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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히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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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메노히보코는 《고지키》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라 왕자로, 일본에 건너와 여러 신물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붉은 구슬에서 태어난 여인과 결혼했으나, 아내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다지마국에 정착했으며, 7종의 신보를 일본에 귀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리마노쿠니 후도키》에는 아메노히보코가 오오쿠니누시와 땅을 다투는 신으로 등장하며, 지명 유래 설화에도 등장한다. 아메노히보코는 한반도 도래인 집단을 상징하는 시조신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그의 후손은 진구 황후, 이토 현주 등으로 전해진다. 아메노히보코와 관련된 신앙은 다지마국 이즈시 신사를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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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히보코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아메노히보코 (天日槍)
주요 전승지 분포출석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신화적 배경
신격화 대상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신보의 신령, 아메노히보코의 신령
전승
주요 관련 장소출석신사 (효고현도요오카시)
기이국
오미국
쓰루가
히메시마 (오이타현)
신라
관련 링크
도요오카시 영어 소개 (보존 문서)도요오카시 영어 소개
시가라키 도자기 역사시가라키 도자기 역사
도요오카시 역사 소개 (보존 문서)도요오카시 역사 소개

2. 역사적 기록

아메노히보코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의 여러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그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으나, 두 기록 사이에는 내용상 차이가 존재한다.

고사기』는 아메노히보코를 신라의 왕자로 묘사하며, 붉은 구슬에서 태어난 아카루히메와의 결혼과 이별 후 일본 다지마에 정착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29][7] 이 기록은 한반도난생설화, 특히 고구려 시조 주몽 신화와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한다.[30] 또한 그의 후손으로 다지마모리진구 황후의 조상이 언급된다.

반면, 『일본서기』는 스이닌 천황 대에 아메노히보코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귀화하여 여러 신성한 보물을 바쳤다고 기록한다. 이후 여러 지역을 거쳐 다지마국 이즈시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아카루히메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나타나지 않으며, 유사한 설화는 아메노히보코보다 먼저 도래한 가야 왕자 쓰누가아라시토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지방 풍토기인 『하리마노쿠니 후도키』에서는 아메노히보코를 신대(神代)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신(渡來神)으로 그리고 있으며, 토착신인 오오쿠니누시와 땅을 두고 경쟁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하리마 지역의 지명 유래 설화와 연결된다.

그 외에도 『지쿠젠노쿠니 후도키』 일문에서는 이토군 현주의 선조 이토데(五十跡手)가 자신을 고려(高麗) 오로산(意呂山)에 강림한 히보코의 후손이라고 주아이 천황에게 밝혔다는 기록이 있으며,[31] 『신센쇼지로쿠』에는 아메노히보코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여러 씨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아메노히보코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걸쳐 나타나지만, 그의 출신, 도래 경위, 행적, 관련 인물 등 세부적인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2. 1. 고사기와 일본서기

아메노히보코에 대한 기록은 일본의 주요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지만, 그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고사기』의 기록'''

『고사기』에 따르면, 옛날 신라의 아구누마(阿具奴摩 또는 阿具沼)라는 늪에서 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햇빛이 무지개처럼 그녀의 음부에 닿아 임신하게 되었고 붉은 구슬을 낳았다. 이 광경을 본 어떤 남자가 여인에게 간청하여 구슬을 얻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이 남자가 소를 끌고 음식을 나르던 중, 신라의 왕자였던 아메노히보코가 이를 보고 소를 잡아먹으려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남자는 결백을 주장했으나 풀려나지 못했고, 결국 붉은 구슬을 아메노히보코에게 바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17]

아메노히보코가 구슬을 집에 가져와 마루에 두자 구슬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 그는 이 여인을 정실 부인으로 삼았고, 그녀는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아메노히보코는 오만한 성격 탓에 아내를 비난했고, 이에 상처받은 아내는 부모의 나라로 돌아가겠다며 작은 배를 타고 난바로 떠나 그곳 히메코소 신사(比売碁曾神社)의 신(아가루히메노카미)가 되었다.[29][17] 현재 오사카부 오사카시의 히메코소 신사가 이곳으로 비정된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아메노히보코는 아내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난바 해협의 신이 길을 막아 아내에게 갈 수 없었고, 결국 다지마에 상륙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현지 여성인 마에미츠(前津見, 『고사기』 오진 천황기에는 사키쓰미(前津見)로 표기)와 결혼하여 아들 다지마모로스쿠(多遅摩母呂須玖)를 낳았다.[7][17]

『고사기』 오진 천황기에는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가져온 보물, 이른바 "타마쓰타카라(玉津宝)" 8종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이 보물들은 효고현 도요오카시이즈시 신사에 모셔진 "이즈시노야마에노오카미(伊豆志之八前大神)"로 칭해진다고 한다.[17]

『고사기』 기록 아메노히보코 전래 보물 (타마쓰타카라 8종)
종류명칭
구슬구슬 2관(貫)
히레(比礼)나미후루히레(浪振る比礼), 나미키루히레(浪切る比礼), 카제후루히레(風振る比礼), 카제키루히레(風切る比礼)
거울오키쓰카가미(奥津鏡), 헤쓰카가미(辺津鏡)



또한 『고사기』는 아메노히보코의 후손 계보를 전하는데, 아들 다지마모로스쿠로부터 시작하여 다지마모리진구 황후까지 이어진다. 구체적으로는 다지마모로스쿠 → 다지마히데(多遅摩斐泥) → 다지마히나라키(多遅摩比那良岐) → 다지마히다카(多遅摩比多訶) → 가쓰라기노타카누카히메(葛城之高額比売命) → 진구 황후(息長帯比売命) 순서이다. 다지마모리는 다지마히나라키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17] 화과자의 신으로 불리는 다지마모리는 아메노히보코의 후손이다.

아메노히보코 설화 중 햇빛으로 잉태하여 알(구슬)에서 태어났다는 부분은 시베리아, 한반도부터 동남아시아까지 널리 퍼져 있는 난생설화의 일종으로, 특히 고구려 시조 주몽의 출생 신화와 유사성이 지적된다.[30]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 3년(기원전 27년 추정) 3월 조에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일본에 귀화했으며, 7가지 신보(神寶)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보물들은 다지마에 보관되어 신성한 물건으로 여겨졌다고 한다.[12]

『일본서기』 스이닌 3년 기록 아메노히보코 전래 보물 (7종)
종류명칭수량
구슬하후토의 구슬(羽太玉)1개
구슬아시타카의 구슬(足高玉)1개
구슬우카카의 붉은 옥(鵜鹿々赤石玉)1개
이즈시의 작은 칼(出石小刀)1자루
이즈시의 창(出石桙)1자루
거울히노카가미(日鏡)1면
히모로기쿠마노히모로기(熊神籬)1구



같은 조의 별전(別伝)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는 처음에 하리마국 시사와(宍粟) 마을에 도착했다. 스이닌 천황은 오토모누시(三輪氏 祖)와 나가오시(倭氏 祖)를 보내 그를 심문하게 했다. 아메노히보코는 자신이 신라 왕자이며, 일본에 성스러운 천황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동생 치코(知古)에게 나라를 맡기고 귀순하러 왔다고 밝혔다. 이때 그는 8가지 물건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스이닌 3년 별전 기록 아메노히보코 헌상 보물 (8종)
종류명칭
구슬하호소의 구슬(葉細の珠), 아시타카의 구슬(足高の玉), 우카카의 붉은 옥(鵜鹿鹿の赤石の玉)
칼/창이즈시의 칼(出石の刀子), 이즈시의 창(出石の桙), 이사사노타치(胆狭浅の大刀)
거울히노카가미(日鏡)
히모로기쿠마노히모로기(熊の神籬)



천황은 아메노히보코에게 하리마국 시사와 마을과 아와지시마 이데아사(出浅) 마을에 거주하도록 허락했으나, 아메노히보코는 더 좋은 땅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기를 원했다. 그는 우지강을 거슬러 올라가 오미국 아나(吾名) 마을에 잠시 머물렀고, 이후 와카사국을 거쳐 다지마국 이즈시에 정착했다. 오미국 카가미(鏡) 마을[13]의 도공(陶人)이 그의 종자가 된 것은 이때의 일이라고 한다. 다지마에서 그는 이즈시의 오토미미(太耳)의 딸 마타오(麻多烏)와 결혼하여 아들 다지마노모로스케(但馬諸助)를 낳았다. 이 계보는 다지마노모로스케 → 다지마히나라키(但馬日楢杵) → 키요히코(清彦) → 다지마모리로 이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12]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 88년 7월 조에는 천황이 다지마국의 신보를 보고 싶어 아메노히보코의 증손자인 키요히코에게 헌상을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키요히코가 가져온 신보는 하타(하후토)의 구슬, 아시다카의 구슬, 우카시카(우카카)의 붉은 돌 구슬, 햇빛 거울(히노카가미), 곰 신성한 울타리(쿠마노히모로기)의 5종이었다. 키요히코는 이즈시 작은 칼 1자루를 몰래 숨겼으나 발각되어 다른 보물들과 함께 신부(神府, 신성한 창고,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부로 추정)에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작은 칼은 신부에서 사라져 키요히코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사라졌고, 나중에 아와지시마에서 발견되어 섬 주민들에 의해 신사에 모셔졌다고 한다.[14][15] 같은 조에서는 아메노히보코가 다지마의 마에쓰미미(前津耳 또는 大耳)의 딸 마타노오(麻多烏)와 결혼하여 다지마 모로스케를 낳았고, 그가 키요히코의 조부라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15]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차이점'''


  • 아카루히메와의 관계: 『고사기』에서는 아카루히메가 아메노히보코의 아내였으나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히메코소 신사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반면 『일본서기』에서는 아메노히보코와 아카루히메의 직접적인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서기』는 아메노히보코가 도래하기 전에 의부 가락국의 왕자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가 일본에 건너왔으며, 아카루히메와 관련된 설화(붉은 구슬에서 태어난 여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이를 쫓아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쓰누가아라시토라고 기록하고 있다. 쓰누가아라시토는 3년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 전래 보물: 양쪽 기록 모두 아메노히보코가 여러 보물을 가져왔다고 전하지만, 그 종류와 개수에는 차이가 있다. (위 표 참조)
  • 계보: 아메노히보코의 후손 계보 역시 세부적인 이름과 대수에서 차이를 보인다. 『고사기』는 진구 황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중시하는 반면, 『일본서기』는 다지마모리로 이어지는 계보를 주로 기록한다.
  • 도래 시기와 경위: 『고사기』는 오진 천황 대의 일로 기록하며 아내를 찾아 일본에 왔다고 설명하지만, 『일본서기』는 스이닌 천황 대의 일로 기록하며 일본 천황의 덕망을 듣고 귀순했다고 설명한다.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録)』에는 아메노히보코의 후손으로 사쿄 지방의 시미즈노오비토(清水조)・오치노오비토(大市조)와 야마토 지방의 히라타노오비토(辟田조) 등이 언급된다.

2. 2. 하리마국 풍토기

하리마노쿠니 후도키에서는 신대(神代)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신(渡來神)인 '''아메노 히보코노 미코토'''(天日槍命)로 등장한다. 이 기록에서 그는 오오쿠니누시와 동일시되기도 하는 아시하라시코오노미코토(葦原志許乎命) 및 이와노오오카미(伊和大神)와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 신으로 그려진다. 이는 기키(고사기일본서기)의 기록과는 연대나 다툼의 유무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아메노히보코와 토착신들의 다툼은 이보군, 이소 군, 간자키군 등의 지명 유래 설화로 남아있다. 이들의 경쟁은 결국 각자 세 자루의 검은 을 던져 그 낙하지점으로 땅의 소유를 결정하는 점을 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아시하라시코오노미코토가 던진 칡은 하리마국에 한 자루, 다지마국에 두 자루가 떨어졌으나, 아메노 히보코가 던진 칡은 모두 다지마국에 떨어졌다. 이 결과에 따라 아메노히보코는 다지마국이즈시 지역으로 물러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대신을 모시는 이와 신사(효고현 시소시)


하리마 국 풍토기』에는 아메노히보코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지명 기원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하리마 국 풍토기』 속 아메노히보코 관련 지명 유래'''

지역관련 지명유래 요약비고
이보군츠부오카(粒丘)객신(客神, 외래신) 아메노히보코가 한반도에서 건너와 우토강(현 이보강·하야시다강 합류점 부근[18]) 가에 도착하여 토착신 아시하라노시코오노미코토에게 머물 땅을 요구했다. 시코는 바닷속 땅만 허락했으나, 아메노히보코는 검으로 바다를 휘저어 섬을 만들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낀 시코가 먼저 북쪽으로 가 츠부오카에서 식사하던 중 입에서 밥알(粒)이 떨어져 지명이 유래했다.[19]다츠노시 이보정 이보카미 북쪽 나카진산 추정[18]
시소군 히지리카와오토무라(川音村)아메노히보코가 마을에 머물며 "강 소리(川音)가 매우 높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20]시소시 야마자키정 카와도 부근 추정[18]
시소군 히지리우바이다니(奪谷)아시하라노시코오노미코토와 아메노히보코 두 신이 골짜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툰(奪) 데서 유래했다.[20]
시소군 타카케리타카야(高屋)아메노히보코가 "이 마을의 높이(高)가 다른 마을보다 뛰어나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21]시소시 야마자키정 쇼노에서 야마자키 부근 추정[18]
시소군 카시와노리이나카가와(い奈加川)아시하라노시코오노미코토와 아메노히보코가 땅을 두고 다툴 때, 우는 말이 이 강에서 두 신과 만난 데서 유래했다.[21]스게노강 추정[18]
시소군 운카리하카무라(波賀村)이와 대신과 국토 점유를 다툴 때, 아메노히보코가 먼저 도착하자 뒤늦게 온 이와 대신이 "대책(計)을 세우지 않아 먼저 도착한 것인가"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22]시소시 하가정 아가·아리카·카미노 부근 추정[18]
시소군 미카타리미카타(三方)아시하라노시코오노미코토와 아메노히보코가 검은 칡(黒葛) 던지기 점을 쳤을 때, 아시하라노시코오노미코토의 칡 세 개(三) 중 하나가 이 마을에 떨어진 데서 유래했다. 아메노히보코의 칡은 모두 다지마에 떨어져 이즈시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별전: 이와 대신이 유품으로 어장(御形)을 세워 미카타가 되었다는 설도 있음)[22]시소시 이치노미야정 북반부 추정[18]
칸자키군 타다리키무레야마(杵牟礼山)이와 대신과 아메노히보코가 군사를 일으켜 싸울 때, 이와 대신의 군사들이 모여 벼를 찧었고, 그때 나온 쌀겨가 쌓여 언덕이 되었는데, 그 키(杵)를 떨어뜨린 곳이라 하여 키무레야마라고 부르게 되었다.히메지시 후나츠정 야하타 쌀겨 무덤 추정[18]
칸자키군 타다리야치구사노(八千種野)아메노히보코가 이끌었던 군사의 수가 8천(八千) 명이었던 데서 유래했다.칸자키군후쿠사키정 야치구사 부근 추정[18]


2. 3. 기타 기록

고지키에 따르면, 신라의 "아구누마(阿具奴摩/阿具沼)"라는 근처에서 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햇빛이 그녀의 성기를 비추자 붉은 구슬을 낳았다. 이를 본 한 남자가 구슬을 얻어 간직했다. 어느 날, 그 남자가 에 식량을 싣고 가던 중, 당시 신라의 왕자였던 아메노히보코가 그를 보고 소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오해하여 투옥시켰다. 남자는 붉은 구슬을 바치며 석방을 간청했고, 아메노히보코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메노히보코가 구슬을 집에 가져가자 구슬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 아메노히보코는 이 여인과 결혼했지만, 사소한 일로 아내에게 화를 냈다. 이에 아내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작은 배를 타고 난바로 떠났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아메노히보코는 아내를 따라 난바로 가려 했으나, 수호신(가미)이 길을 막아 결국 다지마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에미쓰(前津見)"라는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7]

난바로 간 본래의 아내는 그곳 사람들의 신이 되어 "아카루히메(阿加流比売)"라고 불리게 되었다.[7]

고사기에서는 히메코소노샤(比売碁曾社, 비매거조신사)의 유래를 아메노히보코와 아카루히메노카미(阿加流比売神)의 이야기로 설명하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스이닌 천황 2년 조의 주석에서 쓰누가아라시토와 그의 아내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3. 아메노히보코의 신보

아메노히보코가 신라 왕자로서 일본으로 건너올 때 여러 신성한 보물, 즉 신보(神宝)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전해진다. 하지만 각 기록에 따라 신보의 종류와 개수에는 차이가 있다.

'''『고사기』의 기록'''

『고사기』 오진 천황기에는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신보를 "타마쓰타카라(玉津宝)"라고 칭하며 다음 8종류를 언급한다.[17]


  • 구슬 2관
  • 나미후루히레(浪振る比礼)
  • 나미키루히레(浪切る比礼)
  • 카제후루히레(風振る比礼)
  • 카제키루히레(風切る比礼)
  • 오키쓰카가미(奥津鏡)
  • 헤쓰카가미(辺津鏡)


이 신보들은 바다의 풍파를 다스리는 주술 도구로 여겨지며, 바다 신 신앙과 아메노히보코 신앙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보물들은 "이즈시노야마에노오카미(伊豆志之八前大神)"라는 이름으로 효고현 도요오카시 이즈시정이즈시 신사에서 아메노히보코와 함께 모셔지고 있다.[17]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 3년(기원전 27년) 3월 조에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도래하며 다음 7가지 신보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12]

  • 하후토의 구슬(羽太の玉) 1개
  • 아시타카의 구슬(足高の玉) 1개
  • 우카카의 붉은 옥(鵜鹿鹿の赤石の玉) 1개
  • 이즈시의 작은 칼(出石の小刀) 1자루
  • 이즈시의 창(出石の桙) 1자루
  • 히노카가미(日鏡) 1면
  • 쿠마노히모로기(熊の神籬) 1구


이 보물들은 다지마국에 보관되어 항상 신물(神物)로 여겨졌다고 한다. 같은 조의 별전(別伝)에서는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귀화하기를 원하며 다음 8가지 물건을 헌상했다고 전하는데, 목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 하호소의 구슬(葉細の珠)
  • 아시타카의 구슬
  • 우카카의 붉은 옥
  • 이즈시의 칼(刀子)
  • 이즈시의 창
  • 히노카가미
  • 쿠마노히모로기
  • 이사사노타치(胆狭浅の大刀)


한편,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 88년 7월 조에는 천황이 다지마국에 있는 아메노히보코의 신보를 보고 싶어 하여, 그의 증손자인 키요히코에게 명하여 헌상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헌상된 신보는 다음 5가지였다.

  • 하타의 구슬 1개
  • 아시다카의 구슬 1개
  • 우카시카의 붉은 돌 구슬 1개
  • 햇빛 거울 1면
  • 곰 신성한 울타리 1개


그러나 이와 별도로 "이즈시"라는 이름의 작은 칼 1자루가 있었는데, 키요히코는 이를 헌상하고 싶지 않아 옷 속에 숨겼다가 발각되었다. 결국 이 칼도 다른 신보와 함께 신부(神庫, 미쿠라)에 납입되었으나 얼마 후 자연히 사라졌다. 키요히코는 칼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없어졌다고 보고했고, 천황은 두려워하여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이 칼은 나중에 아와지시마에서 발견되어 섬 사람들에 의해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졌다고 한다.[14][15] 이 신부(神庫)는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4. 쓰누가아라시토와의 관계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오기 전에 가야 국왕의 아들인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가 먼저 도래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사기』에서 전하는 아메노히보코 설화 중 아카루히메가 일본으로 건너가고 아메노히보코가 그녀를 뒤쫓아가는 부분의 실제 주인공은 쓰누가아라시토가 된다. 쓰누가아라시토는 일본에 머물다 3년 뒤에 귀국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오사카에 있는 히메코소 신사의 유래에 대해서도 두 문헌의 기록이 다르다. 『고사기』에서는 이 신사가 아메노히보코와 아카루히메의 이야기와 관련있다고 설명하지만[29], 『일본서기』 스이닌 천황 2년 조의 주석에는 쓰누가아라시토와 그의 아내에 얽힌 전승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두 설화 사이에 혼동이나 내용의 중첩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録)』에는 쓰누가아라시토의 후손으로 사쿄(左京)의 시미즈노오비토(清水真人)·오치노오비토(大市真人)와 야마토국(大和国)의 히라타노오비토(闢田真人) 등이 기록되어 있다.

5. 가계 및 후손

고지키에는 화과자의 신으로 불리는 다지마모리(多遅摩毛理)가 아메노 히보코와 아카루히메노카미(阿加流比売神)의 증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지마모리의 아들인 다지마히다카(多遅摩比多訶)의 딸 카츠라기노타카와카히메는 진구 황후의 어머니가 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아카루히메노카미와 결혼한 인물은 가야의 왕자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이며, 그는 아메노히보코보다 먼저 일본에 건너갔다고 기록하여 차이를 보인다.

아메노히보코의 아버지는 의부 가락국왕으로 전해진다. 부인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다지마국 이즈시(出石)의 오토미미(太耳) 혹은 마에쓰미미(前津見)의 딸인 마타오(麻多烏) 또는 마타노오(麻陀烏)와 결혼했다고 한다.[12][15]

『일본서기』 기록을 종합하면, 아메노히보코는 마타오(마타노오)와의 사이에서 타지마노모로스케(但馬諸助)를 낳았고, 그 후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고 한다.[12][15][32]


  • 아들: 타지마노모로스케(但馬諸助)
  • 손자: 타지마히나라키(但馬日楢杵)
  • 증손: 키요히코(淸彦, 但馬淸彦)
  • 현손: 다지마모리


아메노히보코의 후손은 진구 황후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진구 황후는 종종 한반도로 해석되는 "약속의 땅"을 침략하고 정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아메노히보코가 한반도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진구 황후와 그의 아들 오진 천황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10][11]

6. 해석 및 평가

일본 신화와 고대 기록에 등장하는 아메노히보코는 여러 문헌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 해석 또한 다채롭다. 각 문헌은 아메노히보코의 출신, 행적, 성격 등을 다르게 묘사하고 있어, 그의 정체성과 설화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서는 신라 왕자로서 신비로운 난생설화와 관련된 아카루히메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는 한반도 신화와의 연관성을 시사한다.[30][8] 반면, 『하리마노쿠니 후도키』에서는 도래신으로서 토착신과의 경쟁 관계가 부각되어, 고대 사회의 세력 구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지쿠젠노쿠니 후도키』에서는 특정 지역 호족의 시조로 언급되기도 한다.[31]

이처럼 아메노히보코 설화는 기록의 다양성과 복잡성으로 인해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아메노히보코라는 인물 또는 그와 관련된 집단의 역사적 실체, 그리고 고대 한반도일본 열도 간의 교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구 과제를 제공한다.

6. 1. 학계의 해석

고사기』에 기록된 아메노히보코와 아카루히메 이야기는 학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특히 아카루히메가 햇빛을 받아 잉태된 어머니에게서 붉은 구슬(알) 형태로 태어났다는 설화는 한반도 및 주변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난생설화의 일종으로 여겨진다.[8] 이러한 탄생 방식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건국 신화와 매우 유사하다는 분석이 많다.[30][8] 주몽 역시 어머니 유화부인이 햇빛을 받고 잉태하여 낳은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아메노히보코와 아카루히메 모두 신라 출신이라는 전승과 함께, 이 설화가 시베리아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 공유되던 신화적 요소, 특히 한반도의 건국 신화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8] 금관가야의 수로왕, 신라의 혁거세 역시 알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이러한 난생 신화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다.[8]

다른 관점에서는 아메노히보코 설화와 신라연오랑과 세오녀 설화 간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두 이야기 모두 태양 숭배와 관련된 요소를 포함하며, 신라인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과정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9] 비록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의 왕족이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 설화들은 고대 한반도 출신 인물들이 일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다른 문헌들은 아메노히보코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하리마노쿠니 후도키』에서는 아메노히보코를 신대에 도래한 신(天日槍命)으로 묘사하며, 오오쿠니누시와 동일시되는 아시하라시코오노미코토(葦原色許男命) 및 이와노오오카미(岩之大神)와 땅을 두고 경쟁한 존재로 그린다. 이는 기키(고사기일본서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지쿠젠노쿠니 후도키』 일문에는 이토군의 현주 선조인 이토데(五十跡手)가 주아이 천황에게 자신을 고려(여기서는 신라를 의미할 수 있음)의 오로산(意呂山)에 강림한 히보코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내용이 있다.[31]

아메노히보코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관련된 전승도 존재한다. 『셋츠국 풍토기』 이문(『만엽집 주석』 인용)에 따르면, 오진 천황신라의 여신(아카루히메로 추정)이 남편을 피해 쓰쿠시국의 '이와히노히메 섬'(오이타현 히메시마로 추정[25][26])에 머물렀으나, 신라와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셋츠국의 히메시마 마츠바라(현 오사카시 니시요도가와구 히메지마)로 옮겨갔다고 한다. 이 지명 '히메시마'는 여신이 머물렀던 섬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27] 또한 『부젠국 풍토기』 이문(『우사궁 탁선집』 인용)에는 신라의 신(아메노히보코로 추정)이 다가와군 가와라정 부근에 정착하여 '가와루노카미(鹿春神)'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27] 이는 후쿠오카현 가와라정의 가와라 신사와 관련된 전승으로 여겨진다.

6. 2. 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아메노히보코 설화는 그 내용과 전승 과정을 통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 속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고사기』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 이야기는 신라의 아구누마(阿具奴摩)라는 늪에서 시작된다. 햇빛을 받아 붉은 구슬을 낳은 여인과, 그 구슬을 우연히 얻었다가 아메노히보코에게 빼앗기는 남자의 이야기는 설화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히보코가 구슬을 얻는 과정에서 보이는 오해와 강압적인 태도는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구슬이 아름다운 여인(아카루히메)으로 변하고 히보코의 정실이 되지만, 그의 모욕적인 언사로 인해 아내는 결국 떠나 난바의 히메코소 신사(比売碁曾神社)로 향한다.[29] 아내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온 히보코는 다지마에 정착하게 된다.

이 설화의 핵심 모티프인 '햇빛으로 잉태하여 알(구슬)에서 태어나는' 난생설화는 시베리아, 한반도, 동남아시아 등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신화 유형이다. 특히 고구려 시조 주몽의 출생 신화와의 유사성이 지적되는데[30], 이는 아메노히보코 설화가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거나, 혹은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 내에서 공유되던 서사 구조를 반영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메노히보코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사한 전승도 존재한다. 『셋츠국 풍토기』 이문에는 오진 천황 때 신라 여신이 남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쓰쿠시국의 히메시마(오이타현 히메시마로 추정[25][26])를 거쳐 셋츠국의 히메시마 마츠바라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7] 또한 『부젠국 풍토기』 이문에는 신라의 신이 다가와군 가와라초 부근에 와서 '가와루노카미(鹿春の神)'라 불리며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27](후쿠오카현 가와라정의 가와라 신사 관련).

다이도 2년(807년)에 편찬된 『고어습유』에서는 스이닌 천황 조에서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海檜槍)가 도래하여, 다지마 국 이즈시 군에 큰 신사(이즈시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와 기록들은 아메노히보코라는 인물 또는 그와 관련된 집단이 고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착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될 수 있으며, 고대 한일 간의 인적, 문화적 교류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6. 3. 비판적 관점

아메노히보코 관련 기록은 여러 문헌에 걸쳐 나타나지만, 내용의 일관성이 부족하고 설화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고사기』에 따르면, 아메노히보코는 신라에서 한 남자가 소중히 간직하던 붉은 구슬을 강압적으로 빼앗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구슬이 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거만한 성격 탓에 아내를 모욕하여 결국 아내가 신라로 돌아가 버리는 결과를 맞는다.[29] 아내를 되찾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오지만 난바 해협 신의 방해로 실패하고 다지마에 정착하게 된다. 이러한 서사는 아메노히보코의 성격적 결함과 그로 인한 실패를 보여준다. 또한, 햇빛으로 잉태하여 붉은 구슬(알)을 낳는다는 설화의 시작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난생 신화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어[30], 설화의 기원과 전파 과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하리마노쿠니 후도키』에서는 아메노히보코가 토착신인 오오쿠니누시(아시하라시코오노미코토)와 영토를 두고 다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점을 치는 대결에서 패배하여 다지마 이즈시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는 도래인 세력과 토착 세력 간의 갈등 및 긴장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이도 2년(807년)에 편찬된 『고어습유』에서는 스이닌 천황 때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海檜槍)가 도래하여 다지마 국 이즈시 군에 큰 신사(이즈시 신사)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의 일본 정착과 신격화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외 문헌에서도 아메노히보코와 관련된 단편적인 기록이나 유사한 설화가 발견된다. 『지쿠젠노쿠니 후도키』 일문에는 이토군 현주의 선조 이토데가 자신을 히보코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내용이 있고[31], 『셋츠국 풍토기』 이문에는 남편(아메노히보코로 추정)을 피해 신라 여신이 쓰쿠시국을 거쳐 셋츠국 히메시마까지 피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7] 『부젠국 풍토기』 이문 역시 신라의 신이 건너와 다가와군 가와라초 부근에 살았다는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27] 이러한 다양한 기록들은 아메노히보코 설화가 일본 각지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내용상의 차이와 파편적인 정보로 인해 설화의 원형과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7. 관련 유적 및 신앙

(타지마모로스쿠)모로스기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이즈시정 우치마치히데 신사소타지마 히타카(론)히데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탄토정 하타야마(론)히데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탄토정 미나미오스기 신사소관구 유라도미스기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이즈시정 아라키나카시마 신사소나카지마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미야케히지 신사소타지마 히데히지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탄토정 구치후지기타군타마라키 신사소다지마 히나라기
(타지마히나라키)타마라키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히다카정 이노즈메아시다 신사소(아메노히보코의 종자)아시다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나카고 모리시타다카누키 신사소가츠라기 타카누키히메다카누키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히다카정 다케누키기사키군미미이 신사소마에즈미
(타이마미/마에츠미)미미이 신사효고현 도요오카시 미야이



위 목록 외에도 『이즈시정사』에서는 기사키군의 우미 신사(海神社)도 관련사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다이에이 4년(1524년)의 「승려 모 씨 이즈시 신사 수조 권진장(僧某出石神社修造勧進状)」을 비롯한 문헌에는 출석 신사에 의한 도요오카 분지 및 이즈시 분지의 족열(足占, 발로 땅을 디뎌 점치는 행위 또는 땅을 개척하는 행위)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메노히보코 또는 그를 따르던 씨족에 의한 이즈시 지역 개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지적된다[28].

8. 각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메노히보코는 『일본서기』, 『고지키』에서는 다지마노모로스쿠(但馬諸助)부터 진구 황후에 이르는 여러 인물의 조상이며, 『지쿠젠노쿠니 풍토기』의 일문에서는 이토노아가타누시(怡土県主) 등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신찬성씨록』에는 다음과 같은 씨족이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적'''

'''사이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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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서 Nihon Sh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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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5 風土記 小学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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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5 風土記 小学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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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30] 서적 神話の世界 集英社 1974
[31] 문서 사쿠니혼기(釈日本紀)
[32] 웹사이트 청언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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