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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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공찬전은 조선 시대 문신 채수가 지은 소설로, 조선 최초의 금서로 지정되어 탄압받았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저승 세계를 다루며, 채수의 가족인 설공찬과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설공찬은 요절하여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들어가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며, 저승 체험을 통해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문으로 번역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한국 소설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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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 | |
---|---|
서지 정보 | |
제목 | 설공찬전 |
한글 제목 | 설공찬전 |
한자 제목 | 薛公瓚傳 |
창작 시기 | 1511년 이전 |
종류 | 소설 |
시대 | 조선 |
2. 작가 채수(蔡壽)
채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 작가였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다.[1]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설공찬전''에는 귀신, 영혼, 윤회 등 불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 채수는 성리학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불교와 도교 사상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설공찬전'' 외에도 다양한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문집인 ''나재집''(懶齋集)에는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1]
2. 1. 생애와 관직
채수(蔡壽)의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세종 31년(1449)에 채신보(蔡申報)와 그의 부인 문화 류씨(文華柳氏)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1]세조 14년(1468)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예종 즉위년(1469)에 3년마다 열리는 정기 문과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여 사간원의 정언(正言)이 되었다. 성종 즉위년(1470)에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이후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그는 또한 ''세조실록''과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1]
성종 13년(1482)에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 해에 그는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거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사직했다.[1]
1485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정초와 황제의 생일에 명(明)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후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고, 결국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1498년의 무오사화 때 조정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화를 면했다.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 때 그는 모함을 받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었으나 결국 풀려났다.[1]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기록되었으며 인청군(麟城君)의 작위를 받았다. 그 해 채수는 관직에서 물러나 함창(咸昌)으로 이주하여 이듬해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세상에서 물러났다. 중종 6년(1511)에 그는 ''설공찬전''을 썼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며, 중종 10년(1515) 함창에서 사망했다.[1]
2. 2. 사상과 문학
채수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다.[1]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설공찬전''에는 귀신, 영혼, 윤회 등 불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1] 채수는 성리학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채수는 ''설공찬전'' 외에도 다양한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의 문집인 ''나재집''(懶齋集)에는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1]
3. 줄거리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설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었다. 설공찬 누나의 혼령은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설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불러온 주술사 김석산이 혼령을 내쫓자 혼령은 설공찬을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공침에게 들어가 오가며, 설충수를 장난삼아 속이기도 한다.
설충수가 다시 김석산을 부르자 설공찬은 설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데, 설충수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자 설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설공찬은 사촌동생 설원과 윤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저승 소식을 전한다.
3. 1. 설공찬과 가족
- '''설공찬''' - 결혼도 못하고 일찍 죽었다.[4] 이복규 교수는 씨족원류에 공찬과 공침이 각각 공양(公養)과 공심(公甚)으로 표기된 것을 근거로, 당시 연좌제 때문에 이름을 우회적으로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심(甚)'은 구개음화되어 '침'으로도 발음된다.[4]
- '''설공찬의 누이''' -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최윤조의 아내인 순창 설씨로 추정된다.[4] 설공침의 영혼에 잠시 들어왔다가 설공찬을 데리고 온다.[4]
- '''설충수''' - 설공찬의 아버지로, 실존인물이다. 경주순창설씨대동보라는 족보에 실려있고 무덤도 있다.[4]
- '''설충란''' - 설공침의 아버지로, 실존인물이다. 경주순창설씨대동보라는 족보에 실려있고 무덤도 있다.[4]
- '''설공침''' - 설공찬과 달리 공부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었으나, 설공찬의 영혼이 들어간다. 이후 설공찬의 누이나 설공찬이 들어가는 암시 역할을 한다.[4]
3. 2. 저승 체험
설공찬은 저승이 바닷가에 있으며, 단월국이라 불리고 비사문천왕이 다스린다고 전한다.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피는데, 비사문천왕은 잡힌 사람에게 매질하며 가족 이름을 묻는다. 명이 다한 사람은 잡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풀어준다. 공찬은 증조부 설위 덕에 풀려났다. 이승에서 선하게 살면 저승에서도 잘 지내지만, 악한 사람은 고생하거나 지옥에 떨어진다. 주전충처럼 반역으로 집권한 왕은 지옥에 떨어지고,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한다. 여성도 글만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4]저승 궁중에서 열린 연회는 중국 궁궐보다 화려했다. 중국 역대 황제와 신하들이 모였고, 조선 연산군 때 활동한 민후도 있었다. 성화 황제는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 염라대왕에게 요청하지만, 염라대왕은 "황제가 천자라 하나 사람 죽이고 살리는 것은 내 권한 밖의 일이다."라며 거절한다. 성화제가 직접 부탁하자 염라대왕은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4]
저승에 나오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설명 |
---|---|
비사문천왕 | 저승을 다스리는 왕. 명나라 천자보다 위에 있으며, 염라대왕 밑에 있다. 불교에 나오는 신이다.[4] |
성화제 | 명나라 천자. 총애하는 신하 애박이를 1년 후에 데려오라고 염라대왕에게 부탁한다.[4] |
애박이 | 명나라 천자가 총애하는 신하. 염라대왕이 잡아 끓는 솥에 손을 넣게 한다.[4] |
3. 3. 저승의 모습
설공찬이 전하는 저승은 바닷가에 위치한 단월국(檀越國)이며, 비사문천왕이 다스린다.[4]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피는데, 비사문천왕이 잡힌 사람에게 매질을 가하면서 가족 이름을 대라고 한다.[4] 명이 다한 사람은 잡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안 잡아간다고 한다.[4] 공찬은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4]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을 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4] 왕이었더라도 주전충처럼 반역해서 집권하였으면 지옥에 떨어지며,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한다.[4] 여성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4]
저승 궁중에서 열린 연회는 중국 궁궐보다 더 화려했고, 중국 역대 황제들과 신하들이 모여있었다.[4] 성화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염라대왕에게 요청했으나, 염라대왕은 "사람 죽이고 살리는 것은 내 권한 밖의 일"이라며 거절했다.[4] 성화 황제가 직접 부탁하자, 염라대왕은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했다.[4]
4. 작품의 특징과 의의
《설공찬전》은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져 소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국문(國文)으로 번역되어 유통되면서 인기를 얻었으며,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6]
《설공찬전》은 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 1553년) 사이의 공백을 메꾸는 작품으로,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이다. 이는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설공찬전》은 '설화->소설'이 아닌 ''''실화->소설'로''' 이행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실제 가문에 전해지고 무덤까지 존재하는 실존 인물이며, '정덕 무진년(戊辰年)'[10]처럼 자세한 시간과 공간 묘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중종실록 기록[11][12]과 '씨족원류', '문화류씨세보' 등에도 설씨 가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16세기에 쓰여진 《설공찬전》은 15세기 금오신화와 17세기 소설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소설이 한문에서 국문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저승 세계를 다루고 있어 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자주 비교된다.
4. 1. 금서(禁書) 지정과 탄압
《설공찬전》은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탄압받았다. 이는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져 사헌부까지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설공찬전》은 중종실록에도 실리게 되었으며, 소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첫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이복규 교수는 《설공찬전》이 탄압받은 이유가 당시 중종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 때문이라고 보았다. 소설에서 "주전충 같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주전충은 왕과 신하들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 인물이다. 이는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을 우의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채수는 중종반정에 반대했으며, 그의 작품 '나재집'에서도 이러한 심정이 나타난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경북 상주에 쾌재정을 짓고 남은 생애를 보내며 《설공찬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소설 속 저승에서 여성들이 글만 알면 어떤 일이든 맡을 수 있다는 내용도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문제로 여겨졌다.[5]
《설공찬전》이 국문(國文)으로 번역되어 유통된 것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의 국문본은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6]
《설공찬전》은 조선 시대에 금서로 지정되었는데, 국문으로 출판되어 전국에 유포되면서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금서 지정의 이유 중 하나로 추측된다. 16세기에 쓰여진 이 작품은 15세기 금오신화와 17세기 소설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소설이 한문에서 국문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SBS 교양 프로그램 <깜짝 스토리랜드> 2002년 8월 13일 방송분에서는 해당 소설을 전형적인 괴기소설인 것처럼 소개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14]
4. 2. 문학사적 의의
《설공찬전》은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져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국문(國文)으로 번역되어 유통되면서 인기를 얻었으며, 우리 소설 연구에서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6]《설공찬전》은 국문학사(國文學史)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 1553년) 사이의 공백을 메꾸는 작품으로,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이다. 이는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석주 권필이 창작한 주생전(周生傳)이 국문본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도 소설이 이미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9]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 이전의 국문 표기 소설을 추정해 왔는데, 《설공찬전》 국문본의 발견으로 이 가설이 증명되었다.[4]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산정형(山頂形) 정자 쾌재정은 익공형식과 화반장식, 처마 앙곡 등의 수법은 건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최초의 국문 번역본 소설인〈설공찬전〉이 이곳에서 지어졌다는 역사성을 인정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1호 지정되었다.
《설공찬전》은 '설화->소설'로 이행하는 일반적인 흐름과 달리, ''''실화->소설'로''' 이행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실제 가문에 전해지고 무덤까지 존재하는 실존 인물이며, 작품에는 '정덕 무진년(戊辰年)'[10]과 같이 자세한 시간과 공간이 묘사되어 있다. 중종실록의 기록[11][12]과 '씨족원류', '문화류씨세보' 등에도 설씨 가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금오신화는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바탕으로 김시습(金時習)이 새롭게 윤색해서 만든 허구적인 작품이다.[13] 하지만 설공찬전에서는 확실한 연도와 인물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들을 근거로 채수는 설공찬이 겪었던 이야기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바탕으로 설공찬전을 실화와 허구를 바탕으로 창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설공찬전》은 16세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15세기에 쓰여진 금오신화와 17세기에 유행한 다른 소설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한문에서 국문으로 변화하는 소설의 경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저승 세계를 다루고 있어 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4. 3. 사회문화적 의의
《설공찬전》은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져 소설의 대중화(大衆化)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5] 이 작품은 국문(國文)으로 번역되어 유통되면서 더욱 인기를 얻었으며, 우리 소설 연구에서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6]이복규 교수는 《설공찬전》이 탄압받은 이유가 당시 중종 정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소설에서 "주전충 같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표현은, 왕과 신하들을 죽이고 왕이 된 주전충을 빗대어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이다.[5] 또한, 저승에서 여성들이 글만 알면 어떤 일이든 맡을 수 있다는 내용은 당시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5]
《설공찬전》은 국문학사(國文學史)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이 작품은 《금오신화》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 《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 1553년)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준다. 특히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9]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 이전에 국문 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는데, 《설공찬전》 국문본이 발견되면서 이 가설이 증명되었다.[4]
《설공찬전》은 일반적인 소설의 전개 방식인 '설화->소설'과 달리, ''''실화->소설'로''' 이행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실제 가문에도 전해지고, 무덤까지 존재하는 실존 인물이며, 작품 내에 '정덕 무진년(戊辰年)'[10]과 같이 자세한 시간과 공간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중종실록의 기록[11][12]과 '씨족원류', '문화류씨세보' 등에도 설씨 가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설공찬전》은 조선 시대에 금서로 지정되었는데, 국문으로 출판되어 전국에 유포되면서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16세기에 쓰여진 작품으로서, 15세기에 쓰여진 《금오신화》와 17세기에 유행한 다른 소설들을 잇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한문으로 쓰였지만,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점은 소설이 한문에서 국문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한, 저승 세계를 다루고 있어 《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4. 4. '실화->소설'
이 작품은 '설화 -> 소설'로 이행하는 일반적인 소설들과 달리, '실화 -> 소설'로 이행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 가문에도 전해지고, 무덤까지 존재하는 실존 인물이라는 점, 작품 내에 '정덕 무진년(戊辰年)'[10]과 같이 삼년상을 치르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 등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중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사관 김수동(金壽童)과 검토관 황여헌(黃汝獻)의 대화에서 채수가 설공찬의 가족이며,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 언급이 나온다.[11][12]
이러한 기록 외에도 '씨족원류'나 '문화류씨세보' 등에도 설씨 가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에는 공찬과 공침이 공양(公養)과 공심(公甚)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511년에 발생한 필화(筆禍) 사건으로 인해 이름을 다르게 표기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구우의 전등신화를 바탕으로 윤색한 허구적인 작품이지만,[13] 설공찬전은 확실한 연도와 인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을 근거로, 채수가 설공찬이 겪었던 이야기와 작가의 의도를 결합하여 실화와 허구를 바탕으로 창작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5. 현대적 재해석
2003년에는 《설공찬전》을 바탕으로 한 연극 '지리다도파 설공찬전'이 초연되었다.[1] 2015년에는 《설공찬전》의 이야기를 재창작한 웹 소설 '설공찬 환혼전'이 네이버에 연재되었다.[2]
6. 판본
1996년, 이복규 교수는 묵재일기 셋째 권(1545년부터 1546년까지의 일기)에서 《설공찬전》의 일부를 손으로 쓴 필사본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1997년 4월 27일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학계에 소개되었다. 《설공찬전》은 원래 한문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이나, 정부의 검열 때문에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묵재일기에서 발견된 필사본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사본이다.
참조
[1]
문서
[2]
문서
[3]
서적
설공찬전 연구
박이정
2003
[4]
간행물
설공찬전(薛公瓚傳)
한국사전연구사
1998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논문
설공찬전 재고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뉴스
[방송] SBS, 시청률 위해서 고전소설 왜곡?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0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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