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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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례는 위나라의 관료로, 하북 전투에서 조조에게 발탁되어 사공군모연이 되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군의 태수를 역임했다. 조휴의 간언을 무시한 조휴의 패배를 예견하고, 명제의 궁궐 건축을 반대하는 등,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조상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으나, 사마의의 쿠데타 이후 복귀하여 사공에 이르렀다. 또한, 《삼국지연의》에서는 용맹한 무장으로 묘사되며,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싸우는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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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손례 |
본관 | 유주탁군 용성현 대리정 |
자 | 덕달 (德達) |
시호 | 경후 (景侯) |
작위 | 대리정후 (大利亭侯) |
생애 |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가평 2년 (250년) |
관직 | |
사공 (司空) | 재임: 250년 2월 6일 ~ 250년 12월 또는 251년 1월 |
전임 | 왕릉 |
후임 | 사마부 |
사례교위 (司隸校尉) | 재임 기간 미상 |
전임 | 비궤 |
진무장군 (振武將軍) | 재임 기간 미상 |
병주자사 (并州刺史) | 재임 기간 미상 |
성문교위 (城門校尉) | 재임 기간 미상 |
기주목 (冀州牧) | 재임 기간 미상 |
형주자사 (荊州刺史) | 재임 기간 미상 |
소부 (少府) | 재임 기간 미상 |
기타 | |
섬긴 군주 | 조조 → 조비 → 조예 → 조방 |
2. 생애
경초 3년(239년), 명제는 조상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조방을 보좌하게 하고, 손례를 대장군장사, 산기상시에 임명해 조상을 보좌하게 했다. 그러나 손례는 청렴하고 정직하며 타협하지 않아 조상의 눈 밖에 났다. 이후 양주자사 겸 복파장군으로 전선에 배치되었다.
당시 흉노와 선비가 강성하여, 손례는 병주자사, 진무장군, 사지절흉노중랑장을 겸하며 북방 문제를 맡았다.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조상이 죽자 중앙으로 돌아와 사례교위가 되었고, 사공으로 승진했으며 대리정후에 봉해졌다. 가평 2년(250년) 11월에 사망하여 경후(景侯)로 추증되었고, 손자 손원(孫元)이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손례는 전란 중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같은 군 사람 마태(馬台)가 어머니를 찾아 주었다. 하북 전투 당시 조조가 원상과 원희를 토벌하고 유주를 차지할 때 발탁되어 사공군모연이 되었다. 마태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자, 손례는 마태를 도주시키려 했으나 마태는 거절하고 자간주부 온회에게 직접 출두했다. 온회가 그 행위에 탄복하여 조조에게 상세히 아뢰자, 둘 다 사형보다 한 단계 감형되었다. 이후 하간군승이 되었고, 영양도위로 승진했으며, 노국의 상이 되어 자신의 녹봉을 들여 노산의 도적을 평정했다. 산양, 평원, 평창, 낭야군의 태수를 역임했다.태화 2년(228년), 조휴가 주방의 거짓 투항을 믿고 환현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손례는 조휴에게 깊숙히 들어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듣지 않아 결국 협석에서 대패했다. 이후 양평태수로 승진했고, 내직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명제가 당시 천하에 곡식이 적은데 궁전을 짓자, 완강하게 노역을 중지할 것을 간언하여 결국 받아들여졌다. 감독자 이혜는 곧 공사가 완료될 것이라고 하여 계속하기를 구했으나, 손례는 직접 현장에 간 후 상소하지 않고 조서를 바로 발동시켰다. 명제가 대석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범이 명제가 탄 수레로 달려들자, 손례는 즉시 말에서 내려 칼로 호랑이를 죽이려 했으나 명제의 칙명으로 돌아가 말에 탔다.
2. 2. 지방관으로서의 활약
손례는 전란 중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같은 군 사람 마태(馬台)가 어머니를 찾아 주었다. 하북 전투 당시 조조가 원상과 원희를 토벌하고 유주를 차지할 때 발탁되어 사공군모연이 되었다. 마태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자, 손례는 마태를 도주시키려 했으나 마태는 거절하고 자간주부 온회에게 직접 출두했다. 온회가 그 행위에 탄복하여 조조에게 상세히 아뢰자, 둘 다 사형보다 한 단계 감형되었다. 이후 하간군승, 영양도위를 거쳐 노국상이 되었고, 자신의 녹봉을 들여 노산의 도적을 평정했다. 산양, 평원, 평창, 낭야군의 태수를 역임했다.태화 2년(228년), 조휴가 주방의 거짓 투항을 믿고 환현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손례는 조휴에게 깊숙히 들어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듣지 않아 결국 협석에서 대패했다. 이후 양평태수로 승진했고, 내직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정시 2년(241년), 오나라 전종이 작피로 쳐들어왔다. 당시 양주 군대 대부분이 휴가중이어서, 손례는 자신의 위병을 거느리고 전종과 싸웠다. 중과부적으로 휘하 대부분의 장졸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나, 결국 전종의 군대를 격퇴했다. 전종은 작피를 점령하고 그 둑을 무너트렸으나, 왕릉에게 참패했다. 황제는 손례의 공적을 기려 비단 700필을 하사했으나, 손례는 이를 전부 죽은 병사들의 집에 주었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소부가 되었고, 이후 형주자사, 기주목으로 승진했다. 당시 기주 내의 청하군과 평원군이 경계를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사마의는 기주목이 된 손례에게 이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손례는 굳이 자신이 갈 것 없이, 청하군과 평원군을 나눌 때의 지도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된다고 했고, 임지로 가서는 지도에 근거하여 분쟁 지역을 평원군 소속으로 판정했다. 그러나 조상이 청하군의 말을 들었으므로 문서를 내려 손례의 판단을 무효화했고, 손례는 이에 항의하여 상주했다. 조상은 분노하여 손례를 5년간 금고에 처했다. 그러나 금고 1년 후 손례를 변호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성문교위에 임명되었다. 당시 흉노와 선비가 강성하였으므로 손례를 병주자사에 임명하고 진무장군 · 사지절흉노중랑장을 더해 북방 문제를 맡겼다.
2. 3. 조예(명제) 시대의 간언
명제가 천하에 곡식이 적은데 궁전을 짓자, 완강하게 노역을 중지할 것을 간언하여 결국 받아들여졌다. 감독자 이혜는 곧 공사가 완료될 것이라고 하여 계속하기를 구했으나, 손례는 직접 현장에 간 후 상소하지 않고 조서를 바로 발동시켰다. 명제가 대석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범이 명제가 탄 수레로 달려들자, 손례는 즉시 말에서 내려 칼로 호랑이를 죽이려 했으나 명제의 칙명으로 돌아가 말에 탔다.2. 4. 조상(曹爽)과의 갈등과 유배
조상은 대장군이 되어 조방을 보좌하게 되었지만, 손례는 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상에게 미움을 받았다. 조상은 손례를 양주자사·복파장군으로 삼고, 관내후에 봉한 후 지방으로 내보냈다.정시 2년(241년), 오의 전종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때 주병의 많은 수가 휴가를 떠났지만, 손례는 적은 수의 수비병을 이끌고 작피에서 교전했다. 전투는 하루 종일 이어졌고, 아군의 과반수가 사상당했으며 손례 자신도 백병전을 치렀다. 그러나 타고 있던 말에 여러 곳의 상처를 입는 격전 끝에, 결국 전종군을 퇴각시켰다(작피의 역).
그 후 소부에 임명되었고, 다시 형주 자사로 지방에 파견되었다.
기주 목으로 전임되었을 때,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던 청하군과 평원군의 경계 분쟁에 대해 사마의가 의견을 묻자, 손례는 부임지로 출발하지 않고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손례는 부임 후 곧 그 해결 방안에 따라 재정을 내렸지만, 조상의 뜻에 맞지 않아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격렬한 항의 상소를 올린 후 처분을 기다렸다. 조상은 상소를 보고 격노하여 손례를 탄핵하고 5년 근신을 명했다. 그러나 간청하는 소리가 많았기 때문에 1년 만에 성문교위로 복직했다.
2. 5. 복귀와 말년
정시 2년(241년), 오나라의 전종이 작피로 쳐들어왔다. 당시 양주 군대 대부분이 휴가중이어서, 손례는 자신의 위병을 거느리고 전종과 싸웠는데, 중과부적으로 휘하 대부분의 장졸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나, 결국은 전종의 군대를 일단 물렸다. 전종은 작피를 점령하고 그 둑을 무너트렸으나, 왕릉에게 참패했다. 황제는 손례의 공적을 기려 비단 700필을 하사했으나, 손례는 이를 전부 죽은 병사들의 집에 주었다.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소부가 되었고, 또 외직으로 나가 형주자사가 되고 기주목으로 승진했다. 당시 기주 내의 청하군과 평원군이 경계를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사마의는 마침 기주목이 된 손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손례는 굳이 자신이 갈 것 없이, 청하군과 평원군을 나눌 때의 지도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된다고 했고, 임지로 가서는 지도에 근거하여 분쟁 지역을 평원군 소속으로 판정했다. 그러나 조상이 청하군의 말을 들었으므로 문서를 내려 손례의 판단을 무효화했고, 손례는 이에 항의하여 상주했다. 조상은 분노하여 손례를 5년간의 금고에 처했다. 그러나 금고 1년 후 손례를 변호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성문교위에 임명되었다. 당시 흉노와 선비가 강성하였으므로 손례를 병주자사에 임명하고 진무장군 · 사지절흉노중랑장을 더해 북방 문제를 맡겼다.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조상이 죽자 중앙으로 돌아와 사례교위가 되었고, 사공으로 승진했으며 대리정후에 봉해졌다. 가평 2년(250년) 11월에 죽었으며 시호를 경후(景侯)라 하고, 손자 손원(孫元)이 뒤를 이었다.
같은 군 사람 노육과는 지위도 명성도 비슷했지만, 서로 감정은 좋지 못했다.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엄격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혼란했던 시절, 행방불명된 어머니를 마대라는 인물이 보호해 주었다. 손례는 은인인 마대에게 전 재산을 양도하여 감사했다고 한다.
조조가 유주를 지배하게 되자, 소환되어 사공 군모연이 되었다. 그런데, 옛 은인인 마대가 법에 저촉되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손례는, 그의 탈옥을 돕고 자수했다. 후에 마대도 "신에게는 도망갈 도의는 없다"고 말하며 온회에게 출두했다. 온회는 손례와 마대의 행위에 감동하여 조조에게 간청하여 손례와 마대가 받은 사형 일등의 죄를 감형시켰다고 한다.
후에 하간군 승에 임명되었고, 형양도위로 승진했다. 노산의 적이 날뛰자, 노국상에 임명되어 적의 진압에 나섰다. 이후 산양·평원·평창·낭야의 군태수를 역임했다.
태화 2년(228년), 조휴의 오 정벌에 종군했다. 조휴에게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권했지만, 조휴는 듣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했다.
그 후, 양평 태수를 맡은 후, 궁정에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당시, 궁실의 수복 공사가 행해지고 있었다. 마침 날씨가 좋지 않아 곡물의 수확이 적었기 때문에, 손례는 역무를 중단하고 백성을 농경으로 되돌리도록 조예(명제)를 굳게 간언하여, 공사 중단의 조칙을 받아냈다. 작업을 감독하던 이혜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다툼이 벌어졌지만, 손례는 다시 상소를 올리지 않고 현장에 가서, 조칙이라고 칭하며 공사를 강제로 중단시켜 버렸다. 조예는 이를 탓하지 않았다.
조예가 대석산에 행차했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 황제의 수레로 다가왔다. 손례가 말에서 내려 칼을 휘두르며 호랑이를 쫓아내려 했지만, 조예는 말에 타면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조예는 위독해지자, 조상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조방(제왕)의 후견인으로서 후사를 맡기려 했지만, 그 좋은 보좌역으로 손례를 눈여겨보았다. 손례는 조예의 침대 곁에서 유조를 받고, 대장군 장사·산기상시로서 조상을 보좌하게 되었지만, 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상에게 미움을 받았다. 조상은 손례를 양주자사·복파장군으로 삼고, 관내후에 봉한 후 지방으로 내보냈다.
3. 평가
최염과 진수는 손례를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엄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최염은 손례가 훗날 삼공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고, 진수는 손례를 포함한 몇몇 인물들이 모두 삼공이 될 만했다고 평했다.
손례는 은인인 마대에게 전 재산을 양도하고, 마대가 죄를 짓자 그의 탈옥을 돕고 자수하는 의로운 모습을 보였다. 조예에게 유조를 받고 조상을 보좌하게 되었으나, 정직한 성격으로 인해 미움을 받기도 했다.
사마의의 쿠데타 이후 사례교위를 거쳐 사공까지 올랐으며, 사후 경후로 시호되었다. 지방 장관으로 5주 7군에 임명되어 위신을 떨쳤고, 노육과 명성, 관직이 거의 같았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사마의의 부하로서 촉한의 제갈량과 싸우지만, 패배를 거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3. 1. 긍정적 평가
최염은 손례가 처음 벼슬을 시작했을 때 성글고 밝으며, 격하고 강인하며 결단력이 있다고 평했다. 또한 훗날 손례가 삼공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진수는 한최고손왕전에서 손례를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엄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손례를 포함한 한기, 최림, 고유, 왕관 모두 삼공이 될 만했다고 평했다.
손례는 혼란스러웠던 시절, 어머니를 보호해 준 은인 마대에게 전 재산을 양도하여 감사를 표했다.
이후 마대가 법에 저촉되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자, 손례는 그의 탈옥을 돕고 자수했다. 마대도 "신에게는 도망갈 도의는 없다"고 말하며 온회에게 출두했고, 온회는 이들의 행위에 감동하여 조조에게 간청해 사형을 면하게 해주었다.
조예는 위독해지자 조상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조방(제왕)의 후견인으로 삼으려 했고, 좋은 보좌역으로 손례를 눈여겨보았다. 손례는 조예의 침대 곁에서 유조를 받고 대장군 장사, 산기상시로서 조상을 보좌하게 되었지만, 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조상에게 미움을 받았다.
사마의의 쿠데타로 조상이 처형되자 손례는 사례교위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사공까지 올라 대리정후에 봉해져 100호의 영읍을 얻었다. 가평 2년(250년)에 사망하여 경후로 시호되었다.
손례는 일찍이 최염에게 "지금은 신분이 낮지만, 머지않아 삼공이 될 인물이다"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방 장관으로서 5주 7군에 임했으며, 어느 곳에서도 위신이 있었다. 같은 시기의 고관이었던 노육과는 동향이고 동년배였지만, 명성·관위는 거의 같았다고 한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제갈량의 북벌 때 자주 등장하는 용맹한 무장으로 묘사된다.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참전해 가정에 육박하는 촉군을 신비와 함께 조진을 지원해 무찔렀다.
228년 제갈량의 2차 북벌 때는 강유의 역습으로 위군이 패하자 함정을 파 촉군을 무찌르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제갈량의 기습으로 크게 패배했다.
229년 제갈량의 3차 북벌 때는 사마의의 명령으로 곽회와 함께 무도와 음평을 방어하러 갔으나, 이미 그곳을 점령한 강유와 왕평의 공격으로 다시 패배했다.
231년 제갈량의 4차 북벌, 234년 제갈량의 5차 북벌 때도 참전했다. 5차 북벌 때는 곽회와 함께 북원에 요새를 마련해두고 그곳을 공격하던 촉군을 크게 무찔렀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嘉平二年]十一月,司空孫禮薨。)
[2]
간행물
Sun Li 孫禮
http://www.chinaknow[...]
Ulrich Theobald
20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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