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쿠안 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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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쿠안 소호는 1573년에 태어나 1645년에 사망한 일본의 사무라이이자 선승이다. 그는 야마나 씨족의 가신으로 태어나, 1582년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거치며 선불교를 공부했다. 다이토쿠지 주지를 역임했지만, 책임을 원치 않아 여행을 떠났고, 1627년 자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사면 후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만나 그의 지혜에 감명을 주었고, 이에미쓰의 초청으로 에도에서 강의를 했다. 다쿠안은 검선일여의 경지를 설파하고, 다양한 일본 문화에 선불교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의 저서로는 《부동지신묘록》 등이 있으며, 다쿠앙즈케의 유래와 관련되기도 한다. 그는 픽션에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연관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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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쿠안 소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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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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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쿠안 소호 |
본명 | 춘옹, 히데키, 소호 |
속성 | 춘옹 (春翁) 히데키 (秀喜) 소호 (宗彭) |
법명 | 다쿠안 (沢庵) |
호 | 도카이 (東海) 보옹 (暮翁) |
시호 | 보코쿠 국사 (普光国師, 1944년 추증) |
출생 | 1573년 12월 24일 |
출생지 | 다지마 국이즈시 (현 효고 현도요오카 시) |
사망 | 1645년 1월 27일 |
사망지 | 에도 |
국적 | 일본 |
종교 | 불교 |
종파 | 임제종 |
칭호 | 로시 |
학문 및 지도 | |
스승 | 기센 세이도 (希先西堂) 군포 소주 (薫甫宗忠) 분세이 도닌 (文西洞仁) 잇토 쇼테키 (一凍紹滴) |
저서 | 부동지신묘록 (不動智神妙録) 태아기 (太阿記) 가마쿠라 순례기 (沢庵和尚鎌倉巡礼記) |
사찰 | |
사찰 | 다이토쿠지 (大徳寺) 호토쿠지 (芳徳寺) 만쇼잔 도카이지 (萬松山東海寺) |
묘소 | 엔가쿠산 소쿄지 (円覚山宗鏡寺) 만쇼잔 도카이지 (萬松山東海寺)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고노에 노부타다 (近衛信伊) 고노에 노부히로 (近衛信尋) 야규 무네노리 (柳生但馬守宗矩) |
2. 생애
다쿠안 소호는 1573년 다지마 국 이즈시(현재의 토요오카시)에서 사무라이이자 야마나 씨족의 가신이었던 아키바 쓰나노리(秋庭綱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로닌 신세가 되면서 10세에 출가하여 이즈시의 사찰에서 수학했고, 이후 교토 다이토쿠지에서 슌오 소엔 등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본격적인 선 수행을 시작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사카이 등지에서 수행을 이어가 1604년 32세에 깨달음을 얻고 '다쿠안'(沢庵)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1609년 다이토쿠지 제154대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며칠 만에 사임하고 명예를 멀리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 도쿠가와 막부가 사찰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1627년 자색 의상 사건(紫衣事件|시에 지켄일본어)이 발생했다. 다쿠안은 막부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다가 1629년 데와 국 가미노야마로 유배되었다.
1632년 대사면령으로 풀려난 후, 야규 무네노리, 덴카이 등의 주선으로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만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에미쓰는 다쿠안을 위해 1639년 에도 시나가와에 도카이지(東海寺)를 창건해주었으며, 다쿠안의 노력으로 1641년 자의 사건 관련 칙령이 철회되어 다이토쿠지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다쿠안은 법맥(法脈) 계승을 거부하며 특정 제자에게 법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는 법은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1] 임종 시 "나에게는 법을 계승한 제자가 없다. 내가 죽은 뒤 후계자라고 자칭하는 자가 있다면 법을 훔치는 자이니 엄벌에 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2]
1645년 에도 도카이지에서 74세로 입적했다. 임종 직전 '꿈'(夢|유메일본어)이라는 한 글자를 남겼으며,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으나 제자들이 고향 이즈시의 소쿄지와 에도의 도카이지에 묘를 세웠다. 도카이지의 묘는 1926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2. 1. 출생과 출가
덴쇼 원년( 1573년 12월 24일), 다지마 국 이즈시(현재의 토요오카시)에서 사무라이이자 야마나 씨족의 가신인 아키바 쓰나요리(秋庭綱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쓰나요리는 다지마 국주 야마나 스케토요의 중신이었다.그가 8세 때인 덴쇼 9년(1581년), 오다 노부나가 휘하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 의해 야마나 씨족이 패배하면서 아버지는 로닌(浪人) 신세가 되었다. 덴쇼 10년(1582년), 10세의 나이로 이즈시의 쇼넨지(紹淵寺)에 들어가 출가하여 '슌오'(春翁)라는 법휘를 받았다. 덴쇼 13년(1586년), 같은 이즈시의 소쿄지(宗鏡寺)로 옮겨 기센 도사츠(希先西堂)를 스승으로 모시고 '히데키'(秀喜)로 이름을 바꾸었다.
덴쇼 19년(1591년), 기센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이즈시 성주였던 마에노 나가야스는 다이토쿠지의 고승 슌오 소엔의 제자 훈포 소츄(薫甫宗忠)를 소쿄지의 주지로 초빙했고, 다쿠안은 훈포를 새로운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분로쿠 3년(1594년), 훈포가 다이토쿠지의 주지가 되어 교토로 가게 되자 다쿠안도 그를 따라 다이토쿠지로 들어갔다. 그곳의 산겐인(三玄院)에서 슌오 소엔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소호'(宗彭)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명했다. 게이초 4년(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자신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 안에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 즈이가쿠지(瑞岳寺)를 세우면서, 평소 친분이 있던 슌오 소엔에게 주지 추천을 의뢰했다. 슌오 소엔이 훈포를 주지로 임명하자, 다쿠안도 스승 훈포를 따라 사와야마 성으로 가서 다음 해까지 머물렀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결과 사와야마 성이 함락되고 미쓰나리가 처형되자, 훈포와 다쿠안은 성을 탈출하여 슌오 소엔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후 다쿠안은 슌오 소엔과 함께 처형된 미쓰나리의 유해를 수습하여 다이토쿠지 산겐인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게이초 6년(1601년), 스승 훈포가 사망하자 이즈미 국 사카이로 가서 난슈지(南宗寺)의 분사이 도진(文西洞仁) 문하에 들어갔다. 게이초 8년(1603년) 분사이가 사망한 후에는 요슌안(陽春庵)의 잇토 쇼테키(一凍紹滴)를 스승으로 모셨다. 마침내 게이초 9년(1604년) 8월 4일, 32세의 나이로 깨달음을 얻고 '다쿠안'(沢庵)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는 그가 여러 스승 밑에서 여러 이름을 사용한 끝에 얻게 된 이름이다.
2. 2. 다이토쿠지 시절
분로쿠 3년(1594년), 스승 훈포 소츄(薫甫宗忠)를 따라 교토로 가서 다이토쿠지에 들어갔다. 다이토쿠지에서는 산겐인(三玄院)의 슌오 소엔을 직접 사사하며 '소호'(宗彭)라는 법명을 받았다.게이초 4년(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어머니의 공양을 위해 자신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 안에 즈이가쿠지(瑞岳寺)를 건립하면서 슌오 소엔에게 주지 파견을 요청했다. 슌오가 훈포 소츄를 주지로 임명하자, 다쿠안도 스승을 따라 사와야마 성으로 가서 다음 해까지 머물렀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가 패배하고 사와야마 성이 함락되자, 다쿠안은 스승과 함께 성을 탈출했다. 이후 처형된 이시다 미쓰나리의 시신을 수습하여 다이토쿠지 산겐인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스승 훈포 소츄와 슌오 소엔이 사망한 후, 다쿠안은 이즈미 국 사카이로 가서 난슈지(南宗寺)의 잇토 쇼테키(一凍紹滴) 등을 사사했다. 게이초 9년(1604년), 32세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고 '다쿠안'(沢庵)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게이초 12년(1607년), 다쿠안은 다이토쿠지로 돌아와 수좌(首座, 수행승의 지도자)가 되었다. 게이초 14년(1609년), 37세의 나이로 다이토쿠지 제154대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던 그는 단 3일 만에 주지직을 내려놓고 사카이로 돌아갔다. 이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다이토쿠지를 비롯한 선종 사찰들의 재건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겐나 6년(1620년), 고향인 이즈시 번의 번주 코이데 요시히데의 초청으로 소쿄지가 복원된 이즈시로 돌아와 잠시 은거 생활을 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불교 사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특히 영향력이 큰 다이토쿠지와 구게(귀족) 간의 관계를 약화시키려 했다. 막부는 천황의 칙령으로 주지를 임명하던 다이토쿠지의 오랜 전통을 무시하고, 모든 승직 임명은 쇼군의 승인을 에도에서 먼저 받도록 강제했다. 1627년, 고미즈노 천황이 다이토쿠지의 고승들에게 자색 승복(紫衣)을 하사하자, 막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교토 쇼시다이에게 승복을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을 자색 의상 사건(紫衣事件|시에 지켄일본어)이라고 부른다. 다쿠안은 다이토쿠지와 묘신지의 고승들과 함께 막부의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에도성에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앞에서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고, 데와 국 가미노야마로 유배되었다.
1632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사망한 후 내려진 대사면령으로 다쿠안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다이토쿠지로 돌아온 다쿠안은 야규 무네노리와 덴카이의 주선으로 새로운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만나게 되었다. 이에미쓰는 다쿠안의 깊은 지혜와 통찰력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에미쓰의 간곡한 초청으로 다쿠안은 에도로 가서 쇼군에게 여러 차례 강의를 했다. 이에미쓰는 다쿠안의 조언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도록 1639년 에도 외곽 시나가와에 도카이지(東海寺)를 특별히 건립해주었다. 1641년, 이에미쓰는 마침내 "자색 의상 칙령"을 철회하여 다이토쿠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2. 3. 자의 사건과 유배
에도 막부가 성립된 후, 사원 법도 등을 통해 사찰에 대한 통제가 엄격해졌다. 특히 다이토쿠지와 같이 영향력 있는 사찰에 대해서는 금중 및 공가 제법도에 따라 조정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기 위한 규제가 가해졌다. 이러한 법도에는 기존에 천황의 조칙으로 결정되었던 다이토쿠지의 주지직 임명을 에도 막부가 결정하며, 천황으로부터 받는 자색 의복(자의) 착용 역시 막부가 인정한 사람에 한해서만 허용하는 등의 내용이 규정되었다.1627년(간에이 4년), 고미즈노 천황이 막부에 미리 알리지 않고 다이토쿠지의 고위 승려들에게 자색 의복 착용을 허가하는 칙허를 내렸다. 막부는 이를 법도 위반으로 간주하여 칙허장을 무효로 하고, 교토 쇼시다이에게 명령하여 승려들이 받은 자색 의복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자색 의상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다쿠안 소호는 교토로 가서 교쿠시츠 소하쿠, 코게츠 소간 등 다이토쿠지의 다른 승려들과 뜻을 모으고, 묘신지의 탄덴 시인, 토겐 에토 등과도 연대하여 반대 운동을 벌였다. 1628년(간에이 5년), 이들은 막부에 항변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막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막부의 명령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1629년(간에이 6년) 다쿠안 등을 문책하기 위해 에도로 소환했다. 에도성에서 변론이 이루어졌으나, 같은 해 7월 막부는 다쿠안 등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다쿠안은 데와국 가미노야마로, 교쿠시츠는 무쓰국 아카다테(타나구라), 탄덴은 데와국 유리(혼조), 토겐은 무쓰국 츠가루(히로사키)로 각각 유배되었다. 이때 다쿠안의 나이는 57세였다.
유배지인 가미노야마 번의 번주 토키 요리유키는 권력에 굴하지 않는 다쿠안의 삶의 태도와 "마음만 깨끗하다면 몸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 다쿠안을 후하게 대우했다. 그는 다쿠안에게 슌우안이라는 이름의 초암을 지어주었고, 다쿠안은 이 초암을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유배 기간 동안 토키 요리유키는 번의 정치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등 다쿠안을 가까이하며 교류했으며, 다쿠안이 사면된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되었다고 한다.[13]
1632년,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사망한 후 대사면령이 선포되면서 다쿠안은 유배에서 풀려나 다이토쿠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2. 4. 사면과 도쿠가와 이에미쓰와의 만남
간에이 9년(1632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사망으로 대사면령이 내려지면서, 덴카이, 호리 나오요리, 야규 무네노리 등의 노력으로 자색 의상 사건에 연루되었던 다쿠앙 소호(당시 60세)를 포함한 관련자들이 사면되었다.[14]사면된 다쿠앙은 일단 에도로 가서 간다(神田)의 고토쿠지(功徳寺)에 머물렀다. 그러나 교토로 돌아가는 것이 즉시 허락되지 않아, 같은 해 겨울부터는 고마고메(駒込)에 있는 호리 나오요리의 별장에서 지내며 간에이 11년(1634년) 여름까지 머물렀다. 이후 교쿠시츠(玉室)와 함께 다이토쿠지로 돌아갔는데, 마침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교토를 방문(상락, 上洛)하자 덴카이, 호리 나오요리, 야규 무네노리의 강력한 권유로 다쿠앙은 이에미쓰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에서 이에미쓰는 다쿠앙의 지혜와 통찰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후 그에게 깊이 귀의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쿠앙은 같은 해(1634년) 잠시 고향인 이즈시로 돌아갔으나, 이듬해인 간에이 12년(1635년) 막부의 명령으로 다시 에도로 향했다. 간에이 13년(1636년)에는 교쿠시츠, 고게츠(江月) 등 다른 승려들과 함께 이에미쓰를 다시 만났는데, 다른 이들은 돌려보내졌지만 다쿠앙만 에도에 머물도록 요청받아 이에미쓰를 가까이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이에미쓰는 다쿠앙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조언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도록 1639년 에도 외곽의 시나가와에 도카이지(東海寺)를 특별히 건설해주었다. 또한 1641년에는 자색 의상 사건 관련 칙령을 철회하여 다이토쿠지의 원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2. 5. 도카이지 창건과 만년
1607년 (게이초 12년), 다쿠안 소호는 다이토쿠지의 수좌(首座, 수행 승려 중 최고위)가 되어 탑두(塔頭, 큰절에 속한 작은 절)인 토쿠젠지(徳禅寺)에 머물렀으며, 동시에 사카이시의 난슈지(南宗寺) 주지도 겸했다. 1609년 (게이초 14년)에는 37세의 나이로 다이토쿠지 제154대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던 그는 단 3일 만에 주지 자리를 떠나 다시 사카이로 돌아갔다. 1620년 (겐나 6년), 고향인 이즈시로 돌아가 이즈시 번의 번주 코이데 요시히데가 재건한 소쿄지 (宗鏡寺)에 투연헌(投淵軒)이라는 암자를 짓고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에도 시대에 들어 도쿠가와 막부는 불교 사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특히 다이토쿠지와 같이 조정과의 관계가 깊은 사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막부는 주지 임명 시 쇼군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천황의 칙령으로 이루어지던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1627년, 고미즈노 천황이 다이토쿠지와 묘신지의 고승들에게 자색(紫色) 승복 착용을 칙허하자, 막부는 즉시 이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교토 쇼시다이에게 승복 압수를 명령했다. 이 사건을 紫衣事件|시에 지켄일본어, 즉 자의 사건이라 부른다. 다쿠안은 이 조치에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1629년 데와 국 가미노야마로 유배되었다.
1632년,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사망하자 대사면령이 내려져 다쿠안은 교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야규 무네노리와 덴카이의 주선으로 새로운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에미쓰는 다쿠안의 지혜와 통찰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쿠안은 이에미쓰의 부름을 받아 에도로 가서 여러 차례 선(禪)을 설법했다.
1638년 (간에이 15년), 고미즈노 천황에게 『원인론』 등을 강의한 후 국사(國師) 칭호를 받게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대신 다이토쿠지의 개산조(開山祖)인 테츠오 기코 (徹翁義亨)에게 추증해 줄 것을 청했다. 같은 해, 야규 무네노리의 요청으로 야마토 국 야규 장(柳生庄)으로 가서 야규 가문의 보리사(菩提寺, 조상의 명복을 비는 절)가 되는 호토쿠지 (芳徳寺)를 창건했다.
1639년 (간에이 16년), 67세의 다쿠안은 다시 에도로 돌아왔고, 이에미쓰는 그를 위해 에도 외곽 시나가와에 만쇼잔 도카이지 (萬松山 東海寺)를 창건하여 초대 주지로 맞이했다. 이는 이에미쓰가 언제든 다쿠안의 조언을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641년 (간에이 18년), 다쿠안의 오랜 노력 끝에 이에미쓰는 자의 사건의 발단이 된 다이토쿠지와 묘신지의 사찰법을 원래대로 되돌린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따라 두 사찰은 이전처럼 주지 임명이 가능해졌고, 막부에 의해 자의 착용 자격이 박탈되었던 주지들도 자격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다이토쿠지파와 묘신지파 사찰의 법맥은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다쿠안은 자신의 법맥(法脈)을 잇는 것을 원치 않아 제자에게 법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는 법이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전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1] 임종 직전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는 나의 법(가르침)을 계승한 제자가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법을 도둑질하는 자이니 당국에 신고하여 엄벌에 처하도록 하라!"[2]
1645년 12월 11일 (쇼호 2년, 1646년 1월 27일), 다쿠안은 에도의 도카이지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제자들이 게송을 청하자 '꿈' (夢|유메일본어)이라는 한 글자만 쓰고 붓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제자들은 효고현 도요오카시 이즈시의 소쿄지와 도쿄도 시나가와구의 도카이지에 그의 묘를 세웠다. 도카이지에 있는 그의 묘는 1926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3. 사상
다쿠안 소호는 당대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선의 가르침을 주변의 사물에 빗대어 알기 쉽게 설명하는 등 매력적인 화법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비롯한 여러 다이묘와 귀족들이 그에게 귀의했다. 하지만 다쿠안 자신은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고결한 선풍(禪風)을 지켰으며, 스스로를 한 명의 선승으로 여겼다. 국사(國師) 칭호를 사양했을 때 잇시 분슈가 이를 칭찬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의 핵심 사상으로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어느 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심(無心)의 경지[4][5][6][7][8][9][10]와 검(劍)과 선(禪)이 하나라는 검선일여(劍禪一如)의 경지[16]가 있다.
한편, 그는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면서도 다이토쿠지·묘신지 등 소속 종단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가까이 다가가 정치적 조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다이묘를 좋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간에이 18년(1641년) 오랜 숙원이던 사법(寺法) 문제가 해결되자, 그를 비판했던 많은 이들이 부끄러워했다고 전해진다.[15]
다쿠안은 시가(詩歌)를 좋아하여 호소카와 유사이나 가라스마 미쓰히로와 같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시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선(禪)을 후대에 전수하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미츠와 고미즈노 천황이 법을 이을 제자를 정하라고 권유했지만 이를 거절했으며, 유언으로 자신의 선을 이었다고 칭하는 자는 법을 어긴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또한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지 말라고 명했으나, 후에 문인 다케노 소우가 『도카이 화상 기년록』(東海和尚紀年錄|도카이 와조 기넨로쿠일본어)을 저술했다.
3. 1. 무심(無心)
다쿠안은 그가 또한 무심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올바른 마음은 어느 곳에도 위치하지 않으며,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응고되거나 한 곳에 고정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4] 다쿠안에게 있어서, 마음이 머물고 멈추는 곳을 갖는 것은 망상의 마음이며 무지함에 머무는 고통이다.[5] 다쿠안에 따르면, 한 곳에 고정된 마음은 자유롭게 기능할 수 없다.[6] 예를 들어, 다쿠안은 마음이 단 하나의 방향에 위치하면 다른 아홉 방향에 부족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마음이 어느 한 방향에도 위치하지 않으면, 동시에 열 방향 모두에 있게 될 것이며, 다쿠안이 말하듯이 "어디에도 두지 않으면, 모든 곳에 있게 될 것이다."[7]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쿠안은 나무를 바라보는 예를 제시한다. 그는 나무를 볼 때 눈이 하나의 잎에 고정되면 다른 모든 잎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눈이 어떤 잎에도 얽매이지 않으면, 모든 잎이 달린 나무 전체가 동시에 받아들여진다. 그는 이 능력을 천 개의 팔을 가진 관세음보살에 비유하는데, 관세음보살의 마음이 그 중 어떤 팔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천 개의 팔 모두가 동시에 유용하기 때문이다.[8]
다쿠안은 이 원칙을 적용하여 단전(배꼽 아래)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과 같은 수행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교의 최고 입장에서 보면, 마음을 배꼽 바로 아래에 두고 방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낮은 수준의 이해이며, 높은 수준이 아니다. [...] 마음을 배꼽 아래에 두고 방황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이 계획을 생각하는 마음에 사로잡힐 것이다. 당신은 앞으로 나아갈 능력이 없어지고, 매우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다."[9]
다쿠안은 자신의 마음이 생각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는데, 그런 경우에는 듣더라도 듣지 못하고, 보더라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쿠안은 자신의 생각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것들을 없애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스스로 이러한 생각을 제거하고 저절로 무심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10]
3. 2. 검선일여(劍禪一如)
야규 무네노리의 요청에 응하여 검선일미(劍禪一味), 즉 검선일여(劍禪一如)의 경지를 설파했다. 이 경지를 기록한 『부동지신묘록』은, 선으로써 무도의 극의를 설명한 최초의 서적으로 평가받으며, 무술에서 무도로 나아가는 흐름을 여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16]。 덧붙여, 다쿠안은 야규 무네노리와 젊은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으며[17], 때로는 간언하고 때로는 의지하는 등 깊은 친교를 맺었다. 또한 무네노리의 아들인 야규 무네요시(주베에) 역시 다쿠안을 존경했으며, 다쿠안은 그에게도 여러 가르침을 주었다고 전해진다.4. 저서
5. 영향
다쿠안 소호는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교류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설명 |
---|---|
이토 잇토사이 | 검술의 달인이자 잇토류의 창시자 |
미코가미 텐젠 | 검술의 달인이자 이토 잇토사이의 후계자 |
야규 무네노리 | 다이묘이자 검술의 달인, 야규 신카게류 검술의 수장. 다쿠안이 야규 무네노리와 미코가미 텐젠에게 보낸 글은 현대 무술가들에게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
이시다 미츠나리 | 다이묘 |
구로다 나가마사 | 기독교 신자였던 다이묘 |
고미즈노 | 양위한 일본 천황 |
도쿠가와 이에미쓰 | 쇼군 |
다쿠안은 자신의 명성이나 인기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으며, 날카로운 지성과 고결한 인품으로 알려졌다. 그는 일본 검술, 정원 가꾸기, 수묵화, 서도, 다도 등 다양한 일본 문화 분야에 선불교의 정신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다.
그의 저작은 총 6권에 달하며, 100편이 넘는 시를 포함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저술은 ''부동심'' (不動心)이다. 이 책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중 두 편은 편지 형식이다.
- 부동지신묘록 (不動智神妙録, Fudochishinmyoroku): "부동의 지혜에 대한 신비로운 기록"이라는 뜻으로, 야규 신카게류 검술의 수장이자 두 세대에 걸쳐 쇼군의 스승이었던 야규 무네노리에게 보낸 편지이다.
- 타이아키 (太阿記, Taiaki): "검 타이아 연대기"라는 뜻으로, 야규 무네노리 또는 이토류 검술의 수장이자 쇼군 가문의 공식 교사였던 오노 타다아키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11]
다쿠안의 사상은 현대 선불교와 무술 연구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다쿠안의 사상과 행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브라이언 D. 빅토리아는 저서 "전쟁 속의 선(Zen at War)"에서 다쿠안이 적의 공허함을 강조하며 살인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빅토리아는 이를 통해 다쿠안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난 사상을 형성했으며, '살생하지 말라'는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을 어겼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12]
5. 1. 다쿠앙즈케
무 절임의 일종인 이른바 다쿠앙은 한 전승에 따르면 다쿠안 소호가 직접 고안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설에 따르면, 간사이 지방에서 널리 먹던 무 절임을 다쿠안이 에도로 전파한 것이라고도 한다.후자의 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도카이지에 있던 다쿠안을 방문했을 때, 무 절임을 대접했는데, 이에미쓰가 마음에 들어 "타쿠와에즈케가 아니라 다쿠앙즈케다"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전승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5. 2. 대중문화
픽션에서는 종종 미야모토 무사시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서는 무사시를 타이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사료상 무사시와 다쿠안 선사의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요시카와 본인도 "무사시와 다쿠안의 교섭은 완전히 나의 창작이며,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21]라고 명언하고 있다.참조
[1]
서적
Letting Go: The Story of Zen Master Tōsui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2]
서적
Letting Go: The Story of Zen Master Tōsui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3]
웹사이트
Cultural Heritage Online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1-05-04
[4]
서적
The Unfettered Mind, Writings from a Zen Master to a Master Swordsman
Shambhala Publications
2012
[5]
서적
The Unfettered Mind, Writings from a Zen Master to a Master Swordsman
Shambhala Publications
2012
[6]
서적
The Unfettered Mind, Writings from a Zen Master to a Master Swordsman
Shambhala Publications
2012
[7]
서적
The Unfettered Mind, Writings from a Zen Master to a Master Swordsman
Shambhala Publications
2012
[8]
서적
The Unfettered Mind, Writings from a Zen Master to a Master Swordsman
Shambhala Publications
2012
[9]
서적
The Unfettered Mind, Writings from a Zen Master to a Master Swordsman
Shambhala Publications
2012
[10]
서적
The Unfettered Mind, Writings from a Zen Master to a Master Swordsman
Shambhala Publications
2012
[11]
서적
The Unfettered Mind – Writings of the Zen Master to the Sword Master
[12]
서적
Zen Skin, Zen Marrow: Will the Real Zen Buddhism Please Stand Up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13]
문서
後の[[正保]]元年([[1644年]])、土岐頼行は東海寺に上山の春雨庵を模した[[春雨寺|塔中]]を沢庵のために建立している。
[14]
문서
「大徳寺難儀に及び申し候時は、柳生殿と堀丹州両人の外に、さまで笑止とも申す人はこれ無し候。我身を大事に皆々存じて、其の時分はのがれぬ人達も、よそに見ており申し候」」
[15]
문서
『万松祖録』
[16]
문서
なお、『[[不動智神妙録]]』の原本は現存せず、沢庵から柳生宗矩に書き贈ったという事実を証する史料はないが、沢庵の作であり、しかも柳生宗矩のために書いたということは当時から認められていたようであり、今日では定説となっている(同書)。
[17]
문서
「上方よりの知音にて候。紫野(大徳寺)の昔から参徒にて、内縁ふかき人」
[18]
문서
『東海和尚紀年録』
[19]
문서
白川亨「石田三成とその一族」、三池純正「敗者から見た関ヶ原合戦」
[20]
간행물
国史大系. 第10巻
http://dl.ndl.go.jp/[...]
[21]
문서
『随筆宮本武蔵』
[22]
문서
고미, 235쪽
[23]
문서
고미, 236쪽
[24]
문서
승려에 관한 모든 기록을 맡은 사람
[25]
문서
고미, 237쪽
[26]
문서
다만 이는 이에미쓰와의 사적 관계에 의한 것으로, 다쿠안에게 공식적인 신분이나 직위가 제수된 것은 아니다. (고미, 237쪽)
[27]
문서
고미,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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