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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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尙)씨는 중국과 한국에서 모두 사용되는 성씨이다. 중국 상씨는 제나라 강태공의 후손에서 유래되었으며, 한국 상씨는 2000년 인구 조사에서 2,298명으로 152위를 기록했고, 목천을 본관으로 한다. 한국 상씨는 당나라 병마사 상가고의 후예로 전해지며, 고구려와 고려 시대에도 상씨 성을 가진 인물이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는 상진이 영의정을 역임하는 등 주요 인물이 배출되었다.
중국의 상(尙)씨는 제나라를 봉지로 받은 강태공의 후손이 송나라의 상(尙) 지역에 정착하며 성씨로 삼은 데서 유래하였다.
한국의 상씨(尙氏)는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 한국의 고대 기록에도 등장한다. 고구려 서천왕 때의 국상(國相) 상루(尙婁)나 후백제의 장군 상달(尙達), 상애(尙哀) 등이 기록된 인물이다.
2. 중국의 상씨
2. 1. 기원
상(尙)씨는 제나라를 봉지로 받은 강성(姜姓)의 강태공 후손에서 유래한다. 이들은 제나라와 인접한 송나라의 상(尙)이라는 지역에 정착하면서 해당 지역명을 성씨로 삼았다. 비록 후기 제나라는 전씨(田氏) 공족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강태공의 후손인 강성 공족 역시 주요 귀족 세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흡수한 후, 일부 강성 공족들이 옛 송나라 땅이었던 상(尙)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상(尙)씨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2. 발전
상(尙)씨는 강태공의 후손에서 비롯되었다. 강태공은 제나라를 봉지로 받았으며, 그의 후손 중 일부는 제나라와 인접한 송나라의 상(尙)이라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들이 지역 이름을 따서 상(尙)을 성씨로 삼게 되었다.
후기 제나라는 전씨(田氏) 공족이 주도하였으나, 강태공의 후손인 강성(姜姓) 공족 또한 주요 귀족 세력으로 유지되었다. 이후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하게 되자, 제나라의 강성 공족 일부가 옛 송나라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던 지역의 이름인 '상(尙)'을 성씨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3. 한국의 상씨
현재 한국의 상씨는 목천(木川)을 단일 본관으로 하며,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 결과 2,298명으로 나타나 한국 성씨 중 인구 순위 152위를 기록했다. 목천 상씨는 고려 시대 인물인 상국진(尙國鎭)을 시조로 하며, 조선 시대에는 영의정을 지낸 상진(尙震)과 같은 인물을 배출하는 등 역사를 이어왔다.[1]
3. 1. 기원 및 본관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 산서성 상당(上黨)에서 유래한 성씨로, 당나라 덕종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서천왕 때 국상(國相) 음우의 아들 상루가 271년(서천왕 2) 국상에 임명되어 294년(봉상왕 3)까지 재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후백제의 장군 상달과 상애 등의 이름이 보인다.
현재 한국의 상(尙)씨는 목천(木川)을 단일 본관으로 한다. 목천 상씨의 시조 '''상국진'''(尙國鎭)은 목천(木川)의 호장(戶長)을 지냈다. 『동국여지승람』, 『목천상씨갑자대동보』 등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본래 백제의 호족이었으나,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목천의 상왕산에 근거지를 두고 여러 차례 백제 부흥 운동을 벌였다. 이에 왕건은 이들에게 코끼리를 뜻하는 상(象)씨를 내렸다고 한다. 상국진의 아들 상득유(尙得儒)는 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 최충이 세운 사학인 구재(九齋) 중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 선발되어 학문을 익히면서 향리로서 부담하던 역(役)을 면제받고 본래 성인 상(尙)씨를 되찾았다. 시조 상국진의 묘는 목천 상왕산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상국진의 손자인 상원(尙愿)은 급사(給事) 벼슬을 지냈으며, 임지를 따라 임천(林川)으로 이주하여 그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살았다. 상국진의 9세손 상영부(尙英孚)는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상영부의 증손자인 '''상진'''(尙震)은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후 조선 명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58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15년간 조선의 재상으로서 국정을 이끌었다.[1] 상진의 아들 상붕남(尙鵬南)은 중종 때 사관(史官)으로 활동하며 우찬성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고,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는 유우(柳藕)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경서와 역사에 밝았으며, 예서(隷書)에도 능했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인 상득용(尙得容)은 조선 후기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을 시작으로 선전관, 훈련원판관, 화량진첨사(花梁鎭僉使) 등을 지냈다. 그는 『육도』, 『손자』, 『무자』 등 병법서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경서와 역사, 천문, 수학에도 밝았다.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상(尙)씨는 대한민국 통계청의 2000년 인구 조사에서 2,298명으로 집계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52위를 기록했다.
3. 2. 역사적 인물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서천왕 때의 국상 음우의 아들 상루(尙婁)가 271년(서천왕 2) 국상에 임명되어 294년(봉상왕 3)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또한 《고려사》에는 후백제의 장군으로 상달(尙達)과 상애(尙哀)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목천 상씨(木川尙氏)의 시조인 '''상국진'''(尙國鎭)은 목천의 호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선조는 본래 백제의 호족이었는데, 왕건이 고려를 세울 당시 목천의 상왕산에 근거지를 두고 여러 차례 백제 재건운동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상국진의 아들 상득유(尙得儒)는 고려 문종 때 최충이 세운 구재 중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 선발되어 공부하면서 향역을 면제받고 본래 성씨인 상(尙)씨를 되찾았다.
상국진의 손자인 상원(尙愿)은 급사 벼슬을 지냈으며, 임지를 따라 임천으로 이주한 후 그의 후손들이 그곳에서 10대에 걸쳐 살았다.
조선 시대에는 상국진의 9세손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상영부(尙英孚)의 증손자 '''상진'''(尙震)이 유명하다. 그는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1558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15년 동안 재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했다.[1]
상진의 아들인 상붕남(尙鵬南)은 중종 때 사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우찬성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중종실록》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유우(柳藕)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경사에 밝았고 예서에도 능했으며, 음서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판결사의 지위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는 상득용(尙得容)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을 시작으로 선전관, 훈련원판관, 화량진첨사(花梁鎭僉使) 등을 지냈다. 육도, 손자, 무자 등 병법서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을 뿐만 아니라, 경사에도 밝았고 천문과 주수 등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다.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아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3. 3. 목천 상씨
상씨(尙氏)의 본관은 목천(木川) 단본이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 결과, 2,298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52위를 기록했다.
목천 상씨의 시조는 목천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鎭)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백제의 호족으로, 고려 건국 과정에서 왕건과 얽힌 일화 끝에 성씨를 잠시 상(象)으로 바꾸었다가 아들 상득유(尙得儒) 대에 본래 성씨인 상(尙)씨를 회복했다고 전해진다. 시조의 묘는 목천 상왕산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상국진의 손자인 상원(尙愿)은 급사(給事) 벼슬을 지냈으며, 임지를 따라 임천(林川)으로 이주한 후 그의 후손들이 약 10대에 걸쳐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9세손 상영부(尙英孚)의 증손자인 '''상진'''(尙震)이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58년 영의정에 올라 15년 동안 재상으로 국정을 이끌었다.[1] 상진의 아들 상붕남(尙鵬南)은 중종 때 사관을 시작으로 우찬성 등 요직을 역임하고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후손 상득용(尙得容)은 조선 후기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병서와 경사, 천문 등에도 능통하였다.
3. 3. 1. 시조
목천 상씨`(木川尙氏)`의 시조는 목천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鎭)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 등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백제의 호족이었다고 전해진다.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할 당시, 상국진의 선조는 목천(木川) 상왕산(尙王山)에 근거지를 두고 여러 차례 백제 부흥 운동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왕건은 이들의 성을 상(象: 코끼리)씨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후 상국진의 아들인 상득유(尙得儒)가 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충(崔冲)이 설립한 사학인 구재(九齋) 중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 선발되어 학문을 익히면서 향리로서 지는 역(役)을 면제받았다. 이때 본래의 성씨인 상씨(尙氏)를 회복하게 되었다.
시조 상국진의 묘는 목천 상왕산 아래 간좌(艮坐) 방향에 위치하며,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상국진의 손자인 상원(尙愿)은 고려 시대에 급사(給事)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임지를 따라 임천(林川)으로 이주한 후 그의 후손들이 약 10대에 걸쳐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3. 3. 2. 고려 시대
《고려사》에는 후백제의 장군 상달(尙達)과 상애(尙哀)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목천 상씨(木川尙氏)의 시조 '''상국진'''(尙國鎭)은 목천의 호장(戶長)을 지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 등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본래 백제의 호족이었다.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할 당시, 상국진의 세력은 목천(木川) 상왕산(尙王山)에 근거지를 두고 여러 차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왕건은 그에게 코끼리를 뜻하는 상(象)이라는 성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상국진의 아들 상득유(尙得儒)는 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충(崔冲)이 세운 사학인 구재(九齋) 중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 선발되어 학문을 익혔다. 이를 계기로 그는 향리로서 부담해야 했던 역(役)을 면제받고 본래 성씨인 상씨(尙氏)를 되찾았다. 시조 상국진의 묘는 목천 상왕산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
상국진의 손자인 상원(尙愿)은 고려 시대에 급사(給事) 벼슬을 지냈으며, 임지를 따라 임천(林川)으로 이주하여 그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세거하였다.
3. 3. 3. 조선 시대
이조판서를 지낸 9세손 상영부(尙英孚)의 증손자 '''상진'''(尙震)은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이후 1558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15년 동안 조선의 재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하였다.[1]
상진의 아들인 상붕남(尙鵬南)은 중종 때 사관이 되었으며, 이후 우찬성 등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유우(柳藕)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경서와 역사서(경사)에 밝았고, 예서(隷書)에도 능했다. 음보 제도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판결사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인 상득용(尙得容)은 조선 후기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이 되었다. 이후 선전관, 훈련원 판관, 화량진첨사(花梁鎭僉使) 등을 지냈다. 그는 『육도』, 『손자』, 『무자』 등 병법서에 매우 밝았으며, 경서와 역사서(경사)에도 지식이 깊었다. 또한 천문학과 수학(주수)에도 능통하였다.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써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3. 4. 인구
상(尙)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298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52위이다. 본관은 목천(木川) 단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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