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스타루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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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르 스타루힌은 러시아 제국 출신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에서 활약하며 통산 303승을 기록,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300승을 달성한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1939년과 1940년 MVP를 수상했으며, 196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5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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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스타루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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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빅토르 스타루힌 |
원어 이름 | Ви́кт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тару́хин (러시아어), ヴィクトル・スタルヒン (일본어), 빅토르 스타루힌 |
별칭 | "푸른 눈의 일본인" (青い目の日本人) |
로마자 표기 | Viktor Konstantinovich Starukhin |
출생일 | 1916년 5월 1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페름 현 니즈니타길 |
사망일 | 1957년 1월 12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 |
키 | 191cm |
몸무게 | 90kg |
타석 | 우 |
투구 | 우 |
선수 경력 | |
포지션 | 투수 |
프로 입단 년도 | 1934년 |
첫 출장 | 1936년 7월 3일 |
마지막 출장 | 1955년 10월 8일 |
소속팀 | 도쿄 교진군 (1934–1944) 퍼시픽/다이요 로빈스 (1946–1947) 긴세이 스타스/다이에이 스타스 (1948–1953) 다카하시 유니온스/톰보 유니온스 (1954–1955) |
기록 및 수상 | |
리그 | JBL/NPB |
승-패 기록 | 303–176 |
평균 자책점 | 2.09 |
완봉승 | 83 |
투구 이닝 | 4,175.1 |
탈삼진 | 1,960 |
일본 야구 트리플 크라운 | 1938년 가을 |
일본 야구 리그 MVP | 2회 (1939, 1940) |
베스트 나인 수상 | 1940년 |
노히트 노런 | 1937년 7월 3일 |
20승 이상 시즌 | 6회 (1937, 1938, 1939, 1940, 1942, 1949) |
30승 이상 시즌 | 3회 (1938, 1939, 1940) |
40승 시즌 | 1939년 |
올스타 선정 | 1952년 |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최다 완봉승 | 83회 |
명예의 전당 | |
명예의 전당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유형 | 일본 |
헌액 년도 | 1960년 |
기타 정보 | |
국적 | 무국적 |
학교 | 구제 홋카이도청립 아사히카와 중학교 (중퇴) |
2. 일본으로의 망명과 유년 시절
빅토르 스타루힌은 러시아 제국 페름 현 니즈니타길에서 태어났다.[89] 러시아 혁명 이후, 1925년 그의 가족은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에 정착했다.[89]
2. 1. 유년 시절과 야구와의 만남
빅토르 스타루힌은 1916년 러시아 제국의 니즈니 타길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과 함께 만주의 하얼빈을 거쳐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에 정착했다.[5]어린 시절, 스타루힌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뛰어난 운동 신경을 바탕으로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특히 100미터 달리기에서는 급우들이 20미터 앞에서 출발해도 이길 정도였으며, 11세에 이미 키가 180cm에 달했다.[5] 아사히카와 히가시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야구를 접하게 되었는데, 큰 키와 뛰어난 운동 능력은 야구에 적합했고, 이를 통해 급우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아버지의 잦은 음주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5]
스타루힌은 일본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홋카이도 예선에서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했지만, 두 번 모두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5]
1916년 스타루힌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러시아 제국 니즈니 타길에서 로마노프 왕조 장교였던 아버지 콘스탄틴과 어머니 에우도키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가족 중에 왕당파가 있었기 때문에 혁명 정부(공산주의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가족은 혁명군에게 쫓기면서 우랄 산맥에서 광대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 하얼빈까지 도망쳤다. 1925년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일본 입국에 필요한 많은 돈을 어머니가 숨겨 두었던 보석으로 간신히 마련하여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에 들어왔다. 일본에서는 무국적의 "백계 러시아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애칭은 '''비자'''였다.[13]
아사히카와 시립 니치쇼 소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백인이 드물었던 탓에 주변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적이 우수하고 운동 신경도 뛰어나 달리기 시합에서 20m 뒤에서 출발해도 1등을 할 정도였다.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소년 야구가 성행했는데, 스타루힌도 학교 팀에서 활약했다. 또한, 보통소학교 5학년 때 이미 180cm를 넘었기 때문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고등소학교 팀에 들어가 있었다.[14]
3. 학창 시절
스타루힌은 구제 아사히카와 중학교(旭川中学校, 후의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히가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들어갔다. 중학교에서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전국 중등학교 우승 야구 대회 홋카이도 대회에서 2년 연속(1933년, 1934년) 결승에 진출했으나, 아군의 실책 등으로 패배하여 고시엔 진출은 좌절되었다. 1932년 고요 학원 야구부 초대로 효고현 고베시로 이주했으나, 이적은 무산되었다.
구제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살인 사건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와세다 대학 진학 대신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과의 일미야구 경기를 위해 구성된 전일본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프로 야구가 없던 당시, 문부성의 통지로 인해 요미우리 신문은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을 결성했고, 스타루힌은 아사히카와 중학교를 중퇴해야만 했다. 여기에는 요미우리 신문 오너 쇼리키 마쓰타로의 협박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3. 1. 중학교 (구제) 시절
구제 아사히카와 중학교(旭川中学校, 후의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히가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들어갔다. 과거 고등소학교 팀에 들어갈 수 없어 급우들과 야구를 할 수 없었던 경험 때문에, 야구부 입부 당시 "정말로 모두와 함께 야구를 해도 되는 건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14] 중학교에서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전국 중등학교 우승 야구 대회의 홋카이도 대회에서는 2년 연속(1933년, 1934년) 결승에 진출했으나, 아군의 실책 등으로 아깝게 패배하여 여름 고시엔에는 한 걸음 미치지 못했다.
1932년 아들이 고요 학원 야구부에 초대되자 가족과 함께 효고현 고베시로 이주하여, 학원 측의 지원으로 빵집을 경영했지만, 동현 타교의 항의로 이적 이야기가 무산되어 아사히카와로 돌아왔다.
구제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스스로 경영하던 카페 「바이칼」의 종업원에 대한 살인 사건을 일으켜 징역 8년의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살인자의 아들"이 되었지만, 이미 아사히카와 중학교의 투수로 유명했던 스타루힌 자신에게는 동정이 모였다.[15] 이 사건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구제 중학교의 수업료와 생활비조차도 동급생들의 모금에 의지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고,[16]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희망했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것도 있어 대학 진학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1934년 11월 25일,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과의 일미야구 경기를 위해 구성된 전일본팀에 거의 강제로 끌려들어갈 뻔했다. 전년도 일미야구에서 17전 전패를 당하고 그 해에도 5연패를 기록했던 전일본 감독 시오카 타다오에게는 우선 1승을 거둔다는 최우선 과제를 위해 “괴투수”를 영입한다는 아이디어였다.
프로 야구가 탄생하지 않고 야구 인기가 주로 6개 대학 아마추어 선수들에 의해 유지되던 당시, 문부성은 "학생 야구 선수를 프로 구단과 경기시켜서는 안 된다"는 통지를 내렸다. 따라서 전일본팀을 모체로 주최 측인 요미우리 신문은 직업 야구단인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을 결성했다. 교토 상업의 사와무라 에이지 선수를 중퇴시켰던 것과 같은 수법으로 스타루힌을 퇴학시켜 팀(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합류시키려 했고, 아사히카와에 스카우트를 보냈지만, 지역 스타를 빼앗기는 것을 아사히카와 시민들과 학교 측이 반대했다.[17]
고시엔에 출전시키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던 스타루힌 자신에게는 고심 끝의 결정이었지만, 앞서 언급된 경제적 사정과 더불어 망명자였던 그가 거절할 경우 가족 전체의 국외 추방, 즉 소비에트 연방으로의 강제송환 가능성을 암시받았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아사히카와 중학교를 중퇴하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어머니와 함께 상경했다. 급하게 밤에 도망치듯 기차에 올라탔고, 반 친구들에게는 아무런 사정도 알리지 않았다. 기적 소리가 “가지 마!”라고 외치는 친구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고 후에 아내에게 이야기했다.[18]
중학교 중퇴와 전일본팀, 그리고 자이언츠 입단 배경에는 일미야구를 주최했던 요미우리 신문 오너 쇼리키 마쓰타로의 의지가 있었고, 스타루힌이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요미우리 매수 이전 경시청 실력자였던 쇼리키가 스타루힌의 아버지의 전과를 빌미로 일본 국적이 없는 스타루힌 일가를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작가 사노 신이치가 저서[19]에서 단언하고 있다.
3. 2. 전일본 선발
1934년 11월 25일,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과의 일미야구 경기를 위해 구성된 전일본팀에 스타루힌이 발탁되었다.[17] 전년도 일미야구에서 17전 전패를 당하고 그 해에도 5연패를 기록했던 전일본 감독은 1승을 위한 "괴투수" 영입을 원했다.당시 문부성은 "학생 야구 선수를 프로 구단과 경기시켜서는 안 된다"는 통지를 내렸다.[17] 요미우리 신문은 전일본팀을 모체로 직업 야구단인 "대일본 도쿄 야구 클럽"(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을 결성했다.[17] 사와무라 에이지 선수를 중퇴시켰던 것과 같은 수법으로 스타루힌을 퇴학시켜 팀에 합류시키려 했지만, 아사히카와 시민들과 학교 측이 반대했다.[17]
고등학교(중학교)를 고시엔에 출전시키고자 했던 스타루힌은 고심했지만, 경제적 사정과 망명자 신분으로 인해 거절할 경우 가족 전체가 소련으로 강제송환될 가능성을 암시받아 거절할 수 없었다.[18] 그는 아사히카와 중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와 함께 상경했다.[18]
요미우리 신문 오너 쇼리키 마쓰타로는 스타루힌의 아버지의 전과를 빌미로 일본 국적이 없는 스타루힌 일가를 협박했다는 주장이 있다.[19]
일미야구 17번째 경기에 첫 등판하여 3번째 투수로 1이닝 무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20] 1934년 11월 29일 사이타마현영 오오미야 공원 야구장에서 열린 17번째 경기의 8회부터 패전 처리로 2이닝을 던진 것이 그의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데뷔였다. 1935년 2월부터 시작된 미국 원정에 참가하게 되지만, 무국적이었기 때문에 여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22]
4. 프로 선수 시절
Викт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тарухин|빅토르 콘스탄티노비치 스타루힌ru은 종전 후인 1946년 주둔군의 지프를 타고 가던 중 우연히 퍼시픽 감독 후지모토 사다요시를 다시 만나, 자이언츠의 제의를 거절하고 퍼시픽에 복귀했다.[13] 그러나 야구를 떠나 있던 스타루힌은 체중이 많이 불어 훈련을 해도 쉽게 예전 체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29] 같은 해 10월 20일 골드스타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48년 후지모토가 긴세이 스타스 감독으로 취임하자, 스타루힌은 이세가와 마스미와 함께 긴세이로 이적했다. 1949년에는 27승을 거두며 9년 만에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다.
1954년 다카하시 유니온즈로 이적했다. 1955년 4월 13일 다이에이 스타즈전에서 팀의 첫 승리를 현역 마지막 83번째 완봉승으로 장식했고, 9월 4일 다이에이전(니시쿄고쿠 경기장)에서 사상 최초로 통산 300승을 완투승으로 달성하며 그 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1957년, 스타루힌은 도쿄 세타가야에서 아사히카와 히가시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던 중 도큐 다마가와 선(현재 도큐 덴엔토시 선으로 대체됨)에서 전차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6]
4.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36년 도쿄 교진군(대일본도쿄야구클럽(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다이닛폰도쿄야큐쿠라부일본어)의 후신)에 입단하여 사와무라 에이지에 이어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23] 입단 초기에는 직구는 좋았지만 제구가 불안정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후지모토 테이기 감독의 격려와 훈련으로 제구력을 향상시켰다.[17][20]1937년 춘계 리그 7월 3일 대 이글스전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23] 춘계 리그 13승, 추계 리그 15승으로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다. 1938년 춘계 리그에서도 14승으로 최다승, 추계 리그에서는 19승, 평균자책점 1.05, 146탈삼진, 승률.905, 7완봉으로 투수 5관왕을 달성했다.
1939년에는 6월 20일(팀 41경기째) 대 라이온 군전에서 20승을 달성,[24] 시즌 42승(일본 프로야구 기록)으로 MVP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100승(165경기, 최고 속도 기록)을 달성했다. 또한 시즌 4개의 끝내기 안타(1969년 오오스기 카츠오에 의해 경신)를 기록했다.[25]
1940년에도 38승으로 2년 연속 MVP와 최다승을 차지했지만, 5시즌 연속 최다승은 일본 프로야구 최장 기록이다. 1939년 노몬한 사건으로 일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군부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았고,[26] 나고야 킨샤쿠군 대표 아카미네 마사시의 권유로 1940년 '''스다 히로시'''(須田 博)로 개명했다.[26]
1941년 7월 14일 40도가 넘는 고열 속 난카이전 등판으로 15승을 올렸으나, 늑막염 진단을 받고 이탈했다.[27] 1942년 4월 복귀하여 26승, 1943년 10승을 기록했지만 늑막염 재발로 다시 이탈했다.[28] 1944년 6월까지 6연승을 기록했으나, 7월 이후 국적 문제로 출전이 불가능해졌다. 11월, 무국적자임에도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가루이자와로 강제 전입되었다(공식 기록은 "병으로 인한 격리").[13]
4.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후
종전 후 스타루힌은 통역으로 주둔군의 지프를 타고 가던 중 우연히 퍼시픽 감독을 맡고 있던 후지모토 사다요시를 다시 만나, 자이언츠의 제의를 거절하고 퍼시픽에 복귀했다.[13] 같은 해 10월 20일 골드스타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1948년에 후지모토가 긴세이 스타스 감독으로 취임하자, 스타루힌은 이세가와 마스미와 함께 후지모토를 따라 긴세이로 이적했다. 1949년에는 27승을 거두며 9년 만에 최다승 타이틀을 획득했다.
1954년에는 다카하시 유니온즈에 이적했다. 1955년 봄 오카야마 캠프에서는 무라샤 고헤이 임시 코치의 지도를 받아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32] 시즌이 시작되자, 4월 13일 다이에이 스타즈전에서 팀의 첫 승리를 현역 마지막이 되는 83번째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9월 4일 다이에이전(니시쿄고쿠 경기장)에서 사상 최초로 통산 300승을 완투승으로 달성했다.
같은 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 해 팀 2위인 7승(21패)을 거두었고 본인도 현역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다음 해 감독 취임이 결정된 가사하라 가즈오가 스타루힌을 해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6]
4. 3. 은퇴
1955년, 스타루힌은 다카하시 유니온스에서 통산 300승을 달성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33] 그해 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7승(21패)을 기록했고, 본인도 현역 생활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다음 해 감독으로 취임이 결정된 카사하라 카즈오가 반(反) 카사하라 파로 여겨졌던 스타루힌을 해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6] 스타루힌은 마지막에는 무급이라도 자이언츠에서 뛰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7]9월 4일 다이에이 스타즈전(니시쿄고쿠 경기장)에서 완투승으로 통산 300승을 달성했지만, 나중에 1939년 기록을 당초 공식 기록대로 되돌렸기 때문에 같은 해 7월 30일에 열린 긴테츠 펄스전(가와사키 구장) 승리가 300승이 된다.[33] 100승, 200승, 300승을 모두 다른 팀에서 기록했는데, 이는 300승 이상 투수 6명(가네다 마사이치, 요네다 테츠야, 코야마 마사아키, 스즈키 케이지, 베쓰쇼 타케히코) 중 유일하다.[33]
경기 후 인터뷰에서 스타루힌은 "와카바야시 타다시도 42세까지 했으니, 나도 아직 계속하고 싶다"라고 말했고, 닛케이 신문에도 "나도 앞으로 5~6년은 던질 생각이다. 목표는 삼진 2000개와 완봉승 100번이다"라는 내용의 수기를 게재했다.[34] 태평양 리그에서는 포상금 50000JPY을 주었지만, 공식적인 시상식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구단주 다카하시 류타로가 직접 기념 축하회를 주최했다.[35]
은퇴 후 스타루힌은 항상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고 한다.[38]
5. 사망
1957년 1월 12일 밤, 빅토르 스타루힌은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던 중 도쿄도 세타가야구 미숙 근처에서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 전에 사망했다.[45] 경찰은 사고 원인을 음주운전과 과속으로 발표했다.[45]
5. 1. 의문의 교통사고
1957년 1월 12일 밤 10시 40분경, 스타루힌은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의 차를 몰고 도쿄도 미나토구 난아오야마에서 세타가야구 미숙에 있는 국도 246호선(다마가와도리)을 달리고 있었다. 도큐 다마가와 선 미숙역[44] 부근에서 앞 차를 추월하려다 후타코타마가와엔행 전차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차는 크게 파손되었고, 스타루힌은 구급차로 국립 세타가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경찰은 사고 원인을 만취 운전과 과속이라고 발표했다.[45] 그러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타루힌이 동창회 장소와 반대 방향으로 차를 운전했고, 차에 타고 있던 동창생들을 차에서 내리게 하고 전철로 가라고 지시하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사고 직전, 친구가 경영하는 아오야마의 볼링장 개장식에 참석하여 술을 마시긴 했지만, 만취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일각에서는 스타루힌의 죽음에 대해 자살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5. 2. 장례와 사후
1957년 1월 12일 밤, 빅토르 스타루힌은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던 중 도쿄도 세타가야구 미숙 근처에서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 전에 사망했다.[45] 경찰은 사고 원인을 음주운전과 과속으로 발표했다.[45]1957년 1월 20일, 프로 야구 사상 처음으로 비공식 '야구장례식'이 거행되었다.[39] 장례식에는 이치오카 타다오 장례위원장을 비롯해 후지모토 사다요시, 미즈하라 시게루, 가와카미 데쓰하루 등 생전에 스타루힌과 교류했던 많은 야구인들이 참석했다.[39]
스타루힌은 다마 묘원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46] 1989년에는 삼십삼회 기일에 맞춰 장녀 나타샤에 의해 아키타현 요코테시 오모누가와마치의 수념사에 분골되었다.[47]
1960년, 스타루힌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8] 아사히카와시에서는 1984년부터 시립 야구장에 '스타루힌 구장'이라는 애칭을 붙이고, 그의 동상을 세워 업적을 기리고 있다.[49]
6. 선수로서의 특징
사와무라 에이지와 함께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에 활약한 위대한 투수로, 장신에서 던지는 각도 있는 강속구의 스피드는 사와무라와 비견되었다.[12] 선수로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투구 스타일: 191cm의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구폼은 타자들에게 "2층 지붕에서 공이 급강하하는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50]
- 구종: 드롭, 슈트, 싱커[51] 외에도 포크나 너클과 같은 "아베크볼"도 던졌다.[52]
- 타격 능력: 1939년 끝내기 안타 4회, 1940년 1경기 5안타, 1955년 대타로 고의사구 기록을 남길 정도로 뛰어났다.[53]
6. 1. 투구 스타일
프로 야구 초창기 강속구 투수로서 사와무라 에이지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두 선수와 대결했던 선수들은 "구속은 거의 같았다. 사와무라 쪽이 타자의 손 앞에서 더 뻗어 나갔기 때문에 감각적으로는 사와무라 쪽이 더 빨라 보였다"는 의견을 제시했다.[50] 한편, 191cm의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구폼 때문에 타자들은 "2층 지붕에서 공이 급강하하는 것 같아서 치기 어렵다"는 평가를 했다.[50]투수로서 구종은 드롭, 슈트, 싱커였다.[51] 강속구 투수이면서도 타자와의 수싸움에 능숙하여 강속구를 중심으로 슈트와 드롭으로 완급을 조절하고, 때로는 싱커로 내야 땅볼을 유도하는 투구를 잘했다. 가끔 긴 간격 후 퀵으로 던지거나, 사이드로 던지기도 했다. 말년에는 흔들리면서 떨어지는 포크나 너클과 같은 변화하는 "아베크볼"도 던졌다.[52]
6. 2. 타격 능력
스타루힌은 투수였지만 타격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53] 1939년에 끝내기 안타를 4번 기록했고, 1940년에는 한 경기에서 5개의 안타를 쳤으며, 1955년에는 대타로 나와 고의사구를 얻어낸 기록도 있다.[53]초구부터 적극적으로 타격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상대 투수들은 초구를 바깥쪽으로 빼는 볼 배합을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스타루힌은 큰 키와 강한 힘을 바탕으로, 조금 벗어난 공도 안타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53]
7. 특기할 만한 점
스타루힌은 맥주를 매우 좋아하여 하룻밤에 대병 24병 이상을 마실 수 있는 주당이었다고 한다.[54]
1939년 시즌 빅토르 스타루힌은 42승을 기록했으나, 전후 일본프로야구 기록 재검토 과정에서 2경기가 승리 투수 요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40승으로 수정되었다.[75] 전쟁 전에는 승리 투수 선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기록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식 기록원이었던 히로세 켄조는 구원 투수를 중시하여 승리 투수와 패전 투수를 기록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1961년 이나오 카즈히사가 42승을 기록하며 스타루힌의 기록을 넘어서자, 기록 수정에 대한 논쟁이 다시 일어났다. 결국 1962년 3월 30일, 커미셔너는 "당시 공식 기록원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 스타루힌의 기록은 다시 42승으로 인정되었다.[75] 이로 인해 이나오 카즈히사의 42승은 타이 기록이 되었다.
스타루힌은 1939년 시즌에 자신의 끝내기 안타로 4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1969년 오스기 카츠오가 경신하기 전까지 30년간 프로야구 기록이었다.
7. 1. 인물
스타루힌은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으며,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성격으로 "일본인보다 일본인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9] 처가 식구들을 존중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면모가 드러났다. 그러나 "외국인", "망명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다.[9] 이러한 고뇌는 그가 오차노미즈의 니콜라이 성당을 자주 찾게 된 이유 중 하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친구와 신부를 찾았다.[9]맥주를 매우 좋아하여 하룻밤에 대병 24병 이상을 마실 수 있는 주당이었다고 한다.[54]
7. 2. 가족 관계
인물 | 관계 | 설명 |
---|---|---|
콘스탄틴 스타루힌 (Константин Старухин / Konstantin Starukhin) | 아버지 | 러시아 니즈니 타길 출신, 육군사관학교 졸업, 러시아 혁명 발발로 군직 상실.[55] 백군 가담 후 일본 망명.[56][57][58] 아사히카와시에서 모직물 행상, 밀크홀 경영.[56] 1933년 카페 종업원 살해, 징역 8년형.[56] 1938년 출소, 1943년 도쿄 사망.[56] |
에우도키아 (Евдокия / Evdokia) | 어머니 | 남편과 일본 망명, 빵을 구워 가계 도움.[56][57][59] |
레나(Lena) | 전처 | 망명 러시아 이민자 출신 미용사, 정교회 니콜라이 성당에서 만나 1938년 결혼.[9] 1941년 장남 조지 출산.[62] 1948년 이혼 후 미국 이주.[56][46] |
다카하시 쿠니에 (高橋久仁恵) | 후처 | 1948년 도쿄 러시안 클럽에서 만나 1950년 결혼.[56][57][46] 장녀, 차녀, 전처 아들 양육.[56][65] 1971년 자택 투신 사망.[65][66] |
조지 스타루힌 (ジョージ・スタルヒン) | 장남 (1941년생) | 아버지 사후 탤런트 활동.[69] |
나타샤 스타루힌 (ナターシャ・スタルヒン) | 장녀 (1951년생) | 일본항공 승무원, 선탠살롱 창업. 2008년, 2016년 시구.[71] |
7. 3. 1939년의 승리 수 논란
1939년 시즌 빅토르 스타루힌은 42승을 기록했으나, 전후 일본프로야구 기록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2경기가 승리 투수 요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40승으로 수정되었다.[75] 전쟁 전에는 승리 투수 선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기록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식 기록원이었던 히로세 켄조는 구원 투수를 중시하여 승리 투수와 패전 투수를 기록했다고 증언했다.그러나 1961년 이나오 카즈히사가 42승을 기록하며 스타루힌의 기록을 넘어서자, 기록 수정에 대한 논쟁이 다시 일어났다. 결국 1962년 3월 30일, 커미셔너는 "당시 공식 기록원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 스타루힌의 기록은 다시 42승으로 인정되었다.[75] 이로 인해 이나오 카즈히사의 42승은 타이 기록이 되었다.
참고로, 스타루힌은 1939년 시즌에 자신의 끝내기 안타로 4승을 거두었다. 이는 1969년 오스기 카츠오가 경신하기 전까지 30년간 프로야구 기록이었다.
8. 상세 정보
'''통산 수상 기록'''
스타루힌은 5시즌 연속 최다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최장 기록이다.[12] 1939년 기록한 42승은 NPB 타이 기록이다.[12] 196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3]
'''주요 기록'''([83])
기록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비고 |
---|---|---|---|---|
100승 | 1939년 11월 1일 | 금사구 | 고라쿠엔 구장 | 165경기 만에 달성[84] |
200승 | 1946년 10월 20일 | 골드스타 | 니시노미야 구장 | 313경기 만에 달성[85] |
300승 | 1955년 7월 28일 | 긴테쓰 | 가와사키 구장 | 573경기 만에 달성 (당초에는 9월 4일 다이에이전 (사이쿄고쿠 구장)으로 기록됨) |
이 기록들은 모두 NPB 최초이자 최고 속도 기록이다.[83]
또한, 스타루힌은 통산 83완봉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NPB 기록이다.
'''등번호'''
- '''18''' (1935년, 1948년)
- '''17''' (1936년~1943년, 1946년~1947년, 1949년~1955년)[1] ※ 1944년은 전 6개 구단에서 등번호가 폐지되었다.
'''등록명'''
8. 1. 연도별 투수 성적
볼넷이
브
회
안타
홈런
사구
자책점
다이요
다이에이
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