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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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1915년에 태어나 1997년에 사망했다. 겐리흐 네이가우스에게 사사했으며, 1945년 소련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60년 미국에서 데뷔했으며, 이후 유럽 연주회를 통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주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했으며, 실황 연주를 선호했다. 그의 연주는 중량감 있고 따뜻하며 색채가 풍부하다는 평을 받으며, 1961년 그래미상, 1975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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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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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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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 |
출생일 | 1915년 3월 20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지토미르 |
사망일 | 1997년 8월 1일 (향년 82세) |
사망지 | 러시아 모스크바 |
직업 | 피아니스트 |
장르 | 서양고전음악 |
악기 | 피아노 |
활동 시기 | 1934년 ~ 1997년 |
레이블 | 멜로디야, DG, 필립스, RCA |
학력 | |
학교 | 모스크바 음악원 |
2. 생애
우크라이나 지토미르에서 태어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는 폴란드계 독일인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5세에 무용곡 반주를 시작했고, 23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겐리히 네이가우스에게 사사했다. 1945년 소련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했다.[78]
1960년 미국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고, 1962년 유럽 순회 연주를 통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비견되는 연주자로 평가받았다.[77] 그의 연주는 중량감, 따뜻함, 풍부한 색채를 지녔다는 평을 받았다. 크고 굵은 손가락으로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했으며, 스케일과 깊이를 갖춘 연주를 선보였다.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했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집>은 그의 대표적인 연주로 꼽힌다.
1970년 일본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을 처음 방문한 후 여러 차례 독주회를 열어 일본 음악 팬들에게 친숙해졌다.[77] 올레그 카간 등 다른 연주자들과 협연도 활발히 했으며, 서방을 포함한 각지에서 음악제를 주최했다. 1981년부터 매년 겨울 푸쉬킨 미술관에서 개최한 "12월의 밤" 음악제는 회화 전시와 주제를 공유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말년에는 피아노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예고 없이 교회가 있는 마을에서 무료 연주를 하는 삶을 꿈꿨고, 실제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콘서트를 많이 열었다.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실혼 관계였던 소프라노 가수 니나 돌리아크[84]도 이듬해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초기 활동 (1915-1937)
우크라이나 지토미르에서 태어났으며,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 아버지 테오필 다닐로비치 리히터(Theophil Richter (Musiker)de)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 테오필은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 작곡가였으며,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1893년부터 1900년까지 빈 음악원에서 수학했다.[6][7] 그의 어머니 안나 파블로브나 리히터는 러시아 귀족 출신 지주 가문 출신이었다.[6][7]
1918년, 리히터의 부모가 오데사에 있었을 때, 내전으로 인해 아들과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리히터는 이모 타마라와 함께 살았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이모와 함께 살면서 회화를 배웠고, 이때 예술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8]
1921년 가족이 다시 만나 오데사로 이주했고, 아버지 테오필은 오데사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잠시 루터교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 1920년대 초, 리히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 문학, 연극 등 다양한 예술 형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제자였던 체코 출신의 하프 연주자에게서 기초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지만, 주로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8]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통독자였던 리히터는 지역 오페라와 발레단과 정기적으로 연습했다. 그는 오페라, 성악 및 실내악에 대한 평생의 열정을 키웠고, 이는 훗날 프랑스 라 그랑주 드 메슬레이와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에서 그가 설립한 축제의 원동력이 되었다. 15세에 오데사 오페라에서 리허설 반주를 시작했다.[9]

1934년 3월 19일, 오데사의 엔지니어 클럽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다. 3년 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였던 헤인리히 노이하우스에게 배우기로 결심하고, 그의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리히터가 쇼팽의 발라드 4번을 연주했을 때, 노이하우스는 동료에게 "이 사람은 천재야"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노이하우스는 에밀 길렐스와 라두 루푸 등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가르쳤지만, 리히터를 "평생 기다려온 천재 제자"라고 여기며 "거의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10]
리히터는 초기 경력에서 작곡도 시도했지만, 모스크바로 이주한 직후 그만두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나쁜 음악에 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작곡을 중단한 이유를 설명했다.[10]
2. 2.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 (1937-1945)
1937년, 22세의 리히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우크라이나 출신 독일계 피아노 교사 겐리히 네이가우스(독일어 발음으로는 하인리히 노이하우스)에게 배웠다.[78] 이 모스크바 이주는 공산당 독재 체제하 소련에서 독일계 루터교 신자라는 위험한 입장에 있던 리히터를 구해주었다. 리히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을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네이가우스는 "가르칠 것이 없었다"라고 말했지만, 리히터 자신은 네이가우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네이가우스는 리히터를 천재라고 칭하며, 때로는 다듬어지지 않은 연주를 일부러 고치려 하지 않았다. 동문인 에밀 길렐스는 리히터보다 1살 아래지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는 2년 선배였다.리히터는 네이가우스의 소개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친분을 맺고, 1943년 1월 18일 모스크바에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7번을 초연하여 성공했다. 1944년에는 프로코피예프의 3곡의 전쟁 소나타로 구성된 독주회를 열었다.[76] 1945년, 30세에 전소련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수상했다. 이후 소련 국내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했으며, 프로코피예프가 정부로부터 반혁명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때도 항상 그와 함께 활동했다.
2. 3. 국제적 명성과 활동 (1945-1997)
1949년, 리히테르는 스탈린상을 수상하여 러시아, 동유럽, 중국에서 광범위한 연주 여행을 하게 되었다.[17] 1950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 외부 첫 연주회를 가졌다.[17] 1952년에는 글린카의 삶을 다룬 영화 ''글린카 작곡가''(1946년 영화 ''글린카''의 리메이크)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연주하도록 초청받았다.1952년 2월 18일, 리히테르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를 솔리스트로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협주곡 (프로코피예프) 내림 마단조의 세계 초연에서 지휘자로 유일하게 등장했다.[18]
1958년 4월, 리히테르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반 클라이번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클라이번에게 만점인 25점을 주었다.
1960년, 그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장례식에서 연주하며 당국에 반항했다.[19]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수상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예술가가 된 그는 1960년 미국에서, 그리고 1961년 영국과 프랑스에서 첫 순회 연주회를 열었다.[20]

1948년, 리히테르는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1950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와 브라티슬라바에서 공연했다. 1954년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1956년에는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순회 공연을 했고, 1957년에는 중국 순회 공연을 한 후 다시 프라하, 소피아, 바르샤바에서 공연했다. 1958년, 리히테르는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을 녹음했다.[21] 1959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했다.
1960년 5월 핀란드에서 서구 첫 콘서트를 열었고, 1960년 10월 15일에는 시카고에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22] 리히테르의 1960년 미국 순회 공연은 카네기홀에서의 콘서트로 절정에 달했다.[23]
리히테르는 미국에서의 공연을 싫어했다.[24] 1970년 뉴욕시 카네기홀에서 반소 시위로 공연이 중단된 사건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21]
1961년, 리히테르는 런던에서 첫 공연을 했다. 1961년 7월 18일 리히테르가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을 모두 연주한 콘서트 이후, 비평가들은 입장을 바꿨다.[26]
1963년, 리히테르는 프랑스 루아르 계곡에서 투르 북쪽 수 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라 그랑주 드 메슬레이를 발견했다. 리히테르가 설립한 이 축제는 매년 개최되는 행사가 되었다.
1970년, 리히테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배를 타고 일본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8번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관객을 위해 연주하는 것을 매우 즐겼지만, 리히테르는 수년 전에 콘서트를 계획하는 것을 싫어했고, 만년에는 짧은 예고 기간을 두고 작고 어두컴컴한 홀에서 연주하곤 했다.[27]
리히테르는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에서 8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청력 변화로 인해 음높이 인식이 바뀌면서 연주할 수 없게 된 것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28]
1981년, 리히테르는 푸시킨 박물관에서 열리는 국제 음악 축제인 "12월의 밤"을 시작했으며, 그가 1997년 사망한 후에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의 12월의 밤"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6년, 리히테르는 야마하 피아노와 함께 6개월간 시베리아 순회 공연을 떠나, 150회가량의 독주회를 열었다. 때로는 공연장조차 없는 작은 마을에서 공연하기도 했다.[29]
말년에 리히테르는 학생들을 위한 무료 공연을 몇 차례 열었다.[30][31]
리히테르는 샤를마뉴의 전기를 읽은 후, 샤를마뉴의 거주지이자 매장지였던 아헨 극장에서 연주하고 싶다고 전보를 보냈고, 얼마 후 공연이 열렸다.[32]
1995년까지도 리히테르는 모리스 라벨의 「거울」 전곡,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제2소나타, 프레데리크 쇼팽의 연습곡, 발라드 4번, 로베르트 슈만의 토카타 등 피아노 레퍼토리 중 가장 어려운 곡들을 계속 연주했다.[33][34]
리히테르의 마지막 오케스트라 협연은 1994년 루돌프 바르샤이가 지휘하는 일본 신세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3곡이었다.[35]
리히테르의 마지막 독주회는 1995년 3월 30일 독일 뤼베크에서 열린 비공개 모임이었다. 리히테르는 안드레아스 루체비츠와 함께 요제프 하이든의 소나타 두 곡과 막스 레거의 "베토벤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를 연주했다.[36]
사망 당시 그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E장조, D. 459"를 연습하고 있었다.[37]
3. 음악
리흐테르는 관객을 위해 연주하는 것을 즐겼지만, 공연을 미리 계획하는 것은 싫어했다. 말년에는 작은 램프 하나만 켜둔 어둡고 작은 홀에서 예고 없이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27] 그는 이러한 환경이 연주자의 표정이나 몸짓 같은 부수적인 것들보다 음악 자체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27]
1981년, 리흐테르는 푸시킨 박물관에서 "12월의 밤"이라는 국제 음악 축제를 시작했다. 이 축제는 그가 사망한 후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12월의 밤"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6년에는 야마하 피아노와 함께 시베리아를 순회하며 150회 가량 연주회를 열었다. 작은 마을에서 공연하기도 했는데, 공연 후 고전 음악을 처음 접한 관객들이 그를 축하하며 좌우로 흔들었다는 일화가 있다.[29] 말년에는 학생들을 위한 무료 공연도 열었다.[30][31]
샤를마뉴 전기를 읽은 후, 리히테르는 그의 거주지이자 매장지였던 아헨 극장 관장에게 전보를 보내 그곳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얼마 후 공연이 성사되었다는 일화는 그의 말년 공연 방식을 잘 보여준다.[32]
1995년까지도 리히테르는 모리스 라벨의 「거울」 전곡,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제2소나타, 프레데리크 쇼팽의 연습곡과 발라드 4번, 로베르트 슈만의 토카타 등 어려운 곡들을 계속 연주했다.[33][34] 1994년에는 오랜 친구인 루돌프 바르샤이가 지휘하는 일본 신세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3곡을 협연했다.[35] 1995년 3월 30일, 독일 뤼베크에서 열린 비공개 모임에서의 마지막 독주회에서는 요제프 하이든의 소나타 두 곡과 막스 레거의 "베토벤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를 연주했다.[36] 사망 당시 그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E장조, D. 459"를 연습하고 있었다.[37]
리흐테르는 독일 그라모폰과의 바르샤바 녹음 세션에서 엔지니어를 맡았던 하인츠 빌트하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매우 고르지 못한 건반 터치를 가진 피아노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아 하나하나 건반의 감촉을 확인하며 고르게 들리도록 연습하여, 자유자재로 연주했다고 한다.[80]
이후 그는 1969년 야마하 피아노에 주목하여 애용하게 되었다.[77] 그는 야마하 피아노에 대해 "유연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특히 피아니시모가 매우 아름답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마음의 감수성을 노래해 준다"라고 말했다.[89]
3. 1. 레퍼토리
리히테르는 한때 "실내악을 제외하고도 약 80개의 다른 프로그램을 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38] 그의 레퍼토리는 헨델과 바흐부터 차이콥스키, 스크랴빈, 시마노프스키, 베르크, 베베른,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힌데미트, 브리튼, 거슈인까지 다양했다.리히터는 새로운 곡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브람스의 파가니니 변주곡과 헨델 변주곡을, 1990년대에는 드뷔시의 연습곡과 거슈인의 곡들, 그리고 이전에는 그의 프로그램에 포함하지 않았던 바흐와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배웠다.
그의 레퍼토리 중심에는 슈베르트, 슈만, 베토벤, J. S. 바흐, 쇼팽, 리스트, 프로코피예프, 드뷔시의 작품들이 있었다.[39] 그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두 권을 한 달 만에 암기했다고 한다.[40]
그는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7번(4일 만에 익혔다)과 프로코피예프가 리히터에게 헌정한 소나타 9번의 초연을 했다. 독주 활동 외에도 로스트로포비치, 바르샤이, 오이스트라흐, 카간, 바시메트, 구트만, 코치스, 레온스카야, 브리튼, 보로딘 현악사중주단 단원들과 같은 파트너들과 함께 실내악을 연주했다. 피셔-디스카우, 슈라이어, 피사렌코, 그의 아내이자 오랜 예술적 동반자인 돌리아크와 같은 가수들을 자주 반주했다.[41]
리히터는 프로코피예프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협주곡 초연을 지휘했는데, 이것이 그의 유일한 지휘 경험이었다. 솔리스트는 이 작품이 헌정된 로스트로포비치였다. 프로코피예프는 1949년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C장조 첼로 소나타를 작곡했고, 그와 리히터는 1950년에 초연했다.
1995년까지도 리히테르는 라벨의 「거울(Miroirs)」 전곡, 프로코피예프의 제2소나타, 쇼팽의 연습곡, 발라드 4번, 슈만의 토카타 등 피아노 레퍼토리 중 가장 어려운 곡들을 계속 연주했다.[33][34]
리히터의 레퍼토리는 바흐부터 20세기 동시대 음악까지 다양하게 펼쳐졌다. 특히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러시아 작곡가 작품들과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리스트, 쇼팽, 브람스 등 고전파와 낭만파 피아노곡이 그 중심을 이뤘다. 드뷔시, 시마노프스키, 바르토크 등의 작품에서도 명연을 선보였다.[77]
방대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한편, 독자적인 안목으로 작품을 엄선했던 것도 특징적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경우, 피아노 소나타 14번이나 21번과 같은 인기곡을 의도적으로 연주하지 않았고, 5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는 1번과 3번만을 레퍼토리로 삼았다. 쇼팽의 연습곡, 드뷔시의 전주곡,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등에서도 일부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85]
3. 2. 연주 스타일
리히테르는 연주자를 "작곡가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는 실행자"로 보았으며, 작품에 이미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추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86] 그는 자신과 다른 연주자 모두에게 비판적이었는데, 무라리 페라히아가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 연주에서 첫 악장의 반복을 생략하자 그 이유를 묻기도 했다. 또한,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에서 수십 년 동안 틀린 음을 연주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해당 연주가 담긴 CD에 "40년 동안 'F' 대신 'F#'(F샵)을 연주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싣기도 했다.리히테르의 연주는 역동적이면서도 정교하게 제어된 기교를 겸비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매우 큰 손을 가져 12도 음정을 가볍게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음악평론가 요시다 히데카즈(吉田秀和)는 리히테르의 베토벤 연주에 대해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로 이 정도의 큰 다이내믹스(강약) 연주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하면서도, 베토벤의 창조적 상상력 속에서는 분명 이러한 음향이 울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느끼게 하는 설득력이 있다"고 평했다.[86]
템포 설정에 있어서 리히테르는 느린 템포부터 빠른 템포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이와이 히로유키(岩井宏之)는 리히테르가 젊은 시절 베토벤 소나타의 빠른 악장을 맹렬한 속도로 연주하기도 했지만, 곧 속도를 중시하지 않는 스타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87] 그러나 1986년 쇼팽의 발라드 4번이나 1984년 도쿄에서의 드뷔시의 서풍에 의한 것』, 라흐마니노프의 음화 Op.33에서는 과거의 빠르고 강력한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1959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녹음은 느린 템포부터 빠른 속도까지 낭만주의를 장대하게 표현했으며, 이후 다른 연주자들의 템포 설정에 영향을 주어 이 곡의 평균 연주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83]
리히테르는 기교적인 난곡뿐만 아니라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 연주에도 뛰어났다. 그는 이전에는 프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경우가 비교적 적었던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을 일찍부터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 글렌 굴드는 1957년 소련 연주 여행 중 리히터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연주를 듣고 "현대에서 가장 강력한 음악 커뮤니케이터"라고 극찬하며, "최면술에 의한 트랜스 상태와 밖에 비유할 수 없는 경지로 인도받았다"고 회상했다.[88]
말년의 리히테르는 연주 시 큰 안경을 착용했으며, 관객들은 리히터가 안경을 벗는 것을 공연 종료 신호로 받아들였다.
3. 3. 녹음
리흐테르는 스튜디오 녹음을 꺼렸지만,[46] 녹음 대부분은 실황 연주에서 나왔다. 그의 대표적인 실황 녹음 장소는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 (1948년)
- 바르샤바 (1954년, 1972년)
- 소피아 (1958년)
- 뉴욕 (1960년)
- 라이프치히 (여러 해)
- 올드버러 (여러 해)
- 투르 근교 라 그랑주 드 메슬레 (여러 해)
- 프라하 (여러 해)
- 잘츠부르크 (1977년)
- 암스테르담 (1986년)
이 실황 녹음들은 그의 연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로 여겨지며,[47] Music & Arts, BBC 레전드, 필립스, Russia Revelation, 파르나수스, Ankh Productions 등 레이블을 통해 그의 생전과 사후에 발매되었다.[47]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리흐테르의 다른 실황 녹음으로는 스크랴빈의 선별된 연습곡, 전주곡 및 소나타(여러 차례 연주), 슈만의 C장조 환상곡(여러 차례 연주),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모스크바, 1960년), 슈베르트의 B-플랫 소나타(여러 차례 연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소피아, 1958년), 라벨의 《거울》(프라하, 1965년),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여러 차례 연주, 1965-66년),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여러 차례 연주, 1975년), 라흐마니노프(여러 차례 연주)와 드뷔시(여러 차례 연주)의 선별된 전주곡 등이 있다.[47]
스튜디오 녹음을 꺼렸음에도 불구하고, 리히테르는 녹음 과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48] 예를 들어,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녹음 세션 후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사용했던 리히터는 테이프를 듣고 불만을 느껴 스타인웨이로 다시 녹음해야겠다고 말했다.[49] 슈만의 토카타 녹음 중에는 슈만이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어려운 곡들 중 하나"라고 여겼던 이 곡을[50] 해석의 자발성을 위해 휴식 없이 여러 번 연주했다.
1958년, 리히테르는 비토르트 로비츠키가 지휘하는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을 녹음하여 미국에서 이름을 알렸다. 1959년에는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성공적으로 녹음했다.
1961년 그래미상에서 리히테르가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RCA 빅터 녹음인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최우수 클래식 연주 – 협주곡 또는 기악 독주자 부문을 수상했다. 이 녹음은 (리히터의 불만에도 불구하고)[52]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리스트의 두 피아노 협주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슈만의 토카타 등과 함께 중요한 녹음으로 평가받는다.[53]
1983년 팔크 슈바르츠와 존 베리의 논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 음반 목록"에 따르면,[51] 1970년대에 리히터는 독주 레퍼토리 전체를 "약 50장의 음반"에 녹음하려 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완성되지 못했고, 1970년부터 1973년 사이 12장의 LP 분량 녹음이 이루어져 올림피아(다양한 작곡가, 10장 CD)와 RCA 빅터(바흐의 《잘 벼려진 건반》)에서 CD로 재발매되었다.
리히테르는 스튜디오 녹음을 싫어했지만, 라이브 녹음을 포함해 결과적으로 많은 음원을 남겼다. 그의 레퍼토리 대부분은 현재 녹음으로 접할 수 있다.[77] 녹음이 들쭉날쭉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요아힘 카이저(Joachim Kaiser)는 "최고의 라이브 레코딩에서 그의 위대함은 비교할 데가 없다"고 평가했다.[76] 사후에는 각국 방송국에 남아 있던 음원들도 CD로 발매되었다.
3. 4. 사용 악기
독일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과의 바르샤바 녹음 세션에서 엔지니어를 맡았던 하인츠 빌트하겐(Heinz Wildhagen)은 당시 사용했던 피아노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현지 스태프가 구한 피아노는 건반의 터치가 매우 고르지 못한 질이 낮은 것이었고, 스태프는 리흐테르가 당연히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아 하나하나 건반의 감촉을 확인하며 고르게 들리도록 연습하여, 문제가 있는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연주했다고 한다.[80]이후 그는 1969년 야마하(Yamaha) 피아노에 주목하여 애용하게 되었다.[77]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유연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특히 피아니시모가 매우 아름답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마음의 감수성을 노래해 준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NHK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프로젝트 X~도전자들~'(2001년 10월 2일 방송분)에서도 소개되었다.[89]
4. 평가 및 영향
이탈리아 비평가 피에로 라탈리노(Piero Rattalino)는 피아노 연주 역사상 리히테르와 비교할 만한 피아니스트는 프란츠 리스트와 페루치오 부조니뿐이라고 주장했다.[56]
글렌 굴드는 리히테르를 "우리 시대 음악계가 배출한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자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57]
내이선 밀슈타인은 그의 회고록 《러시아에서 서쪽으로(From Russia to the West)》에서 리히테르를 "확실히 놀라운 피아니스트였지만, 소문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의 음악은 나에게 너무 건조했다. 리히테르의 라벨의 물의 놀이 해석에서, 흐르는 물 대신 얼어붙은 고드름을 듣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했다.[58]
반 클라이번은 1958년 소련에서 열린 리히테르의 독주회에 참석했다. 그는 독주회 도중 울었다고 전해지며, 미국으로 돌아온 후 리히테르의 연주를 "내가 들어본 가장 강력한 피아노 연주"라고 묘사했다.[59]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리히테르를 처음 접한 경험을 "사실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알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라고 묘사했다.[57]
헨리히 노이하우스는 리히테르를 "전체를 파악하는 동시에 작품의 가장 작은 세부 사항도 놓치지 않는 그의 독특한 능력은, 높은 곳에서 지평선까지 볼 수 있으면서도 풍경의 가장 작은 세부 사항을 구별할 수 있는 독수리와 비교할 만하다."라고 묘사했다.[60]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리히테르에 대해 "리히테르는 특별한 현상이다. 그의 재능의 엄청남은 놀라움과 황홀경을 안겨준다. 음악 예술의 모든 현상이 그에게 접근 가능하다."라고 썼다.[61]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는 리히테르가 "천재"라고 선언했고, 리히테르는 소프로니츠키가 "신"이라고 답했다.[62]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리히테르 한 사람뿐이다."라고 말했다.[63]
피에르 불레즈는 리히테르에 대해 "그의 개성은 피아노가 제공하는 가능성보다 크고, 악기를 완벽하게 마스터한다는 개념 자체보다 넓었다."라고 썼다.[64]
리히테르의 친구였던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그녀의 자서전 《마를레네(Marlene)》에서 "어느 날 저녁 관객들은 무대에 그의 주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동안 그의 바로 뒤에 있던 한 여성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그녀는 홀에서 옮겨졌다. 나는 이 사건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리히테르가 연주하는 동안 죽는다니, 얼마나 부러운 운명인가! 이 여성은 생명을 떠날 때 얼마나 강렬한 음악적 감동을 느꼈을까!' 그러나 리히테르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충격을 받았다."라고 썼다.
그라모폰 비평가 브라이스 모리슨(Bryce Morrison)은 리히테르를 "기이하고, 직설적이며, 영웅적이고, 내성적이며, 서정적이고, 화려하며, 아마도 무엇보다도 심오하게 수수께끼 같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현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라고 묘사했다.[65]
리히테르는 바흐에 대해 "때때로 바흐를 듣는 것은, 위생적인 측면에서라도 해롭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66]
스크랴빈에 대해서는 "스크리아빈은 매일 먹는 빵과 같은 작곡가는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취할 수 있는 진한 술, 시적인 마약, 깨지기 쉬운 수정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67]
소규모 공연장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리히테르는 "작은 피아노를 트럭에 싣고 시골길을 달리세요.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 데 시간을 들이고, 좋은 교회가 있는 아름다운 곳에 멈춰서세요. 피아노를 내리고 주민들에게 알리고, 연주회를 열고, 참석해주신 분들에게 꽃을 드리고, 다시 떠나세요."라고 말했다.[68]
무료로 연주할 계획에 대해 "음악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저는 무료 연주회를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답입니다."라고 말했다.[69]
헨리히 노이하우스에 대해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비록 그가 저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계속 말했지만 말입니다. 음악은 연주하고 듣기 위해 쓰여졌고, 항상 저에게는 말 없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인리히 네이하우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곁에서는 거의 항상 완전한 침묵에 잠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음악에만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저에게 침묵의 의미와 노래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제가 엄청나게 완고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연주해 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라고 말했다.[70]
연주에 대해 "저는 관객을 위해 연주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 연주합니다. 그리고 제가 만족을 얻는다면, 관객들 또한 만족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71]
미국 순회 공연 중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하이든을 연주한 후, 리히터는 인터뷰어의 많은 설득과 자신의 당황스러움 속에서 "하이든은 모차르트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5. 수상 경력
연도 | 수상 내용 |
---|---|
1950년 | 스탈린 상 |
1955년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예술가 |
1960년 | 그래미상 |
1961년 | 레닌상,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인민예술가 |
1968년 | 츠비카우 시 로베르트 슈만 상 |
1975년 | 사회주의 노동 영웅 |
1977년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명예 박사 |
1980년 | 10월 혁명 훈장 |
1985년 | 레닌 훈장 |
1986년 | 레오니 소닝 음악상 (덴마크) |
1987년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글린카 국가상 (1986년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 도시에서 공연한 콘서트 프로그램에 대해 수여됨) |
1995년 | 조국에 대한 공로 훈장 4등급 |
1996년 | 러시아 연방 국가상 |
예술문학훈장 사령관(프랑스) | |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음악)[72] | |
2012년 |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73] |
소행성 9014 Svyatorichter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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