육


일부 대원들은 조종사 기술, 위조, 특수 폭파, 위장 등 더욱 전문화된 훈련을 받기도 했다. 특정 중대는 북부 소련에서의 작전을 대비하여 127명의 크로스컨트리 스키 숙련자로 구성되고 개썰매를 장비하는 등 특수한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선발과 훈련을 통해 브란덴부르크 사단은 적 후방 침투, 사보타주 및 방첩 활동, 정보 수집, 주요 시설 확보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대원들은 적군 병사나 현지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했으며, 저지대 침공 시 네덜란드 바지선 승무원으로, 유고슬라비아 침공 시 세르비아 노동자로, 바르바로사 작전 시 소련 노동자나 적군 병사로 위장하여 침투 작전을 수행했다.

초기 대대는 다음과 같이 4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지역 전문성을 가졌다.

중대담당 지역 및 인원 구성
제1중대발트 3국 / 러시아 지역 출신 인원
제2중대영어권 지역 및 북아프리카 거주 경험이 있는 자
제3중대주데텐 독일인 / 유고슬라비아
제4중대폴란드 등 구 외지 거주 독일인(Volksdeutsche)



이 외에도 오토바이 소대와 낙하산 소대가 포함되었다.

3. 작전

브란덴부르거즈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국방군 소속 특수부대로, 아프베어(Abwehr, 국방군 정보부)의 지휘 아래 적 후방 침투, 사보타주, 정찰, 중요 목표 확보 등 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했다.[1] 부대원들은 목표 지역의 언어와 관습에 능통했으며, 종종 적군 복장이나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했다.[1]

1939년 폴란드 침공 시 처음 투입된 이후[1], 스칸디나비아, 서유럽, 발칸반도, 동부 전선, 북아프리카 등 주요 전선에서 활동했다. 초기에는 소규모 부대로 시작하여 사단 규모까지 확대되었으며,[1] 베저위붕 작전, 프랑스 공방전, 마리타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 등 주요 공세 작전의 선봉에서 교량, 비행장 등 전략적 요충지를 기습 점령하여 독일 본대의 진격을 지원했다.[1]

전쟁 후반기에는 특수 작전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정규 보병 또는 기갑척탄병 부대로 전환되어 동부 전선 등에서 일반 전투 임무에 투입되었고 큰 손실을 입었다.[1] 일부 병력은 오토 스코르체니 휘하의 친위대 특수부대로 편입되기도 했다.[1] 브란덴부르거즈는 폴란드 침공 초기와 발칸반도에서의 반파르티잔 작전 중 민간인 학살 등 전쟁 범죄에 연루된 기록이 있다.[1]

3. 1. 주요 작전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작전 (백색 상황) 전날 밤, 민간인 복장을 한 독일 특수부대원들이 침공 전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침투했다.[1]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특수부대가 전투에 참여한 첫 사례였다.[1] 침공 초기 활동했던 ''에빙하우스 자유군단''은 대부분 폴란드어에 능숙한 민족 독일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요한 다리와 전략 목표를 확보하여 독일 본대의 진군을 도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폴란드 민간인과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1] 1939년 9월 4일, 폴란드 프슈치나에서 이들은 중학교 보이 스카우트 단원들을 포함한 17명을 처형했으며, 오제셰에서는 민간인 29명을 고문하고 살해했다.[1] 또한 9월 8일 상부 실레시아의 시에미아노비체실롱스키에에서 폴란드인 6명을 처형했고, 10월 1일에는 노비 비톰에서 18명을 총살했다.[1] 카토비체에서는 수백 명을 학살하는 등 더 큰 규모의 만행을 저질렀다.[1] 침공 개시 2주 만에 에빙하우스 자유군단은 13개 이상의 폴란드 도시와 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 에빙하우스 자유군단은 폴란드 침공 작전 후 해체되었다.

아프베어 국장 빌헬름 카나리스는 테오도어 폰 히펠에게 에빙하우스 자유군단과 유사한 부대 창설을 지시했고, 1939년 10월 25일, 주로 전 에빙하우스 대대 출신들로 구성된 '''제800 특수 임무 건설·교도 중대'''가 창설되었다. 부대원 모집 시 외국어 구사 능력이 필수 조건이었으며, 특정 지역의 관습과 전통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졌다. 1939년 12월 15일, 부대는 대대 규모로 확장되어 '''제800 특수 임무 건설·교도 대대'''가 되었다.[1] 초기 대대는 다음과 같이 언어 능력에 따라 4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중대담당 지역 및 언어
제1중대발트 3국 / 러시아 지역 출신
제2중대루마니아 출신 민족독일인 (독일계 루마니아인)[1]
제3중대체코어, 슬로바키아어, 루테니아어 구사 주데텐 독일인
제4중대유고슬라비아 출신 민족독일인



이 외에도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신 지원자들과 오토바이 소대, 공수 소대도 포함되었다.[1] 창설 초기에는 루마니아 유전과 터키의 크롬 광석 공급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1]

브란덴부르거즈 1개 소대는 1940년 4월 베저위붕 작전 (스칸디나비아 침공)에 참여하여 덴마크노르웨이의 전략 목표를 확보했다.[1]

1940년 봄 저지대 국가 침공 작전 (황색 작전)에서는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 진격로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5월 8일부터 적군 복장을 착용하고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로 침투했다. 네덜란드 헤네프의 마스강 다리를 확보한 작전이 대표적이다. 빌헬름 발터 중위가 이끄는 8명의 팀은 네덜란드 군경으로 위장하여 다리를 기습 점령하고 폭파 장치를 해제했다.[1] 제3중대는 벨기에 내 61개 목표 지점 중 42개를 성공적으로 확보했다.[1] 이러한 활약으로 브란덴부르거즈는 독일군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국방군최고사령부 총장 빌헬름 카이텔은 카나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들의 뛰어난 전투력을 칭찬했다.[1] 히틀러는 작전에 참여한 600명 중 75%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했다.[1] 1940년 10월, 부대는 연대 규모로 확장되어 '''제800 특수 임무 교도 연대 브란덴부르크'''가 되었다.[1]

1942년 6월, 북아프리카 도라 작전 중 지도 연구 중인 브란덴부르거즈 장교들


1941년 4월 6일 시작된 마리타 작전 (발칸 침공)에도 투입되었다.[1] 이들은 바르다르강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리를 확보하고, 세르비아루마니아 국경의 도나우강 협곡(철문)을 장악했으며, 이후 유보이아 섬을 점령했다.[1] 작전 개시 전날에는 제3대대 소속 54명이 오르쇼바의 중요 조선소를 점령하기도 했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 초기 단계에서도 브란덴부르거즈는 선봉에 섰다. 이들은 독일-소련 국경을 가장 먼저 넘어 전력 생산 시설 파괴, 통신선 차단, 허위 정보 유포, 잠복 요원 활성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1] 가장 주목할 만한 작전은 1941년 6월 28일, 라트비아 다우가프필스다우가바강 다리를 점령한 것이다. 제8중대원들은 노획한 소련군 트럭을 타고 다리를 건너 경비 병력을 제압하고, 이후 2시간 동안 소련군의 반격을 막아냈다.[1] 우크라이나에서는 나흐티갈 대대와 협력하여 중앙군 집단을 지원했다.

1942년 8월 초, 아드리안 폰 푈커잠 남작이 이끄는 62명의 발트 독일인 및 주데텐 독일인 부대는 마이코프 유전 점령을 목표로 소련군 후방 깊숙이 침투했다. 이들은 NKVD 요원으로 위장하고 소련군 트럭을 이용해 전선을 통과했다. 도중에 마주친 붉은 군대 탈영병 대집단을 설득하여 부대에 합류시킨 뒤, NKVD 장교 행세를 하며 마이코프 방어 사령관에게 접근했다. 8월 8일, 독일군 본대가 접근하자 푈커잠 부대는 수류탄을 사용하여 포격 소리로 위장하고 도시의 통신 센터를 파괴했으며, 소련군 지휘관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왔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혼란을 야기했다. 결국 8월 9일, 독일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마이코프를 점령했다.[1]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브란덴부르거즈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활동하며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등지에서 연합군 보급선을 교란하는 작전을 수행했다.[1] 이들은 영국군 복장과 노획 차량을 사용하며 영국 장거리 사막 정찰대 (LRDG)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42년 12월 26일, 영국군 보급로와 다리를 파괴하기 위해 글라이더로 침투한 작전은 대부분의 강하병이 전사하는 재앙적인 실패로 끝났다.[1]

1943년, 부대는 '''브란덴부르크 사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으나, 특수 작전보다는 정규 보병 부대처럼 전선의 틈을 메우는 "소방수" 역할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1] 일부 부대는 발칸 반도에서 반파르티잔 작전에 참여했다.[1] 1943년 중반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으로 돌아서자, 많은 브란덴부르크 부대원들이 이탈리아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주요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발칸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1944년부터 사용된 ''브란덴부르크'' 소맷동


오토 스코르체니 (왼쪽)와 아드리안 폰 푈커삼 (오른쪽), 1944년 10월 16일 판처파우스트 작전 이후 부다페스트에서


이 중 하나가 터키 해안 근처 도데카니사 제도코스섬이었다. 1943년 9월 영국군과 연합군 측 이탈리아군이 주둔한 코스 섬을 탈환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해안 강습 대대와 강하 중대가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와 함께 투입되었다.[1] 이들은 야간 강하 후 섬을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1944년 5월 25일에는 사단 일부 병력이 제500SS 강하엽병대대에 배속되어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생포하려 한 뢰셀스프룽 작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1]

1944년 9월, 독일 상층부는 더 이상 특수부대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브란덴부르크 사단을 '''보병사단 브란덴부르크'''로 재편하고 동부 전선에 투입했다.[1] 약 1,800명의 병력(폰 푈커잠 포함)은 오토 슈코르체니가 지휘하는 SS 제502엽병대대 (이후 SS 제600공수대대 및 SS 야크트페어반트로 개편)로 이관되어 종전까지 싸웠다.[1] 쿠르퓌어스트 연대만이 본래의 특수부대 임무를 유지했다.[1]

1944년 말, 사단은 전차 연대를 배속받아 '''기갑척탄병사단 브란덴부르크'''로 다시 개편되어 동부 전선에 재투입되었다. 이들은 메멜 인근의 격렬한 전투에 참여했으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와 함께 필라우로 후퇴했다. 필라우 근처 전투에서 사단은 거의 전멸했고, 약 800명의 생존자만이 비스툴라 곶으로 간신히 탈출했다.[1] 일부 생존자는 1945년 5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했으며, 다른 일부는 프랑스 외인부대에 지원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1]

4. 부대 개편 및 해체

1942년 후반까지 브란덴부르크 연대의 대부분은 엘리트 보병으로서 독일군 전선의 틈새를 메우는 "화재 진압 부대" 임무에 투입되었다. 1943년 2월, 브란덴부르크는 전선에서 철수하여 독일로 돌아왔다. 이때 연대는 브란덴부르크 사단으로 승격되었지만, 일부 연대는 동부 전선으로 돌아가 "화재 진압 부대" 임무를 재개했다. 다른 일부 대대는 아프리카로 보내져 지중해의 연합군에 대한 교란 작전을 계속했으며, 남은 부대는 발칸 반도로 보내져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상대로 한 작전에 투입되었다.

1944년 5월 25일, 사단 소속의 특수 작전 전문가들이 제500SS 강하엽병대대에 배속되어 Operation Rösselsprung|말의 도약 작전de에 참가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드르바르 근교의 사령부에서 생포하여 발칸 반도에서의 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 운동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토는 SS 강하엽병이 그의 지하 사령부에 돌입하기 직전에 탈출했다. SS 강하엽병은 도시의 묘지로 후퇴하여 참호를 파고 밤까지 파르티잔의 맹렬한 공격을 견뎌냈으나, 이 과정에서 파르티잔 측 사상자 약 6,000명에 비해 제500SS 강하엽병대대는 전사 213명, 부상 881명, 행방불명 51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고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브란덴부르크 기갑척탄병 사단” 부대 휘장


한편,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이끌던 국방군 정보부는 처음부터 발터 쉘렌베르크가 지휘하는 친위대 정보부(SD)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국방군 정보부 내 나치스에 대한 반감은 1944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카나리스를 포함한 몇몇 국방군 정보부 고위 간부들이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게 되면서, 브란덴부르크 부대의 지휘권은 SD로 넘어가게 되었다. 1944년 9월, 특수 작전 부대로서의 사단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기동보병 및 전차 연대 장비를 갖춘 '''Panzer-Grenadier-Division Brandenburg|브란덴부르크 기갑척탄병 사단de'''으로 개편되어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페르커잠 남작을 포함한 약 1,800명의 대원들은 오토 스코르체니 SS대령의 SS-Jagdverbände|SS 구축전대de로 전속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특수 부대로서 작전을 계속했다.

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일반적인 전투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부대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기도 했지만, 브란덴부르크 사단은 여전히 엘리트 부대로 간주되었고, 1940년에서 1941년 사이에 함께 훈련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사단에 배속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사단은 동부 전선에서 발트해 연안을 따라 동프로이센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사단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을 따라 메멜 전투에 참가했으며, 페리를 타고 필라우로 철수할 때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사단은 필라우 인근에서의 격전으로 거의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소수의 생존자들은 1945년 5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했지만, 많은 대원들은 그동안 익힌 은신 및 잠적 기술을 활용하여 추적을 피해 모습을 감추었다.

5. 전후 활동

죽음이나 체포를 피한 브란덴부르크 대원 중 다수는 다른 특수 부대 출신들처럼 전후 민간인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프랑스 외인 부대에 입대했는데,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던 규모가 큰 프랑스 외인 부대 중에는 과거 무장친위대나 독일 육군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독일인 부대가 있었으며, 여기에는 일부 전 브란덴부르크 대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러시아 역시 전 브란덴부르크 대원들을 비밀 부대의 고문이나 공작원으로 채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브란덴부르크 대원들은 용병이나 군사 고문으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지로 건너가 활동했다. 특히 새롭게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발생한 여러 쿠데타는 이들에게 활동 기회를 제공했다. 수카르노 대통령 시절 인도네시아의 보안 책임자 중 한 명은 전 브란덴부르크 대원이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콩고 민주 공화국의 분리 독립을 주장했던 모이즈 촘베 역시 전 브란덴부르크 대원들의 조언을 받았다. 또한 많은 대원들이 무하마드 나기브가 이끌던 이집트군에 고용되었고, 일부는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6. 부대 구조

'''제800 특수임무 건설·교도대대 (1939년 12월)'''

부대명 (독일어)부대명 (한국어)
1. Kompaniede제1중대
2. Kompaniede제2중대
3. Kompaniede제3중대
4. Kompaniede제4중대
Kradschützen Zugde오토바이 소대
Fallschirm-Zugde공수부대 소대



'''브란덴부르크 사단 (1943년 2월 ~ 1944년 3월)'''

부대명 (독일어)부대명 (한국어)
Stab der Divisionde사단 본부
Regiment 1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제1연대
Regiment 2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제2연대
Regiment 3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제3연대
Regiment 4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제4연대
Lehr-Regiment 5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교도 제5연대
Tropische Einheiten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열대지전 부대
Küstenjäger-Abteilung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해안엽병대대
Fallschirm-Battaillon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공수부대대대
Nachrichten-Abteilung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통신대대



'''브란덴부르크 장갑척탄병 사단 (1944년 ~ 1945년)'''

부대명 (독일어)부대명 (한국어)
Stab der Divisionde사단 본부
Panzer-Regiment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전차연대
Jäger(mot)-Regiment 1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제1엽병연대 (자동차화)
Jäger(mot)-Regiment 2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제2엽병연대 (자동차화)
Panzerjäger-Abteilung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장갑엽병대대
Panzer-Artillerie-Regiment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기갑포병연대
Heeres-Flakartillerie-Abteilung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육군 대공포병대대
Panzer-Aufklärungs-Abteilung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기갑정찰대대
Panzer-Pionier-Bataillon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기갑공병대대
Nachrichten-Abteilung Brandenburgde브란덴부르크 통신대대
보급부대보급부대


6. 1. 특별 부대

베르크만 대대(Bergmann, 뜻: "광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아프베어 소속의 군사 부대로, 소련의 코카서스 지역 출신 지원병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독일 장교의 지휘 아래 5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대대는 1941년 10월, 당시 독일령이었던 노이하머에서 코카서스 공화국 출신 망명자들과 소련 포로들로 창설되었다. 독일 특수부대인 브란덴부르거에 배속되었으며, Oberleutnant|오버로이트난트deu(중위) 테오도르 오버랜더가 지휘를 맡았다. 이들은 노이하머와 미텐발트(바이에른)에서 독일 산악엽병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이후 "타마라-II"라는 암호명을 가진 130명의 조지아 출신 아프베어 특별 부대원들이 베르크만 대대에 합류했다. 1942년 3월까지 베르크만 대대는 약 300명의 독일인과 900명의 코카서스인으로 구성된 5개 중대 규모를 갖추었다.

1942년 8월, 베르크만 대대는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코카서스 전투에 투입되면서 첫 실전을 치렀다. 이들은 반(反) 빨치산 작전에 참여하며 모즈도크-날치크-미네랄니예 보디 지역에서 활동했고, 그로즈니 인근에서는 정찰 및 파괴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1942년 말에는 소련군 전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하여 약 300명의 붉은 군대 탈영병을 이끌고 복귀했으며, 독일군의 코카서스 철수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1943년 2월에는 크림 반도에서 소련 빨치산 및 정규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다른 동방군단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베르크만 대대 역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1943년 말 해체되었다. 해체 후 대폭 축소된 규모의 부대원들은 그리스와 폴란드로 보내져 경찰 관련 임무를 수행했다.

나흐티갈 대대(Nachtigall, 공식 명칭: 특수 부대 나흐티갈)와 롤란트 대대(Roland, 공식 명칭: 특수 부대 롤란트)는 아프베어의 특수 작전 부대인 브란덴부르거(제1 브란덴부르거 대대) 소속의 하위 부대들이었다. 이 부대들은 1941년 2월 25일, 아프베어의 수장인 빌헬름 프란츠 카나리스 제독이 독일의 지휘를 받는 "우크라이나 군단" 창설을 승인하면서 조직되었다. 부대원의 대부분은 반데라가 이끄는 OUN의 지시에 따라 합류한, 당시 독일에 점령된 폴란드 지역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었다.

1941년 5월, 독일 사령부는 약 700명 규모의 우크라이나 군단을 나흐티갈("나이팅게일"이라는 뜻) 대대와 롤란트 대대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나흐티갈 대대는 슐레지엔 근처의 노이하머에서 훈련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측 지휘관은 로만 슈케비치였으며, 독일 측 지휘관은 테오도르 오버랜더(훗날 서독에서 연방 장관을 지냄)였다. 전 브란덴부르거 부대원이었던 Oberleutnant|오버로이트난트deu 한스-알브레히트 헤르츠너가 대대의 군사 지휘를 담당했다. 나흐티갈 부대원들은 표준 독일 국방군 군복을 착용했으며, 리비우에 입성하기 전에는 어깨에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 리본을 달았다. 롤란트 대대는 "Im Dienst der Deutschen Wehrmacht|임 디엔스트 데어 도이첸 베어마흐트deu"(독일 국방군 복무 중)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색 완장을 착용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복을 입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된 오스트리아군 철모를 지급받았다.

이들 우크라이나 부대는 아프베어에 의해 창설되었고, 1941년 3월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 이전에 OUN(b) 소속의 리하르트 야리가 조직을 담당했다. 약 350명의 반데라 OUN 추종자들이 전 폴란드 육군 소령이었던 예우헨 포비구쉬치의 지휘 아래 자이베르스도르프에 위치한 아프베어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1년 11월, 독일에 있던 우크라이나 군단 인력은 제201 슈츠만샤프트 대대로 재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650명 규모로 구성되었으며, 해산되기 전까지 벨라루스 지역에서 약 1년간 활동했다. 부대가 해산된 후, 지휘관을 비롯한 많은 대원들은 우크라이나 반군에 합류했으며, 그중 14명은 1943년 봄에 SS 의용 척탄병 사단 "갈리치아"(SS-Freiwilligen-Schützen-Division Galizien)로 자리를 옮겼다.

참조

[1] 문서 z. b. V.: zur besonderen Verwendung の略
[2] 웹사이트 Indian Volunteers in the German Wehrmacht http://www.feldgr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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